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근심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질문과 대답, 부가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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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0-12-31 10:36 조회9,461회 댓글1건본문
1월 8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0분
기억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
연구범위: 창 3:6~10, 15:1~3, 요14:1~2, 마 6:25~34, 18:3, 빌 4:11~12.
<교과를 공부할 때마다 꼭 염두에 둬야할 사실>
이번 기 교과에서 우리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것을 주님의 통치에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에 관한 성서적인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성경 인물들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번 기 교과의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정서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낙담에 빠지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주의 사랑의 빛을 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반사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두려움’, ‘근심’, ‘걱정’, ‘무서워하다’라는 말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의 근심과 두려움에 관련되어 있는 성경절뿐 아니라 그런 인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증과 약속에 관한 말씀들도 많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는 기별은 성경 전체를 통해 두루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근심과 두려움은 죄가 이 땅에 들어온 뒤로 인간 존재의 일부분이 되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근심은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가장 위협하는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로부터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한 나그네가 길에서 공포와 전염병을 만났다. 그들은 만 명을 죽이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그네는 전염병에게 정말 모두를 죽일 작정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염병은 “그렇지 않소. 나는 단지 몇 백 명을 죽일 것이요. 대신 내 친구 공포가 나머지들을 죽일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떻게 두려움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배울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족하는 것이다.
결론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많은 것들이 걱정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하여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요일 1월 2일
최초의 두려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처음으로 두려움과 마주쳐야 했던 아담과 하와의 경험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중 아무도 그런 느낌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신생아들이 직면하는 두려움이란 배고픔, 날카로운 소음이라고 생각한다.
성장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동물이나 어두움, 홀로 되는 것, 학교와 관련된 두려움, 부모로부터의 분리, 성장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동료로부터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 다양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성인 역시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적합한 직업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테러분자들의 공격, 만성 또는 불치의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걱정, 부상과 죽음에 관한 두려움 등 삶의 정황으로부터 비슷한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엘렌 G. 화잇은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후, “그의 죄에 대한 생각이 그를 공포심으로 채웠다. 지금까지 온화하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던 공기가 이 범죄한 부부에게 갑자기 차갑게 느껴졌다. 그들이 누려 왔던 사랑과 평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 그들은 죄에 대한 의식, 장래에 대한 공포, 영혼의 벌거벗음을 느꼈다.”고 말했다(부조와 선지자, 57).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질문 1. 다음은 두려움과 근심에 대하여 주신 말씀들입니다. 각 말씀 가운데 특징적인 요소를 찾아보십시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잠 1: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재앙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학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 하나님의 언약과 그것을 이루시는 성령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 말라.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의를 위하여 고난이 올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일 4:18~19]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두려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원인이 제거된다.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후에 두려움이 뒤따라 온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배후는 그분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믿으면 죽어도 사는 생명을 얻는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일과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이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실상을 확실히 증명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는다.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근심이 없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예수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요일3:14)
그렇다고 해도 일상생활에서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 육체의 안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것들을 이겨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근심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 바라신다.
월요일 1월 3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를 큰 나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에게는 상속자가 없었다. 이는 아브람의 주된 생각과 근심거리였다. “누가 내 상속자가 되겠습니까? 내 집의 종이 나의 상속자가 되겠습니다!”고 했던 그의 말 속에 그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 나타나 있다. 아브람이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은 죽어서도 자신의 영향과 흔적을 남기고자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근심하는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해 주셨다(창 15:1). 우리의 삶과 미래, 죽음과 그 이후도 모두 하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분은 근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필요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기를 바라신다.
질문 1. 창 15:1~3을 읽어보십시오. 아브람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습니까? 그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창15:1~3]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답: 아브람은 후사가 없어서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그가 롯을 찾기 위하여 네 나라 연합군을 추격하고 격퇴하여 롯과 그와 함께 한 포로들을 다 찾아온 것이다. 그 연합군들이 언제 아브람을 반격할는지 그는 두려웠다. 그가 혹시 죽는다면 그를 이을 후사도 없다.
질문 2. 아래의 성경절들을 살펴보십시오. 어떤 상황에서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기별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신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답: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전진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격려와 보증의 말씀이다.
