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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한나: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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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10-08 11:04 조회5,8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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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한나: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배움
10월 16일 일몰 오후 5시 54분

도입)
이스라엘의 한 역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대해 설명하려 하면서 사무엘서는 그 첫 시작을 엘가나의 한 가정 이야기로 이 책의 서문을 삼고 있다. 그리고 한나의 무자함,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을 강조하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한나의 불임으로 말미암아 한나가 그 가정에서 겪는 마음의 슬픔과 비통으로 이 역사책은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창세기에도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사라의 불임 때문에 일어난 이야기, 바로 이런 이야기가 구속사의 중요한 이야기로 나타나고 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여자의 불임은, 가장 큰 저주 중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전래된 미신적인 관념은 불임의 여인들은 무언가 숨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호의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라이벌 브닌나가 한나의 수태하지 못함에 대하여 비웃고 학대할 때마다 한나의 슬픔은 한이 되어 가슴속에 앙금으로 박히게 되었던 것이다(1:6-8).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 중에 여자는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표상하고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의 이야기가 왜 하나님 교회의 중요한 이야기의 소재로 소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생명의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고 훗날 메시야의 탄생도 하나님의 능력의 범주에 속한 것임을 믿도록 말씀을 통하여 준비시켜 주고 있다. 사도 교회가 새로 탄생하면서 구원받을 새로운 생명을 기하급수적으로 낳게 되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었듯이, 오늘 불임 여성 한나가 아이를 낳은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수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절: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1~2).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1장, 2:1~11, 21, 욥 2:12~13, 마 6:19~20, 눅 12:16~21.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존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의 생명은 어떤 의미일까? 전쟁을 벌이는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우리는 트럭에 깔린 지렁이처럼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의하여 짓눌려 있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겠는가? 과연 날 위한 의미와 목적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정치나 종교적 위인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소원을 하나님께 올린 여인, 한나의 일생을 탐구하면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가깝게 대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해 주신다.

일요일 10월 10일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

도입)
우리가 이 과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교훈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실상 한나의 불임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습을 표상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사랑받는 아내였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이 여인의 모습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영적인 생명이 황폐하였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상태처럼 깊이 시들어 있는 모습을 표상하고 있었다. 불임의 상태에 있었던 한나의 모습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처럼 영적으로 시들어 있는 모습을 표상적으로 나타내 보여주기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이 한 여인의 잉태를 통해 태어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있는 모습은, 가장 어둡고 구원이 필요했던 시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모습을 표상하기에 적절하였다. 자식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겪어야 하듯이 이스라엘에 환희의 새 역사를 출발하기 위해 하나님은 한나에게 고통과 슬픔을 먼저 허락하셨다. 그녀의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녀의 분노를 삭일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의 응어리가 쌓여 갔다. 아무리 많은 남편의 사랑과 위로도 그녀의 마음에 당한 상처를 치료하기에는 부족했다. 여자들도 속에 쌓인 스트레스와 분노를 삭이려면 술에 진탕 취해서라도 카타르시스를 맛보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때가 있다(1:14-15). 그러나 한나는 남편도 그 누구도 도울 길 없는 자기만의 문제를 부여안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한나'는 '사랑스러움' 또는 '은혜스러움'이란 의미를 지녔다. 히브리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름이다. 한나는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많이 입었다. 실제적 사실과 잘 부합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초기에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번민과 소외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자녀의 출산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증거로 삼은 반면, 무자(無子)는 하나님의 징계나 저주의 결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 삼상 1:1~16을 읽으십시오.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왜 자녀가 없음을 그토록 한탄했습니까?
아들 없이는 노년의 삶이 보장되지 않았던 그와 같은 문화 속에서 한나의 감정은 그렇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자(無子)함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다. 자녀가 없는 여인은 안이나 밖이나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이는 분명 사회의 시선에 비친 그녀의 가치와 자존감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나는 종종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의아해 했을 것이다. 하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 구약 시대의 불임 여성들이 겪었던 비애를 이해하고 싶다면, 사라와 라헬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창 16:1~2, 30:1. 그들은 얼마나 우울했습니까?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와 관습에 의하면 사라의 행동은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서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절망감과 무거운 짐을 엿볼 수 있다. 자녀를 얻기 위해 다른 여인과 잠자리에 들도록 남편을 설득하고 싶은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야곱에게 쏟아내는 라헬의 절규는 한나의 감정과 고뇌를 연상케 한다. 질투와 낮은 자존감으로 뒤범벅 된 그녀의 감정은 여호와께 마음을 토로할 때 마침내 폭발하였다. 꽃다운 나이가 다 지났다. 세월도, 분명 하나님도 그녀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한나의 시대에 여인들의 주된 역할은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다른 역할을 맡을 가능성은 없었다. 여인들은 자신의 역할을 바꾸거나 다른 직업을 통해 성취감을 얻을 수 없었다. 우리는 구약 시대에 여자 사사와 여선지자가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에 의한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여인들이 삶의 가치를 증명하고 유업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녀가 없는 그녀에게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교훈: 여인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에 자녀를 낳지 못한 한나는 어떤 인생의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부가적용)
자식이 없는 한나는 "마음이 괴로와서, 통곡하며,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며"라고 하였다. 브닌나라는 엘가나의 작은 부인이 한나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상처가 많은데 심한 상처를 받았다. 자식이 없는 한나의 고통을 이용하여 더 고통스럽게 하였다.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다. 거지에게도 고통이 있겠고 대통령과 재벌 총수에게도 고통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자녀, 건강, 경제, 지위, 사람, 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한 고통은 있다. 자녀가 없는 고통도 있지만 자녀가 있기 때문에 겪는 고통도 있다. 고통은 가치가 있는 친구이다. 고통으로 인해서 우리는 인내, 겸손, 기도, 사랑, 성숙, 하나님을 배운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다(시119:71). 지나고 보면 고난은 우리를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깨닫게 된다. 고통은 아프지만 하나님은 진주와 같은 축복으로 만든다. 우리의 고통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고통으로 부가가치를 만드신다.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만드신다. 한나는 고통 가운데서 삶을 포기하거나 세속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가장 신앙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하였다. 흐느껴 울며 애원했다는 것이다. 진정 한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든 인간적 슬픔과 고통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내놓고 애절한 심정으로 기도함으로서 아픔과 고통을 눈물의 기도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나실인으로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한나는 고통 가운데서 눈물과 서원의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는 비난과 고통을 이기는 방패와 무기이다. 한나는 고통 가운데서 인간과 싸우거나 상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상대로 눈물과 서원의 기도를 드렸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월요일 10월 11일
이와 같은 친구들

