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로마서 7장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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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8-13 09:01 조회6,602회 댓글0건본문
8월 21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7분
기억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 교사(리더)는 “밑줄 그어 오셨나요?”라고 꼭 물어보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7장.
성경에서 로마서 7장만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곳도 드물다. 로마서 7장의 문제에 관하여 재림교 성경주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4~15절의 의미는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들 중 하나였다. 주된 질문은 그런 격렬한 도덕적 투쟁에 대한 묘사가 자서전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구절은 바울의 회심 이전, 이후 중 어느 때의 경험을 언급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죄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말의 의미가 매우 단순한 것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다(롬 7:7~11, 정로의 계단, 19, 교회증언 3권, 475 참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신령한 요구에 직면하여 그것을 깨닫게 되는 각 영혼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66)
성경 학도 사이에는 로마서 7장이 바울의 회심 이전의 경험인지, 이후의 경험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성화, 죄에 대한 승리 그리고 “그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다(롬 8:29).
교과 개요
| 핵심 본문 | 롬 7:22~23
| 학습 목표 |
⊙ 깨닫기 : 우리의 죄된 본성이 하나님의 법과 다투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행위보다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려는 옛 생애가 죽어야 함을 깨닫는다.
⊙ 느끼기 :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려는 노력이 무익함을 느낀다.
⊙ 행하기 : 성령을 따라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죄된 욕망 을 버린다.
01. 깨닫기: 우리의 죄된 본성과의 투쟁
A. 우리의 죄된 본성은 하나님의 법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과 씨름한다. 우리가 성령에 따라 살려면 죄된 본성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 어떤 종류의 행위가 본성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나오는 행동인지 예를 들어보라. 우리의 죄된 본성이 어떻게 이런 행동으로 발전되는가?
02. 느끼기: 선을 행하려는 노력이 무익함
A. 우리가 원해도 선을 행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가?
B. 우리의 속절없는 상태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03. 행하기: 자유롭게 살기
A. 어떻게 우리의 죄된 욕망에 대하여 죽을 수 있는가?
B.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수 있는가?
C. 성령을 따르면 어떤 자유가 주어지는가?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점: 본성적으로 죄된 자아와 욕망에 대하여 죽어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
일요일(8월 15일) 율법에 매임?
❶ 롬 7:1~6을 읽으십시오. 독자들로 하여금 율법과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예증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예증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답: 바울은 혼인관계에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법적 구속력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을 예증으로 사용했다. 바울은 이 예증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얽매인 신앙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새로운 신랑으로 맞이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롬 7:1~6에서 사용된 예증이 문맥 가운데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바울의 논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본문을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서신 전체에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예배 제도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도가 메시야의 도래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 신자 역시 그들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 바울이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였다.
바울의 예증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였다. 사는 동안 여인은 남편에게 법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편이 살아있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이 죽는다면 남편에게 매였던 법적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❷ 바울은 혼인법에 관한 예증을 유대교 체계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롬 7:4~5.
[롬7:4,5]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답: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 안에서 부활한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남편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남편의 죽음으로 여자가 법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 것처럼, 육체에 거하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메시야의 초청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예증은 고대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바울이 의도했던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십계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을 도덕법의 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조차 사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지고 넷째 계명의 폐지 및 변경을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됨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수준에 맞도록 당신의 율법의 요구를 낮추실 수도 없고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죄인은 죄악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고 창조주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사도행적, 425)
<부가설명> 율법에 매인 사람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 형벌이 따르게 된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 형벌규정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의 규정에 매여서 그 율법이 진정으로 가르치는 구주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그 율법에 매인 줄을 끊고 예수께로 돌아오면 그때 비로소 율법을 진정으로 이룰 수 있게 된다.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이 생명의 능력이 되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정신이 생활에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내용은 그것이 도덕법이든지 의문의 율법이든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어떻게 생활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 우리가 벗어나야 할 얽매임은 죄뿐 아니라, 죄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포함된다. 특히 유대인 신자들은 메시야를 통해서 그런 신앙제도가 폐지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월요일(8월 16일) 그럼 율법이 죄란 말인가?
그 동안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율법 전체를 다뤘다. 그런데 롬 7:7에 이르러 갑자기 십계명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은 십계명의 폐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번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 전체이지, 십계명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앞서 유대 사회 제도로부터 예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십계명을 예로 들어 자신의 논점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된 율법 제도에 도덕법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시내산 이전처럼 갈보리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다.
