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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 신앙과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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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5-03 22:54 조회5,6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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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8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8분

제 6 과 신앙(信仰)과 치유(治癒)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가운데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로 신앙을 하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 하셨다. 신앙 즉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그분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 결과로 우리의 몸과 마음 이 건강해진다.

일요일(5월 2일)
<두려움의 요인>

▣ 두려움(Fear) = (공포(恐怖))란? (위키백과)
두려움 혹은 공포(恐怖)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어떠한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감정이다. 공포에 빠진 생물은 대체적으로 우울하다.

<생물학>
공포에 빠진 인간은 판단 능력이 상실되며, 근육이 떨리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안구가 빠르게 요동치게 된다. 그래서 공포에 빠진 인간은 실수를 하기가 쉽다.

▣ 두려움의 치유(治癒)
1. 공포와 두려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공포는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걸린다.
2) 또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로 나타날까봐"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3) 그리고 무엇인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나 죄가 되는 것이 있을 때 두려움이 들어오기도 한다.
4) 그리고 "어떤 사고(事故)"를 통하여 얻게 된 공포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5) 그렇게 공포에 잡히는 이유는 "외적인 위험(危險)"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① 예를 들면 외적(外的)인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공포증에 걸리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 공포증이 생길 수도 있다.
② 그런가하면 주위 사람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意識)하면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부모, 친척, 친구, 교우(敎友) 등)
6) 두려움의 위력은 대단하다.
① 두려움은 마음을 더욱 더 약(弱)하게 만든다.
이때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은 나를 더 깊은 공포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② 두려움은 평화를 앗아간다.
③ 그리고 불안에 떨게 한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생각이 복잡하다. 생각이 복잡하니 말도 순서가 없고 생활이 불안정함.

2. 성경은 두려움에 처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 여호수아 1:5-9를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란다.
본문의 말씀은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마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이후에 많은 두려움을 가졌든 것 같다.
◇ 어떻게 내가 훌륭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자리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 과연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을까!
◇ 그리고 모세에게 함께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 등으로 고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을 아시고
① 2절과 3절에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어차피 들어가야 하듯이, 우리는 어차피 이런 일(어려운)을 치루어야 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혼자 보내지 않고,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약속을 해 주셨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분명할진대 하나님은 그대의 어려운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도 있다.
그것은 믿음과 실력을 기르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들어갔듯이
어려운 일들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은 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하고
믿음으로 그 어려운 일의 산을 정복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② 6절, 7절, 9절에 동일하게 나오는 메시지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몸이 건강해도 마음이 약하면 곧 몸이 약해진다.
매사를 잘해도 마음이 약하면 하고자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강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 건강이다. 마음이 건강하면 평안하다.
마음이 건강하면 자신감도 생긴다. 마음이 건강하면 무너진 곳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③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5절, 9절)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린다면 이제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담대히 매사에 어려운 일과 환경을 극복하기를 바란다.

2) 시편 23:4에 위기를 당한 다윗이 고백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도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두려운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어려운 두려운 일들이 닥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지팡이와 막대기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똑 같은 것인데 어떤 때는 지팡이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막대기가 된다.
나무 막대기가 땅에 붙어 있을 때는 지팡이다.
그러다가 지팡이가 하늘로 처 올라가 있을 때에는 막대기가 된다.
이 말은 목자가 양을 치다가 힘이 빠지면 지팡이가 되어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목자가 길을 가다가 맹수를 만나면 막대기가 되어 쫓아내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지쳐서 쓰러지려 할 때에 우리를 보호하시며,
세상의 원수들이 우리를 삼키려하나 주님이 막대기가 되셔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팡이가 되어주시고,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막대기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3) 이사야 41:10을 통하여 에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확실한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언약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언약의 백성들을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현명 자매가 시험을 칠 때에는 하나님은 현명 자매와 함께 하시는데 왜 함께 하시느냐?
"도와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믿지 않는다면 두려워해야겠지만.

4.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 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은 바로 "평안"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
왜 주시는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몰아 내어라고 주신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41:10 말씀을 암송해서 언약으로 붙잡아라. 이것이 믿음이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고 자신감을 회복합시다.

