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질문, 대답, 설명) 04/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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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4-14 21:59 조회5,789회 댓글0건본문
제4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4월 2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13분)
연구 범위: 계 14:, 창 22:12, 전 12:13, 14, 골 3:1, 2, 히 12:1, 2, 고전 3:16, 17
기억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덴마크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종말을 이렇게 비유했다.
큰 극장 무대 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공연에 참여했던 광대가 나와서 청중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모두 나가세요. 불이 났습니다!” 청중은 그것이 단지 대단한 농담이거나 실감 나는 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박수를 보냈다. 그는 경고를 반복했다. “나가세요! 나가라구요!"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더 강력하게 경고할수록 박수는 더 커졌다. 키르케고르의 비유 속 세상은 농담과 착각, 그리고 박수갈채 속에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과 마지막 사건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코 농담이 아니다. 세계는 홍수의 때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홍수의 이야기를 종말의 상징으로 사용하여 옛 세상이 물로 멸망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천체는 불에 타서 녹아 버릴 것이며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했다(벧후 3:10, 현대인).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경고를 받았으므로 이제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를 참된 경배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 느끼기: 선과 악의 싸움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필요함을 느낀다.
- 행하기: 마지막 심판대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예수의 믿음을 가진다.
TMI 위로
2.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사 14:13, 14)
* 하나님과 동등하겠다는 사상으로 나타난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를 어떤 태도로 이끕니까? (신 6:2)
*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준행하는 태도로 이끈다.
4. 선악의 대쟁투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빌 2:5)
*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호소는 어떤 맥락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계 19:1, 2)
*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성도들을 신원하시는 것을 포함한다.
6. 선악의 대쟁투에서 승리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어떤 것입니까? (계 14:12)
*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7.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권면을 다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히 7:25 참조)
*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무서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탄에게 해당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그대의 존귀하신 하나님으로 선택하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충만한 기쁨으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편에 서라는 긍정적인 부르심이다.
4월 16일(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우리 세대를 위한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고 주님과 연합하여 그의 말세의 기별을 전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사탄의 계획을 폭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 곧 온 인류를 위한 긴급하고 영원하며 온 세계에 미치는 기별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 14:7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절박한 종말적인 호소를 읽어 보라. (창 22:12, 시 89:7, 잠 2:5, 전 12:13, 14;, 엡 5:21 참조) 그는 우리에게 어떤 구체적인 교훈을 주는가?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시89:7]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잠2: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전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답: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올바른 경배를 하라.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순복하라.
요한계시록 14:7에 “두려움”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포베오(phobeo)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경, 경외, 존경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 중심의 마음가짐은 이사야 14:13, 14에서 루시퍼가 그 마음에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라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정반대이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신(빌 2:6, 8) 그리스도의 태도이다. 대쟁투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 관한 것이다. 루시퍼는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 외에는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루시퍼는 보좌에 계신 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그 보좌에 앉아 통치하기를 원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 생각에서 그분을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자기중심과 교만을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세 천사 중 첫째 천사가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게 듣고 따라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를 경외하고 존경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뜻보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둔다는 의미이다.
<적용> 그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왜 좋은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긍정적으로 설명하겠습니까?
답: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이런 신앙생활은 영생의 소망을 이루게 되고 전능하신 분의 은총 속에 살게 된다.
<부가설명> ‘두려워한다’라는 말을 한자로는 ‘경외(敬畏)’라고 한다. 공경할 경자와 두려워할 외자이다. 이 말은 공포심을 가지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공경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그 공경하는 분 앞에서 가지게 되는 몸가짐에 관한 말이다. 옛날 왕 앞에 서면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지 않는가?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앞에 있을 때는 최대한으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것을 경외라고 하며 두려워한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사람에게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지녀야 하겠는가? 그것이 자연스럽게 경배하는 모습이 된다. 존경하는 태도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만나는지 그것과 비례하여 경외하는 태도를 나타낼 것이다. 첫째 천사의 기별은 이런 경외하는 삶이 핵심이 창조주로서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다. 재림교회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외하는 것이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임을 깨달은 교회다. 우리의 경외가 진실한 것이 되도록 하자.
