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 한나 :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배움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3과 - 한나 :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배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10-13 21:09 조회6,146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2010년10월 16일 일몰오후 5시 54분

제 3 과
<한나 :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배움>

<기억절>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 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 이다”(삼상 2:1~2).

<요 점>
하나님은 불행한 한 여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녀의 삶을 복이 넘치는 삶으로 바꿔주셨다. 그러자 그녀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믿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일요일(10월 10일)
<나는 얼마나 가치(價値)있는 존재인가?>

▣ <“한나”와 “브닌나” (삼상 1:1-8)> (이야기 하나)
(사무엘 상 1장1-2절)을 보면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無子)하더라”고 말합니다. 엘가나란 사람의 두 아내가 등장을 하는데 "한나"와 "브닌나"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두 여인 사이에 싸움이 등장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4-5절을 보면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한나"가 자식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셨는데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다 해도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여전히 힘이며 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내 것이라는 개념에서 나옵니다.
자기 소유로 주어진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때 자연히 복이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대신 불평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방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더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視覺)에서 본다면 "브닌나"는 복(福)받은 자이고 "한나"는 복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브닌나"는 받은 것이 있고 "한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은 것이 "한나"에게 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본문은 누가 복을 받고 안 받고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뒤에 "한나"가 기도함으로 사무엘을 낳게 된 것을 두고 기도해서 복을 받게 된 것으로 말하는 것도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한나"에게 자식(子息)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한나"가 기도를 안했기 때문도 아니고, 또 한나 더러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자식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있게 하심으로서 인간에게 있는 속성을 드러내시고자 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자식을 가진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심히 핍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인 엘가나가 "한나"를 더욱 사랑한 것에 대한 분 풀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을 권세 삼아서 "한나"를 곤란케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식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한나"가 자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하면서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말한다면 결국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소유에 대한 현대인의 시각은 거의 동일합니다.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보다 나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가 그만큼 나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진 것을 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잘한 자에게 주는 상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나"가 남편의 사랑을 갑절이나 받았다고 하지만 자식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받는 고통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살아있습니다. 이 욕망은 누군가가 가진 자로서 내 옆에 존재할 때 더욱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가진 자를 볼 때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해 낙심하고 하나님에 대해 아쉬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다른 무엇인가가 보태지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사랑보다는 많은 것이 주어지는 사랑을 더 강렬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 가장 귀하신 아들을 주심으로서 나타났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부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내 소유를 계산을 합니다.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하여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전부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보다는 더 좋은 자가용을 소유하고 더 크고 넓은 집을 소유하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엘가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갑절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은 약자(弱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약자(弱者)를 뜻합니다.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엘가나가 이러한 "한나"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은 약자(弱者)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복 받은 것으로 말하고 교회 역시 힘을 소유한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소유로 인한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의 위에 군림하게 되고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한 것처럼 가지지 못한 자의 마음을 격동케 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聖徒)임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소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유란 단지 하나님이 맡긴 것에 대한 차이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 더 받았다’는 생각은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결코 자신을 남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聖徒)에게 있어서 소유는 크게 기뻐해야 할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할 조건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소유로 인해서 나에게서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이 보여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한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케 하고 핍박을 한다면 그것은 "한나"가 당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하시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聖徒)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더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격동케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 “특별히 어머니에게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다. 자기의 생명력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의 육체적 조직을 형성시켜 주는 어머니는 마음과 품성을 꼴 지워 주는 정신적 영적 감화력도 또한 나누어 주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모세를 낳은 히브리인 어머니 요게벳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는(히 11:23)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늘에서 지시한 아들이요 결백한 사사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 학교를 설립한 사무엘의 어머니는 기도와 자아희생을 실천하고 하늘의 영감을 받은 여자 한나였다. 구주의 선구자의 어머니는 나사렛 마리아의 친척이며 그와 같은 심정을 가졌던 엘리사벳이었다”(치료, 371)

◯ <불평의 유혹을 견딤>
“한나에게는 희망이 깨어지고 생애가 무거운 짐처럼 보였으나 그녀는 불평하지 않는 온유한 마음으로 그 시련을 견디었다.”(부조와 선지자, 569).

