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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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8-21 03:03 조회6,857회 댓글0건본문
8월 28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8분
기억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 활발한 토의를 위해 ‘토의를 위한 질문’을 적극 활용합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8:1~17.
로마서 8장은 로마서 7장에 대한 답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고뇌와 실패 그리고 정죄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로마서 8장에서 정죄는 사라지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와 승리가 찾아왔다.
바울은 “그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로마서 7장의 가련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대는 죄의 종이 되어서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께서 그대를 죄에서 건지시고, 그동안 원했지만 육체가 허락하지 않았던 선을 행할 자유를 주셨다.”고 말한다.
이런 자유를 위하여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와 친족이 되시고,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 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대속자가 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3절).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 안에 실현될 수 있었다(4절). 다시 말하자면 율법의 긍정적인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죄의 극복을 가능하게 만드신 것이다.
지면의 제한 때문에 우리는 로마서 8장을 17절까지만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은 부분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보증으로 가득 차 있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8:1
|학습목표|
⊙ 깨닫기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방법을 요약한다.
⊙ 느끼기 :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 느낌을 묘사한다.
⊙ 행하기 :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한다.
01. 깨닫기: 정죄에서 벗어남
A.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충족되었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영에 굴복함으로 몸과 마음이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02. 느끼기: 아바 아버지
A. 성령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같이 변화시킬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 있는 자녀로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시켜 준다.
03. 행하기: 고난과 영광
A. 가까운 사이는 시련과 행복을 공유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치와 자아부정에 참여하는가?
B. 어떻게 하면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
요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된다.
일요일(8월 22일) 정죄에서 벗어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❶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이 복음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단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는 우리를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상용구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심한 결과 그리스도와 가까운 개인적 유대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개념은 로마서 7장에서 기술된 “지체 속”이라는 개념과 대조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굴복하기 전 사람의 상태를 육신으로 표현했다. 그 사람은 죄의 종이며, 죽음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롬 7:11, 13, 24). 그는 죄의 법을 섬기며, 비참하고 가련한 상황 속에 있다(23~24절).
하지만 그가 예수님께 굴복하면 그의 지위에 즉각적인 변화가 생긴다. 이전에는 범법자로서 정죄를 당했지만, 이제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때문에 마치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서게 된다. 그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말 약점과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의 기록이 그의 삶의 기록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❷ 무엇이 사람을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만듭니까?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답: 구원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지배에서 실제적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롬 8:2에서 “생명의 성령 의 법”이란 말은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은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죄와 사망의 법”과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그리스도의 계획을 의미한다. 죄의 법은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생명과 자유를 가져온다.
매우 소중한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힘이 무력하여질 것을 알므로 이 진리가 명백히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복음교역자, 161)
<부가설명>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 또는 “예수 안에” “내 안에” 등의 표현이 아주 많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8:31)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에 거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다시 부연된다. 요15:1~12을 읽으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과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잘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는 것이요,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예수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자가 된다.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예수 밖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불에 살라지는 처소이다. 그곳은 바로 죄와 사망의 법이 도사리고 있으며 예수 밖으로 나가는 자들을 즉시 사망으로 처리하는 곳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부활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이 이 죄의 환경의 공격을 이기게 하신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순간순간 그렇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므로 예수 안에 있게 된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벧전1:23) 말씀으로 난 사람은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고, 말씀이 양식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실상이다.
