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과 죄를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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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8-05 23:12 조회5,60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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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7과 죄를 이김
8월 14일
일몰: 오후 7시 26분
도입)
우리가 한주 동안 죄를 범하지 않고 두주 동안도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삼 주, 사 주, 오 주,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좋아 졌고 이제 변했고 진보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당신에 대해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당신을 한번 시험 하실 것이며 당신으로 한번 실패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주님으로 대치되어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변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인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시는 것이고 만일 당신이 온유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온유한 것이며, 당신이 거룩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거룩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이기고 며칠이 지난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고, 당신은 영원히 당신이고,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김’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성경적 기독교=죽고(자아)사는 것(그리스도의 정신으로)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성경66권은 무엇을 말하느냐? 죽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죽어야 살기 때문인 것이다. 죄사함이란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이다. 즉 내 안의 짐승의 속성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
기억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 안식일학교 홈페이지(www.sspm.or.kr)에 다양한 교과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6장, 요일1:8~2: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한 후, 바울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죄를 계속 지으면 안 되는 것인가?
로마서 6장은 위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바울은 여기서 흔히 “성화”라 부르는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죄를 극복하고 점점 그리스도의 품성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나 로마서는 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롬 15:16에 “거룩하게 되어”라는 말이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만들다”는 말은 보통 하나님께 “성별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과거에 완료된 행위를 의미할 때가 많다.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행 20:32)라는 구절이 좋은 예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는 개념상 하나님께 성별된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성화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지 성화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죄의 극복”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부분을 살펴 볼 것이다.
일요일
8월 8일
은혜가 넘침
도입)
내 안에 있는 죄의 역사들은 구원받은 내 안에서도 요동을 치고 있음을 깨달으며 연약한 나를 주님께 고백 드릴 수밖에 없다. 때때로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교묘히 감추고 변명하고 포장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죄인지도 모르고 또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너무나도 실망하고 또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실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을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게 된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들이며 죄의 습관에 깊이 빠져 있는 자들인가를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하게 깨닫게 된다. 내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품고 살면서도 이것이 나의 죄임을 알지 못하고, 권위에 대해서 항상 반발하고 내 안에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우리가 아닌가? 이런 죄인의 삶에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한 실망스러움 들이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말씀으로 다시 다듬어져야한다는 절실함을 가지게 만들고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들의 죄가 말씀 앞에서 하나 둘 나타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분명한 역사로서 내 안에 자리를 잡으며 주님만이 내게 절대적인 필요임을 알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변하며 책임감 없이 자신의 필요와 안일과 유익만을 위하여 쉽게 변하고 도망치고 움츠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진실 되게 볼 수만 있다면 역겨움과 추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게 허락하신 자리들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을 하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 무책임 이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내 안에 있는 분노를 따라서 움직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죄악이 아닌가? 연약한 자의 편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동조할 그 누군가를 찾고 싶은 것은 인간의 죄악의 본성이 아닌가? 매 순간 끊임없이 쏟아내는 죄악의 쓴뿌리들이 내게 있어서 나를 그 사슬의 매임으로 몰아내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이 싸움이 나를 너무나도 피곤함 가운데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믿기는 이 싸움에서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하신 나의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어서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5:20에서 바울은 매우 인상적인 문장을 남겼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바울의 요점은 죄가 얼마나 많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죄가 너무 많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큰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죄가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❶ 롬 6:1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어떤 식의 논리를 다루고 있습니까? 롬 6:1 이후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한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 사람은 왜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논조를 이어가고 있다. 시작부터 그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하고 있다.
침례는 하나의 장례를 의미한다. 무엇을 장사지내는가? 옛 사람, 즉 죄를 지은 몸, 죄의 지배를 받은 몸을 장사지낸다. 이 “죄의 몸”은 멸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다. 죄의 몸이 파괴됐다면 죄의 왕노릇은 이제 끝난 것이다. 물에서 올라온 사람은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 새 사람이다. 그는 이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다.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침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다시는 그 지배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
물론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마자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께 대하여 살아야 함을 생각하며 투쟁해야 한다. 승리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그래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침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더욱 강력함을 믿는다. 우리는 이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죄가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지해야 한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일본의 신도든,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은혜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이런 종교 대부분은 개인적인 노력이나 자기 부인, 혹은 덕행으로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를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주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 우리를 양육시키시고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의 기초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 베푸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 준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이 은혜이다. 자신을 주셔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양육 받으며 살아간다.
