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예배와 노래와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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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7-28 09:20 조회4,368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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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예배와 노래와 찬양
8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6분
도입)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인 시편 150편 7절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명령하셨다. 호흡이 있는 자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건, 알지 못하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또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호흡이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찬양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 한 분에게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며, 외적이며, 선포적인 것이다. 그러나 찬양은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지만 예배는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 하나님의 찾으심에 “예”라고 반응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예배는 선택이며 내부적인 마음의 문제이다. 예배는 또한 특권이다. 찬양은 모든 사람과 만물이 해야 한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인간 최고의 특권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찬양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복된 특권 중 하나가 예배인 것이다.
기억절 :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 96:1).
결론: 노래는 우리의 뉘우침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며, 그분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달 방법입니다.
첫째 날(일) 7월 31일
사울과 다윗의 차이
도입)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국가로서의 토대를 마련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출발은 참으로 겸손하였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그는 사양하는 겸손함을 보였다. 자신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서 왕이 되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이후에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마음을 잃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다윗은 더욱더 강력한 국가체계를 이루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사울과 다윗의 큰 차이는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 때 보이는 자세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더 이상 사용하시지 않을 것임을 듣게 되었다. 이때 사울은 다른 사람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선지자 사무엘을 협박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의 사지로 내몰아 죽게 하였다. 그 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왕이 얼마나 잘못된 일을 했는가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의 회개를 하였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의하여 실수를 하고, 실패를 했을 때 자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까?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때 결국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2:5).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았기 때문에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다윗을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선택하셨을 때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다(삼상 16:7).
다윗은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다윗의 도덕적 과오가 사울의 죄악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더 심한 죄악을 용서하시고 계속 왕위에 있도록 허락하셨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교훈: 사울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채 계속 자신의 뜻대로 행했지만, 다윗은 진실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굴복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빌었다.
부가적용)
사울과 다윗은 똑같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고,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사울은 초반부터 승승장구하였으나 나중에 독재자로 변모하여 결국 자신과 가문이 멸망하는 불행과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다. 다윗은 초반에 사울 왕으로부터 시기질투를 받아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나중에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대대로 왕이 나오는 가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마음에 맞는 자”라고 했고, 다윗은 聖君(성군)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모든 지도자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세주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이다. 또한 사울은 회개에 더디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다. 하나님은 회개에 빠른 사람을 축복하신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짓게 된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울도 다윗도 죄를 지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후의 자세는 전혀 달랐다. 사울은 회개에 늦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다.
•영감의 교훈 •
▶ 회개를 미루지 말라
“그대는 죄 가운데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지체하지 말고 자비와 용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라. 다윗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자, 회개와 겸손으로 그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토로했다. 그는 그의 면류관은 잃어버려도 견딜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자비는 지금도 여전히 죄인에게 뻗혀 있다”(교회증언 5권, 177).
둘째 날(월) 8월 1일
상한 마음과 상한 영
도입)
시편 34편 18절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했다. 돈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상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하시는 기준에 못 미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연약과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상한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떳떳한 자가 아니라 송구하고 부끄러워서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고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부패한 본성과 타락한 본능 등이 불완전한 요소들이다. 이것은 울어도 안되고 힘써도 안되며 인간의 노력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죄성들이다. 꼭 무슨 일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성과 욕망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죄송해하는 마음이 상한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긍정적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 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상태를 긍휼히 여기시고 품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는 상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의식하고 임재 가까이 있는 것이다. 상한 심령의 반대는 교만한 마음이나 죄의 유혹에 둔감한 마음이다. 그래서 아무런 가책이나 죄의식 없이 육신이 원하는 대로 범죄하고 세상의 유혹에 쉽게 타협하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물결에 빠져드는 것이다. 상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겸손해지고, 통회하며, 회개하며, 온유해지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교훈: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가 예배의 중심에 계신 구세주와 십자가를 주목하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제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제사는 죄를 용서 받는 것과 하나님 은혜를 힘입는 것, 또한 감사를 표현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제사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은 아니다. 구약의 제사 역시 본질적으로 영적인 예배였기 때문에 영적 예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모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말하는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헌제자와 제물의 정신의 일치였다. 그런 제사만이 하나님께서 영적인 예배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물을 떠올려 보라. 그 때 짐승들은 완전히 죽임을 당한 후에 헌제자의 손에 의해 바쳐졌고 단지 제사장에 의해 드러내어 맡겨졌을 뿐이었다. 그 전에 이 짐승은 어디로나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였지만 피를 흘리고 난 후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헌시되어 바쳐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헌제자 역시 그런 정신으로 온전히 자기가 죽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예배를 드릴 때 열납 되는 것이다. 비록 그가 삶에서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과 깨뜨려진 심령이 있다면 헌제자와 제물의 정신이 일치되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진정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 마음으로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그쳐서 참된 예배자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너진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썩어버리게 된다. 말씀을 사랑하고, 무릎을 꿇고서 간절히 기도하며, 지가가 아무것도 아닌 벌레보다 못한 자가 구원받게 하신 십자가의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 그것들이 우리의 예배의 뿌리이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그대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그대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라.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하라”(정로의 계단, 28).
