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 영성과 육체의 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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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4-13 22:33 조회5,723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10년 4월17일(안) 제3과 (영성과 육체의 단련).hwp (36.5K) 88회 다운로드 DATE : 2010-04-13 22:33:29
본문
2010년 4월17일(일몰: 오후 7시 9분)
제 3 과 영성(靈性)과 육체(肉體)의 단련(鍛鍊)
<硏究範圍> : 시 139:13~15, 고전 3:16~17, 9:24~27, 엡 2:8, 딤후 4:7, 2:3~5, 히 11:6.
<核心本文> : 고전 9:25
<記憶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中心思想>
운동은 우리의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學習目標>
(깨닫기) : <사용하고, 잃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활용하고 계발해야 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느끼기) :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인정한다.
(행하기) : <운동 계획>
우리의 육체적인 근육을 믿음의 근육과 마찬가지로 매일 유연하게 단련시킨다.
<要點>
우리의 몸과 우리의 믿음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분을 위해 일하려면 우리의 몸과 믿음을 쓸모 있고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것들이 녹슬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일요일(4월18일)
<영적(靈的)인 경주(競走)>
▣ 성도님들! 올림픽 경기 중에 무슨 경기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흔히들 올림픽 경기의 꽃이라 부르는 경기는 마라톤입니다. 개인적으로 마라톤은 상당히 지루합니다. 두 시간여를 그저 뛰는 모습만 바라봐야 하는 경기기에 TV 앞에 앉아 계속 마라톤을 본다는 것이 저에게는 그리 신이 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마라톤을 올림픽 경기의 꽃이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아마도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인 동시에 엄청난 인내심과 지구력을 요하는 경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지금 한번 머릿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관중으로 둘러싸인 메인 경기장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는 도로로 나가 한 없이 달립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도착점이 있는 메인 경기장으로 돌아옵니다. 그 거리가 무려 42.195Km입니다. 특별히 도로경주에서 돌아왔을 때, 메인 경기장은 메운 수많은 관중들이 그 선수에게 환호를 보내며 집중합니다. 그 선수는 골인 점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립니다.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지금 힘들고 지쳐 있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선수는 속도를 줄이기 않고 뜁니다. 아니 오히려 골인 점을 보자 더욱 가속을 붙입니다. 그가 골인 점을 통과하면 일제히 그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그는 해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일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100m 달리기처럼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끝나버리는 경기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든 신자들 앞에 달려야만 하는 경주가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달음질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달려야 하는 경주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님들이 이 경주에 선수들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믿음의 경주의 선수들입니다. 사도바울의 시대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던 때입니다. 그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바로 경기를 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 있던 일반 관중들과는 다릅니다. 원형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선수들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증인들은 우리가 지금 달려야 할 달음질을 이미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달음질을 달리면서 고난과 시련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당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정과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그 증인들이 이제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야 할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어떻게 달려야 할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영광의 골인 점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은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Ⅰ. <먼저 우리는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갖가지 짐이라 함은 무거운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달려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달리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우리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가벼운 옷과 신발을 신습니다. 가능한 한 몸에 붙은 불필요한 살도 빼야 합니다. 무거운 옷과 신발, 불필요하게 붙은 살들은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음의 달음질을 함에 있어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쉽게 하는 걱정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에 너무나 걱정이 많다 보니 도대체 앞으로 달려 갈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도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멀고 험난하고 끝이 잘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쉽게 세상적인 것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에 욕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것에 욕심을 내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가 벗어야 할 무거운 짐들입니다. 때로는 게으름이 때로는 분주함과 바쁨이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은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을 모른척하거나 거부하는 불순종은 우리의 믿음의 달음질을 방해합니다. 자주 멈추게 만듭니다. 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더 편한 길이 없나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심각한 이유는 우리를 얽매는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들은 곧 우리를 얽매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과 근심이, 세상을 향한 욕심이 우리의 게으름과 분주함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모두 불신앙이라는 죄와 직결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범죄라고 부른 것만이 죄가 아니라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하나님을 멀리하려 하고 모른척하며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일체의 것들은 모두 죄가 됩니다. 이러한 모든 무거운 짐들과 죄들은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를 방해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는 일련의 모든 무거운 짐들과 죄악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걱정과 근심을 벗어버리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며 게으름과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일체의 모든 무거운 짐들과 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마음껏 달려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Ⅱ. <참고 달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내(忍耐)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앞에서 제가 마라톤이 인내가 필요한 경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의 달음질도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과 같은 경주이기에 우리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항상 우리가 평지만 달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때로는 오르막길도 올라야 합니다. 때로는 울퉁불퉁한 길도 달려야 합니다. 때로는 어두운 길도 달려야 합니다. 때로는 외롭게 홀로 달려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은 어떠했습니까? 히브리서11장 36절, 37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믿음의 증인들은 이와 같은 고난당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그들이 달려야 할 믿음의 달음질을 달렸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그들의 고난과 견줄 때 어떠합니까? 우리의 고난이 더욱 심합니까? 물론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에 우리는 손해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때로는 손가락질 당할 때도 있습니다. 궁핍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사탄의 시험과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포기하고 싶습니다.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내가 왜 사서 고생하나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너무 숨이 차고 힘들어서 잠시 걷거나 쉬고 싶은 생각이 드시지는 않습니까? 그저 소위 “쿨”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내가 굳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되나 회의가 들지는 않으십니까? 