◯ 여인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에 자녀를 낳지 못한 한나는 어떤 인생의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월요일(10월 11일)
<이와 같은 친구들>

▣ <“한나”와 “브닌나” (삼상 1:1-8)> (이야기 둘)

여러분의 소유가 얼마가 되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차별을 가지고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많은 자나 적은 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똑같은 죄인(罪人)이고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救援)받을 수 없는 무능(無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무능함이 소유가 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은 소유에 의해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고 대접받는 것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대접은 누구에게나 공평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聖徒)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자들도 있고 몸에 장애(障碍)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그러한 삶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원(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욥기서1장 참조) 그러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聖徒)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가난과 장애는 결코 누군가에게 무시 받을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의 고통을 보게 하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유(所有)는 곧 힘과 연결됩니다. 힘은 곧 권세이며 힘없는 자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권력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유한 자가 곧 권력자로 존재하고 소유하지 못한 자는 소유한 자에 의해 다스림 받으며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怨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와 "브닌나"를 세워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고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누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약자(弱者)에 대한 무시보다는 그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한 삶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약자(弱者)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 약자(弱者)가 되어라 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弱者)란 소유와 연관이 없습니다. 즉 소유가 많다고 해서 강자고 없다고 해서 약자(弱者)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유와 상관없이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힘으로 삼지 않는 자는 누구나 약자(弱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자신의 약자(弱者) 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자(弱者)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거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자(弱者)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철저한 무능력자입니다. 그 무엇을 소유했다고 해도 여러분의 소유물이 구원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책임지실 뿐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소유의 많음이 권세가 되어서 없는 자를 다스리고 무시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직책에 상관없고 부자 가난한 자라는 소유에 상관없고 검사 청소부 등 직업에 상관없이 동일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절대로 세상의 직업이나 신분 또는 소유로 인해서 차별이 보여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소유에 의해서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결과만큼은 소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삶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날마다 자각하면서 소유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삶이되기를 열망하고 힘쓰는 것입니다.

비록 소유가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는 것만을 소유라고 여길 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소유의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눈에 보이는 소유를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입니다.
썩어질 것을 소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참된 소유로 여기며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보이는 소유로 인한 갈등과 싸움 속에서 끝까지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쓸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 “모든 히브리인이 매우 열렬히 갈망한 축복을 이 경건한 부부는 받지 못하여 그들의 가정에는 아이의 음성을 듣는 즐거움이 없었다. 남편은 그의 가계(家系)를 영속시키려는 소망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듯이 제2의 결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 처사는 행복을 가져오지 못했다. 집안에 아들딸들이 탄생하였으나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의 기쁨과 아름다움은 훼손되었고 가정의 평화는 깨어졌다. 새 아내 브닌나는 질투심이 강하고 마음이 좁았고 오만하고 불손하였다. 한나에게는 희망이 깨어지고 생애가 무거운 짐처럼 보였으나 부인은 불평하지 않는 온유한 마음으로 그 시련을 견디었다.”(부조, 569)

◎ “그의 가정에 저주를 가져온 악한 정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축제에까지 침입하였다.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 온 가족은 세워진 습관에 따라 함께 연합하여 엄숙하면서도 즐거운 잔치를 배설하였다. 엘가나는 이 자리에서 자녀들의 어머니와 그 아들과 딸들에게 그들의 몫을 각각 나눠 주고, 한나에게는 그를 중히 여기는 증거로 두 몫을 주어 그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마치 그가 자녀를 가진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 때에 질투심에 불타는 둘째 아내는 자신이 하나님의 큰 총애를 받은 자로서 우대 받기를 요구하고 한나가 아들이 없는 것은 여호와의 불쾌히 여기심의 증거라고 그를 조소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계속되었다. 마침내 한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한나는 슬픔을 감출 길이 없어 울음을 터트리고 잔치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의 남편이 그를 위로하고자 애썼으나 헛수고였다. 그는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 1:8)라고 말하였다.”(부조, 569)

