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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복음의 통일성(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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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10-09 09:30 조회4,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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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복음의 통일성

10월 1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6분

도입)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교회라는 단체를 손수 만들어 주셨다. 가정과 교회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 됨의 원칙이 필요하다. 이 하나 됨의 원칙이 깨어지면 불화와 원망과 불평이 찾아온다. 그래서 기억절의 말씀에선 한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한 마음을 품고 있을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평화가 깨어지는 본질의 원인은 상대적인 우월감 때문이다. 부부 싸움도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고 틀렸다는 생각 즉 내가 더 잘 났다는 생각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 17:1절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엡 4: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권면한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힘써 지키라는 말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시고 뜻을 합하여서 한 마음을 품게 하지 만, 마귀의 사역은 우리를 미혹하여서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 성도들을 서로 이간시켜서 불신하게 만든다. 그래서 벧전 5:8절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기억절: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 2:2).

연구 범위: 갈 2:1~14, 고전 1:10~13, 창 17:1~21, 요 8:31~36, 골 3:11.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은 분리와 불화는 교회를 해하기 위해 마귀가 즐겨 사용하는 도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분리주의를 전염병처럼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
했다.
그러나 진리를 버리면서까지 연합을 추구해야 할까?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보름스 의회에 회부되었을 때, 연합이라는 미명 아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신념을 철회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라.
“만일 개혁자가 단 한 가지 점에서라도 타협하였더라면 사탄과 그의 부하들은 승리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는 교회를 해방하는 방편이 되었고 새롭고 더욱 좋은 하나의 기원(紀元)을 이루어 놓았다”(각 시대의 대쟁투, 166).
갈 2:1~14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연합을 깨려는 일부 신자들의 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사도 바울을 본다. 그러나 연합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연합을 얻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통일성 가운데서도 다양성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복음은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결론: 믿음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눈을 멀게 했던 유대인 전통을 따름으로써 교회는 복음의 의미를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첫째 날(일) 10월 9일
연합의 중요성

도입)
바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친교의 악수’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넓은 마음과 열린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오직 예수님이만이 구원의 진리라는 믿음을 굳게 잡고,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친교의 악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생각과 신념에 사로잡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상식을 벗어나는 천박한 신앙인의 삶을 우리가 살아서는 안된다. 중세시대에는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수없이 많은 학문의 억압이 있었다. 신앙과 학문은 분명히 함께 대화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었지만 중세교회는 학문의 발전이 교회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어긋나는 학설과 연구를 억압했다. 대표적인 것이 갈릴레이의 굴복사건이다. 당시 중세교회는 우주에 중심에 지구가 있다는 천동설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 지구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었다. 천동설은 단순한 과학이론이 아닌 교회의 권위를 형성해주는 배경이기도 했다. 그런데 1609년에 갈릴레이가 천체를 연구하다가 이미 오래전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했던 지동설, 즉 우주에 중심에 태양이 있다는 학설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이런 발견과 주장으로 인해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2번 회부가 되었고, 결국 교회의 협박에 성경에 손을 얹고 다시는 지동설을 주장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고, 일생동안 교회의 감시를 받으면서 살았다. 독선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 가톨릭교회는 1979년때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갈릴레이 재판과 관련된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했다. 예수님밖에는 진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든 사상들, 모든 사람들, 모든 문화들을 함부로 폄하하고, 비난하고, 외면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순간 또 다시 갈릴레이를 협박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던 폭력적이고 무지한 중세교회의 과오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갈 2:9).

고전 1:10~13을 읽어 보라. 바울은 교회 내의 연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복음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의 가르침과 조화롭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바울은 일종의 배교자였다.
이런 비판에 대하여 바울은 그가 회심한 이후 적어도 14년 뒤였던 예루살렘 방문을 회상한다. 고대의 여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바울이 육로를 통해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 갔다면, 적어도 3주 동안 온갖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480㎞를 여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 여행을 감내했던 것은 사도들의 권고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권고 때문이었다. 긴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사도들 앞에 설명했었다.
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바울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도들로부터 재검증을 받을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 이미 14년 간 전파해 온 복음이었다. 다른 사도들의 허가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지지와 격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의 기별에 대한 비난은 바울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사도들의 연합에 대한 공격이자, 교회에 대한 공격이었다. 사도들의 연합을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바울의 이방 선교와 예루살렘의 모교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경우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방인 기독교인과 유대인 기독교인 사이에 교류가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양분되었을 것이고, 이방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바울이 기울여 왔고 앞으로 기울이게 될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2), 111.

