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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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8-25 23:44 조회5,907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10년8월28일(안) 제9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hwp (23.0K) 78회 다운로드 DATE : 2010-08-25 23:4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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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8월28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8분
제9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自由)>
<記憶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 1. 로마서 7장까지로, 믿음에서 발생하는 마음속의 모든 오해(誤解)와 갈등은 설명이 끝났다.
불선(不善)한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른다고 해서 믿음이 없거나 거듭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 다음 로마서8장에서는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성령과 더욱 친해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구원(救援)을 얻은 자의 계속적인 성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8장의 요지(要旨)이다.
2. <그리스도 안의 삶은 놀라운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말했다.
일단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지상에 붙들어 두려는 지구 인력의 법칙에서 해방된다.
그것은 지구의 인력이 아주 없어 졌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작용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설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 생명의 영(靈)으로 말미암아 움직여지는 법칙은 나를 세상과 죄로 초월한 높은 곳으로 올려줌으로써
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3.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
이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생활에서 벗어나 영(靈)으로 가득 찬 생활로 들어가자.
로마서 8장에는 “나”라는 말 대신에 “영(靈)”이라는 말이 21번이 나온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전체를 그에게 드려야 하겠다.
이것은 내 쪽에서 할 일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성령으로 채워주신다.
이 영광스러운 말씀의 장(章)은 “정죄함이 없다”는 것으로 시작되어 “끊을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생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주위에 계시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신다.
<要點>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된다.
일요일(8월 22일)
<정죄(定罪)에서 벗어남>
▣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개인적 관계의 친밀을 나타내는 말로써,
그분을 의존 한다거나 단순히 그분의 추종자 또는 제자가 된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연합을 의미 한다. 9요 14:20; 요 15:4-7)
요한은 이 연합을 “저 안에” 거(居)하는 것으로 묘사 한다. (요일 2:5-6, 28절; 3:24; 5:20)
베드로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벧전 3:16; 5:14)
그러나 이 사상은 특별히 바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그것을 개인뿐 아니라 (고전 1:30; 고후 5:17; 엡 1:1절 등)
교회에 적용한다. (갈 1:22; 살전 1:1; 2:14; 살후 1:1).
예수님은 이 연합의 친밀성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강조했다. (요 15:1-7)
이처럼 변화 시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지 않고는, 정죄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화목(和睦)과 칭의(稱義)를 가져다주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675p>
▣ 1.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죄가 없다” 또는 “실패와 좌절이 없다”는 정도의 축복이 아니라,
인생최후의 궁극적 구원(救援)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잠시 세상의 환난과 고통(苦痛)중에서 죄에 휩싸여 살더라도
그 최후의 결과는 예수 안에 있는 한 완전한 해방(解放)이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2. 복음의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가 죄인을 정죄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정죄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요 3:17; 롬 8:3)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복음의 관대한 대책을 받아들이는 자들,
그리고 순종하는 생애에 충실히 헌신하며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칭의(稱義)와 자유를 제공한다.
신자(信者)의 성품에 아직 결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이런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예수님은 이런 의향(意向)과 노력을
사람의 최고의 봉사로 받으시고, 예수님자신의 거룩한 공로로 그 결점을 채워주신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675p>
◎ <매우 소중한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힘이 무력하여질 것을 알므로 이 진리가 명백히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복음교역자, 161)
◎ :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잘못과 모순이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면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월요일(8월 23일)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軟弱)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8:3)
즉 이런 일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일이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롬 8:3).
즉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우리속의 원죄의 충동과 스스로 선택하여 지은 죄를 분리 지정(指定)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절).
즉 본능적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정죄에서 벗어남이라.
▣ 율법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의 뜻대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靈)을 따르는 삶을 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으로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시고,
영(靈)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다.
◎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교육, 29)
◎ 우리의 모본으로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죄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된다.
화요일(8월 24일)
<육신(肉身) 대 영(靈)>
▣ 로마서 8:3-9절 사이에서 “육신(肉身)”이라는 말이 10번이나 나타나는데,
“영(靈)”이라는 말의 상대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육신(肉身)은 악령(惡靈)의 기관인데, 성령을 설명하자니 상대적으로 육신도 자주 들먹여지게 된 것이다.
육신은 죽여야 할 인간의 속성으로서 로마서의 특별한 소재가 되는데,
문맥에서 사람의 어떤 기능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육신과 영(靈)은 그 영향이 엄청나게 다른데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靈)을 따르는 자는 영(靈)의 일을 생각하나니(5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렇게 생각에 따라 사망과 생명으로 나뉘는데 원래부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절)
그 이유는 “육신(肉身)”이란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소질을 말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靈)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靈)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속에 거(居)한다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은
모두 거듭난 자의 심령에 계신 성령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믿음으로 마음속에 모셔 들인 하나님의 영은
영생의 시작이다.” (시대의 소망 388p)
성령은 이렇게 믿음과 구원의 여정에서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개인적인 그리스도이시다.