도입)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마음의 아픔을 간직할 때가 있다. 인간의 내면(속)에 상처를 받았을 때 어디에 상처를 받는가? 1) 마음(마음에 상처가 난다) 2) 자존심(자존심과 자긍심) 3) 말(말에 의해 상처를 받는다)-입. 한나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브닌나에게서 마음과 자긍심 그리고 말에 의해 엄청난 상처를 경험했다. 그런 그녀가 사무엘을 낳고 나서 그녀의 마음이 치료가 되었다.

1.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며, 아무 가치도 느낄 수 없는 인생을 살기란 한나에게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더해졌습니까? 삼상 1:6~ 7.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상처를 줘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계속되는 브닌나의 조롱은 분명 한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성경 본문은 브닌나가 반복적으로 그녀를 자극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해가 바뀌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브닌나의 행동을 묘사한 단어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죄의 더미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신 9:18, 31:29 참조). 그것은 단순히 일회적인 놀림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마도 한나가 뭔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도록 자극하기 위한 브닌나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브닌나에게 있어서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경쟁자였기 때문이다(삼상 1:5).

2. 욥기 1~6장을 훑어보십시오. 욥의 친구들은 그가 당한 일 때문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습니다(욥 2:12~13 참조). 그러나 그들은 욥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반응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재산과 친족을 잃은 슬픔은 매우 크다. 질병과 삶의 갖가지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때로 어떤 희망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의 삶을 소모시키는, 충족되지 않는 갈망에 불과하여서 우리로 더욱 깊이 절망하게 만든다. 깊은 상처와 좋지 않은 여건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들까지 대면해야 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성취되지 않은 꿈, 계속되는 긴장 그리고 계속되는 자극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한나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부르짖게 만들었다. 가끔 우리는 우리의 상처와 번민을 주님 앞에 토로할 필요가 있다.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면 우리 외부에서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교훈: 모든 길이 막히고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결국 우리는 위를
바라보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부가적용)
우리가 고난 중에서 위를 바라보는 것, 즉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은 꿈을 얻는 창문이요 믿음을 얻는 창문이다. 땅을 바라보고 꿈을 잃어버리고 땅을 바라보다가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과 좌절한 사람은 갇힌 천막에서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늘은 바로 우리에게 새로운 꿈을 주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을 주는 창문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기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신다. 생각을 하면 사람이 움직이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 빌리그래함 목사의 친구는 어려서부터 산간지방에서 자라났고 그 지역의 산에 대하여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 미국의 산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산에서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쉽다는 것을 잘 아는 그 사람은 당황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중에 마침 다행스럽게도 산속 오두막집에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살아 나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노인이 남겨준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보통 사람들은 길을 찾아야겠다고 산 밑으로 내려가는데 그것이 죽는 길이라오.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위로 올라가서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어떤 쪽에 마을이 있는지 분명히 방향을 확인하고 내려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오면 세상으로 조급히 내려갈 것이 아니라, 더욱 위를 사모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가까이 가면 문제와 역경이 해결됨을 믿어야 한다.