월요일
8월 9일
죄가 인격화 됨
도입)
조직신학에서 원죄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인간의 죄악을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실증적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원죄 개념은 두 가지 이유에서 토대가 취약하다. 하나는 어떻게 자신이 실제로 범하지 않은 죄까지, 즉 아담의 죄까지 책임을 져야하는가, 하는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결국 인간이 원죄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면 실제적인 죄의 책임을 인간에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성경과 기독교가 죄에 관해서 문제를 삼는 것은 단 하나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죄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 살아있다. 이게 곧 인간에게 놓여 있는 자기분열의 기초이다. 죽어야만 해결되는 그 죄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분열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 예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것이 곧 칭의론이다. 그런데 칭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죄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칭의는 실체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이다. 죽음을 통해서 죄가 해방될 때까지,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 세계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살아간다.
❶ 롬 6:12의 말씀은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지배하다”는 단어에서 보는 것처럼 죄는 여기서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배하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왕이 되다” 또는 “왕의 역할을 하다”는 의미이다. 죄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고자 한다.
바울은 죄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는 의롭다 칭함을 얻는 자가 죄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통치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의지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그대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곧 의지의 참 힘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그대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는 그대들 안에서 그대들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온 성질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대들의 애정은 그에게 중심을 두게 되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와 조화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47)
롬 6:12에 “사욕”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죄가 지배할 때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 그것과 싸우려고 할지라도 욕망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죄는 마치 난폭한 독재자와 같아서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오직 믿음, 오직 승리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에게서 이 폭군을 몰아낼 수 있다.
롬 6:12에서 “그러므로”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10~11절로 돌아가게 한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간다.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계신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는 동시에 죄를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교훈: 죄는 우리 삶을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우리는 그것의 지배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가적용)
바울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우리의 삶도 바꾸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예수님 밖에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사탄이 이끄는 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때 유명한 깡패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고서 거듭난 이야기이다. 목사님이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자신이 죽었다고 하는 부고장을 만들어서 돌렸다. 이런 내용이다.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가 죽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괴롭혔던 것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저도 예수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꼭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렇게 매일같이 동네를 돌면서 열심히 전도를 했다. 한 번은 아주머니 한분이 설거지를 하다가 김익두 목사님이 정말로 달라졌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바가지에 찬 물을 담아가지고 얼굴에다 확 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나 보자." 그러자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내가 죽었으니까 아주머니가 그대로 살아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죽지 않았다면 아주머니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화요일
8월 10일
법 아래에?
도입)
법 아래서의 삶(신앙생활)은 한마디로 “내가 법을 지켰다는 것을 의(義)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이다.” 그러다보니 법 아래서의 신앙생활로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교만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그것이 교만인줄 꿈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법 아래서의 삶은 자꾸만 어떤 일을 하고나서 댓가를 바라는 삶이다. 가령, “나는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사후에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보내주실 것이다.”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상급(영생)을 많이 주실 것이다”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돌봐 주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의에 젖어서 이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❶ 롬 6:14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십계명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6:14은 로마서에서 중요한 성경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재림교인들에게 자주 제시하는 성경절이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죄가 존재하는 이상 도덕법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죄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로마서의 앞부분과 6장을 읽었다면, 바울이 죄의 실체에 관하여 논하다가 갑자기 “그런데 죄를 정의하는 십계명은 폐지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법 아래”란 수많은 인간의 제도와 규례를 포괄하고 있었던 당시의 유대 사회 제도 아래라는 뜻이다.
반대로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율법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고 성령이 그의 걸음을 인도함으로 죄를 극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으며,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오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그의 삶의 보좌에서 죄가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롬 6:14의 전체 배경이며 그 안에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법 아래”라는 말을 너무 제한적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은혜 아래”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다면 그는 은혜가 아닌 정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은혜 아래”라는 것은 율법이 불가피하게 죄인에게 선고한 정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거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하여 죽음으로 이제 율법이 가져오는 죽음의 정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이다.
