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탕자가 입은 새 옷(질문, 대답, 부가설명)0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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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5-27 23:16 조회8,956회 댓글2건본문
6월 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9분
기억절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연구 범위: 창 4:1~8, 25:25~34, 눅 15:4~32, 요 11:9~10, 롬 5:12~20.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비(Rain)>라는 단편 소설은 한 매춘부를 “교화”시킨 남태평양의 한 선교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록 그의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냉정했을지라도, 그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사실 그는 그녀가 도망쳐 나온 미국으로 돌아가 형량(形量)을 마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겪게 될 고문과 멸시와 치욕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수형생활은 그녀가 반드시 치러야 할 회개의 과정이라는 그의 주장 때문에 마침내 그녀는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뜻밖의 사건으로 끝난다. 파도가 넘실대는 백사장에서 그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는 매춘부를 교화시키는 내내 그녀와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어 자살하고 만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것은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신 은혜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확신이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집을 떠나려는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과 그가 돌아왔을 때, 첫째 아들의 반응과 대조되는 그의 반응을 살펴본다.
➋느끼기 : 돌아온 아들에게 보여준 아버지의 동정심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속에 마르지 않는 샘을 열게 한다.
➌행하기 :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로써 자신과 타인을 사랑한다.
결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을 떠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만을 줄곧 기다리며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더러움을 자신의 가장 값진 옷으로 덮어주고,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첫째날(일)
5월 29일 같은 아버지, 같은 음식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눅 15:11).
질문1: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어디에 또 나오는가?(창 4:1~8, 25:25~34)
[창4:1~8]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25:25~34]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답: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이들 형제들이 서로 다른 성격을 나타내었다.
<부가설명> 쌍둥이로 태어났어도 성격이 다르고 인격이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 사람의 상태인 것 같다. 죄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성질이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유대 열왕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하스 같은 악한 왕에게 히스기야 같은 선한 아들이 나왔는가 하면, 선한 히스기야의 아들은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이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각 사람은 각기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이다. 조상의 은덕도 아니고 형제와 친구와 이웃의 공로도 아니다. 오직 각기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다 개인적으로 태어난다. 비록 쌍둥이가 태어나도 역시 개인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선다고 했고 각각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5~7)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우리는 각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질문2: 눅 15:12을 읽어보라. 아들의 요청에 반응하는 아버지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이는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깨달음을 얻게 하는가?
[눅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답: 하나님은 우리들이 생각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신다. 그러나 그릇된 결정을 한 결과를 내다보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방적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결과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 여호와를 나타내시고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셨다. 창세기 2장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라고 생각한다.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는 구원의 기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용서가 전제된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신다.
둘째날(월)
5월 30일 그분의 날개를 폄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질문: 눅 15:13~19을 읽어보라. 그대는 여기서 어떤 종류의 회개를 보게 되는가? 그는 정말 회개하고 뉘우쳤는가? 아니면 단지 결과를 아쉬워했는가? 본문은 답이 될 만한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가?
[눅15:13~19]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답: 처음에는 자기의 딱한 처지 때문에 아버지 집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돌이키고 아버지께 어떻게 말할 것을 생각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뉘우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자기의 딱한 사정 때문이라고 해도 문에서 기다리다가 뛰어오시는 아버지를 봤을 때 그의 마음이 진심이 안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가설명> 사람은 희한한 존재이다. 몸에 물리적인 피해를 입기 전에는 자기의 처지를 고치려는 생각이 별로 없는 존재들이다. 담배가 몸에 해롭고 술이 몸에 해롭다고 알고 있어도 그것이 표 나는 질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계속 습관대로 행한다. 그러다 급기야 간암이나 폐암이라고 진단이 나면 그때부터 금연한다, 금주한다, 부산을 떨지만 너무 늦게 된다. 그런데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서는 그런 생명의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에 더 반응이 굼뜨다. 탕자처럼 굶게 되었다든지, 돼지우리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서는 그런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 탕자 같은 경험이라도 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좋은까. 그래서 하나님은 채찍을 대시는 것이 아닐까. 성경에 나타난 책망이나 무서운 경고들은 그렇게 해야 돌아와 생명을 얻을 것을 아시는 아버지의 고육지책의 사랑이 틀림없다. 아 한없는 아버지의 이 사랑!
