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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안식일과 예배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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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1-07-11 14:56 조회3,1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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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범 목사의 안교교과해설에 대한 3가지 기본 원칙

1. 성경은 비록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므로 모든 말씀          을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의 하나님의 품성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다.(요5:39-40)

2. 교과의 모든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생명과 관련된 핵심적인 부분과 하나님           의 품성에 비추어 볼 때에 오해되거나 이해되어야 할 부분을 중심으로 해설한      다.(눅10:26)

3. 생명 없는 글 자체에 머물기 보다는  그 글을 말씀하신 생명이신 하나님께 초점    을 맞추어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해설을 한다.(고후3:6; 요14:6)


                      제 3 과 안식일과 예배

기억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시95:6-7)


오늘의 기억절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오늘의 기억절을 우리의 품성대로 이해하고 읽으면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를 하나님의 초청으로 잘 못 읽을 수 있다. “너희들은 내 앞에서 굽혀 경배하고 무릎을 꿇어라!” 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거나 강제하실 수 없으시다. 그분의 품성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생명적인 것을 선택하도록 호소하실 수는 있으시지만 강제하실 수는 없다.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또 다른 오해로 읽는 모습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가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기억절의 첫 부분은 시편95편을 지은 시인의 권유로부터 시작하고 권유로 끝난다. “오라......꿇자”.  시인의 개인적 깨달음과 경험으로 인한 확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며 무릎을 꿇을 만한 당연한 이유를 사람들과 공유함으로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권유하고 있다.

시인이 깨달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에 따라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께 즐겨 굽혀 경배하며 무릎을 꿇은 것처럼 자신의 깨달음의 결과로 지은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어 자신과 같은 강제가 아닌 즐겨 굽혀 경배하며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는 예배에 참여하게 되기를 권유하고 있다.

시인이 깨달은 하나님의 품성은 자신의 양을 기르는 목자와 같은 품성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처럼 기르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고 우리를 양처럼 기르시는 모습은 시편23편에서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나와 함께 하시도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시23:1-5)

시편 23편에서 목자는 하나님이시고 양은 우리들이다. 시편 23편에서 목자는 양을 위해 섬기는 모습이다. 양이 목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섬기고 있다. 목자는 양이 좋아하는 풀이 어디에 많이 있는지를 다 살핀 후에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고, 양이 쉴 만한 물 좋은 곳이 어디인지 다 살핀 후에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내게 생명의 활력을 주시기 위해 밤낮 주무시지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생명 에너지를 공급하시고 내가 이 땅에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의 순간에도 언제나 함께 하신다. 나에게 사망 속에 있도록 노력하여 때때로 넘어지게 만들었던 사단 앞에서 나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속하심을 전제로 나를 죄 짓게 하고 나를 자신의 백성이라고 선언하는 사단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시고 내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목자가 양을 위해 섬기고 서비스 하듯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섬기고 서비스 하시는 분이시다.(마20:28)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자신의 생명으로 책임지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런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은 시편95편의 시인은 기쁨 속에서 즐겨 여호와 하나님께 굽혀 경배하며 무릎을 꿇어 섬기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품성을 소개함으로 자신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받는 생명력 넘치는 예배가 되길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빌2:5-11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오해하지 않게 된다.)

안식일에 대한 문제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안식일을 명령처럼 생각할 수 있다. 십계명(명령)에서 가장 핵심적인 명령이 안식일 계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인으로서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변할 수 없는 계명으로, 그리고 일요일이 아닌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거룩하게 지켜야만 정확히 성경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식일은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품성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아니하시는 분이시고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고전 13:5)

그러므로 명령이란 단어가 성경에 쓰여 있어도 그것을 우리의 품성대로 강제하는 명령으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명령에 대한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의 이해는 부탁이다. (레8:35- 하나님께서는 부탁하시지만 모세의 품성 속에서는 그것을 명령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우리의 생명과 관련이 있으므로 강제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우리가 안식일을 나의 생명력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생명의 날로서 인식하고 붙들기를 권유하신다.
이런 기본 생각위에 교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날(일)  창조와 구속: 예배의 기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출20:8)에 대한 하나님 품성 속에서의 이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시간에 풍성한 생명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주셔서 나의 생명의 근원이 우리에게 생명에너지를 불어넣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사람이 파괴할 수 없는 안식일의 시간 속에 두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매 주의 안식일을 통해 받아들여서 안식일 이외의 모든 날들도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의 근원임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생명 속에 있게 하는 방법이므로 안식일을 잊지 말고 구별하고 유지했으면 좋겠어..”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력의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안식일을 창조의 기념일로 이해하면 6천년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과거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창조력의 기념일로 이해하면 매 순간 나의 생명을 위해 생명에너지를 불어넣으시는 우리의 생명과 절대적 관계 속에 연결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안식일에서 오늘날도 매순간 우리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창조력의 근원을 알게 하는 것처럼 또 다른 창조인 구원의 능력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어야만 한다.
구원이 필요한 상태는 죽은 상태 즉 창조되기 전의 상태로 가버린 인간을 살리는 것이므로 그것은 또 다른 창조가 있어야만 한다.