이렇게 믿음의 달음질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의 말씀입니다. “11.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고, 긍휼이 많으십니다.” 욥이 인내하였을 때에 전보다 더 복을 받았던 것처럼, 믿음의 증인들이 인내하였을 때에, 그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인내합시다. 어렵고 힘들지만, 조금만 더 참으며 달려갑시다. 포기하고 싶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어서 달려갑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인내로써 참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Ⅲ.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달려가려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글 성경은 이 바라보다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라보다”의 뜻은 그저 슬쩍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서 예수께만 눈을 고정시킨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시선(視線)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것들에서 눈을 떼어 오직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믿음의 선두주자요, 챔피언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한 믿음을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본도 우리가 따라가기에 참으로 버거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우리에게 믿음의 본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누추한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삶을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제자를 양육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죄악된 인간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손가락질도 당하셨습니다. 침 뱉음도 당하셨습니다. 채찍도 맞으셨습니다. 창에 찔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죄인인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고서 십자가의 굴욕과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사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우리 인간들이 다시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가 자녀가 되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믿는 자들이 천국에서 예수를 만나 누릴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내다보고서 예수님은 순종과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인내하며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으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받지 못했던 약속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언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바탕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수단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완성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훌륭한 본이 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마라톤 주자가 결승점에 눈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그 결승점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결승점이 보이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면 마라톤 주자는 결국 그 마라톤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믿음을 달음질의 결승점이 보이지도 있지도 않다면 우리의 달음질을 곧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결승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달음질의 결승점이 되십니다. 마라톤 주자가 결승점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가듯, 우리 역시 결승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달려가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의 믿음의 본을 따르면서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팔을 벌리고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다 달려 결승점에 도착할 때 너른 품으로 우리를 기쁨으로 맞이하실 예수를 바라봅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가야 할 때입니다. 아니 이미 달리고 있습니다. 잠시 멈칫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예 포기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예 달리려고 생각지도 않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려갑시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갑시다. 어렵고 힘에 겹지만 참고 인내하며 달려갑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승점에 계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 “복음 경주에 돌입한 사람들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 식욕의 방종을 훨씬 더 삼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항상 절제해야 한다. 한때 승리를 얻을 힘을 그들에게 준 바 있는 그 절제 생활을 그들이 계속하기만 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걸려있는 경주에서도 큰 유익을 끼칠 것이다(원고 74, 1903).”(화잇주석, 고전 9:24-27)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확고한 자제와 엄격한 절제와 쇠하지 않는 열심의 중요성을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감명시켜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을, 고린도 가까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렸던 유명한 경주에 비교하였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는 모든 경기 중에서 경주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왕과 귀족들과 정치가들이 경주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신분이 높고 부요한 청년들이 경주에 가담하였고 그들은 상을 얻기에 필요 되는 노력이나 훈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행적, 309)
◈ “사도는 자신을 경주에서 상을 얻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달리는 사람에 비유하였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방향 없이 달리거나 되는 대로 달리지 아니하려고 바울은 자신을 엄격한 훈련에 복종시켰다. “내 몸을 쳐” 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엄격한 훈련으로 욕망과 충동과 정욕을 격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행적, 314)
◉ 수세기를 지나면서 인류는 운동경기에 매료되었다. 많은 사람이 운동선수들의 현란한 기술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그들이 몸으로 하는 일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이 선천적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장거리 경주 우승자에게 자신도 훌륭한 경주자가 될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운동선수는 물론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하루에 24Km씩 6일간 뛰고, 제칠 일에는 40Km을 뛰라고 했다. 그렇게 일 년간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작은 것부터 충실하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승리할 것이다. 생애의 세세한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원칙들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도 흔히 중요하지 않은 일로 간주된다. 곧 주목을 끌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문제로 취급된다. 그러나 운명이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볼 때, 도움이나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행위는 생애의 승리나 패배를 결정하는 저울에 그 무게를 더한다. 그리고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그들이 기울인 힘과 열심에 비례할 것이다.”(사도행적, 312)
◉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는 뚜렷한 목표와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
월요일(4월19일)
<믿음의 근육(筋肉)이 수축(收縮)될 때>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고전 9:24-27). 특별한 영예로 간주되었던 월계관을 얻기 위하여 경주에 참가한 자들은 그들의 근육, 그들의 두뇌, 그들의 신체의 모든 부분들이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에 있을 수 있도록 모든 일에 절제하였다. 만일, 그들이 모든 일에 절제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절제함으로 가질 수 있는 탄력을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절제하였다면, 보다 더 성공적으로 달릴 수 있었을 것이며 면류관을 받는 일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1보감, 184)
◉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지막 상을 얻기까지 믿음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 뼈가 부러지고 심각한 관절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치료가 이루어지는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상을 입은 관절이나 골절된 수족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깁스나 붕대 또는 정형외과 장비를 동원하기도 한다.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은 서서히 수축되거나 소멸된다. 그래서 근육이 가늘어지고 약해지는 것이다. 뼈와 관절의 부상이 회복되면 지속적인 재활훈련을 통해서 근육은 다시 힘을 얻게 된다.
