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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기-(제1과)-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1)-(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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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10-01 23:01 조회1,8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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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우리를 향(向)한 하나님의 선교(宣敎) – 1

                        (10월 7일 (안) / 일몰: 오후 6시 7분)


<기억절(記憶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서언(緖言)>

죄로 멸망(滅亡)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救援)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모양으로 성육신(聖肉身)하시어 그 약속(約束)을 확증(確證)하셨으며 이 땅에서의 삶과 십자가(十字架)의 고난(苦難)과 부활승천(復活昇天)을 통하여 확신(確信)과 소망(所望)을 주셨으며 이러한 사실을 전(傳)하는 것이 선교(宣敎)이며 이러한 사역(使役)에 동참(同參)함으로 예수님의 재림(再臨)으로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준비(準備)시키고 능력(能力)을 주시며 함께 하신다.


(10월 1일 (일)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Q)~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제일 먼저 질문(質問)하신 말씀은 무엇이며, 그 말씀이 오늘날에도 신학적(神學的)으로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3:9~15)


(A)~ 선교(宣敎)의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오셔서 화목(和睦)의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선교(宣敎)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즉 죄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는 평안히 쉴 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墮落)한 인간(아담)이 자신의 실존(實存)을 올바로 파악(把握)키를 애타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質問)에 하나님의 사랑이 토로(吐露)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자복(自服)하고 돌아올 기회(機會)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처럼 잃어버린 양(羊)을 애타게 찾으신다. (눅 15:3~7). (창 3:9, 만나주석)


○. 하나님이 아담을 뒤따라가 그를 체포(逮捕)하시고는 그를 놀라게 하는 질문(質問)을 하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이리 나오라!"라고 하여 소송(訴訟)을(법률용어(法律用語)로)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네가 이렇게 전략(戰略)했느냐?!’ 나의 벗이었고, 내가 총애(寵愛)하였던 너였으며, 내가 이전보다 더욱 총애하고자 했던 너이건만, 이제 네가 나를 저버리고 자멸(自滅)했단 말인가? 이것이 웬일인가?"라고 한다. 그가 죄를 깨닫고 겸손(謙遜)해지게 하기 위한 "네가 어디 있느냐?" 는 책망(責望)의 질문(質問)은 오히려 "장소(場所)"를 묻는 말(質問)이 아니라 어떠한 "상태(常態)" 에 있는가를 묻는 말(質問)이다.


○.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에 빠진 자들은 그들이 처(處)해 있는 형편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모든 선(善)에서 떠나 그들의 원수(怨讐)들의 와중(渦中)에 있으며, 사탄의 노예(奴隸)가 되고, 멸망(滅亡)의 고속도로(高速道路)에 들어선 것이다.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質問)은 그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그를 다시금 회복(回復)시키기 위한 은혜(恩惠)로운 추적(追跡)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되찾으려고 부르시지 아니하셨더라면, 타락(墮落)한 천사(天使)의 처지(處地)와 같이 그의 처지도 도저히 가망(可望)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찾지 않으셨다면, 잃어버린 양(羊)과 같이 방향(方向)도 없이 끊임없이 유리(遊離)하는 방랑자(放浪者)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을 다시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있어야 할 곳과 있어서는 안 될 곳, 그리고 불행(不幸)하고 불안(不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곳을 그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10월 2일) (월)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願)하시는 하나님>


(Q)~우리와 함께하기를 원(願)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舊約時代)에 주어진 약속(約束)과 제도(制度)의 주요초점(主要焦點)은 무엇입니까? (출 3:12 창세기 17:7, 26:3, 28:15) 


(A)~‘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심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歷史)를 통해서 패역(悖逆)하고 배반(背叛)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하시기를 원(願)하셨다. 즉 문자적으로는 ‘내가 너와 함께 있는 한(限)에는’이다. 출애굽은 단지 피지배민족(被支配民族)이 자유를 찾아 탈출(脫出)하는 단순한 역사적(歷史的) 사건일 수는 없으며 또한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成就)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심으로써만 가능(可能)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지레 낙담(落膽)에 빠진 모세에게 ‘임마누엘’의 약속(約束)을 해 주신 것이다. (수 1:9). 실로 이 약속이야말로 막강(莫强)한 100만 대군(大軍)을 얻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보장(保障)으로서 그 어떤 세력에도 담대(膽大)하며 능(能)히 무찌를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과거(過去)에도 현재(現在)에도 미래(未來)에도 어떠한 시험(試驗)과 고난(苦難)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소망(所望)을 주신다. (사 35:3, 고전 1:27, 히 12:12).


