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혼인 예복(예화 및 부가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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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6-05 08:58 조회5,620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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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1과 혼인 예복
6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3분
도입)
혼인예복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 양이 죽은 사건을 통해, 곧 우리들에게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칭의의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36에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입어야 할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의복에 대한 또 두 번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8절) 라고 말한 이 사실에 비추어 혼인 예복이란 옳은 행실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예복이 우리의 몸에 입어야 할 예복일까? 예수님께서 입혀주시는 칭의인가? 아니면 우리의 옳은 행위도 필요 되는 것인가? 오늘의 연구는 이 두 대립된 사상이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혼인예복이란 순종이라는 실로 지은 것이다. 천이 있어야 옷을 만들 수 있고 실이 있어야 천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신부의 예복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에게 옳은 행실이란 천과 함께 순종이라는 실로 만들어 진 것을 의미한다.
기억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며, 생명책에 저희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참된 제자는 아니다. 최후의 상급을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가 줄 상이 그에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실’(계 22:12)것이기 때문이다”(실물교훈, 310).
결론: 모든 사람이 왕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지만, 모든 이가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들 가운데는 왕이 준비한 예복 즉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기로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초청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합당한 의복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날(일)
6월 5일 격정의 시간
도입)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이어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셨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무슨 권위로 이같이 행동하는지 직접 질문한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면 저들은 신성 모독죄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할 참이었고, 예수가 자신의 권위를 명백히 제시하지 못하면 민중 선동죄나 성전 소란죄로 기소할 참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돌연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에게로서 왔느냐?’ 하고 역으로 질문하신다. 이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만일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 왔다고 대답하면 어찌하여 요한을 믿고 침례를 받지 않으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면 당시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들에게 공격을 받게 될 것이므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하고 발뺌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도 자신이 무슨 권세로 그 같은 일을 하는지 저들에게 말 못하겠다고 되받아 치친다. 이후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완고한 죄악을 비유로 폭로하셨다. 그리고 특히 본문의 혼인잔치 비유는 복음을 무시해버린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죄상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마 21:45).
예수님의 지상 봉사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21장은 극적인 사건과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인간의 어두운 마음과 가장 분명한 진리도 볼 수 없도록 눈멀게 하는 사탄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주셨던 모든 증거들을 목격하고서 어떻게 당시의 지도자들은 그토록 무감각하고, 분별력이 없었을까? 하지만 우리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빛을 받은 재림교인으로서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때때로 우리도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냉담하지 않는가? 특별히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죄와 욕망과 세속적 관심이 진리와 상충될 때 더욱 그렇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말은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얼마나 조심해야겠는가?
마태복음 21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절은 마지막 두 절이다. 백성들은 그분의 기별을 듣고 자신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차렸다. 자칫 완전히 놓칠 수 있는 사실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을 체포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를 가로막은 것은 예수께 모여든 백성들이었다. 소위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되어야 할 자들이 가장 열심히 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결국 나중에 깨닫겠지만 그때는 너무 늦지 않겠는가?(롬 14:10).
교훈: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부가적용)
마태의 비유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예복 비유’가 잔치비유에 첨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초대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무차별한 초대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오해, 즉 마치 부름 받은 자들의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마태의 삶의 자리에 연관시켜 해석한다면, 마태가 보는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선교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즉 ‘누구나 오라’는 외침과 함께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만나는 대로’ 교회로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한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믿으라는, 오라는 부름을 받고 교회 안에 몰려온 많은 이방인들이 마음의 준비 없이, 도덕적 결단 없이 믿음에 합당한 열매도 없이 교회 생활을 계속하는 일종의 도덕 부재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음의 준비 없이, 도덕적 결단이나 변화 없이 교회 생활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경고로써 ‘예복’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과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된 벤 자카이의 비유 가운데서도 정결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잔치에 용납되지 않고 있는데, 랍비의 비유에서는 이 정결한 옷이 특히 ‘회개’를 의미하고 있다. 결국 마태도 그와 비슷한 관심 가운데서 각계각층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집합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도덕적으로 훈련시켜야 할 상황 속에서 선행과 회개 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그의 글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영감의 교훈 •�
▶ 지도자들을 침묵시키심
“그분은 이전에도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지만 이와 같이 엄숙하고 감명적인 방법으로 행하신 적은 전혀 없었다. 그분의 놀라운 일을 목격한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감히 공공연하게 그에게 대한 적개심을 나타낼 수 없었다. 비록 예수님의 대답으로 분노하고 당황했을지라도 그날에는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시대의 소망, 593).
