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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사랑과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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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9-10 11:19 조회5,6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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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6분

기억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 반장은 친교와 선교를 위해 안교활동반을 꼭 실시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 12~13장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로마교인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높은 순종의 표준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과 생각의 변화에서 비롯되며, 그런 변화는 오직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의 마음속에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는 이런 순종이 자동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의무가 무엇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고, 그런 의무들을 순종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능력 없이 순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일부이다. 바울은 행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로마서 13~15장에서 바울은 행위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앞서 밝힌 믿음으로 얻는 의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행위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참된 표현방법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신약이 구약보다 더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의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른 도덕적 행위의 모본이 주어졌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 13:10
|학습목표|
⊙ 깨닫기 : 우리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생활에서 나타난 믿음의 결과를 묘사한다.
⊙ 느끼기 : 서로 존중하고 우애하는 정신을 배양한다.
⊙ 행하기 : 그리스도의 몸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의 은사를 지혜롭게 사용한다.

01. 깨닫기: 봉사하도록 은사가 주어짐
A. 자신의 생명을 주신 분께 우리의 삶을 매일의 제사와 순종으로 바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 경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제사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C.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가?
D.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들을 믿고 서로 연합하여 성장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02. 느끼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A. 다정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B.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어떻게 율법의 완성이 되는가?
C.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어떻게 믿음과 연결되는가?

03. 행하기: 그리스도의 몸을 섬김
A.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도록 어떻게 은사가 주어졌는가?
B.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은사들은 무엇인가?
C.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 우리의 은사를 사랑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요점: 다른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며, 섬기는 것은 영적인 예배 행위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다른 이들 에게 확장시키고, 그럼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다.

일요일(9월 12일) 산 제사

교리적인 내용은 로마서 11장에서 끝났다. 12장에서 16장까지는 실천적인 교훈과 개인적인 언급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장들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믿음은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 믿음이 주님께 순종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어느 정도 무효화시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명령은 여전히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신약에서조차 강조되고 있다. 이런 도덕적 명령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규범화되기 쉽다는 지적도 전혀 없다. 오히려 자아와 죄 사이의 투쟁이 항상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벧전 4: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속되어 있으며,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원수의 세상에 살며, 유혹에 대항하여 많은 투쟁을 치러야 한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히 7:25).

❶ 롬 12: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서 나오는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답: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❷ 롬 12:2은 이런 개념에 얼마나 알맞습니까?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답: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께 드릴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변화된 마음을 구하고, 세속을 따르는 대신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롬 12:1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넌지시 언급한다. 이전에 동물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되 그분을 섬기기 위한 산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제사에 바쳐질 제물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단 하나의 흠이라도 발견되면 그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제물에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 가운데 흠이 없는 자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능한 한 흠 없고 신실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의지함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향과 노력을 인간의 최선의 봉사로 받아들이시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공로로써 그의 결함들을 메꾸어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계명에 대하여 불충성하는 자들은 받지 않으실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82)

<부가설명> 산 제사는 생명 있는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예배이다. 여기 예배라고 번역된 말은 “라트레이아”인데 영어로는 service라고 번역했다. 봉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라는 말은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은 삶 자체가 예배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바울은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고 기록하고 다시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곧 아담 안에서 사망이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되었을 때 반드시 드러나는 생활이다. 생명이 있을 때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신 삶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교훈: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월요일(9월 13일)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함

우리는 이번 기 교과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이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로마서의 기별이 결코 믿음 때문에 십계명의 폐지나 폐기를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재차 강조하였다.
그러나 로마서를 읽으면서 율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런 사랑을 나타낸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❶ 롬 12:3~21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야 합니까?
[롬12:3~21]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답: 우리는 겸손하게 남을 존중하고, 대접하기를 힘쓰며,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며, 이웃과 더불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을 추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다룬 후, 사랑을 드높였다. 사랑(아가페)은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이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품성을 묘사한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실제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겸손인데, 그것은 기꺼이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롬 12:3)을 품지 않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16절)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던 말씀은 겸손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며 타락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스스로 설 수조차 없는 자들이 아닌가?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의에 의지해야 하며, 변화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자랑할 것과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바울이 가르쳐준 말씀대로 살게 된다.