(10월 3일) (화)  <우리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


(Q)~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誕生)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마 1:23) 


(A)~○.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선교계획(宣敎計劃)을 따른 것이다.

①.<임마누엘>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豫言)이다. <임마누엘>이 단어(單語)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固有名詞)로 사용되기보다 성부(聖父) 하나님에 대한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使役)의 한 단면을 암시(暗示)한 용어(用語)이다. (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 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 이란 뜻의 ‘엘’이 결합(結合)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아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罪惡)으로 인(因)해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救援)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呼稱)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怨讐)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和解)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 자체(自體)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罪) 사(赦)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마 1:23, 만나주석)


②.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예언(豫言)을 확실하게 성취(成就)하시고 선교(宣敎)의 목적(目的)을 보여주셨다. <“임마누엘”>

   히브리어 ‘임마누 엘’(‘Immanu ’El)을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우리 가운데 거(居)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 가족과 동일(同一)하게 되기 위해 오셨다. (요 1:1~3, 14; 롬 8:1~4; 빌 2:6~8; 히 2:16, 17; 시대의 소망, 23). ‘임마누엘’은 그의 개인적(個人的)인 이름이 아니라 사명(使命)을 묘사(描寫)하는 칭호(稱號)이었다(참조 사 9:6, 7; 고전 10:4). (마 1:23, 재림교주석)


③.(사 7:1~9:7절)은 한 단위(單位)이며, (사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理解)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誕生)은 ‘미래(未來)에의 확증(確證)’이라는 해석(解釋)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10월 4일) (수)  <우리와 항상(恒常) 함께하시는 하나님>


(Q)~그리스도의 대사명에 깃들여 있는 우리를 향(向)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무엇이며, 우리와 항상(恒常) 함께 있겠다는 약속은 예수의 생애(生涯)를 통해 어떻게 성취(成就)되었습니까? (고후 5:21)

 

(A).-하나님의 선교적(宣敎的) 본성(本性)은 잃어버린 자(者)를 찾아 구원(救援)하려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개방(開放)되어 있지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 절(節)에는 독생자(獨生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動機)가 된 것임이 밝혀져 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單語)들 중의 하나로써,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軟弱)함과 죄성(罪性)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는 뜻을 내포(內包)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本性)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人類)를 향(向)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苦難)을 통해 그 절정(絶頂)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本質)상 하나님과 동등(同等)하신 예수의 생애(生涯)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랑을 보다 구체적(具體的)으로 이해(理解)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他律的)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自發的)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代價)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사명을 주시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0월 5일) (목)  <우리를 위(爲)해 다시 오실 하나님>


(Q)~우리와 함께하기 원(願)하시는 하나님의 열망(熱望)을 무엇으로 가장 분명(分明)하게 보여주실 것이라 예언(豫言)하고 있으며 그 예언이 성취(成就)될까요.?


(A)~예수님의 재림(再臨)은 우리와 함께하기 원(願)하시는 하나님의 열망(熱望)을 가장 분명(分明)하게 보여주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리라는 말씀은 그가 반드시 오실 것이며 그것도 매일 오실 것이라는 확신성(確信性)을 선언(宣言)하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기 위하여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을 때 "곧 간다"라고 말하듯이, 주님의 오시겠다는 말씀은 그의 재림(再臨)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말씀해 주신 그의 재림(再臨)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마음속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길이 참고 견디게 해 준다. (빌 4:5; 약 5:8)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때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선교(宣敎) 계획(計劃)도 완성(完成)될 것이다. 주님은 그의 충실(忠實)한 추종자(追從者)들을 데려가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저들을 은밀(隱密)한 가운데 죽음의 자리에까지 보내시고, 거기서 다시 그들을 하나씩 모으신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영광중(榮光中)에 다 함께 장엄(莊嚴)한 행진(行進)을 할 것이며 주님은 나오셔서 그들을 맞이하여 풍성(豊盛)한 은혜와 사랑으로 영접(迎接)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주님은 그들을 존귀(尊貴)하게 여기시고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구현(具現)되기를 애타게 바라며 기다린다. 그의 형상이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재현(再現)될 때에, 예수 님께서 오실 것이다. (실물교훈, 69). 영광스러운 귀향(歸鄕)을 촉진(促進)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特權)이다. (벧후 3:12; 참조 시대의 소망, 633, 634,; 실물교훈, 69).  (요 14:1~3, 재림교주석)





