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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채색옷(예화및 부가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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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4-15 23:46 조회5,2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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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채색옷
4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4분

도입)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에 겪은 일이다. 그가 일을 보고 잠시 쉬기 위해 도성을 빠져 나와 논길을 걷는데 한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 농부를 황희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농부가 잠시 쉬기 위해 소를 저쪽에 두고 나무 밑으로 오자 농부에게 물었지요. "두 마리 소[牛]중에서 어떤 소가 일을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황희를 붙잡고 멀리 가더니 거기에서 황희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검은 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 소는 일을 잘하지요" 그런 농부를 보고 황희는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아니, 하찮은 소를 보고 물어보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귀에 대고 속삭일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농부는 약간은 노기를 띠며 "글을 배운 선비라는 사람이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 하는 것이었다. 이에 황희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미물이라도 배려해 주는 마음과 주인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 그리고 어떠한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고 경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어느 한편을 편애하는 말과 행동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농부가 아무 생각 없이 황희 정승에게 "누런 소가 일을 더 잘한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누런 소는 교만해져서 높아졌을 것이고 검은 소는 누런 소를 시기하여 심통을 부리거나 낙망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일을 더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아직 시기와 질투와 교만 등을 버리지 못한 육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있다. 야곱의 편애로 말미암아 생긴 야곱의 가정의 분란은 누구를 더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지혜롭게 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기억절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 37:3).

결론: 야곱이 그의 가족 관계에서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 아들을 잃은 슬픔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통해 당시 세계를 휩쓸었던 기근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야곱의 가족에게도 치유를 허락하셨다.

첫째날(일)
4월 17일 분란의 시초

도입)
야곱은 원치 않게 네 명의 아내를 얻었다. 아내들은 자매관계며, 주인과 종의 관계이지만 인간 본성의 경쟁과 욕심으로 출산으로 야곱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하였다. 레아와 라헬에 더해서 다른 두 아내들이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네 명의 아내들이 그에게 주어졌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포위당했으며, 더 이상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녀를 낳기 위한 레아와 라헬의 경쟁은 결국 야곱을 오븐 속에 넣었으며, 그를 뜨거운 오븐속의 개미와 같이 만들었다. 야곱의 아내들이 경쟁과 시기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고 선호하는데 있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말 2:15).

알다시피 인생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영향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물질이 다른 물질을 중력의 힘으로 잡아당긴다. 이는 그대의 몸이 그대의 이웃뿐 아니라 창조된 세계의 모든 것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한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나 후손들에게 즉각적이면서 또한 비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기 위하여 우리가 물리학에서까지 교훈을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격과 위치, 현재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말과 행동에 있어서 얼마나 조심해야겠는가?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가까운 장래나 먼 미래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가 알겠는가?
창 24장과 29:21~30을 읽어보라. 우리가 따르는 세상의 관습이 원칙에 위배될 때 가정에 닥치는 재앙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야곱의 죄와 그것이 가져온 일련의 사건들은 악한 영향 곧 그의 아들들의 품성과 생애에 쓰라린 결과를 가져온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서 심각한 결점들이 나타났다. 일부다처의 결과가 그의 가족들 중에 나타났다. 이 무서운 악은 사랑의 샘을 고갈시키고 그 영향은 가장 신성한 관계를 약하게 한다. 어머니들의 질투는 가족 관계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아이들은 툭하면 싸우는 성질과 제재를 받을 때 참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자라났으므로 그들의 아버지의 생애는 근심과 슬픔으로 어두워졌다”(부조와 선지자, 208~209).

