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주의 날개 그늘(5월 14일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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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균 작성일11-05-08 15:06 조회3,331회 댓글0건본문
제7과 주의 날개 그늘(5월 14일 안식일)
기억절 :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 63:7).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을 꿈꾸는 것은
역사와 함께 였다
인간에게 다가온 하늘의 영은 모두 날아 다녔다
거기다가 새들은 날아다니는데 인간은 왜인가 하는 물음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어떤 식으로 애급에서 인도하셨는지를 이렇게 표현하셨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 다음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시간이 지나 인간은 날기 원했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 비행기 모형이 있는데
그 모형으로 비행기를 만들기로 한 과학자가 있었다
캐나다의 항공 공학 연구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날개 펄럭이는 비행기’를 제작,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고 2008년에 캐나다 더 스타지가 보도했다.
항공 공학 학자이자 토론토 대학교 명예 교수인 제임스 드로이에씨가 집념의 주인공.
그는 30년 넘게 ‘날개 펄럭이는 비행기’를 연구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최근 플래퍼(flapper)
혹은 오니솝터(ornithopter)로 알려진 ‘펄럭이는 날개 비행기’의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시험은 절반의 성공이다.
지난 주 토요일 오전 캐나다 토론토 다운스뷰 파크에서
약 14초 동안 300미터를 날아간 것이 전부이기 때문.
비행기를 결국 활주로에 ‘코’ 부분을 박고 추락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날개 펄럭이는 비행기’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73년 동료 과학자 제레미 해리스를 만난 후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여
비행 시험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왔던 것이다.
플래퍼 제작자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비행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박쥐나 새처럼 날고 싶다는 꿈은 라이트 형제 이후 잊혀졌다.
날개는 고정되고 추진력은 엔진 등에서 얻는 모델이 항공기와
우주왕복선 등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고, 펄럭이는 비행기 모델은 주변화 되어 버렸다.
우리가 독수리 날개침 같이 비상하는 것을 꿈꾸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낭만적인 모양을 꿈꾸는 모습니다
첫째날(일)5월 8일 적나라한 진실
미국의 무인 비행기가 리비아와 아프칸을 폭격한다
그 무인 비행기는 미국에서 조종하며 정확도 또한 유인 비행기와 흡사하다고 한다
지금은 현대전의 시대이다
만약 성경의 지도자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고 그런 전투를 해서 죽게 한다면
아마 뉴스거리가 됐을 것이다
피할 수도 없었고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런 장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를 보내셔서
숨겨진 죄를 밝히셨다
흔히 큰 구멍은 작은 구멍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어릴 때 읽은 국어교과서에서 네델란드 방둑의 구멍을 막은 어린 아이의 이야기도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이지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사시대가 지나고 왕의 집권기가 다가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왕을 가지면 세금을 내야 하고
국방의 의무를 져야하고
평생 왕의 신하가 된다고 했다
그 말의 뜻은 하나님보다 높은 왕권도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잊게하는 왕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게 사실화 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첫 왕부터 그 길을 걸었고
그들의 존경하는 왕들 중에 저들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은 왕이 없을 만큼
저들은 고통을 당했다
왕과 거기에 부속된 자들의 옷은 그들의 권세를 상징했다
친절하던 제사장의 권위는 왕권 앞에서 무너졌다
복잡한 제사장의 옷보다 왕의 권위있는 옷이 더 무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왕을 주소서 하고 외쳤던 그들의 혀를 베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뒤로 물러갈 자리도 없었다
저들은 하나님처럼 굴었고 하나님보다 나쁘게 굴었고
그 신하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왕으로 말미암아 유대에는 그늘이 왔다
구름기둥대신에 눈보라가 쳐 댔고
불기둥대신에 지진이 왔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혔다.
둘째날(월)5월 9일 나단이 모든 것을 밝히다
“다윗이…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5~7).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신복인 요압의 입만 막으면 문제없었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저녁마다 고운 밧세바만 안고 살면 되었다
아이도 벴고 미래도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베일로 가려진 인생길에서 다윗은 자신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가 아니었다
즐거운 인생길이 펄처졌는데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가 회개하고 보니 죽은 자가 있었다
바로 우리아였다
숨겼다고 생각된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인 다윗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백성들 누가 자기를 왕 대접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없었을까?
그 와중에 태어난 자식이 죽는다
그만하면 죄를 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죄는 대를 이어 나라가 나뉜다
무섭고 고통스런 세월을 백성들에게 안긴다
왕이 굵은 베옷을 입는 것보다 더한 수치의 옷을 입을 적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는다
왕도 그러는데 우리는 어떤가 한다
그래서 지도자의 옷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셋째날(화)5월 10일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인간이 가진 제일의 약점은
나의 수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덴에서부터 아담은 하와에게 미루었고
하와는 뱀에게 미뤘다.