▣ 육신(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고, 육신의 요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 <육신(肉身)의 생각과 영(靈)의 생각>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란 '있음'인데, '있음'은 과연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뛴다.
어떤 이는 물질의 축적(蓄積)을 통해서,
어떤 이는 명예(名譽)의 얻음을 통해서,
어떤 이는 권력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과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물질도 변화함으로 있다가 없어진다. 명예도, 권세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
또한 놀라운 것은 우리의 육체도 언제인가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함으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생각"이라는 귀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의 방향이 어느 곳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靈)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육신의 생각은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그런 집착은 막다른 골목 즉 사망에 이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못 박음은 우리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
즉 "영(靈)의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집착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 ,그리스도께 속함>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된다.
수요일(8월 25일)
<우리 안에 있는 영(靈)>
▣ 영(靈)안에 있는 삶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죄를 섬기는 육신은 침례 시에 파괴가 된다.
즉 로마서 6장6절에 옛 사람이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침례는 죽음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상징한다.
즉 침례는 새 생명으로서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이시다.
육신의 본성으로는 중간 지대는 없다. (마 12:30)
▣ 로마서 8장의 제목을 굳이 붙인다면 “성령과의 친교”이다.
로마서 8장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로마서 8장>
(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4. 5. 6절)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9절)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절)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영은 의를 인하여 살아 있는 것이라.”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13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15절) “양자의 영”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23절)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
(26절)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
(27절)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성령에 대한 이 같은 말씀을 종합하면 훌륭한 성령론(聖靈論)이 된다.
우선 그 호칭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양자의 영” “성령” “영(靈)”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그 역할이 다양하다는 것을 말하며,
또 성부와도 성자와도 성도와도 완전히 하나가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시사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① “정죄(定罪)에서 해방(解放)시키심”
② “성도(聖徒)를 인도(引導)하심”
③ “의(義)롭게 해주심”
④ “생명(生命)을 주심”
⑤ “우리의 영(靈)으로 더불어 후사(後嗣)임을 증거(證據)하심”
⑥ “영혼(靈魂)을 성숙(成熟)하게 하심”
⑦ “약(弱)한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중보하심” 등등으로
우리의 의(義)와 성화(聖化)와 구원(救援)을 위해 실제로 도와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데,
바울도 그래서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을 하였다.
우리가 자연인 즉 본능적 죄인으로 태어나서.
(1) 율법과 예수님을 앎으로 죄를 더욱 분명히 인식하고
(2) 그리스도의 은혜와 속죄를 바라서 그의 선한 말씀을 순종하기로 선택하고
(3) 그렇게 할 때 점차 하늘에 적합하게 변해 가는데, 이전체적인 과정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반이 우리의 믿음이다.
성령은 지식 이상의 체험을 위한 능력자이며,
활동 이상의 심령 변화를 위한 감화자로서,
우리와 산 교제를 나누시는 하늘가는 인도자 시며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안내자이다.
○ 성령(聖靈)은 히브리어로 “카디쉬 루아흐”라고 하는데 헬라어의 “하기온 프뉴마”와 같다.
둘 다 단어적(單語的)으로는 “신령한 바람”, “거룩한 생기”,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충동”,
“거룩한 능력”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 (요 14:16)라고도 하셨는데,
“옆에 부름 받은 자”, “곁에서 도와주려고 기다리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나가게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시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에 대한 대표적 표현들을 찾아보면,
신령한 기운이나 영감(靈感)같은 감화력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인격자이심을 알 수 있다.
(고후 13:13; 마 28:19) - 삼위 하나님중의 한분
(롬 8:27) - 마음이 있고.
(롬 5:5) - 사랑 할 줄도 아시고,
(고전 12:11) - 의지가 있고,
(엡 4:30) - 근심도 하시고,
(요 14:26) -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주시고,
(요 15:26) -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요 16:8) -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도 하시고,
(요 16:13)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고,
(요 3:5) - 거듭나게 해주시고,
(롬 8:11) - 부활시켜 주시고,
(벧후 1:21) - 영감(靈感)을 주시고,
이 모든 말씀은 성령이 독자적으로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여 일하시며 우리 개인과의 교제도 원하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 <지속적(持續的)인 일>
“때에 따라 기도하며 때에 따라 정직하게 거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대는 그대의 삶 속에 거하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가져야 한다.”(설교와 강연 1권, 399)
◎ :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기로 날마다 결심해야 한다. 만약 그런 결심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목요일(8월 26일)
<입양(入養) 대 속박(束縛)>
▣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하나님의 자녀인양 하지 말 것이며,
어느 교파(敎派)에 속했다고 구원(救援)의 자녀인양 하지도 말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靈)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즉 모든 헌신을 하고도 빚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정신을 가진 그들이다.