[대하 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답: 여호사밧 왕이 세 민족 연합군이 유다를 공결격할 때 격려하시고 그 싸움의 주관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을때.
[눅 21: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답: 말세 환난의 때에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답: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
<부가설명> 아브라함의 두려움이나 근심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영생한다면 후사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후사가 있으면 좋고 없다고 해도 자신이 영생하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목숨이 있는 동안 안전하고 넉넉하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된다. 세상이 사람들을 그렇게 살도록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에게 자녀가 없으면 그의 산업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일을 생각할 때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성령의 주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염려함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냥 염려하는 것뿐이고, 그렇게 하면 심신의 건강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되 염려는 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훈: 인간의 근심은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화요일 1월 4일
근심하지 말고 믿으라
질문 1. 요 14:1~2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위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셨습니까?
[요14:1,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답: 이 말씀 전에 최후의 만찬이 있었다. 거기서 예수를 팔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것이다. 이런 소망의 약속으로 근심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질문 2. 시 118:8~9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사람을 신뢰하는 것을 어떻게 비교하였습니까?
[시118:8,9]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답: 권력을 가진 사람(방백)일지라도 사람에게 피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비교 하였다.
세상에 유력한 사람들은 때때로 현실적으로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생명에 대하여서는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다. 오직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만이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 지나가는 세상에서 이 생명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생명을 소유했다면 세상 일에 담담할 능력을 얻을 것이다.
질문 3. 마 18:3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는 무엇입니까?
[마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답: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가 요구하는 답은 아마 전적인 신뢰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린아이가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고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삶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근심걱정을 주께 맡기게 될 것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부가설명> 우리가 근심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죽으면 근심도 죽는다. 근심을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죽어야 한다. 예수님께 오는 참된 쉼이 있다고 하셨는데(마11:28,29) 그것은 예수 안에서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하다. 계시록은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쉼이 있다고 말한다.(계14:13) 이것은 역사적 어떤 시점에 있을 사건을 예언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아가 주 안에서 죽는다면 쉼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자아가 죽는 것이 쉽지 않다. 눈앞에 다가오는 현실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교훈: 근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수요일 1월 5일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
질문 1. 산상수훈의 일부분인 마 6:25~33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자상한 충고의 말씀 이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6:25~3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답: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그 있어야 할 것들을 먼저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우리의 절대적인 필요에 대하여 책임지실 것을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새와 백합을 예로 드신 것은 모든 생물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존한다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하겠느냐고 하셨다.(마6:27) 구역은 목숨을 일각이나 더하겠느냐고 했다. 성장과 생명의 작용을 연결시킨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생명을 누가 관리하느냐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또한 염려라는 말은 분열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눈이 성하면”(22절)이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이 말은 “하플루스”인데 이것은 “single”이다. “하나”라는 뜻이다. 즉 눈의 초점이 분열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눈이 이중 초점이 되면 사물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 보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우리는 초점을 오직 예수님께 맞추라는 말씀이다. 세상과 예수님을 동시에 보려면 괴롭고 염려가 된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초점을 분열시키지 말고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중 초점으로 괴로워하지 않는가?
교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근심을 소용없게 만든다.
목요일 1월 6일
그날에 족함
질문 1. 마 6:34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어떤 면에서 매우 중요합니까?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답: 사람에게는 오직 하루씩만 주어졌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 하루를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다음에 주어질 하루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니 오지도 않은 내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아직 그들의 양식이 떨어져서 굶은 일이 전혀 없었는데, 곧 떨어질 것 같은 양식 때문에 미리 걱정하였다. 그러나 내일을 위하여 만나는 예비 되어 있었고, 그 양식은 한 날 필요씩 공급되었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 되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었다.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비결은 바로 만족하는 것이다. 만족은 유전되는 태도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얻는 품성이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다(12절).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지금 가진 것에 대한 만족감을 늘리고, 내일 다가올 것에 관한 염려를 접을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현대 물질문명의 소용돌이에서 사람들은 상대적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같은 때에 이민을 왔는데, A는 좋은 차를 타고 멋진 집을 장만했는데, 나는 이게 뭐냐. 이런 것이 상대적 빈곤이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 사람들 중에 이런 빈곤으로 과중한 스트레스에 눌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 같다. 라이벌 의식이다. 우리가 이런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울은 이런 의식이 없었다. 그에게는 예수 안에 모든 부요함이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연히 거하면서(사30:15)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해야할 당사자가 염려에 빠져 있으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충만이며 이 충만이 마음을 채우면 만족할 것이다. 바울이 바로 이 경지에 이른 것이다.