둘째날(월)
6월 6일 왕의 초대
도입)
왕의 초대에서 보듯이 기독교의 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는 음울한 종교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초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초청은 매우 기쁜 일이며 그리스도의 종교는 매우 행복한 경험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참 기쁨에로 초청을 받는 것이라서, 그 초대를 거절하는 자는 이 복음의 기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처음 한국에서 시작했을 때,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분들이 목사님이 되어 써놓은 글들이 있다. 거기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많은데, 그 중에 불교는 상갓집과 같다고 비유를 하고 있는 글이 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생무상'을 말하고 있으니 상갓집과 같다는 것이다. 다 죽고 다 없어진다 하니 죽음의 종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유교는 마치 제삿집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밤낮 효도한다고 하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유교는 일 년에도 수차례 제사만 지낸다. 유교의 가르침대로 살다보면 일 년 내내 제사만 지내기 십상이다. 제사 지내는 일에 정성을 다하니 유교는 제삿집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고 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고 '희락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인간에게 행복과 기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일반적인 혼인 잔치와 왕이 베푸는 혼인 잔치는 차원이 다르다. 왕자의 혼인 잔치에 왕으로부터 초대 받았다면 그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계 12:2, 9, 엡 5:21~23).
마 22:1~8를 읽어보라. 왕이 어떻게 모든 것을 준비했는지 보라. 그는 결혼식을 계획하고, 만찬도 준비했으며, 소와 살찐 짐승도 잡았다. 정말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라는 것이 기별이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제공된 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초청을 무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자들은 그것을 가볍게 여겼다. 즉 그들은 초청을 심각하고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요구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여러 이유를 들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길로 갔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좁다고 말씀하셨다(마 7:14). 사람들은 초청을 거절하거나 기피하고자 온갖 핑계를 댄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유혹이 핑계거리이다. 결국 일부는 초청을 무시하고, 어떤 이들은 초청하러 나아간 자들을 핍박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을 “합당치” 않다고 선언한 왕의 말을 깊이 생각하라. 죄의 보편성과 인류의 죄성에 비춰볼 때, 우리는 왕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왕의 잔치에 초대받기에 합당한가? 결론적으로, 성서적 의미에 있어서 “합당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들에 기인한다. 우리의 합당함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할 때에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들 속에 있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분의 초청에 응하며, 그분이 준비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가적용)
왕이 종들을 보내어 저자거리에서 잔치 자리를 채울 사람들을 청한 것은 문호개방의 비유이다. 즉 죄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든지 제한이 없이 문호를 열었다. 누구나 다 환영이나 천국의 잔치에 올 수 있지만 오는 자들은 그들에게 준 사랑에 맞는 생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은혜는 은혜일뿐 아니라 은혜에 따른 큰 책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왕이 요구하신 예복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이 천국의 잔치를 연 대표적인 장소이다. 교회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도록 문을 여셨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누구에게든지 구원의 문호를 열어놓은 곳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일이 있다. 이 교회는 그동안 내가 세상에서 입고 살았던 옷과는 다른 옷을 입도록 요구하고 있다. 구원의 잔치 그리스도와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혼인에 필요한 예복을 요청하셨다. 왕에게 초대된 손님들이 혼인잔치를 참석하게 되면, 각자 예복을 선물로 나누어 받게 된다. 물론 잔치에 참석하기 전에 초대 손님들의 집으로 미리 예복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예복을 받은 손님들은 다 그 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여 주인에게 예의를 표하며 축하했다. 만일 손님이 예복을 입지 않거나,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대강 걸쳐 입었을 경우에 그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었으며 곧 잔치에서 쫓겨났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왕의 잔치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했을 때는 처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영감의 교훈 •
▶ 가치관의 문제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거절하기 위하여 그들이 댄 모든 핑계는 오늘날 복음의 초청을 거절하는 모든 핑계의 기초가 된다. 사람들은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저희의 세속적 번영을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희는 세속적 이익을 영원한 사물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실물교훈, 224).
셋째날(화)
6월 7일 잔치에 온 사람들
도입)
당시 문화는, 왕실이나 고위 관료, 부자들이 잔치를 배설할 때 미리 종들을 보내어 하객들의 참석 의사를 타진하고, 당일 날 입을 예복을 미리 선물했다고 한다. 그 외 예복이 미리 전달이 안 되는 경우에는, 잔치 장소 입구에서, 종들이 예복을 미리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불러들였다. 그래서 결혼 잔치 마당은 잔치 손님들로 가득 찼다. 마22:10 왕의 혼인잔치에는 선인, 악인 구분 없이 모두 다 초대되었다. 실제로 교회 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을 볼 때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만 골라서 모인 곳이 결코 아니다. 교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예복’이 주어졌듯이,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칭의’가 주어진다. 어떤 사람은 유난히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좀 마음껏 과시하고 싶은데 잔치자리에 예복을 입으라고 하니.. 사양한 것이다. 자기 옷이 더 고급스럽고 좋다는 것이다. 본문의 메시지는, ‘자기 공로를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새 옷’, 즉 칭의를 힘입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의 고급 옷(자기 공로)으로는, 천국 잔치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
초청이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왕은 다른 종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마 22:9)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가서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기 때문이다(마 22:10).
