제 11 과 사르밧 과부: 믿음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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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0-12-03 13:43 조회8,411회 댓글4건본문
12월 11일(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왕상 17장, 욥 38장, 42:4~6, 눅 4:24~28, 히 11:1, 계 1:17.
죽음은 그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풀은 마르고, 나무는 시들었으며, 소들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염소는 가엾이 울고 있다. 혹시 구름 한 조각이라도 있을까, 비 한 방울이라도 내릴까 소원하며 매일 하늘을 응시한다. 그녀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쓰기 위해 밀가루와 기름을 아껴왔다. 둥글고 납작하게 구운 작은 떡 하나를 같지 않은 크기로 나눈다. 그리고 큰 쪽을 아들에게 준다. 힘을 잃고 야위어가는 아이를 볼 때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도 다 소용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얼마 후 둘 다 굶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끼 먹을 양식만 남았다. 아들의 손을 붙잡고 과부는 사르밧 마을을 떠나 마지막 식사를 지을 나무를 주워 모은다. 여기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성경 기사와 구원의 역사에 실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서서히 믿음의 길을 걸었던 한 이름 모를 과부의 삶 속에 펼쳐진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대쟁투를 보게 될 것이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왕상 17:13~14
| 학습 목표 |
⊙ 깨닫기 : 엘리야가 이방 땅에서 이교도 과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배경을 묘사한다.
⊙ 느끼기 : 다른 종교를 가진 외국인이 마지막 남은 양식을 자신에게 달라고 할 때, 굶주린 어머니의 감정을 헤아려본다.
⊙ 행하기 : 우리가 어떻게 될지 정확히 모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행하며 전진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밑바닥에서
A. 과부의 식량이 바닥났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 준 엘리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를 어떻게 도왔는가? 그들의 만남은 믿음의 성장에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02. 느끼기: 믿음이 있어 관대해짐
A.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과 아들이 먹을 마지막 양식을 낯선 이방인에게 나눠줄 정도로 과부는 관대한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게 먼저 음식을 달라고 요구하였는가?
B.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행하도록 요구하실 때,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주시는가?
03. 행하기: 믿음으로 행함
A.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미지의 땅에 들어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B. 그대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어떤 확신에 의지하고 있는가?
요 점: 식량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는 믿음으로 엘리야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녀와 아들, 그리고 엘리야에게 넘치는 복을 허락하셨다.
일요일 12월 5일 사르밧으로
이 이야기는 큰 선지자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의 발단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바알숭배가 국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더 이상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심으로 폭풍의 신(바알)과 정면으로 맞섰다(왕상 17:1).
1. 하나님께서 폭풍의 신을 섬기고 있는 나라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어떤 모순을 암시하고 있습니까? 이는 다른 권세와 비교하여 이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시 86:8, 렘 10:6, 히 1:1~3, 욥 38장 참조.
[시86: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렘10:6]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히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욥38장 전체]
답: 만약 이스라엘이 바알의 나라가 되었다면 엘리야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말 아야 했다. 그러나 세상을 통치하는 분은 여호와였다. 폭풍의 신 바알은 가뭄에 속수무책이었던 반면 여호와는 바알의 본고장에서도 이적을 행하셨다.
이스라엘 땅이 극심한 가뭄에 메말라 있을 때에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었다(왕상 17:3). 그릿 시내도 마르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방 땅인 사르밧으로 떠나도록 명하셨다(왕상 17:1 ~9).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사이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악랄한 여왕 이세벨의 고국, 페니키아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페니키아의 국신은 바알이었다. 그래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고대 세계에서 신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도시나 지역에 속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밧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이방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알 숭배의 중심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필요를 이용하여 먼 사르밧 땅의 한 여인에게 가까이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로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문제를 감추거나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가장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여전히 고생하며 상처받고,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의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
“이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민이 누리는 특권과 축복을 일찍이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자기의 길에 비추이는 모든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선지자와 왕, 129)
<부가설명> 바알은 비를 주관하는 신이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비로 시집오면서 바알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그 아버지 엣바알은 바알의 종이라는 뜻이고 그의 이름 이세벨은 바알이 왕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정숙한 여인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항하는 이름인 듯 하다는 설명도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바알이 왕이라는 뜻이 합당한 것 같아 보인다. 이세벨은 시집오면서 이스라엘을 바알의 나라로 만들 결심을 하고 온 것 같다. 결국 아합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게 되었는데, 그녀가 데리고 온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각 지방과 고을을 맡아서 철저히 바알 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는 광야의 신이기 때문에 광야에서 섬겼지만 지금은 정착하고 농업을 하는데 우로를 주관하는 바알을 섬겨야 한다고 설득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은 권력을 배경으로 압박하는 바알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 엘리야는 분연히 일어나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며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선포하고, 또 바알이 번개를 주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라고 바알 선지자들과 내기를 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비와 불(번개)을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였다.
