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과 하나님의 사람: 순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님(1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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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0-11-27 03:57 조회8,300회 댓글3건본문
12월 4일(안식일) 일몰:오후 5시 14분
기억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출 32장, 왕상 13:1~34, 단 5:13~17, 눅 16:13, 요 15:24, 딤후 4:3.
이번 주 우리는 구약에서 가장 기이한 이야기 중에 하나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변절한 왕, 음식을 거부하는 선지자, 깨진 달걀처럼 갈라진 제단이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당혹스런 것은 거짓말하는 늙은 선지자와 사람을 차별하는 사자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열 왕국 첫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긴장감이 팽배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여로보암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의 열 개 지파는 다윗 왕국의 상속자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게서 분리되었다. 전운이 감돌고 정국이 불안정한 이런 변화의 시기에 하나님은 여로보암 왕에게 그분의 선지자를 보내어 북방 왕국에서 행해지는 우상 숭배에 대하여 경고의 기별을 전하게 하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시는지 말하고 있다. 비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 복음의 진술은 필연적으로 거짓 복음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왕상 13:26
| 학습 목표 |
⊙ 깨닫기 : 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복귀 도중 명령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비교한다.
⊙ 느끼기 : 믿음의 긴장이 풀리면 쉽게 느슨한 불순종으로 이어짐을 명심한다.
⊙ 행하기 : 매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유혹으로부터 그분의 보호를 간구하기로 다짐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강하나 여전히 약함
A. 왕과 대중 앞에서 그토록 용감하고 신실하게 행동했던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그 이후 곧바로 유혹에 빠지게 되었는가?
B.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유로 그에게 닥친 즉각적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C. 왜 하나님은 그를 가차 없이 신속하게 벌하셨는가?
02. 느끼기: 유혹의 표적
A.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원래의 명령과 상충되는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유혹을 받았는가?
B. 어떤 유혹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고 있는가?
03. 행하기: 믿음의 방패
A. 불순종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무엇인가?
B. 어떻게 하면 사단의 속임수와 간계를 물리칠 수 있는가?
C.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원래의 명령과 상충되는 지시를 전했다. 하나님께 명확한 지시를 받고도 자신의 양심을 다른 사람의 말에 굴복시켰던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요 점: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충실하게 예언을 선포하고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일요일 11월 28일 정치적인 종교
솔로몬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판단 미숙으로 나라가 분리되어,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방 유다는 르호보암이 다스리게 되었다(왕상 12장 참조).
오래지 않아 여로보암은 매우 위태로운 방향으로 북방 왕조를 이끌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하나님 숭배에서 우상 숭배로 인도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정치적 편리성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그는 벧엘과 단, 두 곳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여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금송아지는 가시적으로 하나님을 상기시키려는 도구였고, 일반 백성들에게 예배의 신뢰성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출발했던 행보가 결국 십계명을 어기는 길로 인도한 셈이 되었다(출 20:4~5).
1.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과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는 어떤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왕상 12:25~33 참조.
[왕상12:25~33]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답: 두 사건 모두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상숭배가 용납된 예이다. 기독교도 배도의 시기에 이런 역사의 전철을 밟았다.
예배를 문화적 상황에 맞게 혁신하고 개선할 필요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스라엘의 경우 금송아지가 국가적 죄로 발전할 것이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변화의 연쇄 반응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몇 레위인들에게 새롭게 세워진 신당의 제사장으로 일하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삼았고, 그 결과 성직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았다(왕상 12:31~32).
여로보암의 종교적, 정치적 변화의 이야기는 초대 교회의 경고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이 정치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영향 때문에 변경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기 위해 안식일 대신 일요일이 선택되었다. 이교도들을 위해 예배를 보다 시각적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성상숭배가 도입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압력은 결코 여로보암 시대나 기독교 초기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도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예배를 이익수단으로 이용하지 말라
“열 지파를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욕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자기 계획의 약점을 보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은 저희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중에 매우 익숙했던 우상을 하나님의 상징으로 그들 앞에 세움으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위험에 처하도록 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은 최근에 애굽에 거주했었는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백성들 앞에 이와 같은 이교의 조상(彫像)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배우게 했던 것이다.”(선지자와 왕, 100)
<부가설명> 종교인들은 자기의 이익과 현실적 요구 사이에서 번번이 자기 이익과 현실적 요구를 택하면서 종교적 신앙적 이유를 만들어 제시한다. 종교가 국가와 개인의 편리와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종교와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경전을 변개하게 된다. 적어도 변개하려고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여로보암이 그랬고 로마교가 그랬고 개신교들이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되게 풀이하였다. 재림교회는 이런 사조에 안전한가? 요즘 일어나는 문화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신앙생활 자세와 예배에 도입되는 일련의 조치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길 때에 처음에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실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웃사와 충돌한 것이다. 웃사는 죽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운반되어야 한다. 웃사의 뜻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예배를 블레셋 방법으로 수행할 때에 능력이 죽는 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사건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매우 조심해햐 할 시점에 있는 것 같다.