비유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라(마 22:9~14). 혼인 잔치에 온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가장 비열하고 혐오스럽고 못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리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또는 매사에 비판적이며 비난을 일삼고 위선적이고 정말 사악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서 구원의 약속을 주장하고 구원을 확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어 주 예수께 대한 충성심으로 원정길에 약탈과 강탈을 일삼았던 십자군의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떤 목격자는 “우리 군대는 이교도들을 냄비에 삶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꼬챙이에 찔러 구워먹었다.”고 했다. 어떻게 이처럼 무시무시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대가 어떻게 그들의 동기와 관습과 기회를 판단할 수 있는가? 혹시 그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처럼 용서와 은혜의 약속을 주장하며 회개하지 않았을까? 경건한 줄 알았던 사람이 저지르는 끔찍한 행위들은 또 어떤가? 우리가 누구관대 마음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롬 14:10, 히 10:30, 전 12:14, 단 7:9, 10). 재림교회는 이것을 “조사심판”이라 부르는데, 이 비유에는 그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교훈: 우리의 사명은 악한 이와 선한 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다.
부가적용)
나는 저 인간들 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하다가는 ... 쫓겨날 가능성 크다. ‘나보다 더 깨끗하고 잘난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다가는... 예복을 못 입는다. 왕이 주신 예복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그 잔치에 있지 못할 것이다. 이 잔치에 대한 해석으로 이 예복을 실천적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대포적인 성경절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였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더라 하더라” 계19:7. 이 예복이란 예수님의 입혀주시는 칭의를 말함인가? 아니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말하는 것인가? 위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둘 다 맞다. ‘예복’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칭의’를 뜻한다. 그러면서도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옳은 행실’을 반드시 나타내게 된다. 다음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행실) 엡4:22~25
•영감의 교훈 •
▶ 초청의 대상
“복음의 초청은 온 세상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계 14:6)에게 주어지는 기별이다. 경고와 자비가 섞인 마지막 기별은 그 영광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해야 한다. 이 기별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실물교훈, 228).
넷째날(수)
6월 8일 옷을 입지 않음
도입)
교회에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은 죄인이 들어와 죄인으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교회는 죄인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는 철공소와 같다. 롬 13:14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情慾)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圖謀)하지 말라 교회에 들어온 이상 우리가 갈아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살던 방법으로 세속의 옷을 입고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방법이다. 에베소서 5장8절에 보면 “너희는 전에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두움에 속한 죄된 생활을 버리고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우리의 삶이 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다 못된 사람들이라고 지탄을 받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할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마 22:11).
비유에서 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옷을 거절한다고 그것을 영생 혹은 영멸의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믿지 않은 한,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순간 가라지와 곡식(마 13:24~30),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마 25:1~13), 충실자와 불충실한자(마 25:14~30), 의의 옷을 입은 자와 입지 않은 자(마 22:1~14) 그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끔찍한 일들을 자행했던 자들을 구별해 내실 것이라는 사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특별히 내가 아닌 타인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는 종교라면 우리와 동일한 구원의 약속을 주장하는 모든 자들 가운데서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일종의 최종적인 판정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구원이 순전히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간단하게 우리의 행위를 종합하면 된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를 위해 행한 타인의 공로를 믿음으로, 우리가 아닌 타인에게 있는 의를 믿음으로 결정된다면 문제는 더욱 미묘하고 까다로워진다. 그래서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하는 종교보다 이런 종교는 전혀 실수해 본 적이 없는 분에 의한 심판이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판단 기준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은혜로 제공해 주신 의의 두루마기를 각자가 입고 있는지 안 입고 있는지 볼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언젠가 믿음을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 진짜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과 입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실 것이다.
부가적용)
황의성이란 사람은 소년 시절부터 절도와 폭력, 강도, 강간 등 닥치는 대로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고, 교도소도 여러 번 드나들었다. 12월 어느 날, 7개월의 복역 잔류 기간을 앞두고 안양 교도소로 이송되는 상황이 생겼다. 새롭게 지정된 감방에 들어가니 고참들이 고통을 주기 시작했고, 화가 난 황의성 씨도 육탄전으로 맞섰지만, 그때마다 눅실하게 맞고는 분을 삭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 안에 변기통 옆에서 한 죄수가 그들의 싸움을 보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를 마친 그 사람은 눈물도 닦지 않은 채 황의성 씨의 피를 닦고 간호를 해주었다. 그때 황의성 씨의 가슴은 마치 불덩이가 날아와서 불을 붙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로부터 황의성씨는 착실한 신자 죄수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황의성 씨가 변화되는 모습을 본 교도소 측에서는 3개월을 앞당겨서 출소시켜 주었고요, 이후 그는 날마다 427장 찬송을 3~5번 불렀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내게 계시네] 라는 책도 냈다. 이렇게 성령은 위력 있는 불씨라서 한 죄수의 마음을 태우고, 그로 하여금 영혼 구원 역사에 동참케 한 것이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빛을 입고 살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다.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옷을 입는다. 군인은 군복을 입는다. 학생은 교복을 입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연주복을 입는다. 백화점은 특별한 디자인의 옷으로 자기를 구별한다. 옷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레스토랑 중에는 정장을 입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있다. 물론 거기에는 자기들만의 하이클래스(고급)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즐기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쨌든 옷을 통해 동질성을 누리려 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왕의 예복을 입는 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닮은 동질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음식은 원하나 예복은 원치 않는다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복음의 축복과 특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품성의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실물교훈, 315).