교훈: 우리가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에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할지라도 마음을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신다.
셋째날(화)
5월 31일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20).
질문: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의 재회를 위해 긴 여정을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읽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를 탕자의 비유와 비교해 보라(눅 15:4~10). 여기에 어떤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가?
답: 집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 사람은 탕자 본인이다. 그러나 양과 은전의 비유에서는 목자와 주모가 찾아 나섰다.
<부가설명>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잃은 것에 대한 비유가 있다. 첫째 것이 잃은 양의 비유이다. 양은 잃어버려진 상태를 알지만 돌아갈 길을 모르는 무리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목자가 찾아가면 반갑게 반응한다. 잃은 은전에 대한 비유는 잃어버려진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은 부류에 대한 비유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것이 가장 어려운지도 모른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 부류에 속해 있지 않을까? 탕자는 잃어버려진 것도 알고 돌아가는 길도 아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비유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체면이라는 자존심만 버리면 진리에 굴복할 수 있는데, 이 자존심이 그들을 얽어매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상태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할 때 생명의 길로 나오기가 용이할 것이다. 현재의 인간의 자아는 사망의 자아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다양한 청중들을 보라. 거기에는 세리도 있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때의 사건이나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멸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 대신,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과 돌보심을 보여주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교훈: 하나님을 떠나기로 결심한 죄인들도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자들도 기꺼이 회복시켜 주신다.
넷째날(수)
6월 1일 제일 좋은 옷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질문: 눅 15:20~24을 읽어보라. 아들의 고백에 대하여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아들은 얼마나 뉘우치고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어떤 기별을 배우게 되는가?(렘 31:17~20 참고)
[눅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답: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 순간을 압도했다. 돌아온 사실만으로 아버지는 기뻤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신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입히신 그런 옷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예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부가설명> 나는 이 장면에서 기쁨을 위하여 희생된 살진 송아지를 주목한다. 다시 살아난 생명의 기쁨을 위하여 송아지는 생명을 잃었다. 인류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탕자가 돌아온 것이 송아지를 잡은 것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하여서는 예수께서 피를 흘려 죽으셔야 했다.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 중에서 장사를 잘 한 종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인류를 구원하여 하늘에 함께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우주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의 즐거움이다.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셨다. 그것은 영생의 옷이 아니겠는가. 영생의 옷을 덧입히신 아버지, 주었다가 살아난 아들의 생명의 질을 잘 가르쳐주는 표현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즐거워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명을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느끼시는 우리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시고도 기뻐하시는 주님,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시니(사53:11) 황송하지만 우리도 함께 즐거움에 참여해야지요.
교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면 그분은 그 순간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모든 좋은 것들을 허락하신다.
다섯째날(목)
6월 2일 아버지 자신의 옷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정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순종하는 남녀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 부친은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다”(실물교훈, 203~204).
질문1: 위에 있는 인용문은 탕자의 비유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떤 통찰력을 주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답: 아들의 과거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또 집에 있는 종들이 아들이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하는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다. 주었을 때 사실들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부가설명> 인류는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예수를 알기 전에 있었던 일을 묻지 않으신다. 그때는 죽은 상태에서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죽어 생명을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일이 고백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으로 다 된 것이다.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올 때도 사정은 동일하다. 우리의 자비의 아버지께서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선언하신다. 그에게 새 새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신다. 그 순간이 가장 완전하고 거룩한 순간이 아닌가. d;제부터 이 아들은 이 가장 좋은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그래도 더럽혀지면 지체하지 말고 예수의 피에 씻어 희게 해야 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그들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권세를 얻는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질문2: 눅 15:24을 읽어보라. 아버지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강력한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답: 이 말씀은 사람에게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즉 사망도 아니요 생존도 아닌 그런 상태가 없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죽었든지 살아 있든지 두 상태뿐이다.
