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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요압: 강하나 부족한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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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11-11 23:55 조회6,51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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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과 요압: 강하나 부족한 용사
11월 20일 일몰:오후 5시 18분

도입)
한 나라의 독재자가 자신의 명성을 더욱 높일 생각으로 자기 얼굴이 들어간 우표를 발행하게 한 후에 판매상황이 어떤지 보기 위해 시찰에 나섰다. 우체국장에게 “우표 판매상황이 어떻소?”라고 물으니까, “판매는 잘 되는데 우표가 잘 안 붙는다고 사람들이 불만을 말합니다.” 라고 했다. 독재자는 “그럴리가...” 하면서 직접 우표 뒷면에 침을 묻혀 봉투에 붙여보았다. “이렇게 잘 붙는데, 왜?”라고 하자 우체국장은 “하지만 사람들은 침을 우표 앞면에다 뱉어서 붙이려고 하거든요”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도록 하시고 우리는 자신을 겸허히 낮추어야 한다. 그 스스로를 높이려 하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되어있다.

기억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하 2:17~23, 3:23~27, 11:15~25, 20:7~11, 왕상 1장.

요압의 이야기는 정치와 권모술수와 왜곡된 충성과 질투와 완고함의 이야기이다. 당시는 강력한 중앙 정부나 잘 정비된 퇴직 제도에 의해 생존이 보장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신속하게 사라졌다.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다져간 다윗의 용사이자 관리자였던 요압의 때가 그랬다. 부족 사이의 경쟁과 불화로 특징 지워졌던 사사기 이후에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은 것은 왕의 등장이었다. 왕권은 사울로 시작해서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면서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성경은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부족적 사고가 삼사십 년 안에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요압의 생애는 전쟁과 불화와 심지어 종족학살로 얼룩져 있다. 우리에게 요압이 연루되었던 그런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의 이야기로부터 우리 안에 있는 일그러진 품성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주 우리는 다윗의 부족한 용사 요압이라는 부정적인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품성의 단점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 예수님을 찾게 될 것이다.

일요일 11월 14일 가족의 문제

도입)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앞에서 패하였다. 그런데 이 때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은 발이 들노루처럼 빠른 장수였다. 그런 아사헬이 이스라엘의 군장인 아브넬을 잡아 전과를 올리려는 개인적인 야망에 불탔다. 그리하여 그가 아브넬을 쫓아갔다. 아브넬은 자신을 쫓아오는 아사헬에게 여러 번 경고하여 자신을 쫓지 말도록 했으나 개인적인 영웅심리에 이끌린 아사헬은 끝까지 아브넬을 쫓다가 그의 칼에 찔려 죽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요압의 친동생이자 다윗의 조카가 되는 아사헬이라는 유능한 장수를 다윗은 이 이 전쟁으로 잃게 되었다. 아사헬은 다윗의 이름난 용장 30명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사헬은 경솔하여 백전 노장인 아브넬의 두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브넬에게 다가섰던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빠른 발을 믿고 교만하였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실력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급했다. 공을 세워보겠다는 일념만을 가지고 성급하게 달려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큰 승리를 거둔 이면에도 전쟁에서는 어떤 태도로 임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재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신중함과 겸손함과 침착함 그리고 참된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보게 된다. 자신의 힘만 믿고 날뛰는 아사헬의 죽음은 아무리 무예가 출중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압이 다윗의 친척이었고(대상 2:13~17 참고), 다윗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그의 품성을 처음으로 엿볼 수 있는 곳은 사무엘하 2장이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 유다는 급히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사울 왕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던 아브넬은 살아있었다.

아브넬과 다윗 사이에는 과거사가 있었다. 사울의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수없이 수색했던 자가 바로 아브넬이었다. 아브넬은 자신이 쫓던 자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유다와 다윗을 향해 전쟁을 일으켰다. 수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유리했지만, 다윗의 나라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1. 삼하 2:17~23을 읽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요약해 보십시오.