다섯째날(목)
6월 9일 조사
도입)
사람이 어느 좌석에 나타날 때의 차림새는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친구의 잔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노동복으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친구가 우리의 옷에 관계할 바는 아니나,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이 차리고 가는 것이 친구에게 대한 대접이요, 친구의 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의복과 사랑의 예복을 갈아입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겉옷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옷도 갈아입고 정결한 모습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할머님이 교회에 다녀와서 손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목사님의 성경 말씀이나 설교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예배는 참 잘 보고 왔다”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손자 녀석이 “할머니는 엉터리 신자예요”라고 말을 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손자에게 뽀얗게 먼지가 쌓인 망태기를 주며 개울가에 가서 물을 담아 오라고 하였다. 한 참 후에 손자는 물에 씻겨 깨끗해진 망태기를 내밀곤 망태기 어떻게 물을 담느냐고 투덜댔다. 할머니는 “물을 담아오지는 못했지만 망태기가 깨끗해진 것처럼 비록 내가 지식을 얻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은 깨끗해졌다”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는 말씀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 지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갈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입은 첫째가 침례를 받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답게 우리의 삶에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8절에 보면 “너희는 전에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어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믿지 않은 한, 그분의 의를 실제로 입은 사람과 단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구별이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것이 이 비유가 다루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전 12:14과 고전 4:5을 마 22:11에 비춰보라. 대쟁투(계 12:7~9, 벧전 5:8, 욥 1~2장)와 대쟁투에 대한 전 우주적 관심(단 7:10, 고전 4:9, 엡 3:10)을 알고 있는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딤후 2:19의 말씀을 기초로 행위에 대한 조사심판 개념이 비성서적이라는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러나 우리와 나머지 우주는 아니다.
생각 속에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온 우주가 죄와 반역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의롭고, 공정하게 다루시는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어떤 종류의 심판이든 조사를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창 3:9~19을 보라. 죄가 들어온 직후, 하나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물으시며 바로 인간의 문제에 개입하셨다. 이 “조사”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들이 한 일의 중대함을 알게 하시고자 한 것이다.) “조사심판” 역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조사는 하나님께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다른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창세기의 이 심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형선고를 능가했던 것처럼(창 3:15 참고), 은혜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가 현재이든 최후의 심판 때이든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그분의 은혜가 부어질 것이다.
교훈: 조사 심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온 우주를 위한 것이며,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부가적용)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은혜의 시기라고도 하고 조사심판 때라고도 말한다. 조사심판은 죽이는 심판(집행심판)이 아니요, 살리는 심판이다. 어떠한 사람이든 즉 강도 짖을 했던지 살인을 했던지, 어떤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개인의 아버지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말끔히 씻어 의인으로 하늘에서는 간주된다. 아버지 앞에 예수님이 중보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였다. 그의 중보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된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원수가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의 사랑 많으신 아버지로 다가선 것이다. 죄는 말끔이 씻어졌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 죄에서 해방이 된다. 과거의 죄, 지금의 죄, 앞으로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다고 해서 죄를 또 져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인과 악인은 그들의 생활 상태 그대로 여전히 세상에 살면서 하늘 성소에서 철회할 수 없는 마지막 결정이 내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밭 갈고 집짓고 먹고 마시고 할 것이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배 안에 두고 경건치 못한 자들은 배 밖에 두신 채 문을 닫으셨다. 7일 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을 모르고 경솔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또한 임박한 심판에 관한 경고를 조롱하였다. 구주께서는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고 범죄한 인류에 대한 은혜의 초청이 철회되는 마지막 시간은 밤중에 도둑이 오는 것처럼 가만히 눈에 띄지 않게 올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5, 36)). 깨어 있기를 소홀히 하고 세상의 매력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는 자들의 상태는 참으로 위험하다. 사업가가 이득에 마음을 빼앗기고, 향락을 즐기는 자가 방종을 구하고, 유행을 따르는 자가 몸을 단장하기에 겨를이 없을 바로 그때, 온 세상의 심판관 되신 예수님께서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단 5:27) 라고 선고하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온 우주가 주목하고 있음
“지금은 우리의 믿음을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이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는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마지막 일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바야흐로 시작되려고 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야망이 마음을 점령하도록 허용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하늘의 하나님께 충성되고 진실한 것으로 판명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교회증언 5권, 526).
예비일(금)
6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307~319 “예복을 입지 않음.”
“구속의 경륜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만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이 작은 세계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대로 생각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시기 위해서였다”(실물교훈, 68).
