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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예배: 포로기에서 회복기까지(질문, 대답, 부가설명)0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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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8-26 07:55 조회8,36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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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9분

기억절 :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연구 범위: 느 1장, 렘 29:10~14, 겔 8장, 단 3장, 학 1장, 슥 1:1~6.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 1,9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당시 유대 나라와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 성전이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비중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성전은 예배의 정점이었으며 민족과 종교적 정체성에 중심이었다. 성전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며 통치하겠다고 말씀하신 공간이었다. 성전은 야훼의 신자들이 성결, 용서, 은혜 그리고 화목을 발견했던 곳이었다.
성전은 진정 하나님의 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적 경고를 믿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성전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선지자들의 경고대로 바벨론 사람들에 의하여 성전은 정말 파괴되었다.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단지 추측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처참한 폐허 속에서도 하나님은 유대 나라가 회복될 것이며, 성전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이 예언적 운명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포로기와 회복기 동안 이루어졌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세상의 기대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임을 이해한다.
➋느끼기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보여 준 것처럼 하나님께 양보하지 않은 신실함과 충성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➌행하기 : 하나님의 백성들이 죗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결론: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포로들은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경계심을 늦추고, 세상의 관습에 따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유사한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첫째 날(일) 8월 28일
“인자야 보았느냐?”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겔 8:17).

질문1: 에스겔 8장을 읽어 보라. 여기에 묘사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성전에서 벌어졌다. 어떻게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와 같은 배도에 빠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겔8장의 내용]
1) 성전 문에 투기의 우상이 서 있었다.
2)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10,11절) 어두운 데서 이렇게 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애굽의 우상 숭배 습관을 모방해 섬긴 것이다. 유다 왕국 후반기에 여호야김 왕은 애굽 왕 바로느고와 동맹을 맺어 애굽과 가까이 한 적이 있었으며(왕하 23:33-35), 마지막 왕 시드기야 시대에는 반 바벨론 정책이 팽배했으며 애굽을 의뢰하고 애굽을 닮으려는 풍조가 가득 찼었기 때문에(대하36:11~14; 렘37:1~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다.>
3) 성전 북문에서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였다.
<‘담무스(Tammuz)’란 수메르어 ‘두무지(Dumuzi, '충성스런 아들' 또는 '생명의 아들'의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고대 바벨론이나 베니게 등지에서 봄에 식물을 성장, 결실케 하는 우상으로  숭배되어져 왔다. 뜨거운 여름이 돌아와 식물들이 타고 시들어 죽게 될 때에는 이 신이 죽어 지하 세계에 간 것으로 사람들이 믿었다. 그리고 이 신은 그의 누이이면서 배우자 신인 풍요의 여신 이쉬타르(Ishtar)에 의해 지하 세계에서 봄에 지상으로 이끌려져 만물을 다시 소생케 하여 결실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고대 바벨론 사람들은 이런 미신의 사상에 따라 바벨론의 제 4월을 담무스 월이라 하였는데, 현재 태양력의 6, 7월에 해당된다. 이때에 이 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교 의식이 행해졌다. 이런 우상 숭배 습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은 B. C. 8-7세기경쯤이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후에는 유대인들이 이 풍습을 본받아 그들의 제 4월을 ‘탐무즈(Tammuz)’로 불렀다. 한편 본 절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이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한 것은 고대 바벨론의 우상 숭배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봄에 만물이 소생하고 풍요롭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삶이 풍요롭고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라 하겠다.>
4) 여호와 전 문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성전을 등지고 동방 태양을 향해 경배했다.
<이곳은 원래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기도 같은 특별한 일을 행하는 장소이다(욜2:17). 그러나 이곳이 오히려 우상에게 경배하는 신성 모독의 장소로 바뀌었다. 이십 오 인 은 24반열에 든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포함한 자들의 수효이다.>

답: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하지 않고 방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 풍조를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수용하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격으로 세상풍조를 교회 안에 용납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세상풍조에 맞추어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줄 착각하게 된다.