◯ <그리스도인의 참 특성인 동정>
“동정과 친절과 사랑이 결핍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할 수 없다.”(교회증언 6권, 42)
“생애 자체가 고통스런 투쟁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늘 부족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불신을 나타낸다. 자신들에게는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투쟁하는 고독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친절한 말과 동정의 표정과 감사의 표시는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과 같을 것이다. 동정의 말 한 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는 피곤한 어깨에 무겁게 지워져 있는 짐을 치워 줄 것이다. 따라서 사심이 없는 모든 친절한 말과 행동은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다.”(산상보훈, 23)

◯ 모든 길이 막히고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결국 우리는 위를 바라보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화요일(10월 12일)
<마음을 토로(吐露)함>

▣ 성경에는 수태(受胎)고지를 받고 아들을 낳는 여인들 얘기가 더러 나옵니다.
성령으로 예수가 마리아에게 수태(受胎)되는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여호와, 여호와의 사자, 천사 또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수태(受胎)고지를 받는 몇 사람의 여인들 중의 하나가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이다.

사무엘상의 1장은 엘가나라는 사람의 두 아내 중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자식(子息)이 없다는 기록으로 시작된다. 한 사람의 남자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가 남편으로 섬기는 삶에 대한 얘기 중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 사람은 자식이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의 여인은 자식을 두지 못하여 자식이 없는 여인이 먼저 자식을 가진 다른 여인을 질투하게 되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남편의 대(代)라도 잇게 해야겠다는 순수하고 좋은 뜻으로 자기의 여종을 남편에게 바쳤다가 막상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크게 받아 아들을 낳게 되고 이제는 자신의 종의 신분이라기 보담 자기의 남편을 자기와 공유하는 첩의 신분으로 상승하여 남편 아브라함의 사랑을 다투어야 하는 위치가 되자 예전에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실 앞에 당황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여인으로서의 질투심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레아와 라헬은 비록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동기간이지만 한 남자와 결혼한 사이가 되어 서로 남편을 공유하게 되자 서로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하게 되고 그 사랑을 많이 차지한 증표가 곧 자식을 낳는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시녀까지 바쳐가면서 자식 낳기 경쟁까지 벌리는 어리석고 이상야릇한 짓을 저지른다.

본질적으로 여인들이란 한 사람의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언니 동생 간이든, 어머니와 딸의 사이이든, 남남 관계든 상관없이 같은 남자의 여자가 되면 서로 경쟁관계가 되어 투기로 얼룩지게 되는 이런 여인들의 성정(性情)을 지니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경우가 위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또 한 번 한 남자의 아내 되는 두 여인이 질투와 긴장관계를 벌리는 얘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자식을 낳느냐 못 낳느냐가 마치 남자의 사랑을 많이 차지하느냐 않느냐 하는 척도처럼 인식되어 아이를 수태(受胎)치 못한 한나의 고뇌와 슬픔을 나타내주고 있다.

남편 엘가나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혼자 몸인 한나에게는 배나 더 많이 주었는데 그만큼 그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더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남편이 자식을 낳아준 자기보다 자식도 낳지 못한 한나를 남편이 더 위하는 것에 질투가 나고 화가 난 브닌나는 오히려 이를 빌미로 한나를 구박하고 아이도 못 낳는 년(?)이라고 심히 격동을 시키는 바람에 한나가 고민하여 울고 식음을 전폐하곤 했다.

비록 그 남편 엘가나가 이런 한나를 향해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하고 위로 하고 달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나는 그 괴로움을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어 어느 날 여호와께 통곡하며 서원기도를 드리게 된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 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장 11절)

이렇게 하여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이후 그토록 자식을 못 낳아 브닌나의 핍박을 받아 눈물의 세월을 보냈던 한나는 여호와의 은혜로 모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되었다.