▣ 두려움 즉 공포(恐怖)는 드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다.
첫째는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경우와
둘째는 미래의 불확실 때문에 오는 두려움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 성경에서 그 실레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사무엘상 17:1-11절)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골리앗으로 인하여 크게 두려워하니라.
골리앗의 신장(身長)이 “여섯규빗 한 뼘”(2m90㎝)의 우람함에 이스라엘의 사울 왕 이하 모든 군대는 두려워하였고 놀랐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용사 다윗은 (사무엘 상 17:32-58절)에 시원하고 통쾌한 승리의 기록이 기록되어있다.
특히 믿음의 용사 다윗의 이야기를 보자.
삼상 17:32절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삼상 17:36절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라
삼상 17:45절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전능자의 믿음으로 다윗은 (삼상 17:49절) “물매와 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느라.”

<둘째로>
(다니엘 2:1-49)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이 꿈을 통하여 이상을 보고,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그러한 가운데 명철한 하나님의 종 다니엘을 통하여 명쾌한 해석을 듣고도 금 머리가 바벨론을 상징한다고 해서 인젠 온 사람의 형상을 금으로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워놓고 그것에게 절하라 하는(다니엘 3:1-18) 미래의 두려움을 인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하는 어리석음의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만날 수가 있다.

▷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영혼을 멸(滅)하실 수 있는 분이신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오직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다윗처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생애를 삽시다.

◉ <하나님을 경외하라>
“우리는 주님이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방법과 그분의 가르침을 잊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뢰를 주님께 둔다면 우리는 지금 강한 백성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진리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 감사할 것뿐이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62)

◉ 우리가 두려움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월요일(5월 3일)
<우주(宇宙)에게 말하는 남자>

▣ 성경66권중에 우상(偶像)이라는 단어가 180회의 성경절에 206회가 나오는데 그토록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禁)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우상숭배의 배도가 생기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異邦人)도 아닌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틈만 나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인간의 속성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숭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편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분으로써 우주(宇宙)를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십계명가운데 두 번째 계명에 까지 기록하시고 있다.
그 이유는 피조물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함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懇求)를 드리는 것은 곧 우주(宇宙)에게 말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숭배(偶像崇拜)하는 아내를 맞이한 결과, “솔로몬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의 상상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그는 악한 감화의 누룩을 예루살렘에 들여와서 일부다처(一夫多妻)주의와 우상숭배를 영구화시켰다” (대총회 회보 1895. 2. 25)

◈ 우상숭배(偶像崇拜)자들과의 교제로 인해서 그(솔로몬)의 믿음은 파산 하였고 한번 거짓된 길에 들어서자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백성의 안전을 위해서 세워두신 울타리들을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솔로몬의 삶은 일부다처(一夫多妻)주의로 타락되었고 마침내 그는(솔로몬) 자신을 경배하는데 자신을 바쳤다. (교회증언7권218-219)

◉ <믿음으로 전진하라 >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기도하고 그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우리는 받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은 칠흑 같은 구름을 뚫고 의기소침하여 실의에 빠진 영혼에게 빛과 소망을 준다. 당혹함과 근심스런 두려움, 악한 생각 등은 이러한 믿음과 신뢰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온전히 신뢰할 때에 그 백성들을 위하여 큰일을 하실 것이다.”(교회증언 2권, 139)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화요일(5월 4일)
<믿음의 힘>

▣ 믿음이란?
헬라어 “피스티스(pistis)”는 “확신”, “신뢰”, “신념” 또한 “신실함”, “신용” 신실한 행동은 믿음 있는 태도의 산물이므로,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마음자세나 행동양식을 의미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을 보증하기 위하여 충분한 증거를 지닌 견고하고 근본적인 “실상”에 늘 의존한다.
“휘포스타시스”는 고대 파피루스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재산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입증하게 한 법적문서들에 대하여 사용하였다. 그 문서들은 재산은 아니지만, 재산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그의 권리를 증명해 주었다.
따라서 “휘포스타시스”는 여기서 “권리증서”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곧 “믿음은 ―권리요 증서요”
믿음으로 그리스도ㅓ인은 그에게 약속된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약속을 하신 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은 정하신 때 그것들이 성취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이와 같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약속된 축복들을 주장할 수 있게 할뿐 아니라 그것들을 지금 향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약속된 기업은 현재의 소유가 된다. 장차올 좋은 것들은 더 이상 미래에 성취될 단순한 꿈들이 아니라 현재에 생생한 실체들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믿음의 눈에는 보인다.
바라는 것들은 곧 약속의 기업들이다. (본교 성경주석(한) 13권 585-586p)

◈ 믿음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듯이, 믿음은 눈으로 즉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신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그대로 물리적으로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1세기에 네로 황제의 박해(迫害)를 피해서 “카타콤”에 피난한 성도들과 왈덴스인들이나 존 위클리프, 후스, 제롬, 폴리갑 등을 비롯해서 많은 믿음의 용사들이 믿음의 힘을 경험한 분들이다.