교훈: 바울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다는 비난은 사도들과 교회들의 연합을 저해하는 행위였으나, 바울은 오히려 연합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부가적용)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이 ‘할례를 받아야지 구원을 받는다’는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 지금 이방인이면서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바울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자신의 믿음의 실천으로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진리를 수호함에 있어서 단호하고 확고한 바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었던 사도행전 15장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16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동행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주었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 일행은 여러 성을 두루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디도로 하여금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던 바울이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다른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을 지키게 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바울이 변한 것인가? 바울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일관성이 없고, 율법주의와 타협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런 바울의 모습이야말로 참 자유인의 모습이다. 은혜가 없는 율법주의, 율법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극단적인 율법주의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율법자체가 나쁘지 않다. 만약 바울이 지나치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만을 강조하기 위해 율법을 무조건 금기시 했다면 바울의 복음역시 또 다른 율법주의로 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바울이 복음을 강조하고 이방인들에게 초점을 두었다면,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사도들은 율법을 준수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선교를 했다. 그러기에 어떻게 보면 바울과 다른 사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도들은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서 갈등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다름이 하나님의 다양함이라고 매우 건설적으로 이해를 했다.

•영감의 교훈•
▶ 조화로운 교회
“세상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완전한 조화가 있음을 보게 되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위한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불화, 좋지 못한 의견 차이, 교회의 사소한 문제 등은 우리의 구속주께 욕을 돌리게 된다. 이 모든 일은 자아가 하나님께 굴복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교회의 음성에 순종하면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교회증언 4권, 19).

둘째 날(월) 10월 10일
할례와 거짓 형제들

도입)
초대교회에서는 할례의 위상이 엄청난 쟁점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창세기17장10절에 명하신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성서적 지위를 누려왔다.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이셨다. 그분의 열두 제자도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의 성서, 유대정경(구약39권)이 기독교 교회 성서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의식법이 기독교 교회로 넘어 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의식법이 넘어오면서 더불어 논쟁도 따라왔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바울과 유대인 신자 사이에서 할례가 논쟁의 핵심으로 부상한 이유는 무엇인가?(창 17:1~22, 갈 2:3~5, 5:2, 6, 행 15:1, 5 참고). 일부 신자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표였다. 물론 할례는 아브라함의 남자 후손들에게 해당되었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분과의 언약적 관계로 초청하신다. 할례는 사라의 여종에게서 자녀를 낳음으로 하나님을 도와 약속을 성취시키려던 아브라함의 시도 이후에 주어졌다(창 17장).
할례는 언약의 의미에 적절한 표였다. 할례는 인간이 세운 최선의 계획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는 없다는 교훈을 상기시켰다. 외적 할례는 내적 할례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했다(신 10:16, 30:6, 렘 4:4, 롬 2:29). 할례는 우리 자아에 대한 확신을 벗겨 내고 대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에 할례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우월성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150년 전에 어떤 과격한 애국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모든 유대인뿐 아니라, 그들의 사법적 권한 아래 있는 주변 민족에게까지 할례를 강요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할례를 구원받기 위한 일종의 통행증으로 여겼다. 이런 의식은 다음과 같은 고대 경구에 잘 드러나 있다. “ ‘할례 받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는다.’ ”
바울이 할례 자체를 반대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순종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였다.

교훈: 바울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의 복음이 수리아 안디옥 같은 비유대인 도시들에 전파되고 있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 진리가 할례 같은 의식법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의식법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보장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사도들은 이방 세계를 두루 다니며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했다.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사도행전10:43). 바울은 이렇게 전했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사도행전13:38-39).

•영감의 교훈•
▶ 할례 받은 자도 심판받는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쓰라린 실망을 맛보게 될 자들 중에는 외식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겉으로만 신앙 생애를 해 온 자들이 있을 것이다. 저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자아가 엮어져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81).

셋째 날(화) 10월 11일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성

도입)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일 뿐 아니라, 사람 중에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문제가 없을 때가 없었다. 교회가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마치 병원에 환자가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물론 병원에 환자가 없거나 병원 자체가 없으면 좋을 것이나 병이 있는 한 병원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서운 병에 걸린 환자가 찾아올 때 병원전체는 긴장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교회는 조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때로 그 어려움이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심각한 것일 때 교회 전체는 어려움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할례문제였다. 오늘날은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도 할례를 받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받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할례만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할례를 받으면 계속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고, 율법을 지킨다면 복음이 설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율법은 무엇이며, 복음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할례 문제가 어려운 것은 율법이나 할례나 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초로 하여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데 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인데, 받지 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아주 분명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갈 2:1~10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요 8:31~36, 롬 6:6~7, 8:2~3, 갈 3:23~25, 4:7~8, 히 2:14~15). 우리는 이런 자유를 실제로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자유란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는 신약의 다른 저자보다 자유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고,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여러 차례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이다. 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그리고 죗된 욕망과 성향의 얽매임으로부터, 율법의 정죄로부터 그리고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를 포괄한다(롬 6장, 8:1~2, 고전 15:55).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갈 2:7).