<부가설명>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뜻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은 아버지 편에서 아들과 분리되었으나 이제 재결합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물과 죄로 죽은”(엡2:1)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다.(고전15:22) 이런 자들의 행동은 죽은 행실이다.(히6:1, 9:14) 사람의 이런 죽은 상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요11:25)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반응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요5:24,25) 탕자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 죽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돼지를 치며 쥐엄 열매를 먹으며 돼지우리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산 것이 아니라, 죽어서 썩어져가도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죽은 자들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이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행실은 죽은 행실이 된다. 예수께로 나아올 때 어린아이라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19:14)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어린아이는 천국에 간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한다. 예수께 나아오는 어린아이가 천국에 가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 없이는 갓 태어난 아기도 아담 안에서 죽은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아기일 수밖에 없다. 결코 중립지대가 없다는 말이다.
교훈: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우리의 잘못과 수치를 속히 가리고,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각양 은사들을 부어주기 바라신다.
예비일(금)
6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198~211 “탕자”, 260 “부자와 나사로”, 시대의 소망, 495~496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 교회증언 3권, 100 ~104 “잃어버린 자의 비유들.”
“주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인자하게 인류를 대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라. 천부께서는 탕자를 사랑하사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신다. 이제 천부의 팔은 회개한 아들을 껴안으시고, 천부의 옷은 그의 남루한 옷을 가리며, 그 왕족에 참예한 표로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신다. 그런데, 이런 탕자를 보고 그에게 냉정히 대할 뿐 아니라 멸시하며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 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자처하고, 또한 많은 유혹과 악전고투하는 여러 영혼들을 보면서도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제멋대로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정하게 방관하고만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실까?”(복음교역자, 1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가정과 환경 속에서 자란 형제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토의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이 사실은 일요일 첫째 질문의 부가설명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거기 찾아 참고하기 바란다.
➋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희망과 약속과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설명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탕자는 그의 곤고한 생활 사정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을 겪는 사람들 중에는 현실적으로 탕자 같은 상태도 아니고 마음도 탕자 같이 절실하지 않을 때 권고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든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사정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형편이 어떻든지 성경말씀의 기록과 약속을 그대로 수용하는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권고의 실마리를 틀 수 있지 않을까?
일몰:오후 7시 49분
기억절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연구 범위: 창 4:1~8, 25:25~34, 눅 15:4~32, 요 11:9~10, 롬 5:12~20.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비(Rain)>라는 단편 소설은 한 매춘부를 “교화”시킨 남태평양의 한 선교사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록 그의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냉정했을지라도, 그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사실 그는 그녀가 도망쳐 나온 미국으로 돌아가 형량(形量)을 마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겪게 될 고문과 멸시와 치욕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수형생활은 그녀가 반드시 치러야 할 회개의 과정이라는 그의 주장 때문에 마침내 그녀는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뜻밖의 사건으로 끝난다. 파도가 넘실대는 백사장에서 그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는 매춘부를 교화시키는 내내 그녀와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어 자살하고 만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것은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신 은혜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확신이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집을 떠나려는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과 그가 돌아왔을 때, 첫째 아들의 반응과 대조되는 그의 반응을 살펴본다.
➋느끼기 : 돌아온 아들에게 보여준 아버지의 동정심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속에 마르지 않는 샘을 열게 한다.
➌행하기 :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로써 자신과 타인을 사랑한다.
결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을 떠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만을 줄곧 기다리며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더러움을 자신의 가장 값진 옷으로 덮어주고,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첫째날(일)
5월 29일 같은 아버지, 같은 음식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눅 15:11).
질문1: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어디에 또 나오는가?(창 4:1~8, 25:25~34)
[창4:1~8]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25:25~34]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답: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이들 형제들이 서로 다른 성격을 나타내었다.
<부가설명> 쌍둥이로 태어났어도 성격이 다르고 인격이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 사람의 상태인 것 같다. 죄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성질이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유대 열왕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하스 같은 악한 왕에게 히스기야 같은 선한 아들이 나왔는가 하면, 선한 히스기야의 아들은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이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각 사람은 각기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이다. 조상의 은덕도 아니고 형제와 친구와 이웃의 공로도 아니다. 오직 각기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다 개인적으로 태어난다. 비록 쌍둥이가 태어나도 역시 개인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선다고 했고 각각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5~7)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우리는 각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질문2: 눅 15:12을 읽어보라. 아들의 요청에 반응하는 아버지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이는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깨달음을 얻게 하는가?