“사단은 그 때에 파멸되지 않았다. 천사들은 그 때에도 대쟁투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깨닫지는 못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원칙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야만 했다. 인류를 위해서도 사단은 계속 존재해 있어야 했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영광의 왕과 흑암의 왕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알아야만 한다. 인류는 자기가 섬길 자를 선택하여야만 한다”(시대의 소망, 7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만행들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이용하여 끔찍한 죄악을 가리고 정당화시켰는지 생각해봅시다. 이런 불행한 사실들을 볼 때,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➋예수님은 혼인 예복에 대한 비유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마치셨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6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3분
도입)
혼인예복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 양이 죽은 사건을 통해, 곧 우리들에게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칭의의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36에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입어야 할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의복에 대한 또 두 번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8절) 라고 말한 이 사실에 비추어 혼인 예복이란 옳은 행실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예복이 우리의 몸에 입어야 할 예복일까? 예수님께서 입혀주시는 칭의인가? 아니면 우리의 옳은 행위도 필요 되는 것인가? 오늘의 연구는 이 두 대립된 사상이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혼인예복이란 순종이라는 실로 지은 것이다. 천이 있어야 옷을 만들 수 있고 실이 있어야 천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신부의 예복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에게 옳은 행실이란 천과 함께 순종이라는 실로 만들어 진 것을 의미한다.
기억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복음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며, 생명책에 저희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다 참된 제자는 아니다. 최후의 상급을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가 줄 상이 그에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실’(계 22:12)것이기 때문이다”(실물교훈, 310).
결론: 모든 사람이 왕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지만, 모든 이가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잔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들 가운데는 왕이 준비한 예복 즉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기로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초청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합당한 의복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날(일)
6월 5일 격정의 시간
도입)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이어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셨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무슨 권위로 이같이 행동하는지 직접 질문한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면 저들은 신성 모독죄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할 참이었고, 예수가 자신의 권위를 명백히 제시하지 못하면 민중 선동죄나 성전 소란죄로 기소할 참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돌연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에게로서 왔느냐?’ 하고 역으로 질문하신다. 이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만일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 왔다고 대답하면 어찌하여 요한을 믿고 침례를 받지 않으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면 당시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들에게 공격을 받게 될 것이므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하고 발뺌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도 자신이 무슨 권세로 그 같은 일을 하는지 저들에게 말 못하겠다고 되받아 치친다. 이후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완고한 죄악을 비유로 폭로하셨다. 그리고 특히 본문의 혼인잔치 비유는 복음을 무시해버린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죄상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마 21:45).
예수님의 지상 봉사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21장은 극적인 사건과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인간의 어두운 마음과 가장 분명한 진리도 볼 수 없도록 눈멀게 하는 사탄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주셨던 모든 증거들을 목격하고서 어떻게 당시의 지도자들은 그토록 무감각하고, 분별력이 없었을까? 하지만 우리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빛을 받은 재림교인으로서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때때로 우리도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냉담하지 않는가? 특별히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죄와 욕망과 세속적 관심이 진리와 상충될 때 더욱 그렇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다. 이 말은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얼마나 조심해야겠는가?
마태복음 21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절은 마지막 두 절이다. 백성들은 그분의 기별을 듣고 자신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차렸다. 자칫 완전히 놓칠 수 있는 사실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을 체포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를 가로막은 것은 예수께 모여든 백성들이었다. 소위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되어야 할 자들이 가장 열심히 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결국 나중에 깨닫겠지만 그때는 너무 늦지 않겠는가?(롬 14:10).
교훈: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부가적용)
마태의 비유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예복 비유’가 잔치비유에 첨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초대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무차별한 초대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오해, 즉 마치 부름 받은 자들의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마태의 삶의 자리에 연관시켜 해석한다면, 마태가 보는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선교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즉 ‘누구나 오라’는 외침과 함께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만나는 대로’ 교회로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한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믿으라는, 오라는 부름을 받고 교회 안에 몰려온 많은 이방인들이 마음의 준비 없이, 도덕적 결단 없이 믿음에 합당한 열매도 없이 교회 생활을 계속하는 일종의 도덕 부재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음의 준비 없이, 도덕적 결단이나 변화 없이 교회 생활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경고로써 ‘예복’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과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된 벤 자카이의 비유 가운데서도 정결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잔치에 용납되지 않고 있는데, 랍비의 비유에서는 이 정결한 옷이 특히 ‘회개’를 의미하고 있다. 결국 마태도 그와 비슷한 관심 가운데서 각계각층 여러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집합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도덕적으로 훈련시켜야 할 상황 속에서 선행과 회개 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그의 글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영감의 교훈 •�
▶ 지도자들을 침묵시키심
“그분은 이전에도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지만 이와 같이 엄숙하고 감명적인 방법으로 행하신 적은 전혀 없었다. 그분의 놀라운 일을 목격한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감히 공공연하게 그에게 대한 적개심을 나타낼 수 없었다. 비록 예수님의 대답으로 분노하고 당황했을지라도 그날에는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시대의 소망, 593).
둘째날(월)
6월 6일 왕의 초대
도입)
왕의 초대에서 보듯이 기독교의 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는 음울한 종교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초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초청은 매우 기쁜 일이며 그리스도의 종교는 매우 행복한 경험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참 기쁨에로 초청을 받는 것이라서, 그 초대를 거절하는 자는 이 복음의 기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처음 한국에서 시작했을 때, 유교문화에 젖어 있는 분들이 목사님이 되어 써놓은 글들이 있다. 거기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많은데, 그 중에 불교는 상갓집과 같다고 비유를 하고 있는 글이 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생무상'을 말하고 있으니 상갓집과 같다는 것이다. 다 죽고 다 없어진다 하니 죽음의 종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유교는 마치 제삿집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밤낮 효도한다고 하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유교는 일 년에도 수차례 제사만 지낸다. 유교의 가르침대로 살다보면 일 년 내내 제사만 지내기 십상이다. 제사 지내는 일에 정성을 다하니 유교는 제삿집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고 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고 '희락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인간에게 행복과 기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일반적인 혼인 잔치와 왕이 베푸는 혼인 잔치는 차원이 다르다. 왕자의 혼인 잔치에 왕으로부터 초대 받았다면 그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계 12:2, 9, 엡 5:21~23).
