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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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8-26 12:11 조회6,577회 댓글0건본문
9월 4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8분
기억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 교사(리더)는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해 주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9장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3, 15).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들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성경절은 개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들이 정해져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답을 얻고 싶다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택한”자들을 선별하여 사용할 권한을 갖고 계신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복음화 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뜻하는 자들을 일꾼으로 선택하지 못할 법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그 누구의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그러한 행위는 자유의지의 원칙과 전혀 상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 바라신다는 위대한 진리와 전혀 충돌되지 않는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 9:21
|학습목표|
⊙ 깨닫기 : 하나님의 선택의 정당성에 대해 토론한다.
⊙ 느끼기 :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보이는 방법과 보이지 않는 방법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포괄적인 공의를 이해한다.
⊙ 행하기 :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신실하고 순종적인 남은 무리가 되기로 다짐한다.
01. 깨닫기: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일함
A.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셨지만, 그분이 바라시던 대로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 대신 자기 의를 의지하기로 선택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B.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이 그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02. 느끼기: 큰 그림
A. 우리가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사역의 큰 그림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공의롭고 자비로운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03. 행하기: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
A.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유형의 그릇으로 만드시든지 그분이 우리를 의로운 자녀로 삼으시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우리를 내어드리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B.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남은 자손으로서 우리가 피해야 할 어떤 실수를 범했습니까?
C. 우리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이스라엘과 다른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까?
요점: 우리가 약속의 자녀라면 우리는 우리의 공로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대비책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의 계획에 협력해야 한다.
일요일(8월 29일) 바울의 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하나님은 세속주의와 어두움과 우상숭배로 기울어져 있는 세상을 복음화시킬 전도자들을 필요로 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로 모범적인 나라가 되게 해서 다른 국가들이 참 하나님께 이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품성을 드러내서 세상이 자신에게 이끌리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제사 제도의 교훈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열방 중에 높임을 받고, 그분을 바라보는 자들은 모두 살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증가하면 그들의 복도 증가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지경을 넓혀야 했다.
❶ 롬 9:1~12을 읽으십시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롬9:1~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답: 바울은 복음을 거절한 동족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이 분명했다.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일하게 하실 남은 무리들을 여전히 갖고 계셨다. 남은 무리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남은 자들을 선택해 오셨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1)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의 후손 모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의 자손만을 선택하셨다. (2)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을 모두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야곱의 자손만을 선택하셨다.
중요한 것은 유업과 조상이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가 적자(嫡子) 이고, 적통(嫡統)이며, 남은 교회의 신자일 수도 있지만, 언약 밖에서 멸망할 수도 있다. 누가 “약속의 자녀”인지는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롬 9:8).
제한이 없는 구원
“그리스도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영혼에게 미치기에 풍족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큰 선물이신 분을 받아들일 사람의 수효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시대의 소망, 565)
<부가설명> 로마서 9장부터 11장은 선택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말씀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내용이다. 바로 예정론에 단골 메뉴인 셈이다. 여기에는 애굽의 바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예정이라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예정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그릇론이다. 그릇 곧 도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도구, 구원을 증거할 하나님의 그릇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바로 이 복음의 증인으로 택하였다. 애굽의 바로도 당시에는 복음을 증거할 증인으로 택함을 받았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그릇으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릇노릇을 올바르게 하지 않거나 거절할 때 그는 영광에 이르지 못할 것이지만 그가 거절하는 그 일로도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고 복음은 전파된다. 그릇을 택함을 받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지지만 거절할 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릇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그 일을 감당하여 그들의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해야 한다. 모든 성도는 또한 그릇이기도 하다.
교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심은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월요일(8월 30일) 택함을 입음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2~13).