❶ 롬 7:8~11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롬7:8~11]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답: 율법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거룩하며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죄가 그 기회를 통해 살아나 율법의 거룩한 목적을 가리고 우리를 헛된 노력으로 이끌어 더욱 죄 가운데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도덕에 대하여, 시민 생활에 대하여, 제사에 대하여 그리고 건강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율법을 위반할 경우의 처벌 조항도 두셨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죄로 정의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탐심을 죄로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죄란 계신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된 뜻을 모르면 죄에 대한 인식도 없겠지만, 계시된 뜻을 알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며 죽음과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의 다리를 놓아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성취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는 율법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기능은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 구원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 그는 정죄받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 계명이 이르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양심을 깨우칠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자신을 보되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으로 보게 되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고 바울이었다.”(화잇 주석, 롬 7:9)
폐지된 것은 율법이 아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해 준다.”(각 시대의 대쟁투, 46)
교훈: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화요일(8월 17일) 거룩한 율법
❶ 롬 7:12을 읽으십시오. 지금까지 내용을 토대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답: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에 바울은 가능한 한 율법의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 존재 목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즉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것이 제도이든 도덕법이든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과 믿음으로 얻는 그분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다.
❷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바울은 무엇을 탓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 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습니까? 이런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7:13.
[롬7:13]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답: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율법은 단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되도록 가치 있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상황, 즉 “온갖 탐심”을 이루게 된 것에 대하여 율법이 아닌 죄를 탓하였다(8 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의 표준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지만, 바울은 그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을 수밖에 없었다.
❸ 바울을 끔찍한 죄인으로 만들 정도로 죄가 강력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롬7:14,15]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답: 율법이 선을 가르치고 있을지라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육신에 속한 이상, 죄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율법이 그에게 말하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죄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막는다.
이런 예증을 통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함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은혜 아래 있을 때만 승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롬 6:14). 같은 주제가 로마서 7장에서 재차 강조되고 있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죄라는 무자비한 주인의 종이 됨을 의미한다.
율법 앞에서 인간은 죄인일 뿐이다.
“거룩하다고 크게 공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을 들여다보라. 그들이 율법의 원대한 요구를 깨닫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감찰하는 율법의 일을 깨달을 때 죄 없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사도행적, 562)
<부가설명> 롬7:14의 “육신에 속하여(사르키노스 에이미)”라는 말은 창6:3의 “육체가 됨이라(후 바사르)”는 말고 같은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육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그 자체가 죄의 존재라는 뜻이다. 영어는 “I am carnal.” 혹은 “I am of the flash”이라고 번역하였다. 나는 육체라는 뜻이다. 우리말 “육신에 속하여”라는 번역은 아주 잘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육신이라는 말은 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범죄함으로 육체가 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엡4:18)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엡4:22) 그렇게 썩어져가는 것을 죽은 행실이라고 가르친다.(히6:1) 예수 그리스도 없는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율법을 잘 지키면 의에 이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죽은 자들의 죽은 행실을 억제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에게 해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이제 그가 가진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라고 고백한다.(빌3:7~12)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부여되는 영원한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이다.(롬4:13~25)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상태이다.(요5:24,25)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된 것이다.(고전15:22) 이제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능히 지킬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롬8:7~9) 생명이 있을 때 생활이 이루어진다.(롬6:4) 그 생활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 실현되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하는 생명이 바로 예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교훈: 율법은 너무나 선한 것이지만, 메시야 없는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낼 뿐이다. 구원을 바라는 자는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가야 한다.
수요일(8월 18일) 로마서 7장의 사람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17).
❶ 이 말씀에서 어떤 내적 갈등을 볼 수 있습니까?
[롬7:16,17]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답: 우리는 선한 것을 갈망하지만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율법을 거울처럼 사용할 때, 성령은 그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죄인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❷ 바울이 제시했던 요점이 어떻게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까?