************<말미부록(末尾附錄)>*********


<(창 3:9) 네가 어디 있느냐??>

항상 하나님의 접근을 환영하였던 아담은 이제 숨었다. 그러나 마치 그가 숨은 곳을 몰라서 아담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복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는 하나님을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담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당황하여 스스로 숨었다고 하나님에게 말함으로써 죄를 그 결과 뒤에, 자신의 불순종을 자신의 수치심 뒤에 숨기고자 하였다. 죄의 결과에 대한 그의 의식은 죄 자체보다도 예민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처한 인간의 특성인, 죄와 형벌 사이의 혼동을 목격한다. 인간은 죄 자체보다도 죄의 결과에 더 민감하며 그것을 더 혐오한다. (창 3:9 재림교주석)


<(창 3:9) 숨어버린 아담)>

하늘과 땅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도망자들의 범죄에 대한 사실이 심리되는 사건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형식에 얽매이지는 아니하지만, 가능한 한 공정하게 판결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로움이 나타나게 된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에 빠진 자들은 그들이 처(處)해 있는 형편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모든 선에서 떠나 그들의 원수들의 와중에 있으며, 사탄의 노예가 되고, 멸망(滅亡)의 고속도로(高速道路)에 들어선 것이다.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質問)은 그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그를 다시금 회복(回復)시키기 위한 은혜(恩惠)로운 추적(追跡)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되찾으려고 부르시지 아니하셨더라면, 타락(墮落)한 천사의 처지와 같이 그의 처지도 도저히 가망(可望)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찾지 않으셨다면, 잃어버린 양(羊)과 같이 방향도 없이 끊임없이 유리(遊離)하는 방랑자(放浪者)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을 다시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있어야 할 곳과 있어서는 안 될 곳, 그리고 불행(不幸)하고 불안(不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곳을 그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창 3:9 매튜헨리)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하신가!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죄가 그 형벌(刑罰)을 치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미 타락한 인류를 구속할 길,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자발적인 희생에 의한 길(벧전 1:20; 엡 3:11; 딤후 1:9; 계13:8)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를 이해하도록, 시각 교재(視覺敎材)를 제공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제사 의식(祭祀儀式)을 제정(制定)하였다. 무죄(無罪)한 어린양은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피를 흘려야 했으며, 죄인의 벌거벗음을 가려주기 위하여 그의 가죽을 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적으로 상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범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었으며 그의 의(義)만이 인간을 덮어주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이 구속(救贖)의 계획을 얼마나 분명하게 이해하였는지 모르나, 죄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구속주(救贖主)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고 잃어버린 통치권(統治權)을 다시 얻으며 에덴의 행복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게시되어 그에게 보증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救援)의 복음은 성경의 중심 주제이다. (창 3:9~15, 재림교주석)


<그리스도, 즉각적(卽刻的)인 보증(保證)>

죄가 있자마자 곧 구세주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갈바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을 인류의 담보물로 제시하셨다. (리뷰 1901. 3. 12).


<영광(榮光)의 세계와 연결시키심>

비록 지구성이 길을 잃고 빗나가서 하늘 본토에서 떨어져 나가고 하늘과 교제가 끊어졌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를 다시 영광의 세계와 연결하셨다(사인즈 1887.11.24).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심>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다(편지 22, 1900. 2. 13).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발자국에 그의 발을 두심>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영광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의 위치까지 하나님을 낮추기로 제안하시다니! 그분은 아담의 걸어갈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두실 것이었다. 그는 타락한 인성을 입으시고 아담을 이긴 강한 원수와의 싸움에 돌입하실 것이었다. 그는 사단을 이김으로써 아담의 실패와 타락으로부터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실 것이었다(리뷰 1874.2.24). (창 3:9~15, 화잇주석)