•기도 •
하나님, 저를 외면치 않으시고 가까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전치 못한 제 마음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은혜로 덮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쁨의 눈물로 드리는 저의 제사를 받아 주옵소서.
셋째 날(화) 8월 2일
찬양의 노래와 예배
도입)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인생의 주인이시다. 성도의 본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은 인간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고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찬양을 기뻐하시며, 찬양 중에 거하신다. 찬양 중에 임재하시고 찬양 중에 놀라운 능력을 주신다. 찬양은 상한 감정을 치유하고 영성을 일으켜 말씀을 잘 받을 수 있게 한다. 마음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에 동참하게 한다. 찬양은 예배를 아름답게 하며, 영적으로 성도들을 충만하게 한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대상 16:8).
교훈: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과 언약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며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부가적용)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찬양은 경건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중략)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여기서 사용된 동사 '아이네오'는 반드시 곡조 있는 음악 행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이나 인간에게 좋은 언급을 하여 칭찬하는 행위를 지칭하는바 일반적으로 '찬양'이라는 협의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정황을 보건대 이것은 곡조 있는 찬송이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유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이들이 한 찬양은 전통적 유대 관행의 연장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죄수들의 귀에 들리게끔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다(행 16: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켜 그 권능을 행사하시게끔 하는 믿음의 행위가 되었다(행 16:26). 그들이 부른 찬송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적시되어있지는 않으나 사용된 동사 '휨네오'를 염두에 둘 때 유대 전통을 따른 시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방패와 산성, 피난처 되신 주님의 대한 여러 시편들이 불려 졌을 것이다. 야고보는 환경의 희노애락에 반응하는 신앙의 정서적 대응으로 찬송을 권면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희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여기서 사용된 동사 '프살로'는 어원(語原)으로 볼 때 '현을 뜯는다'는 의미를 가진 현악기 연주의 행위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 명사형 '프살모스'(psalm)가 구약의 시편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행 13:33), 이것은 악기 반주의 여부와 상관없이 '휨네오'처럼 시편을 노래하는 행위로 보아 무방하다. '찬양'의 이슈는 종종 우리말의 한자어가 갖는 문자적 의미 때문이기도 한다. 기릴 讚(찬) 오를 揚(양)으로 구성된 '찬양'이란 단어는 어의(語義)상 그것이 가리키는 말이나 노래의 가사가 하나님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그 문자적 의미와 실제적 사용 사이에 어색함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좁은 의미에서 찬양의 진정한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찬양'이란 용어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집회에서 경건 생활 및 신앙 행위와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음악 행위 일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어 왔다. 즉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사실상 '기독교 음악' 전체를 대신하는 용어가 되어 있다.
•영감의 교훈 •
▶ 찬양의 동기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자비하심과 다함없는 사랑의 나타남을 돌이켜 볼 때에 우리는 불평 대신에 찬양할 것이다. 우리는 참되고 부드러우며 동정 많은 양 무리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양 무리에 관하여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신 그 신실하신 사랑에 대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6권, 367).