“활동은 우리의 생존 법칙이다. 신체의 모든 기관은 제각기 맡은 기능이 있으며, 그 기능의 수행에 따라 각 기관의 발달과 힘이 좌우된다. 모든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힘과 활력이 생기지만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와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한 쪽 팔을 몇 주일 동안만이라도 묶어 두었다가 붕대를 풀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 팔이 같은 기간에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팔보다 약해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활동은 모든 근육조직에 꼭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치료봉사, 237~238)
◉ 따라서 믿음은 활동을 수반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믿음은 자랄 수 없다. 믿음이 선물이기는 하나,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초로 옳은 결정을 내리지 않거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며 전도하지 않는다면, 또 믿음의 기회를 붙잡지 않고 겸손과 순종으로 무릎 꿇기까지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약속의 소망 없이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얼마나 놀랍고 소중한 선물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활용할수록 더해지는 믿음>
“이 깨어 있어야 할 시기에 무감각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만연하고 있는 비참한 죄악은 교회로부터 죄를 제거하기 위한 최고의 성실과 산 증언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은 두려울 정도로 감소되고 있다. 믿음이 증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이다.”(증언보감 1권, 33)
◉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소멸되거나 약해지는 것처럼, 믿음을 활용하지 않으며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다.
화요일(4월20일)
<보지 못하나 믿음>
▣ 신앙(信仰)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보는 것이다
대담하게도 기독교 안에서의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 말로 귀하고 가치 있고 진정한 참 신앙은 보지 않고 대담하게 담대히 믿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며 보고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것과 멸망의 무서운 것을 보여 준다면 세상에서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마치 깊은 바다 밑에 큰 바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깊은 바다 밑에 큰 바위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 밑에 바위가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늘나라와 멸망을 보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곧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의심하고 믿지 않아서 안 되는 것이지, 믿어서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안보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시며 우주 만물을 주관 하시고 계십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고 믿으십시오.
신앙은 도마처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백부장처럼 말씀만 하여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 예수께서 인내심을 가지고 자상하게 자신의 상처를 도마에게 보여주고 나서,
도마는 나의 주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였다. (요한복음 20장28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장29절)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증거를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지, 우리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 때문에 성경을 통하여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십자가(十字架)의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신 후 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그분이 살아나셨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도 내가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말씀을 직접 하셨지만, 제자들마저도 그를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부활이 실제 임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복음전파의 명령을 말씀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엇을 듣고 그냥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에 거짓과 속임수로 된 것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주신말씀을 믿고 굳게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 <의심을 능가하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 못 하실 리가 없는 것이요, 지극히 선하심으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런즉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그를 의지하기를 의심하지 말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의 확실한 허락을 믿으라.”(정로의 계단, 96)
◉ 진정한 믿음은 보이는 증거가 없을지라도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이미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요일(4월21일)
<육체(肉體)의 연습(練習)이 주는 유익(有益): Part 1>
▣ 한 번의 비상(飛翔)을 위한 천(1,000)번의 점프
피겨스테이팅 선수 24명의 훈련과정을 관찰한 연구결과의 차이점은
일류 선수들은 연습시간 68%를 고난도 점프를 훈련하고,
이류선수들은 연습시간은 48%를 점프에 투자하며, 일류선수보다 더 많이 휴식을 한다.
김연아의 재능을 하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연아가 연습하는 과정을 딱 사흘만 지켜보라고~
김연아의 유일한 결점은 지나치게 연습을 하는 "완벽주의자라는 점"이라고 코치브라이언 오서는 말한다.
김연아는 하나의 점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최소 3000번의 엉덩방아를 찧는다고 한다.