▣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을 대표하여 갈멜 산에 섰다. 믿음의 힘으로 우상숭배는 타파되었고, 복된 비는 이스라엘에 퍼부어지기를 기다리던 축복의 소낙비를 증거(證據)하였다.”(교육, 150)

◉ 성경을 보면 예수가 병든 사람을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救援)했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본래 구원(救援)이라는 용어는 매우 종교적인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병 고치는 행위에서 병자들에게 하신 것을 보면 예수의 치유(治癒)는 단순히 그 병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존재에 새로운 구원을 베푸셨음을 보여준다. 치유(治癒)는 하나님나라에서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한다. 곧 인간의 왜곡된 삶의 가장 극명한 현실인 병을 치유하셨다는 것은 당시 병에 얽힌 갖가지 종교적 담론이 가져다준 비인간적인 선입견의 파괴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삶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치유사건과 구원(救援)을 동일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님나라의 삶'은 지금까지의 왜곡된 삶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된 삶의 현실이다.
갖가지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온갖 거짓 평화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이 모든 가치를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세계다. 예수의 치유사건은 하나님나라 도래의 징표이자 하나님나라가 구체화된 삶의 세계다.
치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치유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존재 변화를 지향한다. 육체의 치유든, 정신의 치유든, 삶의 치유든 그것은 회개한 삶이 하나님나라의 삶으로 전이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므로 치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진정한 치유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며, 그 치유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삶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이 바로 치료(Cure)와 치유(Healing)다.
치료(治療)는 의학적 행위로 육체의 병(病)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치유는 질병의 고침을 포함하여 훨씬 더 포괄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 치료를 받았다 할지라도 치유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비록 육체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을지라도 영혼은 치유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예수는 치료와 치유를 동시에 행하셨지만 우리 모두 그런 은사(恩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의사가 될 수는 없다.
또 우리가 기도로써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 '치유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병 자체를 '치료'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를 방문하여 고통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면서 그를 '치유'할 수는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치유의 역사를 행하시기 때문이다.
치유의 영성이 깊은 사람일수록 아픈 사람을 더욱 깊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이를 치유하시는 당신은 고통을 없애는 이가 아니라 그 아픔의 뜻을 알게 하시는 이십니다.
눈먼 자를 치유하시는 당신은 어둠을 없애는 이가 아니라 빛의 환희를 알게 하시는 이십니다.
절름발이에게는 한 쪽 성한 발의 감사를 갇힌 이에게는 복받치는 깊은 자유를 앉은뱅이에게는 두 손의 온전함을 되씹게 하는 당신의 치유(治癒) 당신은 내가 아프고 괴로운 부위에 집착을 내리부을 때 당신은 내 눈길 안 닿는 이 역사의 상처까지 세밀하게 만져주시는 이십니다. 당신의 치유는 사랑의 깊음에서 오는 생명의 오름입니다.
'치유(治癒)의 주님' 치유의 역사는 사랑의 작은 표현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영성(靈性)을 혼돈하고 또 왜곡하는 것은 바로 '치유(治癒)'와 '치료(治療)'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치유의 영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통전적인 삶의 변화, 곧 하나님나라의 삶으로 변화를 지향하지 않는 치병행위는 한낱 기복(祈福)신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의 치유사건을 도외시하거나 치유의 역사를 위해 힘쓰지 않는 교회나 개인 또한 위로의 기쁨을 얻지 못한다. '신유 은사' 운운하며 그리스도의 치유사건을 왜곡하는 사이비 치료행위를 냉철하게 경계하되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의 민족·사회·개인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는 사건이 계속됨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치료행위가 아닌 치유사건의 도구다.