교훈: 우리가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산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가적용)
은혜 아래서의 삶은 법아래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다. 은혜 아래서 사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죄로 죽은 사람이다. 죄로 죽은 사람은 자기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죽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하고나서 어떤 댓가를 바라거나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죄로 죽은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주어서 다시 살려주셨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댓가를 바라겠는가?” 가령,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 수십억의 헌금을 했다하자 그럼 그가 하나님에게 어떤 댓가를 바래야 하겠는가? 또 전도를 많이 했다하자 그가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바래야 하겠는가? 그가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돌봐 주었다고 하자! 그 댓가를 하나님에게 바래야 하겠는가? 죄로 죽었어야 할 인간이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되었는데, 그가 무슨 일을 했다하여 하나님에게 어떤 댓가를 바란다면 그는 이미 은혜를 망각한 자이거나, 결코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삶이다. 또한 은혜 아래서 사는 자는 법아래서 사는 자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법아래서 사는 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자신을 뽐내지만, 은혜 아래서 사는 자는 오직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준 주님만 바라볼 뿐,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절대 알리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오직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법아래 사는 사람들은 자기 열심,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어떻게든 자기 의를 드려내려고 한다. 이밖에도 은혜 아래 사는 자와 법아래서 사는 자의 차이는 수없이 많지만 일일이 열거하기가 부족할 정도이다.
수요일
8월 11일
씨름하고 있는 두 주인
도입)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먼저 선행된다.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고, 더 중대한 사항인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의지나 행동의 결과들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 안에서 수많은 정보와 자료가 정리되고 가장 유용한 결과를 끄집어내게 된다. 서로가 엇비숫한 가치를 드러내면 우리의 마음은 싸움터가 된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 아니면 나보다는 더 중대한 일들을 놓고 갈등하게 된다. 시간과 소유물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대상을 숙고해야 한다. 매일 일어나는 내면에서의 전쟁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싸움터와 같다. 하루에도 수많은 적들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아니면 우리의 편에서 더 나은 것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돕는 하늘의 용병들도 수없이 방문한다. 이 싸움은 힘에 대한 것이며 가치에 대한 것이며 영적 유익에 대한 것이며 유효성에 대한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 모든 힘과 가치와 유익 그리고 유효성은 그리스도 안에만 거한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내면은 혼란과 내리지 못한 결정에 대한 갈등이 지속될 것이다.
❶ 롬 6:16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그의 주장이 흑백논리처럼 분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뚜렷하게 드러난 대조적인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사는 삶이 죄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의 삶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이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승리를 줄 수 있다.
신하를 다스리는 왕으로 죄를 의인화 했던 것처럼, 바울은 이제 종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으로서 죄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이 어떤 주인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섬길 수도 있고, 영생에 이르는 의를 섬길 수도 있다. 중간지대는 없으며 절충의 여지도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영생하든지 영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❷ 롬 6:17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16절의 말씀을 어떻게 확대시키고 있습니 까?
여기서 순종이 어떻게 올바른 교리와 연결되고 있는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교리”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가 여기서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원칙들을 배우고 순종하였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올바른 교리를 “마음으로 순종”할 때, 그것은 그들을 “의의 종”이 되도록 이끈다(18절).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상, 교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거짓 교리에 대하여 상당히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교훈: 우리가 의의 주인을 섬기기 원한다면 올바른 교리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과연 의의 주인이신가? 예수님은 죄를 범한자의 심판자가 아니라 변호사이다. 나는 예수님이 심판자가 되어서 검사가 되서 나대신 말씀의 칼을 들고 심판해주길 바랬는데 ,그리고 그것이 의로우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다가 본 예수님은 얼마나 불의에 가득찬 모습인가. 죄진 자의 편에 서서 죄진 자를 옹호하시고 용서하시고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유다 안에 예수님이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셨던 세계는 공의로운 세계가 아닌가?
불의한자를 심판하시고 공의를 드러내는 세계 아마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던 자신들을 그로마의 압제아래에서 건져줄 메시야를 고대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르게 예수님은 초라하게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 오신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의롭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의롭다는 표현을 쓰신다. 왜 그럴까? 옳고 그른 것을 나누고 거기서 옳은 것이 의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의라는 생각이 든다. 믿음의 중심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의이고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의이다. 야곱과 에서가 그러하고 다말이 그러하고 라합이 그러하다. 죄를 범한 불의한자를 믿음으로 사랑의 눈으로 보시는 의로우신 예수님이다.