국지전이 벌어지는 동안 요압의 동생이 현명치 못하게 아브넬을 추격하였다. 아브넬은 그에게 추격을 멈추라고 여러 번 경고했지만, 성격이 급한 젊은 장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아브넬은 자기방어 차원에서 그를 죽였다. 요압은 이 일을 잊지 않았다.

얼마 후 아브넬은 연약한 왕 이스보셋 통치 아래 상황이 좋지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다윗에게로 가서 이스라엘 부족들을 다윗에게 돌리겠다고 제안하였다(삼하 3:1~22). 그때 먼 곳으로부터 복귀하는 길에 있던 요압은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새로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요압은 자신이 주도하지 않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삼하 3:23~27. 요압이 다윗에게 했던 말과 그가 궁극적으로 아브넬을 죽인 이유를 대조해 보십시오. 삼하 3:30. 요압은 아브넬의 동기를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이런 사실을 통해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교훈: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는 일은 무엇이든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그럴수록 우리는 공(公)과 사(私)를 구별해야 한다.

부가적용)
요압이 어떤 전쟁을 마치고 헤브론으로 돌아와서 자기 없는 동안에 다윗과 아브넬과의 회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돌아가던 중에 있는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다 성문에서 암살하였다. 그가 이렇게 행한 것은 자기 동생 아사헬의 원수를 갚은 것이었다. 요압이 이 일을 감행하기 전에 다윗 왕에게 아뢰기를, 아브넬의 헤브론 방문은 정탐 행위라고 거짓되이 단정했던 것이다. 요압은 장군이요 용사였지만 이때에는 시기(猜忌)와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행동한 소인이었다. 요압의 이 행동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해롭게 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거족적(擧族的)으로 다윗 왕의 통치 아래 돌아오도록 하려는 아브넬의 운동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이 그를 죽였으니, 그것은 회개 운동을 방해한 악한 행동이었다. 언제나 믿음 없이 사욕(私慾)으로 덤비는 자는 하나님의 일에 거치는 자가 된다. 복수 행위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월요일 11월 15일 죄의 대가

도입)
요압이 다윗의 신하로서 왕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아브넬에게 행한 일은 반역적 처사였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공의로운 일이 아니고 사적(私的)인 복수 행위였으니 만큼 그에게 하나님의 벌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다.(29-30). 그러므로 그 죄 값은 다윗과 관계없고, 요압과 그의 가문이 당해야 될 것이었다. "백탁병"은 유출병을 말함이고(레 15:2),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라는 말은 절뚝발이를 가리킨다. 요압과 모든 백성(그의 군대)에게 명하여 아브넬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哀悼)하라고 하였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장본인 요압과 그 군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 것은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사람 앞에서 담대히 의를 주장한 신앙 행위이다. 다윗은 친히 상여를 따라갔으며, 또 아브넬의 무덤에서 통곡하고 애가(哀歌)를 지었다. 다윗의 울음은 인정에 속하였다고 하기보다는 의리(義理)가 손상된 것을 원통히 여김이었다. 다윗은 이렇게 의를 사모한 임금이었다.

비록 아브넬를 애도하며, 요압의 행동을 꾸짖었을지라도, 그 당시 다윗의 지위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하여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삼하 3:28~35 참조). 보복을 피하기 위해 요압은 가능한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스스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윗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옳은 일은 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양심에 꺼리는 일까지 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양심의 소리에 점차 둔감해져서 마침내 정말 중요한 일에 바로 설 수 없다.

죄는 또한 신뢰를 잃게 만든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여러 차례 이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아를 죽인 죄 때문에 다윗은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없었다. 장자가 누이를 강간하고(삼하 13장), 둘째 아들이 살인자가 되었을 때에도(삼하 13:23~ 39), 자신이 비슷한 죄인이었기에 다윗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1. 삼하 11:15~25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요압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요압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스스로 아브넬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때문에 그는 의인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우리아를 암살하는 일에 동조하는 죄를 더했다. 삼하 11:7을 보면 우리아만 희생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들이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도록 몇 명의 군사를 이 무모한 작전에 함께 내보냈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로부터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자비로 우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과 함께, 실추된 신뢰성과 신실함의 부족이 가져온 결과는 여전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2. 요압은 위에서 다윗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삼하 18:5~15을 읽어보십시오. 여
기서 요압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시켰을까요?