•기도 •
하나님은 내 노래와 내 자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저도 제 마음을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나님께 바치려 합니다. 제가 드리는 찬양의 제사를 받아 주옵소서.
넷째 날(수) 8월 3일
다윗의 노래
도입)
역대상25장 7절에 보면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가 이백팔십팔인이라]라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된다. 구약의 다윗왕조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은 배우고 익숙하기 위해서 얼마나 연습했겠는가? 아삽과 여두둔 헤만이라는 성가대장이 있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찬양은 곧 다윗의 왕조를 지키는 군대와도 같았다. 그래서 군대장관과 더불어 성가대장의 위치는 얼마나 중요한 직분인지 모른다.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성가대의 찬양은 그냥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를 부르는 찬양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이기느냐 죽는냐의 갈림길에서 군사들에게 영적인 무장을 하는 영적 갑옷과도 같다. 역대상 25장 1절은 군대장관과 더불어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왕의명령을 쫓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신령한 노래의 의미의 히브리어는 "나바"라는 동사인데 즉 예언하다 영감으로 노래하다 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찬양은 영감이 있어야하며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새벽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7).
교훈: 음악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삶과 예배에 있어서 뗄 수 없는 요소이다.
부가적용)
찬양이 의미 있는 것은 형식보다도 내용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음악도 그 기원을 따져보면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역사를 거치면서 각종 순결치 못한 관행이나 사고와 결탁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음악은 질그릇이다. 그러나 그 질그릇이 안에 보배를 담기 때문에 귀해진다(고후 4:7). 특정 형식의 음악이 가치를 지닌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음을 독려하며 순결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음악'의 구속(救贖)이라 명하고 싶다. 신약성서는 많은 세속적 언어와 개념들을 원용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죄악과 우상숭배에 갇혀있던 그 언어들을 구속(救贖)해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세계에서 죄악의 영향을 벗어나 있는 백퍼센트 순도의 문화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그것을 원용(援用)할 때 그 문화는 구속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고 볼 수 있다. 음악도 그렇게 구속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병과 더러움은 전염이 된다. 그러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중증의 여인이 예수를 만졌을 때는 역의 전염이 발생했다(막 5:25-34). 예수의 거룩함과 깨끗함이 병과 불결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전염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음악도 구속을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새 노래에 우리의 마음에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음악의 힘
“노래는 일반적으로 충동적으로, 혹은 특별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불려진다. 어떤 때에는 노래하는 자들이 실수하게 되므로, 음악은 참석한 자들의 마음에서 적절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음악은 아름다움, 정념(情念), 힘을 가져야 한다. 찬양과 헌신의 노래로 목소리를 높이라. 할 수 있으면 기악을 함께 사용하여, 영광스런 조화가 받으실 만한 제물로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라”(증언보감 1권, 457).
다섯째 날(목) 8월 4일
8월 4일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양하라!
도입)
신약성서가 찬양의 음악적 요소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상당한 정도 우리 그리스도인 쪽의 자유재량을 뜻한다. 창조성이 중요시되는 예술적 성격을 지닌 찬양의 영역을 지나치게 전통적 인위의 규격 안에 짜 맞추려하는 것은 신앙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다. 역동적 창의성이 질식되지 않도록 표현과 감성의 심화를 위해 충분한 자유를 허락해야 할 것이다. 특정 문화, 특정 스타일의 음악을 우상화하지 말고 창조적 새 음악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대해 자유와 창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 특정 음악에 결합되어 있는 죄악된 문화를 그대로 들여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된다(롬 12:2). 현재 상태에서 도저히 죄악적 요소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음악을 고의적으로 찬양에 도입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죄악이 된다. 아무리 음악이 중립적이라고 해도 뚜렷하게 무당춤을 동반하는 굿거리장단을 굳이 교회의 찬양으로 도입할 경우 현재로서는 많은 사람을 시험 들게 할 것이다. 이것은, 고기를 먹는 것이 죄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연상하여 스스로 시험에 들게 만들 때는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권했던 바울의 가르침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고전 8:1-13). 무당굿의 리듬이 들리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손상당한다. 이것은 현재의 평균적 정서와 관련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정서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리듬 또한 하나님을 찬미하는 통로가 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닌 것이 현실이며 진실이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빌 4:8).
