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탕자가 입은 새 옷(예화 및 부가설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5-28 08:45 조회5,843회 댓글3건첨부파일
- 10제10과 탕자가 입은 새 옷.hwp (50.5K) 183회 다운로드 DATE : 2011-05-28 08:45:30
본문
제10과 탕자가 입은 새 옷
6월 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9분
도입)
1669년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1606-1669년)가 속세의 영욕으로 얼룩진 질곡의 삶을 마감한 해였다. 한때 성공한 화가로서 부를 누리다가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채, 한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키는 이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했다고 한다. 이런 고독과 궁핍한 생의 말년에 임한 화가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완성한 위대한 종교화가 바로 (성화) ‘돌아온 탕자’이다. 그림의 주제는 누가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술과 여자 등 정욕을 좇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먹이로 연명하다 결국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는 떠들썩한 잔치나, 탕자를 통해 방종한 삶의 파국을 경고하는 메시지의 극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따스한 온정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떠날 때의 화려했던 옷은 낡았고, 멋지고 탐스러웠을 머리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아들이 아버지 앞에 죄를 뉘우치며 무릎 꿇은 채로 울고 있고, 그를 그윽하게 포옹하는 아버지의 모습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생애에서 하나님께 귀의하고픈 그의 마음과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그림으로 엮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기억절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결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을 떠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만을 줄곧 기다리며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더러움을 자신의 가장 값진 옷으로 덮어주고,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첫째날(일)
5월 29일 같은 아버지, 같은 음식
도입)
같은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은 몇 가지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먼저 남은 것이 전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종과 같이 여긴다는 점이다. 그런 맏아들에게는 사랑이 없었다. 맏아들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재산은 아버지의 소유이다. 둘째에게 몫을 주었다고 해서 나머지는 전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둘째를 가차 없이 매도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버지 앞에서 그 낳은 자식을 이런 식으로 욕할 수 있는가. 아버지는 이르신다. "You are always with me, and everything I have is yours.(Luke 15:31)". 맏아들은 몇 해 동안 스스로 종이 되어 살았다. 아들의 몫을 요구해 본 일이 없다. 아버지에게 염소새끼 한 마리 내어달라고 왜 말을 못하는가. 소를 잡아도 아버지는 오히려 잘했다 하실 것이다. 어떤 소유든 맏아들의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권리로써 아버지의 소유를 누리는 것이다. 오래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더불어 아들의 기쁨을 누리는 것 또한 곧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역지사지로 맏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빈털털이로 돌아온다면 아버지가 내버려 두시겠는가. 똑같이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가 인간적으로 미울찌라도 돌이켰음을 가족으로써라도 기뻐해야 했다. 동생이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으로 버려지는 데 형된 자가 팔짱 끼고 방관한다면 오히려 동생보다 못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어떻게든 죄악에 빠지기 전에 돌이키도록 권유하고, 돌아온 동생을 전심으로 아버지와 같이 기뻐하는 것이 형제의 본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눅 15:11).
교훈: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신다.
부가적용)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가르침 중의 하나는 자기의(自己義)와 자기애(自己愛)이다. 첫째 아들은 자기의에 빠져서 삶을 낭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 왔으나 그도 탕자이었기는 매한가지이다. 자신의 삶의 노예처럼 일 한 것은 아버지께 아들의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일꾼의 입장에서 한 것과 다른 이에 대한 배려 및 용서를 하지 않은 것이 탕자가 되는 이유인 것이다. 둘째 아들은 자기애에 빠져서 삶을 낭비 한 것과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여 삶을 낭비한 죄와 결국에는 좌절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최악의 삶을 경험 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은혜의 손길을 잊지 않고 아버지를 찾아 가는 용기로 인하여 용서함을 받고 아버지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도 살다가 보면 자기의와 자기애에 빠지는 유혹을 받는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확신이 강하여 自己義에 빠지기가 쉽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이 그런 경우의 극단적인 예이고,,, 흔히 자신에 철저한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및 용서가 부족한 것이다. 또한 이기적이고 자기 연민 및 自己愛가 강한 사람들은 쉽게 타락하거나.. 성적으로 치우쳐..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잊지 않는 점에서 첫 번째 아들보다는 구원과 거듭남의 가능성이 많음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영감의 교훈 •
▶ 아버지의 품성을 오해함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다”(실물교훈, 198).