요압은 다윗의 명령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따랐으나, 자신의 개인적 유익을 위해서는 왕의 엄명도 가볍게 여겼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성공은 곧, 자신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삼하 19:5~6). 요압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도 그런 유혹에 빠지기 얼마나 쉬운가!

교훈: 하나의 죄가 발전하면 죄에 대한 우리의 억제력이 약화되어 또 다른 죄에 노출되고, 결국 요압과 같이 양심이 둔화된다.

부가적용)
다윗은 자기의 왕권으로써도 범죄자를 제어(징계)하기 어렵다고 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악한대로" 그들에게 갚아주시기를 구한다. 다윗은 비록 왕이었지만 그의 왕권을 가지고도 자신의 신하인 요압을 죽일 수가 없는 상황이 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요압을 하나님께서 그를 처단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다윗은 사람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자였다. 그런 다윗을 모르고 요압은 개인적인 원수를 빌미로 아브넬을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와 연합이지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다. 요압은 다윗의 저주아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연합과 모든 사람의 용서에 있음을 아시기 바란다. 우리 모두 사랑하고 연합하고 용서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화요일 11월 16일 정치가 요압

도입)
압살롬이 그의 사환을 시켜 암논을 살해하는 사건이 나온다. 압살롬이 왜 암논을 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살해의 동기를 놓고 우리는 압살롬의 죄만을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암논에게 있기는 했지만 더 깊이 살펴보면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그 근본적인 동기가 다윗에게 있음을 안다. 우리는 사람의 죄를 판단할 때 단지 나타난 표면적인 모습으로만 판단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기까지 다 보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심판이 될 것이다.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동기를 우리는 압살롬에게만 그 죄가 다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다윗의 죄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암논이 압살롬의 동생인 다말을 강간하였다는 사실을 다윗이 알았지만 암논의 죄를 물어 다윗이 혼을 내든지 형벌을 주든지 마땅히 죄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의 범죄를 처벌하기를 게을리 했다. 이렇게 그 처벌을 게을리 하는 동안 자신의 동생이 강간당한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압살롬의 마음에 암논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윗이 암논을 불러다 그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가르치지 않은 결과가 결국 암논을 죽게 하고 압살롬을 살인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압살롬의 죄보다 다윗의 죄가 더 큰 것이다. 왕이요 아버지인 다윗의 불충실과 그 아들 암논이 회개치 않은 까닭에 여호와께서는 이 사건들이 그 당연한 진로를 따르도록 허락하시고 압살롬을 제지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다.(부조 하 728p) 부모나 통치자가 죄악을 처벌할 의무를 게을리 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처리하실 것이“라고 부조 하 728p에 말씀하셨다.

사무엘하 13장은 압살롬이 그의 이복형제 암논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압살롬은 그 일로 나라를 떠나서 자신의 때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암논이 자신의 이복 누이이자, 압살롬의 친누이인 다말을 강간한 것은 분명한 죄였다. 하지만 형제를 죽인 압살롬의 죄는 또 어떠한가? 자신의 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다윗은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장애가 있었던 것 같다. 압살롬은 누이가 당한 일을 보복하고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명예와 수치는 다윗 시대의 가치체계를 이루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였다.) 다윗의 장자 암논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권리는 압살롬에게 있었다. 다윗의 마음은 죽은 아들에 대한 애도와 압살롬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이 모든 불행이 어쩌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요압은 이 문제에 개입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윗 왕에게 직접 고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드고아의 한 지혜로운 여인을 이용하여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1. 삼하 14장을 읽으십시오.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어떻게 전달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요압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됩니까?