아브라함과 잠자리를 갖고 임신하게 된 여종 하갈의 멸시에 견딜 수 없었던 사라가 14년 만에 아들이삭을 낳고 그 분을 갚았듯이 그리고 언니 레아가 아들만 여섯을 낳고 또 두 사람의 시녀들이 야곱과 관계하여 네 명의 아들을 두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 막혔던 태를 열어주시므로 두 아들을 낳게 된 레아처럼 한나도 종국에는 자식들을 슬하에 두는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교훈하기 위하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을 수 있는 이야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진즉에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그토록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투(死鬪)의 기도를 하였을까?
전자(前字)에 소개한 사라나 레아나 무자(無子)했던 여인들의 기도가 있었을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특권(特權)을 주시기 위하고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도 한나처럼 사라처럼 무자(無子)한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財物)”로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疾病)”으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職場)이나 직업(職業)”으로 등등 여러 가지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모든 기도의 제목들로 인하여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구원(救援)자되시는 평강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신실한 신앙을 합시다.

◎ <기도 祈禱>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단순한 독백이나 말을 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인 교섭이며 대화(對話)이다. 기도는, 기원(祈願) 감사, 찬미를 포함한다. 성경에는 기도가 넘치게 많은 까닭에 그리스도교는 기도의 종교라고까지 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했고(사 56:7; 사 21:13) 또 성전에서 희생제를 드리는 데도 기도가 그 예배의 주요 부분이었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그 생애에 중대한 전환이 올 때에는 반드시 기도하셨는데(막 1:35; 눅 3:22; 6:12; 9:29) 특히 「겟세마네」에 있어서의 기도(막 14:32, 35, 39)와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눅 23:34; 막 15:34; 눅 23:46)는 속죄에 관한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또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표준으로 ‘주의 기도’(마 6:9~13)를 가르치셨다. (→ 주기도). 구약 성경에는 기도의 사람으로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히스기야, 다니엘, 한나 등을 들 수 있다.”

◎ <기도의 종류 및 실례>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들어주실 때 무언가를 드리기로 하는 서원이 있다. 야곱(창 28:20~22),
입다 (삿 11:30-40), 한나 *삼상 1:11)의 서원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서원으로, 법궤를 옮겨오는 다윗의 경우가 그렇다(시 132:2~5),
셋째, 소원 성취 외에 다른 유익을 구하지 않는 서원으로, 아랏과의 전쟁(민 21:1~3)등이 그렇다.”

◎ “한나는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다. 한나는 이 세상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였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치욕을 거두시고 당신을 위하여 양육하고 교육시킬 한 아들을 귀중한 선물로 주시기를 열렬히 탄원하였다. 그리고 한나는 만일 자기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자기의 아이를 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였다. 한나는 성막 문 곁으로 가까이 나아가 마음이 괴로워 “기도하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하나님과 교통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 사악한 시대에는 그와 같이 예배하는 광경을 보기가 매우 드물었다. 종교적 축제에서까지도 불경한 연락과 술취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엘리는 한나를 보고 술 취한 줄로 생각하였다. 엘리는 당연한 책망으로 훈계하리라고 생각하고 엄하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하였다.”(부조, 570)

◎ “한나는 마음이 아프고 놀랐으나 온유하게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리다”고 대답하였다.”(부조, 570)

◎ “하나님의 성도들(갈렙, 한나, 도르가)이 가졌던 바와 같이,
그처럼 인내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계속적인 충성이 흔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이 충성이 없이는 번영할 수가 없다.
이 충성은 교회에서도, 안식일학교에서도, 그리고 또 사회에서도 다 필요하다. ― TSS 109.”(안교, 159)