사르밧은 이스라엘 변방에 가까운 시돈의 마을이었는데, 이 여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싶어 했던 사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이런 난국에 엘리야를 그에게 보내셔서 인생의 먹고 마실 것을 친히 공급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해보이시고 엘리야를 보호하게 한 것이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세계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누구를 통해서든지 일하실 수 있다.
월요일 12월 6일 의외의 도구(왕상 1 7:7~12)
최후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과부는 엘리야를 보자마자 여호와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경이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무언가에 의해서 그녀는 엘리야를 여호와 숭배자로 알게 되었다.
1. 왕상 17:12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것이 그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왕상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답: 이 여인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이라고 한 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 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이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말한 데서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사신 여호와”라는 말과 “죽으리라”는 말을 대조하였다. 이 말은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이 되실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소망이 담긴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왕상 17:3~4과 17:8~9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습니까?
[왕상17:3,4, 8,9]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답: 하나님은 때로는 짐승을 이용하시고, 때로는 낯선 이방인을 이용하셔서 엘리야를 먹이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초월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지도하고 인도하셨다. 처음에는 엘리야로 하여금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까마귀에게 음식을 공급하도록 명하셨다. 그 다음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셨다(9절).
그녀는 의외의 도구였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나 권세도 없는 과부에 불과했다. 그녀야말로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소중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대개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신다(고후 12:9).
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리적으로 제한받지 않음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제한받지 않음을 본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대쟁투 속에서 펼쳐지는 엘리야의 활약을 통해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우리는 죽음도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해하고 괴롭히는 일들이 닥칠지라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다(렘 29:11). 어차피 우리는 좋든 안 좋든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줄 알아야 한다.
봉사의 유익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실제로 표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 짐을 가볍게 해줌으로 인간 생애의 고통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 자신의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크게 돕고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을 베푸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이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209)
<부가설명> 사르밧 과부에 대하여서는 예수께서 친히 언급하셨다.(눅4:25,26) 그는 엘리야 때에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을 입은 이방 여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했을 때 애굽 왕 바로를 통하여 아브라함이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바로를 책망하시므로 바로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동시에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을 책망하셨다면 바로는 자기의 행동이 잘못 된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가 책망을 받음으로 두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허물을 깨닫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돕거나 허물을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선사하신다. 세상의 누구든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이 그를 사용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구원의 기쁨도 누린다.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한 것 같고 고레스는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 이 사실을 지적하셨다.
교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의외의 멋진 도구로 사용하신다.
화요일 12월 7일 전적인 순복(왕상 17:13~16)
1. 왕상 17:13~16을 읽으십시오. 엘리야는 과부에게 먼저 뭐라고 말했습니까? 왜 그것을 먼저 말했을까요? 그녀에게 어려운 일을 요구함으로써 엘리야는 어떤 큰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까?
[왕상17:13~16]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답: 일반적인 상황에서 엘리야의 제안은 믿을 수 없는 종류였지만 사르밧 과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의 제안을 따랐고, 하나님은 그녀의 절박한 믿음에 반응하셨다.
성경에서 과부는 아무리 좋은 시대에 살았다할지라도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그들을 돌볼 장성한 자녀가 없는 경우라면 특히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쉬웠고, 법적인 권리도 제한되었다. 대기근의 시대라면 아마도 더 했을 것이다. 집마다 생존을 위해 다투는데 가난한 과부에게 돌아올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과부에게 선지자는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녀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녀는 절대 부탁을 들어 줄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아사(餓死)로부터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단 한 줌의 밀가루과 기름 한 술이 전부였다.
2. 엘리야는 누가 먼저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떤 믿음이 필요했습니까?