둘째날(월)
5월 30일 그분의 날개를 폄
도입)
신앙은 그동안 자신의 눈으로 생각으로만 살아왔던 삶을 이젠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언제나 부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처럼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우리 모두가 부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 인생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이제 더 이상 갈곳이 없다고 생각할 때 인생이 마지막 부빌 언덕이 되어주실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교훈: 우리가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에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할지라도 마음을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신다.
부가적용)
우리는 성경에서 오른편 강도나..감성적이고 이기적인 야곱이나 철없어 보이는 어린 요셉 등 다혈질인 베드로 등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보는데 저들 역시 자기의와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들이 축복이요 꿈이며 야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야 성취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좌뇌와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우뇌를 갖고 있다. 사랑과 공의 하나님처럼 우리도 이를 균형적으로 지헤롭게 사용하고 시기적절하게 써야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결국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의 탕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차가운 머리와 따듯한 가슴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집으로 가야 할 때
“그가 가장 비천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친절과 사랑을 생각하였다. 그제야 그는 아버지의 필요성을 느꼈다”(교회증언 3권, 101).
셋째날(화)
5월 31일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도입)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두 아들 중 큰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오해했지만 아버지의 행동거지를 닮았다. 그래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의를 열심히 쌓고 있었다. 관계성에서 출발하지 않은 행위 즉 사랑 없는 행위는 자기 의를 쌓게 되어 있다. 둘째 아들은 행동거지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성품이 사랑이심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철없는 둘째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탕진한 결과로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싶을 만큼 고생하다가 아버지가 자신을 품으실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다시 깨닫고 아버지께 돌이킨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20).
교훈: 하나님을 떠나기로 결심한 죄인들도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자들도 기꺼이 회복시켜 주신다.
부가적용)
조지 워싱턴이 어렸을 때에 그 아버지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쓰는 조그만한 도끼를 하나 사주었다. 손으로 던지면 빙빙 돌다가 벽에 탁 박히는게 어린 워싱턴은 너무도 신이 났다. 그래서 도끼를 들고 사방에 뛰어 다니다가 실수로 그만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체리나무를 찍어버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겁이 난 워싱턴은 아무도 몰래 땅을 파고 그 나무를 묻어 버렸다. 그리고 모른 척했다. 하지만 아버지 보기가 민망해서 슬슬 피해 다녔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조지 워싱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도끼를 휘두르다가 실수로 그 체리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나는 네가 한 짓 인줄 벌써 알고 있었단다. 너 외에 누가 했겠느냐 그러나 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단다. 너는 참으로 위대하구나.' 칭찬해 주었다. 거기서 조지 워싱턴이 다시 태어났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약하면서도 고집스럽고 우둔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가? 사랑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시기로 목표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사랑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저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도 크신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라도 돌아오라” 회개를 안타깝게 외치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우선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이 먼저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실수한 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접촉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오셨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그분은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무한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의 극기와 자아 희생, 그분의 이기심 없는 활동, 그분의 굴욕,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은 타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증거한다.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교회증언 5권, 603).
넷째날(수)
6월 1일 제일 좋은 옷
도입)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 둘째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상징하는 옷이다. 언제나 기억하고 고백하고 감사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이다(마7: 11). 안아줌, 입맞춤, 살진 송아지...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게는 준비하신 제일 좋은 옷을 내어줄 수 없고, 입혀주실 수가 없다.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내어입히신다. 죄인이 예수 믿고 돌아와 회개하면 구원을 주시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성도들이 돌아와 믿음으로 살고 기도로 살면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풍성한 긍휼을 입고 은혜를 입는다(이사야55:7).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돌아오라”는 신호를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 아들에게 입히라고 말했다. “제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가장” 혹은 “첫 번째”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아들에게 주고 있다.
교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면 그분은 그 순간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모든 좋은 것들을 허락하신다.