위의 말씀은 교회 내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가?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처럼 바울을 불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음을 인정하였다. 두 경우 복음은 동일하였지만,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은 그 대상에 따라 달랐다. 이 성경절에는 “동일한 원리도 상이한 사회나 문화적 배경 속에서는 달리 제시되어야 하며 다른 강도를 갖게 된다는 매우 중요한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정확히 기독교 연합의 기초가 되는 하나 됨이며, 다양성 속에 있는 통일성이다.” - James D. 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Peabody, Mass.: Hendrickson Publishers, Inc., 1993), 106.

교훈: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로부터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성이 교회의 통일성을 해하지 않음을 확신하였다.

부가적용)
각인각색이란 말이 있듯이, 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 기호도 다를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반응이나 해답도 달리 생각할 수 있다. 한 믿음이라는 말은 반드시 한 가지만의 생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자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으되 같은 길을 가는 한 믿음의 동지라는 사실만은 아울러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할 수 없을진대, 우리는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을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섭리의 차원에서 바라보며 서로를 용납하고 공존하여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세상에 대해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한 치의 이견도 없는 완벽한 합의의 모습이 아니다. 이견을 가지고 때로는 갈등할지라도 마지막 지켜야 할 선 만은 지키며, 나아가 서로를 용납하려는 사랑의 모습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자랑할 덕목이다. 아직까지 불완전한 우리는, 때로는 이견을 가지고 때로는 갈등하며 다툴 수도 있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관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리의 높은 신앙과 도덕성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아울러 갖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것은 전혀 우리의 몫이다. 바울이든 바나바든, 심지어 마가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분량에 맞추어 나름대로 충성했다. 그 사이에 의견이 일치한 점도 있었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서 갈등을 빚고 싸우기도 했다. 이 갈등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의 문제였고, 관점의 문제였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갈등을 만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관점이 바로 여기 있다. 그 문제가 나와 저 사람의 성격 때문에 빚어진 것인지, 아니면 진리의 문제 때문에 빚어진 것인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그처럼 비판하는 나에게는 잘못이 정말 하나도 없는 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하나님 안에서 한마음을 이룸
“거룩한 말씀에 굴복하는 자들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견해와 사상이 우리들의 노력을 지배하여서는 안 된다. 인간은 오류에 빠지기 쉬우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 서로 논쟁에 휘말리는 대신에 사람들은 주님을 높여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416).

넷째 날(수) 10월 12일
안디옥에서의 대면

도입)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차별 없이 복음을 이방인에게도 전하라는 환상(vision)과 함께 말씀과 고넬료를 통해 확증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이 트집을 잡는 것을 설득한 만큼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올바른 본을 보여야 했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외식을 했기에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눈치를 보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리를 거슬리는 행동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면 나에게 해가 되고 누가 무어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해야 사람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고 외식 하는 사람이 된다. 외식 하는 사람은 온전케 하는 복음의 진리를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하므로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똑같이 행동한다. 바울은 이 외식하는 모습을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한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갈 2:11).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문을 받은 뒤 얼마 후 베드로는 바울의 선교 전초기지이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위치한 시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하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이방인 신자들과 식사하였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신자들이 도착하자 그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베드로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갈 2:11~13과 행 10:28을 비교해 보라.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삶 속에 문화와 전통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배어 있음을 알게 되는가?
어떤 이들은 베드로와 유대인 신자들이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오류를 범한다. 만약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의 음식법을 포기했다면, 분명 교회 내 심각한 논란이 일어나서 그 사실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문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며 나눈 친교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보았고, 가능한 한 이방인과의 사회적 접촉을 회피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런 문제로 갈등했던 베드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상을 통해 실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베드로는 로마 장교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행 10:28)셨다고 증거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베드로는 동족을 의식한 나머지 이전 관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그리스어로 ‘휘포크리시스(hypocrisis: 위선, 외식)’라고 불렀다.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말했다.