교훈: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잘못과 모순이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면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월요일(8월 23일)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율법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지는 못한다. 의식법이나 도덕법은 죄로 인한 정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편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❶ 롬 8:3~4을 읽으십시오. 속성상 율법이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 입니까?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뜻대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삶을 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은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시고, 영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해결책을 제공하셨고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였다. 구원에 관하여 십자가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사신 그리스도의 생애 역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이제 우리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 아래에”(롬 6:14)서는 불가능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행한다고 해서 율법의 준수가 구원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신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갈 5:24)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는 사람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4절에서 “행하다”란 말은 “스스로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표현이다. 여기서 “육신” 이란 단어는 회심 전이든 이후이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암시한다.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런 자유를 결코 누릴 수 없다. 죄에 붙잡혀 있는 자는 원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롬 7:15, 18).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교육, 29)
<부가설명>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육신이 율법을 할 수 없도록 연약한 것이 무엇인가? 태초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도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외모나 품성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시나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애정은 순결하였고 그의 식욕과 감정은 이성(理性)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행복하였다.”(부조 45) 그런데 현재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아니 설령 문자대로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신이 연약한 것이다.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고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아담의 후손과 똑 같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씨로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이 연약한 것, 곧 사망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을 처리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진심으로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며 새 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이다.(롬6:4)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말을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고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의 육신에는 죄의 성질(죄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은 대신 지실 수 없다. 자기도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철저하게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그는 죄성이 있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같은 모양의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에게는 죄와 상관있는 것이 결코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완전한 대속 자가 되실 수 있으셨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속죄할 수 없다. 그의 죄악스럽고 타락한 상태는 인간을 불완전한 제물로, 타락하기 전 아담 보다 덜 가치 있는 속죄희생으로 놓이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고 올바르게 만들었으며 인간의 범죄 후, 인간의 완전하고 순결한 상태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보다 가치 면에서 더 우월한 제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는 희생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충만히 만족시키기 위한 충분히 가치 있는 유일한 희생이었다. 천사들은 죄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율법보다 가치가 덜 있었다. 저들은 율법을 순종해야 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며, 그분 앞에서 섬기기 위한 메신저였다. 저들은 피조물이었으며 유예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의무사항이 놓여있지 않았다. 그는 생명을 내려놓을 수 있고, 다시 취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 그가 한 것은 자발적인 희생이었다. 그의 생명은 인간을 타락한 상태에서 구출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RH, December 17, 1872)
교훈: 우리의 모본으로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죄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된다.
화요일(8월 24일) 육신 대 영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4~5).
❶ 이 말씀이 주고 있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현재 그대의 삶에 대하여 무엇을 말 하고 있습니까?
답: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초청 되었다. 그 동안에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육신의 요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어 카타는 “~을 따르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다”는 말은 “열중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 집단의 사람들은 육신적 욕망을 성취하는데 열중하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은 성령의 일, 즉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을 따르는데 집중한다. 생각이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 집단은 다르게 행동하며 살아간다.
❷ 육신의 생각으로는 무엇을 할 수 없습니까?
[롬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답: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욕망에 집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과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육신의 욕망에 열중하면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황 가운데 있게 된다. 생각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법을 공공연히 범할 수도 있다.
바울이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반복적으로 이 주제로 돌아온다.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떠나서 율법을 지킬 수는 없다.
특히 바울의 목적은 토라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었던 행실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을 정죄하는 동일한 죄를 짓고 있었다(로마서 2장). 이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메시야 없이 그들은 죄의 노예일 수밖에 없고, 그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하여 무지한 유대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대답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주신 것들이 더 이상 구원받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행했던 일들이 모두 선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 속함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부가설명> 창6:3은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난외주에 의하면 육체임으로 범과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옛날 번역에는 범과함으로 육체에 속하였으니 라고 난외에 주를 달았다. 성경이 계시하는 전체적인 사상에 의하면 옛 번역이 성경 사상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에 의하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죄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죽은 행실에 대하여 말한다.(히6:1, 9:14) 죽은 행실이 무엇인가? 썩어져가는 구습이다.(엡4:22)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부자 법관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고,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다.(마19:29, 빌3:6) 그러나 그렇게 완벽하게 율법을 흠이 없도록 지켰어도 그것은 바울을 생명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은 사망으로 인하여 썩어져가는 구습에 대한 것이고, 영의 생각은 거듭난 생명의 생활의 대한 생각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은 영에 있다고 하셨다.(요3:6) 영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가진 거듭난 사람이다. 그들은 성령의 주장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지켜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과 육이 어떤 뜻인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교훈: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된다.
수요일(8월 25일) 우리 안에 있는 영
바울은 계속하여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2가지의 생활방식,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죄와 육신의 본성에 따라 살 것인가를 대조하고 있다. 전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후자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인도한다. 그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자니라”(마 12:30). 이것보다 더 쉽고 명백하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❶ 롬 8:9~14을 읽으십시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집니까?