마 22:1~8를 읽어보라. 왕이 어떻게 모든 것을 준비했는지 보라. 그는 결혼식을 계획하고, 만찬도 준비했으며, 소와 살찐 짐승도 잡았다. 정말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라는 것이 기별이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제공된 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초청을 무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자들은 그것을 가볍게 여겼다. 즉 그들은 초청을 심각하고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요구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여러 이유를 들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길로 갔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좁다고 말씀하셨다(마 7:14). 사람들은 초청을 거절하거나 기피하고자 온갖 핑계를 댄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유혹이 핑계거리이다. 결국 일부는 초청을 무시하고, 어떤 이들은 초청하러 나아간 자들을 핍박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을 “합당치” 않다고 선언한 왕의 말을 깊이 생각하라. 죄의 보편성과 인류의 죄성에 비춰볼 때, 우리는 왕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가 정말 왕의 잔치에 초대받기에 합당한가? 결론적으로, 성서적 의미에 있어서 “합당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들에 기인한다. 우리의 합당함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할 때에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들 속에 있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분의 초청에 응하며, 그분이 준비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가적용)
왕이 종들을 보내어 저자거리에서 잔치 자리를 채울 사람들을 청한 것은 문호개방의 비유이다. 즉 죄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든지 제한이 없이 문호를 열었다. 누구나 다 환영이나 천국의 잔치에 올 수 있지만 오는 자들은 그들에게 준 사랑에 맞는 생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은혜는 은혜일뿐 아니라 은혜에 따른 큰 책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왕이 요구하신 예복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이 천국의 잔치를 연 대표적인 장소이다. 교회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도록 문을 여셨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누구에게든지 구원의 문호를 열어놓은 곳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일이 있다. 이 교회는 그동안 내가 세상에서 입고 살았던 옷과는 다른 옷을 입도록 요구하고 있다. 구원의 잔치 그리스도와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혼인에 필요한 예복을 요청하셨다. 왕에게 초대된 손님들이 혼인잔치를 참석하게 되면, 각자 예복을 선물로 나누어 받게 된다. 물론 잔치에 참석하기 전에 초대 손님들의 집으로 미리 예복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예복을 받은 손님들은 다 그 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여 주인에게 예의를 표하며 축하했다. 만일 손님이 예복을 입지 않거나,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대강 걸쳐 입었을 경우에 그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었으며 곧 잔치에서 쫓겨났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왕의 잔치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했을 때는 처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영감의 교훈 •
▶ 가치관의 문제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거절하기 위하여 그들이 댄 모든 핑계는 오늘날 복음의 초청을 거절하는 모든 핑계의 기초가 된다. 사람들은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저희의 세속적 번영을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희는 세속적 이익을 영원한 사물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실물교훈, 224).
셋째날(화)
6월 7일 잔치에 온 사람들
도입)
당시 문화는, 왕실이나 고위 관료, 부자들이 잔치를 배설할 때 미리 종들을 보내어 하객들의 참석 의사를 타진하고, 당일 날 입을 예복을 미리 선물했다고 한다. 그 외 예복이 미리 전달이 안 되는 경우에는, 잔치 장소 입구에서, 종들이 예복을 미리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불러들였다. 그래서 결혼 잔치 마당은 잔치 손님들로 가득 찼다. 마22:10 왕의 혼인잔치에는 선인, 악인 구분 없이 모두 다 초대되었다. 실제로 교회 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을 볼 때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만 골라서 모인 곳이 결코 아니다. 교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예복’이 주어졌듯이,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칭의’가 주어진다. 어떤 사람은 유난히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좀 마음껏 과시하고 싶은데 잔치자리에 예복을 입으라고 하니.. 사양한 것이다. 자기 옷이 더 고급스럽고 좋다는 것이다. 본문의 메시지는, ‘자기 공로를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새 옷’, 즉 칭의를 힘입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의 고급 옷(자기 공로)으로는, 천국 잔치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
초청이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왕은 다른 종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마 22:9)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가서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기 때문이다(마 22:10).
비유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라(마 22:9~14). 혼인 잔치에 온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가장 비열하고 혐오스럽고 못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리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또는 매사에 비판적이며 비난을 일삼고 위선적이고 정말 사악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서 구원의 약속을 주장하고 구원을 확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어 주 예수께 대한 충성심으로 원정길에 약탈과 강탈을 일삼았던 십자군의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떤 목격자는 “우리 군대는 이교도들을 냄비에 삶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꼬챙이에 찔러 구워먹었다.”고 했다. 어떻게 이처럼 무시무시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대가 어떻게 그들의 동기와 관습과 기회를 판단할 수 있는가? 혹시 그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처럼 용서와 은혜의 약속을 주장하며 회개하지 않았을까? 경건한 줄 알았던 사람이 저지르는 끔찍한 행위들은 또 어떤가? 우리가 누구관대 마음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롬 14:10, 히 10:30, 전 12:14, 단 7:9, 10). 재림교회는 이것을 “조사심판”이라 부르는데, 이 비유에는 그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교훈: 우리의 사명은 악한 이와 선한 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다.