▣ 인체의 모든 기능은 사용(활용)하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진리를 절감하는 때는,
이미 절박한 고생을 당하는 단계에서이다.
어린 아이들은 잠시도 그냥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웬만한 상처나 부상(負傷)은 빨리 치유가 된다.
그러나 나이가 많을수록 상처(傷處)나 질병의 회복이 늦어진다. 그이유가 무엇일까?
인체의 모든 세포가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강해지기 때문이다.
침구술(鍼灸術)에서 뜸(구(灸)요법이 있다.
이는 인체내의 적혈구와 백혈구들의 일종의 민방공(防空) 훈련이다.
혈관 속의 적혈구와 백혈구들이 몸에 갑작스런 뜨거움이 느끼면 순식간에 그곳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그 부위가 빨갛게 되는 것이 즉 적혈구들의 집합 상태인 것이다.
이를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이 침구술(鍼灸術)의 요법(療法)인 것이다.
시술(施術)할 때는 고통이 따르지만 반면에 질병의 치유가 된다.
마찬 가지로 인생의 고난은 일종의 훈련인 것이다.
특히 군대(軍隊)에서의 값비싼 중장비(重裝備)를 다루는 사람들의 훈련은 아주 혹독하게 이루어진다.
즉 수백억 원의 값비싼 비행기나 탱크 등등.
조종하는 조종사가 적당한 훈련을 받고 하늘과 지상에서 운행한다면,
수많은 잦은 안전사고와 수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직임에 있는 자들은 그 만큼 혹독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맹훈련이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신앙에서도 여실히 증명이 된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의 경험이나, 요셉의 경우도, 욥의 경우도,
아브라함의 이삭의 사건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도 바울과 회심이후의 베드로나 요한의 경우 등도
여실히 입증이 된다.
온전한 신앙에서의 훈련과 경험이 혹독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상(報償)을 결코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점을 성경에서 여실히 보증하고 있음에 감사드립시다.
▣ 운동선수가 경기(競起)에서 승리를 기대하려면 욕구(慾求)와 욕망(慾望)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몸이 마음의 명령에 즉시 반응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하며, 흔히 인류에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천성적인 나태함과 일하기 싫어하는 경향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는 술이나 자극적이고 호화로운 생활이나 방종(放縱)같이 자극과 흥분을 일으켜 결국 쇠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삼가야만 한다. 그는 명백히 해로운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는 해롭지 않은 것에서도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는 엄격히 절제하는 가운데 먹고 마시며, 몸을 연약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저히 거부해야만 한다. 영생의 상을 굳게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은 여러 면에서 헬라 경기대회 참가자가 따랐던 것과 유사한 과정을 따라야만 한다. 단기간 지속될 지상에서의 영광을 위해 겨루는 선수들처럼,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자격을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용기와 믿음, 인내와 자아부정과 근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 경주에서는 훈련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기자는 누구나 모두 상을 받을 수 있다. 영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膳物)이기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구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부여된다. <본교성경주서(한)12권 241p>
◉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몸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과학자들은 운동이 우리의 몸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1마일을 4분 안에 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적당한 운동을 통해서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매우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몸과 분리된 불멸의 혼이 존재한다는 그리스 사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 육체는 악하다는 이교의 사상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느끼는 것은 정신과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두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어떤 면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양심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 남녀들은 자제(自制)의 의무와 순결의 필요와 각종 타락한 식욕과 더러운 습관에서의 해방에 대하여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치료봉사, 130)
◉ 운동하는 사람들은 운동이 얼마나 유익한지 증명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엄청난 운동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 <하나님과 협력하라>
“영혼이 거하는 육신은 하나님께 속한다. 모든 근육과 살은 주의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등한함이나 남용으로 단 하나의 기관이라도 약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사 육체적·영적 모든 능력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꼴 지우실 수 있는 성전을 만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몸을 최상의 건강 상태로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협력하여야 한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69)
◈ “너희도 얻도록 달음질하라
쟁취해야 할 귀중한 승리가 있다. 식욕과 모든 세속적인 정욕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자는 쇠하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과 진주 문이 있으며 보석으로 된 기초 위에 세워진 도성에 있는 복된 가정을 하사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을 받기 위하여 힘쓸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자. ST, 1887. 9. 1.”(절제, 150)
◉ 우리의 몸은 정신과 영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최선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운동으로 몸을 관리해야 한다.
목요일(4월22일)
<육체(肉體)의 연습(練習)이 주는 유익(有益): Part 2>
▣ 헬라 경기대회의 승리자가 받은 상(賞)과,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사람이 일시적인 성공을 위해 얼마나 애쓰며, 동료 인간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기 위해 몸의 불편함이나 고통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이 곧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위해서도 기꺼이 이렇게 한다면, 신자는 영원히 썩지 않을 영생의 면류관을 위해 얼마나 더 열심히, 더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다 말인가.