이번 주 교과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로마서 9장은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특정한 개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이 세상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자들이 되기를 바라셨다. 이 성경절에서 에서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하나님은 모든 남녀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그도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❶ 롬 9:14~15을 읽으십시오. 롬 9:12~13과 함께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9: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14,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답: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선택은 긍휼에 근거한 것이고,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결코 에서보다 야곱 을 편애하거나 그에게만 구원의 특혜를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역시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 2: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딛 2:11).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감당할 나라를 선택하실 수 있다. 나라들이 그 역할을 거절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택까지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원한다 할지라도 에서는 메시야의 조상 또는 택한 백성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에서를 구원의 대열에서 배제시켜버리는 독단적인 조치는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모든 이에게 값없이 주어진다. 우리 모두는 멸망이 아닌 구원을 받도록 선택되었다(엡 1:4~5, 벧후 1: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약속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우리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모든 영혼이 영생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 하셨는데 그것은 죄인을 의롭게 하고 순종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심
“만일 에서가 장자로서의 축복을 그 아버지에게서 받았다하더라도 그의 번영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어서 에서의 행동거지에 따라 형통이나 혹은 불행을 주셨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의인 아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가인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명령을 존중하지 않고 그 자신의 타락의 길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가인처럼 버림받을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15)
<부가설명> 앞의 문제의 부가설명에서 말했지만 9장부터 11장은 구원을 위하여 선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릇을 위한 선택에 대한 것이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는 말은 야곱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의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지 야곱은 구원을 얻고 에서와 그 후손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확실하게 전파할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택하신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에서보다는 야곱과 그의 후손이 더 적합한 것을 보셨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적합성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또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이루신다. 그들이 적합하게 했다면 더 잘 됬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하나님의 일은 실패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롬11:11,12)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시지만 택함을 받았던 그릇은 버림을 당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 들은바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어떤 역할을 맡기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화요일(8월 31일) 신비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❶ 롬 9:17~24을 읽으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 말씀에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9:17~24]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답: 토기장이가 함께 그릇을 만들지라도 그릇의 용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선택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이방 백성에게도 부어져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게 하였다.
출애굽 당시 애굽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애굽의 재앙과 이스라엘의 탈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애굽인들과 이방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신임을 계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열방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그분께 나아와 경배하도록 초청하고자 계획된 것이었다.
분명 바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듦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까지 제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는 호소에 대하여 강퍅해진 것이지, 구원 받으라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호소에 강퍅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바로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이 모든 것을 두고 봤을 때, 타락한 우리가 세계와 실재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하여 얼마나 편협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연 속에 담겨있는 신비들도 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의사들이 수술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 불과 150~200년 전이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에 깊이 젖어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에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이 오늘날 우리의 무지를 밝히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음
“바로의 경우에 있어서 그 일은 어떠했던가?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 가운데서 빛이 반복해서 주어질 때마다 그 말은 되풀이된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기로 거절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굳어지고 하나님의 영에 의한 감동을 덜 받게 되었다.”(교회증언 5 권, 119)
<부가설명>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다. 이 구원의 길은 제한이 없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속죄는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기별을 거절하는 반응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9~11장의 내용을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개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구원의 기별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9장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릇론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릇으로 선택되었으면 충성해야 한다. 그것을 거절하면 그 스스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기대하신다.(딤전2:4)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겔18:32)
교훈: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신비에 둘러 싸여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은 어떻겠는가? 그분이 하시는 일과 펼치시는 계획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고 높다.
수요일(9월 1일) 암미: 내 백성
바울은 롬 9:25에서 호 2:23을, 26절에서 호 1:10을 인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결혼을 통해 다른 신을 좇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셨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이름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와 심판을 상징하였다. 로암미라는 셋째 자녀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호 1:9).
그러나 이 와중에서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 후에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거짓 신들을 제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호 2:11~19 참조). 그 때 로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이 암미, 즉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의 시대에 암미는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었다(롬 9:24). 얼마나 분명하고 강력한 증거인가! 복음은 처음부터 온 세상을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으로서 우리가 이 부르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 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바울의 시대나 고대 이스라엘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구원의 복음은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❶ 롬 9:25~29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 구약을 얼마나 인용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이 말씀이 전하고 있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독자들에게 어떤 소망을 주고 있습니까?