화요일 10월 12일
마음을 토로함

도입)
한나는 자신의 원통함과 격동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하나님께 토했다. 기도란 어쩌면 하나님 앞에 자기 심정을 모두 다 토해내는 고독한 영혼의 절규요,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눈물방울 하나하나까지 다 헤아리시는 분이시다. 한나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 무거운 짐, 답답함, 억울함과 분노, 불평과 증오,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소원, 그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았던 것이다. 한나의 가슴 아픈 이런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 그리하여 그에게 수태케 하셔서 그의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신 것이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는 결국 어떤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경우에 따라 비합리적이고, 심지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 한나는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였습니까? 삼상 1:9~16을 읽고 그녀가 고통을 처리하는 단계를 묘사하십시오.

이 기도는 공식적인 청원이나 일반적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식의 기도가 아니다. 성경 기자는 한나가 여호와 앞에 그녀의 심정을 쏟아냈다고 묘사하였다. “붓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액체와 관련되어 있는데, 특히 제사의 피와 물과 관련되어 있다(레 4:7, 12, 18, 25 참조). 그것은 종종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은 심판이나 복을 부어 주신다(시 69:24, 79:6, 사 42:25). 그것은 풍성함과 충만함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몇 개의 구약의 본문에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시 42:4~5, 62:9~9, 애 2:19). 이렇듯 토로하는 기도는 아마도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올리는 기도였던 것 같다. 이 기도에는 철저한 정직과 가장 깊은 고통과 두려움의 고백이 요구된다. 한나는 기도에 너무 깊이 몰입한 나머지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야곱이 야간의 습격자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하나님을 붙잡았다(창 32:26~27).

2. 한나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 즉각적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삼상 1:17~18.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토로할 때,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적절한 때에 그의 방식으로 응답해 주겠다는 확신을 주신다(시 37:4). 그의 약속은 미래에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을 준다.
삼상 1:11에서 한나는 하나님께 큰 약속을 드린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아들을 낳게 해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이었다. 서원은 원래 기도나 경배와 같이 예배의 일부분이었다. 한나의 서원은 엄청난 것이었다. 아들에 대한 모든 기대의 포기였다. 엘가나의 아내로서 그녀의 지위와 입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교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 담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쏟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받으신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통과 슬픔과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기도하는 영혼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심을 아시기 바란다. 여러분의 가슴 답답함, 불평과 증오를 다른 사람에게 쏟지 말고 하나님께 쏟으시기 바란다. 한나가 낳은 자식의 이름이 사무엘인데 이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사무엘-하나님의 들으셨다는 뜻의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실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가슴의 한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주의 깊게 당신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신다. 당신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고 울부짖는 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그냥 허공에 대고 울부짖는 것은 단순히 소리일 뿐이다. 그냥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기도를 듣고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실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은 기도할 것이다. 얍복강에서 야곱의 기도는 그의 삶의 태도를 말한다. 그는 비록 약고, 얍삽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었고, 그는 기도를 했던 사람이다.