[눅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답: 하나님은 우리들이 생각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신다. 그러나 그릇된 결정을 한 결과를 내다보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방적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결과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 여호와를 나타내시고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셨다. 창세기 2장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라고 생각한다.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는 구원의 기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용서가 전제된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신다.
둘째날(월)
5월 30일 그분의 날개를 폄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질문: 눅 15:13~19을 읽어보라. 그대는 여기서 어떤 종류의 회개를 보게 되는가? 그는 정말 회개하고 뉘우쳤는가? 아니면 단지 결과를 아쉬워했는가? 본문은 답이 될 만한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가?
[눅15:13~19]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답: 처음에는 자기의 딱한 처지 때문에 아버지 집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돌이키고 아버지께 어떻게 말할 것을 생각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뉘우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자기의 딱한 사정 때문이라고 해도 문에서 기다리다가 뛰어오시는 아버지를 봤을 때 그의 마음이 진심이 안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가설명> 사람은 희한한 존재이다. 몸에 물리적인 피해를 입기 전에는 자기의 처지를 고치려는 생각이 별로 없는 존재들이다. 담배가 몸에 해롭고 술이 몸에 해롭다고 알고 있어도 그것이 표 나는 질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계속 습관대로 행한다. 그러다 급기야 간암이나 폐암이라고 진단이 나면 그때부터 금연한다, 금주한다, 부산을 떨지만 너무 늦게 된다. 그런데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서는 그런 생명의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에 더 반응이 굼뜨다. 탕자처럼 굶게 되었다든지, 돼지우리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떨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서는 그런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 탕자 같은 경험이라도 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좋은까. 그래서 하나님은 채찍을 대시는 것이 아닐까. 성경에 나타난 책망이나 무서운 경고들은 그렇게 해야 돌아와 생명을 얻을 것을 아시는 아버지의 고육지책의 사랑이 틀림없다. 아 한없는 아버지의 이 사랑!
교훈: 우리가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에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할지라도 마음을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신다.
셋째날(화)
5월 31일 당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20).
질문: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의 재회를 위해 긴 여정을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읽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를 탕자의 비유와 비교해 보라(눅 15:4~10). 여기에 어떤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가?
답: 집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 사람은 탕자 본인이다. 그러나 양과 은전의 비유에서는 목자와 주모가 찾아 나섰다.
<부가설명>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잃은 것에 대한 비유가 있다. 첫째 것이 잃은 양의 비유이다. 양은 잃어버려진 상태를 알지만 돌아갈 길을 모르는 무리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목자가 찾아가면 반갑게 반응한다. 잃은 은전에 대한 비유는 잃어버려진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은 부류에 대한 비유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것이 가장 어려운지도 모른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 부류에 속해 있지 않을까? 탕자는 잃어버려진 것도 알고 돌아가는 길도 아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비유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체면이라는 자존심만 버리면 진리에 굴복할 수 있는데, 이 자존심이 그들을 얽어매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상태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할 때 생명의 길로 나오기가 용이할 것이다. 현재의 인간의 자아는 사망의 자아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다양한 청중들을 보라. 거기에는 세리도 있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때의 사건이나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멸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 대신,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과 돌보심을 보여주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교훈: 하나님을 떠나기로 결심한 죄인들도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자들도 기꺼이 회복시켜 주신다.
넷째날(수)
6월 1일 제일 좋은 옷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
질문: 눅 15:20~24을 읽어보라. 아들의 고백에 대하여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아들은 얼마나 뉘우치고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어떤 기별을 배우게 되는가?(렘 31:17~20 참고)
[눅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답: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 순간을 압도했다. 돌아온 사실만으로 아버지는 기뻤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신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입히신 그런 옷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예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부가설명> 나는 이 장면에서 기쁨을 위하여 희생된 살진 송아지를 주목한다. 다시 살아난 생명의 기쁨을 위하여 송아지는 생명을 잃었다. 인류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탕자가 돌아온 것이 송아지를 잡은 것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하여서는 예수께서 피를 흘려 죽으셔야 했다.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 중에서 장사를 잘 한 종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인류를 구원하여 하늘에 함께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우주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의 즐거움이다.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셨다. 그것은 영생의 옷이 아니겠는가. 영생의 옷을 덧입히신 아버지, 주었다가 살아난 아들의 생명의 질을 잘 가르쳐주는 표현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즐거워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명을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느끼시는 우리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시고도 기뻐하시는 주님,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시니(사53:11) 황송하지만 우리도 함께 즐거움에 참여해야지요.