교훈: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정치적인 명분과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변경시키기 시작하면 그 끝은 큰 배도로 이어지게 된다.
월요일 11월 29일 하나님의 행보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정치적인 행보에 개입하셔서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셨다. 그분은 유다로부터 한 선지자를 보내셨다. 신원 미상의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이 신당을 봉헌하기 위해 막 제단 앞에 섰을 때 나타났다. 이스라엘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기막힌 순간을 선택하셔서 행동하셨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1. 왕상 13:1~6을 읽으십시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즉시 떠오르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왕상13:1~6]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답: 여로보암이 벧엘에서 분향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그 제단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하나의 징조로서 제단은 반으로 갈라졌다. 그들은 여호와께 예배한다고 했으나 자의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다.
신원 미상의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로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통상적인 칭호였다. 모세와 엘리야도 그렇게 불렸다(신 33:1, 왕상 17:18). 이 칭호는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이 선지자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감이 크다. 하나님의 사람은 목소리를 높여 여로보암의 제단을 저주하고 예언을 베풀었다. 예언 중 그는 요시야라는 특정 이름을 언급 하였다(왕상 13:2). 요시야는 거의 삼백 년 후에나 태어날 인물이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도 태어나기 이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여 언급되었다(사 44:28, 45:1 참조).
하나님의 사람이 전한 기별의 요점은 무엇인가? 우선, 그 단은 불법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요시야라는 다윗의 후손이 와서 이 단을 더럽힐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가 예배장소를 따로 만든 것도 다윗의 보좌에 앉은 자에게 왕국을 뺏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말이다. 그 다음, 선지자는 이 예언의 확실성을 각인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을 즉각적으로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단이 갈라졌다. 구경꾼들은 이를 보고 모세가 금송아지 숭배를 보고 분노하여 돌비를 깨뜨렸던 사건을 떠올렸다.
여로보암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금송아지를 한 개도 아닌 두 개나 만들었다. 회개하기는커녕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켰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손, 지팡이, 홀은 언제나 심판을 상징한다. 여로보암은 그를 붙잡아 두기 원했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일은 그렇게 끝났다.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이 되게 하라
“하나님이 생각의 주제가 되어야 하며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엄숙하고 신성한 예배로부터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 새 자녀 지도법, 427)
<부가설명> 성경에 계시된 예배의 의미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누구에게 경배하든지 그 경배의 대상이 경배하는 사람의 근본이며 주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굴복의 예식이 된다. 여로보암이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경배하고 제사한 것은 송아지가 그들의 존재와 생존의 근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행사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것을 용인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이 생명과 존재의 근원을 떠나기 때문에 그들이 생존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또 그들이 참 경배의 대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예배는 예배하는 자의 존재와 생명을 확인하는 거룩한 예식이다. 그리스도인은 예배가 그들의 존재의 기본을 확인하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예배는 거룩하며 엄숙하고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마음과 뜻을 다하여 경배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는 복의 향연이 되는 것이다.
교훈: 어리석은 죄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잘못을 깨달은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한다.
화요일 11월 30일 선물을 주는 자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이적이었다. “말라 다시 거두지 못”(왕상 13:4)했던 여로보암의 손이 즉시 회복되었다. 그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여로보암 왕이 대중 앞에서 회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적은 사람의 의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있은 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기고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가 버린다.
1. 예수님은 이적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눅 16:31, 요 10:25~28, 15:24.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눅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요10:25~2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답: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우리도 오직 말씀에 의하여 진리를 분별하고 오직 진리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거짓 예배 행위를 중단하고 진심으로 개혁을 시작하기보다 여로보암은 전략을 바꿨다(왕상 13:7 ~10 참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궁에 초청하여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이것은 이적을 목격한 백성들 앞에서 선포된 기별의 효과를 중화시키려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였다. 여로보암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제안했다. 책임자의 입장에 있거나 봉사를 요청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상급을 주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매매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별을 후원자의 원함에 따라 변경시킬 수 없었다.
2. 왕하 5:14~16과 단 5:13~17을 읽으십시오. 선물을 주겠다는 제안에 선지자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왕하5:14~16]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15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16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단5:13~17]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14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15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16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답: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일한 선지자들은 사람이 주는 상급을 거절하였다.