답: 엘리야의 주장은 매우 이기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 그녀는 제물을 바치는 심정으로 마지막 식사를 선지자에게 주었을 것이다.
대개 다른 사람의 음식을 챙긴 다음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나눠 줄 여력이 없는 자에게 음식을 요구할 뿐 아니라,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식사를 요구함으로써 선지자는 그녀의 믿음을 끌어올리고 전적으로 굴복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3. 하나님께서 완전한 순복을 요구하신 다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 창 22장 참조.
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이다.
창세기 22장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장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 우리는 결국 항상 더 많은 것을 받는다. 선지자에게 음식을 먼저 제공할 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신뢰하는 어린 믿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싹텄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을 믿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아닌가?(히 11:1 참조) 그런데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저급한 예배를 드리는 이방 여인이 경험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그녀와 교통하셨고, 그녀는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어진 명령대로 행하였다.
봉사는 희생이 요구됨
“이보다 더 큰 신앙의 시험을 요구할 수 없었다. 과부는 이제까지 모든 나그네를 친절하고 너그럽게 접대하였다. 이제 자신과 아이에게 이르러 올 고통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의지하여 “엘리야의 말대로”함으로 그 여인은 이 손님을 친절히 대접하라는 최고의 시험에 응했다.”( 선지자와 왕, 130)
<부가설명> 그 여인은 잠깐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 사람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는가? 그러나 곧 생각하면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나 먹지 않고 죽으나 결과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염치없이 말할 때에는 그분의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순종하였고 결과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자기희생이 자기 보존의 길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칙이 바로 그렇다. 자기 보존의 법칙이 바로 자기희생의 법칙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고, 언제나 섬기는 자로 계셨다.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섬기는 것이 곧 섬김을 받는 길이다. 아무것도 실제로 내 것이 없다.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과 사업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모습이다.
교훈: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을 다 바치면 하나님은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을 우리 손에 쥐어 주신다.
수요일 12월 8일 자신의 죄를 기억함(왕상 17:17~18)
과부가 최후의 떡을 엘리야에게 주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이적을 베푸셨다. 그녀와 아들은 기적적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게 되었다.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한 번도 아니고 매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1.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 사람의 자연스런 반응은 무엇입니까? 욥 42:5~6, 사 6:5, 단 10:8, 눅 5:8, 계 1:17 참조. 왜 그런 반응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욥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단10: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답: 이 땅에서 아무리 의롭게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면 모두 죄인과 같이 되었고, 죽은 자처럼 되었다.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과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거룩한 하나님과 접촉하는 순간, 우리의 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신다고 생각하게 된다. 왕상 17:18에서 과부는 자신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선지자를 원망하였다.
2. 그녀의 사고방식을 보십시오. 왕상 17:18. 왜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왕상17: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답: 그녀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오히려 자신에게 재앙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이 과거에 지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마도 그녀는 엘리야의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선지자의 삶을 대조해 보고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날마다 기적 속에서 살면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경험함으로 이전보다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극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임한 비극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비난한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아이가 아픈 것일까? 무슨 죄 때문에 내 삶에 이런 재앙이 닥쳤을까? 물론 고통이 우리의 악한 선택에서 비롯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재난을 당하기도 한다. 욥을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한 그에게도 큰 불행이 닥쳤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비극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추측에 불과한 원인에 집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죄에 집착하지 말고 주께 집중하라
“원근 각처에, 그리고 젊은이들뿐 아니라 모든 연령층에 빈곤과 근심과 죄에 빠져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 단계적으로 그들을 구주께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의 일이다.”(교회증언 6권, 255)
<부가설명> 이 과부는 아들이 죽자, 그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사람들이 자기 가까운 주변에 생기는 변고를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지자를 잘 대접한 결과가 아들이 죽는 것으로 보답되었으니, 아마도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 여자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뜻밖의 변고를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한다. 모든 대답은 그날 부활 후에 확실히 들을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 때문에 자신을 원망라고 주위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길러야 할 것이다.
교훈: 가장 큰 구원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알 수 없는 비극은 찾아온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목요일 12월 9일 믿음을 시험함
1. 과부와 엘리야의 믿음은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까? 왕상 17:17~24.