◎ <이 장면은 거듭거듭 반복됨>
“그것은 매년 제를 드릴 때는 물론이요 분위기가 조성되어 브닌나가 그의 경쟁자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자신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는 언제나 그러하였다. 이 여자의 처사는 한나에게 거의 참을 수 없는 시련으로 생각되었다. 사단은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을 화나게 하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의 대리자를 이용하여 그들를 괴롭힌다(사인즈 1881. 10. 27).”(화잇주석, 삼상 1:8)

◯ <비난(非難) 대신 기도(祈禱)함>
“한나는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다. 한나는 이 세상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였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치욕을 거두시고 당신을 위하여 양육하고 교육시킬 한 아들을 귀중한 선물로 주시기를 열렬히 탄원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70)

◯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 담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받으신다.

수요일(10월 13일)
<주님을 찬양(讚揚)함>

▣ <찬양(讚揚)의 능력>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00편 4절)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심장의 맥은 리듬이요, 말은 선율이요, 억양은 음정, 이미 음악의 기본적인 요소를 갖춘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은 곧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음악에서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기뻐하며 즐거워 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하찮은 그런 것에도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두가 축하하며 즐거워해야 할 때 기꺼이 노래하며 춤을 출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얻게 되는 자그마한 기쁨에도 우리는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의 삶 자체가 찬양이었고, 마리아도(눅1:46-56), 사가랴도(눅1:67-79), 시므온도(눅2:29-32),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까지도 찬양으로 마침을 볼 수 있습니다.(마26:17-29,30)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함께 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은혜를 더욱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찬송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입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146:1,2)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찬양과 기도와 말씀 그리고 봉사라는 4가지 요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 <찬양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께 무조건 울부짖고 고함치고 간청하고 요구한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바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양하므로 그의 궁정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굉장히 평범하고도 간단한 길이 우리 앞에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감사와 찬양을 등한히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의 성소에도 정면에 향단이 있고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매일 향을 피웠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향을 피워서 향이 성전에 가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향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보면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찬양 드리는 것이 향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쁘게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사와 향은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앞에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향을 피워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과 그 보혈을 의지하고 향은 우리 감사와 찬양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향을 피우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 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찬송을 보좌삼고 와서 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려면 하나님 보좌를 예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찬송이 하나님의 보좌요, 보좌가 예비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와서 좌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96편 8절에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예물은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찬양하므로 하나님의 보좌에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95편 2절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채찍을 받고 벌을 받은 것은 원망과 불평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니 하나님은 떠나가고 불 뱀이 와서 그들을 물고 찢었던 것입니다.