하늘의 영감을 받은 찬양의 주제와 가사가 성경에 수록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음악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새로운 찬양을 작곡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문화와 연관성이 없는 음악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서 예배한다. 그래서 문화는 어느 정도 우리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데 그 차이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고전 10:31, 빌 4:8, 골 1: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 시 사용하는 음악의 종류에 관하여 어떤 지침과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가? 오랫동안 예배 음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찬미가는 대개 성곡으로 여겨지지만,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세상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배 음악은 가장 고귀하고 선하신 주님을 가리켜야 한다. 예배 음악은 인간의 저속한 요소가 아닌 더 높으신 분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 음악은 도덕적으로 중성이 아니다. 음악은 우리를 최고의 높은 영적 경험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우리를 욕망과 고난과 좌절과 분노로 이끌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음악 산업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사탄이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알 수 있다.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영적, 지적, 정서적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가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생각을 고양시키며,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야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음악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깨닫게 만드는 종류이어야 한다. 인류는 다양한 악기와 음악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 용기를 주는 음악이 다른 쪽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적합한 예배 음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훈: 교회 음악도 문화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고귀함을 나타내고, 생각을 고양시키며, 주님에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의 젊은이들이 고전적인 찬송으로 도무지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데 CCM을 통해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삶이 바뀌며 사명자로 빚어져 가는데 굳이 나서서 찬물을 끼얹으며 그것이 성령충만도 아니고 마귀적이며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일은 성서적이지 않고 신앙적이지도 못하다. 뒤집어놓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고전음악 스타일의 찬양이 기성세대에 진정 기독교적인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우리 십대들의 성령의 충만을 질식시킨다면 오히려 세속적이며 마귀적이며 영혼을 죽이는 살인적 도구가 될 수 있다. 노래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포용과 이해의 자세를 체득해야 한다. 찬양 스타일의 용납과 새 노래에의 동참은 이론과 원리의 문제이기보다는 신앙 인격의 성숙과 도량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기되는 찬양의 이슈는 신학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랑의 능력과 그 깊이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주 자주 우리의 불쾌감이나 증오를 신학적 정통성의 용어로 포장하는 위선을 저질러왔다. 찬양에 있어서도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롬 15:1).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갈 5:13).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권면을 주었다. 나의 것과 스타일이 다른 음악의 찬양으로 은혜 받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으로 용납하여 받아 주라. 아마 이것이 성서적인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감의 교훈 •
▶ 조화로운 찬양
“모든 사람이 영으로, 또한 깨달은 마음으로 찬미해야 함을 나는 보았다. 하나님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나 불협화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올바른 것이 언제나 그릇된 것보다는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바르고 조화로운 찬양에 더 가까이 이를수록 그분은 더욱 영광을 받으시며, 교회는 유익을 얻고 불신자들의 호감을 산다”(증언보감 1권, 45).
예비일(금) 8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노래는 영적 진리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무겁게 짓눌리어 절망에 빠질 것 같은 심령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에 부른 노래의 가사에서 하나님의 몇 말씀을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유혹이 힘을 잃고 삶은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갖고, 용서와 즐거움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누어지는 실례가 얼마나 많은가!…
예배의 일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행위이다. 사실, 많은 노래는 기도이다.…
구속주께서 우리를 영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문어귀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보좌를 두른 하늘 합창대의 찬미와 감사의 주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의 노래의 메아리가 지상의 가정에서 반향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가수(歌手)들에게 더 가까이 이끌릴 것이다. 하늘의 교제는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 찬미의 기조(基調)를 배운다”(교육, 1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가 속한 사회나 문화는 교회 음악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대는 그런 영향은 없다고 부인하겠습니까?
