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미혹하는 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와 예배(질문, 대답, 부가설명)08/27/11 > 교과토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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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미혹하는 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와 예배(질문, 대답, 부가설명)08/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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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8-19 09:19 조회9,098회 댓글2건

본문

8월 27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0분

기억절 :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사 44:7).

연구 범위: 사 1:11~15, 6:1~8, 44장, 58:1~10, 렘 7:1~10, 미 6:1~8.

러시아 작가 이반 뚜르게녜프(Ivan Turgenev)는 그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 한 등장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모두 실오라기에 매달려 있어. 바닥없는 심연이 언제 발밑에서 입을 벌릴지 알 수 없지. 그런데도 우리는 굳이 온갖 불쾌한 것들을 생각해 내서는 삶을 망쳐 버리는 거야.” -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이상원 역, 아버지와 아들, (파주: 열린책들, 2010), 168.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의 길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 사랑하며 경배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을 면하게 해 주신다.
단순히 주를 따르기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는 아니다. 주중에 어떻게 살아가든 안식일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번 주 우리는 그런 신자들을 향하여 선지자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런 신앙은 기만이며 스스로 “삶을 망쳐 버리는” 좋은 방법임을 보여 주고 있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전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핵심적인 사항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➋느끼기 : 하나님의 앞에 섰을 때에 이사야가 느꼈던 무가치함, 정결에 대한 갈망, 섬기려는 소망의 마음을 나눈다.
➌행하기 :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

결론: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면, 이사야처럼 영혼이 깨끗해지기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자들을 공의와 자비의 정신으로 섬기며, 겸손히 자신과 함께 거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날(일) 8월 21일

천천의 숫양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미 6:6).

질문: 미 6:1~8을 읽어 보라. 구원의 계획을 상징했던 이스라엘의 희생제사에 관하여 선지가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신 10:12~13 참고).
[미6:1~8]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
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답: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도를 가르쳐주는 보이는 설명이었다. 그 제도를 통하여 구원의 실상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어린양의 대속을 믿음으로 사망의 죄를 처리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후에 그 새 생명의 생활을 영위하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구원한 역사적 사실을 간과(看過)하고 제사 제도를 실행하는 행사에 매어달렸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으로 생각하고 일상생활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다. 우리도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면서 예배행사만 열심히 수행하면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부가설명> 이미 어느 날인가 부가설명에서 말했듯이 예배는 예식예배와 생활예배가 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예식예배에 능숙했다. 그러나 생활예배는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았다. 생활예배가 올바르게 수행되지 않는 예식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짐으로 여기시며 예배당 마당을 밟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신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하실 때 그 “모든 일”은 세상에 살아가기 위하여 행하는 생활상의 일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일”은 십계명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일상생활에서 실처는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말하든지 친교하든지 직업에 종사하든지 모든 것이 바로 생활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 포함된 말이다. 일상생활로 시행되는 모든 것이 십계명의 정신 곧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수행되는 것을 뜻한다. 안식일은 일주일에 제칠일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행하는 것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바로 생활예배이다. 예식예배는 생활예배의 결산이다. 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하자.

교훈: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예배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원칙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자들의 예배이다.

둘째 날(월) 8월 22일

이사야를 부르심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질문: 사 6:1~8을 읽어 보라. 주어진 이상에 대하여 이사야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중대한 신학적 진리는 무엇인가?
[사6:1~8]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답: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함을 깨달아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심을 따라 정결하게 함을 받았을 때에 그는 소명에 기쁘게 응하였다.

<부가설명> 우리의 예식예배에는 천사들이 임석하여 함께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께 거룩한 숭경 심으로 예배한다. 우리 논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존재의 임석을 이사야의 계시를 통하여 밝히 보여주셨다. 그들은 얼굴과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창화한다. 우리는 예식예배를 너무 거룩함이 없이 고식적(姑息的)으로 순서만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회개와 거룩함에 참여하는 엄숙함이 있어야 한다. 악기 소리를 요란하게 하는 것과 춤추듯이 몸짓하는 것이 축제에는 어울릴 것이지만 예식예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사야에 계시된 예배의 모습에서 그렇게 깨들을 수 있다. 이사야 6장은 이 세상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형식상으로도 어떠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개혁되어야 한다. 세 천사의 기별은 바로 이렇게 경배를 회복하라는 기별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깨닫는다면 분명히 이렇게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 예배가 오히려 죄가 될까 심히 두렵다.

교훈: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이사야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구원의 은혜를 구하였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셋째 날(화) 8월23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사 1:11).