목요일
8월 12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도입)
우리의 관념 속에는 우리가 예수의 도움을 받아 거룩하게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님이 거룩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만 주님을 보기 때문에 주님이 떡으로 우리를 만족시키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거룩을 구하는데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거룩을 구하고 거룩케 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힘주시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이 아닌 예수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은혜, 구원, 치료 등등을 우리의 외적이고 객관적인 자리에 둘 때,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의 목적에 들어갈 수 없음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심으로 어떤 일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요14장) 그리고 예수 자신이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과 의와 구속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세우셨다고 하지 않고 주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이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할 때, 그 육신의 연약함을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이용하셔서 우리 속에 그 분의 인격을 더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가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가 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 형성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는 그 무엇 즉, 신념과 자아의 여러 항목들을 깨뜨리신다. 우리에게 물려받은 천연적인 인내가 있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파쇄 하신다. 그래서 나에게 인내가 없는 상태로 만드셔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내가 되게 하신다. 사실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을 보면 그리스도 인격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다 없어짐을 보게 된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내가 그 인줄( I AM : 나는...이다) 믿지 아니하면 우리가 죄 가운데 죽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한다.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고 다 죄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교만을 십자가로 가져갈 때 예수가 겸손이 되신다. 미움을 죽음에 둘 때 그가 우리 속에 사랑이 되신다. 이 비밀이 크다.
❶ 지금까지 로마서 6장에서 공부한 것을 기억하면서 19~23절까지 남은 절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아래에 정리해 보십시오.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 진리를 그대의 삶에 실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쟁점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설명은 그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한다. “연약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허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능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의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새로운 주인 예수께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맡기기로 선택해야 한다.
롬 6:23은 죄의 형벌, 즉 범법의 대가는 죽음임을 말해준다. 죄의 형벌이 죽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뿐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죄는 자기 종들을 속이고 실컷 부려먹다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주인과 같다.
두 주인의 비유에서 바울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다른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양자택일해야 한다. 중간지대는 없다. 동시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죄의 통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며, 죄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우리에게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죄가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리라는 승리의 약속을 매일 주장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죄를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이 폭군은 수치스런 일을 행한 대가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폭군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의를 섬기는 자는 바르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행한다. 그들의 행위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새로운 경험에서 비롯된 열매로서 나타난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필요한 이유와 구원의 관점을 완전히 잃고 있는 것이다.
교훈: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해져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구원의 주님께 맡기면 죄는 우리에게서 지배력을 잃게 된다.
부가적용)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연약하다는 것은 병들기 쉬운 나약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에게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연약함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을 향해서 갈 수 없고 구원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 자체가 연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믿음이 있는 모습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이 의로워 질 수 있고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고 부끄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연약하다”는 말조차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요구하는 모습과 거리가 멀어 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며, “아, 나는 역시 연약해서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구나!” 그리스도를 더 바라보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약하니까 할 수 없지 뭐!”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끝까지 죄를 피해보려고 하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한들 그것은 불법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연약함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느냐는 것이다. 연약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이 강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그 가운데서 짓게 된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죄짓지 않는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아는 인간이 되기를 원하신다. 죄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은 겉이 아닌 속 내용을 볼 줄 아는 눈이 뜨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죄를 죄로 느끼는 마음, 죄를 죄로 아는 그 마음의 진실됨을 용서하시고 이러한 인간됨을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라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화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을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에게 종으로 드려서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연약해서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금요일
8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05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교회증언 3권, 365 “청년들에게 호소함.”
“그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고 있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품성을 얻게 하시려고 하신다.”(시대의 소망, 123)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직접 약속하였고, 지성과 감성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화된 인간 도구들과 협력하기로 맹세한다.”(화잇 주석, 롬 6:1~4)
“믿음과 행실이 일치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악한 자의 자녀들은 그들 자신의 주인의 종이다. 누구를 섬기든지 그 섬기는 자의 종이 된다. 그들이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늘 왕의 종들이, 사단의 종들이 참여하는 오락과 쾌락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그들이 그런 오락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흔히 말할지라도 해가 없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분리시켜 당신 앞에서 정결하게 하시고자 신성하고 거룩한 진리를 계시하셨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교회증언 1권, 4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죄를 극복하리라는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 우리 마음이 부패되어 있다면 뭔가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2.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간증해 보십시오.
