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핵심Q&A)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4-17 15:40 조회2,754회 댓글0건첨부파일
- -제4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이봉주 장로-07.hwp (27.0K) 24회 다운로드 DATE : 2023-04-17 15:40:33
본문
제4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榮光)을 돌리라
(4월 22일 (안) / 일몰: 오후 7시 13분)
<기억절(記憶節) >
“성도들의 인내(忍耐)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誡命)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서언(序言)>
◎.첫째 천사의 기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기별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호소(呼訴)로,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오직 그분만 경배하라는 호소(신 6:13, 17, 10:12-13, 13:4)를 분명히 반향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命令)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本分)이니라”(전 12:13)는 말씀을 반복(反復)하고 있다.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가납 여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전 12:13-14, 롬 14:10, 고후 5:10).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숭배심(崇拜心)과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接近)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충성, 그의 뜻에 온전히 복종(참조 신 4:10 주석)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삶속에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삼상 12:14, 대하 6:31, 시 40: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후속(後續) 결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그는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을 지킴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요 15:8, 17:4, 고전 6:19-20).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 이 둘은 항상 나란히 간다(신 5:29, 시 112:1, 렘 44:10, 전 12:13).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계 14:12).
4월 16일(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Q)―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명령(命令)의 첫째천사의 기별(奇別)의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계시록 14:7, 히 7:25 참조) 반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사 14:13, 14)
-(A)―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의미(意味)로 사용되지 않고 숭배심(崇拜心)과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접근(接近)한다는 의미(意味)로 사용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絶對的)인 충성(忠誠)으로 그의 뜻에 온전히 복종(服從)함을 의미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傾聽)하며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中心)에 (첫째 자리로) 두고 순종(順從)여 실천(實踐)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루스벨의 정신(精神)으로 하나님과 동등(同等)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보다 자신의 주장과 사상(思想)을 마음의 중심에 둔다는 의미(意味)이다.
4월 17일(월)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고 순종(順從)하기
.
-(Q)―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태도(態度)의 삶을 영위(營爲)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신명기 6:2, 시편119:73~74, 전도서 12:13~14)
-(A)―사람들이 올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나에게 필요한 예수”를 만들어 내어 숭배(崇拜)의 대상으로 우상화(偶像化)하여 마음의 안위(安慰)로 삼아 성경의 원칙이 아닌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사는 자들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眞理)의 근본(根本)이 되시며 진리의 모든 원칙(原則)이 되시는 성경의 본 바탕이 되시며 그 자신을 담고 있으신 성경의 본체(本體)이신 예수님은 성육신(聖肉身)하신 진리(眞理)이시며 살아있는 원칙(原則)이신 그분만을 경외(敬畏)하고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能力)을 나누어 주시는 분임을 확신할 때 경외심(敬畏心)이 나오고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정답이라고 알고 믿는 것을 말한다.
4월 18일(화) 하나님 중심(中心)의 생활(生活)
-(Q)―하나님을 중심(中心)으로 삼고 사는 삶이란 어떠한 삶을 의미(意味)하며, 요한계시록의 세천사의 기별과 어떠한 관련(關聯)이 있습니까? (마태 6:33, 빌 2:5, 골로새서 3:1~2, 히브리서 12:1~2)참조
-(A)― 생각하는 것은 말을 하게 되고 말한 것은 행동으로 옮기게 되며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을 반복하면 품성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듯이, 생각 즉 마음의 중심은 굉장히 중요하다. 흔히 세속적(世俗的)가치(價値)로 자아중심(自我中心)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땅의 것을 만족(滿足)”으로 각종 취향(趣向)에 따라 자아 만족과 결국은 쾌락(快樂)의 자기중심(自己中心)의 삶을 추구(追求)하는 삶이다. 그러나 “위의 것”을 추구(追求)하는 삶이라 하나님 중심의 삶인데 이는 예수님을 인생의 진정(眞正)한 중심으로 영원한 삶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삶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 중심의 삶은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禮拜)와 헌물(獻物)과 봉사(奉仕)로 반응하게 된다. 즉 <이 마음을 품으라는 문자적으로 “이것을 생각하라”이지만 “이 마음을 가지라”를 의미(意味)한다.>
4월 19일(수)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라
.
-(Q)― (요한계시록14:7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호소(呼訴)는 어떤 맥락(脈絡)을 포함(包含)하고 있습니까? (계 19:1~2, 로마서12:1~2, 고전3:16~17, 고전6:19~20, 고전10:31절 참조)
-(A)― (요한계시록14:7절)에서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라는 호소(呼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으로 예배(禮拜)를 통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섬김을 통해서 복음을 전(傳)함으로(전도(傳道))등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성전(聖殿)이 되는 존재(몸과 마음과 정신)를 깨끗게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성경(星鏡)에서 하라고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한 것은 하지 말고 먹으라 한 것은 먹고 먹지 말라 하는 것은 먹지 말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하나님의 심판(審判)의 매우 합당한 삶이될 것이다.
4월 20일(목)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자들
.