[롬8:9~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답: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다. 우리가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기로 선택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가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일이 가능하도록 인도하신다.
“육신” 안에 있는 삶과 “영” 안에 있는 삶은 대조되고 있다. “영” 안에 있는 삶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로마서 9장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린다. 그것은 아마도 성령이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일 것이다(9~10절).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롬 6:1~11에서 사용했던 비유를 떠올린다. 비유적으로 “죄의 몸”, 즉 죄를 섬기는 육신은 침례를 받을 때에 파괴된다.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6절). 그러나 침례는 죽음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상징하고 있다. 침례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살아간다. 새로운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옛 자아를 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선택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거두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이 멸망당한 뒤에도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땅에 있는 육체를 죽”이라고 편지하였다(골 3:5).
따라서 회심한 이후에도 죄와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의 차이점은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심으로 이제 사람이 죄를 이길 거룩한 능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지속적인 일
“때에 따라 기도하며 때에 따라 정직하게 거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대는 그대의 삶 속에 거하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가져야 한다.”(설교와 강연 1권, 399)
<부가설명> 바울은 여기서 거듭난 사실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아직 요한복음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령의 영감으로도 알았을 것이고, 니고데모에게 들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요3:6) 영이 된 사람은(롬8:9) 영으로 살게 된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받은 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 육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의 경험들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과 죄가 자극을 하면 쉽게 반응한다. 아담은 육체가 되기 전, 곧 선악과를 먹기 전 완전했을 때, 죄의 경험이 전혀 없었을 때에도 사단의 자극에 반응해버렸다. 그렇거든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의 경험을 가진 우리들이 육체는 더 쉽게 반응할 수 있다. 그래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고,(롬8:13)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갈5:16) 우리 속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도록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거듭난 사람들을 영을 따라 살도록 주장하신다. 우리는 육체의 유혹과 자극들을 성령의 역사에 굴복시켜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였다.(고전15:31)
교훈: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기로 날마다 결심해야 한다. 만약 그런 결심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목요일(8월 26일) 입양 대 속박
❶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롬 8:15. 이 말 씀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고 있습니까? 그 소망은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습니까?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답: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로 묘사되었다. 노예는 속박되어 있다. 그의 삶은 주인에 대한 두려움의 연속이다. 그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참고 일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그럴 일이 없다. 첫째, 그는 자발적으로 봉사한다. 둘째, 그는 두려움 없이 섬긴다. 왜냐하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 쫓”기 때문이다(요일 4:18). 셋째, 양자 또는 양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한한 가치의 유업을 상속받는다.
“노예 정신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애쓰는 율법주의적 신앙 생애를 하려고 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언약 하에 있을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화잇 주석, 롬 8:15~21)
❷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자녀로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답: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그분의 내재하심을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우리의 영접을 확신시켜 준다. 이 일에 있어서 단지 감정만을 내세우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말씀의 빛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었음을 확신시켜 주는 내적 음성이 들릴 것이다.
롬 8:17은 우리가 상속자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는 자녀이며 또한 상속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놀라운 유업을 물려받는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우리의 새로운 신분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고, 그 신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부여된 것이다.
종이 아니라 자녀임
“그분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거룩한 특권을 회복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거하게 되기를 바라신다.”(시대의 소망, 826)
<부가설명> 요한은 자녀라는 말을 “테크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아들이라는 말을 “휘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롬8:14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휘오스”를 썼다. 그런데 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양자가 된 사실을 강조하기보다는 아들의 법적 권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양자라고 번역된 말은 “휘오데시아”인데 아들로 받아들여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테크논은 혈연적 표현 쪽이 강하다면, 휘오스는 법적 권리에 대한 사상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테크논이 되었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들의 법적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혈연적으로나 법적 권리로나 확실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며느리나 사위가 시아버지나 장인에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태어난 자식들은 장성했어도 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된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에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고 속박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신나는 일이고 흥겨운 일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까 신나고, 하나님이 친 아버지가 되어서 그분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으니 흥이 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기쁨 이 흥을 마음껏 누리는 신앙생활을 하자.