[롬9:25~29]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답: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이스라엘은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희망의 씨를 남겨두셨다.
일부 바울의 동족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다(롬 9:2). 그러나 거기에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인간은 약속을 어겨도,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약속을 주장하면, 그 약속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단 한 가지 조건
“구원에 필요한 큰 진리는 백주(白晝)와 같이 명백히 드러났나니 누구든지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 자신의 판단을 따라 행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라도 잘못되거나 저희의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정로의 계단, 89)
<부가설명>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스스로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사단의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니라(로암미)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사람이 내 백성이(암미) 되도록 조처를 취하셨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고잔15:22)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이것을 거절하면 하나님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될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도록 창조된 땅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있을 자리가 없다. 그들은 존재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하나님 백성 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 외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교훈: 로암미였던 우리가 암미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리라는 그분의 약속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목요일(9월 2일) 걸려 넘어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 9:30~32).
❶ 이 말씀의 기별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구원의 중대한 요소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과 행위를 중요시 여김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원의 반석으로 인정한 이방인들은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 이 교훈은 각 개인의 신앙과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바울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것을 놓치고 있는지, 그들이 추구했던 것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동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방인들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용납하셨다. 이방인들은 세속적 관심과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복음이 이르자 그들은 그 가치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자로 영접하였음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다 선언하셨다. 그것은 일종의 믿음의 거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만 걸림돌에 넘어졌다(롬 9:33). 일부를 제외하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분이 오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로마서 9장이 끝나기 전에 바울은 또 다른 구약 말씀을 인용하였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3). 이 장에서 바울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진정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벧전 2:6~8 참조). 걸림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지만 어떻게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는가? 그렇다.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분은 전혀 다른 돌, 즉 “구원의 바위”가 되신다(시 89:26).
믿는 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견고한 기초돌이 되신다. 그들은 반석에 떨어져서 깨어진다.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과 그분께 대한 믿음이 이곳에 나타나 있다. 반석에 떨어져 깨어지는 것은 우리의 독선(獨善)을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역시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599)
<부가설명> 사람은 태어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범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한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고 한 말씀 중에 그 법을 십계명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창조에 대한 말씀이 있다. 불법의 가장 핵심 사실은 창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계명과 그 외의 다른 모든 계명은 자동적으로 소용이 없게 된다. 구원은 이렇게 창조를 거절함으로 존재를 상실하게 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곧 재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담 안에서 존재를 상실하게 된 모든 그의 후손들이 다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를 회복한다. 재창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 의를 의지한다는 말은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아서 생명을 얻겠다는 정신이다. 그것은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살아나겠다는 것과 똑 같다. 가능한 일인가. 이스라엘은 바로 이 불가능한 그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을 행위에 의지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생명을 얻고 존재를 얻는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에 스스로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 산다면 잃어버린바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렇게 자기의 삶을 성령께 맡겨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내가 의로운 일을 하고 완전하도록 삶으로 나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나아가면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예언의 신의 증언은 이 사실을 잘 지적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향상의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올라갈 때에 인간의 힘을 의지하기 시작하며, 얼마 후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시야에서 놓쳐 버린다. 그 결과는 실패 즉 얻었던 모든 것의 상실이다. 도중에 지쳐서 영혼의 원수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계발되었었던 그리스도의 은혜를 빼앗아 가도록 허용하는 사람들의 형편은 참으로 슬프다. 사도는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죄를 깨끗케 하심은 잊었느니라”고 선언한다.”(행적 532) 우리는 진정으로 조심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굴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이를 수 있다.
교훈: 우리가 예수님을 인정하면 구원의 반석에 굳건히 서게 되지만, 예수님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면 걸려 넘어지게 된다.
금요일(9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261~262 “후기 영국의 개혁자들”, 화잇 주석, 출애굽기 4장.