부가적용)
나는 저 인간들 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하다가는 ... 쫓겨날 가능성 크다. ‘나보다 더 깨끗하고 잘난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다가는... 예복을 못 입는다. 왕이 주신 예복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그 잔치에 있지 못할 것이다. 이 잔치에 대한 해석으로 이 예복을 실천적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대포적인 성경절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였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더라 하더라” 계19:7. 이 예복이란 예수님의 입혀주시는 칭의를 말함인가? 아니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말하는 것인가? 위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둘 다 맞다. ‘예복’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칭의’를 뜻한다. 그러면서도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옳은 행실’을 반드시 나타내게 된다. 다음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행실) 엡4:22~25
•영감의 교훈 •
▶ 초청의 대상
“복음의 초청은 온 세상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계 14:6)에게 주어지는 기별이다. 경고와 자비가 섞인 마지막 기별은 그 영광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해야 한다. 이 기별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실물교훈, 228).
넷째날(수)
6월 8일 옷을 입지 않음
도입)
교회에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은 죄인이 들어와 죄인으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교회는 죄인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는 철공소와 같다. 롬 13:14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情慾)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圖謀)하지 말라 교회에 들어온 이상 우리가 갈아입어야 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살던 방법으로 세속의 옷을 입고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방법이다. 에베소서 5장8절에 보면 “너희는 전에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두움에 속한 죄된 생활을 버리고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우리의 삶이 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다 못된 사람들이라고 지탄을 받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할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마 22:11).
비유에서 옷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옷을 거절한다고 그것을 영생 혹은 영멸의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믿지 않은 한,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순간 가라지와 곡식(마 13:24~30),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마 25:1~13), 충실자와 불충실한자(마 25:14~30), 의의 옷을 입은 자와 입지 않은 자(마 22:1~14) 그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끔찍한 일들을 자행했던 자들을 구별해 내실 것이라는 사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특별히 내가 아닌 타인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는 종교라면 우리와 동일한 구원의 약속을 주장하는 모든 자들 가운데서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일종의 최종적인 판정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구원이 순전히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간단하게 우리의 행위를 종합하면 된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를 위해 행한 타인의 공로를 믿음으로, 우리가 아닌 타인에게 있는 의를 믿음으로 결정된다면 문제는 더욱 미묘하고 까다로워진다. 그래서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하는 종교보다 이런 종교는 전혀 실수해 본 적이 없는 분에 의한 심판이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판단 기준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은혜로 제공해 주신 의의 두루마기를 각자가 입고 있는지 안 입고 있는지 볼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언젠가 믿음을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 진짜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과 입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실 것이다.
부가적용)
황의성이란 사람은 소년 시절부터 절도와 폭력, 강도, 강간 등 닥치는 대로 죄를 저질렀던 사람이고, 교도소도 여러 번 드나들었다. 12월 어느 날, 7개월의 복역 잔류 기간을 앞두고 안양 교도소로 이송되는 상황이 생겼다. 새롭게 지정된 감방에 들어가니 고참들이 고통을 주기 시작했고, 화가 난 황의성 씨도 육탄전으로 맞섰지만, 그때마다 눅실하게 맞고는 분을 삭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 안에 변기통 옆에서 한 죄수가 그들의 싸움을 보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를 마친 그 사람은 눈물도 닦지 않은 채 황의성 씨의 피를 닦고 간호를 해주었다. 그때 황의성 씨의 가슴은 마치 불덩이가 날아와서 불을 붙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로부터 황의성씨는 착실한 신자 죄수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황의성 씨가 변화되는 모습을 본 교도소 측에서는 3개월을 앞당겨서 출소시켜 주었고요, 이후 그는 날마다 427장 찬송을 3~5번 불렀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내게 계시네] 라는 책도 냈다. 이렇게 성령은 위력 있는 불씨라서 한 죄수의 마음을 태우고, 그로 하여금 영혼 구원 역사에 동참케 한 것이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빛을 입고 살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다.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옷을 입는다. 군인은 군복을 입는다. 학생은 교복을 입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연주복을 입는다. 백화점은 특별한 디자인의 옷으로 자기를 구별한다. 옷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레스토랑 중에는 정장을 입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있다. 물론 거기에는 자기들만의 하이클래스(고급)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즐기려는 의도도 있지만 어쨌든 옷을 통해 동질성을 누리려 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왕의 예복을 입는 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닮은 동질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음식은 원하나 예복은 원치 않는다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복음의 축복과 특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품성의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실물교훈, 315).