[롬7: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답: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없다. 오히려 죄의 능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도록 성령은 가끔 사람들을 “옛 언약”과 같은 경험으로 이끈다. 엘렌 G. 화잇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선언하였다. . . .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깨어버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 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날마다 주님께 드리는 일에 실패함으로 죄를 섬기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갈 길이 멀 뿐이지 자신은 성화의 정상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합리화시킨다. 그리스도께 죄를 가져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는 대신,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 7장의 주장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실상 로마서 7장이 주장하는 것은 죄의 종이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단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정로의 계단, 64)
<부가설명> 로마서 7장은 바울이 회심 전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냐, 회심 후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냐 하는 것이 학자들의 논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반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로마서의 동사(動詞)의 시제(時制)때문이라고 한다. 문장을 이해하는데 동사의 시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7장 전체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반부를 보면 바울은 분명히 자기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했다.(7:22)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은 거듭난 경험이 없을 때는 결코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이 말씀에 의하여 바울이 거듭난 후의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거듭났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다.(7:22,23) 그러나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자꾸 거듭난 자기를 죄의 법 아래로 이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투쟁이다.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생래적인 경험의 법이다. 즉 욕심이나, 두려움이나, 놀라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다 생래적인 것이며, 처하여 사는 세상이 죄의 세상이기 때문에 죄의 법이 지체 가운데 있는 이런 것들을 자극하여 마음의 법 곧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공격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무엇일까? 십계명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면 마음에 십계명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은 것인가? 과연 그런가? 마음에 선한 법을 기억하고 행하려는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아주 많다. 소위 양심적인 의인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십계명의 요구를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르는 것일까? 어쩌면 유대교인들이 재림신자들보다 십계명을 문자적으로는 더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것을 영생을 얻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선이나 악이 무엇일까? 도덕적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대한 것일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핵심적인 것은 도덕적 선행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스스로 도덕적, 또는 율법적 행동을 하려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스스로 행하는 의롭고 선한 행동으로 사망에서 벗어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다 육체의 예법들이다.(히9:10)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강력한 법에 강하게 붙들어 매여 있다. 이것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한 그는 예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선한 악이다. 선악을 구별할 수 없게 하는 아주 선해 보이는 가장 구제하기 힘든 악이다. 왜냐하면 구주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과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속히 예수께 숨어야 하고 성령이 주장하게 해야 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된(롬8:9, 요3:5,6) 사람의 거듭난 영과 함께 능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 실행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의 성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게 되는 것이다.(롬8:7 참고)
교훈: 우리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예수님께서 승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목요일(8월 19일) 사망에서 건져 냄
❶ 롬 7:21~23을 읽으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는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경험해 본 적 이 있습니까?
[롬7: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답: 각자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법과 죄의 법을 동일시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한다(롬 7:25). 죄를 섬기고 그 법에 순종한다는 것은 사망을 의미한다(10~13절). 따라서 죄에게 순종하고 있는 그의 몸을 “이 사망의 몸”이라고 묘사해도 무방한 것이다.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에 관한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이다. 성령의 확신 아래 바울은 이 법에 동의한다. 그의 마음은 이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는 죄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대 마음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그대의 육체가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아마 누구든지 문제가 제시한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사는 비 그리스도인들도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해도 욕망에 이끌려 욕망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건강을 생각하여 담배를 끊으려고 해도 중독 된 사람들은 거기서 헤어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마약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다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유혹하는 세상에서 욕망의 본능이 그를 도덕적인 삶을 못하게 한다. 인생이 파탄에 이른다. 교과의 저자는 이런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7장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경험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예수 없는 사람들도 도덕적인 삶을 추구할 때 똑 같은 상태에 처하는데 그것이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바울이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로마서가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다 육체의 예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탐나는 것들을 멀리하고, 음욕을 없애기 위하여 여자들을 멀리하는 것으로 그들은 의를 이루는 줄 알았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의 썩어져가는 구습만 나타내는 사망의 생명이 처리되지 않는다. 여전히 사망에 매여 있는 것이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결국 그는 유익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해롭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빌3:7~9) 이렇게 깨달았을 때 유대인들의 가장 깊이 빠져있는 문제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도덕적 율법적 선행의 의(義)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유혹으로 그런 노력을 할수록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노력이 예수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❷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답: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후에 왜 이미 벗어난 문제에 대하여 다시 영혼의 갈등을 언급해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어떤 이는 이 감사의 표현을 삽입된 감탄구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감탄사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절규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영광스런 구속(8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울이 앞서 말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죄와의 갈등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내 자신”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는 죄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은 비록 자아가 끊임없이 살아난다 할지라도 승리의 약속을 구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아무도 그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굴복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런 결정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아무도 그대에게 가져다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전부가 되심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부가설명>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인 것은 그분이 바로 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지백체가 완전해도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해도 예수님이 없는 상태는 죽은 상태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나의 전부인 것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 의미를 바르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분이 행하신 의롭고 선한 행위를 내 것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전부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이 행한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아멘.