수요일 10월 13일
주님을 찬양함

도입)
한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으나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즐거움이 마음의 즐거움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인 것을 여러분은 아시기 바란다. 또한 그녀가 사용하는 뿔이라는 말이 있다. 뿔은 짐승에게 있어 권위와 힘의 상징이다. 자존심과 자긍심과 같은 것이다. 간혹 짐승들이 서로 싸울 때 뿔을 부딪치며 싸운다. 이 뿔이 부딪치며 싸울 때 결국 이 뿔이 강한 자가 이긴다. 이 뿔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높아졌다고 말한다. 그녀의 자존심과 자긍심에 상처를 받았는데 이 모든 자존심을 하나님이 세워주셨다. 인간의 자존심과 자긍심은 하나님을 믿을 때 높아진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비하하고 인간을 경멸하지만 하나님만큼 인간을 높이고 귀하게 여기시는 분은 없으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자긍심을 높이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입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정말 공격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입에 할 말이 없을 때 마음이 아프다. 한나는 가정 내에서 위상이 추락이 되었고 말을 잊고 살았다. 할 말이 없이 살았다. 그런 그녀의 입이 원수를 향해 크게 열렸다고 말한다. 사람이 가장 힘든 것은 입으로 대항할 수 없을 때이다. 상대방의 입이 너무 세서 대항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향하여 입이 크게 열렸다고 말했다. 그녀의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게 자신감을 주신다. 여러분의 마음과 자긍심 그리고 우리의 입에서 자신감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란다. 우리 하나님은 기죽고 살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는 하시나 당신의 백성들이 기죽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대는 즐거울 때에 노래하는 그런 사람인가? 성경은 삶의 중요한 순간에 찬양을 불렀던 인물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미리암과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한 뒤, 홍해 바닷가에서 노래했다(출 15:20~21). 드보라와 바락은 왕들과 군사들을 물리친 하나님의 능력을 장엄한 서사시로 찬미하였다(삿 5:1~31). 마리아가 친족인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입술에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왔다(눅 1:46~55). 이런 노래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정황 속에서 나왔지만, 한 가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분의 자녀들이 올린 탄원에 응답하셨을 때 생긴 일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1. 삼상 2:1~11을 읽으십시오. 한나의 노래는 무엇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까?

한나는 이제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 자신의 개인적 경험 뿐 아니라, 역사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절대적으로 여기며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내일이면 뜬구름같이 사라져 버릴 것들이었다. 한나가 자신의 노래를 통해 극명하게 강조하고 싶었던 사실은 삶의 상황들이 항상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넘어진 자가 힘으로 띠를 띠는 반면 용사의 활은 꺾인다(삼상 2:4).

한나는 참된 안전은 상황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특별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치를 주시는 분이다.

어떤 이들은 한나의 노래 가운데 6절을 가지고 씨름한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은 임의로 결정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에 대한 구약의 기본 전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인 관점으로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로서 창조물을 가지고 그의 뜻대로 행하실 수 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인 사건들도 하나님의 통치에 예속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저자들은 종종 인간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듯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면 그가 행하신 것이나 다름 없다는 식으로 보일 수 있다.

교훈: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가적용)
한나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대한 신뢰를 가졌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에 대한 신뢰를 가졌다. 우리의 체험에 있어 하나님께 대한 이런 깊은 체험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의 경험이 더 깊어지시기를 바란다. 한나는 인간이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 역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또한 살아가면서 인생이 전적으로 뒤바뀌게 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도 전적인 인생의 역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춘향전도 인생의 역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데렐라도 인생의 역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콩쥐 팥쥐도 인생의 역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이야기와 심성 속에 인생의 역전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많이 찾아 볼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 살 것이지만 언젠가 우리의 삶에 인생 역전이 있게 될 것이다.

목요일 10월 14일
하나님의 투자 계획

도입)
우리는 오늘의 소지에서 한나의 깊은 헌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낳을 수 없는 중에 나은 자신의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의 헌신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갓 젖 뗀 아이를 드릴 수 있는 한나의 헌신을 보게 된다. 율법에 의하면 여자가 하나님께 서원한 서원은 변심하기 쉽다하여 남편이 취소할 수 있었다.(민 30:6-15 참조) 한나가 아이를 낳으면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약속하고 서원 했지만 그러나 엘가나가 그 서원을 취소하면 하나님 앞에 사무엘을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며, 그 아내 한나의 서원을 존중해 주었다(1:22,23). 엘가나와 한나는 자신들이 서원한대로 젖뗀 후 독자를 바친 아브라함의 심정처럼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1:24-28) 우리는 한나가 아이를 하나님께 바친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왜 구속사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경험과, 한나가 하나님께 젖 뗀 아이를 바친 이 경험을 구속사의 경험으로 남겨 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드린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 이 기록은 필요했던 것이다.

한나는 노래하면서 성소를 떠났지만, 어린 사무엘을 뒤에 남겨두었다. 불임이라는 오명을 벗기는 했지만, 아들이 없는 텅빈 집을 향해 가야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아들을 바쳤으니, 늙으면 누가 그녀를 돌볼까? 그녀는 단순한 믿음과 신뢰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소유를 드렸다. 한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아들을 드렸던 또 다른 영웅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오랜 불임 기간 후에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이삭이 다 성장했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반면 한나는 아들을 낳기도 전에 아기가 생긴다면 하나님을 섬기도록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가 젖을 떼자, 그녀는 아들을 실로로 데리고 갔다. 상상해 보라. 엘리의 가문은 그리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엘 리가 사무엘의 좋은 교사와 인도자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들을 맡기고 작별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1. 한나의 믿음과 사랑의 표현을 하나님은 어떻게 존중하셨습니까? 삼상 2:21.


