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채색옷(질문, 대답, 부가설명)04/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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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4-15 13:32 조회8,839회 댓글6건본문
일몰:오후 7시 14분
기억절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 37:3).
연구 범위: 창 29:21, 30:24, 34, 42:13, 고전 9:24~26.
이야기의 발단은 야곱과 그의 아내들의 이야기인 창세기 29장에서 시작된다. 한 아버지와 네 명의 어머니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아들. 이 가정이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힐지 알기 위해서는 선지자가 필요치 않았다. 야곱이 에덴에서 시작된 일부일처제의 모본을 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제도는 모든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유를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잘못을 행할 자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야곱이 저지른 실수의 상징으로서 “채색옷”은 하나의 실수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어떻게 또 다른 실수와 잘못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고 있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요셉의 채색옷이 이야기 가운데 차지했던 역할과 다른 형제들의 분노와 질투를 묘사한다.
➋느끼기 : 야곱의 가족 가운데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정서적 갈등을 이해한다.
➌행하기 : 우리 자신의 가족 안에 일어나는 어려움을 하나님의 통치와 중재에 맡긴다.
결론: 야곱이 그의 가족 관계에서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 아들을 잃은 슬픔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통해 당시 세계를 휩쓸었던 기근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야곱의 가족에게도 치유를 허락하셨다.
첫째날(일)
4월 17일 분란의 시초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말 2:15).
질문: 창 24장과 29:21~30을 읽어보라. 어떤 종류의 가정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따르는 세상의 관습이 원칙에 위배될 때 가정에 닥치는 재앙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창24장은 이삭의 결혼 사건이고, 29장은 야곱의 결혼 사건이다. 이삭의 결혼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중한 결정과 선택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신 손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인간의 생각과 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야곱은 속임을 당했고, 그 가정은 평안하지 않았다.
<부가설명> 세상의 관습을 따라 하나님의 원칙을 무시할 때 세상에서도 비극이 생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살면서 먼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생각해야 하고 그 원칙에 의하여 세상의 삶을 결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예수님 편을 선택하여 사는 것이다. 때때로 인간적 판단과 인정에 이끌려 우리의 선택이 잘못 될 수 있다. 가능하다면 곧 선택을 원칙에 따라 변경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렇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자아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인도를 겸손하게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원칙을 따르지 않은 선택으로 당하는 어려움은 감수할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런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인생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영향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물질이 다른 물질을 중력의 힘으로 잡아당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가까운 장래나 먼 미래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가 알겠는가?
“야곱의 죄와 그것이 가져온 일련의 사건들은 악한 영향 곧 그의 아들들의 품성과 생애에 쓰라린 결과를 가져온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서 심각한 결점들이 나타났다. 일부다처의 결과가 그의 가족들 중에 나타났다. 이 무서운 악은 사랑의 샘을 고갈시키고 그 영향은 가장 신성한 관계를 약하게 한다. 어머니들의 질투는 가족 관계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아이들은 툭하면 싸우는 성질과 제재를 받을 때 참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자라났으므로 그들의 아버지의 생애는 근심과 슬픔으로 어두워졌다”(부조와 선지자, 208~209).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말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 자유에 잘못을 할 자유도 주셨다고 주장하는 일이 합당한지는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최고의 상태이고 가장 행복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든지 수용하든지 하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수용하기 원하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거절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하나님께 반납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의 끝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정 기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기간에 구주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을 받지 않으면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고전15:22)로 썩어져가는 구습이 나타날 뿐이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도덕적인 사실들이다.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 행위로도 스스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실상이며 이런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구주를 믿고 구주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는 것이다. 이것도 구주를 보내시고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조처해주신 하나님의 조처가 없으면 인간의 자유로 이것을 선택할 수 없다. 야곱은 아담의 후손들의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랐다. 그것이 세상의 관습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생명을 받았다고 해도 주위의 인간의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들과도 관계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주를 믿고 이런 관계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러면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의 자유에서 진정한 생명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원칙에 어긋나는 세상 관습을 따름으로써 야곱은 가정에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 부모의 감화력
“사람의 품성을 형성하는 데에 가정의 감화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다. 교사는 부모의 일을 도울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교육, 283).
둘째날(월)
4월 18일 요셉과 그의 형제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창 37:2).