◎ <찬양(讚揚)은 고난 중에 역사하시는 통로이다>
감사와 찬양은 또한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에 들어 왔을 때 여리고를 하루에 한 바퀴씩 7일 동안 돌고 7일 째는 일곱 바퀴를 돌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고함을 질렀습니다. 전부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크시 도다”라고 크게 고함을 치자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원수의 진이 찬양을 통해서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이 엿새 동안 여섯 바퀴를 돌고 일곱째날 일곱 바퀴를 돈 것은 비유컨대 기도와 같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베옷을 입고 성전에 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 전쟁은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이 한 것은 거룩한 성가대를 조직해서 그들이 적군이 쳐들어오는 골짜기 언덕위에 올라가서 일제히 찬송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찬송을 부르자 하나님께서 복병을 주셔서 복병을 일으켜 세워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을 치게 만들고 또 저들끼리 싸우게 만들어서 전쟁하지 않고 멸망하고 큰 승리를 얻게 만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 스스로 물러가고 스스로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가져오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 <찬양은 해방(解放)과 자유(自由)의 능력이다>
감사와 찬송은 해방과 자유의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의 근심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염려가 우리 마음을 묶고 좌절과 절망이 우리를 짓누를 때, 아무리 기도하고 가슴을 쳐도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감사와 찬양을 부르면 쇠사슬이 끊어지고 해방과 자유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흑암은 광명으로 변하는 기적이 찬양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은 찬양의 위대한 능력이 가져오는 역사인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서 많이 얻어맞고 굶주리고 깊은 감옥에 들어가서 쇠고랑을 찼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그들 두 명은 일어나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 찬송을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처지가 못 됩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이 얻어맞고 굶고, 쓰라리고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쇠사슬에 매여서 드러눕지도 못하고 감옥 깊은 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 빌립보 옥사에 일어나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사가 뒤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들의 차고가 사람 손에 의하지 않고 다 풀려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다 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서 해방과 자유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로 26절에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찬양과 감사는 지진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진이 일어나서 모든 묶인 줄이 끌러지고 묶인 밧줄이 풀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와 찬양은 마음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사와 찬양을 할 때 위로가 오지 않습니까? 그 위로가 우리의 심령에 굉장한 치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을 통해서 주님 앞에 나가면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서 우리 영도, 마음도, 몸도 치료를 받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2절에 “내 영혼아 하나님을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기도할 때 송축부터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우리의 삶속에 강함과 치유약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찬양과 감사의 종교인 것입니다.
◎ 1970년에 덴버 포스트 지에서는 음악과 식물의 성장속도를 실험해 발표했는데, 그 결과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란스러운 음악이 나오는 방과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과 조용하고 경건한 음악이 나오는 방에 각각 식물을 넣었습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식물의 성장 속도를 비교해 보니 요란한 음악이 나오는 방에서 자란 식물은 약 36센티미터 자랐고 그 뿌리는 약했으며 줄기는 스피커와 반대편으로 스피커의 소리를 안 들으려고 굽어져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에서 자란 식물은 46센티미터가 자라고 뿌리가 길고 털이 많으며 줄기는 곧게 자랐습니다. 조용하고 경건한 음악이 흐르는 방에서 자란 식물은 51센티미터로 가장 길게 자랐습니다. 경건한 음악을 들려준 식물은 뿌리와 줄기가 매우 튼튼하게 잘 자랐으며 식물은 스피커를 향해서 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습니다.

◎ “어머니의 마음에는 기쁨과 찬양이 넘쳐흘러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싶었다.
영감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한나는 이렇게 기도했다.”(부조, 571)

◎ “ (삼상 1장)에 한나가 부른 찬가(讚歌)는 신약시대의 마리아의 찬가(讚歌)와 함께 유명하다(삼상 2:1~10).”

◯ <찬양의 힘>
“하늘의 정사와 권세를 잡은 이들은 외관적으로는 불리한 처지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들이 수행하고 있는 싸움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속주의 깃발 주위에 집결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려고 나아가면 새로운 정복 사업은 성취되고, 새로운 명예를 얻게 된다. 모든 하늘 천사들은 겸손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므로, 이 지상에 있는 주의 일꾼들의 군대가 찬양의 노래를 부를 때에, 하늘 찬양대는 그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찬양을 돌린다.”(사도행적, 154)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목요일(10월 14일)
<하나님의 투자계획(投資計劃)>