선물을 주는 자는 선물을 받는 자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고, 선물을 받는 자는 선물을 준 자에게 빚을 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선물을 사양하고, 이스라엘 땅에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여로보암의 호의를 거절함으로써 그는 참 예배와 우상숭배가 혼합된 예배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매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많이 걸을 필요가 없었다. 신당 봉헌이 있었던 벧엘은 유다 국경에서 2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유다 마을인 미스바도 벧엘에서 불과 1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하여 돌아가는 극적인 실물교훈을 통해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얼마나 반역적인지 보여주어야 했다.
굽히지 말라
“어떤 사람은 성품이 굳세지 못하다. 또 그들이 세우는 계획과 목적도 확고하고 일정하지가 못하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약하고 결단성이 없고 무능함을 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 그리스도인의 성품 가운데는 어떤 역경에서라도 조금도 변하거나 굽히지 않는 굳은 의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 정신력과 사람의 아첨이나 뇌물과 위협에서도 변치 않는 성실한 성품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복음교역자, 290)
<부가설명> 선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여로보암은 엄청난 이적을 경험했지만 정치적 처신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적을 경험한 것이 반드시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적은 사단도 행할 수 있다.(살후2:9)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을 말씀의 진리 위에 굳게 세워야 한다.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죽은 자에게서 가는 자가 있으면 믿을 것이라는 비유 속의 부자의 말에 모세와 선지자를 듣지 않으면 죽은 자에게서 가는 자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고 비유 속의 아브라함의 말을 빌려 대답하시므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가는 이적보다도 기록된 성경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언제나 확인하고 믿음을 굳게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가 불의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행위를 지지하거나 모르는 체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이며, 그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수요일 12월 1일 달콤한 거짓말
봉헌 의식에서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을 목격한 일반 백성들은 그 사실을 방방곡곡에 전파하였다. 그 중 어떤 젊은이는 자기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전하였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는 늙은 선지자였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나섰고, 나무 아래 쉬고 있는 그를 만났다.
1. 왕상 13:11~19을 읽으십시오. 이 본문을 창 3:1~5에 나오는 최초의 유혹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까? 이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왕상13:11~19]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12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18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창3:1~5]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답: 하나님의 사람은 인류의 조상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나는 이해와 해석에 미혹되었다.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했으나,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속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명의 긴박성을 이해해야 했다. 그는 왕에게 기별을 전한 다음, 지체하지 말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나무 아래 쉬면서 그는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 2킬로미터만 걸으면 유대 땅 나무 아래에서 쉴 수 있었다. 긴박성을 망각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스스로 유혹에 노출되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다. 늙은 선지자가 그를 속인 동기는 알 수 없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성경은 그가 그 사람을 속였다고 했다(왕상 13:18). 그 순간 늙은 선지자는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대리자가 되었다(요 8:44). 더욱 편치 않은 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너무나 쉽게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줄곧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이행하던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와 정반대의 속임수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가? 우리는 잠깐 유혹에 넘어간 그에게 동정표를 던지기 쉽다. 그러나 주어진 명령에 완전히 반대되는 거짓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유혹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선택 주변을 맴돈다. 유혹은 같으나 유혹의 형태는 변한다. 히 4:15은 예수께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지금은 현대적인 형태로 가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받는 동일한 유혹을 예수께서 받으시고 이기셨다.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에게 통찰력과 “피할 길”을 약속하셨다(고전 10:13).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들이 큰 빛을 받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처럼,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할 특권을 받았었다는 이유로, 그 후에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그처럼 높임을 받은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엄격히 형벌하시지 않으시리라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치명적인 기만이다. 주어진 큰 빛과 특권은 그 빛에 상응하는 미덕과 거룩함을 요구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가납하실 수 없다. 큰 축복이나 특권에 취하여 방심하거나 부주의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부조와 선지자, 359)
<부가설명> 가장 친밀하고 믿을만한 사람을 통하여 사단이 접근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와가 그랬고 제자를 통하여 예수님께 접근하였으며, 여기서도 같은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고 말씀을 들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에게 전한 것과 다른 계시를 다른 선지자를 통하여 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까?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을 전하고 성경말씀으로 접근해도 그것이 “또 기록하였으되”와도 일치하는지 시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전제적으로 모순이 없는지 확인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베뢰아 성도들의 모본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믿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되는 길을 제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목요일 12월 2일 반복된 시험
1. 하나님의 사람은 두 번에 걸쳐 시험을 당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온 첫 번째 시험은 완강히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늙은 선지자로부터 온 두 번째 시험에서 넘어졌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딤후 4:3, 벧후 2:1, 유 4~16 참조.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유4~16]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답: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말씀에 근거하여 조심에 또 조심을 거듭하여 말씀으로 시험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자.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시험은 외부에 있지 않다. 정치적 권력에 의한 박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 내부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명확한 말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참선지자와 교사는 다른 영감적인 계시와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로부터 온 새로운 예언과 가르침은 이미 주어진 진리에 더해지는 것이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종을 권하지 불순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그들의 교훈을 들은 자들과 본인들의 삶에 나타난 결과로 판단 받아야 할 것이다.