교훈: 죄를 섬기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사랑과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
금요일(8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253~256 “후기 영국의 개혁자들”, 시대의 소망, 113 “침례”, 253~256 “가버나움에서”, 671~67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실물 교훈, 95~98 “누룩과 같으니라”, 교회증언 8권, 126~129 “의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구속의 경륜은 신자들에게 왕국의 이편에서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자아를 부인하고 극기와 치욕의 길을 가기를 요구한다. ... 그러나 그런 시련과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 분의 백성들 속에 드러나고 재현된다. ...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교육받고 연단받아 후에 얻을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86)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진 사슬은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르기에 충분할 만큼 길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죄많은 사람을 타락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을 받을 후사가 될 위치에 놓아 주실 수 있다.”(교회증언 7권, 229)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있는 엘렌 G. 화잇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말씀에서 어떤 소망 을 얻게 됩니까? 이런 승리에 대한 약속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진 것이 이렇게 많은데 실제로 우리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우리는 확인하고 확신하여 이 약속들이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도우신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약속들의 궁극적 성취는 재림하실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며, 죄가 우리들을 옥죄어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게 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고통과 실망도 당한다. 그러나 약속은 확실하다.
2. 그대가 실제 매일의 삶에서 “영의 일을 생각”(롬 8:5)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영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영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의 삶 속에서 이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무엇을 보고, 읽고, 무엇에 관하여 생각합니까?
* 영의 일은 일상생활에서 성경의 원칙을 따는 것이며 매 순간마다 예수님 편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과 감정과 감각의 반응과 세상적 욕망이 어렵게 만드는 것들이다. 말씀으로 난 사람들이 영의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은 힘을 잃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대쟁투에는 중간 지대가 없으며, 우리는 이편 아니면 저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냉엄한 진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런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생활방식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 우리는 전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전혀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생명의 생활방식으로 사는 길 외에 다른 생활방식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생활방식을 떠나면 아프고 괴롭고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은 영의 사람을 죽게 된다.
기억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 활발한 토의를 위해 ‘토의를 위한 질문’을 적극 활용합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8:1~17.
로마서 8장은 로마서 7장에 대한 답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고뇌와 실패 그리고 정죄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로마서 8장에서 정죄는 사라지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와 승리가 찾아왔다.
바울은 “그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로마서 7장의 가련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대는 죄의 종이 되어서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께서 그대를 죄에서 건지시고, 그동안 원했지만 육체가 허락하지 않았던 선을 행할 자유를 주셨다.”고 말한다.
이런 자유를 위하여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와 친족이 되시고,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 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대속자가 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3절). 그래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 안에 실현될 수 있었다(4절). 다시 말하자면 율법의 긍정적인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죄의 극복을 가능하게 만드신 것이다.
지면의 제한 때문에 우리는 로마서 8장을 17절까지만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은 부분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보증으로 가득 차 있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8:1
|학습목표|
⊙ 깨닫기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방법을 요약한다.
⊙ 느끼기 :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 느낌을 묘사한다.
⊙ 행하기 :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한다.
01. 깨닫기: 정죄에서 벗어남
A.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충족되었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영에 굴복함으로 몸과 마음이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02. 느끼기: 아바 아버지
A. 성령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같이 변화시킬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 있는 자녀로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시켜 준다.
03. 행하기: 고난과 영광
A. 가까운 사이는 시련과 행복을 공유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치와 자아부정에 참여하는가?
B. 어떻게 하면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
요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된다.
일요일(8월 22일) 정죄에서 벗어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❶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이 복음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단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는 우리를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상용구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심한 결과 그리스도와 가까운 개인적 유대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개념은 로마서 7장에서 기술된 “지체 속”이라는 개념과 대조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굴복하기 전 사람의 상태를 육신으로 표현했다. 그 사람은 죄의 종이며, 죽음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롬 7:11, 13, 24). 그는 죄의 법을 섬기며, 비참하고 가련한 상황 속에 있다(23~24절).