▣ <어떤 산(山)을 오르게 할 것인가?>
인생에는 똑 같은 높이의 산(山)들이 있고, 그 산을 가장 먼저 정복(征服)하면 성공한 삶을 산다고 가정(假定)하자.
그렇다면 산을 가장 먼저 정복하기 위해 남들이 잘 도전(挑戰)하지 않는 산에 올라야 할 것을 가르치는 부모가 있고.
또한 편의 부모는 모험(冒險)을 하지 않고 완전하고 완벽한 성공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며 가르치는 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부모가 실패(失敗)할 산을 오르기를 원할까마는, 그러나
현실은 모두가 높은 산이나 남들이 오르지 않는 산을 정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들은 단지 더 보기에 좋은 산(山)만 정복하라고 강요할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투자(投資)는 영원히 실패하지 않는 투자(投資)인데,
이론(理論)이 아닌 실제는 인간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현실들이다.
그 투자는 인간으로써는 모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경쟁의식속의 인간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名譽), 재물(財物), 직업(職業), 건강(健康), 등등은 움직이는 목표물(目標物)들로서 확실하게 실패하는 투자물들이다.
성경속의 대표적인 인물들로서 아합왕, 이세벨, 하만, 빌라도, 헤롯왕, 롯의 처(妻), 바벨론의 왕들, 등등이다.
오를 때가 있으면 반듯이 바닥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 인간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온 우주만물(宇宙萬物)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은
절대로 손해(損害)보는 투자가 아니요 후회가 없는 확실한 투자인 것이다.
그 실제의 사실이 성경에서 입증해주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다니엘과 3친구들, 요셉,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엘리사, 등을 비롯해서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이며,
특히 오늘의 “한나”의 경우 한 가지만 보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재물은 덧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치 있게 활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나, 그것을 모으기만 하는 자는 갑작스럽게 어떤 손실을 입을지 모르며, 삶의 목적이 지상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 재물과 함께 덧없이 멸망하고 만다.
우리가 무엇을 드리든지 하나님은 받으시고, 배가시켜서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되돌려 주신다. 진정으로 소중한 보배는 하나님께 드려야 가장 안전하다. 우리를 위해 잠시 이곳에서 쌓아두는 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시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자존감의 회복은 그녀로 하여금 기꺼이 드리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 <본성적인 애정을 이긴 믿음의 승리>
“그 아이가 자라서 어머니를 떠날 수 있을만한 나이가 되자 그 어머니는 곧 하나님께 드린 엄숙한 서약을 이행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과 사랑으로 한나는 아이를 사랑하였다. 그의 힘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그리고 그의 아이다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그녀의 애정은 아들을 더욱 자신에게 가까이 휘감아 들였다. 그는 그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요, 하늘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하나님께 드릴 보화로서 받은 것이다. 그녀는 크신 시여자이신 그분의 아들을 자기의 것으로 붙들어 놓지 않을 것이었다. 믿음은 어머니의 마음을 강하게 해 주었고 그녀는 본성적인 애정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사인즈 1881. 10. 27).”(화잇주석, 삼상 2:11)

◎ “한나의 기도는 응답되어 그는 그처럼 열렬히 간청하던 선물을 받았다. 그는 그 아이를 바라보고 그를 “사무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 … 구하였다”는 뜻이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서 떨어질 수 있을 만큼 자라자 곧 한나는 그의 서원을 이행하였다. 그는 어머니로서의 온 정성을 다하여 그의 아이를 사랑하였다. 사무엘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바라보고 그의 재잘거리는 귀여운 소리를 들을 때에 한나의 애정은 날마다 사무엘과 더욱더 밀착되었다. 사무엘은 그의 외아들인 동시에 하늘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성별된 보물로 받았으므로 그를 소유주이신 주신 분께 돌려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부조, 570)

◎ “한나는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할 수 있는 교육을 받도록 그를 대제사장의 지도에 맡기고 조용히 실로에서 라마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지력이 싹트기 시작하는 매우 초기부터 한나는 자기 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자신을 여호와의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쳤다. 한나는 아들 주위에 있는 모든 익숙한 사물을 통해 그의 생각을 창조주께 향하도록 노력하였다. 아이와 헤어진 후에도 이 충실한 어머니의 염려는 그치지 않았다. 매일 그는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매년 그는 손수 아들의 예복을 만들어 남편과 함께 예배하러 실로에 갈 때에 가지고 가서 그 아이에게 자기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그 예복을 주었다. 그 작은 예복은 올마다 그가 순결하고 고상하고 진실 되기를 기원하는 그의 기도로 짜여져 있었다. 한나는 자기의 아들이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가 하늘이 귀중히 여기는 위대함,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웃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열렬히 탄원하였다.”(부조, 572)