◉ 치유(治癒)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고통, 곧 애통(愛痛)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독일어로 '동정' 혹은 '자비'라는 의미의 단어가 'Mitleiden'인데, 이 단어는 고통을 의미하는 'Leiden'과 '함께'라는 뜻의 'mit'의 합성어다. 풀어서 설명하면, 진정한 자비 혹은 동정(Mitleiden)은 그들의 고통에 애통으로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치유의 영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치유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랑의 작은 표현, 곧 남을 높이고 사랑하는 말, 관심의 표현, 마음의 나눔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그런 애통을 통한 치유로 하나님의 한없는 위로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언제나 일반적인 상식과 교양을 넘어서는 분으로서 소위 영적이라고 불리는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이며, 기적과 이적으로만 일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분만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뜻을 초자연적으로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 가운데서 일하실 때에 초자연적인 사역보다는 자연적이고도, 상식적인 차원에서 일하시는 면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치유하실 때 기적과 이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편보다는 창조주이신 천연의 의사의 손길을 통해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길을 더 선호하신다.

▣ 위약(僞藥)(플라시보)의 효과를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위약(僞藥)은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환자가 의학이나 치료법으로 받아들이지만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짜 약제를 말한다. 영어로는 placebo라고 한다. 위약과 관련하여 잘 알려진 현상으로 심리현상 중 하나인 위약(僞藥)효과(placebo effect)가 있다. 이를 “플라시보” 효과 또는 “플라시보 이펙트”라고 그대로 읽기도 한다. 의사(醫師)가 환자에게 가짜 약을 투여하면서 진짜 약이라고 하면 환자의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에 병이 낫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약이 부족할 때 많이 쓰였던 방법이다.
이와 반대로 믿지 않으면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이 '노시보' 효과입니다.
플라시보 효과는 한마디로 가짜 약이다.
약효(藥效)가 전혀 없는 것을 특효약(特效藥)이라고 가장하여 환자에게 복용토록 하여 병세가 호전되는 효과를 말한다.
플라시보는 '마음에 들도록 한다.'라는 뜻의 라틴어로 '가짜 약'이라는 의미가 있다.
병원에서는 정신적인 질병이나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플라시보 효과를 활용해서 큰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어릴 때 배가 아플 때, 울고 있으면 할머니는 "할머니 손은 약손이다. 할머니 손은 약손이다." 라고 말을 하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동네를 뛰어다니며 노는 것도 바로 이 플라시보효과 덕분이 아니겠는가? 이상과 같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실험이며 증거이다.
“신앙” “믿음” “신뢰” 이젠 당신의 선택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 할 것인가. 사람을 비롯한 물리적인 보이는 것을 더 신뢰 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이 믿음을 좌우합니다.

▶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이 성경 절은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서 정신과 육체는 밀접하게 교감하고 있으며,
생각과 마음가짐에 따라 건강이 좌우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 이 세상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오직 산 믿음의 힘을 통해서만 침착하고 강하고 안전할 수 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릴 때에만 우리는 평안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에게 비친 것보다 더 큰 빛이 우리에게 비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한 것과 동일한 봉사를 하고 동일한 사업을 하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거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가납하심과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는 그들의 성실과 열성을 본받아야 한다. 곧, 그들이 그들의 빛을 이용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빛을 이용하고, 그들이 오늘날 살았다면 하게 될 그대로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비친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빛은 어둠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품성과 행동을 통하여, 공언하는 거룩한 진리와, 이 마지막 때에 성취되고 있는 예언의 정신과 일치되는 연합과 일치의 정신의 정도를 세상에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이해한 진리와 심령에 비친 빛을 등지고 지도받기를 거부할 것 같으면, 그 진리와 빛이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할 것이다.”(1증언, 262)

◈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기 위해 그대가 사는 큰 도시에는 하나님을 위한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피곤한 영혼들을 긍휼이 많으신 구속주의 품으로 이끌기 위해, 지혜의 온유함과 믿음의 힘으로 일하는 경험 있는 손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죄와의 타협을 모르며, 책략과도 연관이 없고, 범죄와도 관련이 없다. 도움이 필요할 때에 원수를 도와주는 자들이 아니고, 언제나 점호에 응하여 즉각적으로 행동할 준비가 된 군인들이 필요하다.”(4증언, 80)

◉ <믿음이 자아를 형성함 >
“의무를 잘 감당했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제공해 준데 대한 만족감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가볍고 기뻐질 때, 즐겁고 고무적인 힘이 온몸에 새 생명을 가져다준다……. 건강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쏟은 나머지 자아(自我)를 잊어버릴 것 같으면,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함으로 주님의 명령을 따를 것 같으면, 그들은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약속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치료봉사, 257)

◉ 육체와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심으로 충만한 마음은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준다.