다섯째날(목)
6월 9일 조사
도입)
사람이 어느 좌석에 나타날 때의 차림새는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친구의 잔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노동복으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친구가 우리의 옷에 관계할 바는 아니나,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이 차리고 가는 것이 친구에게 대한 대접이요, 친구의 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의복과 사랑의 예복을 갈아입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겉옷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옷도 갈아입고 정결한 모습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할머님이 교회에 다녀와서 손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목사님의 성경 말씀이나 설교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예배는 참 잘 보고 왔다”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손자 녀석이 “할머니는 엉터리 신자예요”라고 말을 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손자에게 뽀얗게 먼지가 쌓인 망태기를 주며 개울가에 가서 물을 담아 오라고 하였다. 한 참 후에 손자는 물에 씻겨 깨끗해진 망태기를 내밀곤 망태기 어떻게 물을 담느냐고 투덜댔다. 할머니는 “물을 담아오지는 못했지만 망태기가 깨끗해진 것처럼 비록 내가 지식을 얻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은 깨끗해졌다”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는 말씀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 지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갈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입은 첫째가 침례를 받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답게 우리의 삶에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8절에 보면 “너희는 전에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어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믿지 않은 한, 그분의 의를 실제로 입은 사람과 단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구별이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것이 이 비유가 다루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전 12:14과 고전 4:5을 마 22:11에 비춰보라. 대쟁투(계 12:7~9, 벧전 5:8, 욥 1~2장)와 대쟁투에 대한 전 우주적 관심(단 7:10, 고전 4:9, 엡 3:10)을 알고 있는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딤후 2:19의 말씀을 기초로 행위에 대한 조사심판 개념이 비성서적이라는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러나 우리와 나머지 우주는 아니다.
생각 속에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온 우주가 죄와 반역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의롭고, 공정하게 다루시는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어떤 종류의 심판이든 조사를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창 3:9~19을 보라. 죄가 들어온 직후, 하나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물으시며 바로 인간의 문제에 개입하셨다. 이 “조사”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들이 한 일의 중대함을 알게 하시고자 한 것이다.) “조사심판” 역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조사는 하나님께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다른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창세기의 이 심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형선고를 능가했던 것처럼(창 3:15 참고), 은혜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가 현재이든 최후의 심판 때이든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그분의 은혜가 부어질 것이다.
교훈: 조사 심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온 우주를 위한 것이며,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부가적용)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은혜의 시기라고도 하고 조사심판 때라고도 말한다. 조사심판은 죽이는 심판(집행심판)이 아니요, 살리는 심판이다. 어떠한 사람이든 즉 강도 짖을 했던지 살인을 했던지, 어떤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개인의 아버지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말끔히 씻어 의인으로 하늘에서는 간주된다. 아버지 앞에 예수님이 중보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였다. 그의 중보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된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원수가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의 사랑 많으신 아버지로 다가선 것이다. 죄는 말끔이 씻어졌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 죄에서 해방이 된다. 과거의 죄, 지금의 죄, 앞으로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다고 해서 죄를 또 져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인과 악인은 그들의 생활 상태 그대로 여전히 세상에 살면서 하늘 성소에서 철회할 수 없는 마지막 결정이 내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밭 갈고 집짓고 먹고 마시고 할 것이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는 그를 배 안에 두고 경건치 못한 자들은 배 밖에 두신 채 문을 닫으셨다. 7일 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을 모르고 경솔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또한 임박한 심판에 관한 경고를 조롱하였다. 구주께서는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고 범죄한 인류에 대한 은혜의 초청이 철회되는 마지막 시간은 밤중에 도둑이 오는 것처럼 가만히 눈에 띄지 않게 올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5, 36)). 깨어 있기를 소홀히 하고 세상의 매력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는 자들의 상태는 참으로 위험하다. 사업가가 이득에 마음을 빼앗기고, 향락을 즐기는 자가 방종을 구하고, 유행을 따르는 자가 몸을 단장하기에 겨를이 없을 바로 그때, 온 세상의 심판관 되신 예수님께서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단 5:27) 라고 선고하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온 우주가 주목하고 있음
“지금은 우리의 믿음을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이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는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마지막 일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바야흐로 시작되려고 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야망이 마음을 점령하도록 허용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하늘의 하나님께 충성되고 진실한 것으로 판명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교회증언 5권, 526).
예비일(금)
6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307~319 “예복을 입지 않음.”
“구속의 경륜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만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이 작은 세계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대로 생각하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시기 위해서였다”(실물교훈, 68).
“사단은 그 때에 파멸되지 않았다. 천사들은 그 때에도 대쟁투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깨닫지는 못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원칙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야만 했다. 인류를 위해서도 사단은 계속 존재해 있어야 했다.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영광의 왕과 흑암의 왕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알아야만 한다. 인류는 자기가 섬길 자를 선택하여야만 한다”(시대의 소망, 76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만행들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이용하여 끔찍한 죄악을 가리고 정당화시켰는지 생각해봅시다. 이런 불행한 사실들을 볼 때,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에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➋예수님은 혼인 예복에 대한 비유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마치셨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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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님의 댓글
한마음 작성일
수고하셨습니다.
말씀감사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