교훈: 미래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하기 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근심을 없애는 방법이다.
1월 7일 금요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를 죽이는 것은 일이 아니라 염려이다. 염려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어려움을 그리스께로 가져가는 것이다. 어두운 측면을 보지 않도록 하자. 명랑한 정신을 계발하도록 하자”(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466).
“만일 우리가 더 많은 믿음, 더 많은 사랑, 더욱 큰 인내, 우리 하늘 아버지에 대한 더욱 완전한 신뢰를 갖도록 스스로를 교육시킨다면, 이생의 투쟁들을 통과할 때에 더욱 큰 평강과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불평하고 염려하여 당신의 팔에서 떠나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은혜의 유일한 원천, 모든 약속의 성취, 모든 복의 실현이시다. …실로 우리의 순례 생활은 예수가 없다면 외로울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요 4:18)을 것이라고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분의 약속을 믿으며 낮에는 그것들을 되풀이하고 밤에는 그것들을 묵상하도록 하자”(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4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는 목요일 소지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던 바울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었습니까? 교과반에서 서로 나눠 보십시오.
* 바울의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행20:24) 죽음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모든 것이 가볍다. 만족이 그 마음과 삶을 채울 것이다.
➋별다른 이유도 없이 고통과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난치, 또는 불치의 병을 경험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로한 진정한 능력은 없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권고할 수 있을 것이며, 말씀 안에서 스스로 믿음으로 당면한 경우를 극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해결은 하나님께 있을 뿐이다.
➌혹시나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그대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
*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재림교인들은 아직 오지 않은 일요일 휴업령, 야곱의 환난을 미리 생각하며 걱정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참 많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중에 오늘 주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준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기억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
연구범위: 창 3:6~10, 15:1~3, 요14:1~2, 마 6:25~34, 18:3, 빌 4:11~12.
<교과를 공부할 때마다 꼭 염두에 둬야할 사실>
이번 기 교과에서 우리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것을 주님의 통치에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에 관한 성서적인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성경 인물들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번 기 교과의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정서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낙담에 빠지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주의 사랑의 빛을 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반사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두려움’, ‘근심’, ‘걱정’, ‘무서워하다’라는 말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의 근심과 두려움에 관련되어 있는 성경절뿐 아니라 그런 인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증과 약속에 관한 말씀들도 많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는 기별은 성경 전체를 통해 두루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근심과 두려움은 죄가 이 땅에 들어온 뒤로 인간 존재의 일부분이 되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근심은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가장 위협하는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로부터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한 나그네가 길에서 공포와 전염병을 만났다. 그들은 만 명을 죽이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그네는 전염병에게 정말 모두를 죽일 작정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염병은 “그렇지 않소. 나는 단지 몇 백 명을 죽일 것이요. 대신 내 친구 공포가 나머지들을 죽일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떻게 두려움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배울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족하는 것이다.
결론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많은 것들이 걱정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하여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요일 1월 2일
최초의 두려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처음으로 두려움과 마주쳐야 했던 아담과 하와의 경험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중 아무도 그런 느낌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신생아들이 직면하는 두려움이란 배고픔, 날카로운 소음이라고 생각한다.