세상에 죄가 들어 왔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과 관념은 왜곡됐고, 그로 인해 사단은 사람들이 모든 건강 법칙을 범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일하고 여가를 즐기고, 생각 하는 습관을 통해 육체의 퇴보를 재촉하는 방식으로 살라간다.<건강에 관한 권면 18-19p>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런 일들에서 개혁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건강보존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엄격한 자제를 실행하는데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요구하신다. 사람은 건강한 삶을 사는 문제에서 마음대로 스스로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를 사셨기에 그에게는 몸과 마음을 가능한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건강 법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구주를 향한 사랑에 좌우되는 그리스도인은 욕구와 열정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정신적, 육체적, 영적 생애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면을 모든 면에서 받아들일 것이다. 육체의 욕구는 그보다 고결한 정신력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데, 이 정신력은 바로 성령의 지도아래 있는 것이다. <교회증언 Ⅱ권380-381p)
▣ 알코올과 담배는 사단이 사람을 현옥시켜 사용하게 만든 독소이기에, 영(靈)과 육(肉) 모두에게 연약성을 증가 시키며 기꺼이 모든 일에 절제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상급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건강에 관한 권면 125p>
▣ 권투 선수가 상대 없이 연습을 한다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또는 상대 선수가 그의 주먹을 피함으로 그가 허공에다 힘을 허비하게 만들어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상대를 봐주거나 상대가 자기 주먹을 피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혼자서 싸움을 연습하며 허송세월을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히는데, 이는 그의 상대가 항상 눈앞에 있으며 단호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먹마다 목표물에 확실하게 겨누어 명중시키기 위해 모든 뜻과 원기를 모아서 주먹을 날린다.그는 육체의 후패한 욕구들을 제어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전존재를 하나님에게 복종시켜야 했다.
▣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욕구와 욕망들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은 알면서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사우는 시늉은 하지만 실상 자기의 주먹으로 자신의 일부분이 강타되기를 바라지 않는데, 이는 주먹이 명중함으로 초래될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 된 본성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손상시키지 못하고, 인정에 호소하는 육체를 무시하기에는 의지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바울은 이와 다르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 된 육체 곧 육체의 본성을 향해 결코 인정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미워하여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기에, 모든 연민이나 동정 같은 생각과 느낌을 다 버리고 모든 힘과 기술과 뜻을 다해 주먹을 겨냥한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바울이 영지주의자 처럼 육체자체를 본질상 치유 불가능한 악으로 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육체를 제어 하고자 노력 했을 뿐 파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고대(古代)의 권투경기(혹은 헬라인의 주먹 싸움)의 이 비유(比喩)는
바울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만 하는 쟁투(爭鬪)가 얼마나 격렬한가를 생생히 예증(例證)하기위해 사용했다. 당시 권투 선수가 꼈던 권투 장갑은 오늘날의 장갑과 달랐는데 그것은 주로 쇠가죽 띠로 만들어 졌으며 때로는 놋쇠 조각들이 달려있어 그 파괴력이 강화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9장27절)의 “쳐”라는 말은 헬라어 “휘포피아조”(hupὀpiazὀ)는 참 그리스도인이 죄 된 본성을 얼마나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뤄야할지 생생하게 묘사해주는 단어이다. 이 단어에는 사람의 악한 성향 속에 있는 모든 후패한 열정을 극복하기위한 엄격한 훈련과 자기 부정이 시사돼있다.
◉ 바울은 악한 성향과 후패한 정욕과 성벽을 모두 완전히 극복하려는 확고부동한 목적을 드러낸다. 그는 어중간한 방책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현세의 본성이 어떤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끝장을 봐야만 하는 싸움이라는 점과, 신령한 열망과 양립하지 못하는 악이 사라져야만 함을 알았다.
이것은 하늘 시만으로 승인 받을 자격을 갖추고자 소망하는 모든 사람이 배워야만 하는 교훈이다. 본성의 욕망과 열망에서 나온 자극과 갈망은 소멸 시켜야만 한다. <정로의 계단 43-44, 60> <본교성경주서(한)12권 241-243p>
◉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 것처럼 육체도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운동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현재의 건강상태가 규칙적인 운동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이미 존재하는 건강상의 문제나 장애가 있다면, 의사로부터 적당한 강도의 운동을 처방받는 것이 현명하다.
어떤 운동을 하든지 3가지 점을 명심하라: 빈도, 강도, 시간
1) 빈도 : 현재 건강이 최상의 상태라면 일주일에 여섯 번 운동하기를 권한다.