질문1: 사 1:11~15을 읽어 보라. 이런 예배를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뜻은 무엇이겠는가?
[사1: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답: 성전에 행해지는 공식적인 예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잘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이지만 사람이 손에 피를 가득히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

<부가설명> 교과에 있는 대로 이에 대한 대답이 다음 구절들이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공식예배는 하는데 일상생활은 악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엿새 동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정신으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식일에 예배당에 모여서 예식예배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께 짐이 된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바르게 못하니까 안식일 예배에 참석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은 또한 금물이다. 이사야처럼 우리는 안식일에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먼저 진정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예식예배에 참여하여 사유하시는 은총을 받고 이사야의 고백으로 허락된 한 주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사43:7)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멋진 작품이 바로 작가의 영광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참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주님 용납하여 주님의 영광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질문2: 사 58:1~10을 읽어 보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금식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나님은 백성들이 어떻게 금식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금식을 실천하든지 실천하지 않든지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사58:1~10]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답: 참된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구제와 동정과 봉사의 생활이라고 가르친다.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생활이다. 존재와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로 이하여 세상이 여호와라 이름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 잘 하고 찬양 잘하고 기도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앙생활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성경이 가르친 대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런 모습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은 두려움이 아니다. 기쁨과 즐거움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다시 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모두에게 기쁨이다. 그래서 그 생명,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 그 부활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선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의 생활이다. 이 생활이 안식일 함께 예배당에 모여 예식예배를 드리는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예배와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며 사는 삶이다.

넷째 날(수) 8월 24일

다 허망하도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사 44:9).

질문: 이 점을 생각하면서 이사야 44장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핵심을 요약해 보라. 특히 그들이 예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말해보라.
[사44:1~23]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 8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0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11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2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13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 14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15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16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 그 나머지도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19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고 그 숯불 위에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 그는 재를 먹고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스스로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3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삼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답: 태어났으니 그냥 한 세상 지나가며 호흡하고 먹고 마시다가 그냥 후흡이 멎으면 세상에 사라지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참 허망한 것이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인생 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런 허망한데서 구원하여 창조주와 구속주를 찬양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창조와 구속으로 우리의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는 것은 다 허망한 일이다. 그것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것과 같다. 예배에는 속죄의 기쁨이 있고 생명을 얻은 즐거움이 있다. 그러므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창조했다고 말씀하신다.(사43:21) 예배에는 찬양이 빠질 수 없고 회개와 속죄가 반드시 함께 있다. 진정한 회개는 속죄를 경험하게 하고 참된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우리의 예배에는 이런 경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만물이 창조주께 경배하며 찬양한다. 산들도 나무들도 구원받은 사람들도 찬양하고 노래한다. 그리스도인은 찬양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이미 말한 대로 존재가 예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예배이다.

교훈: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에 우리가 힘과 시간을 바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다섯째 날(목) 8월 25일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질문: 렘 7:1~10을 읽어 보라. 어떤 주제가 이곳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배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렘7:1~10]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답: 이스라엘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의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성전에 드나들었다. 그러나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았다. 도덕 불감증이 되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시니까 괜찮다는 생각으로 산 것 같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는 것은 가증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처럼 생각했다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

<부가설명> 오늘날 기독교는 복음과 도덕성을 다 상실하였다. 특히 개신교가 더욱 그렇다. 여간 도덕적인 죄를 범해도 교회 가서 하나님께 회개하면 예수의 보혈로 다 씻어주시니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죄를 짓기에 담대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용서가 보증되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특허를 얻은 셈이 된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가? 결코 아니다. 바울을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하게 말한다.(롬6:1) 결코 그럴 수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구원 받은 것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으로든지 성경적으로든지 죄를 짓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이 말씀을 그냥 하는 소리로 들으면 안 된다. 이것은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요1:12,13), 곧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못하는 사람을 난 사람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주장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죄를 짓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는 그런 생명으로 났는지,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사야처럼 굴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결하게 하시고 항상 정결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예배를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교훈: 성전에서 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예비일(금) 8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303~310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음”, 331~339 “히스기야”, 349~366 “앗수르에게서 구원받음”, 381~391 “므낫세와 요시아”, 407~421 “예레미야.”

“이사야의 시대에 인류의 영적 지각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로 인하여 어두웠다.… 이스라엘 사람은 여호와의 참품성을 그들의 시야에서 놓친 데 대하여 핑계의 여지가 없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시 86:15) 분으로서 그들에게 나타내셨다”(선지자와 왕, 311~312).

“성전 마당에 있을 때에 본 계시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품성을 밝히 보았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크신 위엄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으나 선지자는 주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선지자와 왕, 31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까? 심지어 신앙적인 요소라 할지라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우상이 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신앙적인 요소가 사람의 사상과 사람의 칭찬과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가도록 진행되면 우상이 될 수 있다. 예배가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의 감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면 그 예배는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요즘 특히 주의해야할 사항이 아닐까 두렵다.

➋사람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게 행하는 일들을 살펴보십시오. 우리도 그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떻게 그와 같은 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말씀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듣고 거듭난 생명으로 그 말씀대로 생활하면 된다. 사람은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듣지 않고 자기의 입장과 저치에 비추어서 해석하며 듣는다. 그래서 자기에게 알맞으면 삼키고 알맞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뱉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에(벧전1:23) 말씀이 바로 그의 생활이 된다. 이런 경험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상냥녀님의 댓글

상냥녀 작성일

항상 은혜의 말씀 감사 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늘 강건 하시며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김한수님의 댓글

김한수 작성일

목사님 늘 깊이 있는 말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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