지도자들의 어떤 잘못을 지적해 주면
그 전에는 지적해 달라고 했던 말까지 잊어버린다
그리고 변명하고 미워하고 결국은 원수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 약점을 잘 아신다
가져 오기만 하면 잊어주마 하신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잊어주마 하신다
그래서 다윗도 용서 받고 나도 용서 받고 님들도 용서 받는 것이다
넷째날(수)5월 11일 눈보다 희게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우슬초를 한 번 본 일이 있다
다른 풀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그런 풀이었다
그래서 그 풀이 주는 의미보다
씻으시는 행위가 더 의미있다고 여긴다
손을 씻는다
더러움을 씻는다
만약 더러움이 없다면 씻지 않을 것이다
와이샤스를 씻는다
한국은 하루 한 벌 갈아입어야 하는데
L,A에서는 3일을 입어도 깨끗하단다
그만큼 한국의 서울 대기가 안 좋다는 말이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암 발생률이 제일 많은 곳이 울산이라 한다
왜 그럴까?
결국 환경오염이 주범이다
먹고 마시는 것도 청정지역에서 나온 것은 더 좋다는 말이다
더러운 것은 모두 씻어야 한다
죄는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씻는다
우리는 그 씻는 예법을 침례라고 한다
더 가까이 나가서 우리가 행하는 성만찬 예식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는 예식이다
그래서 나는 우슬초가 특별한 씻음의 원천이라고 보지 않는다
씻음을 대빗자루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우슬초가 그것을 대신한 것 분이다
예표는 언제나 예표일 뿐이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원형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게 왕조시대의 구리뱀이 된다
다섯째날(목)5월 12일 주의 날개 밑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시 61:4).
날개는 힘이 있어야한다
어릴 때 친구들과 야생 거위 잡는다고 약을 놓은 일이 있었는데
야생 거위를 본 다음 그만 뒀다
날개를 펴니 나보다 훨씬 컷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날개로 묘사하셨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사실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묻어 두는 것 보는 순간
미물도 그럴진데 인간도 그러지 못하는 것 읽으면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 짧은 날개는 날지도 못하게 퇴화되었다
자신을 보호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 날개는 목숨을 걸고 자식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에게는 독수리 같은 부리도 없고 칼날 같은 발톱도 없다
그래도 그 새끼를 그 날개 안에 안는다.
주님에게는 날개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살아가던 그 시절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을 목도한 이들은
주님의 날개를 생각해 냈다
그분의 날개는 힘 있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함을 입을 수 있었고
저들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족속들은 저들의 밥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은혜의 날개 같은 옷으로 보호받는다
영원을 위한 날개짓이 바로 그분으로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축복이다
기억절 :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 63:7).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을 꿈꾸는 것은
역사와 함께 였다
인간에게 다가온 하늘의 영은 모두 날아 다녔다
거기다가 새들은 날아다니는데 인간은 왜인가 하는 물음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어떤 식으로 애급에서 인도하셨는지를 이렇게 표현하셨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 다음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시간이 지나 인간은 날기 원했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 비행기 모형이 있는데
그 모형으로 비행기를 만들기로 한 과학자가 있었다
캐나다의 항공 공학 연구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날개 펄럭이는 비행기’를 제작,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고 2008년에 캐나다 더 스타지가 보도했다.
항공 공학 학자이자 토론토 대학교 명예 교수인 제임스 드로이에씨가 집념의 주인공.
그는 30년 넘게 ‘날개 펄럭이는 비행기’를 연구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최근 플래퍼(flapper)
혹은 오니솝터(ornithopter)로 알려진 ‘펄럭이는 날개 비행기’의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시험은 절반의 성공이다.
지난 주 토요일 오전 캐나다 토론토 다운스뷰 파크에서
약 14초 동안 300미터를 날아간 것이 전부이기 때문.
비행기를 결국 활주로에 ‘코’ 부분을 박고 추락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날개 펄럭이는 비행기’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73년 동료 과학자 제레미 해리스를 만난 후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여
비행 시험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왔던 것이다.
플래퍼 제작자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비행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박쥐나 새처럼 날고 싶다는 꿈은 라이트 형제 이후 잊혀졌다.
날개는 고정되고 추진력은 엔진 등에서 얻는 모델이 항공기와
우주왕복선 등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고, 펄럭이는 비행기 모델은 주변화 되어 버렸다.