3.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일에 의존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그분 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간과한다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구원의 두 측면을 함께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월 14일
일몰: 오후 7시 26분
도입)
우리가 한주 동안 죄를 범하지 않고 두주 동안도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삼 주, 사 주, 오 주,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신이 좋아 졌고 이제 변했고 진보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당신에 대해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당신을 한번 시험 하실 것이며 당신으로 한번 실패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변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주님으로 대치되어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변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인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시는 것이고 만일 당신이 온유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온유한 것이며, 당신이 거룩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거룩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이기고 며칠이 지난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고, 당신은 영원히 당신이고,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김’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성경적 기독교=죽고(자아)사는 것(그리스도의 정신으로)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성경66권은 무엇을 말하느냐? 죽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죽어야 살기 때문인 것이다. 죄사함이란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이다. 즉 내 안의 짐승의 속성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어야 한다.
기억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 안식일학교 홈페이지(www.sspm.or.kr)에 다양한 교과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6장, 요일1:8~2: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한 후, 바울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죄를 계속 지으면 안 되는 것인가?
로마서 6장은 위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바울은 여기서 흔히 “성화”라 부르는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죄를 극복하고 점점 그리스도의 품성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나 로마서는 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롬 15:16에 “거룩하게 되어”라는 말이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만들다”는 말은 보통 하나님께 “성별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과거에 완료된 행위를 의미할 때가 많다.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행 20:32)라는 구절이 좋은 예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는 개념상 하나님께 성별된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성화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지 성화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죄의 극복”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부분을 살펴 볼 것이다.
일요일
8월 8일
은혜가 넘침
도입)
내 안에 있는 죄의 역사들은 구원받은 내 안에서도 요동을 치고 있음을 깨달으며 연약한 나를 주님께 고백 드릴 수밖에 없다. 때때로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교묘히 감추고 변명하고 포장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죄인지도 모르고 또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너무나도 실망하고 또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실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을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게 된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들이며 죄의 습관에 깊이 빠져 있는 자들인가를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하게 깨닫게 된다. 내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품고 살면서도 이것이 나의 죄임을 알지 못하고, 권위에 대해서 항상 반발하고 내 안에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우리가 아닌가? 이런 죄인의 삶에서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한 실망스러움 들이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말씀으로 다시 다듬어져야한다는 절실함을 가지게 만들고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들의 죄가 말씀 앞에서 하나 둘 나타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분명한 역사로서 내 안에 자리를 잡으며 주님만이 내게 절대적인 필요임을 알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변하며 책임감 없이 자신의 필요와 안일과 유익만을 위하여 쉽게 변하고 도망치고 움츠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진실 되게 볼 수만 있다면 역겨움과 추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게 허락하신 자리들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을 하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 무책임 이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내 안에 있는 분노를 따라서 움직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죄악이 아닌가? 연약한 자의 편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동조할 그 누군가를 찾고 싶은 것은 인간의 죄악의 본성이 아닌가? 매 순간 끊임없이 쏟아내는 죄악의 쓴뿌리들이 내게 있어서 나를 그 사슬의 매임으로 몰아내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이 싸움이 나를 너무나도 피곤함 가운데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믿기는 이 싸움에서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하신 나의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어서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5:20에서 바울은 매우 인상적인 문장을 남겼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바울의 요점은 죄가 얼마나 많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죄가 너무 많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씀은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큰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죄가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❶ 롬 6:1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어떤 식의 논리를 다루고 있습니까? 롬 6:1 이후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한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 사람은 왜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논조를 이어가고 있다. 시작부터 그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하고 있다.
침례는 하나의 장례를 의미한다. 무엇을 장사지내는가? 옛 사람, 즉 죄를 지은 몸, 죄의 지배를 받은 몸을 장사지낸다. 이 “죄의 몸”은 멸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다. 죄의 몸이 파괴됐다면 죄의 왕노릇은 이제 끝난 것이다. 물에서 올라온 사람은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는 새 사람이다. 그는 이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다.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침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다시는 그 지배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
물론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마자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께 대하여 살아야 함을 생각하며 투쟁해야 한다. 승리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그래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침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더욱 강력함을 믿는다. 우리는 이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죄가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지해야 한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일본의 신도든,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은혜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이런 종교 대부분은 개인적인 노력이나 자기 부인, 혹은 덕행으로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를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주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 우리를 양육시키시고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의 기초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 베푸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 준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이 은혜이다. 자신을 주셔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양육 받으며 살아간다.