<예(例)>
한 울타리 안에 살아도 주인이나 주인의 가족과 파출부(종)로 있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주인이나 주인집의 자녀는 언제나 마음대로 냉장고의 문을 열고 마음대로 음식을 꺼내어 먹을 수도 있고,
집안을 어지려 틀릴 수도 있지만 파출부(종)는 그렇게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다.
주인집의 자녀나 가족은 잠을 자고 싶으면 잠을 자도 되지만 파출부(종)나 손님은
그 집안에서는 자유스럽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주인과의 관계 때문인 것이다.
한 집에 산다고 해도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은 자유스럽지만 파출부(종)는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와 마찬 가지로 혈연이 없어도 입양된다는 것은 그 주인집에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한 집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신분이 바뀌면 삶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자유가 보장 되여 있는 것이다.
▣ 죄를 섬기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사랑과 확신 속에서 자유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 묘사 되지만,
예수님이 없는 삶은 노예의 속박으로 죄의 종인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① 그는 자발적으로 봉사를 한다.
② 그는 두려움 없이 섬긴다. (요일 4:18)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이다.
③ 양자(養子)나 양녀(養女)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한한 가치의 유업을 상속 받는다.
◎ <종이 아니라 자녀임>
“그분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거룩한 특권을 회복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거(證據)하게 되기를 바라신다.”(시대의 소망, 826)
◎ 죄를 섬기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사랑과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
◎ “구속의 경륜은 신자들에게 왕국의 이편에서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자아를 부인하고 극기와 치욕의 길을 가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시련과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 분의 백성들 속에 드러나고 재현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교육받고 연단 받아 후에 얻을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86)
◎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진 사슬은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르기에 충분할 만큼 길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죄 많은 사람을 타락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을 받을 후사가 될 위치에 놓아 주실 수 있다.”(교회증언 7권, 229)
◎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9)
<초점(焦點)>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귀한 특권을 통하여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제9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自由)>
<記憶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 1. 로마서 7장까지로, 믿음에서 발생하는 마음속의 모든 오해(誤解)와 갈등은 설명이 끝났다.
불선(不善)한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른다고 해서 믿음이 없거나 거듭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 다음 로마서8장에서는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성령과 더욱 친해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구원(救援)을 얻은 자의 계속적인 성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8장의 요지(要旨)이다.
2. <그리스도 안의 삶은 놀라운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말했다.
일단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지상에 붙들어 두려는 지구 인력의 법칙에서 해방된다.
그것은 지구의 인력이 아주 없어 졌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힘이 작용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설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 생명의 영(靈)으로 말미암아 움직여지는 법칙은 나를 세상과 죄로 초월한 높은 곳으로 올려줌으로써
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3.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
이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생활에서 벗어나 영(靈)으로 가득 찬 생활로 들어가자.
로마서 8장에는 “나”라는 말 대신에 “영(靈)”이라는 말이 21번이 나온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전체를 그에게 드려야 하겠다.
이것은 내 쪽에서 할 일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성령으로 채워주신다.
이 영광스러운 말씀의 장(章)은 “정죄함이 없다”는 것으로 시작되어 “끊을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생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주위에 계시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신다.
<要點>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된다.
일요일(8월 22일)
<정죄(定罪)에서 벗어남>
▣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개인적 관계의 친밀을 나타내는 말로써,
그분을 의존 한다거나 단순히 그분의 추종자 또는 제자가 된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연합을 의미 한다. 9요 14:20; 요 15:4-7)
요한은 이 연합을 “저 안에” 거(居)하는 것으로 묘사 한다. (요일 2:5-6, 28절; 3:24; 5:20)
베드로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벧전 3:16; 5:14)
그러나 이 사상은 특별히 바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그것을 개인뿐 아니라 (고전 1:30; 고후 5:17; 엡 1:1절 등)
교회에 적용한다. (갈 1:22; 살전 1:1; 2:14; 살후 1:1).