우리가 독수리 날개침 같이 비상하는 것을 꿈꾸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낭만적인 모양을 꿈꾸는 모습니다
첫째날(일)5월 8일 적나라한 진실
미국의 무인 비행기가 리비아와 아프칸을 폭격한다
그 무인 비행기는 미국에서 조종하며 정확도 또한 유인 비행기와 흡사하다고 한다
지금은 현대전의 시대이다
만약 성경의 지도자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고 그런 전투를 해서 죽게 한다면
아마 뉴스거리가 됐을 것이다
피할 수도 없었고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런 장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를 보내셔서
숨겨진 죄를 밝히셨다
흔히 큰 구멍은 작은 구멍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어릴 때 읽은 국어교과서에서 네델란드 방둑의 구멍을 막은 어린 아이의 이야기도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이지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사시대가 지나고 왕의 집권기가 다가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왕을 가지면 세금을 내야 하고
국방의 의무를 져야하고
평생 왕의 신하가 된다고 했다
그 말의 뜻은 하나님보다 높은 왕권도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잊게하는 왕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게 사실화 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첫 왕부터 그 길을 걸었고
그들의 존경하는 왕들 중에 저들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은 왕이 없을 만큼
저들은 고통을 당했다
왕과 거기에 부속된 자들의 옷은 그들의 권세를 상징했다
친절하던 제사장의 권위는 왕권 앞에서 무너졌다
복잡한 제사장의 옷보다 왕의 권위있는 옷이 더 무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왕을 주소서 하고 외쳤던 그들의 혀를 베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뒤로 물러갈 자리도 없었다
저들은 하나님처럼 굴었고 하나님보다 나쁘게 굴었고
그 신하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왕으로 말미암아 유대에는 그늘이 왔다
구름기둥대신에 눈보라가 쳐 댔고
불기둥대신에 지진이 왔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혔다.
둘째날(월)5월 9일 나단이 모든 것을 밝히다
“다윗이…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5~7).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신복인 요압의 입만 막으면 문제없었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저녁마다 고운 밧세바만 안고 살면 되었다
아이도 벴고 미래도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베일로 가려진 인생길에서 다윗은 자신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가 아니었다
즐거운 인생길이 펄처졌는데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가 회개하고 보니 죽은 자가 있었다
바로 우리아였다
숨겼다고 생각된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인 다윗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백성들 누가 자기를 왕 대접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없었을까?
그 와중에 태어난 자식이 죽는다
그만하면 죄를 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죄는 대를 이어 나라가 나뉜다
무섭고 고통스런 세월을 백성들에게 안긴다
왕이 굵은 베옷을 입는 것보다 더한 수치의 옷을 입을 적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는다
왕도 그러는데 우리는 어떤가 한다
그래서 지도자의 옷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셋째날(화)5월 10일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인간이 가진 제일의 약점은
나의 수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덴에서부터 아담은 하와에게 미루었고
하와는 뱀에게 미뤘다.
지도자들의 어떤 잘못을 지적해 주면
그 전에는 지적해 달라고 했던 말까지 잊어버린다
그리고 변명하고 미워하고 결국은 원수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 약점을 잘 아신다
가져 오기만 하면 잊어주마 하신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잊어주마 하신다
그래서 다윗도 용서 받고 나도 용서 받고 님들도 용서 받는 것이다
넷째날(수)5월 11일 눈보다 희게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우슬초를 한 번 본 일이 있다
다른 풀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그런 풀이었다
그래서 그 풀이 주는 의미보다
씻으시는 행위가 더 의미있다고 여긴다
손을 씻는다
더러움을 씻는다
만약 더러움이 없다면 씻지 않을 것이다
와이샤스를 씻는다
한국은 하루 한 벌 갈아입어야 하는데
L,A에서는 3일을 입어도 깨끗하단다
그만큼 한국의 서울 대기가 안 좋다는 말이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암 발생률이 제일 많은 곳이 울산이라 한다
왜 그럴까?
결국 환경오염이 주범이다
먹고 마시는 것도 청정지역에서 나온 것은 더 좋다는 말이다
더러운 것은 모두 씻어야 한다
죄는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씻는다
우리는 그 씻는 예법을 침례라고 한다
더 가까이 나가서 우리가 행하는 성만찬 예식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는 예식이다
그래서 나는 우슬초가 특별한 씻음의 원천이라고 보지 않는다
씻음을 대빗자루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우슬초가 그것을 대신한 것 분이다
예표는 언제나 예표일 뿐이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원형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게 왕조시대의 구리뱀이 된다
다섯째날(목)5월 12일 주의 날개 밑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시 61:4).
날개는 힘이 있어야한다
어릴 때 친구들과 야생 거위 잡는다고 약을 놓은 일이 있었는데
야생 거위를 본 다음 그만 뒀다
날개를 펴니 나보다 훨씬 컷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날개로 묘사하셨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사실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묻어 두는 것 보는 순간
미물도 그럴진데 인간도 그러지 못하는 것 읽으면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 짧은 날개는 날지도 못하게 퇴화되었다
자신을 보호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 날개는 목숨을 걸고 자식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에게는 독수리 같은 부리도 없고 칼날 같은 발톱도 없다
그래도 그 새끼를 그 날개 안에 안는다.
주님에게는 날개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살아가던 그 시절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을 목도한 이들은
주님의 날개를 생각해 냈다
그분의 날개는 힘 있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함을 입을 수 있었고
저들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족속들은 저들의 밥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은혜의 날개 같은 옷으로 보호받는다
영원을 위한 날개짓이 바로 그분으로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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