교훈: 하나님의 원칙에 어긋나는 세상 관습을 따름으로써 야곱은 가정에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부가적용)
요셉은 야곱이 91세에 얻은 아들이며,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첫 번째 아들이며, 11번째 아들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로서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얻었다. 야곱은 그에게 “채색옷”을 입혔는데, 아버지의 유산 상속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요셉에게 배다른 형들을 감시하게 했고, 어린 요셉은 형제들의 일에 대해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주어 형들의 미움을 받았다. 요셉과 라헬을 향한 야곱의 편애는 가족 간에 이기심과 갈등, 질투, 미움, 사기, 거짓이 난무하는 가정을 만들고 말았다. 인생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기쁨이 있고 동시에 슬픔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보완적 역할을 한다. 슬픔으로 인해 기쁨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행복을 알게 된다. 당신의 길에 고난이 있을 때 그 것은 강함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며 이는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영감의 교훈 •
▶ 부모의 감화력
“사람의 품성을 형성하는 데에 가정의 감화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다. 교사는 부모의 일을 도울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교육, 283).

둘째날(월)
4월 18일 요셉과 그의 형제들

도입)
요셉이 형들의 양치는 일을 도와 일하는데도 형들의 미움과 불평을 산 이유가 있다. 첫째, 아버지인 야곱 곧 이스라엘이 요셉을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깊이 편애했다. 부모가 약간 편애를 해도, 자녀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먼저 사랑을 많이 받은 형이니까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겠지. 동생이니까 돌봐 주는 언니를 더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겠지.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며 편애하는 부모들이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편애란 자녀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를 심화시키고, 불화와 반목을 조장하는 것이다. 설령 더 사랑스런 자녀가 있다고 해도, 다른 자녀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요셉을 편애하는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히기까지 했다. 채색 옷이란 일종의 예복으로 일을 안 해도 되는 왕족이나 귀족이나 부자들이 입는 사치스런 두루마기이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 요셉은 우쭐대며 수다 떠는 병이 생겼다. 둘째, 요셉은 입이 아주 가벼웠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과 불평을 산 보다 더 큰 이유는 아버지에게 형들의 과실을 고자질하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더 많은 형들의 잘못이나 허물을 보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만끽했고, 또한 아버지에게 고자질함으로써 우월함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고자질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사이다. 형들보다 잘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는 줄 알고 우쭐대던 요셉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요셉의 고자질은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요셉을 미워하며 불평하는 형들의 뒤틀린 심사에 불을 붙였다. 어쩌면 요셉은 형들의 미움과 불평에 대해 억울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실상, 요셉은 아버지에게 형들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모함한 것도 아니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집안을 위해 사실대로 고자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창 37:2).

가장 전통적인 가정에서도 형제간의 경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증오, 질투, 편애 그리고 자만과 같은 요소들 때문에 야곱의 가정은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요셉의 형제들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었다.
창세기 34장을 읽어보라. 요셉의 형들은 성격이 어떠했는가? 모든 가족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꿈(창 37:5~11)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형들이 요셉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꿈 때문에 반감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하다. 창 37:8은 바로 이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창 37:2를 읽어보라.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더욱 악화되었는가? 고자질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아무리 잘못되었을지라도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요셉의 행동을 고마워할 형들이 아니다. 비록 본문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저지른 과거의 행동에 비춰볼 때, 분명 그들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에 수치와 비난을 가져올 문제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처럼 가장 큰 문제점은 “이스라엘(야곱)이 여러 아들보다 그(요셉)를 깊이 사랑”하였다(창 37:3)는 것이다. 형제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야곱의 태도를 알아차렸고 그로 인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다고 요셉에게 행한 형들의 잘못에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교훈: 야곱의 편애, 요셉의 꿈과 고자질하는 버릇 때문에 형제들의 증오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부가적용)
입이 가벼웠던 요셉의 고자질은 옳은 내용이고, 두 번의 꿈 이야기도 옳은 내용이니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옳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옳은 언행 때문에 그른 결과가 되고, 옳은 언행 때문에 치명적인 불행을 초래하기도 한다. 요셉의 사실 그대로의 고자질은 최악의 결과가 되는 원인이 되었다. 요셉의 꿈꾼 사실 그대로의 발설은 형들의 살의를 불러일으켰다. 요셉은 천만다행으로 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지고 구덩이에 던져졌고, 형 유다의 제안으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노예가 되었다.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의 성공이나 인생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은 다 성공의 조건이나 성공의 비결에만 신경을 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실패의 조건을 알고 해결하는 것이다. 요셉이 인생과 직업 모두의 위대한 성공자가 된 것은 입이 가벼운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로 고자질하는 것이건 꿈 이야기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건, 듣는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과 처지와 이해관계에 따라 듣는 것이다. 우리가 가볍게 입을 연 것 때문에 성공에 걸림돌인 반대자도 생기고, 미워하는 자도 생기고, 살의를 품는 자도 생길 수 있다.