예수님은 이 연합의 친밀성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강조했다. (요 15:1-7)
이처럼 변화 시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지 않고는, 정죄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화목(和睦)과 칭의(稱義)를 가져다주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675p>
▣ 1.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죄가 없다” 또는 “실패와 좌절이 없다”는 정도의 축복이 아니라,
인생최후의 궁극적 구원(救援)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잠시 세상의 환난과 고통(苦痛)중에서 죄에 휩싸여 살더라도
그 최후의 결과는 예수 안에 있는 한 완전한 해방(解放)이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2. 복음의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가 죄인을 정죄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정죄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요 3:17; 롬 8:3)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복음의 관대한 대책을 받아들이는 자들,
그리고 순종하는 생애에 충실히 헌신하며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칭의(稱義)와 자유를 제공한다.
신자(信者)의 성품에 아직 결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이런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예수님은 이런 의향(意向)과 노력을
사람의 최고의 봉사로 받으시고, 예수님자신의 거룩한 공로로 그 결점을 채워주신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675p>
◎ <매우 소중한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힘이 무력하여질 것을 알므로 이 진리가 명백히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복음교역자, 161)
◎ :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잘못과 모순이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면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월요일(8월 23일)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軟弱)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8:3)
즉 이런 일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일이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롬 8:3).
즉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우리속의 원죄의 충동과 스스로 선택하여 지은 죄를 분리 지정(指定)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절).
즉 본능적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정죄에서 벗어남이라.
▣ 율법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의 뜻대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靈)을 따르는 삶을 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으로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시고,
영(靈)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다.
◎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교육, 29)
◎ 우리의 모본으로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죄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된다.
화요일(8월 24일)
<육신(肉身) 대 영(靈)>
▣ 로마서 8:3-9절 사이에서 “육신(肉身)”이라는 말이 10번이나 나타나는데,
“영(靈)”이라는 말의 상대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육신(肉身)은 악령(惡靈)의 기관인데, 성령을 설명하자니 상대적으로 육신도 자주 들먹여지게 된 것이다.
육신은 죽여야 할 인간의 속성으로서 로마서의 특별한 소재가 되는데,
문맥에서 사람의 어떤 기능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육신과 영(靈)은 그 영향이 엄청나게 다른데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靈)을 따르는 자는 영(靈)의 일을 생각하나니(5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렇게 생각에 따라 사망과 생명으로 나뉘는데 원래부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절)
그 이유는 “육신(肉身)”이란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소질을 말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靈)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靈)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속에 거(居)한다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은
모두 거듭난 자의 심령에 계신 성령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며 믿음으로 마음속에 모셔 들인 하나님의 영은
영생의 시작이다.” (시대의 소망 388p)
성령은 이렇게 믿음과 구원의 여정에서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개인적인 그리스도이시다.
▣ 육신(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고, 육신의 요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 <육신(肉身)의 생각과 영(靈)의 생각>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란 '있음'인데, '있음'은 과연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뛴다.
어떤 이는 물질의 축적(蓄積)을 통해서,
어떤 이는 명예(名譽)의 얻음을 통해서,
어떤 이는 권력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과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물질도 변화함으로 있다가 없어진다. 명예도, 권세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
또한 놀라운 것은 우리의 육체도 언제인가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함으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철학자가 고민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생각"이라는 귀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의 방향이 어느 곳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靈)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육신의 생각은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그런 집착은 막다른 골목 즉 사망에 이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못 박음은 우리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
즉 "영(靈)의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집착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 ,그리스도께 속함>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된다.
수요일(8월 25일)
<우리 안에 있는 영(靈)>
▣ 영(靈)안에 있는 삶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죄를 섬기는 육신은 침례 시에 파괴가 된다.
즉 로마서 6장6절에 옛 사람이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침례는 죽음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상징한다.
즉 침례는 새 생명으로서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이시다.
육신의 본성으로는 중간 지대는 없다. (마 12:30)
▣ 로마서 8장의 제목을 굳이 붙인다면 “성령과의 친교”이다.
로마서 8장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로마서 8장>
(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4. 5. 6절)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9절)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절)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영은 의를 인하여 살아 있는 것이라.”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13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15절) “양자의 영”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23절)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
(26절)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
(27절)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성령에 대한 이 같은 말씀을 종합하면 훌륭한 성령론(聖靈論)이 된다.
우선 그 호칭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양자의 영” “성령” “영(靈)”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그 역할이 다양하다는 것을 말하며,
또 성부와도 성자와도 성도와도 완전히 하나가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시사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① “정죄(定罪)에서 해방(解放)시키심”
② “성도(聖徒)를 인도(引導)하심”
③ “의(義)롭게 해주심”
④ “생명(生命)을 주심”
⑤ “우리의 영(靈)으로 더불어 후사(後嗣)임을 증거(證據)하심”
⑥ “영혼(靈魂)을 성숙(成熟)하게 하심”
⑦ “약(弱)한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중보하심” 등등으로
우리의 의(義)와 성화(聖化)와 구원(救援)을 위해 실제로 도와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데,
바울도 그래서 여기서 집중적으로 언급을 하였다.
