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예수님과 옷(질문, 대답, 부가설명)06/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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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6-10 12:43 조회8,963회 댓글2건본문
6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6분
기억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 5:28).
연구 범위: 막 5:24~34, 눅 8:43~48, 요 13:1~16, 요 19:23~24, 마 26:59~68, 마 27:27-29.
성경에 나타난 옷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옷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어떤 설명 없이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맞기도 하고 때로는 틀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입은 옷의 종류와 형태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이번 주 우리는 예수께서 등장하는 문맥 가운데서 옷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치유를 받은 한 여인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하
여 겉옷을 벗으신 예수님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옷을 찢음으로 교만한 지도자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대제사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병에 의하여 조롱의 홍포를 입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짐으로 예언을 성취시킨 병사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단지 옷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상징과 의미가 넘쳐난다.안교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예수께서 개입된 여러 상황 속에 등장하는 의복의 의미들을 살펴본다.
➋느끼기 : 이야기의 정서적인 흐름에 공감하며 그 감정들이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성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➌행하기 : 그리스도의 겸손하고 이타적인 봉사의 모본을 따른다.
결론: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었기에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분의 벗은 몸은 우리를 위해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낮은 지위와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요 우주의 왕이셨지만, 대제사장과 이방 병사들의 조롱과 모욕으로 옷 입으셔야 했습니다.
첫째날(일)
6월 12일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8).
질문1: 막 5:24~34과 눅 8:43~48을 읽어보라.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수 있겠다고 믿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막5:24~3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눅8:43~48]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답: 그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자기의 병의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거나 말만 한 것이 아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믿는 대로 행동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질문2: 예수님께서 누가 자신의 옷을 만졌는지 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답: 그가 옷을 만진 행위나 예수님의 옷에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과 치유의 능력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고 그 여자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며 치유의 근원을 확실히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부가설명>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는 12년을 피를 쏟고 살았기 때문에 심히 약해져 있는 상태이다. 그녀가 예수님이 자기 동네, 어쩌면 자기 집 앞 골목으로 통행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희망이 솟았을 것이다. 그녀가 힘없는 걸음으로 집 앞에 나와 골목을 보았을 때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무리에게 둘러싸여 오시는 예수님께 접근할 방법이 없어 보인 것이다. 그녀는 그 많은 무리를 헤집고 예수님의 옷을 만지러 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리들에게 짓밟혀 죽게 될는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마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예수님께 접근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오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그녀는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옷 가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얼마나 감격한 순간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조용히 물러가려고 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여자를 불러 세운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사실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이 약할 대로 약해진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한 것은 예수님이셨다. 그는 일부러 이 여자의 집 앞 길로 가셨고, 여자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도록 여자 가까이로 접근해 주신 것이다. 마음에 예수님을 만나서 영육 간에 치유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원할 때 우리 주님은 친히 접근하신다. 오, 사랑의 주님이시여!
막 5:24~34과 눅 8:43~48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질병에 걸리면 의학적으로 위험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문화에서는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오명을 받기 때문에 그 여인은 더욱 비참하였다.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의원들에게 온 재산을 다 주고 오히려 더 중한 환자가 되었기에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의술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자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수치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을 이루어줄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막 5:24~34을 읽어보라.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깊었다. 그래서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옷 또는 접촉 자체가 그녀를 낫게 한 것은 아니다. 그녀를 낫게 한 것은 오직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무력한 처지를 깨닫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짐은 행위 속에 나타난 믿음을 의미했다. 이는 기독교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전부나 다름없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 5:30).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하여 여인의 행동과 치유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셨고,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하셨다. 그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바라셨다. 그리고 그분의 옷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치유했음을 그녀가 이해하기 원하셨다. 이전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처지에 있었지만, 이제 치유된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할 수 있었다.
교훈: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여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였다.
둘째날(월)
6월 13일 “겉옷을 벗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요 13:4~5).
질문1: 마 20:20~28을 읽어보라. 예수님과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제자들은 어떤 중요한 교훈을 파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였는가?
[마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답: 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의 봉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가 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들이 이 정신을 배우고 실천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그들이 거듭나는 경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없다. 물론 병이 중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실력이 없으면 섬기지 못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었고 오직 예수님만이 살아 있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섬기려고 오셨다. 그분의 섬김을 받아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이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섬긴 것처럼 섬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런 섬김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는가?