월요일
8월 9일
죄가 인격화 됨
도입)
조직신학에서 원죄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인간의 죄악을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실증적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원죄 개념은 두 가지 이유에서 토대가 취약하다. 하나는 어떻게 자신이 실제로 범하지 않은 죄까지, 즉 아담의 죄까지 책임을 져야하는가, 하는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결국 인간이 원죄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면 실제적인 죄의 책임을 인간에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성경과 기독교가 죄에 관해서 문제를 삼는 것은 단 하나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죄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 살아있다. 이게 곧 인간에게 놓여 있는 자기분열의 기초이다. 죽어야만 해결되는 그 죄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분열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 예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것이 곧 칭의론이다. 그런데 칭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죄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칭의는 실체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이다. 죽음을 통해서 죄가 해방될 때까지,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 세계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살아간다.
❶ 롬 6:12의 말씀은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지배하다”는 단어에서 보는 것처럼 죄는 여기서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배하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왕이 되다” 또는 “왕의 역할을 하다”는 의미이다. 죄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고자 한다.
바울은 죄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는 의롭다 칭함을 얻는 자가 죄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통치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의지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그대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곧 의지의 참 힘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그대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는 그대들 안에서 그대들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온 성질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대들의 애정은 그에게 중심을 두게 되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와 조화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47)
롬 6:12에 “사욕”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죄가 지배할 때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 그것과 싸우려고 할지라도 욕망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죄는 마치 난폭한 독재자와 같아서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오직 믿음, 오직 승리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에게서 이 폭군을 몰아낼 수 있다.
롬 6:12에서 “그러므로”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10~11절로 돌아가게 한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간다.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계신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는 동시에 죄를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교훈: 죄는 우리 삶을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우리는 그것의 지배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가적용)
바울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우리의 삶도 바꾸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예수님 밖에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사탄이 이끄는 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때 유명한 깡패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고서 거듭난 이야기이다. 목사님이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자신이 죽었다고 하는 부고장을 만들어서 돌렸다. 이런 내용이다.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가 죽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괴롭혔던 것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저도 예수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꼭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렇게 매일같이 동네를 돌면서 열심히 전도를 했다. 한 번은 아주머니 한분이 설거지를 하다가 김익두 목사님이 정말로 달라졌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바가지에 찬 물을 담아가지고 얼굴에다 확 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나 보자." 그러자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내가 죽었으니까 아주머니가 그대로 살아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죽지 않았다면 아주머니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화요일
8월 10일
법 아래에?
도입)
법 아래서의 삶(신앙생활)은 한마디로 “내가 법을 지켰다는 것을 의(義)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이다.” 그러다보니 법 아래서의 신앙생활로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교만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그것이 교만인줄 꿈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법 아래서의 삶은 자꾸만 어떤 일을 하고나서 댓가를 바라는 삶이다. 가령, “나는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사후에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보내주실 것이다.”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상급(영생)을 많이 주실 것이다”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돌봐 주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의에 젖어서 이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❶ 롬 6:14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십계명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6:14은 로마서에서 중요한 성경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재림교인들에게 자주 제시하는 성경절이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죄가 존재하는 이상 도덕법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죄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로마서의 앞부분과 6장을 읽었다면, 바울이 죄의 실체에 관하여 논하다가 갑자기 “그런데 죄를 정의하는 십계명은 폐지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법 아래”란 수많은 인간의 제도와 규례를 포괄하고 있었던 당시의 유대 사회 제도 아래라는 뜻이다.
반대로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율법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고 성령이 그의 걸음을 인도함으로 죄를 극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으며,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 옛 사람을 장사 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오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그의 삶의 보좌에서 죄가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롬 6:14의 전체 배경이며 그 안에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법 아래”라는 말을 너무 제한적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은혜 아래” 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다면 그는 은혜가 아닌 정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은혜 아래”라는 것은 율법이 불가피하게 죄인에게 선고한 정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거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아에 대하여 죽음으로 이제 율법이 가져오는 죽음의 정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이다.