성장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동물이나 어두움, 홀로 되는 것, 학교와 관련된 두려움, 부모로부터의 분리, 성장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동료로부터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 다양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성인 역시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적합한 직업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테러분자들의 공격, 만성 또는 불치의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걱정, 부상과 죽음에 관한 두려움 등 삶의 정황으로부터 비슷한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엘렌 G. 화잇은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후, “그의 죄에 대한 생각이 그를 공포심으로 채웠다. 지금까지 온화하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던 공기가 이 범죄한 부부에게 갑자기 차갑게 느껴졌다. 그들이 누려 왔던 사랑과 평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 그들은 죄에 대한 의식, 장래에 대한 공포, 영혼의 벌거벗음을 느꼈다.”고 말했다(부조와 선지자, 57).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질문 1. 다음은 두려움과 근심에 대하여 주신 말씀들입니다. 각 말씀 가운데 특징적인 요소를 찾아보십시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잠 1: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재앙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학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 하나님의 언약과 그것을 이루시는 성령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 말라.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의를 위하여 고난이 올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일 4:18~19]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두려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원인이 제거된다.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후에 두려움이 뒤따라 온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배후는 그분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믿으면 죽어도 사는 생명을 얻는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일과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이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실상을 확실히 증명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는다.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근심이 없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예수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요일3:14)
그렇다고 해도 일상생활에서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 육체의 안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것들을 이겨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근심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 바라신다.
월요일 1월 3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를 큰 나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에게는 상속자가 없었다. 이는 아브람의 주된 생각과 근심거리였다. “누가 내 상속자가 되겠습니까? 내 집의 종이 나의 상속자가 되겠습니다!”고 했던 그의 말 속에 그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지 나타나 있다. 아브람이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은 죽어서도 자신의 영향과 흔적을 남기고자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근심하는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해 주셨다(창 15:1). 우리의 삶과 미래, 죽음과 그 이후도 모두 하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분은 근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필요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기를 바라신다.
질문 1. 창 15:1~3을 읽어보십시오. 아브람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습니까? 그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창15:1~3]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답: 아브람은 후사가 없어서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그가 롯을 찾기 위하여 네 나라 연합군을 추격하고 격퇴하여 롯과 그와 함께 한 포로들을 다 찾아온 것이다. 그 연합군들이 언제 아브람을 반격할는지 그는 두려웠다. 그가 혹시 죽는다면 그를 이을 후사도 없다.
질문 2. 아래의 성경절들을 살펴보십시오. 어떤 상황에서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기별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신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답: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전진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격려와 보증의 말씀이다.
[대하 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답: 여호사밧 왕이 세 민족 연합군이 유다를 공결격할 때 격려하시고 그 싸움의 주관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을때.
[눅 21: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답: 말세 환난의 때에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답: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
<부가설명> 아브라함의 두려움이나 근심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영생한다면 후사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후사가 있으면 좋고 없다고 해도 자신이 영생하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목숨이 있는 동안 안전하고 넉넉하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된다. 세상이 사람들을 그렇게 살도록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에게 자녀가 없으면 그의 산업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일을 생각할 때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성령의 주장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염려함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냥 염려하는 것뿐이고, 그렇게 하면 심신의 건강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되 염려는 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교훈: 인간의 근심은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화요일 1월 4일
근심하지 말고 믿으라
질문 1. 요 14:1~2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위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셨습니까?
[요14:1,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답: 이 말씀 전에 최후의 만찬이 있었다. 거기서 예수를 팔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것이다. 이런 소망의 약속으로 근심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질문 2. 시 118:8~9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사람을 신뢰하는 것을 어떻게 비교하였습니까?
[시118:8,9]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답: 권력을 가진 사람(방백)일지라도 사람에게 피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비교 하였다.
세상에 유력한 사람들은 때때로 현실적으로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생명에 대하여서는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다. 오직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만이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 지나가는 세상에서 이 생명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생명을 소유했다면 세상 일에 담담할 능력을 얻을 것이다.
질문 3. 마 18:3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는 무엇입니까?
[마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답: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가 요구하는 답은 아마 전적인 신뢰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린아이가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고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삶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근심걱정을 주께 맡기게 될 것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부가설명> 우리가 근심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죽으면 근심도 죽는다. 근심을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죽어야 한다. 예수님께 오는 참된 쉼이 있다고 하셨는데(마11:28,29) 그것은 예수 안에서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하다. 계시록은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쉼이 있다고 말한다.(계14:13) 이것은 역사적 어떤 시점에 있을 사건을 예언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아가 주 안에서 죽는다면 쉼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자아가 죽는 것이 쉽지 않다. 눈앞에 다가오는 현실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교훈: 근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수요일 1월 5일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
질문 1. 산상수훈의 일부분인 마 6:25~33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자상한 충고의 말씀 이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6:25~3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답: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그 있어야 할 것들을 먼저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우리의 절대적인 필요에 대하여 책임지실 것을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새와 백합을 예로 드신 것은 모든 생물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존한다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하겠느냐고 하셨다.(마6:27) 구역은 목숨을 일각이나 더하겠느냐고 했다. 성장과 생명의 작용을 연결시킨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생명을 누가 관리하느냐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또한 염려라는 말은 분열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눈이 성하면”(22절)이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이 말은 “하플루스”인데 이것은 “single”이다. “하나”라는 뜻이다. 즉 눈의 초점이 분열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눈이 이중 초점이 되면 사물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 보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우리는 초점을 오직 예수님께 맞추라는 말씀이다. 세상과 예수님을 동시에 보려면 괴롭고 염려가 된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초점을 분열시키지 말고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중 초점으로 괴로워하지 않는가?
