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혼인 예복(질문, 대답, 부가설명)0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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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6-03 11:52 조회9,364회 댓글4건본문
6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3분
기억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연구 범위: 마 21장, 22:1~14, 계 21:2, 9, 전 12:14, 단 7:10, 창 3:9~19.
기독교 역사는 어두운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무시무시한 일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예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 더욱 참혹한 일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자행될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흥미로운 비유를 공부할 것인데, 그 비유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가슴 아픈 진리를 보여준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충실한 자와 불충실한 자를 가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며, 생명책에 저희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참된 제자는 아니다. 최후의 상급을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가 줄 상이 그에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실’(계 22:12)것이기 때문이다”(실물교훈, 310).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혼인 잔치의 비유가 어떻게 조사 심판의 측면을 담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분석한다.
➋느끼기 : 혼인 잔치에 오라는 왕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의 태도와 그들의 거부에 반응하는 왕의 태도를 파악한다.
➌행하기 : 혼인 잔치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고, 그분이 주시는 예복을 신실하게 입는다.
결론: 모든 사람이 왕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지만, 모든 이가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들 가운데는 왕이 준비한 예복 즉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기로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초청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합당한 의복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날(일)
6월 5일 격정의 시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마 21:45).
질문: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비유의 배경을 형성하는 21장을 읽어보라.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마 21장의 기본 주제는 무엇인가? 21장을 몇 줄로 요약해 보라. 여기서 우리 자신을 위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답: 마태 21장은 몇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2) 성전 청결.
3)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저주.
4) 성전 청결에 대한 논쟁,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는가 물으심.
5) 두 아들 비유.
6) 포도원의 악한 일꾼들 비유
이 기록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과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가설명> 여기 나타난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많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이 옳고 예수가 그릇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마21:45,46)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주 나의 믿은 것이 말씀과 일치하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그 성경 지식으로 진리를 배반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처럼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하는 사상으로 교회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교훈: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날(월)
6월 6일 왕의 초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질문: 마 22:1~8을 읽어보라. 이 비유는 앞 장의 사건들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어떤 비슷한 주제가 나타나는가?
[마22:1~8]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답: 21장에 있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말씀을 하셨다. 두 아들 중에 불순종한 아들이나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이나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오지 않은 사람들이나 예복을 거부한 사람들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합당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조되어 있다.
<부가설명> 21장의 두 비유와 22장의 잔치비유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하시는 몇 가지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두 아들 비유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부자(父子)의 관계로 비유하신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主從)의 관계로 비유하시고, 22장의 잔치 비유는 주객(主客)의 관계로 비유하신다. 부자의 관계에서는 순종과 불순종으로 대조하였고, 주종의 관계에서는 충성과 반역으로 대조하였고, 주객의 관계에서는 순응과 불응으로 대조하였다. 부자의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 상태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으나 불순종함으로 사망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하나님과 사람은 주종의 관계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고 충성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반역하고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손님으로 하늘 잔치에 초청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립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길을 열어놓으시고 모든 것이 준비된 생명의 잔치에 초청했지만 초청 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거리에서 아무나 초청하여 들인다. 다만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현관에서 받아 입어야 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다. 그는 예수의 생명을 거절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옷이 예복보다 좋아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행한 도덕적 선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생명으로 맺는 열매가 아니다. 인간의 공로이다. 그것은 죽은 상태에서 화장을 한 것일 뿐이다. 산 자들의 자리에 죽은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화장터로 옮기게 된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분의 초청에 응하며, 그분이 준비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날(화)
6월 7일 잔치에 온 사람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
질문: 비유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라(마 22:9~14). 혼인 잔치에 온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22:9~14]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답: 길에서 만나는 대로 다 잔치 자리에 청해 들였다. 그 중에는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다. 그러나 주인은 오직 예복 입지 않은 사람만 잔치 자리에서 바깥으로 내어보냈다.
<부가설명>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를 아주 선명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평가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비유이다. 길에서 갑자기 불려온 이 사람들은 집에 가서 예복을 입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입은 예복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는 종들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잔치 집에 이미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기 들어가면서 준비된 예복을 입으면 된다. 아마도 종들이 입혀주었을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준 것처럼. 그들 중에는 도덕적 안목으로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손을 살피러 왔다. 주인은 잔치 자리에 들어오기 전에 악한 자와 선한 자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다. 다만 예복을 입지 않은 손에 대하여서만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얼마나 선하고 완전하였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졌느냐, 예수의 생명이 없느냐 라는 문제이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선한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그 완전함과 선함을 입고 잔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가 멋지게 화장(化粧)한 것일 뿐 생명이 없는 미라일 뿐이다. 죽은 자는 산 자 무리 중에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있는 자리로 보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악했거나 선했거나 예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잔치 자리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산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31,32)라고 하셨다. 세리와 창기는 당시에 가장 부도덕한 자들의 대표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예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의를 믿고 으스대다가 천국을 놓치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위의 마21장의 말씀은 바로 22장의 예복 비유 전에 하신 말씀이다.