4월 17일(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기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더 알아보자.
신명기 6:2을 읽어 보라. 시편 119:73, 74, 전 12:13, 14의 말씀들은 “하나님을 경외”한 결과가 무엇이라고 알려주는가?
[신6: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시119:73,74]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4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전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답: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를 순종으로 이끄는 경건한 존경의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하늘의 긴급한 호소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이다(엡 2:8-10). 은혜가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순종의 의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과거의 죄에서 건져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경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준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게 하였”(롬 1:5, 흠정역)다고 선언한다.
은혜로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하거나 순종의 필요성을 최소화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진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순종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율법주의라고 치부한다. 그들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뿐”이라고 선언한다. 어떤 예수를 말하는 것인가? 사람이 만들어낸 예수인가, 아니면 성경의 예수인가? 성경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가볍게 여기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결코 성경의 원칙을 축소하게 이끌지 않으신다. 성경의 원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과 세상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결코 그분의 가르침을 경건의 모양만 갖춘 공허한 이야기로 끌어내리게 하지 않으신다. 진리의 모든 원칙을 그 자신에 담으신 분이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진리이시며, 살아 있는 원칙이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호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이 주시는 모든 충만함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경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른다.
<교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영원한 복음은 우리가 경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나누어 준다.
<묵상> 마태복음 10:28의 말씀을 묵상해보십시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제공합니까?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답: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경외하라는 말씀이다.
<부가설명> 경외하는 첫 자세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다. 존경하는 분이 말씀하면 존경하는 마음과 자세로 귀 기울여 듣는다. 다음은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이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말씀이 생활의 지침이 된다면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것을 순종이라고 하는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생활의 길인 것을 깨달았기에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아가서 그 말씀 자체가 생명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지는 경험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경외는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아니 순종된다.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그리스도인 속에서 생명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말씀이 생활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쉬운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이 영생이라고 하셨다(요12:50).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이 삶이 되고 그것이 곧 삶의 길이된다. 이 길을 걷지 않으면 생명이 사라지게 된다.
4월 18일(화) 하나님 중심의 생활
세속적 가치가 자아를 중심으로 삼은 소비지상주의 시대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이 삶의 중심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쾌락이나 권력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스포츠, 음악 또는 오락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자기중심주의의 횡포와 자기중심적 우선순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생의 진정한 중심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영광을 돌리라고 호소한다.
마태복음 6:33, 골로새서 3:1, 2, 그리고 히브리서 12:1, 2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진정한 중심으로 삼는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히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답: 예수님을 바라보며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이 땅의 마지막 대쟁투의 중심 쟁점은 마음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에 대한 충성, 주권, 헌신에 대한 싸움이다. 대쟁투의 마지막 싸움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기 위한 선과 악의 대결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권면한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성채이다. 그것은 우리 행동의 원천이다. 빌 2:5의 “품으라”는 권면은 그것을 허용하거나 선택하는 자발적인 의지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위한 선택은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사물들로 채우시고 우리의 생각을 형성하실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사고방식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을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 일정 수준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생각해보라. 그러나 올바른 것(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 골 3:2)에 대해 생각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종종 타락하고 죄 많은 우리의 마음은 자연히 천한 것들, 즉 세상의 것들로 향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했듯이 신성한 선물인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기로 의도적이고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교훈> 하나님을 인생의 진정한 중심으로 삼으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기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영원한 사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묵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으라는 세 천사의 기별을 마음에 새겨 보십시오. 내가 그동안 잘못된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적용> 빌립보서 4:8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을 실행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빌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답: 생활에 드러나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첫째로 생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굴복해야 한다.