수요일(5월 5일)
<스트레스 풀기>

▣ 1. <스트레스란 ? >
오늘날처럼 갈등과 경쟁이 치열한 산업사회에서는 사회가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 복잡하게 변화함으로 이에 적응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많은 신체적·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런 부담감을 일명 스트레스라 한다. 스트레스를 처음으로 명명한 학자는 생물학자인 Hans Seyle이며 물리학적 의미에서 정의되기 시작한 스트레스가 관심을 받으면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지고 있다
<첫째>는 더위, 추위, 소음 등과 같은 물리학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스트레스이고,
<둘째>는 피로, 질병과 같은 생리적인 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스트레스이며 마지막
<셋째>는 사회나 학교에서의 대인관계로부터 생기는 갈등, 좌절, 불안 등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심리적 스트레스이다.
적절한 스트레스는 삶의 원동력이 되며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여 주기 때문에 이런 경우의 스트레스는 삶의 진미를 느끼게 해주는 양념과 같은 존재로 삶의 원기를 북돋아 주는 활력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나친 스트레스는 질병을 일으키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므로 스트레스는 중요한 건강 위험 인자이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잘 인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건강 유지 및 증진에 반드시 필요하다.

2. <스트레스의 기전>
인간은 각자의 스트레스 적응 반응에 따라 동일한 스트레스 원에 대해서도 각각 다른 다양한 반응을 나타낸다. 인간이 내·외적 환경의 자극에 의해 신체적·심리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인체는 스트레스에 적응하기 위해 시상하부에서 부신피질 자극 호르몬 유리 호르몬(CRH : corticotropin releasing hormone) 과 청반 노르에피네피린(LC-NE : locos ceruleus norepinephrine)이 분비되어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시키고 부교감신경계의 작용을 억제하게 되어 혈압, 심박동 수, 호흡수가 증가하게 되며 기관지가 확장될 뿐 아니라 피부에 소름이 끼치면서 털이 일어나고 발한 작용이 증가한다. 이외에도 신체적 증상으로 두통, 요통, 경부 동통, 피로, 변비, 설사, 혈압 상승, 성 기능 장애, 근육의 과 긴장, 소화불량과 식욕 변화 등이 나타날 수 있고 정서적 반응으로 흥분, 좌절감, 무력감, 초조감, 수면 장애, 공포감, 우울감, 조바심 등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신체가 적절히 이완되면 신진대사 율이 감소되어 산소 소모량이 감소되고, 교감 신경계 활동이 저하되어 심박동 수와 호흡수가 감소되고, 혈압이 하강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적절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이용하여 신체를 이완시킨다면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 증상들을 감소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긴장감, 압박감, 불안,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건강을 유지 증진하기 위해서는 스트레스 해소하고 인체를 적절히 이완시킬 수 있는 스트레스 관리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상(以上)은 세상의 방법과 처방입니다.>

성경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음 사람은 “사울 왕”의 다윗에 대한 시기로
(삼상 18 : 7 ; 삼상 21:11; 삼상 29:5)의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아합 왕”은 하찮은 서민 나봇의 포도밭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열왕기 상 21:1-4절)의 “아합 왕”의 나봇에 포도밭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며,
“하만”과 모르드개의 경우로 ((에스더 3:2-9:25절)까지의 실례를 보자
(에스더 3 : 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에스더 3 : 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였더라.
(에스더 3 : 5)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怒)하더니
이상(以上)의 세 사람들은 결국 스트레스로 자업자득하여 비참한 생애를 마친 사람들의 대표적인 실례들이다.