안식일은 창조와 재창조(구원)가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내게 창조력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아담 안에서 창조전의 상태로 되돌아 갔을때도 역시 창조 때와 같은 창조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조와 구원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당연성을 창조주로서의 아버지와 피조물로서의 아들이라는 절대적 관계 속에서 이해 할 때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이 생명적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안식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력과 회복력을 주시고 우리들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로서 당연히 주시는 생명력과 회복력을 통해 재창조되고 회복되어 생명 속에 있게 된다.
주시고 받아야만 되는 절대적 관계로서의 인식이 안식일 예배의 핵심이다.


둘째 날(월)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날이고 지금 살고 있는 내 자신의 생명의 근원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귀한 날이다.
일주일 중 하루의 구별로 인해 나머지 모든 날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시고 매순간 생명에너지를 공급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한다.


셋째 날 (화) 종노릇에서 벗어남

창조와 구속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창조가 없었던 것을 있게 한 것처럼 구속도 없어질 선택의 결과에 대해 다시 있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다시 창조하는 것 즉 재창조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떠났을 때 그것이 죄였고 그때 아담 안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도 함께 죄가 되었고 동시에 죄의 다른 표현처럼 죽었다.(고전15:22)

아담에게 선고된 죽음(창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은 창조되기 전의 무(無)로 돌아갈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장면이 아니라 아담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의 선언이다.

없는 상태에서 있게 하는 것이 창조이고 창조된 존재는 창조하신 분께서 계속적으로 생명을 공급하셔야만 살게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사는 아담이 하나님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 에너지도 거부하고 스스로 살 수 있음을 선택한 것이므로 아담과 그 안에서 태어날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아담은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가 하나님을 거절함으로 그때 죽은 것이고 아담 안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도 그때 이미 죽고 없어진 것이다.

이미 없어졌지만 하나님의 대속을 담보로 유예되어졌고 유예되어진 상태에서 보이는 허상을 사람들은 볼 수 있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질 뿐 실상은 없는 것이다.

없어진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책임지심에 대한 담보로 당장 없어질 상태를 유보하시고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생명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아 우리를 위해 대속하시는 사랑을 봄으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생명)을 받게 하여 생명의 관계가 이어지도록 하셨다.

아담과 그 안에서 태어날 인류의 구원은 당연히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한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본질상 아담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떠난 그때 우리들도 함께 하나님을 떠남으로 무(無)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이 어떻게 없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구원이 창조와 원리가 같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도 창조주 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식일에 창조와 구속의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행실(히6:1)만 할 수 있다.
생명의 일은 생명이신 분만 하실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출애굽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고 종노릇의 상태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와 생명을 누리므로 그 의미를 매주일 안식일을 통해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생명의 행실을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꼭 필요함을 느끼고 확신하여 생명과 지속적으로 연결되도록 하셨다.


넷째 날 (수) 그대를 거룩케 하는 자를 기억하라


우리가 죽은 자이고 생명이 필요한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 때에만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40:6-9)
셋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셋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아들의 이름이 사람들의 말에 오르내릴 때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4:26) 에노스란 이름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살아있는 아이, 생명력이 충만한 어린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부르면서 인간의 실상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허상 속에서 죽은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도 에노스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유일한 희망으로 생명을 주시는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때에야 비로소 인식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성화에 대한 오해중 하나는 성화를 “거룩한 행동의 변화”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생각이다. 없는 사람은 행동도 없고 거룩한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사는 것이다.
성화란 그 말 그대로 생각해보면 “구별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행동의 과정이 있기 전에 먼저 생각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생각이 점점 나의 본질은 티끌이라는 사실과 이 티끌을 흩어지지 않게 흩어지고자 하는 힘보다 더 큰 힘으로 나를 붙드시고 계시는(욥38:37-38)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티끌이 나의 본질인데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티끌인 나를 위해 대신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신 사실에 대해서 점점 감사하게 되고 절대적 신뢰와 의존을 갖게 되는 생각의 과정을 성화라고 한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생각의 변화이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로 연결되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결이 하나님의 품성을 닮는 행동의 변화를 만들게 된다.

안식일 속에서 우리를 쉬게 하시고 대신 일하시는(요5:17)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됨으로 우리의 절대적 필요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과 생명을 공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됨으로 안식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점점 더 의존하게 하고 고정되게 하는 귀한 사랑과 생명의 시간이다.
믿음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이므로 안식일은 강제하는 명령으로는 이룰 수가 없다. 오직 안식일 속에 보여 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신뢰하게 되어 지고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서 점점 하나님 중심이 되게 한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여 생명 속에 있게 하신다.


다섯째 날 (목) 구속의 쉼

창조, 구속, 성화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선물이다.
그때에 우리들은 마음 놓고 쉴 수 있다.
그동안 알게 된 하나님의 품성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그래서 나의 미래를 안심하고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게 된다. 그때에 드디어 쉼을 누리고 평안을 누릴 수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되어 쉼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게 될 때 시편 95편의 시인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굽혀 경배하”게 되고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 경험이 생명적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명이 필요하고 행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사95:6-7)로 권유하게 된다.


예배일 (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준수로 그들이 당신의 경배자로 일컬어지도록 계획하셨다. 안식일은 우상숭배로부터의 그들의 분리와 참 하나님과 연결된 표징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들 자신이 거룩하게 되어야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였다. ... 이렇게 되어야만 안식일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경배자로 구별할 수 있었다.”



개인블로그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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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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