◎ “한나가 받은 보상은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가! 그의 모본은 충실함에 대한 얼마나 큰 격려인가! 모든 어머니들에게 말할 수 없이 값있는 기회와 무한히 귀중한 사업이 위임되어 있다. 여인들이 싫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주위에 있는 대수롭지 않은 매일의 의무는 중대하고 고상한 사업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감화를 통하여 세상을 복되게 하는 일이 어머니들의 특권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마음에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머니들은 기쁜 일과 궂은일을 통하여 저희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하늘로 가도록 길을 곧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에만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품성을 거룩한 모본을 따라 형성시킬 수 있다. 세상은 부패한 감화로 가득 차 있다. 유행과 습관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한다. 만일 어머니들이 교훈하고 지도하고 제어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자녀들은 자연히 악을 용납하고 선에서 돌아설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주 구주 앞에 나아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가르쳐 주소서”라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모든 어머니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 주신 교훈에 유의하라. 그러면 필요할 때에 그대들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부조, 572)

◎ <한나의 보상(報償)>
“평가하기 어려울 만큼 가치 있는 기회들과 무한히 귀중한 사업이 모든 어머니들께 맡겨졌다. 선지자 사무엘의 처음 3년의 생애 동안에 그의 어머니는 선악을 식별하도록 그를 가르쳤다.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눈에 익은 것들을 통하여 어머니는 그의 생각을 창조주에게로 향하게 하도록 힘썼다. 주님께 자기 아들을 바치기로 한 서원(誓願)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는 큰 극기심을 가지고 대제사장 엘리의 보호에 아들을 맡기어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훈련을 받게 하였다. … 그의 초기의 훈련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다운 성실성을 지속하기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였다. 한나는 얼마나 큰 보상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의 모본은 충성에 대한 얼마나 훌륭한 격려가 되는가. ― RH, 1904. 9. 8.”(자녀, 196)

◯ <어머니의 감화(感化)>
“한나는 아들 주위에 있는 모든 익숙한 사물을 통해 그의 생각을 창조주께 향하도록 노력하였다. 아이와 헤어진 후에도 이 충실한 어머니의 염려는 그치지 않았다. 매일 그는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 한나는 자기의 아들이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가 하늘이 귀중히 여기는 위대함,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이웃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열렬히 탄원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72)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깨닫고 가장 소중한 아들을 기꺼이 드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와 자녀에게 복을 주셨다.

◯ “부모들이여, 주님께 그대들의 자녀들을 바치고 그들이 주님께 속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양떼에 속한 어린 양이며 참된 목자의 보호를 받는 자들임을 항상 명심하게 하라. 한나가 주님께 사무엘을 바쳤으며 그에 대하여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라고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이며 사사인 사무엘의 생애에서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저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할 때에 자녀들에게 모든 가능성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143)

◯ <한나가 받은 보상은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가!>
“그의 모본은 충실함에 대한 얼마나 큰 격려인가! 모든 어머니들에게 말할 수 없이 값있는 기회와 무한히 귀중한 사업이 위임되어 있다. 여인들이 싫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주위에 있는 대수롭지 않은 매일의 의무는 중대하고 고상한 사업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감화를 통하여 세상을 복되게 하는 일이 어머니들의 특권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마음에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머니들은 기쁜 일과 궂은일을 통하여 저희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하늘에 가도록 길을 곧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에만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품성을 거룩한 모본을 따라 형성시킬 수 있다. 세상은 부패한 감화로 가득 차 있다. 유행과 습관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한다. 만일 어머니들이 교훈하고 지도하고 제어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자녀들은 자연히 악을 용납하고 선에서 돌아설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주 구주 앞에 나아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가르쳐 주소서.’라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모든 어머니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 주신 교훈에 유의하라. 그러면 필요할 때에 그대들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72)


<초점(焦點)>

한나의 삶을 통하여 작은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여 신실한 믿음의 삶의 증거는
기도(祈禱)와 찬양(讚揚)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생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이 됨을 배우게 됨을 감사드리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