참된 성화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동료를 위하여 신성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모든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다. 참된 회개란 이기심을 떠나 하나님과 인간 동료를 위한 성화된 애정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바야흐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이 철저한 개혁 운동을 일으켜 문둥병과 같은 이기심을 버리고 저들의 죄로 얼룩진 영혼을 정결케 할 것인가?”(가려 뽑은 기별 1권, 115)

<부가설명> 성도가 사랑을 실천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나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생명은 그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이미 여러 번 한 것 같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은 이 말 이하에 나타나는 은사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무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공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거든 그 지위를 논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로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그 지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 지위가 하는 일들을 마치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논단하는 성질이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대를 살려주려는 생명의 정신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믿음의 생활이다. 선으로서 악은 이기는 생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전히 주장하는 삶을 이루는 것이다.

교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화요일(9월 14일) 정부와의 관계

❶ 롬 13:1~7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공적인 권력 기관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할지에 대하여 이 말씀에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원칙은 무엇입니까?
[롬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답: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 나라의 정부를 선과 악에 대하여 보응하는 대리자로 삼으셨다. 그러나 권력의 요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때 우리는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교 국가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바울이 이 글을 적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제국은 매우 잔인하고, 그 통치자들은 부패했으며,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수년 안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대거 박해할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나라를 대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 같은 정부의 착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정부라는 개념 자체는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념과 통치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인간은 규칙과 제도, 그리고 기준이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 무정부(anarchy)는 성서적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형태의 정부와 통치 방식을 승인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잔인한 정권들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단지 바울과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땅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충되지 않는 한 충성스럽게 국가에 협조해야 한다. 우리는 권력과 충돌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하며 다른 이들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예언을 통해서 언젠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권력과 대립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계 13). 그 때까지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세운 정부를 하나님이 임명하신 규범으로 인정하고, 그 정당한 범위 안에서 거기에 순종하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치될 때에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법보다 높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 우리는 권력자들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는다. 말로나 글로 우리가 법과 질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우리의 길을 막는 그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말아야 한다.”(사도행적, 69)

공연한 비난을 삼감
“위정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항상 흠을 잡는 일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개인이나 기관을 공격하는 것이 우리의 사업이 아니다. . . . 우리는 권세들을 무시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취급받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적개심과 분란을 쓸데없이 조장하여 그때가 속히 오도록 하지 말 것이다.” (교회증언 9권, 230)

교훈: 미래의 국가가 하나님의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우리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수요일(9월 15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❶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 입니까?
답: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사랑은 말이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또는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실현해야 할 다양한 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율법의 교훈을 확대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성이 무엇인지 말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은 곧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의 모호한 표준으로 율법의 구체적인 명령을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덕적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죄를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누가 죄의 실재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율법은 오직 사랑이라는 동기 속에서만 준수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❷ 사랑이 율법 준수의 원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어떤 계명을 예로 들었습니까? 왜 이 계명들만 언급하였을까요?
[롬 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답: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제 6, 7, 8, 10 계명을 예로 들었다. 목록에서 제9계명이 빠져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바울이 어떤 특정 계명의 존속 여부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사랑의 요소는 새롭게 소개된 원칙이 아니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사랑의 원칙이 구약에 있었던 요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계명만이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는 말인가? 절대 그럴 리 없다.
문맥을 살펴보라.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그가 개인적인 관계를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계명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계명을 폐했다고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게다가 신약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이에게 사랑을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마 25:40, 요일 4:20~21).

사랑의 빚
“아침에 환자가 좀 나은 것을 보고 사마리아인은 그의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그 비용을 지불하고 그를 위하여 돈을 맡겼다. 이것으로도 만족지 않아 그는 더 많이 비용이 들 경우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주리라.”라고 약속하였다.”(시대의 소망, 503)

<부가설명> 롬13:8~10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같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랑만 하면 다 된다고 해석하기를 좋아하면서 십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전혀 그런 뜻이 아니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세히 보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여기서 7, 6, 8, 10계명을 직접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 말씀은 여기 말한 네 계명뿐만 아니라, 그 외에 여섯 계명이 더 있다. 그 계명들도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말한 네 계명만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십계명의 모든 내용을 다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지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준수할 수 있다.