하지만 그가 예수님께 굴복하면 그의 지위에 즉각적인 변화가 생긴다. 이전에는 범법자로서 정죄를 당했지만, 이제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때문에 마치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서게 된다. 그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말 약점과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의 기록이 그의 삶의 기록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❷ 무엇이 사람을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만듭니까?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답: 구원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지배에서 실제적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롬 8:2에서 “생명의 성령 의 법”이란 말은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은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죄와 사망의 법”과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그리스도의 계획을 의미한다. 죄의 법은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생명과 자유를 가져온다.
매우 소중한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힘이 무력하여질 것을 알므로 이 진리가 명백히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복음교역자, 161)
<부가설명>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 또는 “예수 안에” “내 안에” 등의 표현이 아주 많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8:31)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에 거하라고 하셨다. 이 말은 다시 부연된다. 요15:1~12을 읽으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과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잘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는 것이요,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예수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자가 된다.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예수 밖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불에 살라지는 처소이다. 그곳은 바로 죄와 사망의 법이 도사리고 있으며 예수 밖으로 나가는 자들을 즉시 사망으로 처리하는 곳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부활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이 이 죄의 환경의 공격을 이기게 하신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순간순간 그렇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므로 예수 안에 있게 된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벧전1:23) 말씀으로 난 사람은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고, 말씀이 양식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실상이다.
교훈: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 잘못과 모순이 많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면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월요일(8월 23일)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율법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지는 못한다. 의식법이나 도덕법은 죄로 인한 정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편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❶ 롬 8:3~4을 읽으십시오. 속성상 율법이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 입니까?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뜻대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삶을 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예수님은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시고, 영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해결책을 제공하셨고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였다. 구원에 관하여 십자가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사신 그리스도의 생애 역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이제 우리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 아래에”(롬 6:14)서는 불가능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행한다고 해서 율법의 준수가 구원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신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갈 5:24)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는 사람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4절에서 “행하다”란 말은 “스스로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표현이다. 여기서 “육신” 이란 단어는 회심 전이든 이후이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암시한다.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런 자유를 결코 누릴 수 없다. 죄에 붙잡혀 있는 자는 원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롬 7:15, 18).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교육, 29)
<부가설명>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육신이 율법을 할 수 없도록 연약한 것이 무엇인가? 태초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도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외모나 품성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시나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애정은 순결하였고 그의 식욕과 감정은 이성(理性)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행복하였다.”(부조 45) 그런데 현재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아니 설령 문자대로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신이 연약한 것이다.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고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아담의 후손과 똑 같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씨로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이 연약한 것, 곧 사망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을 처리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진심으로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며 새 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이다.(롬6:4)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말을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고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의 육신에는 죄의 성질(죄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은 대신 지실 수 없다. 자기도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철저하게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그는 죄성이 있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같은 모양의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에게는 죄와 상관있는 것이 결코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완전한 대속 자가 되실 수 있으셨다.
“인간은 인간을 위하여 속죄할 수 없다. 그의 죄악스럽고 타락한 상태는 인간을 불완전한 제물로, 타락하기 전 아담 보다 덜 가치 있는 속죄희생으로 놓이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고 올바르게 만들었으며 인간의 범죄 후, 인간의 완전하고 순결한 상태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보다 가치 면에서 더 우월한 제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는 희생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충만히 만족시키기 위한 충분히 가치 있는 유일한 희생이었다. 천사들은 죄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율법보다 가치가 덜 있었다. 저들은 율법을 순종해야 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며, 그분 앞에서 섬기기 위한 메신저였다. 저들은 피조물이었으며 유예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의무사항이 놓여있지 않았다. 그는 생명을 내려놓을 수 있고, 다시 취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 그가 한 것은 자발적인 희생이었다. 그의 생명은 인간을 타락한 상태에서 구출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RH, December 17, 1872)
교훈: 우리의 모본으로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죄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된다.
화요일(8월 24일) 육신 대 영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4~5).
❶ 이 말씀이 주고 있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현재 그대의 삶에 대하여 무엇을 말 하고 있습니까?
답: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초청 되었다. 그 동안에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육신의 요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어 카타는 “~을 따르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다”는 말은 “열중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 집단의 사람들은 육신적 욕망을 성취하는데 열중하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은 성령의 일, 즉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을 따르는데 집중한다. 생각이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 집단은 다르게 행동하며 살아간다.