부가적용)
조선왕조(朝鮮王朝) 때에 어느 대신이 중국에서 얻어온 귀한 도자기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10개가 한 벌로 된 것이었다. 이것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쓰는 아기고 아끼는 보물이었다.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왔으므로 이것을 꺼내어 대접하는 그릇으로 쓰게 하였다. 그런데 하인이 실수하여 그만 하나를 깨뜨렸다. 이 하인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종 하나쯤 죽이는 것은 대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짓장처럼 질린 하인을 향하여 대감은 부드럽게 말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자 얼른 열심히 일이나 해라." 이 종은 황공하게 물러나왔다. 그날 그 손님이 떠나간 후에 주인은 그 종을 불렀다. 그 종은 염려하는 마음으로 부복하였다. "너는 가서 그 접시를 모두 가지고 오너라." 종은 그 나머지 9개를 주인 앞에 공손히 갖다 놓고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지라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웬 일인가? 대감은 그 접시를 하나 들더니 마당에 동댕이쳐 깨는 것이 아닌가! 그 종은 황급히 대감의 손을 붙들고 소리쳤다. "대감마님! 고정하시고, 차라리 이놈을 죽여주십시오, 어찌 이 보물을 동댕이치십니까?" 그러나 주인 대감은 부드럽게 종을 물려 앉히고 9개의 접시를 모두 깨뜨렸다. 모든 종들이 안절부절이요, 식구들은 영문을 몰라 벙벙하였다. 드디어 대감은 오히려 시원한 표정을 쾌할하게 말하였다. "너무 놀랄 것 없다. 너는 이 접시를 깨었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내가 이 접시를 모두 깨뜨린 이유는 이렇다. 이 나머지 9개를 볼 때마다. 네가 깨뜨린 한 개가 내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고 너도 이것을 볼 때마다 항상 황송한 죄책감을 가지게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깨뜨려 완전히 없으면 너와 내가 모두 이 문제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고 평안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모두 깨뜨린 것이니 염려마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면제한 것은 이 대감의 행위보다 더욱 철저하다. 탕자의 이야기에서, 탕자가 저질러 놓은 죄의 결과들이 돌아온 아들에게 몰려와서 보상을 요구할 때 그것은 아버지가 책임진다. 아들은 거기에 대하여 염려하거나 노력하여 보상할 모든 책임에서 자유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참된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는 어떤 교역자는 죄인을 책망하기는 급히 하고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뒤에 감추어 버린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진상-곧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영접하기 위하여 애타게 기다리시며, 그에게 노염을 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환영할 잔치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하늘 아버지의
참모습을 죄인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라. 아,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복음교역자, 157).
다섯째날(목)
6월 2일 아버지 자신의 옷
도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은 정죄 상태에 놓여있다. 사람 스스로는 도무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의 옷을 갈아입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대신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종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아무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를 대신해 인성의 옷을 쓰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입으신 옷이며,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입혀주신 옷, 제일 좋은 옷, 구원의 옷으로 입혀주실 수가 있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아버지는 아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기를 원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과거를 곱씹지 말아야 함에 대한 얼마나 귀중한 교훈인가?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가장 나쁜 죄가 무엇인지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고전 4:5).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전진할 필요가 있다(빌 3:13~14).
눅 15:24를 읽어보라. 결국에는 구원의 최종적인 문제에 있어서 중간 지대란 없다. 대쟁투가 끝나고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될 때, 사람들도 각각 영원히 살든지 아니면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서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교훈: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우리의 잘못과 수치를 속히 가리고,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각양 은사들을 부어주기 바라신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받게 된 구속 곧 죄사함은 곧 모든 백성들에게 자기의 거룩한 옷을 입혀 주신 그리스도의 의이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옷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 태어난 모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를 가져와 우리를 변화시킨 옷이다. 탕자의 삶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듯이 우리는 아버지께서 입혀주신 새 옷을 입은 새로운 아들이 될 것이다.
| 적용 |
그대의 신앙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대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결심을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 아버지의 품성을 이해함
“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디딘다 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그 순간에 그분은 그것을 아신다”(실물교훈, 206).
예비일(금)
6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198~211 “탕자”, 260 “부자와 나사로”, 시대의 소망, 495~496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 교회증언 3권, 100 ~104 “잃어버린 자의 비유들.”