목요일(9월 16일)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이번 기에 줄곧 말했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 교회, 특히 그 가운데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한 가지 매우 특정한 주제, 즉 신약 시대의 믿음과 행위의 기능에 대하여 분명히 해 두기를 원했다. 문제는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율법을 강조했던 자들을 돕기 위해 바울은 구원의 과정 속에서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였다. 원래 구약 시대의 유대교도 은혜의 종교였지만 율법주의가 일어나 본질이 많이 훼손되었다. 우리도 같은 실수를 범치 않기 위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❶ 롬 13:11~14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일을 고대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롬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답: 바울은 2천 년 전에 재림이 가까웠음을 설교하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하며 단정하고 바르게 살라고 권면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니 깨어서 맞이할 준비를 하자는 바울의 설교가 정말 아름답다. 이것이 2천 년 전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재림은 우리의 죽음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다음 주가 됐든, 40년 후가 됐든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죽은 상태로 4일 동안 잠을 자든, 400년 동안 잠을 자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 하면 잠들어있던 우리가 눈을 뜨고 처음 바라보게 될 일이 예수님의 재림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이를지 모른다. 인생은 정말 짧고,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다.
재림이 로마서에서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서나 고린도서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재림은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재림이 없다면, 소망도 믿음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재림이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 놀라운 진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재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입혀 주시는 의를 입는 법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실물교훈, 312)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역사적 시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께서 사람들이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것을 다 아시는 분께서 속히 오리라고 하셨다. 역사적 시간을 말씀하시지 않고 인간의 일생이 아주 짧은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호흡이 끊어지는 때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때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세월이 없다. 그들이 죽음의 잠이 든 그 순간 후에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을 때가 처음 맞는 시간이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개념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에 재림을 맞을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 재림의 아침이 바로 잠든 그 다음날 아침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죽음의 잠을 자는 그 이튿날이 재림의 날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속히 오시는가. 그래서 우리는 매일 재림을 맞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죽더라도 경험의 시간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림은 정말 가깝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완성을 바라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한다.

금요일(9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66~69 “초기 증언들에게 대한 설명”, 교회증언 5권, 540~541 “실제적 경건”, 교회증언 6권, 394~395 “정부 권위에 대한 우리의 자세”, 부조와 선지자, 352~353 “성막과 그 봉사.”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성경의 진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말씀이다. 이런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자는 모든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에게 새로운 지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와 죄로 이해를 가렸던 어두움이 제거되는 것이다. “새 마음”을 주신다는 말씀은 “새로운 생각”을 주신다는 뜻이다. 심령의 변화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진리의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피는 자는 하나님께 의지함에 따라 지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이른 것처럼 명철한 이해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얻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마이 라이프 투데이, 402)
“주님은 곧 오신다. . . .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의 구속받은 자로 영접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영광중에 계신 왕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본향을 향하여!”라고 소리쳐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을 영원한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시간에 접근하고 있다.”(교회증언 8권, 25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목요일 교과 끝부분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재림이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 놀라운 진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재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멘. 재림하셔야 구원의 사업이 종결된다. 반드시 재림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이 세상의 성도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착한 시민이 되는 것과 동시에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 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뜻이라 확신하고 정부와 대립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그대에게 자문을 구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말해주겠습니까? 그대는 어떤 원칙을 따르겠습니까? 이런 상담은 오직 극도의 신중함과 기도, 그리고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성경적으로 확실한 것이면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와 대립하면서 과연 바로 그때 해야 할 일인지 충분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만일 반드시 그때 그 일을 해야 할 성경적 시기적 당위성이 없으면 그런 일은 추진하지 않아야 바른 신앙의 태도이다.

3. 그대의 생각에 무엇이 더욱 어려울까요?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철저하게 고수하고 지키는 것,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혹시 그대는 이것을 이분법적인 오류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 문자적으로 계명을 고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그것을 다 지켰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는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받는 문제가 연결되면 다른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웃을 사랑하고 도우기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공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 지키는 문제를 구원받는 조건과 결부시키지 않아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 그 생명의 능력이 율법을 지키는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고 분명히 가르친다. 예수님이 생명이 된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 사랑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는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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