우리가 자연인 즉 본능적 죄인으로 태어나서.
(1) 율법과 예수님을 앎으로 죄를 더욱 분명히 인식하고
(2) 그리스도의 은혜와 속죄를 바라서 그의 선한 말씀을 순종하기로 선택하고
(3) 그렇게 할 때 점차 하늘에 적합하게 변해 가는데, 이전체적인 과정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반이 우리의 믿음이다.
성령은 지식 이상의 체험을 위한 능력자이며,
활동 이상의 심령 변화를 위한 감화자로서,
우리와 산 교제를 나누시는 하늘가는 인도자 시며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안내자이다.
○ 성령(聖靈)은 히브리어로 “카디쉬 루아흐”라고 하는데 헬라어의 “하기온 프뉴마”와 같다.
둘 다 단어적(單語的)으로는 “신령한 바람”, “거룩한 생기”,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충동”,
“거룩한 능력”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 (요 14:16)라고도 하셨는데,
“옆에 부름 받은 자”, “곁에서 도와주려고 기다리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나가게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시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에 대한 대표적 표현들을 찾아보면,
신령한 기운이나 영감(靈感)같은 감화력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인격자이심을 알 수 있다.
(고후 13:13; 마 28:19) - 삼위 하나님중의 한분
(롬 8:27) - 마음이 있고.
(롬 5:5) - 사랑 할 줄도 아시고,
(고전 12:11) - 의지가 있고,
(엡 4:30) - 근심도 하시고,
(요 14:26) -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주시고,
(요 15:26) -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요 16:8) -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도 하시고,
(요 16:13)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고,
(요 3:5) - 거듭나게 해주시고,
(롬 8:11) - 부활시켜 주시고,
(벧후 1:21) - 영감(靈感)을 주시고,
이 모든 말씀은 성령이 독자적으로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여 일하시며 우리 개인과의 교제도 원하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 <지속적(持續的)인 일>
“때에 따라 기도하며 때에 따라 정직하게 거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대는 그대의 삶 속에 거하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가져야 한다.”(설교와 강연 1권, 399)
◎ :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기로 날마다 결심해야 한다. 만약 그런 결심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목요일(8월 26일)
<입양(入養) 대 속박(束縛)>
▣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하나님의 자녀인양 하지 말 것이며,
어느 교파(敎派)에 속했다고 구원(救援)의 자녀인양 하지도 말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靈)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즉 모든 헌신을 하고도 빚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정신을 가진 그들이다.
<예(例)>
한 울타리 안에 살아도 주인이나 주인의 가족과 파출부(종)로 있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주인이나 주인집의 자녀는 언제나 마음대로 냉장고의 문을 열고 마음대로 음식을 꺼내어 먹을 수도 있고,
집안을 어지려 틀릴 수도 있지만 파출부(종)는 그렇게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다.
주인집의 자녀나 가족은 잠을 자고 싶으면 잠을 자도 되지만 파출부(종)나 손님은
그 집안에서는 자유스럽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주인과의 관계 때문인 것이다.
한 집에 산다고 해도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은 자유스럽지만 파출부(종)는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와 마찬 가지로 혈연이 없어도 입양된다는 것은 그 주인집에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한 집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신분이 바뀌면 삶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자유가 보장 되여 있는 것이다.
▣ 죄를 섬기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사랑과 확신 속에서 자유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 묘사 되지만,
예수님이 없는 삶은 노예의 속박으로 죄의 종인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① 그는 자발적으로 봉사를 한다.
② 그는 두려움 없이 섬긴다. (요일 4:18)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이다.
③ 양자(養子)나 양녀(養女)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한한 가치의 유업을 상속 받는다.
◎ <종이 아니라 자녀임>
“그분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거룩한 특권을 회복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거(證據)하게 되기를 바라신다.”(시대의 소망, 826)
◎ 죄를 섬기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사랑과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
◎ “구속의 경륜은 신자들에게 왕국의 이편에서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자아를 부인하고 극기와 치욕의 길을 가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시련과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 분의 백성들 속에 드러나고 재현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교육받고 연단 받아 후에 얻을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86)
◎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진 사슬은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르기에 충분할 만큼 길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죄 많은 사람을 타락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을 받을 후사가 될 위치에 놓아 주실 수 있다.”(교회증언 7권, 229)
◎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9)
<초점(焦點)>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귀한 특권을 통하여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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