“주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인자하게 인류를 대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라. 천부께서는 탕자를 사랑하사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신다. 이제 천부의 팔은 회개한 아들을 껴안으시고, 천부의 옷은 그의 남루한 옷을 가리며, 그 왕족에 참예한 표로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신다. 그런데, 이런 탕자를 보고 그에게 냉정히 대할 뿐 아니라 멸시하며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 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자처하고, 또한 많은 유혹과 악전고투하는 여러 영혼들을 보면서도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제멋대로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정하게 방관하고만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실까?”(복음교역자, 1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가정과 환경 속에서 자란 형제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토의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➋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희망과 약속과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6월 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9분
도입)
1669년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1606-1669년)가 속세의 영욕으로 얼룩진 질곡의 삶을 마감한 해였다. 한때 성공한 화가로서 부를 누리다가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채, 한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키는 이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했다고 한다. 이런 고독과 궁핍한 생의 말년에 임한 화가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완성한 위대한 종교화가 바로 (성화) ‘돌아온 탕자’이다. 그림의 주제는 누가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술과 여자 등 정욕을 좇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 먹이로 연명하다 결국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는 떠들썩한 잔치나, 탕자를 통해 방종한 삶의 파국을 경고하는 메시지의 극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따스한 온정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떠날 때의 화려했던 옷은 낡았고, 멋지고 탐스러웠을 머리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아들이 아버지 앞에 죄를 뉘우치며 무릎 꿇은 채로 울고 있고, 그를 그윽하게 포옹하는 아버지의 모습만이 존재하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생애에서 하나님께 귀의하고픈 그의 마음과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그림으로 엮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기억절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결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을 떠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만을 줄곧 기다리며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더러움을 자신의 가장 값진 옷으로 덮어주고,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첫째날(일)
5월 29일 같은 아버지, 같은 음식
도입)
같은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은 몇 가지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먼저 남은 것이 전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종과 같이 여긴다는 점이다. 그런 맏아들에게는 사랑이 없었다. 맏아들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재산은 아버지의 소유이다. 둘째에게 몫을 주었다고 해서 나머지는 전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둘째를 가차 없이 매도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버지 앞에서 그 낳은 자식을 이런 식으로 욕할 수 있는가. 아버지는 이르신다. "You are always with me, and everything I have is yours.(Luke 15:31)". 맏아들은 몇 해 동안 스스로 종이 되어 살았다. 아들의 몫을 요구해 본 일이 없다. 아버지에게 염소새끼 한 마리 내어달라고 왜 말을 못하는가. 소를 잡아도 아버지는 오히려 잘했다 하실 것이다. 어떤 소유든 맏아들의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권리로써 아버지의 소유를 누리는 것이다. 오래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더불어 아들의 기쁨을 누리는 것 또한 곧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역지사지로 맏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빈털털이로 돌아온다면 아버지가 내버려 두시겠는가. 똑같이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가 인간적으로 미울찌라도 돌이켰음을 가족으로써라도 기뻐해야 했다. 동생이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으로 버려지는 데 형된 자가 팔짱 끼고 방관한다면 오히려 동생보다 못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어떻게든 죄악에 빠지기 전에 돌이키도록 권유하고, 돌아온 동생을 전심으로 아버지와 같이 기뻐하는 것이 형제의 본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눅 15:11).
교훈: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신다.
부가적용)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가르침 중의 하나는 자기의(自己義)와 자기애(自己愛)이다. 첫째 아들은 자기의에 빠져서 삶을 낭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 왔으나 그도 탕자이었기는 매한가지이다. 자신의 삶의 노예처럼 일 한 것은 아버지께 아들의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일꾼의 입장에서 한 것과 다른 이에 대한 배려 및 용서를 하지 않은 것이 탕자가 되는 이유인 것이다. 둘째 아들은 자기애에 빠져서 삶을 낭비 한 것과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여 삶을 낭비한 죄와 결국에는 좌절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최악의 삶을 경험 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은혜의 손길을 잊지 않고 아버지를 찾아 가는 용기로 인하여 용서함을 받고 아버지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우리도 살다가 보면 자기의와 자기애에 빠지는 유혹을 받는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확신이 강하여 自己義에 빠지기가 쉽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이 그런 경우의 극단적인 예이고,,, 흔히 자신에 철저한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및 용서가 부족한 것이다. 또한 이기적이고 자기 연민 및 自己愛가 강한 사람들은 쉽게 타락하거나.. 성적으로 치우쳐..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잊지 않는 점에서 첫 번째 아들보다는 구원과 거듭남의 가능성이 많음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영감의 교훈 •
▶ 아버지의 품성을 오해함
“이 둘째 아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그는 자기의 기분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였다”(실물교훈, 198).
둘째날(월)
5월 30일 그분의 날개를 폄
도입)
신앙은 그동안 자신의 눈으로 생각으로만 살아왔던 삶을 이젠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언제나 부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처럼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우리 모두가 부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 인생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이제 더 이상 갈곳이 없다고 생각할 때 인생이 마지막 부빌 언덕이 되어주실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교훈: 우리가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에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할지라도 마음을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신다.