•영감의 교훈 •
▶ 편애의 폐단
“어리석게도 야곱은 요셉에게 편애를 나타냈고 이것이 그의 다른 아들들의 질투심을 자극하였다. 요셉이 형제들의 악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에 그는 매우 괴로워하면서 용기를 내어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충고하였으나 더욱 그들의 증오와 원한을 살 뿐이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의 아버지의 권위로 그들을 개심시키고자 하여 그 문제를 아버지에게 알렸다”(부조와 선지자, 209).

셋째날(화)
4월 19일 여러 색깔의 옷

도입)
'옷이 사람을 만든다'(vestis virum facit)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직장 예비군과 달리 지역 예비군 훈련장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다. 건설 공사장 인부로부터 회사원과 기업체 대표 그리고 공무원이나 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도 일단 예비군복을 입으면 외형적으로는 물론 행동도 비슷해진다. 말이 거칠어지고 심지어 점잔은 사람들까지도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예비군복은 사람의 마음을 놓아버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중고등학생들이 방과 후에 사복을 입으면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들은 신분이 노출되고 혼자일 경우는 예의나 교양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 속에 있거나 복장이 통일되어 누가 누군지를 잘 모를 경우 자세가 흐트러지고 망가지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복장이 예비군복일 경우 증세는 더 심하다. 예비군복은 아무데서나 앉을 수 있는 등 자유로운 복장인데다 예비 군인이라는 특유의 문화가 복장에 풍기기 때문이다. 익명성이 강할수록 군중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단정한 옷차림을 하면 말이나 행동도 단정해진다. 자라나는 청소년기인 중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어야 하는 이유다. 채색 옷을 입은 요셉은 채색 옷을 입은 사람의 자질을 가지고 살아갔다. 그가 입은 옷은 그의 삶에 은연 중에 지도자로서의 꿈을 가지게 되는 영향을 받고 있었고, 또한 그 자신이 입은 옷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살게 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채색 옷은 긴 소매가 달려 있고 발까지 가려지는 긴 겉옷을 말한다(창 37:3). 일반적으로 입는 겉옷은 소매가 없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채색 옷은 일반 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달리 왕족이나(삼하 13:18) 족장, 족장의 후계자만 입는 옷이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가 장자가 아닌데 요셉을 후계자로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창 37:3) 이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를 받았던 것이었다(창 37: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3~4).

교훈: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편애를 알고 요셉을 시기했으며 채색옷 때문에 그들의 증오심은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부가적용)
요셉이 편애를 받으면서 특이한 복장을 하는 것 자체가 그의 형제들에게 질투를 야기 시키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의 이상한 꿈은 형들의 마음에 질투의 불을 심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요셉이 그 꿈을 소개한다. 형제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을 했다는 꿈이다. 요셉은 또한 두 번째 꿈을 말하는데 요셉의 형제를 암시하는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할 뿐 아니라 달과 해도 절을 했다는 꿈이다. 물론 달과 해는 요셉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오만함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했겠는가! 어느 날 형들이 양 떼를 먹이려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된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찾아 형들에게 가고 있고 그들에게 오고 있는 요셉을 형들이 보게 되면서 죽이기로 계획을 한다. 이때 장자 루우벤이 요셉을 죽이기보다는 마른 웅덩이에 던져 놓을 것을 제안하고 그리고 마침 지나가는 노예 상인에게 애굽의 노예로 요셉을 판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요셉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영감의 교훈 •
▶ 반감은 이성을 잃게 함
“요셉이 형제들 앞에 섰을 때에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주의 영의 임재로 말미암아 환하게 빛났으므로 그들은 요셉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길을 단념하지 않고 그들의 죄를 책망한 요셉의 결백을 미워하였다. 그들의 마음속에 가인을 움직인 동일한 정신이 불타오르고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210).