❷ 육신의 생각으로는 무엇을 할 수 없습니까?
[롬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답: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욕망에 집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과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육신의 욕망에 열중하면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황 가운데 있게 된다. 생각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법을 공공연히 범할 수도 있다.
바울이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반복적으로 이 주제로 돌아온다.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떠나서 율법을 지킬 수는 없다.
특히 바울의 목적은 토라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었던 행실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을 정죄하는 동일한 죄를 짓고 있었다(로마서 2장). 이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메시야 없이 그들은 죄의 노예일 수밖에 없고, 그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하여 무지한 유대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대답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주신 것들이 더 이상 구원받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행했던 일들이 모두 선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 속함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부가설명> 창6:3은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난외주에 의하면 육체임으로 범과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옛날 번역에는 범과함으로 육체에 속하였으니 라고 난외에 주를 달았다. 성경이 계시하는 전체적인 사상에 의하면 옛 번역이 성경 사상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에 의하면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죄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죽은 행실에 대하여 말한다.(히6:1, 9:14) 죽은 행실이 무엇인가? 썩어져가는 구습이다.(엡4:22)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부자 법관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고,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다.(마19:29, 빌3:6) 그러나 그렇게 완벽하게 율법을 흠이 없도록 지켰어도 그것은 바울을 생명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은 사망으로 인하여 썩어져가는 구습에 대한 것이고, 영의 생각은 거듭난 생명의 생활의 대한 생각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은 영에 있다고 하셨다.(요3:6) 영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가진 거듭난 사람이다. 그들은 성령의 주장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지켜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과 육이 어떤 뜻인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교훈: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된다.
수요일(8월 25일) 우리 안에 있는 영
바울은 계속하여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2가지의 생활방식,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죄와 육신의 본성에 따라 살 것인가를 대조하고 있다. 전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후자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인도한다. 그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자니라”(마 12:30). 이것보다 더 쉽고 명백하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❶ 롬 8:9~14을 읽으십시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집니까?
[롬8:9~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답: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다. 우리가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기로 선택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가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일이 가능하도록 인도하신다.
“육신” 안에 있는 삶과 “영” 안에 있는 삶은 대조되고 있다. “영” 안에 있는 삶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로마서 9장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린다. 그것은 아마도 성령이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일 것이다(9~10절).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롬 6:1~11에서 사용했던 비유를 떠올린다. 비유적으로 “죄의 몸”, 즉 죄를 섬기는 육신은 침례를 받을 때에 파괴된다.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6절). 그러나 침례는 죽음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도 상징하고 있다. 침례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살아간다. 새로운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옛 자아를 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선택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거두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이 멸망당한 뒤에도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땅에 있는 육체를 죽”이라고 편지하였다(골 3:5).
따라서 회심한 이후에도 죄와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의 차이점은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심으로 이제 사람이 죄를 이길 거룩한 능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지속적인 일
“때에 따라 기도하며 때에 따라 정직하게 거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대는 그대의 삶 속에 거하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가져야 한다.”(설교와 강연 1권, 399)
<부가설명> 바울은 여기서 거듭난 사실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아직 요한복음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령의 영감으로도 알았을 것이고, 니고데모에게 들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요3:6) 영이 된 사람은(롬8:9) 영으로 살게 된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받은 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 육체는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의 경험들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과 죄가 자극을 하면 쉽게 반응한다. 아담은 육체가 되기 전, 곧 선악과를 먹기 전 완전했을 때, 죄의 경험이 전혀 없었을 때에도 사단의 자극에 반응해버렸다. 그렇거든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의 경험을 가진 우리들이 육체는 더 쉽게 반응할 수 있다. 그래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고,(롬8:13)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갈5:16) 우리 속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도록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거듭난 사람들을 영을 따라 살도록 주장하신다. 우리는 육체의 유혹과 자극들을 성령의 역사에 굴복시켜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였다.(고전15:31)
교훈: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기로 날마다 결심해야 한다. 만약 그런 결심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목요일(8월 26일) 입양 대 속박
❶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롬 8:15. 이 말 씀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고 있습니까? 그 소망은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습니까?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답: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로 묘사되었다. 노예는 속박되어 있다. 그의 삶은 주인에 대한 두려움의 연속이다. 그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참고 일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그럴 일이 없다. 첫째, 그는 자발적으로 봉사한다. 둘째, 그는 두려움 없이 섬긴다. 왜냐하면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 쫓”기 때문이다(요일 4:18). 셋째, 양자 또는 양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한한 가치의 유업을 상속받는다.