질문1: 창 34장을 읽어보라. 이 장의 말씀은 요셉의 형들의 성격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답: 요셉의 형제들 중에 시므온과 레위가 상당히 과격하고 난폭했던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은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런 모습은 요셉의 형제들이 거의 다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기록대로는 한 사람도 그 일을 만류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복수하려는 성정을 가진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만 사는 사람들에게 본능인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다 그런 성정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용기가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며, 또 사회와 법률의 제재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미 복수를 한 것과 다름이 없는지도 모른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원수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도록 마음으로부터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2: 창 37:2을 읽어보라.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더욱 악화되었는가?
[창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답: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형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요셉이 어떤 의도로 과실을 고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요셉의 성격도 그리 훌륭했다고 보기 힘 드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좀 더 지혜롭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형들이 요셉의 권고를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의 신의 증언은 요셉이 좋은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어리석게도 야곱은 요셉에게 편애를 나타냈고 이것이 그의 다른 아들들의 질투심을 자극하였다. 요셉이 형제들의 악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에 그는 매우 괴로워하면서 용기를 내어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충고하였으나 더욱 그들의 증오와 원한을 살 뿐이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의 아버지의 권위로 그들을 개심시키고자 하여 그 문제를 아버지에게 알렸다”(부조와 선지자, 209).
<부가설명> 사람의 마음이 비뚤어지면 자기의 비뚤어진 마음이 모든 판단의 표준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호의도 악의로 해석한다. 요셉의 형들의 상태가 바로 그랬다. 그들이 잘못하는 것을 고칠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가 알게 된 그 사실까지 너무 화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요셉이기 때문에 요셉이 아무리 선의로 그렇게 했다고 해도 형들에게 그것이 선의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우리도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이렇게 되는 수가 있다. 우리는 매사에 기도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일을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 그렇게 하지 못해서 오해를 일으키고 결과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매사에 성령의 지도를 받고 하고자 하는 일에 피차에게 성령의 감화가 임하도록 기도하며 충고나 의논에 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야곱의 편애, 요셉의 꿈과 고자질하는 버릇 때문에 형제들의 증오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셋째날(화)
4월 19일 여러 색깔의 옷
질문: 창 37:3~4을 읽어보라. 아버지의 행동은 어떻게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는가?
[창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답: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 그 표가 채색 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 편애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때 형제들의 질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부가설명> 가정의 안녕과 평화는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에 크게 좌우된다.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른 편애 속에 자랐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성경 기록상으로는 어머니 리브가의 사망에 대한 것이 없고 자녀들과 재 상봉한 기록도 없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 야곱은 어머니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이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편애의 비극이다. 야곱의 아들들의 성격이 과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야곱이 자녀들을 취급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 같고, 여러 어머니들의 질투도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가정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대로 일부일처여야 한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고루 맛보고 성장하는 것이 가정의 바른 모습니다. 가정은 고향이다. 고향이 그리워지고 고향이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깨어지면 고향을 잃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재림교회가 가장 힘써 개혁해야 하는 것은 가정의 신앙생활과 정결이다. 느헤미야는 고대 이스라엘 구약 역사의 마지막 기록이다. 그 책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곧 남은 자손의 역사이다. 그 마지막이 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에 남은 자손이 가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가정은 예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성경과 진리로 정결해야 한다. 그럴 때 야곱 가정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고 잠31장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채색옷은 다만 일시적인 이 땅에서의 영광과 특별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요셉을 더 사랑하는 야곱의 이야기 가운데 채색옷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채색옷은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증오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중심 소재가 되었다.
교훈: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편애를 알고 요셉을 시기했으며 채색옷 때문에
그들의 증오심은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넷째날(수)
4월 20일 채색옷이 벗겨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창 37:13, 18, 20, 23).
질문: 창 37:12~25을 읽어보라. 선과 악, 순수함과 음흉함에 대하여 어떤 극명한 대조점이 보이는가?
[창37:12~25]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가로되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17 그 사람이 가로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요셉이 그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답: 요셉은 아버지의 분부대로 순전한 마음으로 형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를 죽여서 그의 꿈의 성취 여부를 보자고 말한다. 그들은 요셉이 도착하기 전에 요셉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순전한 마음으로 형을 찾아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요셉은 선한 일을 하고 있으나 형들은 음흉한 음모로 생명을 뺏으려는 악을 도모하였다.
질문2: 창 37:23을 읽어보라. 어떤 의미심장한 일이 벌어졌는가?
[창37: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답: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인 채색 옷을 벗겼다.
<부가설명> 이 장면은 편애의 앙금을 벗겨내려는 형들의 악한 사상을 드러낸다. 채색옷은 분명 좋은 옷인데 그것은 세상의 영화를 상징할 수도 있다. 또 아버지의 편애의 상징이며 동시에 형들의 증오의 상징이기도 하다. 옷 하나가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세상의 영화는 언젠가 망가진다.