➋음악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인용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대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통해 그대는 얼마나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음악이 희망과 용기를 주고 교회에서 마땅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대의 교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8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6분
도입)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말씀인 시편 150편 7절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명령하셨다. 호흡이 있는 자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건, 알지 못하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또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호흡이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찬양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 한 분에게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며, 외적이며, 선포적인 것이다. 그러나 찬양은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지만 예배는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 하나님의 찾으심에 “예”라고 반응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예배는 선택이며 내부적인 마음의 문제이다. 예배는 또한 특권이다. 찬양은 모든 사람과 만물이 해야 한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인간 최고의 특권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찬양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복된 특권 중 하나가 예배인 것이다.
기억절 :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 96:1).
결론: 노래는 우리의 뉘우침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며, 그분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달 방법입니다.
첫째 날(일) 7월 31일
사울과 다윗의 차이
도입)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국가로서의 토대를 마련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출발은 참으로 겸손하였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그는 사양하는 겸손함을 보였다. 자신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서 왕이 되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이후에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마음을 잃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다윗은 더욱더 강력한 국가체계를 이루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사울과 다윗의 큰 차이는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깨닫게 되었을 때 보이는 자세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더 이상 사용하시지 않을 것임을 듣게 되었다. 이때 사울은 다른 사람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선지자 사무엘을 협박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의 사지로 내몰아 죽게 하였다. 그 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왕이 얼마나 잘못된 일을 했는가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의 회개를 하였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의하여 실수를 하고, 실패를 했을 때 자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까?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때 결국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2:5).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았기 때문에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다윗을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선택하셨을 때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다(삼상 16:7).
다윗은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다윗의 도덕적 과오가 사울의 죄악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더 심한 죄악을 용서하시고 계속 왕위에 있도록 허락하셨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교훈: 사울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채 계속 자신의 뜻대로 행했지만, 다윗은 진실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굴복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빌었다.
부가적용)
사울과 다윗은 똑같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고,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사울은 초반부터 승승장구하였으나 나중에 독재자로 변모하여 결국 자신과 가문이 멸망하는 불행과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다. 다윗은 초반에 사울 왕으로부터 시기질투를 받아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나중에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대대로 왕이 나오는 가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마음에 맞는 자”라고 했고, 다윗은 聖君(성군)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모든 지도자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세주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이다. 또한 사울은 회개에 더디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다. 하나님은 회개에 빠른 사람을 축복하신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짓게 된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울도 다윗도 죄를 지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후의 자세는 전혀 달랐다. 사울은 회개에 늦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다.
•영감의 교훈 •
▶ 회개를 미루지 말라
“그대는 죄 가운데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지체하지 말고 자비와 용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라. 다윗은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자, 회개와 겸손으로 그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토로했다. 그는 그의 면류관은 잃어버려도 견딜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자비는 지금도 여전히 죄인에게 뻗혀 있다”(교회증언 5권, 177).
둘째 날(월) 8월 1일
상한 마음과 상한 영
도입)
시편 34편 18절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했다. 돈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상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하시는 기준에 못 미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연약과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상한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고 떳떳한 자가 아니라 송구하고 부끄러워서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고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부패한 본성과 타락한 본능 등이 불완전한 요소들이다. 이것은 울어도 안되고 힘써도 안되며 인간의 노력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죄성들이다. 꼭 무슨 일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성과 욕망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죄송해하는 마음이 상한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긍정적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 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상태를 긍휼히 여기시고 품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는 상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의식하고 임재 가까이 있는 것이다. 상한 심령의 반대는 교만한 마음이나 죄의 유혹에 둔감한 마음이다. 그래서 아무런 가책이나 죄의식 없이 육신이 원하는 대로 범죄하고 세상의 유혹에 쉽게 타협하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물결에 빠져드는 것이다. 상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겸손해지고, 통회하며, 회개하며, 온유해지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교훈: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가 예배의 중심에 계신 구세주와 십자가를 주목하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제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제사는 죄를 용서 받는 것과 하나님 은혜를 힘입는 것, 또한 감사를 표현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제사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은 아니다. 구약의 제사 역시 본질적으로 영적인 예배였기 때문에 영적 예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모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말하는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헌제자와 제물의 정신의 일치였다. 그런 제사만이 하나님께서 영적인 예배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물을 떠올려 보라. 그 때 짐승들은 완전히 죽임을 당한 후에 헌제자의 손에 의해 바쳐졌고 단지 제사장에 의해 드러내어 맡겨졌을 뿐이었다. 그 전에 이 짐승은 어디로나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였지만 피를 흘리고 난 후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헌시되어 바쳐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헌제자 역시 그런 정신으로 온전히 자기가 죽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예배를 드릴 때 열납 되는 것이다. 비록 그가 삶에서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과 깨뜨려진 심령이 있다면 헌제자와 제물의 정신이 일치되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진정한 예배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 마음으로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그쳐서 참된 예배자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너진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썩어버리게 된다. 말씀을 사랑하고, 무릎을 꿇고서 간절히 기도하며, 지가가 아무것도 아닌 벌레보다 못한 자가 구원받게 하신 십자가의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 그것들이 우리의 예배의 뿌리이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그대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그대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라.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하라”(정로의 계단, 28).