교훈: 우리의 사명은 악한 이와 선한 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다.
넷째날(수)
6월 8일 옷을 입지 않음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마 22:11).
질문: 비유 속에서 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옷을 거절한다고 그것을 영생 혹은 영멸의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옷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복음을 나타낸다. 일상적으로 우리교회가 말하는 대로 말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그런데 그 의가 무엇인가? 아마도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선한 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은 반만 맞는 대답이다.
<부가설명> 옷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옷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것을 의의 겉옷이라고 하지 않았는가.(사61:10) 그런데 성경에는 옷에 대한 말씀이 많다. 간단히 열거하면, 구원의 옷, 찬송의 옷,(사61:3) 의의 겉옷,(사61:10) 그 옷,(계7:14)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계19:8) 두루마기,(계22:14) 하나님의 전신 갑주,(엡6:11) 예복,(마22:11,12) 빛의 갑옷,(롬13:12) 예수,(롬13:14, 갈3:27) 이런 옷들이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옷일까? 안교 반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생각은 다 예수를 옷 입은 사실을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찬송이며 우리의 의이시고 우리의 빛이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며, 피로 씻은 그 옷 두루마기이고 하나님의 전신 갑두이며 예복이고 빛의 갑옷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입고 사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신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면 우리는 예수 생명이 나타내는 그 생명의 생태를 생활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의이며 빛의 열매인 것이다. 성경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의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옷 입었다는 말의 성경적 의미가 아니겠는가. 독자들께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교훈: 하나님은 언젠가 믿음을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 진짜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과 입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실 것이다.
다섯째날(목)
6월 9일 조사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질문: 마 22:11의 말씀에 비추어 전 12:14과 고전 4:5을 읽어보라. 이 말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답: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별하신다. 그것은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일이다. 이유는 재림하실 때에는 구별된 사실에 의하여 대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림하시기 전에 구별하는 일을 우리는 조사심판이라고 지칭한다. 이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는 예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만이 들어간다. 하나님은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인지 구별하여 온 우주 앞에 분명히 드러내신다. 그래서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주인인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온 것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여 산 자의 땅에 죽은 자가 없도록 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죽은 자는 장례식을 하는데 화장(火葬)을 하는 것이다. 조사심판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여 내는 것이고 마지막 흰 보좌 앞에서 베풀어지는 심판은 죽은 자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는 것이다. 그 보좌 앞에는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서 있다고 계시록은 기록한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고 그 행위를 따라 불 못에서 화장처리를 받는 것이다.(계20:11~15) 생명책에는 생명 있는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된다. 그래서 그 책 이름이 생명책인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산 자로서 생명책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가?
교훈: 조사 심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온 우주를 위한 것이며,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예비일(금)
6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307~319 “예복을 입지 않음.”
“구속의 경륜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만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이 작은 세계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대로 생각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시기 위해서였다”(실물교훈, 68).
“사단은 그 때에 파멸되지 않았다. 천사들은 그 때에도 대쟁투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깨닫지는 못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원칙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야만 했다. 인류를 위해서도 사단은 계속 존재해 있어야 했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영광의 왕과 흑암의 왕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알아야만 한다. 인류는 자기가 섬길 자를 선택하여야만 한다”(시대의 소망, 7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만행들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이용하여 끔찍한 죄악을 가리고 정당화시켰는지 생각해봅시다. 이런 불행한 사실들을 볼 때,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다 성경이 말하는 참 교회는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구별하는 일을 하실 것이다. 그것은 온 우주에 하나님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과정 중에 하나이다.
➋예수님은 혼인 예복에 대한 비유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마치셨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교회라는 이름으로 있는 것이 다 참 교회가 아니고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청함을 받은 자라는 원어는 부름 받은 자들이다. 택함을 입은 자들은 뽑힌 자들이다. 교회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일 수 있다. 물론 비유에서는 부름을 받았지만 거절한 사람들이 첫째이고 어쩌면 예복을 입지 않는 자도 부름 받은 자로 여겨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택함을 입는 자는 비유가 가르쳐주는 대로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복을 입었는지?
일몰:오후 7시 53분
기억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연구 범위: 마 21장, 22:1~14, 계 21:2, 9, 전 12:14, 단 7:10, 창 3:9~19.