또한 이것을 역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입혀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마귀가 벗기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답게 채색된 성품의 옷, 마치 성소 휘장 같이 찬란한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을 요셉의 형들이 강제적으로 위협하여 옷을 벗긴 것처럼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때로는 하와에게 접근 했던 것처럼 감언이설로 속여서 옷을 벗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옷을 벗기려는 어떤 유혹과 시도도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미 1,2과에서 말한 것처럼 옷을 벗기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포기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생의 생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주님 오시는 그 아침에 이 생명으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교훈: 형들은 요셉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가장 먼저 채색옷을 벗김으로 그들의 증오와 두려움을 드러냈다.
다섯째날(목)
4월 21일 “당신 아들의 옷”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창 37:31~32).
질문1: 창 37:26~36을 읽어보라. 그들이 아버지에게 사용한 언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창37:26~3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33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답: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거짓의 아비에게 농락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버지의 대답에서 요셉을 판 형제들은 악한 짐승이 되었다.
<부가설명> “창 37:26~36에 나타난 아버지에게 사용한 언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형제들이 ‘우리 동생의 옷’이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 아들의 옷’이라고 언급한 것에 주목하라.”
우리 한글 성경에는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라고 번역되었으나 원문은 “당신의 아들의 옷”으로 되어 있다. 더 직역하면 “너의(your) 아들의 옷”이다. 그들이 요셉을 해코지한 후에 요셉과 형제의 관계도 단절되었고, 아버지와 부자의 관계도 단절 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형제에게 악을 행하면 형제의 관계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 끊어지게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건이 아닌가.
질문2: 창 42:13, 21~23, 32, 44:28을 읽어보라. 이 성경 본문은 형제들의 행동이 오랜 세월 동안 그들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말해주고 있는가?
[창42:13,21~23.32]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32 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십이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창44:28] 하나는 내게서 나간 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답: 요셉 앞에서 그들이 하는 말은 오랜 세월동안 그 사건이 그들의 일상적인 삶과 정서에 결코 평안함을 주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야곱의 말에도 요셉을 잃은 슬픔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사건은 오랜 세월동안 야곱 가정에 슬픈 기억으로 그들의 가정생활을 우울하게 하는 요소였다.
<부가설명> 과거의 허물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두면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나를 불행하고 우울하게 하며 항상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상태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을 두려움을 내어 쫓는데(요일4:18)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해코지한 사실이 평생 그들의 마음에 짐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야곱의 삶 속에도 그늘이 있었고 가정은 행복보다는 우울한 그늘이 덮고 있었던 것 같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이 만난 하나님과의 씨름은 사실은 야곱의 과거와의 씨름이었다. 우리는 허락된 오늘이라는 하루하루를 예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하루만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루만 사는 존재들이며 내일 아침에 예수님을 새 생명으로 영광중에 만날 것이다.
교훈: 동생에게 행한 죄 때문에 형제들은 아버지에게도 상처를 입혔고, 그 후 후회와 죄책감 속에 살아야 했다.
예비일(금)
4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209~240 “가나안으로 돌아옴”, “애굽에서의 요셉”, “요셉과 그의 형제들” 재림교회 성경주석 1권, 463~468.
“요셉은 그에게 닥쳐올 일을 알지 못하고 길고 지루했던 여정 이후에 이제는 형제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다는 진심어린 즐거움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반기지 않고 차갑게 대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온 용건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들이 화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요셉을 위선자라고 조롱하였다. 그들이 질투심을 말로 표현하자 사탄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동정심을 잃었고 형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사라졌다. 그들은 요셉이 입고 있던 그의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요 또한 그들의 질투의 감정을 야기했던 채색옷을 벗겼다”(엘렌 G. 화잇, 더 스피릿 오브 프로페시 1권, 128~1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채색옷”이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것, 비록 그것이 멀지 않아 우리에게서 벗겨지고 피로 더러워질지라도, 간절히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장은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의 영예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화려하든지 아니든지 채색옷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세상적인 옷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채색옷을 입을 수도 있다. 벗겨지고 찢겨질 세상의 채색옷을 버리고 하늘의 아름답고 화려한 채색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소 휘장을 장식한 극히 아름다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채색옷이다.
➋만약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섬기는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 이야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만약 형제들이 기도하는 법, 자신을 죽이는 법,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알았다면, 이 가운데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큰 고통과 고난을 겪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걸렸던 덫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며(딤전4:5)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아를 부인하면 그런 덫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댓글목록
유성호님의 댓글
유성호 작성일극서은 은 무슨 뜻인가요?