“개인과 한 백성에 대한 택함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택함인데,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택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천국의 축복을 누리도록 분명히 택함을 입었다고 생각하면서 종말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택함이 아니다.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갑옷을 입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사단이 그의 영혼을 앞잡이로 삼으려고 하는 동안에 모든 거룩하지 못한 정욕을 거스려 싸울 수 있도록 그의 수중에 놓아두신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하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깨어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시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해 가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도록 택함을 입었다. 이것이 성경의 택함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53~454)
“인간의 유한한 정신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품성이나 그 사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연구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가장 우둔하고 무지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열심 있고 교양 있는 사람에게도 거룩하신 하나님은 오묘로 가리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지만,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우리는 한없는 자비가 무한한 능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만큼 그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전능하신 손과 사랑으로 충만한 그분의 마음에 의뢰할 뿐이다.”(교육, 16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를 결정하셨다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구원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이런 견해는 우리의 입장과 어떻게 다릅니까?
* 그런 견해가 우리의 입장과 어떻게 다른 것을 묻기 전에 성경의 입장과 어떻게 다른 것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견해를 전 예정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도록 한 사실을 오해한 것일 뿐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구원받도록 예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자체로 상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요15:5)
2.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할과 비교해서 오늘날 재림교회와 그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잘하고 있습니까? 또는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못하고 있습니까? 토론해 보십시오.
* 오늘날 재림교회의 상태가 어쩌면 옛날 이스라엘의 처지와 그렇게 같은지. 이스라엘은 구약성경 외에 탈무드를 가지고 있었듯이, 오늘날 재림교회는 성경전서 외에 예언의 신의 증언을 가지고 있다. 옛 이스라엘이 율법의 행위를 그렇게 강조하고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 것처럼 오늘날 재림교회도 율법을 지켜서 완전해진다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주장이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는 완전과 의를 대체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도사리면 옛 이스라엘의 허물에 빠진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가 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때 예수께서 내 안에서 그분의 삶을 사시는 것이다.(갈2:20, 빌2:13)
기억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 교사(리더)는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해 주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9장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3, 15).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들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성경절은 개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들이 정해져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답을 얻고 싶다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택한”자들을 선별하여 사용할 권한을 갖고 계신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복음화 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뜻하는 자들을 일꾼으로 선택하지 못할 법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그 누구의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그러한 행위는 자유의지의 원칙과 전혀 상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 바라신다는 위대한 진리와 전혀 충돌되지 않는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 9:21
|학습목표|
⊙ 깨닫기 : 하나님의 선택의 정당성에 대해 토론한다.
⊙ 느끼기 :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보이는 방법과 보이지 않는 방법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포괄적인 공의를 이해한다.
⊙ 행하기 :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신실하고 순종적인 남은 무리가 되기로 다짐한다.
01. 깨닫기: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일함
A.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셨지만, 그분이 바라시던 대로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 대신 자기 의를 의지하기로 선택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B.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이 그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02. 느끼기: 큰 그림
A. 우리가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사역의 큰 그림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공의롭고 자비로운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03. 행하기: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
A.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유형의 그릇으로 만드시든지 그분이 우리를 의로운 자녀로 삼으시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우리를 내어드리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B.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남은 자손으로서 우리가 피해야 할 어떤 실수를 범했습니까?
C. 우리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이스라엘과 다른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까?
요점: 우리가 약속의 자녀라면 우리는 우리의 공로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대비책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의 계획에 협력해야 한다.
일요일(8월 29일) 바울의 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하나님은 세속주의와 어두움과 우상숭배로 기울어져 있는 세상을 복음화시킬 전도자들을 필요로 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로 모범적인 나라가 되게 해서 다른 국가들이 참 하나님께 이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품성을 드러내서 세상이 자신에게 이끌리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제사 제도의 교훈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열방 중에 높임을 받고, 그분을 바라보는 자들은 모두 살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증가하면 그들의 복도 증가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지경을 넓혀야 했다.