교훈: 절망 중에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예수께서 주신 약속을 선택하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한다.
8월 20일(금요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212~215 “완전한 법”, 308~310 “신령하신 죄의 담당자”, 치료봉사, 84~85 “심령의 치료”, 452~454 “참지식을 탐구하는 중요성.”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바울은 그의 형제들이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의 크신 영광이 유대인들의 모든 성소 제도에 깊은 뜻을 부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희생제물로 죽으셨을 때 표상은 그 원형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률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영광이 있었다. 이 두 율법은 다 신성의 소인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공의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폐지될 의문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성결케 하는 영을 주실 때, 그 실체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화잇 주석, 고후 3:7~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로마서 7장의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회심 전 바울? 아니면 회심 후 바울? 아니면 로마서 7장은 모든 상황에 관한 것입니까? 그대는 어떤 칭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 나는 로마 7장의 사람은 회심 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회심했으나 인간은 자기 의를 의지하려는 경향에 빠진다. 오늘날 우리 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가 의를 행하려고 애를 쓰다가 잘 안될 때 탄식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로마 7장의 사람의 상태이다. 우리는 8장의 사람으로 속히 넘어가야 한다.
2. 침례를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와 씨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계속 죄를 져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해답은 그 중간쯤에 있는 것입니까?
*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죄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미처 막지 못한 경우이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상태로 태어났다.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세상이, 죄가, 사단이 공격할 때 그것을 잘 막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상처를 입는다. 때로는 아주 깊은 상처를 입는다. 속히 주께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로 인하여 영생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실패하며,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에는 어떤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있습니까?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모든 그릇된 행동과 생각과 경향을 다 고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에는 어떤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 이 두 견해는 다 성경적이 아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죄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가 공격할 때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주님 앞에 속히 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 생명은 우리로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활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비록 로마서 7장의 사람이 누구인지 의견이 다양하지만,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예수님의 신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약속을 배워야 합니까?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기억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 교사(리더)는 “밑줄 그어 오셨나요?”라고 꼭 물어보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7장.
성경에서 로마서 7장만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곳도 드물다. 로마서 7장의 문제에 관하여 재림교 성경주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4~15절의 의미는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들 중 하나였다. 주된 질문은 그런 격렬한 도덕적 투쟁에 대한 묘사가 자서전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구절은 바울의 회심 이전, 이후 중 어느 때의 경험을 언급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죄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말의 의미가 매우 단순한 것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다(롬 7:7~11, 정로의 계단, 19, 교회증언 3권, 475 참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신령한 요구에 직면하여 그것을 깨닫게 되는 각 영혼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66)
성경 학도 사이에는 로마서 7장이 바울의 회심 이전의 경험인지, 이후의 경험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성화, 죄에 대한 승리 그리고 “그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다(롬 8:29).
교과 개요
| 핵심 본문 | 롬 7:22~23
| 학습 목표 |
⊙ 깨닫기 : 우리의 죄된 본성이 하나님의 법과 다투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행위보다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려는 옛 생애가 죽어야 함을 깨닫는다.
⊙ 느끼기 :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려는 노력이 무익함을 느낀다.
⊙ 행하기 : 성령을 따라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죄된 욕망 을 버린다.
01. 깨닫기: 우리의 죄된 본성과의 투쟁
A. 우리의 죄된 본성은 하나님의 법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과 씨름한다. 우리가 성령에 따라 살려면 죄된 본성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 어떤 종류의 행위가 본성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나오는 행동인지 예를 들어보라. 우리의 죄된 본성이 어떻게 이런 행동으로 발전되는가?
02. 느끼기: 선을 행하려는 노력이 무익함
A. 우리가 원해도 선을 행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가?
B. 우리의 속절없는 상태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03. 행하기: 자유롭게 살기
A. 어떻게 우리의 죄된 욕망에 대하여 죽을 수 있는가?
B.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수 있는가?
C. 성령을 따르면 어떤 자유가 주어지는가?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점: 본성적으로 죄된 자아와 욕망에 대하여 죽어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
일요일(8월 15일) 율법에 매임?