<부가설명> 바울은 자기 삶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갈2:20). 바울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같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바울은 빌립보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했다. 또한 바울 자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고백했다(고전2:16). 바울은 예수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고 했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으니 바울의 삶은 예수님의 삶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대로 그 사람 됨됨이가 이루어진다고 했다(잠23:7).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고 했다(잠4:23). 그래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키라고 권한다(고후10:5). 진정으로 거듭나면 생각이 영의 생각이 된다(롬8:5,6). 사람이 출생하면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생활한다. 가정이 생활의 근거다. 사람이 중생하면 그는 위에서 나는 자가 된다(고전15:47~49). 거듭난다는 말은 위에서 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온에 등록하신다(시87:6). 하늘 가족의 조언을 듣게 되고 하늘 가족의 삶을 살게 된다. 자연히 하늘 가족의 가장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이 땅에서도 그 말씀을 생활하게 된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는 것이다.
4월 19일(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흥미롭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계 14:7)는 표현에 대한 구약성경의 용례에 대한 연구는(다른 용례도 있지만) 이 표현이 첫째 천사의 기별(계 14:7)에서와 마찬가지로 종종 하나님의 심판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여준다(수 7:19, 삼상 6:5, 렘 13:15, 16, 말 2:2). 이 개념은 요한계시록 19:1, 2에서도 볼 수 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고전 3:16, 17, 고전 6:19, 20, 고전 10:31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답: 몸을 정결하게 관리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소요 하나님의 임재로 거룩하게 된 성전이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분명하게 요구한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실 때, 우리는 식단, 의복, 오락, 다른 사람과의 교류는 물론 그 모든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헌신을 통해 세상에 그분의 사랑의 품성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 땅의 마지막 심판의 때에 훨씬 더 중요하다.
로마서 12:1, 2를 읽어보라.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의 선택 전체에 관해 어떤 호소를 하는가?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답: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 구절에서 신체에 해당하는 신약성서 헬라어는 소마타(somata)인데, 이는 개인 존재의 총합(몸, 마음, 감정)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필립스역(The Phillips translation) 성경은 롬 12:1의 “합당한 섬김”(흠정역)이라는 표현을 “지적인 예배의 행위”로 번역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전적인 헌신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몸과 감정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로 지적인 예배의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비추어 볼 때 순종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교훈> 우리의 삶으로, 또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세천사의 기별은 마지막 심판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욱 중요한 기별이다.
<묵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심판의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심판대에서 어떻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생활한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적용> 자신의 몸(존재)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참으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성경과 증언의 말씀 대로 식생활하며 정결한 생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가설명> 심판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연결되어 기록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계시의 기록이다. 심판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것이 중심 사안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자기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그 행하시는 심판으로 자신을 알리시며, 악인은 스스로 행한 일에 걸려든다”(시9:16-바른성경). 그러므로 심판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심판하시므로 루시퍼의 거짓이 우주에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우주적인 찬양이 온전하게 된다. 그래서 심판과 하나님의 영광이 연결된다. 성경은 예수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기록하였다(행10:42, 딤후4:1, 벧전4:5).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것과 죽은 사람에 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일 수 있다. 그러나 또 심판에서 생명 있는 자와 생명 없는 자를 구분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설명의 배경은 민수기 16:47,48이다.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이 장면은 심판의 장면이다. 속죄받은 사람은 산 자가 되고 속죄받지 못한 사람은 죽은 자가 되었다. 그것이 확실히 구분 되었을 때 염병이 그쳤다. 생명이 있는 자는 생명이신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생명의 땅에서 살 것이고 생명 없는 자는 죽은 자의 땅으로 가서 완전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만이 충만할 것이고 성도들은 그 영광을 입고 영원히 살 것이다. 아멘.
4월 20일(목)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자들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계 14:12, 흠정역). 이것은 말세의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의 본문이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여기 "예수의 믿음"이라는 표현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가장 맹렬한 유혹을 이기실 수 있게 한 믿음의 품격이다. 믿음은 믿는 사람 각자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믿음을 행사할 때 믿음은 자란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력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한다. 우리의 됨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 것에 의지해서 승리한다.