2) 강도 : 운동의 강도는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꾸준한 성격이라면 운동의 강도가 점점 세질 것이다.
심장박동수를 높이고 땀을 흘리는 운동이 좋다.
그러나 스스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3) 시간 : 하루에 약 45~90분 정도 운동하는 것이 좋다.
일주일에 6일 동안 매일 적어도 30분 운동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
시간을 나눠서 운동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침, 점심, 저녁 10분씩 운동할 수도 있다.
그대에게 맞게 프로그램을 조정해야 한다. 걷기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형태의 운동이다.
◊ <움직여야 산다.>
“목사, 교사, 학생, 그 밖의 정신노동자들은 육체적 운동으로 제거되지 않는 심한 정신적 부담으로 초래된 질병 때문에 때때로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많은 활동적인 생애이다. 적당한 운동과 함께 병행되는 엄격한 절제의 습관은 정신적, 육체적 활력을 확보해 주고, 모든 정신노동자들에게 인내력을 줄 것이다.”(치료봉사, 238)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 특별한 명예로 생각되었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주에 임한 사람들은 모든 것에 절제함으로 그들의 근육과 뇌와 모든 지체가 경주에 최적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모든 것에 절제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원하던 몸의 탄력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절제하면 더 성공적으로 잘 뛸 수 있으며, 면류관을 받을 것이 더 확실해질 것이었다.”(교회증언 2권, 357)
◉ 운동은 현재의 건강상태에 따라 조절해야 하며, 규칙적인 운동은 지능을 높이고,
여러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다.
“은혜 중에 자라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사업을 사욕이 없이 행하는 것이니 곧 우리의 재능이 미치는 대로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복되게 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 힘이라는 것은 활동함으로 생기는 것이니 활동이야말로 생명의 필수 조건이다. 은혜로써 주는 복을 받음으로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일하지 아니하고 먹고 살려는 자와 같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에 있어서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언제나 퇴화와 쇠퇴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의 수족을 쓰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오래지 아니하여 그 수족을 쓸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쓰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가졌던 능력까지 잃어버릴 것이다.”(정로의 계단, 80~81)
▣ <초점(焦點)>
영성과 육체는 단련함으로 인하여 건강해진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도 건강도 온전히 유지하는 비결은 단련을 통하여 이르러 온다. ✝
제 3 과 영성(靈性)과 육체(肉體)의 단련(鍛鍊)
<硏究範圍> : 시 139:13~15, 고전 3:16~17, 9:24~27, 엡 2:8, 딤후 4:7, 2:3~5, 히 11:6.
<核心本文> : 고전 9:25
<記憶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中心思想>
운동은 우리의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學習目標>
(깨닫기) : <사용하고, 잃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활용하고 계발해야 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느끼기) :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인정한다.
(행하기) : <운동 계획>
우리의 육체적인 근육을 믿음의 근육과 마찬가지로 매일 유연하게 단련시킨다.
<要點>
우리의 몸과 우리의 믿음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분을 위해 일하려면 우리의 몸과 믿음을 쓸모 있고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것들이 녹슬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일요일(4월18일)
<영적(靈的)인 경주(競走)>
▣ 성도님들! 올림픽 경기 중에 무슨 경기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흔히들 올림픽 경기의 꽃이라 부르는 경기는 마라톤입니다. 개인적으로 마라톤은 상당히 지루합니다. 두 시간여를 그저 뛰는 모습만 바라봐야 하는 경기기에 TV 앞에 앉아 계속 마라톤을 본다는 것이 저에게는 그리 신이 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마라톤을 올림픽 경기의 꽃이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아마도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인 동시에 엄청난 인내심과 지구력을 요하는 경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지금 한번 머릿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관중으로 둘러싸인 메인 경기장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는 도로로 나가 한 없이 달립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도착점이 있는 메인 경기장으로 돌아옵니다. 그 거리가 무려 42.195Km입니다. 특별히 도로경주에서 돌아왔을 때, 메인 경기장은 메운 수많은 관중들이 그 선수에게 환호를 보내며 집중합니다. 그 선수는 골인 점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립니다.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지금 힘들고 지쳐 있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선수는 속도를 줄이기 않고 뜁니다. 아니 오히려 골인 점을 보자 더욱 가속을 붙입니다. 그가 골인 점을 통과하면 일제히 그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그는 해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일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100m 달리기처럼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끝나버리는 경기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든 신자들 앞에 달려야만 하는 경주가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달음질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달려야 하는 경주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님들이 이 경주에 선수들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믿음의 경주의 선수들입니다. 사도바울의 시대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던 때입니다. 그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바로 경기를 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 있던 일반 관중들과는 다릅니다. 원형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선수들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증인들은 우리가 지금 달려야 할 달음질을 이미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달음질을 달리면서 고난과 시련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당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정과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그 증인들이 이제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야 할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어떻게 달려야 할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영광의 골인 점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은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Ⅰ. <먼저 우리는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갖가지 짐이라 함은 무거운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달려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달리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우리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가벼운 옷과 신발을 신습니다. 가능한 한 몸에 붙은 불필요한 살도 빼야 합니다. 