❶ 롬 9:1~12을 읽으십시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롬9:1~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답: 바울은 복음을 거절한 동족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이 분명했다.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일하게 하실 남은 무리들을 여전히 갖고 계셨다. 남은 무리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남은 자들을 선택해 오셨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1)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의 후손 모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의 자손만을 선택하셨다. (2)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을 모두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야곱의 자손만을 선택하셨다.
중요한 것은 유업과 조상이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가 적자(嫡子) 이고, 적통(嫡統)이며, 남은 교회의 신자일 수도 있지만, 언약 밖에서 멸망할 수도 있다. 누가 “약속의 자녀”인지는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롬 9:8).
제한이 없는 구원
“그리스도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영혼에게 미치기에 풍족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큰 선물이신 분을 받아들일 사람의 수효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시대의 소망, 565)
<부가설명> 로마서 9장부터 11장은 선택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말씀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내용이다. 바로 예정론에 단골 메뉴인 셈이다. 여기에는 애굽의 바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예정이라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예정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그릇론이다. 그릇 곧 도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도구, 구원을 증거할 하나님의 그릇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바로 이 복음의 증인으로 택하였다. 애굽의 바로도 당시에는 복음을 증거할 증인으로 택함을 받았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그릇으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릇노릇을 올바르게 하지 않거나 거절할 때 그는 영광에 이르지 못할 것이지만 그가 거절하는 그 일로도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고 복음은 전파된다. 그릇을 택함을 받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지지만 거절할 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릇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그 일을 감당하여 그들의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해야 한다. 모든 성도는 또한 그릇이기도 하다.
교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심은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월요일(8월 30일) 택함을 입음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2~13).
이번 주 교과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로마서 9장은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특정한 개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이 세상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자들이 되기를 바라셨다. 이 성경절에서 에서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하나님은 모든 남녀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그도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❶ 롬 9:14~15을 읽으십시오. 롬 9:12~13과 함께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9: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14,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답: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선택은 긍휼에 근거한 것이고,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결코 에서보다 야곱 을 편애하거나 그에게만 구원의 특혜를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역시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 2: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딛 2:11).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감당할 나라를 선택하실 수 있다. 나라들이 그 역할을 거절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택까지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원한다 할지라도 에서는 메시야의 조상 또는 택한 백성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에서를 구원의 대열에서 배제시켜버리는 독단적인 조치는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모든 이에게 값없이 주어진다. 우리 모두는 멸망이 아닌 구원을 받도록 선택되었다(엡 1:4~5, 벧후 1: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약속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우리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모든 영혼이 영생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 하셨는데 그것은 죄인을 의롭게 하고 순종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심
“만일 에서가 장자로서의 축복을 그 아버지에게서 받았다하더라도 그의 번영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이어서 에서의 행동거지에 따라 형통이나 혹은 불행을 주셨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의인 아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가인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명령을 존중하지 않고 그 자신의 타락의 길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가인처럼 버림받을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15)
<부가설명> 앞의 문제의 부가설명에서 말했지만 9장부터 11장은 구원을 위하여 선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릇을 위한 선택에 대한 것이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는 말은 야곱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의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지 야곱은 구원을 얻고 에서와 그 후손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확실하게 전파할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택하신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에서보다는 야곱과 그의 후손이 더 적합한 것을 보셨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적합성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또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이루신다. 그들이 적합하게 했다면 더 잘 됬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하나님의 일은 실패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롬11:11,12)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시지만 택함을 받았던 그릇은 버림을 당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 들은바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어떤 역할을 맡기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화요일(8월 31일) 신비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❶ 롬 9:17~24을 읽으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 말씀에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9:17~24]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답: 토기장이가 함께 그릇을 만들지라도 그릇의 용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선택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이방 백성에게도 부어져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게 하였다.
출애굽 당시 애굽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애굽의 재앙과 이스라엘의 탈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애굽인들과 이방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신임을 계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열방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그분께 나아와 경배하도록 초청하고자 계획된 것이었다.