요압이 그 여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일러주었다는 말은 그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의 신학은 옳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에 불과했다. 그는 용서 없는 보복의 삶을 이어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심지어 신앙마저도 정치와 성공의 수단에 불과했다. 요압은 압살롬의 가능성을 보고, 미래의 왕에게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못지않은 적수를 만났다. 압살롬을 복귀시키는 일에 주역이었던 요압은 그로부터 어떤 감사의 답례도 받지 못했다. 압살롬은 단지 그를 이용한 다음, 자신이 요압만큼 교활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재빨리 보여주었다. 그는 다윗과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요압을 압박하기 위해 그의 밭에 불을 질렀다(삼하 14:28~33). 압살롬에게는 요압의 개입이 고마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내전 상황으로 발전하게 될 무시무시한 반역의 무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를 구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큰 재앙의 불씨를 키우기 마련이다.

부가적용)
오늘의 말씀은 범죄로 말미암은 다윗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그러나 더 중요한 구속사적인 중요점은 이것이다. 이 여인이 압살롬을 용서하라고 하는 기별이다. 실상 다윗도 여자 때문에 우리야를 때려 죽였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그는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고 그에게 참기 힘든 모욕만 가증시켜 결국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를 들게 한 것이다. 구속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용서이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윗의 모습은 그 자신도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가?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고 3년 동안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행동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역하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꼬인 일을 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이다. 아무런 조건도 없고 아무런 댓가를 치르지 않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이다.

수요일 11월 17일 칼에 의지하여 살아감

도입)
다윗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아 삼일 동안 유다지파에서 병력을 모집하도록 시켰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요압을 배제하려 하였던 의도로서 이루어졌다. 또한 자신이 아마사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아마사에게 앞으로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을 모으는 그 일이 지체가 되었다. 왜 지체가 되었을까? 실상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장으로서 대군을 가지고도 요압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또한 그가 3일 내에 병력을 모으지 못한 것은 유다지파의 신임을 얻지를 못하였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요압은 이 일로 말미암아 다윗에게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군대 소집하는 일을 아마사에게 맡기다니, 그리고 그 일이 지체되니까,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이번 반란을 평정하는 일을 맡겼다. 요압은 백의종군하게 된 것이고 또한 공을 세울 기회가 없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면 요압의 군대 장관의 지위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다윗은 왜 요압에게 이런 조치를 내렸을까? 첫째는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것이고, 둘째론 왕인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다. 전에 같으면 이런 일은 분명히 요압의 일인데 아마사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니 아비새에게 일을 맡겼다. 아무래도 다윗은 요압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어떤 사람인가? 결국 속임수로 사촌인 아마사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에 생각 하나가 들어와서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하 20장 이야기를 통해서 그러한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고 계신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거스르는 마음, 즉 우리의 욕망을 따라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의 운명은 사단과 함께 죽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삼하 20장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요압은 어떤 인물입니까? 요압의 거역은 어떻게 정당화 되었습니까?


아마사와 요압은 사촌지간이었다(삼하 17:25).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다. 요압이 다윗의 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뒤에(삼하 18:5, 14) 다윗은 요압을 제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마사에게 군 최고 지휘관을 약속하였다(삼하 19:13). 여기에는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요압에 대한 문책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의도는 단지 요압에 대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사를 임명한 것은 압살롬 편에 가담했던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 화해의 표시였다.

2. 삼하 20:1~2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 상황은 어땠습니까?


다윗은 요압을 무시하고 아마사에게 군대장관직을 약속했다. 그리고 군대를 소집하여 새로운 반역을 처리하도록 그를 보냈다. 아마사가 정한 시간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자, 다윗은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명을 내렸다. 이 위기의 때에 다윗은 요압보다 그를 더 신뢰하였다. 마침내 요압과 아마사가 만났다. 요압은 아브넬을 암살했던 방식으로 아마사를 죽였다. 성경 기자는 그 공격이 순식간에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다(삼하 20:8~10). 요압은 자신이 배제되고 더 이상 첫째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매정하게 사촌을 살해했다.