[왕상17:17~24]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답: 기적 속에 살아온 과부와 엘리야는 아이의 죽음으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은 더 강하게 성장했다.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엘리야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 아이를 되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도는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여인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선지자도 그런 일을 이해하기 위해 고뇌해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마 11:1~3).
상당 기간 과부와 엘리야는 그치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의 기적 속에 살았고 그런 경험은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기적만큼이나 극적인 시련이 이르렀을 때, 그들의 믿음은 시험에 들고 말았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경험해야 했던가? 강력한 방법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던 일들도 있었지만, 훗날 주님께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원치 않는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기적이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하지만, 믿음의 중심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 엘리야는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떤 칭호를 사용했습니까? 이는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보여줍니까?
답: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왕상 17:20).
엘리야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분과 매우 친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라 해서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아이의 죽음을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 기적은 어떤 마법이나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려는 선지자의 시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성경 기자는 아이를 되살린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엘리야 본인도 그 결과에 놀랬다. 아마도 그는 과부에게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고 외쳤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여인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야의 믿음에도 도움이 되었다.
믿음의 고백으로 과부의 반응은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붙드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봉사는 인내가 필요함
“낙담은 가장 영웅적인 믿음도 흔들 수 있고 가장 확고한 의지도 약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여전히 동정하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동기와 마음의 의도를 훤히 아신다. 모든 것이 어둡게 보일 때에 끈기 있게 기다리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업을 지도하는 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하늘은 역경의 날에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무력한 것 같으나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혼만큼 참으로 강한 것은 없다.”(선지자와 왕, 174)
<부가설명> 엘리야는 죽은 아들을 눕히고 기도하고 그 아이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 이 동작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선지자는 그렇게 하였다.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그는 일곱 번 얼굴이 무릎 사이에 들어가도록 엎드려 기도하였다. 세 번은 어쩌면 예수께서 무덤에 계신 삼일을 암시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3이 하나님의 수로 알려져 있으니까 세 번 하나님께 온 몸을 던져 간구하는 자세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엘리야의 이 동작은 하나님 앞에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앞에 당한 일에 대하여 우리의 간절하고 정직한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의식으로는 원하는데, 감정으로는 원하지 않은 모순이 우리 안에 있다. 이성과 감정이 일치하게 간절히 원하는 자세가 기도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훈: 기적은 믿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시련은 믿음을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금요일12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눅 4:23~27).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듣는 자들의 의문에 응하셨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업을 위하여 택하신 종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허용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느낄 줄 아는 마음과 믿고자 하는 신앙을 가졌던 자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그들은 죄에 집착하고, 주의 사자들을 통하여 오는 성령의 경고를 거절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이를 수 있었던 통로를 차단시키고 말았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가정들을 그냥 지나치시고 이방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에 속하지 않은 한 여인의 가정에서 당신의 종을 위한 피난처를 발견하셨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가 받은 빛을 좇았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내신 더욱 큰 빛에 마음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은총을 입었었다.”(시대의 소망, 23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죄와 고난은 어떤 관계입니까? 자신의 죄의 결과 고통 받는 자들과 자신과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다르게 취급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런 자의적 판단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까?
*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이유가 어떻든지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할 것이다.
2. 희귀한 유전적 결함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십대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어떤 위로와 조언을 주어야 합니까?
*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의 허물을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용서하신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과거의 죄가 현재의 잘 하는 것으로 보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죄책감으로 현재의 상황을 해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리고 희귀병을 앓는 것이 죄의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변질된 유전 인자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치료될 수도 있고 부활의 아침에 완전히 치료된 상태로 부활할 것이다.
3.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적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그는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에 휩싸일 수 있습니까? 이로 보건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기적을 경험한 사람도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사단의 시험은 너무나 교묘하여 기적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시험한다. 그래서 시험인줄도 모르고 시험에 빠질 수 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예수님 편을 선택하는 삶이다. 그것은 철저히 말씀으로 검정되고 말씀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댓글목록
정경단님의 댓글
정경단 작성일복사
임영철님의 댓글
임영철 작성일
목사님 감사합니다.
늘 능력의 종이 되십시요.
노준아빠님의 댓글
노준아빠 작성일감사 합니다...^^
표종락님의 댓글
표종락 작성일항상 감사합니다. 안교 교과연구의 필독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