2. 왕상 13:20~34을 읽으십시오.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왕상13:20~34]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28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답: 늙은 선지자는 돌연 하나님의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곧 그에게 이를 심판을 예언하였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이적이었으며, 늙은 선지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뼈도 그와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는 남을 돕기 위해 왔지만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도 지킬 수 없었다.
이 이야기의 난해성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거짓말한 이유에서 시작 된다. 그는 기만자 사단의 역할을 하다가 그 장이 끝나기도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된다(21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확실한 단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명백한 명령을 그렇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왕은 이적을 보고도 계속 죄를 지었던 반면, 늙은 선지자는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거든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예언은 삼백 년 후 요시야에 의하여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왕하 23:15~16). 예언대로 요시야는 제단에서 뼈를 태웠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뼈는 보존하였고, 그 덕에 함께 묻힌 늙은 선지자의 뼈도 보호를 받았다(왕하 23:17 ~18).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라
“만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불순종한 후에도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허락되었다면 왕은 이 사실을 자신의 불순종을 변명하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다. 갈라진 제단과 마비된 팔과 감히 여호와의 명백한 명령을 불순종한 자에게 내린 무서운 운명에서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노여워하셔서 신속하게 나타내신 불쾌함을 분별해야 했고 이 형벌들은 그에게 행악을 고집하지 말라는 경고가 되어야 했다.”(선지자와 왕, 107)
<부가설명> 성경은 사건 자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방법으로 기록되었다. 그런 사실을 간단히 서술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하여 어떤 기별을 주시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사건의 세세한 전말을 알려고 하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이 사건은 여로보암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별을 분명하게 하려는 기록이다. 이 사건을 읽을 때 우리는 사마리아의 거짓선지자의 행동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사건의 내용이 읽는 자를 그렇게 유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기록의 목적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내용을 통하여 분명히 배울 것이 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린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에게 전한 것과 반대 되는 지시를 다른 선지자에게 했다고 믿을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만큼 거짓선지자의 주장이 강하고 그럴듯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확인하는 진리 확인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누가 그럴듯한 주장을 하면 그것을 성경에서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예언의 신의 증거로 그 주장을 확인하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바른 순서가 아니다. 성경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언의 신의 증거는 그 다음에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선지자도 속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 신앙하는 일에 참으로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에 어느 목회자나 성경 교사가 자기도 모르게 거짓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교훈: 시험은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찾아온다. 우리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이다.
금요일12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구주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하여 승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능력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유혹하는 자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시험을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대처하셨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악을 저항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벧후 1:4).
시험받는 자에게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과 유혹의 힘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도록 알려 주라. 그 모든 힘은 우리의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오며”라고 말한다(시 119:11, 17:4).” (치료봉사, 1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진리는 점진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활과 신념, 조직들과 선교활동 등은 변화될 것입니다. 현상유지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진하려고 하는 계획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영향 때문인 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교과반에서 토론해 보십시오.
* 우선 그 계획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정직하게 생각할 것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의 이익과 교회의 이기심이 그 밑바닥에 도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추진하려는 것이 성경적이며 예언의 신의 증거와 조화가 되는지를 정직하게 살필 것이다. 다음은 그것이 합리적인지도 살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살펴서 주님의 능력으로 일을 추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2. 하나님의 사람의 의무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죄를 허용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죄인과 교제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합니까? 죄악의 행습을 권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십시오.
* 바울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만날 때에 자기의 신앙과 진리 안에서 확고히 서 있으면서도 그들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면서 접근하였다.(고전9장) 기도하며 그런 방법을 택할 것이다.
3. 많은 나라에서 뇌물을 주거나 특별한 선물을 주는 것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거래의 일부입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 교과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한 지침을 적어보십시오.
* 그 선물과 거래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를 확인할 것이다. 정치적 의도나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지도 숙고할 것이다. 그런 거래가 올무가 될는지도 생각할 것이다.
4. 만약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수석장로가 마지막 시대의 사건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검증되어야 할까요?
* 성경과 예언의 신의 증언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되게 전개되는 원리와 충돌되지 않아야 한다. 그 주장이 있어야할 바로 그 자리에 충돌 없이 잘 맞는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표종락님의 댓글
표종락 작성일항상 감사합니다.
유계순님의 댓글
유계순 작성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수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행복한 안식일 만드세요.
김관철님의 댓글
김관철 작성일
잘 보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입니다.
행복한 안식을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