•기도 •
하나님, 저를 외면치 않으시고 가까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전치 못한 제 마음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은혜로 덮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쁨의 눈물로 드리는 저의 제사를 받아 주옵소서.
셋째 날(화) 8월 2일
찬양의 노래와 예배
도입)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인생의 주인이시다. 성도의 본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은 인간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고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찬양을 기뻐하시며, 찬양 중에 거하신다. 찬양 중에 임재하시고 찬양 중에 놀라운 능력을 주신다. 찬양은 상한 감정을 치유하고 영성을 일으켜 말씀을 잘 받을 수 있게 한다. 마음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에 동참하게 한다. 찬양은 예배를 아름답게 하며, 영적으로 성도들을 충만하게 한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대상 16:8).
교훈: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과 언약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며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부가적용)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찬양은 경건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중략)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여기서 사용된 동사 '아이네오'는 반드시 곡조 있는 음악 행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이나 인간에게 좋은 언급을 하여 칭찬하는 행위를 지칭하는바 일반적으로 '찬양'이라는 협의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정황을 보건대 이것은 곡조 있는 찬송이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유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이들이 한 찬양은 전통적 유대 관행의 연장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죄수들의 귀에 들리게끔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다(행 16: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켜 그 권능을 행사하시게끔 하는 믿음의 행위가 되었다(행 16:26). 그들이 부른 찬송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적시되어있지는 않으나 사용된 동사 '휨네오'를 염두에 둘 때 유대 전통을 따른 시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방패와 산성, 피난처 되신 주님의 대한 여러 시편들이 불려 졌을 것이다. 야고보는 환경의 희노애락에 반응하는 신앙의 정서적 대응으로 찬송을 권면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희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여기서 사용된 동사 '프살로'는 어원(語原)으로 볼 때 '현을 뜯는다'는 의미를 가진 현악기 연주의 행위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 명사형 '프살모스'(psalm)가 구약의 시편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행 13:33), 이것은 악기 반주의 여부와 상관없이 '휨네오'처럼 시편을 노래하는 행위로 보아 무방하다. '찬양'의 이슈는 종종 우리말의 한자어가 갖는 문자적 의미 때문이기도 한다. 기릴 讚(찬) 오를 揚(양)으로 구성된 '찬양'이란 단어는 어의(語義)상 그것이 가리키는 말이나 노래의 가사가 하나님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그 문자적 의미와 실제적 사용 사이에 어색함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좁은 의미에서 찬양의 진정한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찬양'이란 용어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집회에서 경건 생활 및 신앙 행위와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음악 행위 일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어 왔다. 즉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사실상 '기독교 음악' 전체를 대신하는 용어가 되어 있다.
•영감의 교훈 •
▶ 찬양의 동기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자비하심과 다함없는 사랑의 나타남을 돌이켜 볼 때에 우리는 불평 대신에 찬양할 것이다. 우리는 참되고 부드러우며 동정 많은 양 무리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양 무리에 관하여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신 그 신실하신 사랑에 대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6권, 367).