부가적용)
우리는 성경에서 오른편 강도나..감성적이고 이기적인 야곱이나 철없어 보이는 어린 요셉 등 다혈질인 베드로 등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보는데 저들 역시 자기의와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예외 없이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들이 축복이요 꿈이며 야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야 성취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좌뇌와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우뇌를 갖고 있다. 사랑과 공의 하나님처럼 우리도 이를 균형적으로 지헤롭게 사용하고 시기적절하게 써야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결국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의 탕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차가운 머리와 따듯한 가슴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집으로 가야 할 때
“그가 가장 비천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친절과 사랑을 생각하였다. 그제야 그는 아버지의 필요성을 느꼈다”(교회증언 3권, 101).
셋째날(화)
5월 31일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도입)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두 아들 중 큰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오해했지만 아버지의 행동거지를 닮았다. 그래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의를 열심히 쌓고 있었다. 관계성에서 출발하지 않은 행위 즉 사랑 없는 행위는 자기 의를 쌓게 되어 있다. 둘째 아들은 행동거지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성품이 사랑이심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철없는 둘째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탕진한 결과로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싶을 만큼 고생하다가 아버지가 자신을 품으실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다시 깨닫고 아버지께 돌이킨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20).
교훈: 하나님을 떠나기로 결심한 죄인들도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자들도 기꺼이 회복시켜 주신다.
부가적용)
조지 워싱턴이 어렸을 때에 그 아버지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쓰는 조그만한 도끼를 하나 사주었다. 손으로 던지면 빙빙 돌다가 벽에 탁 박히는게 어린 워싱턴은 너무도 신이 났다. 그래서 도끼를 들고 사방에 뛰어 다니다가 실수로 그만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체리나무를 찍어버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겁이 난 워싱턴은 아무도 몰래 땅을 파고 그 나무를 묻어 버렸다. 그리고 모른 척했다. 하지만 아버지 보기가 민망해서 슬슬 피해 다녔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조지 워싱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도끼를 휘두르다가 실수로 그 체리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나는 네가 한 짓 인줄 벌써 알고 있었단다. 너 외에 누가 했겠느냐 그러나 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단다. 너는 참으로 위대하구나.' 칭찬해 주었다. 거기서 조지 워싱턴이 다시 태어났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약하면서도 고집스럽고 우둔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가? 사랑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시기로 목표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사랑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저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도 크신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라도 돌아오라” 회개를 안타깝게 외치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우선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이 먼저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실수한 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접촉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오셨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그분은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무한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의 극기와 자아 희생, 그분의 이기심 없는 활동, 그분의 굴욕,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은 타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증거한다.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교회증언 5권, 603).
넷째날(수)
6월 1일 제일 좋은 옷
도입)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 둘째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상징하는 옷이다. 언제나 기억하고 고백하고 감사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이다(마7: 11). 안아줌, 입맞춤, 살진 송아지...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게는 준비하신 제일 좋은 옷을 내어줄 수 없고, 입혀주실 수가 없다.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내어입히신다. 죄인이 예수 믿고 돌아와 회개하면 구원을 주시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성도들이 돌아와 믿음으로 살고 기도로 살면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풍성한 긍휼을 입고 은혜를 입는다(이사야55:7).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돌아오라”는 신호를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 아들에게 입히라고 말했다. “제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가장” 혹은 “첫 번째”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아들에게 주고 있다.
교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면 그분은 그 순간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모든 좋은 것들을 허락하신다.