넷째날(수)
4월 20일 채색 옷이 벗겨짐

도입)
아내들 사이의 심한 시기, 질투 더 나아가 투기의 모습을 본 야곱이었지만 그 또한 아내들 사이의 투기를 부추기는 원인을 스스로가 제공했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그 심한 투기 속에서도 야곱은 여전히 라헬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다. 물론 라헬에게 사랑이 더 가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레아를 통해 낳은 자식들까지 또다시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훗날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인 요셉에 대해서 특별히 편애를 하였다. 이는 결국 다른 자녀들이 무리를 지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든 것이니 아비의 잘못이 큰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삭 이외에 낳은 다른 서자들에게까지 각각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 정통 계보를 이을 이삭과의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나머지 자녀들끼리도 서로 간에 기울어짐이 없도록 공평하게 처신했다. 비록 하나님의 정통 계보는 이삭을 통해 이어진다 해도 나머지 자녀들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를 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섭리를 이루어 가시지만 야곱은 지나치게 요셉에 대해서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다. 이것이 결국은 가족들 사이의 불화를 야기 시키고 마침내는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것을 볼 때 특히 머리된 사람은 각 사람의 마음을 잘 살펴서 혹여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간에 시기, 질투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성결되고 영으로 들어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머리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도 하고 반대로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드러지게 한 사람만을 칭찬하고 높여 준다거나 역으로 한 사람만을 지적하고 책망한다면 이는 결국 서로 간에 불화의 소지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니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물론,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도 때와 장소와 상황을 잘 살펴서 서로 간에 시기, 질투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윗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이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창 37:13, 18, 20, 23).

교훈: 형들은 요셉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가장 먼저 채색옷을 벗김으로 그들의 증오와 두려움을 드러냈다.

부가적용)
야곱의 편애가 형제들 사이에 어떤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지 뻔히 보였지만 야곱은 이를 가벼이 넘겼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요셉에게 있었다. 요셉은 아버지의 총애를 당연히 여겼고 사랑받지 못하는 형들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요셉의 철부지 같은 인격을 보여주는 구절이 창세기 37장 2절이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이스라엘에서는 12살이 되면 성인식을 한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요셉은 17살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 이복형들의 흠결을 일러바쳤다. 형들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첩실자식들에 대한 무시였을 수도 있다. 당연히 형들이 요셉을 좋게 볼 리 없다. 요셉의 이런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밭에서 자기가 묶은 볏단이 갑자기 일어나자 다른 형들이 묶은 단들이 고개를 숙이더라는 것이었다. 또 해와 달과 열한개의 별이 자신을 향해서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자랑한 것이다. 여기서 해는 아버지 야곱이고 열한개의 별은 다른 형제들이었다. 이 꿈이 다른 가족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너무도 분명했지만 요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랑하였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것이다. 다른 이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요셉은 정말 기고만장한 사람이다. 야곱은 요셉을 야단치면서도 이 꿈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 꿈은 장차 요셉에게 벌어질 일을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만 요셉은 결코 이 꿈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꿈이 커도 준비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설사 복권 당첨되듯 축복을 받아도 축복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축복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다.