질문2: 요 13:1~16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이 말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13:1~17]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답: 예수께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1번 질문과 관련하여 말하면 이제는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능히 섬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께서 겉옷을 벗으신 것은 봉사하는 자세이며 그것은 자기희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앉으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는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활동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을 나타낸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고 있을 뿐 진정으로 생명의 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나타낸다.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서로 섬김을 받으려하고 욕심 부리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고 매도하고 지탄하는 정신을 서로 나타내었다. 예수께서는 선생과 주가 되셔서 제자들과 종의 발을 씻어주셨다. 겸손은 예수 생명의 성질이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이렇게 행할 수 있다. 그것이 생명의 능력이요 본성이기 때문이다.
교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다투고 있을 때, 주님은 겉옷을 벗고 우리를 섬기신다.
셋째날(화)
6월 14일 “옷을 찢지 말며”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레 21:10).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마 26:65).
질문: 마 26:59~68을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대답에 대제사장이 자신의 옷을 찢은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막 15:38, 히 8:1).
[마26:59~68]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막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히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답: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의 대답에 그의 대제사장의 옷을 찢었다. 이것은 이 세상 대제사장의 직무가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이 세상 성소의 기능이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 성소에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만민을 위하여 봉사하실 것이다.
<부가설명>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이나 그들이 봉사하는 성전의 의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냥 제도를 따라 직무를 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성소봉사를 통하여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피 흘려 죽여서 제사드리는 희생 제물들이 인류의 죄, 곧 사망을 없애기 위하여 인류 대신 죽으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구주의 희생을 표상하는 것인 줄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바울의 말대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고전2:8) 그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통하여서도 구원의 도리를 이루어나가셨다. 이 세상 성소의 기능이 다한 것을 나타내시고, 대제사장이 그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아론의 후손으로서 대제사장의 직무가 끝났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이제는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사유하심에 필요한 피를 흘리셨고, 바로 그분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당시니 흘리신 그 피로 인류를 위하여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정말 바르게 깨달아서 올바른 믿음으로 주 앞에서 주님께 받은 그 생명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의복이 상징하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의 품성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히고, 메시야의 죽음을 선고했다.
넷째날(수)
6월 15일 조롱의 옷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마 27:27~29).
질문: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생각해보라. 어떤 끔찍한 역설이 보이는가? 이 성경 본문은 인간의 무지와 잔인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이 말씀은 오늘날 세상이 창조주와 구주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가?(눅 23:10~11, 막 15:17~20 참고).
[눅23:10,1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막15:17~20]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답: 사람이 알지 못하면서 지위를 이용할 수 있으면 무지(無知)하게 용감하여진다. 여기 기록된 사건들이 바로 그렇다. 오늘날도 동일한 상태가 매일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특히 재림신자들에게 이런 상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가설명> 사단은 하늘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경배를 받을 엄청난 생각을 한 것 같다. 예수께서 그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렘23:18, 사14:12~14; 쟁투 29장 “죄악의 시작”장 참고) 사단은 땅으로 쫓겨난 후에, 예수께서 시험의 광야에 있을 때 예수께 와서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루시퍼의 근본 의도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정신은 지금도 여전하다. 소위 교회에서 그 일을 앞장서서 행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지상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사제들이 성만찬 때에 예수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떡을 가지고 축사할 때에 그 떡이 실제로 예수의 살로 변하기 때문에 사제는 예수의 살을 창조하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교단은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루시퍼의 속셈과 동일한 것이다. 루시퍼는 예수님이 여호와 곧 자존자(自存者)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역을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과 똑 같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렇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그분이 우리의 모본이 되려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 같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폄하한다. 예수님은 친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23)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아담의 후손들인 인간들과 다르다는 말씀이 아닌가?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친히 밝히신 것이다. 이런 모든 주장들은 그날 가야바와 안나스와 헤롯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대한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다 예수님을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주, 곧 재창조주시라는 것을 확신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 법정의 그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교훈: 우리를 의와 영광으로 옷 입히기 위해,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다섯째날(목)
6월 16일 “내 겉옷을 나누며”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8).