“노예 정신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애쓰는 율법주의적 신앙 생애를 하려고 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언약 하에 있을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화잇 주석, 롬 8:15~21)
❷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자녀로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답: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는 그분의 내재하심을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우리의 영접을 확신시켜 준다. 이 일에 있어서 단지 감정만을 내세우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말씀의 빛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었음을 확신시켜 주는 내적 음성이 들릴 것이다.
롬 8:17은 우리가 상속자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는 자녀이며 또한 상속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놀라운 유업을 물려받는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우리의 새로운 신분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고, 그 신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부여된 것이다.
종이 아니라 자녀임
“그분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거룩한 특권을 회복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거하게 되기를 바라신다.”(시대의 소망, 826)
<부가설명> 요한은 자녀라는 말을 “테크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아들이라는 말을 “휘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롬8:14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휘오스”를 썼다. 그런데 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양자가 된 사실을 강조하기보다는 아들의 법적 권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양자라고 번역된 말은 “휘오데시아”인데 아들로 받아들여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테크논은 혈연적 표현 쪽이 강하다면, 휘오스는 법적 권리에 대한 사상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테크논이 되었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들의 법적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혈연적으로나 법적 권리로나 확실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며느리나 사위가 시아버지나 장인에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태어난 자식들은 장성했어도 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된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에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고 속박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신나는 일이고 흥겨운 일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까 신나고, 하나님이 친 아버지가 되어서 그분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으니 흥이 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기쁨 이 흥을 마음껏 누리는 신앙생활을 하자.
교훈: 죄를 섬기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사랑과 확신 속에서 살아간다.
금요일(8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253~256 “후기 영국의 개혁자들”, 시대의 소망, 113 “침례”, 253~256 “가버나움에서”, 671~67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실물 교훈, 95~98 “누룩과 같으니라”, 교회증언 8권, 126~129 “의사들에게 보내는 편지.”
“구속의 경륜은 신자들에게 왕국의 이편에서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자아를 부인하고 극기와 치욕의 길을 가기를 요구한다. ... 그러나 그런 시련과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 분의 백성들 속에 드러나고 재현된다. ...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교육받고 연단받아 후에 얻을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86)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진 사슬은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르기에 충분할 만큼 길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죄많은 사람을 타락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을 받을 후사가 될 위치에 놓아 주실 수 있다.”(교회증언 7권, 229)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있는 엘렌 G. 화잇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말씀에서 어떤 소망 을 얻게 됩니까? 이런 승리에 대한 약속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진 것이 이렇게 많은데 실제로 우리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우리는 확인하고 확신하여 이 약속들이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도우신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약속들의 궁극적 성취는 재림하실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며, 죄가 우리들을 옥죄어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게 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고통과 실망도 당한다. 그러나 약속은 확실하다.
2. 그대가 실제 매일의 삶에서 “영의 일을 생각”(롬 8:5)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영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영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의 삶 속에서 이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무엇을 보고, 읽고, 무엇에 관하여 생각합니까?
* 영의 일은 일상생활에서 성경의 원칙을 따는 것이며 매 순간마다 예수님 편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세상의 유혹과 감정과 감각의 반응과 세상적 욕망이 어렵게 만드는 것들이다. 말씀으로 난 사람들이 영의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은 힘을 잃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대쟁투에는 중간 지대가 없으며, 우리는 이편 아니면 저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냉엄한 진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런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생활방식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 우리는 전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전혀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생명의 생활방식으로 사는 길 외에 다른 생활방식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생활방식을 떠나면 아프고 괴롭고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은 영의 사람을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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