•기도 •
하나님은 내 노래와 내 자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저도 제 마음을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나님께 바치려 합니다. 제가 드리는 찬양의 제사를 받아 주옵소서.
넷째 날(수) 8월 3일
다윗의 노래
도입)
역대상25장 7절에 보면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가 이백팔십팔인이라]라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된다. 구약의 다윗왕조시대에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은 배우고 익숙하기 위해서 얼마나 연습했겠는가? 아삽과 여두둔 헤만이라는 성가대장이 있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찬양은 곧 다윗의 왕조를 지키는 군대와도 같았다. 그래서 군대장관과 더불어 성가대장의 위치는 얼마나 중요한 직분인지 모른다.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성가대의 찬양은 그냥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를 부르는 찬양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이기느냐 죽는냐의 갈림길에서 군사들에게 영적인 무장을 하는 영적 갑옷과도 같다. 역대상 25장 1절은 군대장관과 더불어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왕의명령을 쫓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신령한 노래의 의미의 히브리어는 "나바"라는 동사인데 즉 예언하다 영감으로 노래하다 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찬양은 영감이 있어야하며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새벽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7).
교훈: 음악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삶과 예배에 있어서 뗄 수 없는 요소이다.
부가적용)
찬양이 의미 있는 것은 형식보다도 내용 때문이다. 어떤 형식의 음악도 그 기원을 따져보면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역사를 거치면서 각종 순결치 못한 관행이나 사고와 결탁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음악은 질그릇이다. 그러나 그 질그릇이 안에 보배를 담기 때문에 귀해진다(고후 4:7). 특정 형식의 음악이 가치를 지닌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음을 독려하며 순결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음악'의 구속(救贖)이라 명하고 싶다. 신약성서는 많은 세속적 언어와 개념들을 원용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죄악과 우상숭배에 갇혀있던 그 언어들을 구속(救贖)해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세계에서 죄악의 영향을 벗어나 있는 백퍼센트 순도의 문화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그것을 원용(援用)할 때 그 문화는 구속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고 볼 수 있다. 음악도 그렇게 구속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병과 더러움은 전염이 된다. 그러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중증의 여인이 예수를 만졌을 때는 역의 전염이 발생했다(막 5:25-34). 예수의 거룩함과 깨끗함이 병과 불결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전염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음악도 구속을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새 노래에 우리의 마음에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음악의 힘
“노래는 일반적으로 충동적으로, 혹은 특별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불려진다. 어떤 때에는 노래하는 자들이 실수하게 되므로, 음악은 참석한 자들의 마음에서 적절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음악은 아름다움, 정념(情念), 힘을 가져야 한다. 찬양과 헌신의 노래로 목소리를 높이라. 할 수 있으면 기악을 함께 사용하여, 영광스런 조화가 받으실 만한 제물로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라”(증언보감 1권, 457).
다섯째 날(목) 8월 4일
8월 4일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양하라!
도입)
신약성서가 찬양의 음악적 요소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상당한 정도 우리 그리스도인 쪽의 자유재량을 뜻한다. 창조성이 중요시되는 예술적 성격을 지닌 찬양의 영역을 지나치게 전통적 인위의 규격 안에 짜 맞추려하는 것은 신앙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다. 역동적 창의성이 질식되지 않도록 표현과 감성의 심화를 위해 충분한 자유를 허락해야 할 것이다. 특정 문화, 특정 스타일의 음악을 우상화하지 말고 창조적 새 음악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대해 자유와 창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 특정 음악에 결합되어 있는 죄악된 문화를 그대로 들여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된다(롬 12:2). 현재 상태에서 도저히 죄악적 요소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음악을 고의적으로 찬양에 도입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죄악이 된다. 아무리 음악이 중립적이라고 해도 뚜렷하게 무당춤을 동반하는 굿거리장단을 굳이 교회의 찬양으로 도입할 경우 현재로서는 많은 사람을 시험 들게 할 것이다. 이것은, 고기를 먹는 것이 죄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연상하여 스스로 시험에 들게 만들 때는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권했던 바울의 가르침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고전 8:1-13). 무당굿의 리듬이 들리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손상당한다. 이것은 현재의 평균적 정서와 관련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정서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리듬 또한 하나님을 찬미하는 통로가 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닌 것이 현실이며 진실이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빌 4:8).