한나는 주님께 아들을 바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아들을 붙잡아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바침으로써 그녀는 5명의 자녀를 더 얻었고, 사무엘은 심오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사무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대언자이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교육자와 지도자가 되었다.

2. 쌓아 둔 재물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마 6:19~20, 눅 12:16~21.


우리가 무엇을 드리든지 하나님은 받으시고, 배가시켜서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되돌려 주신다. 진정으로 소중한 보배는 하나님께 드려야 가장 안전하다. 우리를 위해 잠시 이곳에서 쌓아두는 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시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자존감의 회복은 그녀로 하여금 기꺼이 드리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교훈: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깨닫고 가장 소중한 아들을 기꺼이 드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와 자녀에게 복을 주셨다.

부가적용)
모성애가 강한 여인이 자기의 젖뗀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헌신이 아니다. 자식을 떼어놓는 심정을 이해하는가?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는 심정이 바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는데 작은 빛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사무엘상 1장의 역사의 모습과 구속사적인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한나의 대적, 라이벌은 브닌나라 하였다.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힌 라이벌이었다. 표상적으로 여자들은 교회를 나타내고 있다(벧전 5:13). 우리는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그 시기의 역사적 구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전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대적인 로마의 압제아래 살았다. 이스라엘과 로마의 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나와 브닌나의 대치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슴에 한을 가지고 이 로마를 정복해줄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바랬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간절한 바램이 하늘에 사무쳤을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셔서 그들의 눈물을 씻기시고 그들을 위로하셨던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한나의 브닌나의 대치는 어쩌면 라이벌 관계, 대적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과 로마의 대치, 대적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기도 하고 우리 시대의 우리의 대치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한 가정에서 두 여자의 대결이 있었듯이, 이것은 두 여자, 즉 두 교회의 경쟁관계로 확대해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개신 교회들이 있다. 브닌나처럼 아이들도 쑥쑥 잘 낳는 다른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이 교회들은 안식일 교회는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많은 핍박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이런 대치 국면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교회들은 아이들도 쑥쑥 잘 낳고 교회도 잘되는데 우리는 우리의 교회성장이 더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는 아이를 잘 낳지 못하는 불임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픔을 경험하지는 않으셨는가? 그러나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사무엘, 그 시대의 진짜 주역을 낳은 여자는 한나였으며, 한나는 그 역사의 주인공인 사무엘을 낳았다. 이 시대의 진짜 주역은, 아들을 많이 낳은 브닌나의 아들들이 아니라 아들을 적게 낳았어도 진짜 제대로 된 아들, 기도해서 얻은 아들, 하나님의 섭리로 태어난 아들-즉 여러분과 저희들이 진짜 하나님의 제대로 된 아들임을 생각하며 우리 시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란다.

금요일 10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모들이여, 주님께 그대들의 자녀들을 바치고 그들이 주님께 속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양떼에 속한 어린 양이며 참된 목자의 보호를 받는 자들임을 항상 명심하게 하라. 한나가 주님께 사무엘을 바쳤으며 그에 대하여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라고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이며 사사인 사무엘의 생애에서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저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할 때에 자녀들에게 모든 가능성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143)

“한나가 받은 보상은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가! 그의 모본은 충실함에 대한 얼마나 큰 격려인가! 모든 어머니들에게 말할 수 없이 값있는 기회와 무한히 귀중한 사업이 위임되어 있다. 여인들이 싫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주위에 있는 대수롭지 않은 매일의 의무는 중대하고 고상한 사업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감화를 통하여 세상을 복되게 하는 일이 어머니들의 특권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마음에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머니들은 기쁜 일과 궂은일을 통하여 저희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하늘에 가도록 길을 곧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에만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품성을 거룩한 모본을 따라 형성시킬 수 있다. 세상은 부패한 감화로 가득 차 있다. 유행과 습관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한다. 만일 어머니들이 교훈하고 지도하고 제어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자녀들은 자연히 악을 용납하고 선에서 돌아설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주 구주 앞에 나아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
게 행하오리이까 가르쳐 주소서.’라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모든 어머니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 주신 교훈에 유의하라. 그러면 필요할 때에 그대들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7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인들 가운데 가정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과반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도움을 주기 위해 그대는 얼마나 헌신하겠습니까?

2. 그대가 속한 사회에서는 소위 ‘낙인’을 찍는 그런 문화가 있습니까? 그런 문화로 인하여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그대는 하나님께서도 이런 것들을 나쁘게 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관습에 따라 다른 사람을 낙인찍을 위험이 있습니까? 어떤 환경에서 우리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문화적인 것과 성서적인 것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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