교훈: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이방인 신자와 교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에서 온 신자들의 눈을 의식해 외식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부가적용)
바울은 잘못된 율법주의가 복음 속으로 은밀히 들어와 신자의 참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한 일이다.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방 성도들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식탁교제를 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구별이 없음을 고넬료 사건을 통하여 체험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서 온 강경파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황급히 식사자리를 떠났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이유로 인해 생길 율법주의적 경향이 농후한 유대인들과의 마찰이 불편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같은 처신은 단지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외식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거가 되며, 예루살렘 공의회(A·D 49)의 결정을 무력화시킴으로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대한 굴복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외식의 문제점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며, 이중생활을 통해 사람의 눈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기만하려는 자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절실하여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울며 탄원해야 정상인데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양 성인군자의 가면을 쓰고 교회를 오가는 우리는 어쩌면 다 외식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영감의 교훈•
▶ 좋은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타협하는 방법으로 화평을 모색하지 않으셨다”(복음전도, 368).

다섯째 날(목) 10월 13일
바울의 염려

도입)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11년 동안이나 숨기고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11년간 매일 아침 읽지도 못하는 신문을 펼쳐 들고 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남의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자 했던 그 사람의 눈속임은 과연 자신에게 어떤 만족감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슬프게도 매사추세츠에 산다는 그 사람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다. “겉치레 경건주의”, “겉치레 말”, “겉치레 선행”, “겉치레 기도”, 겉치레 웃음“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는 없는지? 우리는 ”영적인 배우“ 상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비록 사람은 모를지 몰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잠26: 26) 위선은 한자로 ‘거짓 위(僞)’에 ‘착할 선(善)’을 쓴다. 즉 선한 것인 양 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선이란 결국 도덕적 결벽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 서부의 한 대형 교회에서 과거에 치명적인 도덕적 죄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더니, 이들 중 대부분이 평소에 “나는 절대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도덕적 결벽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을 한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새 역사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의의 칼을 높이 드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대상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안디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울과 베드로, 교회의 두 지도자가 공개적인 충돌 양상이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그의 행위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했다.
바울이 베드로와 공개적으로 대결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갈 2:11~14)
문제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방문객들과 식사하기로 한 결정에 있지 않았다. 옛날에 그 정도의 손님 대접은 당연한 관습이었다. 문제는 “복음의 진리”에 있었지, 친교나 식습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의 행위는 사실상 전체 복음의 기별을 양보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갈 3:28과 골 3:11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바울의 강력한 대응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예루살렘 총회에서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은 이방인들이 할례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위가 이런 합의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공개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곳에서 이제는 회중의 분리로 말미암아 분열된 미래 교회의 양상을 보이게 됐다.
바울의 입장에서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 신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2등급 신자를 면치 못하리라는 암시였으며, 그들이 완전한 교제를 나누기 원한다면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강한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
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

회당에서 유대인의 여러 관습을 따르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요 바울의 반대자들을 “유대교화된 자들(Judaizers)”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훈: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교회가 베드로의 외식적 행위 때문에 다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열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부가적용)
베드로의 이 같은 외식의 악영향을 인식한 바울은 예수님의 수제자요, 자신보다 연장자인 베드로를 책망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수호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복음의 진리를 조금도 혼잡 됨 없이 지키고자 얼마나 사력을 다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바울의 태도는 일면 무례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바울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율법주의로부터 복음을 지키기 위한 진심 때문이었다. 그의 중심을 안 베드로 역시 책망을 달게 받아들였고 그의 서신서에서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벧후 3:15). 이 같은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화 된 사람의 겸손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에피소드는 초대교회가 진리의 권위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굴복할 수 있는 신축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가 진리 앞에 신축성을 가진 새 가죽부대와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 포도주인 진리의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영감의 교훈•
▶ 다수의 불의에 저항할 용기
“그리스도의 목사들은 최고의 기쁨을 주는 진리만을 백성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에게 양심의 고통을 일으키는 다른 진리들은 억제해 두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는 품성의 계발을 깊은 염려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만일 그의 양 무리 중 어느 하나가 죄악을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충실한 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경우에 적합한 교훈을 주어야 한다”(사도행적, 394).

예비일(금) 10월 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복음교역자, 117~119 “바울의 분별성.”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도 큰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인간 대리자에게 부여된 책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명령하고 통제하는 그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가 만약 주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지성과 감정을 왜곡시키는 일에 그는 틀림없이 더욱더 큰 해독을 끼친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확고한 원칙 위에서 행동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파괴적인 감화를 정면으로 가로막아야만 하였다.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유익을 얻게 하려 함이요, 그 교훈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엄숙한 경고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그들이 성실의 길에서 실수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게 하려 함이다”(화잇 주석, 갈 2:11~1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정면대결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교회는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거부하는 자들을 징계해야 합니까?

➋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변치 말아야 할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변해도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사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❸ 재림교회 내에 여러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연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요약: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일부 유대인 신자들의 주장은 초기 교회의 연합을 위협하였다. 비록 사도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지만, 이런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 연합을 유지하며,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설 수 있도록 사도들은 함께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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