하늘의 영감을 받은 찬양의 주제와 가사가 성경에 수록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음악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새로운 찬양을 작곡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문화와 연관성이 없는 음악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서 예배한다. 그래서 문화는 어느 정도 우리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데 그 차이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고전 10:31, 빌 4:8, 골 1: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 시 사용하는 음악의 종류에 관하여 어떤 지침과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가? 오랫동안 예배 음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찬미가는 대개 성곡으로 여겨지지만,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세상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배 음악은 가장 고귀하고 선하신 주님을 가리켜야 한다. 예배 음악은 인간의 저속한 요소가 아닌 더 높으신 분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 음악은 도덕적으로 중성이 아니다. 음악은 우리를 최고의 높은 영적 경험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우리를 욕망과 고난과 좌절과 분노로 이끌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음악 산업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사탄이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알 수 있다.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은 영적, 지적, 정서적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가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생각을 고양시키며,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야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음악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깨닫게 만드는 종류이어야 한다. 인류는 다양한 악기와 음악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 용기를 주는 음악이 다른 쪽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적합한 예배 음악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훈: 교회 음악도 문화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고귀함을 나타내고, 생각을 고양시키며, 주님에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의 젊은이들이 고전적인 찬송으로 도무지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데 CCM을 통해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삶이 바뀌며 사명자로 빚어져 가는데 굳이 나서서 찬물을 끼얹으며 그것이 성령충만도 아니고 마귀적이며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일은 성서적이지 않고 신앙적이지도 못하다. 뒤집어놓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고전음악 스타일의 찬양이 기성세대에 진정 기독교적인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이 우리 십대들의 성령의 충만을 질식시킨다면 오히려 세속적이며 마귀적이며 영혼을 죽이는 살인적 도구가 될 수 있다. 노래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포용과 이해의 자세를 체득해야 한다. 찬양 스타일의 용납과 새 노래에의 동참은 이론과 원리의 문제이기보다는 신앙 인격의 성숙과 도량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기되는 찬양의 이슈는 신학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랑의 능력과 그 깊이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아주 자주 우리의 불쾌감이나 증오를 신학적 정통성의 용어로 포장하는 위선을 저질러왔다. 찬양에 있어서도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롬 15:1).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갈 5:13).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권면을 주었다. 나의 것과 스타일이 다른 음악의 찬양으로 은혜 받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으로 용납하여 받아 주라. 아마 이것이 성서적인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감의 교훈 •
▶ 조화로운 찬양
“모든 사람이 영으로, 또한 깨달은 마음으로 찬미해야 함을 나는 보았다. 하나님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나 불협화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올바른 것이 언제나 그릇된 것보다는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바르고 조화로운 찬양에 더 가까이 이를수록 그분은 더욱 영광을 받으시며, 교회는 유익을 얻고 불신자들의 호감을 산다”(증언보감 1권, 45).
예비일(금) 8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노래는 영적 진리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무겁게 짓눌리어 절망에 빠질 것 같은 심령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에 부른 노래의 가사에서 하나님의 몇 말씀을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유혹이 힘을 잃고 삶은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갖고, 용서와 즐거움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누어지는 실례가 얼마나 많은가!…
예배의 일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행위이다. 사실, 많은 노래는 기도이다.…
구속주께서 우리를 영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문어귀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보좌를 두른 하늘 합창대의 찬미와 감사의 주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의 노래의 메아리가 지상의 가정에서 반향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가수(歌手)들에게 더 가까이 이끌릴 것이다. 하늘의 교제는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 찬미의 기조(基調)를 배운다”(교육, 1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가 속한 사회나 문화는 교회 음악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대는 그런 영향은 없다고 부인하겠습니까?
➋음악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인용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대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통해 그대는 얼마나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음악이 희망과 용기를 주고 교회에서 마땅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대의 교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댓글목록
Kailee님의 댓글
Kailee 작성일I see, I supspoe that would have to be the c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