<영원(永遠)한 언약(言約)>

 “영원한”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모든 경우에 언제나 무한한 기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출 21:6 주석 참조). 성경에 사용된 “영원한”이란 이 말은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 지닌 고유한 특성 때문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지속하는 상황이나 상태를 일반적으로 표시한다. 이것은 왕에게 “만세 수를 하옵소서”(왕상 1:31; 느 2:3 등)라는 표현 등에서 분명해지는데, 이것은 단순히 왕이 장수(長壽)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아브라함의 영적인 씨-은 영광스러운 언약의 후사이므로(갈 3:7, 27~29), “영원한 언약”은 구속의 경륜이 시행되는 한 계속 효력을 유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규정은 세세토록 유용한 것이다. (창 26:3, 만나주석)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기까지는 결코 어떤 백성이나 개인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외부적인 압력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 백성의 신앙을 흐리게 하지 못할 것이다. 순결성과 진리를 실천하는 일을 등한히 함으로 하나님의 영을 근심케 하며 자신의 생애를 약화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저들 가운데 계셔서 축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적인 부패는 하나님의 경고가 예루살렘에 임하였던 것처럼 이 백성에게도 임할 것이다. 아, 탄원의 음성과 열렬한 기도가 들려와야 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자들은 자신이 버림을 받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하며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대의 소돔과 고모라 성과 고대의 예루살렘 성에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게 한 죄들이 우리의 죄가 되지 않게 할 때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이며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2 SM 378)


우리가 무지(無知)함으로 실족(失足)할지라도 구주(救主)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결코 홀로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천사들은 우리의 친구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보혜사(保惠師)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도성(都城)으로 가는 길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없다. 그들이 피할 수 없는 위험들은 없다. 하나님께서 치료의 길을 마련해 주시지 않는 슬픔이 없고, 비애(悲哀)가 없고, 인간적 약점이 없다. (가정과 건강 YHH 206)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기에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순복하면 그 즉시로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심령을 비운다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여 주실 것이다. (교회에 보내는 권면 7T, 213)


<영원한 언약(言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혈통 상 그의 직계 자손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녀로 삼으신 모든 인간에게도 공식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당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언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였고(행 2:39) 사도 바울 역시 이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행 4:31).


<너와 네 후손(後孫)의 하나님이 되리라>

구원의 약속을 함축하고 있는 말로서 곧 모든 언약 내용의 핵심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 은혜로 많은 은사를 주실 뿐 아니라 마침내 자신까지도 내어주신다. 이는 곧 인간 구원을 예기하게 해 주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 자체로서(요 14:6) 자신과 교제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이다. (요 17:3).  (창 17:7, 만나주석)


구속(救贖)의 계획은 인간의 지성(知性)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한다. 하나님 편에서 그토록 낮게 몸을 낮추심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이다. 우리는 그 계획이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깨달을 수가 없고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도 그보다 월등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그것은 신성에다 인성의 옷을 입힌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셔서 죄가 만들어 놓은 진노를 당하심으로써만 성공할 수가 있다. 이 계획을 통하여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될 수가 있고 예수를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모두 다 의롭게 하시는 분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이 인간을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시는 하늘의 구속(救贖) 과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하여, 죄와 죽음에 대한 그의 승리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가 있다. 이 계획을 헤아려 보려 할 때 유한한 인간의 모든 지성은 좌절하고 만다. (편지 43, 1895).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가 햇빛과 소나기가 한데 연합함으로써 생기는 것같이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는 자비와 공의의 연합된 힘을 나타낸다. 공의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는 보좌 위에 있는 언약의 무지개를 이지러지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율법이 내리는 형벌만 보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공의가 없으면 즉 형벌이 없으면 하나님의 정부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은 자비와 공의를 잘 조화시켜 놓은 덕분이다. 우리가 세상의 구속주와 여호와의 율법을 함께 바라볼 때 그 두 속성의 연합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부르짖게 한다. (리뷰 1892.12.13). (요 3:16, 화잇주석)


(16)

<구속(救贖)의 사업은 완성될 것이다.>

 죄가 많던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여진다. 사탄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 바로 이 땅, 지구 자체가 속량함을 받을 뿐 아니라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죄의 저주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물 가운데 한 오점(汚點)이 되었던 이 작은 세계는 하나님의 우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세계보다 더욱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곳,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으로 거하시고 영광의 왕께서 생활하시고 고생하시고 돌아가신 이 땅에서 그가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저희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리하여 무궁한 세대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주의 빛 가운데 다닐 때 그들은 그의 말할 수 없는 선물(‘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시대의 소망,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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