교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가면 그분은 그 순간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모든 좋은 것들을 허락하신다.
다섯째날(목)
6월 2일 아버지 자신의 옷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정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순종하는 남녀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 부친은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하였다”(실물교훈, 203~204).
질문1: 위에 있는 인용문은 탕자의 비유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떤 통찰력을 주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답: 아들의 과거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또 집에 있는 종들이 아들이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하는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다. 주었을 때 사실들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부가설명> 인류는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예수를 알기 전에 있었던 일을 묻지 않으신다. 그때는 죽은 상태에서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죽어 생명을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일이 고백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으로 다 된 것이다.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올 때도 사정은 동일하다. 우리의 자비의 아버지께서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선언하신다. 그에게 새 새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신다. 그 순간이 가장 완전하고 거룩한 순간이 아닌가. d;제부터 이 아들은 이 가장 좋은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그래도 더럽혀지면 지체하지 말고 예수의 피에 씻어 희게 해야 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그들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권세를 얻는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질문2: 눅 15:24을 읽어보라. 아버지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강력한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답: 이 말씀은 사람에게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즉 사망도 아니요 생존도 아닌 그런 상태가 없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죽었든지 살아 있든지 두 상태뿐이다.
<부가설명>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뜻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은 아버지 편에서 아들과 분리되었으나 이제 재결합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물과 죄로 죽은”(엡2:1)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다.(고전15:22) 이런 자들의 행동은 죽은 행실이다.(히6:1, 9:14) 사람의 이런 죽은 상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요11:25)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반응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요5:24,25) 탕자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 죽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돼지를 치며 쥐엄 열매를 먹으며 돼지우리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산 것이 아니라, 죽어서 썩어져가도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죽은 자들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이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행실은 죽은 행실이 된다. 예수께로 나아올 때 어린아이라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19:14)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어린아이는 천국에 간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한다. 예수께 나아오는 어린아이가 천국에 가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 없이는 갓 태어난 아기도 아담 안에서 죽은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아기일 수밖에 없다. 결코 중립지대가 없다는 말이다.
교훈: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 우리의 잘못과 수치를 속히 가리고,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각양 은사들을 부어주기 바라신다.
예비일(금)
6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198~211 “탕자”, 260 “부자와 나사로”, 시대의 소망, 495~496 “갈릴리로부터의 마지막 여행”, 교회증언 3권, 100 ~104 “잃어버린 자의 비유들.”
“주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인자하게 인류를 대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라. 천부께서는 탕자를 사랑하사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신다. 이제 천부의 팔은 회개한 아들을 껴안으시고, 천부의 옷은 그의 남루한 옷을 가리며, 그 왕족에 참예한 표로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신다. 그런데, 이런 탕자를 보고 그에게 냉정히 대할 뿐 아니라 멸시하며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 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자처하고, 또한 많은 유혹과 악전고투하는 여러 영혼들을 보면서도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제멋대로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정하게 방관하고만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실까?”(복음교역자, 1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가정과 환경 속에서 자란 형제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토의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이 사실은 일요일 첫째 질문의 부가설명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거기 찾아 참고하기 바란다.
➋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희망과 약속과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설명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탕자는 그의 곤고한 생활 사정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지만, 과거 때문에 현재 고통을 겪는 사람들 중에는 현실적으로 탕자 같은 상태도 아니고 마음도 탕자 같이 절실하지 않을 때 권고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든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사정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형편이 어떻든지 성경말씀의 기록과 약속을 그대로 수용하는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권고의 실마리를 틀 수 있지 않을까?
댓글목록
도루시님의 댓글
도루시 작성일감사합니다.
최대진님의 댓글
최대진 작성일영적인 말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