질문2: 겔 8:12을 자세히 읽어 보라. 장로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하였을까?
[겔8: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 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답: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않고 유다를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이 하나님께 바벨론에 망하지 않도록 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를 통한 권고를 무시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권고할 것이라고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그런 결과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부가설명> 기복(祈福) 신앙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 같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 주어야 하는 신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준행해야 할 것들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요구만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지운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도록 내버려두었으니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라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합리화했다.(겔8:12) 이런 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되어야 하고 병들지 않아야 하고 계획하는 일들은 다 형통해야 한다. 그것이 복 받은 것이다. 어떤 교단의 목사님 주장처럼 삼박자 축복이 임해야 한다는 정신이 있다면 이스라엘 장로들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해야 한다. 그것이 피조물인 우리들의 가장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우리들을 평안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특히 장래의 소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우리들에게 주시려는 장래의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고전7:31, 요일2:17) 지나가는 것을 소망을 주신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을 소망으로 주신다.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소망을 확고히 붙들고 고난이 닥쳐도 인내로서 연단을 받아 더욱 돈독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교훈: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구별된 공간에 세상의 타락한 관습을 불러 들여오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참예배에서 벌어지게 된다.

둘째 날(월) 8월 29일
우상숭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질문: 다니엘 3장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나오는 우상숭배와 계시록 14장에서 나오는 우상숭배를 비교해 보라. 짐승의 표와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이야기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단 3장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의 우상 숭배를 거절하다가 풀무 불에 들어가는 환난을 당한 사건이다. 그  불속에 예수께서 함께 계시고 그들을 건지셨다.]

답: 다니엘서 3장은 황금 우상을 만들고 음악에 맞추어 누구든지 그 우상에게 경배하라는 바벨론 왕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유다의 세 청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경배하지 않고 평일보다 칠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 속에 던짐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건져내시고 바벨론 왕을 굴복시켰다.
  계시록 14장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명령이다. 심판하실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와 반대로 우상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이 불과 유황의 고난을 받게 되며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게 되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하게 된다.

<부가설명> 역사의 종말은 예배 대결이 대단원이 될 것이다. 계13장과 14장은 예배 대결을 예언했다. 13장은 용과 바다짐승과 땅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라고 한다. 경배하지 않으면 몇이든지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14장은 창조주를 경배하라고 한다.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는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풀무 불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했지만, 계시록의 이 사건은 사단부터 불 못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단이 그들을 도우지도 못한다. 우리는 바른 예배를 해야 한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경배에 대한 시험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과 넷째 계명이 시금석이다. 이것은 다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계명이다. 그러므로 시험은 창조주를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라고 한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계명이 적용되는 것은 다르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그때는 우상 앞에서 경배를 강요했지만 말세에는 우상을 경배하는 표를 통하여 강요할 것이다. 그 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예배일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은 계13장을 잘 살펴 연구하면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지면 관계로 그것을 여기 올리지 않지만 나의 웹사이트 3amsda.org에서 김명호 목사방에 들어가서 “기초부터 배우는 성경공부”난을 클릭하여 30과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세력에 대한 예언” 12번을 읽으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참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대로 경배해야 할 것이다.

교훈: 마지막 시대의 쟁점은 경배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빼앗으려는 세력은 계명을 변경시켰을 뿐 아니라 완력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할 것이다.

셋째 날(화) 8월 30일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질문1: 렘 29:10~14을 읽어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 어떤 소망을 얻을 수 있는가?
[렘29:10~14]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답: 하나님은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 주시려는 마음이다. 소망으로 장래를 보증하시며 사람들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회복의 소망을 확신할 수 있다.

질문2: 학개 1장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이 그들의 관심을 분산시켰는가? 왜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는가?
[학1:1~15] 다리오 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10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12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13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14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15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사일이었더라.

답: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와서 먼저 자기들의 생계를 챙기는데 집중하였다. 그들이 포로가 된 원인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야 했다. 그들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뒷전에 두었다. 하나님은 너희 소위(所爲)를 살펴보라고 하신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병든 자의 첫째 할 일은 완치되는 치료의 길을 찾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병이 치료되도록 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돌아온 다음 그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어떻게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생고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이는 경쟁사회에서 민생 해결과는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는 신앙문제를 첫째 자리에 두고 그 일을 먼저 수행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행17:28)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는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자비하셔서 하나님을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나 다 햇빛과 비를 주시고 호흡을 주시기 때문에(마5:45, 행17:24) 아직도 이 세상이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분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시104:29)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예배를 회복하기 바라신다. 그러나 세상일에 얽매여 영적 사명에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날(수) 8월 31일
너희 조상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슥 1:5).

질문: 슥 1:1~6을 읽어 보라. 어떤 주제가 여기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가? 본문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실상을 어떻게 보여 주고 있는가?
[슥1:1~6]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답: 귀환한 사람들이 조상들이 왜 포로가 되었는지 잊어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다. 그 후손이 귀환포도들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져 있었다.