❶ 롬 7:1~6을 읽으십시오. 독자들로 하여금 율법과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예증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예증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답: 바울은 혼인관계에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법적 구속력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을 예증으로 사용했다. 바울은 이 예증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얽매인 신앙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새로운 신랑으로 맞이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롬 7:1~6에서 사용된 예증이 문맥 가운데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바울의 논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본문을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서신 전체에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예배 제도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도가 메시야의 도래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 신자 역시 그들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 바울이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였다.
바울의 예증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였다. 사는 동안 여인은 남편에게 법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편이 살아있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이 죽는다면 남편에게 매였던 법적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❷ 바울은 혼인법에 관한 예증을 유대교 체계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롬 7:4~5.
[롬7:4,5]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답: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 안에서 부활한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남편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남편의 죽음으로 여자가 법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 것처럼, 육체에 거하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메시야의 초청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예증은 고대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바울이 의도했던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십계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을 도덕법의 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조차 사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지고 넷째 계명의 폐지 및 변경을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됨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수준에 맞도록 당신의 율법의 요구를 낮추실 수도 없고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죄인은 죄악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고 창조주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사도행적, 425)
<부가설명> 율법에 매인 사람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 형벌이 따르게 된다. 율법은 그 자체로서 형벌규정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율법의 규정에 매여서 그 율법이 진정으로 가르치는 구주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그 율법에 매인 줄을 끊고 예수께로 돌아오면 그때 비로소 율법을 진정으로 이룰 수 있게 된다.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이 생명의 능력이 되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정신이 생활에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내용은 그것이 도덕법이든지 의문의 율법이든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어떻게 생활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 우리가 벗어나야 할 얽매임은 죄뿐 아니라, 죄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포함된다. 특히 유대인 신자들은 메시야를 통해서 그런 신앙제도가 폐지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월요일(8월 16일) 그럼 율법이 죄란 말인가?
그 동안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율법 전체를 다뤘다. 그런데 롬 7:7에 이르러 갑자기 십계명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은 십계명의 폐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번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 전체이지, 십계명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앞서 유대 사회 제도로부터 예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십계명을 예로 들어 자신의 논점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된 율법 제도에 도덕법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시내산 이전처럼 갈보리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다.
❶ 롬 7:8~11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롬7:8~11]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답: 율법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거룩하며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죄가 그 기회를 통해 살아나 율법의 거룩한 목적을 가리고 우리를 헛된 노력으로 이끌어 더욱 죄 가운데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도덕에 대하여, 시민 생활에 대하여, 제사에 대하여 그리고 건강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율법을 위반할 경우의 처벌 조항도 두셨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죄로 정의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탐심을 죄로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죄란 계신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된 뜻을 모르면 죄에 대한 인식도 없겠지만, 계시된 뜻을 알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며 죽음과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의 다리를 놓아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성취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는 율법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기능은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 구원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 그는 정죄받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 계명이 이르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양심을 깨우칠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자신을 보되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으로 보게 되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고 바울이었다.”(화잇 주석, 롬 7:9)
폐지된 것은 율법이 아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해 준다.”(각 시대의 대쟁투, 46)
교훈: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화요일(8월 17일) 거룩한 율법
❶ 롬 7:12을 읽으십시오. 지금까지 내용을 토대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답: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에 바울은 가능한 한 율법의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 존재 목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즉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것이 제도이든 도덕법이든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과 믿음으로 얻는 그분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다.
❷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바울은 무엇을 탓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 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습니까? 이런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7:13.
[롬7:13]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답: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율법은 단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되도록 가치 있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상황, 즉 “온갖 탐심”을 이루게 된 것에 대하여 율법이 아닌 죄를 탓하였다(8 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의 표준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지만, 바울은 그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을 수밖에 없었다.
❸ 바울을 끔찍한 죄인으로 만들 정도로 죄가 강력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롬7:14,15]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답: 율법이 선을 가르치고 있을지라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육신에 속한 이상, 죄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율법이 그에게 말하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죄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막는다.
이런 예증을 통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함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은혜 아래 있을 때만 승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롬 6:14). 같은 주제가 로마서 7장에서 재차 강조되고 있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죄라는 무자비한 주인의 종이 됨을 의미한다.
율법 앞에서 인간은 죄인일 뿐이다.