기독교 역사는 어두운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무시무시한 일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예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 더욱 참혹한 일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자행될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흥미로운 비유를 공부할 것인데, 그 비유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가슴 아픈 진리를 보여준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충실한 자와 불충실한 자를 가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며, 생명책에 저희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참된 제자는 아니다. 최후의 상급을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가 줄 상이 그에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실’(계 22:12)것이기 때문이다”(실물교훈, 310).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혼인 잔치의 비유가 어떻게 조사 심판의 측면을 담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분석한다.
➋느끼기 : 혼인 잔치에 오라는 왕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의 태도와 그들의 거부에 반응하는 왕의 태도를 파악한다.
➌행하기 : 혼인 잔치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고, 그분이 주시는 예복을 신실하게 입는다.
결론: 모든 사람이 왕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지만, 모든 이가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들 가운데는 왕이 준비한 예복 즉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기로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초청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합당한 의복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날(일)
6월 5일 격정의 시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마 21:45).
질문: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비유의 배경을 형성하는 21장을 읽어보라.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마 21장의 기본 주제는 무엇인가? 21장을 몇 줄로 요약해 보라. 여기서 우리 자신을 위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답: 마태 21장은 몇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2) 성전 청결.
3)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저주.
4) 성전 청결에 대한 논쟁,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는가 물으심.
5) 두 아들 비유.
6) 포도원의 악한 일꾼들 비유
이 기록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과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가설명> 여기 나타난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많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이 옳고 예수가 그릇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마21:45,46)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주 나의 믿은 것이 말씀과 일치하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그 성경 지식으로 진리를 배반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처럼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하는 사상으로 교회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교훈: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날(월)
6월 6일 왕의 초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질문: 마 22:1~8을 읽어보라. 이 비유는 앞 장의 사건들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어떤 비슷한 주제가 나타나는가?
[마22:1~8]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답: 21장에 있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말씀을 하셨다. 두 아들 중에 불순종한 아들이나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이나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오지 않은 사람들이나 예복을 거부한 사람들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합당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조되어 있다.
<부가설명> 21장의 두 비유와 22장의 잔치비유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하시는 몇 가지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두 아들 비유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부자(父子)의 관계로 비유하신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主從)의 관계로 비유하시고, 22장의 잔치 비유는 주객(主客)의 관계로 비유하신다. 부자의 관계에서는 순종과 불순종으로 대조하였고, 주종의 관계에서는 충성과 반역으로 대조하였고, 주객의 관계에서는 순응과 불응으로 대조하였다. 부자의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 상태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으나 불순종함으로 사망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하나님과 사람은 주종의 관계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고 충성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반역하고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손님으로 하늘 잔치에 초청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립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길을 열어놓으시고 모든 것이 준비된 생명의 잔치에 초청했지만 초청 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거리에서 아무나 초청하여 들인다. 다만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현관에서 받아 입어야 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다. 그는 예수의 생명을 거절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옷이 예복보다 좋아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행한 도덕적 선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생명으로 맺는 열매가 아니다. 인간의 공로이다. 그것은 죽은 상태에서 화장을 한 것일 뿐이다. 산 자들의 자리에 죽은 자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화장터로 옮기게 된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분의 초청에 응하며, 그분이 준비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날(화)
6월 7일 잔치에 온 사람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
질문: 비유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라(마 22:9~14). 혼인 잔치에 온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22:9~14]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답: 길에서 만나는 대로 다 잔치 자리에 청해 들였다. 그 중에는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다. 그러나 주인은 오직 예복 입지 않은 사람만 잔치 자리에서 바깥으로 내어보냈다.
<부가설명>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를 아주 선명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평가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비유이다. 길에서 갑자기 불려온 이 사람들은 집에 가서 예복을 입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입은 예복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는 종들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잔치 집에 이미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기 들어가면서 준비된 예복을 입으면 된다. 아마도 종들이 입혀주었을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준 것처럼. 그들 중에는 도덕적 안목으로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손을 살피러 왔다. 주인은 잔치 자리에 들어오기 전에 악한 자와 선한 자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다. 다만 예복을 입지 않은 손에 대하여서만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얼마나 선하고 완전하였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졌느냐, 예수의 생명이 없느냐 라는 문제이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선한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그 완전함과 선함을 입고 잔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가 멋지게 화장(化粧)한 것일 뿐 생명이 없는 미라일 뿐이다. 죽은 자는 산 자 무리 중에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있는 자리로 보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악했거나 선했거나 예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잔치 자리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산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31,32)라고 하셨다. 세리와 창기는 당시에 가장 부도덕한 자들의 대표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예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의를 믿고 으스대다가 천국을 놓치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위의 마21장의 말씀은 바로 22장의 예복 비유 전에 하신 말씀이다.