교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근심을 소용없게 만든다.
목요일 1월 6일
그날에 족함
질문 1. 마 6:34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어떤 면에서 매우 중요합니까?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답: 사람에게는 오직 하루씩만 주어졌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 하루를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다음에 주어질 하루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니 오지도 않은 내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아직 그들의 양식이 떨어져서 굶은 일이 전혀 없었는데, 곧 떨어질 것 같은 양식 때문에 미리 걱정하였다. 그러나 내일을 위하여 만나는 예비 되어 있었고, 그 양식은 한 날 필요씩 공급되었다. 백성들은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 되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었다.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비결은 바로 만족하는 것이다. 만족은 유전되는 태도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얻는 품성이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다(12절).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지금 가진 것에 대한 만족감을 늘리고, 내일 다가올 것에 관한 염려를 접을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현대 물질문명의 소용돌이에서 사람들은 상대적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같은 때에 이민을 왔는데, A는 좋은 차를 타고 멋진 집을 장만했는데, 나는 이게 뭐냐. 이런 것이 상대적 빈곤이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 사람들 중에 이런 빈곤으로 과중한 스트레스에 눌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 같다. 라이벌 의식이다. 우리가 이런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울은 이런 의식이 없었다. 그에게는 예수 안에 모든 부요함이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연히 거하면서(사30:15)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해야할 당사자가 염려에 빠져 있으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충만이며 이 충만이 마음을 채우면 만족할 것이다. 바울이 바로 이 경지에 이른 것이다.
교훈: 미래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하기 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근심을 없애는 방법이다.
1월 7일 금요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를 죽이는 것은 일이 아니라 염려이다. 염려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어려움을 그리스께로 가져가는 것이다. 어두운 측면을 보지 않도록 하자. 명랑한 정신을 계발하도록 하자”(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466).
“만일 우리가 더 많은 믿음, 더 많은 사랑, 더욱 큰 인내, 우리 하늘 아버지에 대한 더욱 완전한 신뢰를 갖도록 스스로를 교육시킨다면, 이생의 투쟁들을 통과할 때에 더욱 큰 평강과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불평하고 염려하여 당신의 팔에서 떠나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은혜의 유일한 원천, 모든 약속의 성취, 모든 복의 실현이시다. …실로 우리의 순례 생활은 예수가 없다면 외로울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요 4:18)을 것이라고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분의 약속을 믿으며 낮에는 그것들을 되풀이하고 밤에는 그것들을 묵상하도록 하자”(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4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는 목요일 소지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던 바울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었습니까? 교과반에서 서로 나눠 보십시오.
* 바울의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행20:24) 죽음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모든 것이 가볍다. 만족이 그 마음과 삶을 채울 것이다.
➋별다른 이유도 없이 고통과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난치, 또는 불치의 병을 경험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로한 진정한 능력은 없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권고할 수 있을 것이며, 말씀 안에서 스스로 믿음으로 당면한 경우를 극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해결은 하나님께 있을 뿐이다.
➌혹시나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그대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
*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재림교인들은 아직 오지 않은 일요일 휴업령, 야곱의 환난을 미리 생각하며 걱정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참 많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중에 오늘 주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준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평신도님의 댓글
평신도 작성일
이번 교과 주제도 너무 좋고 목사님께서 부연 설명도 열심히 잘 해주시니
교과 공부를 통해서 받는 은혜가 배가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