요압의 부하 중 하나가 요압과 다윗 왕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으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백성들은 요압에 대한 충성이 곧 다윗 왕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고, 아마사 사건에서와 같이 재판관과 배심원과 집행자로서의 요압의 권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왕의 마음은 이미 요압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교훈: 자신의 입지와 성공을 위해 친족마저 살해했던 요압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의 연쇄반응이 멈추도록 주님께 회개하며 악행을 근절해야 한다.

부가적용)
요압은 출세욕과 질투로 말미암아 아브넬을 속임수로, 압살롬은 혼수상태에서, 그리고 아마사 역시 속임수로 죽임으로 세 번째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다윗을 둘러싼 참상이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12:10)는 나단의 예언의 비극적인 성취를 보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요압의 차가운 마음을 본다. 자신의 정적들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죽이는 모습을 본다. 그는 이것을 그의 자숙의 기회로 삼기는커녕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심령으로 전에 했던 그 일을 오늘도 계속하는 못 말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되 차가운 마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자신의 정적을 눈앞에 두지를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차가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라지 일지라도 곡식과 같이 두고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요일 11월 18일 요압의 최후

도입)
왕상 1장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려는 다윗과 그 다윗의 왕위 승계에 얽힌 왕자들의 난을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사건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첫째로 다윗의 실수이다. 다윗의 실수는 한마디로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이 늙어 기력이 쇠해지도록 후계자를 지명하거나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후계자도 정해놓지 않게 되자 권력의 공백 상태가 형성되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왕이 되기를 꿈꾸던 야심가 아도니야가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그는 다윗의 오른 팔이었던 군대장관 요압을 포섭했다. 다윗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던 제사장 아비아달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이들과 모의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반란이 일어나자 왕자들 사이에 암투가 생겨났다. 신하들 사이에 줄 서기와 편가르기가 생겨났다. 다윗은 군왕으로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국내적으로 국외적으로 산적한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잘 처리하지 못한 왕위 계승의 문제로 인해 모든 업적이 자칫 자신의 당대로 끝날 뻔하였다. 그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실수이다. 우선 다윗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 앞으로 자신의 왕위를 넘겨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가정불화와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다윗은 계승해야 할 다음의 왕권을 확실히 해야 할 때를 놓친 것이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반란을 꾀하게 되고 문제가 생기자 그제서야 서둘러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우고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반역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뒤였다. 겨우 아들 아도니야는 죽음을 면했지만 자기의 오른 팔이었던 요압은 죽음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었던 제사장 아비아달이 쫓겨나 유배를 가게 된다. 나라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윗이 때를 놓친 결과이다. 우리가 죽을 때, 죽음을 위해 준비하시고 죽어야 한다. 부모가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생각지 않은 재난이 가정이 이를 수가 있다. 재산이 있으면 재산도 분배하고 나누는 일을 살아생전에 잘 행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후 문제가 없이 인생을 마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도 우리의 지혜가 될 것이다. 중국 고사성어 가운데 "갈이천정"이란 말이 있다. 목이 말라야 비로소 샘을 판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생긴 뒤에 서둘러 봐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시기가 아주 적절해 보였다. 다윗은 이제 나이가 많아 밤에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다윗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선발되었다. 성경 기자는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음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무기력함을 내비쳤다(왕상 1:1~4). 다윗은 젊은 아비삭과 상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상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남은 아들 가운데 장자였던 아도니야는 자신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 왕상 1장을 읽으십시오. 요압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압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왕상 1:7은 요압이 이 모의를 주동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윗 왕에게 이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요압은 이전처럼 앞장서서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그는 솔로몬을 자신의 섭정왕으로 선포함으로써 요압과 아도니야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요압은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분으로 여겼다. 요압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책임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같지 않았다. 그분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보응은 즉각적이지 않을지라도 이생이든 최후의 심판 때이든 언젠가 임한다. 그러나 종종 인생 말년에 고달픈 시간을 보내면서 심은 대로 거두는 사람들도 있다(갈 6:7).