무거운 옷과 신발, 불필요하게 붙은 살들은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음의 달음질을 함에 있어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쉽게 하는 걱정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에 너무나 걱정이 많다 보니 도대체 앞으로 달려 갈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도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멀고 험난하고 끝이 잘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쉽게 세상적인 것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에 욕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것에 욕심을 내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가 벗어야 할 무거운 짐들입니다. 때로는 게으름이 때로는 분주함과 바쁨이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은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을 모른척하거나 거부하는 불순종은 우리의 믿음의 달음질을 방해합니다. 자주 멈추게 만듭니다. 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더 편한 길이 없나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심각한 이유는 우리를 얽매는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들은 곧 우리를 얽매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과 근심이, 세상을 향한 욕심이 우리의 게으름과 분주함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모두 불신앙이라는 죄와 직결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범죄라고 부른 것만이 죄가 아니라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하나님을 멀리하려 하고 모른척하며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일체의 것들은 모두 죄가 됩니다. 이러한 모든 무거운 짐들과 죄들은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를 방해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는 일련의 모든 무거운 짐들과 죄악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걱정과 근심을 벗어버리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며 게으름과 분주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일체의 모든 무거운 짐들과 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마음껏 달려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Ⅱ. <참고 달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내(忍耐)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앞에서 제가 마라톤이 인내가 필요한 경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의 달음질도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과 같은 경주이기에 우리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항상 우리가 평지만 달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때로는 오르막길도 올라야 합니다. 때로는 울퉁불퉁한 길도 달려야 합니다. 때로는 어두운 길도 달려야 합니다. 때로는 외롭게 홀로 달려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은 어떠했습니까? 히브리서11장 36절, 37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믿음의 증인들은 이와 같은 고난당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그들이 달려야 할 믿음의 달음질을 달렸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그들의 고난과 견줄 때 어떠합니까? 우리의 고난이 더욱 심합니까? 물론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에 우리는 손해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때로는 손가락질 당할 때도 있습니다. 궁핍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사탄의 시험과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포기하고 싶습니다.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내가 왜 사서 고생하나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너무 숨이 차고 힘들어서 잠시 걷거나 쉬고 싶은 생각이 드시지는 않습니까? 그저 소위 “쿨”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내가 굳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되나 회의가 들지는 않으십니까? 이렇게 믿음의 달음질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의 말씀입니다. “11.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고, 긍휼이 많으십니다.” 욥이 인내하였을 때에 전보다 더 복을 받았던 것처럼, 믿음의 증인들이 인내하였을 때에, 그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인내합시다. 어렵고 힘들지만, 조금만 더 참으며 달려갑시다. 포기하고 싶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어서 달려갑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인내로써 참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Ⅲ.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달려가려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글 성경은 이 바라보다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라보다”의 뜻은 그저 슬쩍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서 예수께만 눈을 고정시킨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시선(視線)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것들에서 눈을 떼어 오직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믿음의 선두주자요, 챔피언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한 믿음을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본도 우리가 따라가기에 참으로 버거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우리에게 믿음의 본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누추한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우리 인간과 똑 같은 삶을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제자를 양육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죄악된 인간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손가락질도 당하셨습니다. 침 뱉음도 당하셨습니다. 채찍도 맞으셨습니다. 창에 찔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죄인인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고서 십자가의 굴욕과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사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우리 인간들이 다시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가 자녀가 되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믿는 자들이 천국에서 예수를 만나 누릴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내다보고서 예수님은 순종과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인내하며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으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받지 못했던 약속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언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바탕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수단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완성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훌륭한 본이 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마라톤 주자가 결승점에 눈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그 결승점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결승점이 보이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면 마라톤 주자는 결국 그 마라톤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믿음을 달음질의 결승점이 보이지도 있지도 않다면 우리의 달음질을 곧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결승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달음질의 결승점이 되십니다. 