질문: 요 19:23~24을 읽어보라. 거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예언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가?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요19:23,24]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답: 로마의 군인들은 로마의 통치권을 최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면서 만왕의 왕을 조롱하였다. 그리고 옷을 취하여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취하였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런 성취로 하여 예수가 참으로 구주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부가설명>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통치권을 조롱하였다. 교과에 있는 말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한 것이고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우주의 통치권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구주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들을 이루는 것일 뿐이었다. 베드로가 검으로 말고의 귀를 베었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모든 것은 다 종말을 처음부터 보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그렇게 됨으로 예수님이 태초부터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게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완전히 검정된 구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기록한 말씀 밖으로 결코 넘어가지 않은 믿음의 삶을 살도록 주께서 복 주시기를 기도한다.
교훈: 벌거벗는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진 아픔과 고통을 견디셨던 예수님은 옷을 나누는 병사들을 통해 큰 용기와 확신을 얻으셨다.
예비일(금)
6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치료봉사, 59~63 “믿음의 접촉”, 시대의 소망, 342~343 “믿음으로
만짐”, 728~731 “빌라도의 법정에서”, 746 “갈바리.”
“예수의 원수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가 운명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만 하면 그의 신성한 능력과 행하신 이적에 관한 소문을 영원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저희는 예수의 영향력 때문에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몰인정한 군사들은 예수의 옷을 취하여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예수의 속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통으로 짠 옷이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이 옷을 가지기로 작정하였다. 성경에는 이 일이 이루기 수백 년 전에 이 광경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즉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6, 18)”(살아남는 이들, 223~2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용기를 주는 성경의 예언들을 나누어봅시다. 이러한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이유를 주고 계심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 구주가 탄생하여 사단을 이길 것이라는 예언은 창세기 3:15부터 기록되어 있다.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등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언제나 맨 먼저 성도들의 승리에 대한 보증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였다. 이런 것들은 다 예수 안에서 이미 승리한 사실을 확신하게 하는 구조이다.
➋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을 견디셔야 했던 그리스도의 고통과 자기 부정에 대하여 다시 음미해 봅시다.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아를 희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 진정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아인데, 그것을 부인하는 일이 정말 어렵다. 우리의 의식에 사단이 너무 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 굴복시키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인지 답답하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몰:오후 7시 56분
기억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 5:28).
연구 범위: 막 5:24~34, 눅 8:43~48, 요 13:1~16, 요 19:23~24, 마 26:59~68, 마 27:27-29.
성경에 나타난 옷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옷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어떤 설명 없이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맞기도 하고 때로는 틀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입은 옷의 종류와 형태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이번 주 우리는 예수께서 등장하는 문맥 가운데서 옷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치유를 받은 한 여인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하
여 겉옷을 벗으신 예수님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옷을 찢음으로 교만한 지도자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대제사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병에 의하여 조롱의 홍포를 입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짐으로 예언을 성취시킨 병사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단지 옷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상징과 의미가 넘쳐난다.안교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예수께서 개입된 여러 상황 속에 등장하는 의복의 의미들을 살펴본다.
➋느끼기 : 이야기의 정서적인 흐름에 공감하며 그 감정들이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성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➌행하기 : 그리스도의 겸손하고 이타적인 봉사의 모본을 따른다.
결론: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었기에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분의 벗은 몸은 우리를 위해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낮은 지위와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요 우주의 왕이셨지만, 대제사장과 이방 병사들의 조롱과 모욕으로 옷 입으셔야 했습니다.
첫째날(일)
6월 12일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8).
질문1: 막 5:24~34과 눅 8:43~48을 읽어보라.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수 있겠다고 믿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막5:24~3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눅8:43~48]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답: 그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자기의 병의 나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거나 말만 한 것이 아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믿는 대로 행동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질문2: 예수님께서 누가 자신의 옷을 만졌는지 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답: 그가 옷을 만진 행위나 예수님의 옷에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과 치유의 능력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고 그 여자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며 치유의 근원을 확실히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부가설명>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는 12년을 피를 쏟고 살았기 때문에 심히 약해져 있는 상태이다. 그녀가 예수님이 자기 동네, 어쩌면 자기 집 앞 골목으로 통행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희망이 솟았을 것이다. 그녀가 힘없는 걸음으로 집 앞에 나와 골목을 보았을 때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무리에게 둘러싸여 오시는 예수님께 접근할 방법이 없어 보인 것이다. 그녀는 그 많은 무리를 헤집고 예수님의 옷을 만지러 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리들에게 짓밟혀 죽게 될는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마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예수님께 접근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오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그녀는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옷 가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얼마나 감격한 순간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조용히 물러가려고 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여자를 불러 세운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사실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이 약할 대로 약해진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한 것은 예수님이셨다. 그는 일부러 이 여자의 집 앞 길로 가셨고, 여자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도록 여자 가까이로 접근해 주신 것이다. 마음에 예수님을 만나서 영육 간에 치유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원할 때 우리 주님은 친히 접근하신다. 오, 사랑의 주님이시여!