부가적용)
조선왕조(朝鮮王朝) 때에 어느 대신이 중국에서 얻어온 귀한 도자기 한 벌을 가지고 있었다. 10개가 한 벌로 된 것이었다. 이것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쓰는 아기고 아끼는 보물이었다.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왔으므로 이것을 꺼내어 대접하는 그릇으로 쓰게 하였다. 그런데 하인이 실수하여 그만 하나를 깨뜨렸다. 이 하인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종 하나쯤 죽이는 것은 대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짓장처럼 질린 하인을 향하여 대감은 부드럽게 말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자 얼른 열심히 일이나 해라." 이 종은 황공하게 물러나왔다. 그날 그 손님이 떠나간 후에 주인은 그 종을 불렀다. 그 종은 염려하는 마음으로 부복하였다. "너는 가서 그 접시를 모두 가지고 오너라." 종은 그 나머지 9개를 주인 앞에 공손히 갖다 놓고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지라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웬 일인가? 대감은 그 접시를 하나 들더니 마당에 동댕이쳐 깨는 것이 아닌가! 그 종은 황급히 대감의 손을 붙들고 소리쳤다. "대감마님! 고정하시고, 차라리 이놈을 죽여주십시오, 어찌 이 보물을 동댕이치십니까?" 그러나 주인 대감은 부드럽게 종을 물려 앉히고 9개의 접시를 모두 깨뜨렸다. 모든 종들이 안절부절이요, 식구들은 영문을 몰라 벙벙하였다. 드디어 대감은 오히려 시원한 표정을 쾌할하게 말하였다. "너무 놀랄 것 없다. 너는 이 접시를 깨었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내가 이 접시를 모두 깨뜨린 이유는 이렇다. 이 나머지 9개를 볼 때마다. 네가 깨뜨린 한 개가 내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고 너도 이것을 볼 때마다 항상 황송한 죄책감을 가지게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깨뜨려 완전히 없으면 너와 내가 모두 이 문제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고 평안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모두 깨뜨린 것이니 염려마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면제한 것은 이 대감의 행위보다 더욱 철저하다. 탕자의 이야기에서, 탕자가 저질러 놓은 죄의 결과들이 돌아온 아들에게 몰려와서 보상을 요구할 때 그것은 아버지가 책임진다. 아들은 거기에 대하여 염려하거나 노력하여 보상할 모든 책임에서 자유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참된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는 어떤 교역자는 죄인을 책망하기는 급히 하고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뒤에 감추어 버린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진상-곧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영접하기 위하여 애타게 기다리시며, 그에게 노염을 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환영할 잔치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하늘 아버지의
참모습을 죄인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라. 아,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복음교역자, 157).
다섯째날(목)
6월 2일 아버지 자신의 옷
도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은 정죄 상태에 놓여있다. 사람 스스로는 도무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의 옷을 갈아입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대신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종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아무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를 대신해 인성의 옷을 쓰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입으신 옷이며,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입혀주신 옷, 제일 좋은 옷, 구원의 옷으로 입혀주실 수가 있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아버지는 아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기를 원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과거를 곱씹지 말아야 함에 대한 얼마나 귀중한 교훈인가?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가장 나쁜 죄가 무엇인지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고전 4:5).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전진할 필요가 있다(빌 3:13~14).
눅 15:24를 읽어보라. 결국에는 구원의 최종적인 문제에 있어서 중간 지대란 없다. 대쟁투가 끝나고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될 때, 사람들도 각각 영원히 살든지 아니면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서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교훈: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우리의 잘못과 수치를 속히 가리고,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각양 은사들을 부어주기 바라신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받게 된 구속 곧 죄사함은 곧 모든 백성들에게 자기의 거룩한 옷을 입혀 주신 그리스도의 의이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옷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 태어난 모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를 가져와 우리를 변화시킨 옷이다. 탕자의 삶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듯이 우리는 아버지께서 입혀주신 새 옷을 입은 새로운 아들이 될 것이다.
| 적용 |
그대의 신앙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대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결심을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 아버지의 품성을 이해함
“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디딘다 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그 순간에 그분은 그것을 아신다”(실물교훈, 206).
예비일(금)
6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198~211 “탕자”, 260 “부자와 나사로”, 시대의 소망, 495~496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 교회증언 3권, 100 ~104 “잃어버린 자의 비유들.”
“주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인자하게 인류를 대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라. 천부께서는 탕자를 사랑하사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신다. 이제 천부의 팔은 회개한 아들을 껴안으시고, 천부의 옷은 그의 남루한 옷을 가리며, 그 왕족에 참예한 표로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신다. 그런데, 이런 탕자를 보고 그에게 냉정히 대할 뿐 아니라 멸시하며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 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자처하고, 또한 많은 유혹과 악전고투하는 여러 영혼들을 보면서도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제멋대로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정하게 방관하고만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실까?”(복음교역자, 1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가정과 환경 속에서 자란 형제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토의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➋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희망과 약속과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댓글목록
한마음님의 댓글
한마음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말씀감사합니다.
추사님의 댓글
추사 작성일
항상 영감있는 해석으로 교과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리노님의 댓글
바울리노 작성일
가슴이 훈훈 해 옴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