<부가설명> 선택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의지가 아니다. 특히 생명과 존재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자유의지가 배제되어 있다. 우리 중에 누가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대로 선택해서 태어났는가? 예수님 외에는 결코 없다. 자유의지는 존재하고 난 다음에 일인데, 그래도 엄밀한 의미로 자유위지는 없다. 한국 사람을 태어난 사람이 자기 자유의지로 미국인종이 될 수 없다.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는 말은 도덕적인 일이나 신앙문제나 학문을 하는 것이나 음식을 선택하거나, 이런 일들을 택할 때난 쓰일 말일 뿐이다. 신앙과 종교문제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먼저 선택하셨다. 우리의 선택은 자유의지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없었다면 예수를 믿을까 안 믿을까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거절하든지 받아들이든지 하는 것뿐이다. 자유의지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지극히 제한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포로에서 돌아오게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마음대로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교훈: 조상의 실수를 교훈삼아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마음으로 나아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 설교의 역할이다.

다섯째 날(목) 9월 1일
느헤미야의 기도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질문: 느헤미야 1장에서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그가 드린 기도를 읽어 보라. 그리고 다음의 물음에 대답하라.
[느1:4~11]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⑴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죄 지은 자들 가운데 왜 자신을 포함시켰는가?(단 9:5~6 참고).
[단9:5,6]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6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답: 조상들과 한 혈통이 된 연대의식으로 한 줄기에 달린 생명과 존재라는 인식으로 회개하는 기도이다. 민족적 회개이다.

⑵ 이런 종류의 기도를 무엇이라 하는가? 왜 이런 기도가 중요한가?(출 32:31~34, 약 5:16).
[출32:31~34]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답: 흔히 중보 기도라고 말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딤전2:1에서 “엔튜크시스”라는 말을 썼는데,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개역에는 도고(禱告)라고 번역되었고, 새번역에는 중보기도라고 번역했다. 중보는 예수님이 하시는 직무가 아닌가. 중보적 기도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⑶ 이 기도는 예언의 조건성을 어떤 식으로 말해 주고 있는가?

답: 8~10절에 나타나 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⑷ 무엇을 근거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런 호소를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창 12:1~3, 출 6:4~5 참고).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출6:4,5]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답: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친히 하신 언약에 의하여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그 언약으로 인하여 응답하셔야 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 걸으라고 한 그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의 참된 삶의 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걸으라고 한 그 길 안에서 구해야 한다. 내 스스로의 길을 가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가르친다. 느헤미야는 이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길 안에서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나의 욕망이 기초가 된 기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내용을 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어떤 경우를 당해도 하나님의 약속한 길 위에 있는 것이 확실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줄 믿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모든 성취가 그와 같다.

교훈: 느헤미야는 예배의 회복과 예루살렘 중건을 위해 중보하였다.

예비일(금) 9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551~566 “유랑인들의 귀환”, 567~581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하여 도움”, 607~617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618~627 “영적 부흥”, 661~668 “하나님의 율법을 배움”, 669~678 “개혁.”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있는 고통의 때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시다”(선지자와 왕, 512).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속인들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저희가 어느 정도 세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위험이 끊임없이 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행동이 큰 이익을 줄 것처럼 보이나 항상 영적 손실로 끝난다”(상동, 570).

“오늘날에 수행되어야 할 개혁 사업에도 에스라와 느헤미야처럼 죄를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 아니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 사업의 중한 책임을 진 사람들은 … 거짓된 사랑의 가면으로 죄악을 가리지도 않을 것이다. … 그들은 또한 죄를 견책하는 사람에게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정신이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상동, 67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목요일에 기록한 중보의 기도를 서로 읽어 보십시오. 이런 기도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신자들은 지금 교회에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 느헤미야의 기도를 읽어보라. 성도들을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와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교회의 필요를 주님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자. 내가 보기에 오늘날 재림교회는 말씀에 대한 열망이 식은 것 같다. 말씀의 부흥 말씀 연구와 깨달음의 부흘을 위하여 기도하자.

➋문화적인 접근에는 항상 타협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를 외부와 차단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무엇은 바꾸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우리는 고립과 분리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배는 물 없이는 소용이 없다. 그러나 물이 배에 들어오면 배는 침몰한다. 교회는 물 같은 세상에 배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지만 세상에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을 건져서 배에 태워야 하지만 배 안에 물이 들어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 세상 물이 들어오도록 용납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댓글목록

이한용님의 댓글

이한용 작성일

목사님 늘감사합니다. 건강 하세요. 이한용 드림

유병찬님의 댓글

유병찬 작성일

좋은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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