-(Q)― 이겨내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고 “그에게 영광(榮光)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意味)이며, 선악(善惡)의 대 쟁투(大爭鬪)에서 승리(勝利)하게 하는 핵심적(核心的)인 요소(要素)는 어떤 것입니까? (계 14:12, 히브리서4:14~16, 7:25절)
-(A)― 요한계시록의 주제(主題)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세천사의 기별이며 세천사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은혜(恩惠)와 능력(能力)과 승리(勝利)의 기별(奇別)이며 그 기별은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예수그리스도의 능력(能力)과 이를 믿는 백성에게 대한 승리(勝利)의 기쁘고 복(福)된 소식(消息)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誡命)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이 곧 이기는 비결(秘訣)인 것이다.
------------<말미부록(末尾附錄)>---------------------
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알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원고 16, 1890). (계 14:7, 화잇주석)
⑵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기별은 특히 이 천사의 전파에 의해 묘사된 기간에 시의적절(時宜適切)한데, 이는 사람들이 물질주의(物質主義)와 쾌락(快樂)의 신(神)들 그리고 자신들이 고안(考案)한 많은 다른 것들을 경배(敬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4:7, 화잇주석)
⑶
두려워하며.
헬라어 포베오(phobeo-),
“두려워하다”, “숭배하다.” 이곳에서 포베오는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숭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충성, 그의 뜻에 온전히 복종(참조 신 4:10 주석)함을 의미한다.(계 14:7, 화잇주석)
⑷
(빌 2:5) 겸손한 자를 위한 빛(요 8:12)(딛 2:10 참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만약 그대가 온전히 겸손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 버려둠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생명의 빛을 갖게 될 것이다. (청년 지도자 1892. 10. 13).
⑸
사치와 안일과 이기적 쾌락이나 방종은 그의 생애에서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생애는 계속적인 자기 부정과 자아 희생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의 비천한 출생과 걸맞게 높은 지위나 부유함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 이는 가장 비천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결코 고통스러운 가난의 아픔을 모르실거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하려 함이었다. 그가 만약 뛰어난 외모나 부유함이나 위대함을 갖고 있었다면 가난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분이 창달하는 사회를 회피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조건인 가난을 택하셨다. (원고 9, 1896).
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알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원고 16, 1890). (계 14:7, 화잇주석)
⑺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후속 결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그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요 15:8, 17:4, 고전 6:19-20).
⑻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 이 둘은 항상 나란히 간다(신 5:29, 시 112:1, 렘 44:10, 전 12:13).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계 14:12).
(계 14:7, 만나주석)
⑼
그리스도 예수.
이 이름의 통상적인 순서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바울은 특히 이 편지에서 자주 이러한 순서로 사용하였다(3:3, 8, 12, 14; 4:7, 19, 21).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구주의 신(神)·인(人) 본성(本性)에서 인간적(人間的) 요소(예수)에 앞서 신적(神的) 요소(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듯하다. 바울은 모든 영적 생애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으며, 연합(聯合)과 겸손(謙遜)의 교훈(敎訓)을 심어주기를 원할 때 그가 바라는바 빌립보인들이 소유하기를 바라는 미덕(美德)의 최고 예증으로 자기 주님의 생애를 개괄적으로 제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어 나오는 장엄한 설명(2:6~8)에서 그는 학문적 의미에서의 신학을 의식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예증하고 그가 회심시킨 자들에게 주를 닮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자신의 영감적이며 정통한 이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떠나 가장 비천한 형태의 인성을 취하였으며,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장 천한 임무를 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대한 모본을 따라 그들의 삶의 구조를 꼴 지어야 한다. (빌 2:5, 재림교주석)
⑽
그리스도의 비천(卑賤)한 생활환경(요 1:1-3,14; 히 2:14-18)(막 16:6; 눅 22:44; 요 10:17, 18; 롬 5:12-19; 고후 8:9; 딤전 2:5; 히 3:1-3 참조)
그리스도께서 몸을 낮추사 지극히 높으신 자리를 떠나셔서 인성을 쓰실 때 그는 어떤 조건을 갖춘 인간의 자리라도 마음대로 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크게 되는 것과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한 삶의 길을 택하였다. 그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었고, 그의 부모님은 가난하였지만 세계의 소유주이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였다.
⑾
믿음은 보이는 증거에 의거한 것이 아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떠나 죽음을 당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는 천사들 중 어떤 천사보다도 더 컸었다. 그는 위엄이 있고, 매력적인 모습을 갖고 계셨다. 그러나 그분의 봉사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보다 약간 컸다. 만약 그의 고상한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사람들 사이에 오셨더라면 그의 외모가 사람들을 사로잡았을 것이요, 사람들은 믿음을 활용할 필요도 없이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⑿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은 보이는 증거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개인적인 매력 때문에 그를 믿었지만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사람 속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가 없고 발견되지도 않는 그의 탁월한 품성 때문이었다. (2예언 39).