교훈: 우리가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산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가적용)
은혜 아래서의 삶은 법아래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다. 은혜 아래서 사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죄로 죽은 사람이다. 죄로 죽은 사람은 자기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죽은 사람은 “무슨 일을 하고나서 어떤 댓가를 바라거나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죄로 죽은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주어서 다시 살려주셨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댓가를 바라겠는가?” 가령,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 수십억의 헌금을 했다하자 그럼 그가 하나님에게 어떤 댓가를 바래야 하겠는가? 또 전도를 많이 했다하자 그가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바래야 하겠는가? 그가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돌봐 주었다고 하자! 그 댓가를 하나님에게 바래야 하겠는가? 죄로 죽었어야 할 인간이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되었는데, 그가 무슨 일을 했다하여 하나님에게 어떤 댓가를 바란다면 그는 이미 은혜를 망각한 자이거나, 결코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삶이다. 또한 은혜 아래서 사는 자는 법아래서 사는 자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법아래서 사는 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자신을 뽐내지만, 은혜 아래서 사는 자는 오직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준 주님만 바라볼 뿐,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절대 알리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오직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법아래 사는 사람들은 자기 열심,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어떻게든 자기 의를 드려내려고 한다. 이밖에도 은혜 아래 사는 자와 법아래서 사는 자의 차이는 수없이 많지만 일일이 열거하기가 부족할 정도이다.
수요일
8월 11일
씨름하고 있는 두 주인
도입)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먼저 선행된다.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고, 더 중대한 사항인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의지나 행동의 결과들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 안에서 수많은 정보와 자료가 정리되고 가장 유용한 결과를 끄집어내게 된다. 서로가 엇비숫한 가치를 드러내면 우리의 마음은 싸움터가 된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 아니면 나보다는 더 중대한 일들을 놓고 갈등하게 된다. 시간과 소유물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대상을 숙고해야 한다. 매일 일어나는 내면에서의 전쟁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싸움터와 같다. 하루에도 수많은 적들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아니면 우리의 편에서 더 나은 것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돕는 하늘의 용병들도 수없이 방문한다. 이 싸움은 힘에 대한 것이며 가치에 대한 것이며 영적 유익에 대한 것이며 유효성에 대한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 모든 힘과 가치와 유익 그리고 유효성은 그리스도 안에만 거한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내면은 혼란과 내리지 못한 결정에 대한 갈등이 지속될 것이다.
❶ 롬 6:16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그의 주장이 흑백논리처럼 분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뚜렷하게 드러난 대조적인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사는 삶이 죄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의 삶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이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승리를 줄 수 있다.
신하를 다스리는 왕으로 죄를 의인화 했던 것처럼, 바울은 이제 종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으로서 죄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이 어떤 주인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섬길 수도 있고, 영생에 이르는 의를 섬길 수도 있다. 중간지대는 없으며 절충의 여지도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영생하든지 영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❷ 롬 6:17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16절의 말씀을 어떻게 확대시키고 있습니 까?
여기서 순종이 어떻게 올바른 교리와 연결되고 있는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교리”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가 여기서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원칙들을 배우고 순종하였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올바른 교리를 “마음으로 순종”할 때, 그것은 그들을 “의의 종”이 되도록 이끈다(18절).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상, 교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거짓 교리에 대하여 상당히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교훈: 우리가 의의 주인을 섬기기 원한다면 올바른 교리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과연 의의 주인이신가? 예수님은 죄를 범한자의 심판자가 아니라 변호사이다. 나는 예수님이 심판자가 되어서 검사가 되서 나대신 말씀의 칼을 들고 심판해주길 바랬는데 ,그리고 그것이 의로우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다가 본 예수님은 얼마나 불의에 가득찬 모습인가. 죄진 자의 편에 서서 죄진 자를 옹호하시고 용서하시고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유다 안에 예수님이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셨던 세계는 공의로운 세계가 아닌가?
불의한자를 심판하시고 공의를 드러내는 세계 아마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던 자신들을 그로마의 압제아래에서 건져줄 메시야를 고대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르게 예수님은 초라하게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 오신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의롭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의롭다는 표현을 쓰신다. 왜 그럴까? 옳고 그른 것을 나누고 거기서 옳은 것이 의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의라는 생각이 든다. 믿음의 중심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의이고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의이다. 야곱과 에서가 그러하고 다말이 그러하고 라합이 그러하다. 죄를 범한 불의한자를 믿음으로 사랑의 눈으로 보시는 의로우신 예수님이다.