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극서은"은 "그것은 "을 잘못 타자 한 것입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찾아 가르쳐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코스모스님의 댓글
코스모스 작성일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사람에게 안식일과 가정제도를 축복으로 주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선지자나 하나님께서 일부다처에 대해서 지적하시거나 죄라고 언급하신거시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일부다처를 용인하신것인데 왜 그러셨던것인지요? 성경상 일부일처가 원칙아닌가요? 괭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요?
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일부다처를 하나님이 친히 허락한 사실은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라기 2:15은 하나님께서는 영이 유여하셔도 오직 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자녀를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일부일처가 성경 원칙이고 창조 원칙이지요. 그런데 왜 다처를 한 믿음의 조상들이 많은지요. 야곱이 대표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원칙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감사합니다.
코스모스님의 댓글
코스모스 작성일일부다처가 성경상 원칙이 아니라면 그 당시 일부다처인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죄를 짓고 있다고 단정할수 있는건가요? 아니면 죄는 아니라면 후대에 화잇여사의 예언의 말씀이후로 일부다처를 죄라 다정할수 있나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와는 반대로 일부다처가 매우 일찍이 시작되었다. 주께서는 아담에게 한 아내를 주심으로 그것에 관한 당신의 규칙을 보이셨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적인 욕망을 따르기로 선택하였다. 그 결과로 범죄와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신속하게 증가하였다." -부조와 선지자,91-
"일부다처는 아주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어 버렸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일이었으며 가족 관계의 신성성과 평화에 치명적이었다. 아브라함과 하갈과의 결혼은 그의 가정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나쁜 결과를 빚어내었다."부조와 선지자,145 -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 속에서 결혼의 함축인 의미를 담고 계시며, 아담을 위해 오직 한 아내만 지으셨다(창2:21-23). 이렇게 해서 이상적인 결혼 모습이라고 믿어지는 일부일처가 시작됐다
아담의 7대 손이며 가인의 후손 라멕 시대 이후 일부다처제가 생겨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4:19-24). 성경은 라멕을 처음으로 두 아내를 가진 사람으로 지목하면서 도덕적으로 불미스러운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창4:23-24).
인류의 초기 결혼을 볼 때에, ‘근친혼’(씨족결혼)이 만연했다. 그러나 B.C. 4000년경부터 배우자를 종족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 ‘족외혼’이 일반화되면서 결혼문화가 의식화되고 배우자에게 예우를 갖추게 되었다. 성경에서도 근친혼 풍습은 유목이나 족장시대까지 이어져 부인을 씨족이나 부족 내에서 선택했다(창11:29, 20:12, 28:2, 31:41).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받으면서 법적으로 같은 어머니의 형제들과 자매들간의 결혼은 금지됐다. 더 나아가 모든 의붓자매와 아버지의 부인의 딸, 숙백(부)모, 고모(부), 이모(부), 외숙(부)모, 며느리, 처형(제), 장모 등에게 확대됐다(레20장).
선지자시대 이후 히브리인의 결혼제도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다. 하지만 구약 상류사회에서는 일부다처주의가 유행했고(삿8:30, 삼하5:13), 형식상만 일부일처제이지 실제는 법적인 부인들 곁에 첩의 존재를 허용했다. 일부다처제는 ‘자매형’과 ‘비자매형’로 구분되는데 비자매형은 일반적이었다. 자매형의 일부다처제(sororate)는 율법이전시대에만 찾아볼 수 있는데 실례는 야곱이 레아, 라헬 자매와 결혼한 것. 한편 히브리인에게도 남편들이 형제나 친족인 ‘일처다부제’(levirate)가 존재했으며(고엘 제도, 신25:5-10), 다말(창38:6-11)과 룻(룻4:1-10)의 기사에서 나타난다.
구약에서 혼잡한 결혼 생활은 혼잡한 신앙생활로 비유되며(겔16장), 간음을 큰 죄악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일부일처를 주장하며 이방여인과의 이혼할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스9-10장). 성경에서 참된 결혼의 의미는 육체적 관계를 넘어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일반 가정에서는 일부일처제도가 지배적이었다. 왕조시대 전체를 통하여 사무엘의 가정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중혼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 사회상을 드러내는 지혜서에서도 일부다처제도를 말하고 있지 않다. 여인들이 가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하고 있는 여러 구절에서 엄격한 일부일처제도의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잠 5:15-19; 31:10-31; 전 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