“거룩하다고 크게 공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을 들여다보라. 그들이 율법의 원대한 요구를 깨닫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감찰하는 율법의 일을 깨달을 때 죄 없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사도행적, 562)
<부가설명> 롬7:14의 “육신에 속하여(사르키노스 에이미)”라는 말은 창6:3의 “육체가 됨이라(후 바사르)”는 말고 같은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육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그 자체가 죄의 존재라는 뜻이다. 영어는 “I am carnal.” 혹은 “I am of the flash”이라고 번역하였다. 나는 육체라는 뜻이다. 우리말 “육신에 속하여”라는 번역은 아주 잘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육신이라는 말은 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범죄함으로 육체가 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엡4:18)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엡4:22) 그렇게 썩어져가는 것을 죽은 행실이라고 가르친다.(히6:1) 예수 그리스도 없는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율법을 잘 지키면 의에 이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죽은 자들의 죽은 행실을 억제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에게 해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이제 그가 가진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라고 고백한다.(빌3:7~12)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부여되는 영원한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이다.(롬4:13~25)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상태이다.(요5:24,25)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된 것이다.(고전15:22) 이제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능히 지킬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롬8:7~9) 생명이 있을 때 생활이 이루어진다.(롬6:4) 그 생활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 실현되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하는 생명이 바로 예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교훈: 율법은 너무나 선한 것이지만, 메시야 없는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낼 뿐이다. 구원을 바라는 자는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가야 한다.
수요일(8월 18일) 로마서 7장의 사람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17).
❶ 이 말씀에서 어떤 내적 갈등을 볼 수 있습니까?
[롬7:16,17]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답: 우리는 선한 것을 갈망하지만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율법을 거울처럼 사용할 때, 성령은 그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죄인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❷ 바울이 제시했던 요점이 어떻게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까?
[롬7: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답: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없다. 오히려 죄의 능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도록 성령은 가끔 사람들을 “옛 언약”과 같은 경험으로 이끈다. 엘렌 G. 화잇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선언하였다. . . .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깨어버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 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날마다 주님께 드리는 일에 실패함으로 죄를 섬기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갈 길이 멀 뿐이지 자신은 성화의 정상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합리화시킨다. 그리스도께 죄를 가져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는 대신,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 7장의 주장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실상 로마서 7장이 주장하는 것은 죄의 종이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단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정로의 계단, 64)
<부가설명> 로마서 7장은 바울이 회심 전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냐, 회심 후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냐 하는 것이 학자들의 논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반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로마서의 동사(動詞)의 시제(時制)때문이라고 한다. 문장을 이해하는데 동사의 시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7장 전체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반부를 보면 바울은 분명히 자기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했다.(7:22)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은 거듭난 경험이 없을 때는 결코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이 말씀에 의하여 바울이 거듭난 후의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거듭났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다.(7:22,23) 그러나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자꾸 거듭난 자기를 죄의 법 아래로 이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투쟁이다.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생래적인 경험의 법이다. 즉 욕심이나, 두려움이나, 놀라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다 생래적인 것이며, 처하여 사는 세상이 죄의 세상이기 때문에 죄의 법이 지체 가운데 있는 이런 것들을 자극하여 마음의 법 곧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공격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무엇일까? 십계명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면 마음에 십계명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은 것인가? 과연 그런가? 마음에 선한 법을 기억하고 행하려는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아주 많다. 소위 양심적인 의인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십계명의 요구를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르는 것일까? 어쩌면 유대교인들이 재림신자들보다 십계명을 문자적으로는 더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것을 영생을 얻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선이나 악이 무엇일까? 도덕적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대한 것일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핵심적인 것은 도덕적 선행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스스로 도덕적, 또는 율법적 행동을 하려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스스로 행하는 의롭고 선한 행동으로 사망에서 벗어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다 육체의 예법들이다.(히9:10)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강력한 법에 강하게 붙들어 매여 있다. 이것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한 그는 예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선한 악이다. 선악을 구별할 수 없게 하는 아주 선해 보이는 가장 구제하기 힘든 악이다. 왜냐하면 구주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과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속히 예수께 숨어야 하고 성령이 주장하게 해야 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된(롬8:9, 요3:5,6) 사람의 거듭난 영과 함께 능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 실행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의 성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게 되는 것이다.(롬8:7 참고)
교훈: 우리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예수님께서 승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목요일(8월 19일) 사망에서 건져 냄
❶ 롬 7:21~23을 읽으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는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경험해 본 적 이 있습니까?