분명 바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듦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까지 제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는 호소에 대하여 강퍅해진 것이지, 구원 받으라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호소에 강퍅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바로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이 모든 것을 두고 봤을 때, 타락한 우리가 세계와 실재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하여 얼마나 편협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연 속에 담겨있는 신비들도 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의사들이 수술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 불과 150~200년 전이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에 깊이 젖어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에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이 오늘날 우리의 무지를 밝히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음
“바로의 경우에 있어서 그 일은 어떠했던가?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 가운데서 빛이 반복해서 주어질 때마다 그 말은 되풀이된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기로 거절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굳어지고 하나님의 영에 의한 감동을 덜 받게 되었다.”(교회증언 5 권, 119)
<부가설명>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다. 이 구원의 길은 제한이 없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속죄는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기별을 거절하는 반응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 9~11장의 내용을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개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읽으면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구원의 기별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9장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릇론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릇으로 선택되었으면 충성해야 한다. 그것을 거절하면 그 스스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기대하신다.(딤전2:4)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겔18:32)
교훈: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신비에 둘러 싸여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은 어떻겠는가? 그분이 하시는 일과 펼치시는 계획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고 높다.
수요일(9월 1일) 암미: 내 백성
바울은 롬 9:25에서 호 2:23을, 26절에서 호 1:10을 인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결혼을 통해 다른 신을 좇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셨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이름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와 심판을 상징하였다. 로암미라는 셋째 자녀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호 1:9).
그러나 이 와중에서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 후에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거짓 신들을 제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호 2:11~19 참조). 그 때 로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이 암미, 즉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의 시대에 암미는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었다(롬 9:24). 얼마나 분명하고 강력한 증거인가! 복음은 처음부터 온 세상을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으로서 우리가 이 부르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 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바울의 시대나 고대 이스라엘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구원의 복음은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❶ 롬 9:25~29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 구약을 얼마나 인용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이 말씀이 전하고 있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독자들에게 어떤 소망을 주고 있습니까?
[롬9:25~29]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답: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이스라엘은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희망의 씨를 남겨두셨다.
일부 바울의 동족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다(롬 9:2). 그러나 거기에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인간은 약속을 어겨도,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약속을 주장하면, 그 약속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단 한 가지 조건
“구원에 필요한 큰 진리는 백주(白晝)와 같이 명백히 드러났나니 누구든지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기 자신의 판단을 따라 행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라도 잘못되거나 저희의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정로의 계단, 89)
<부가설명>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스스로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사단의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니라(로암미)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사람이 내 백성이(암미) 되도록 조처를 취하셨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고잔15:22)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이것을 거절하면 하나님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될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도록 창조된 땅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있을 자리가 없다. 그들은 존재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하나님 백성 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 외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교훈: 로암미였던 우리가 암미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리라는 그분의 약속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목요일(9월 2일) 걸려 넘어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 9:30~32).
❶ 이 말씀의 기별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구원의 중대한 요소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과 행위를 중요시 여김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원의 반석으로 인정한 이방인들은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 이 교훈은 각 개인의 신앙과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바울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것을 놓치고 있는지, 그들이 추구했던 것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동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방인들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용납하셨다. 이방인들은 세속적 관심과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복음이 이르자 그들은 그 가치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자로 영접하였음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다 선언하셨다. 그것은 일종의 믿음의 거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만 걸림돌에 넘어졌다(롬 9:33). 일부를 제외하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분이 오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로마서 9장이 끝나기 전에 바울은 또 다른 구약 말씀을 인용하였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3). 이 장에서 바울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진정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벧전 2:6~8 참조). 걸림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지만 어떻게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는가? 그렇다.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분은 전혀 다른 돌, 즉 “구원의 바위”가 되신다(시 89:26).