교훈: 우리의 사명은 악한 이와 선한 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다.
넷째날(수)
6월 8일 옷을 입지 않음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마 22:11).
질문: 비유 속에서 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옷을 거절한다고 그것을 영생 혹은 영멸의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옷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의 복음을 나타낸다. 일상적으로 우리교회가 말하는 대로 말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그런데 그 의가 무엇인가? 아마도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선한 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은 반만 맞는 대답이다.
<부가설명> 옷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옷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것을 의의 겉옷이라고 하지 않았는가.(사61:10) 그런데 성경에는 옷에 대한 말씀이 많다. 간단히 열거하면, 구원의 옷, 찬송의 옷,(사61:3) 의의 겉옷,(사61:10) 그 옷,(계7:14)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계19:8) 두루마기,(계22:14) 하나님의 전신 갑주,(엡6:11) 예복,(마22:11,12) 빛의 갑옷,(롬13:12) 예수,(롬13:14, 갈3:27) 이런 옷들이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옷일까? 안교 반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생각은 다 예수를 옷 입은 사실을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찬송이며 우리의 의이시고 우리의 빛이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며, 피로 씻은 그 옷 두루마기이고 하나님의 전신 갑두이며 예복이고 빛의 갑옷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입고 사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신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면 우리는 예수 생명이 나타내는 그 생명의 생태를 생활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의이며 빛의 열매인 것이다. 성경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의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옷 입었다는 말의 성경적 의미가 아니겠는가. 독자들께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교훈: 하나님은 언젠가 믿음을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 진짜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과 입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실 것이다.
다섯째날(목)
6월 9일 조사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질문: 마 22:11의 말씀에 비추어 전 12:14과 고전 4:5을 읽어보라. 이 말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답: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별하신다. 그것은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일이다. 이유는 재림하실 때에는 구별된 사실에 의하여 대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림하시기 전에 구별하는 일을 우리는 조사심판이라고 지칭한다. 이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는 예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만이 들어간다. 하나님은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인지 구별하여 온 우주 앞에 분명히 드러내신다. 그래서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주인인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온 것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여 산 자의 땅에 죽은 자가 없도록 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죽은 자는 장례식을 하는데 화장(火葬)을 하는 것이다. 조사심판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여 내는 것이고 마지막 흰 보좌 앞에서 베풀어지는 심판은 죽은 자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는 것이다. 그 보좌 앞에는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서 있다고 계시록은 기록한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고 그 행위를 따라 불 못에서 화장처리를 받는 것이다.(계20:11~15) 생명책에는 생명 있는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된다. 그래서 그 책 이름이 생명책인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산 자로서 생명책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가?
교훈: 조사 심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온 우주를 위한 것이며,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예비일(금)
6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307~319 “예복을 입지 않음.”
“구속의 경륜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만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이 작은 세계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대로 생각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시기 위해서였다”(실물교훈, 68).
“사단은 그 때에 파멸되지 않았다. 천사들은 그 때에도 대쟁투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깨닫지는 못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원칙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야만 했다. 인류를 위해서도 사단은 계속 존재해 있어야 했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영광의 왕과 흑암의 왕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알아야만 한다. 인류는 자기가 섬길 자를 선택하여야만 한다”(시대의 소망, 7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만행들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이용하여 끔찍한 죄악을 가리고 정당화시켰는지 생각해봅시다. 이런 불행한 사실들을 볼 때,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다 성경이 말하는 참 교회는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구별하는 일을 하실 것이다. 그것은 온 우주에 하나님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과정 중에 하나이다.
➋예수님은 혼인 예복에 대한 비유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마치셨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교회라는 이름으로 있는 것이 다 참 교회가 아니고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청함을 받은 자라는 원어는 부름 받은 자들이다. 택함을 입은 자들은 뽑힌 자들이다. 교회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일 수 있다. 물론 비유에서는 부름을 받았지만 거절한 사람들이 첫째이고 어쩌면 예복을 입지 않는 자도 부름 받은 자로 여겨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택함을 입는 자는 비유가 가르쳐주는 대로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복을 입었는지?
댓글목록
한마음님의 댓글
한마음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말씀감사합니다.
복있는사람님의 댓글
복있는사람 작성일감사합니다^^좋은 교과해설 올려주셔서 공부잘했습니다
장태엽님의 댓글
장태엽 작성일
매일 여기서 공부를 하는데요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은혜스런 말씀 부탁 드립니다.^^
전상환님의 댓글
전상환 작성일감사합니다 목사님 건강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