목요일
8월 12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도입)
우리의 관념 속에는 우리가 예수의 도움을 받아 거룩하게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님이 거룩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만 주님을 보기 때문에 주님이 떡으로 우리를 만족시키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거룩을 구하는데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거룩을 구하고 거룩케 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힘주시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이 아닌 예수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은혜, 구원, 치료 등등을 우리의 외적이고 객관적인 자리에 둘 때,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의 목적에 들어갈 수 없음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심으로 어떤 일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요14장) 그리고 예수 자신이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과 의와 구속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세우셨다고 하지 않고 주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이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할 때, 그 육신의 연약함을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이용하셔서 우리 속에 그 분의 인격을 더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가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가 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 형성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는 그 무엇 즉, 신념과 자아의 여러 항목들을 깨뜨리신다. 우리에게 물려받은 천연적인 인내가 있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파쇄 하신다. 그래서 나에게 인내가 없는 상태로 만드셔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내가 되게 하신다. 사실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을 보면 그리스도 인격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다 없어짐을 보게 된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내가 그 인줄( I AM : 나는...이다) 믿지 아니하면 우리가 죄 가운데 죽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한다.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고 다 죄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교만을 십자가로 가져갈 때 예수가 겸손이 되신다. 미움을 죽음에 둘 때 그가 우리 속에 사랑이 되신다. 이 비밀이 크다.
❶ 지금까지 로마서 6장에서 공부한 것을 기억하면서 19~23절까지 남은 절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아래에 정리해 보십시오.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 진리를 그대의 삶에 실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쟁점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설명은 그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한다. “연약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허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능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의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새로운 주인 예수께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맡기기로 선택해야 한다.
롬 6:23은 죄의 형벌, 즉 범법의 대가는 죽음임을 말해준다. 죄의 형벌이 죽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뿐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죄는 자기 종들을 속이고 실컷 부려먹다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주인과 같다.
두 주인의 비유에서 바울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다른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양자택일해야 한다. 중간지대는 없다. 동시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죄의 통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며, 죄와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우리에게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죄가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리라는 승리의 약속을 매일 주장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죄를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이 폭군은 수치스런 일을 행한 대가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폭군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의를 섬기는 자는 바르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행한다. 그들의 행위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새로운 경험에서 비롯된 열매로서 나타난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필요한 이유와 구원의 관점을 완전히 잃고 있는 것이다.
교훈: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해져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구원의 주님께 맡기면 죄는 우리에게서 지배력을 잃게 된다.
부가적용)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연약하다는 것은 병들기 쉬운 나약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에게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연약함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을 향해서 갈 수 없고 구원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 자체가 연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믿음이 있는 모습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이 의로워 질 수 있고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고 부끄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연약하다”는 말조차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요구하는 모습과 거리가 멀어 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며, “아, 나는 역시 연약해서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구나!” 그리스도를 더 바라보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약하니까 할 수 없지 뭐!”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끝까지 죄를 피해보려고 하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한들 그것은 불법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연약함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느냐는 것이다. 연약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이 강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그 가운데서 짓게 된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죄짓지 않는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아는 인간이 되기를 원하신다. 죄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은 겉이 아닌 속 내용을 볼 줄 아는 눈이 뜨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죄를 죄로 느끼는 마음, 죄를 죄로 아는 그 마음의 진실됨을 용서하시고 이러한 인간됨을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라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화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을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에게 종으로 드려서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연약해서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금요일
8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05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교회증언 3권, 365 “청년들에게 호소함.”
“그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고 있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품성을 얻게 하시려고 하신다.”(시대의 소망, 123)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직접 약속하였고, 지성과 감성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화된 인간 도구들과 협력하기로 맹세한다.”(화잇 주석, 롬 6:1~4)
“믿음과 행실이 일치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악한 자의 자녀들은 그들 자신의 주인의 종이다. 누구를 섬기든지 그 섬기는 자의 종이 된다. 그들이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늘 왕의 종들이, 사단의 종들이 참여하는 오락과 쾌락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그들이 그런 오락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흔히 말할지라도 해가 없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분리시켜 당신 앞에서 정결하게 하시고자 신성하고 거룩한 진리를 계시하셨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교회증언 1권, 4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죄를 극복하리라는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 우리 마음이 부패되어 있다면 뭔가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2.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간증해 보십시오.
3.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일에 의존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그분 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간과한다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구원의 두 측면을 함께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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