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비밀(골 2:9; 엡 3:9; 벧전 1:11, 12)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인성의 옷으로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천사들은 신성의 능력이 인간에게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가리우신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죄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그의 피로 사신 것을 사랑하셨다. 그는 죄인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그들을 자신과 연합시키셨다.(빌 2:5, 화잇주석)
⒁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비밀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타락한 세상에서 사시고 일하실 수 있었는지를 알기를 원하며, 그가 어떻게 죄 많은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질 수가 있었는지를 알고자 한다. 강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죄를 미워하셨던 그가 죄를 범한 인간들에 대하여 가장 부드러운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는 것이 천사들에게는 신비로운 일이었다. (사인즈 1898. 1. 20).
⒂
설명할 수 없는 두 속성의 연합(골 1:26, 27)
만약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과 융합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의 지상 봉사 기간 동안에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계가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놀라운 신비를 명확하게 밝힐 수가 없다. 그 신비란 두 속성 곧 신성과 인성의 융합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인간은 경탄하고 그리고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도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이 방법으로 인간은 어느 정도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다. (편지 5, 1889).
(16)
하늘이나 땅에서 가장 경이로운 일―
연구해 볼만한 깊은 문제를 원할 때 하늘이나 땅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 곧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켜 보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주셔서 죄로 가득찬 인간을 위하여 수치와 능욕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다. 하늘 궁정에 크신 사령관이셨던 그분이 하늘 왕의 옷과 왕관을 벗으시고 그의 신성 위에 인성의 옷을 입으시고 모범 인간으로서 인류의 선두에 서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인류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고난을 겪으시기 위하여 친히 몸을 낮추신 것이다. (빌 2:5, 화잇주석)
(17)
전 세계가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기 때문에 그가 땅에서 봉사하시는 중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지만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하셨다(히 2:14-18 인용)(원고 76, 1903)
(18)
모든 율법을 초월하여 계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속죄 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자원해서 오셨다. 의무적으로 져야하는 멍에는 그에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독립적, 자존적 존재였고 모든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빌 2:5, 화잇주석)
(19)
천사들은 지성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의무에 복종하고 있었고, 어떤 천사의 개인적인 희생도 타락한 사람을 구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가 있었으며, 죄 많은 인류의 구속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었고, 버린 것을 다시 취할 권세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이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을 강탈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흠정역](안교 1906. 9. 4).
(20)
그리스도의 인성은 황금 사슬(출 3:5)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들과 그리스도를 묶는 사슬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묶어놓는 황금 사슬이다. 이것이 우리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진짜 사람이었고, 그가 사람이 되셨을 때 겸손의 증거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체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셨다.(빌 2:5, 화잇주석)
(21)
우리는 인성의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제목에 접근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하신 다음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가 이 제목을 연구할 때에는 배우는 자의 겸손함과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 가야 한다. 그리고 성육신의 연구는 열매가 풍성한 밭이며, 깊이 파고 숨은 보물을 찾는 탐구자에게 풍성하게 보답할 것이다(원고 67, 1898).
(빌 2:5, 화잇주석)
(22)
첫째 천사가 외친 ‘심판의 시간이 왔다’는 달리 말하면 ‘심판이 시작되었다’라고 외친 것을 본 것이다. 즉 ‘수업 시간이 되었다’는 말은 ‘수업이 시작되었다’는 말과 같다.
요한계시록 14장의 문맥에서 첫째 천사의 기별은 세상의 끝 즉 재림의 때에 관한 묘사가 아니다. 오히려 재림 전에 있을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 전에 이미 이르러왔고 그래서 시작된 심판은 어떤 심판인가? 성경 원문은 재림 전에 있는 조사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은 재림 전에 조사(심리)를 위한 심판이 시작되어 세상 끝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는 최후의 심판(집행심판)의 날까지 외쳐지는 기별이다.
(23)
첫째 천사의 기별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가납 여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전 12:13-14, 롬 14:10, 고후 5:10).
(24)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심판은 복음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기쁜 소식이다. 이미 순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판의 때가 속히 오고, 이어서 부활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사탄의 정죄 또는 고소(告訴)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은 복음이다.
(25)
간음한 여자가 예수님 앞에 끌려온 사건은 심판이 복음임을 증언하고 있다(요 8:3-11). 여자가 잡혀 끌려와서 예수님 앞에 세움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는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사탄이 죄인을 고소하고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다. 그 여자는 심판을 통하여 정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는다.
(26)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이 구절은 경배의 대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4째 계명과 연관이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출 20:8-11). 이것은 최후의 위기 가운데서 안식일이 쟁점의 필수부분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7)
결론적으로, 첫째 천사의 기별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호소,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오직 그분만 경배하라는 호소(신 6:13, 17, 10:12-13, 13:4)를 분명히 반향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는 말씀을 반복하고 있다.
(28)
“제칠일의 예배뿐 아니라 모든 예배의 진정한 기초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하는데서 나타나게 된다. 이 큰 진리는 결코 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이 진리를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진리가 존속하는 한 안식일도 또한 그 증거와 기념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만일 인류가 오늘날까지 안식일을 지켜 왔을 것 같으면 그들의 생각과 애정이 창조주께 집중되어 주님께서는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 되셨을 것이며 우상 숭배와 무신론자와 회의론 자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안식일 준수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참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기별은 인류에게 특별히 넷째 계명을 지키라는 요구가 될 것이다.” (각 시대의 대쟁투, 437-438) (계 14:7, 만나주석)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