물론 최후의 심판 때에도 자비가 있다. 요압은 아도니야의 모의에 대하여 처벌받지 않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반성과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결국 2차 모의에 가담하였다. 이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요압은 마침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전으로 피해 제단 뿔을 붙잡았다. 그는 제단이 오직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만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출 21:14). 회개하지 않았던 과거의 인생이 마침내 그를 삼켰다. 칼에 의지하여 살던 자가 마침내 칼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왕상 2:28~ 35).

교훈: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주어진 자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스스로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부가적용)
다윗은 그의 마음 가운데 그가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것에 대해 마음에 사무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대 장관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그의 시기심 때문이었다(삼하 3:6-39;20장). 여기서 특기할 것은 요압의 그러한 살해 행위를 다윗은 마치 자신에게 행한 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것은 다윗의 권위에 대한 멸시와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삼하3:26;20:11). 적어도 요압은 다윗 왕에 대해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방자하고(삼하 18:5,14) 거칠었던 것 같다(삼하 3:27;18:14). 그래서 그는 다윗에게 끼친 공(功) 못지않게 자주 다윗 왕가를 괴롭혀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행위는 도저히 묵과될 수 없었던 요압의 치명적 실수로서, 다윗은 그 사실에 대해 아들 솔로몬에게 응분의 조치를 내릴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렸다고 했다. 다윗은 아브넬과 협상하여 평화적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려 했었다(삼하 3:21). 또한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등용한 것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재정비를 도모하려던 때였다(삼하 19:13;20장).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평화의 노력이 요압의 살해 행위로 인해 크게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만일 요압이 전쟁 중에 정정당당히 싸워 그들을 죽임으로 그들의 피를 띠와 신에 묻혔다면, 그것은 결코 책할만한 일이 못될 것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태평한 시대에, 곧 다윗이 탕평책을 쓰고 있는 즈음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 및 복수심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전쟁터에서나 묻혔어야 할 피를 명분 없이 흘리게 했으니, 그것이 곧 요압의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다. 우리는 질투와 시기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 가장 경멸해야 할 죄악이 있다면 질투와 시기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이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던 모습을 본다. 바로 이 모습은 질투와 시기로 인한 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임을 경계로 삼도록 했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투와 시기의 희생물이 되어 죽게 되었는지 모른다.

금요일 11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진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붙들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리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진리 안에 있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의 생애와 품성은 진리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는 특별한 일들, 즉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영광의 왕국에 속한 천사들과 교제할 수 있는 도덕적 적합성을 준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붙드는 진리는 하늘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 마음에 자리를 잡을 때, 진리는 개선과 순결의 사역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결코 사람을 거칠고 무례하게 만들거나, 부주의하거나 강퍅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아온, 하늘에 기원을 둔 진리는 사람을 고상하고 거룩하게 만들며,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정이 많고, 순결하게 만든다. 그것은 강퍅한 마음과 이기심,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애고 우리를 자존심과 세속적 야망으로부터 깨끗하게 만든다.”(엘렌 G. 화잇 언급, 싸인즈 오브 타임즈, 1878. 5. 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는 가족과 직장 그리고 국가에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충성심을 표시해야 합니까? 이런 중요한 관계에도 어떤 한계가 있습니까?

2. 위에 있는 엘렌 G. 화잇의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진리가 그대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의 삶을 통해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신앙에 관하여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솔직해질 필요도 있습니다(고후 13:5).

3. “나는 명령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악이 자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명령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더라도, 때로는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계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우리가 입은 피해를 잊고 용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합니까? 이번 주 교과에서 용서에 대하여 어떤 진리를 배웠습니까? 용서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5. 백만장자 존 D. 록펠러는 경쟁사를 인수하기 위해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험부담을 안고 사업을 인수했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그 회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삼켜버린 것입니다. 부도덕한 행위를 쉽게 정당화하는 이런 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댓글목록

구도자님의 댓글

구도자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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