믿는 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견고한 기초돌이 되신다. 그들은 반석에 떨어져서 깨어진다.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과 그분께 대한 믿음이 이곳에 나타나 있다. 반석에 떨어져 깨어지는 것은 우리의 독선(獨善)을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역시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599)
<부가설명> 사람은 태어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범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한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고 한 말씀 중에 그 법을 십계명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창조에 대한 말씀이 있다. 불법의 가장 핵심 사실은 창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계명과 그 외의 다른 모든 계명은 자동적으로 소용이 없게 된다. 구원은 이렇게 창조를 거절함으로 존재를 상실하게 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곧 재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담 안에서 존재를 상실하게 된 모든 그의 후손들이 다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를 회복한다. 재창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 의를 의지한다는 말은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아서 생명을 얻겠다는 정신이다. 그것은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살아나겠다는 것과 똑 같다. 가능한 일인가. 이스라엘은 바로 이 불가능한 그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을 행위에 의지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생명을 얻고 존재를 얻는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에 스스로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 산다면 잃어버린바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렇게 자기의 삶을 성령께 맡겨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내가 의로운 일을 하고 완전하도록 삶으로 나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나아가면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예언의 신의 증언은 이 사실을 잘 지적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향상의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올라갈 때에 인간의 힘을 의지하기 시작하며, 얼마 후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시야에서 놓쳐 버린다. 그 결과는 실패 즉 얻었던 모든 것의 상실이다. 도중에 지쳐서 영혼의 원수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계발되었었던 그리스도의 은혜를 빼앗아 가도록 허용하는 사람들의 형편은 참으로 슬프다. 사도는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죄를 깨끗케 하심은 잊었느니라”고 선언한다.”(행적 532) 우리는 진정으로 조심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굴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이를 수 있다.
교훈: 우리가 예수님을 인정하면 구원의 반석에 굳건히 서게 되지만, 예수님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면 걸려 넘어지게 된다.
금요일(9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261~262 “후기 영국의 개혁자들”, 화잇 주석, 출애굽기 4장.
“개인과 한 백성에 대한 택함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택함인데,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택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천국의 축복을 누리도록 분명히 택함을 입었다고 생각하면서 종말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택함이 아니다.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갑옷을 입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사단이 그의 영혼을 앞잡이로 삼으려고 하는 동안에 모든 거룩하지 못한 정욕을 거스려 싸울 수 있도록 그의 수중에 놓아두신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하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깨어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시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해 가도록 택함을 입었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도록 택함을 입었다. 이것이 성경의 택함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53~454)
“인간의 유한한 정신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품성이나 그 사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연구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가장 우둔하고 무지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열심 있고 교양 있는 사람에게도 거룩하신 하나님은 오묘로 가리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지만,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우리는 한없는 자비가 무한한 능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만큼 그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전능하신 손과 사랑으로 충만한 그분의 마음에 의뢰할 뿐이다.”(교육, 16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을 자와 버려질 자를 결정하셨다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구원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이런 견해는 우리의 입장과 어떻게 다릅니까?
* 그런 견해가 우리의 입장과 어떻게 다른 것을 묻기 전에 성경의 입장과 어떻게 다른 것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견해를 전 예정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도록 한 사실을 오해한 것일 뿐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구원받도록 예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자체로 상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요15:5)
2.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할과 비교해서 오늘날 재림교회와 그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잘하고 있습니까? 또는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못하고 있습니까? 토론해 보십시오.
* 오늘날 재림교회의 상태가 어쩌면 옛날 이스라엘의 처지와 그렇게 같은지. 이스라엘은 구약성경 외에 탈무드를 가지고 있었듯이, 오늘날 재림교회는 성경전서 외에 예언의 신의 증언을 가지고 있다. 옛 이스라엘이 율법의 행위를 그렇게 강조하고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 것처럼 오늘날 재림교회도 율법을 지켜서 완전해진다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주장이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는 완전과 의를 대체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도사리면 옛 이스라엘의 허물에 빠진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가 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때 예수께서 내 안에서 그분의 삶을 사시는 것이다.(갈2:20, 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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