막 5:24~34과 눅 8:43~48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질병에 걸리면 의학적으로 위험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문화에서는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오명을 받기 때문에 그 여인은 더욱 비참하였다.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의원들에게 온 재산을 다 주고 오히려 더 중한 환자가 되었기에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의술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자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수치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을 이루어줄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막 5:24~34을 읽어보라.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깊었다. 그래서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옷 또는 접촉 자체가 그녀를 낫게 한 것은 아니다. 그녀를 낫게 한 것은 오직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무력한 처지를 깨닫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짐은 행위 속에 나타난 믿음을 의미했다. 이는 기독교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전부나 다름없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 5:30).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하여 여인의 행동과 치유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셨고,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하셨다. 그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바라셨다. 그리고 그분의 옷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치유했음을 그녀가 이해하기 원하셨다. 이전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처지에 있었지만, 이제 치유된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할 수 있었다.
교훈: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여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였다.
둘째날(월)
6월 13일 “겉옷을 벗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요 13:4~5).
질문1: 마 20:20~28을 읽어보라. 예수님과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제자들은 어떤 중요한 교훈을 파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였는가?
[마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답: 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의 봉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가 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들이 이 정신을 배우고 실천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그들이 거듭나는 경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없다. 물론 병이 중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실력이 없으면 섬기지 못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었고 오직 예수님만이 살아 있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섬기려고 오셨다. 그분의 섬김을 받아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이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섬긴 것처럼 섬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런 섬김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는가?
질문2: 요 13:1~16을 읽어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이 말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13:1~17]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답: 예수께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1번 질문과 관련하여 말하면 이제는 더 이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능히 섬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께서 겉옷을 벗으신 것은 봉사하는 자세이며 그것은 자기희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앉으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는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활동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을 나타낸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고 있을 뿐 진정으로 생명의 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나타낸다.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서로 섬김을 받으려하고 욕심 부리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고 매도하고 지탄하는 정신을 서로 나타내었다. 예수께서는 선생과 주가 되셔서 제자들과 종의 발을 씻어주셨다. 겸손은 예수 생명의 성질이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이렇게 행할 수 있다. 그것이 생명의 능력이요 본성이기 때문이다.
교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다투고 있을 때, 주님은 겉옷을 벗고 우리를 섬기신다.
셋째날(화)
6월 14일 “옷을 찢지 말며”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레 21:10).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마 26:65).
질문: 마 26:59~68을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대답에 대제사장이 자신의 옷을 찢은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막 15:38, 히 8:1).
[마26:59~68]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막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히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답: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의 대답에 그의 대제사장의 옷을 찢었다. 이것은 이 세상 대제사장의 직무가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이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이 세상 성소의 기능이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 성소에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만민을 위하여 봉사하실 것이다.
<부가설명>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이나 그들이 봉사하는 성전의 의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냥 제도를 따라 직무를 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성소봉사를 통하여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피 흘려 죽여서 제사드리는 희생 제물들이 인류의 죄, 곧 사망을 없애기 위하여 인류 대신 죽으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구주의 희생을 표상하는 것인 줄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바울의 말대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고전2:8) 그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통하여서도 구원의 도리를 이루어나가셨다. 이 세상 성소의 기능이 다한 것을 나타내시고, 대제사장이 그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아론의 후손으로서 대제사장의 직무가 끝났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이제는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사유하심에 필요한 피를 흘리셨고, 바로 그분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당시니 흘리신 그 피로 인류를 위하여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정말 바르게 깨달아서 올바른 믿음으로 주 앞에서 주님께 받은 그 생명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의복이 상징하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의 품성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히고, 메시야의 죽음을 선고했다.