그분이 극복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극복할 수 있고, 그분이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길 수 있으며, 그분이 유혹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에 우리도 유혹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히브리서 4:14–16과 히브리서 7:25을 읽어 보라. 이겨내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히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답: 그리스도인이 이기는 것은 예수께서 이기신 안에 있으므로 이긴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 이길 수 없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마귀의 간계를 이기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고 아버지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마귀의 시험을 마주하셨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믿으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이시며 세 천사의 기별은 모두 오직 그분에 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기별이며 그것은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으로 승리한 백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기다”라는 단어는 이런저런 형태로 요한계시록에서 11번 사용된다.
1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르는 기독교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교회의 이상에서 요한은 모든 세대에 이긴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 때에 “이긴 자”는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는다(계 21:7).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완전한 의로 완전한 삶을 사신 사실, 오직 그것만이 “이긴 자”들에게 영생의 약속을 주신다. 그것은 행동하는 믿음이며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적적인 은혜이다.
<교훈> 세천사의 기별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것이며, 예수님의 승리에 관한 것이다. 그 승리는 우리의 삶에 변화를 낳는 은혜와 능력의 원천이다.
<적용>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염원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이긴 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는 무엇일까요?
*답: 이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록해주신 말씀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계시록 2, 3장에는 교회마다 이기는 자가 있고 이기는 자에게 주는 상급이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스스로 이기기 위하여 대단히 노력하는 것 같다. 잘 하는 일이다. 힘쓰고 애써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해도 스스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12:4)라는 말씀을 따라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여 승리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승리했을 때도 문제가 생기고 패배해도 문제가 생긴다. 승리하면 ‘내가 이겼다’라는 마음이 생기고 패배하면 실망하게 된다. 죄와 싸울 때 우리는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죄를 이겼다.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히2:14). 예수께서는 선언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리스도인이 이긴 자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울 때 죄를 보지 않아야 한다. 눈을 예수께 돌려 그분의 이기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승리가 그 순간에도 성도의 승리가 된다. 일곱 교회마다 있는 이기는 자는 다 예수님의 이기심으로 그 이김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멘.
4월 2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히 7:25(흠정역)에서 주어진 바울의 놀라운 권면을 생각해 보라. “끝까지 구원하실 수”에서 “끝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완전한,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께 굴복하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표현은 당신을 영광스럽고 존귀한 하나님으로 선택하라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계획은 악의 세력을 이기실 것이다.(계 14:9-11) 이 두려움은 적어도 지금까지는(계 6:14-17) 공포와 떨림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에 대한 기쁨과 사랑의 복종으로 나타난다. 다른 어떤 권세도 그런 헌신과 충성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여겨질 수 없다. 사실, 다른 선택은 없다. 왜냐하면, 대쟁투의 전선에서 자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나타내 보이는 존재는 멸망하기로 예정된 악마적인 세력의 활동이기 때문이다(계 16:13, 14, 17:14, 20:11-15).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 속에 충만한 기쁨으로 그분의 가장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 서도록 우주적인 대쟁투에서 하나님 편에 서라는 긍정적이고 신성한 부름이다(계 21:3~4, 22:3~5).” (Angel Manuel Rodríguez, “The Closing of the Cosmic Conflict: Role of the Three Angels'Messages”, unpublished manuscript, p. 27; 이후 “앙헬 마누엘 로드리게스”로 표기)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매우 미미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우주를 창조하신 분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얼마나 더 위대하고 광활하며 더 전능하신지를 생각해 보라. 이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 사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개념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하나님은 절대로 옳으신 분이시기에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죄가 되어 심판으로 정죄된다. 그래서 그분을 경외하며 속죄 주 안에 있어야 한다.
2. 어떻게 하면 거룩함, 극복, 승리라는 성경적 개념을 논하면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의 승리(실패)와 관계없이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승리만이 구원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항상 지각(知覺)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진정한 중생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면 당연히 이루어진다.
3. 죄에 대한 승리의 모든 약속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본을 보이시고 할 수 있다 약속하신 의의 표준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자주 실패하는 것인가? 주께서 약속하신 일을 행하시도록 허락하지 않음으로 어떤 실수를 범하고 있는가?
*답: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에 자주 굴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손에 자아를 더욱 맡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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