•영감의 교훈 •
▶ 죄인은 의인에게 분노함
“요셉은 위험을 알지 못하고 오랫동안 찾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 그들에게 가까이 갔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환영의 인사 대신 그는 그들의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눈초리를 보고 떨었다”(부조와 선지자, 211).

다섯째날(목)
4월 21일 “당신 아들의 옷”

도입)
요셉은 형님들에게 채색옷(37:3)을 빼앗겼다. 그 좋은 옷을 형님들에게 빼앗기고 더러운 노예 옷을 입게 되었다. 형님들은 동생을 노예로 팔고서 능청스럽게 요셉의 채색 옷에 수염소  피를 바르고 아버지 야곱에게 "아버지 이 옷을 우리가 들판에서 보았는데, 당신 아들의 옷이 아닙니까?" 라고 하며 요셉을 자기들이 팔아버린 것이 아니고 짐승들에게 죽었다는 증거로 보여 주었다. 요셉이 형님들에게 채색옷을 빼앗긴 이유는 무엇인가? 창37:5에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 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이다. 그러나 요셉으로 볼 때는 단순히 사랑을 많이 받은 것뿐이다.  아버지에게는 잘못이지 요셉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아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것으로 그는 형님들의 미움을 받았다. 사랑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미워하는 자가 더 많아질 수도 있는 음지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또한 사단의 시험의 강도도 그만큼 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만 받으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또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요셉은 17년 동안 입고 있던 채색 옷을 빼앗기고 노예의 옷을 입게 되었다.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창 37:31~32).

교훈: 동생에게 행한 죄 때문에 형제들은 아버지에게도 상처를 입혔고, 그 후 후회와 죄책감 속에 살아야 했다.

부가적용)
채색 옷이 벗겨져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종의 옷을 입게 됐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대가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의 슬픔을 보며 죄책감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창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요셉을 팔아버린 사건이 양심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말씀의 표현은 그들이 요셉을 판 이후에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사실의 전말을 정직하게 고하지 못하고 지낸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허물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그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그때의 전말을 고한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셉이 살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죄책감은 과거의 특정 사고, 때로는 정신적으로 재연되는 어떤 형상이나 사건과 관련이 있다. 죄책감은 때로 짧은 회상이 삽입되어 나타나는 꿈이나 악몽을 동반하기도 한다. 목숨을 애원하는 어린 요셉의 모습은 형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당신의 아들
“염소 새끼를 죽여 그 피에 요셉의 채색 옷을 적셔서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가 말하기를 우리가 들에서 그것을 주웠는데 이것이 우리 동생의 옷인지 염려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고 말하였다”(부조와 선지자, 212).

•기도 •
아버지, 그때는 그 죄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지는 몰랐습니다. 심지어 이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슬픔이 될지 생각지 못했습니다.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내 죄를 용서하옵소서. 이 죄의 영향력에서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해 주옵소서.

예비일(금)
4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209~240 “가나안으로 돌아옴”, “애굽에서의 요셉”, “요셉과 그의 형제들” 재림교회 성경주석 1권, 463~468.

“요셉은 그에게 닥쳐올 일을 알지 못하고 길고 지루했던 여정 이후에 이제는 형제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다는 진심어린 즐거움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반기지 않고 차갑게 대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온 용건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들이 화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요셉을 위선자라고 조롱하였다. 그들이 질투심을 말로 표현하자 사탄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동정심을 잃었고 형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사라졌다. 그들은 요셉이 입고 있던 그의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요 또한 그들의 질투의 감정을 야기했던 채색옷을 벗겼다”(엘렌 G. 화잇, 더 스피릿 오브 프로페시 1권, 128~1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채색옷”이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것, 비록 그것이 멀지 않아 우리에게서 벗겨지고 피로 더러워질지라도, 간절히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장은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의 영예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➋만약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섬기는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 이야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만약 형제들이 기도하는 법, 자신을 죽이는 법,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알았다면, 이 가운데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큰 고통과 고난을 겪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걸렸던 덫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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