◈ 명예와 돈과 권력을 검어 쥔 사람들이,
결국은 하찮은 보잘 것 없는 스트레스로 비참한 생애를 마감한 실례(實例)들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모르는 사람들의 경험과 실례들을 통하여
우리 재림교인들은 본 교과를 통하여 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약속을 주장하는 가장 큰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이 임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어진 힘, 다시 말해 마음을 사려 깊고 조심성 있는 마음으로 훈련시키는 꾸준한 노력과 연합된 힘은 사람을 매일의 의무를 위하여 준비시키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마음을 평안하게 지켜 준다.”
(산상보훈, 85)

◉ 스트레스는 건강에 가장 위험한 요소이며, 신앙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목요일(5월 6일)
<믿음과 기적적(奇蹟的)인 치유(治癒)>

◈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는 베드로의 장모의 병(病)도, 문둥병자, 지붕으로 내린 중풍병자, 한편 손 마른 사람, 백부장의 종, 두 소경,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 거라사의 광인(狂人), 혈우 증을 않던 여자, 야이로의 딸, 벙어리와 불구자들, 벳세다 근방의 소경, 귀신들린 소년, 등등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살리셨다.
이러한 기적적인 치유의 절대적인 요소는 환자(患者)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은혜(恩惠)이다.

◉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상당부분 기적적인 치유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병든 자, 눈먼 자, 죽어가는 자, 심지어 이미 죽은 자까지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치유를 받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치유의 전제조건은 믿음이었다.(마 9:2, 22, 28~29, 15:28)
나사렛에서는 불신이 치료의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마 13:58, 막 6:5~6) 한번은 제자들이 치유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14~20)
믿음이 기적적인 치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기도로 치유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때, 그것을 환자의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믿음과 치유에 관하여 지극히 표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 “그리스도의 주위에 가까이 밀려다니며 경탄하던 군중은 생명의 능력에 접근해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그 여인은 고침을 받으리라고 믿고 손을 내밀어 예수를 만졌을 때에 치유하는 능력을 체험하였다. 영적 사물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신앙에 관하여 경박하게 말한다든지 주린 심령과 산 믿음 없이 기도한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다만 세상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믿음은 결코 심령의 치유(治癒)를 받을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진리를 단순히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활용하기 전에 온갖 지식을 기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피상적으로 믿는 것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유일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들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한 의견으로 여긴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자신을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로 결합시키는 한 거래이다. 순수한 믿음은 생명이다. 산 믿음은 사람에게 승리하는 능력이 되는 활력의 증가요 의지하는 신뢰를 의미한다.” (소망 347)

◉ 위에 제시된 본문 가운데 치유된 자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언급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적적인 치유를 불러오는 믿음의 역할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표된 믿음이 항상 절대적인 요소가 아님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주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 치유가 일어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치유가 된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손이 이런 과정들을 통해 병자에게 임하셨음을 믿게 된다. 한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염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끝없이 발생하는 설명할 수 없는 재난들은 타락한 세계의 일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신도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 <믿음은 삶을 변화시킴 >
“인간의 힘이 실패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겠다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자비하신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심령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병이 들었을 때에도 건강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303)

◉ <믿음은 치유의 조건이 아니라 목적이다.>
우리의 질병이 치료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 “참 과학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 전혀 있을 수가 없다.
그 둘은 다 같이 창시자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그것들이 언제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이 판명될 것이다.
천연계에서나 계시에서나 간에 진리는 그 모든 표현에 있어서 그 자체가 조화를 이룬다.”
(교회증언 8권, 258, 참고자료: 치료봉사, 462,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신학요람 12권, 751~783)

◉ <정신과 육체(肉體)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한쪽이 영향을 받으면 다른 편이 반응을 일으킨다. 정신의 상태는 신체 조직의 건강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옳은 일을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함으로 마음에 자유와 행복감이 넘칠 때 이것은 온 신체 조직에 즐거움을
창조하여 혈액 순환을 더욱 활발하게 하며 몸 전체를 강하게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치료제이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많이 하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과 생애에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다.”
(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345)

◉ “하나님의 구원의 제의에 대한 인간의 반응조차도 인간에게서 시작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일 따름이다(롬 12:3).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행 5:31).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에서 우러나온다(요일 4:19). 우리는 사단, 죄. 고통,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4, 5, 8, 9).”(교리, 109)

◉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고 성화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기록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받는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현재와 심판 때에 구원에 대한 보증을 얻는다. " (기본 신조, 10.”(교리, 119))


<초점(焦點)>

죄악 세상에서의 삶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고 그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스트레스는 결과 적으로 영적(靈的)으로 육체적(肉體的)으로 건강에 영향을 주어 질병으로 이르러 온다,
그러나 믿음은 기적적인 치유가 있는바 믿음은 치유의 조건이 아니라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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