[롬7: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답: 각자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법과 죄의 법을 동일시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한다(롬 7:25). 죄를 섬기고 그 법에 순종한다는 것은 사망을 의미한다(10~13절). 따라서 죄에게 순종하고 있는 그의 몸을 “이 사망의 몸”이라고 묘사해도 무방한 것이다.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에 관한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이다. 성령의 확신 아래 바울은 이 법에 동의한다. 그의 마음은 이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는 죄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대 마음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그대의 육체가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아마 누구든지 문제가 제시한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사는 비 그리스도인들도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해도 욕망에 이끌려 욕망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건강을 생각하여 담배를 끊으려고 해도 중독 된 사람들은 거기서 헤어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마약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다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유혹하는 세상에서 욕망의 본능이 그를 도덕적인 삶을 못하게 한다. 인생이 파탄에 이른다. 교과의 저자는 이런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7장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경험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예수 없는 사람들도 도덕적인 삶을 추구할 때 똑 같은 상태에 처하는데 그것이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바울이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로마서가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다 육체의 예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탐나는 것들을 멀리하고, 음욕을 없애기 위하여 여자들을 멀리하는 것으로 그들은 의를 이루는 줄 알았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의 썩어져가는 구습만 나타내는 사망의 생명이 처리되지 않는다. 여전히 사망에 매여 있는 것이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결국 그는 유익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해롭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빌3:7~9) 이렇게 깨달았을 때 유대인들의 가장 깊이 빠져있는 문제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도덕적 율법적 선행의 의(義)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유혹으로 그런 노력을 할수록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노력이 예수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❷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답: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후에 왜 이미 벗어난 문제에 대하여 다시 영혼의 갈등을 언급해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어떤 이는 이 감사의 표현을 삽입된 감탄구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감탄사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절규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영광스런 구속(8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울이 앞서 말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죄와의 갈등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내 자신”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는 죄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은 비록 자아가 끊임없이 살아난다 할지라도 승리의 약속을 구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아무도 그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굴복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런 결정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아무도 그대에게 가져다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전부가 되심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부가설명>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인 것은 그분이 바로 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지백체가 완전해도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해도 예수님이 없는 상태는 죽은 상태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나의 전부인 것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 의미를 바르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분이 행하신 의롭고 선한 행위를 내 것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전부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이 행한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아멘.
교훈: 절망 중에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예수께서 주신 약속을 선택하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한다.
8월 20일(금요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212~215 “완전한 법”, 308~310 “신령하신 죄의 담당자”, 치료봉사, 84~85 “심령의 치료”, 452~454 “참지식을 탐구하는 중요성.”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바울은 그의 형제들이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의 크신 영광이 유대인들의 모든 성소 제도에 깊은 뜻을 부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희생제물로 죽으셨을 때 표상은 그 원형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률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영광이 있었다. 이 두 율법은 다 신성의 소인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공의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폐지될 의문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성결케 하는 영을 주실 때, 그 실체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화잇 주석, 고후 3:7~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로마서 7장의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회심 전 바울? 아니면 회심 후 바울? 아니면 로마서 7장은 모든 상황에 관한 것입니까? 그대는 어떤 칭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 나는 로마 7장의 사람은 회심 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회심했으나 인간은 자기 의를 의지하려는 경향에 빠진다. 오늘날 우리 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가 의를 행하려고 애를 쓰다가 잘 안될 때 탄식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로마 7장의 사람의 상태이다. 우리는 8장의 사람으로 속히 넘어가야 한다.
2. 침례를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와 씨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계속 죄를 져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해답은 그 중간쯤에 있는 것입니까?
*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죄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미처 막지 못한 경우이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상태로 태어났다.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세상이, 죄가, 사단이 공격할 때 그것을 잘 막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상처를 입는다. 때로는 아주 깊은 상처를 입는다. 속히 주께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로 인하여 영생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실패하며,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에는 어떤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있습니까?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모든 그릇된 행동과 생각과 경향을 다 고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에는 어떤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 이 두 견해는 다 성경적이 아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죄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가 공격할 때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주님 앞에 속히 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 생명은 우리로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활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비록 로마서 7장의 사람이 누구인지 의견이 다양하지만,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예수님의 신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약속을 배워야 합니까?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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