넷째날(수)
6월 15일 조롱의 옷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마 27:27~29).
질문: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생각해보라. 어떤 끔찍한 역설이 보이는가? 이 성경 본문은 인간의 무지와 잔인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이 말씀은 오늘날 세상이 창조주와 구주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가?(눅 23:10~11, 막 15:17~20 참고).
[눅23:10,1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막15:17~20]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답: 사람이 알지 못하면서 지위를 이용할 수 있으면 무지(無知)하게 용감하여진다. 여기 기록된 사건들이 바로 그렇다. 오늘날도 동일한 상태가 매일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특히 재림신자들에게 이런 상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가설명> 사단은 하늘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경배를 받을 엄청난 생각을 한 것 같다. 예수께서 그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렘23:18, 사14:12~14; 쟁투 29장 “죄악의 시작”장 참고) 사단은 땅으로 쫓겨난 후에, 예수께서 시험의 광야에 있을 때 예수께 와서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루시퍼의 근본 의도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정신은 지금도 여전하다. 소위 교회에서 그 일을 앞장서서 행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지상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사제들이 성만찬 때에 예수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떡을 가지고 축사할 때에 그 떡이 실제로 예수의 살로 변하기 때문에 사제는 예수의 살을 창조하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교단은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루시퍼의 속셈과 동일한 것이다. 루시퍼는 예수님이 여호와 곧 자존자(自存者)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역을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과 똑 같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렇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그분이 우리의 모본이 되려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 같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폄하한다. 예수님은 친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23)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아담의 후손들인 인간들과 다르다는 말씀이 아닌가?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친히 밝히신 것이다. 이런 모든 주장들은 그날 가야바와 안나스와 헤롯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대한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다 예수님을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주, 곧 재창조주시라는 것을 확신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 법정의 그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교훈: 우리를 의와 영광으로 옷 입히기 위해,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다섯째날(목)
6월 16일 “내 겉옷을 나누며”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8).
질문: 요 19:23~24을 읽어보라. 거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예언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가?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요19:23,24]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답: 로마의 군인들은 로마의 통치권을 최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면서 만왕의 왕을 조롱하였다. 그리고 옷을 취하여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취하였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런 성취로 하여 예수가 참으로 구주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부가설명>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통치권을 조롱하였다. 교과에 있는 말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한 것이고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우주의 통치권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구주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들을 이루는 것일 뿐이었다. 베드로가 검으로 말고의 귀를 베었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모든 것은 다 종말을 처음부터 보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그렇게 됨으로 예수님이 태초부터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게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완전히 검정된 구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기록한 말씀 밖으로 결코 넘어가지 않은 믿음의 삶을 살도록 주께서 복 주시기를 기도한다.
교훈: 벌거벗는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진 아픔과 고통을 견디셨던 예수님은 옷을 나누는 병사들을 통해 큰 용기와 확신을 얻으셨다.
예비일(금)
6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치료봉사, 59~63 “믿음의 접촉”, 시대의 소망, 342~343 “믿음으로
만짐”, 728~731 “빌라도의 법정에서”, 746 “갈바리.”
“예수의 원수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가 운명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만 하면 그의 신성한 능력과 행하신 이적에 관한 소문을 영원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저희는 예수의 영향력 때문에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몰인정한 군사들은 예수의 옷을 취하여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예수의 속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통으로 짠 옷이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이 옷을 가지기로 작정하였다. 성경에는 이 일이 이루기 수백 년 전에 이 광경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즉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6, 18)”(살아남는 이들, 223~2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용기를 주는 성경의 예언들을 나누어봅시다. 이러한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이유를 주고 계심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 구주가 탄생하여 사단을 이길 것이라는 예언은 창세기 3:15부터 기록되어 있다.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등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언제나 맨 먼저 성도들의 승리에 대한 보증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였다. 이런 것들은 다 예수 안에서 이미 승리한 사실을 확신하게 하는 구조이다.
➋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을 견디셔야 했던 그리스도의 고통과 자기 부정에 대하여 다시 음미해 봅시다.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아를 희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 진정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아인데, 그것을 부인하는 일이 정말 어렵다. 우리의 의식에 사단이 너무 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 굴복시키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인지 답답하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목록
한마음님의 댓글
한마음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말씀감사합니다.
도루시님의 댓글
도루시 작성일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 같이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고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