마라톤 주자가 결승점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가듯, 우리 역시 결승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달려가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의 믿음의 본을 따르면서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팔을 벌리고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다 달려 결승점에 도착할 때 너른 품으로 우리를 기쁨으로 맞이하실 예수를 바라봅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달음질을 달려가야 할 때입니다. 아니 이미 달리고 있습니다. 잠시 멈칫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예 포기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예 달리려고 생각지도 않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려갑시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갑시다. 어렵고 힘에 겹지만 참고 인내하며 달려갑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승점에 계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 “복음 경주에 돌입한 사람들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 식욕의 방종을 훨씬 더 삼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항상 절제해야 한다. 한때 승리를 얻을 힘을 그들에게 준 바 있는 그 절제 생활을 그들이 계속하기만 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걸려있는 경주에서도 큰 유익을 끼칠 것이다(원고 74, 1903).”(화잇주석, 고전 9:24-27)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확고한 자제와 엄격한 절제와 쇠하지 않는 열심의 중요성을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감명시켜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을, 고린도 가까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렸던 유명한 경주에 비교하였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는 모든 경기 중에서 경주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왕과 귀족들과 정치가들이 경주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신분이 높고 부요한 청년들이 경주에 가담하였고 그들은 상을 얻기에 필요 되는 노력이나 훈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행적, 309)
◈ “사도는 자신을 경주에서 상을 얻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달리는 사람에 비유하였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방향 없이 달리거나 되는 대로 달리지 아니하려고 바울은 자신을 엄격한 훈련에 복종시켰다. “내 몸을 쳐” 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엄격한 훈련으로 욕망과 충동과 정욕을 격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행적, 314)
◉ 수세기를 지나면서 인류는 운동경기에 매료되었다. 많은 사람이 운동선수들의 현란한 기술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그들이 몸으로 하는 일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이 선천적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장거리 경주 우승자에게 자신도 훌륭한 경주자가 될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운동선수는 물론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하루에 24Km씩 6일간 뛰고, 제칠 일에는 40Km을 뛰라고 했다. 그렇게 일 년간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작은 것부터 충실하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승리할 것이다. 생애의 세세한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원칙들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도 흔히 중요하지 않은 일로 간주된다. 곧 주목을 끌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문제로 취급된다. 그러나 운명이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볼 때, 도움이나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행위는 생애의 승리나 패배를 결정하는 저울에 그 무게를 더한다. 그리고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그들이 기울인 힘과 열심에 비례할 것이다.”(사도행적, 312)
◉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는 뚜렷한 목표와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
월요일(4월19일)
<믿음의 근육(筋肉)이 수축(收縮)될 때>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고전 9:24-27). 특별한 영예로 간주되었던 월계관을 얻기 위하여 경주에 참가한 자들은 그들의 근육, 그들의 두뇌, 그들의 신체의 모든 부분들이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에 있을 수 있도록 모든 일에 절제하였다. 만일, 그들이 모든 일에 절제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절제함으로 가질 수 있는 탄력을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절제하였다면, 보다 더 성공적으로 달릴 수 있었을 것이며 면류관을 받는 일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1보감, 184)
◉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지막 상을 얻기까지 믿음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 뼈가 부러지고 심각한 관절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치료가 이루어지는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상을 입은 관절이나 골절된 수족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깁스나 붕대 또는 정형외과 장비를 동원하기도 한다.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은 서서히 수축되거나 소멸된다. 그래서 근육이 가늘어지고 약해지는 것이다. 뼈와 관절의 부상이 회복되면 지속적인 재활훈련을 통해서 근육은 다시 힘을 얻게 된다.
“활동은 우리의 생존 법칙이다. 신체의 모든 기관은 제각기 맡은 기능이 있으며, 그 기능의 수행에 따라 각 기관의 발달과 힘이 좌우된다. 모든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힘과 활력이 생기지만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와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한 쪽 팔을 몇 주일 동안만이라도 묶어 두었다가 붕대를 풀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 팔이 같은 기간에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팔보다 약해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활동은 모든 근육조직에 꼭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치료봉사, 237~238)
◉ 따라서 믿음은 활동을 수반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믿음은 자랄 수 없다. 믿음이 선물이기는 하나,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초로 옳은 결정을 내리지 않거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며 전도하지 않는다면, 또 믿음의 기회를 붙잡지 않고 겸손과 순종으로 무릎 꿇기까지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약속의 소망 없이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얼마나 놀랍고 소중한 선물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활용할수록 더해지는 믿음>
“이 깨어 있어야 할 시기에 무감각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만연하고 있는 비참한 죄악은 교회로부터 죄를 제거하기 위한 최고의 성실과 산 증언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은 두려울 정도로 감소되고 있다. 믿음이 증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이다.”(증언보감 1권, 33)
◉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소멸되거나 약해지는 것처럼, 믿음을 활용하지 않으며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다.
화요일(4월20일)
<보지 못하나 믿음>
▣ 신앙(信仰)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보는 것이다
대담하게도 기독교 안에서의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 말로 귀하고 가치 있고 진정한 참 신앙은 보지 않고 대담하게 담대히 믿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며 보고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것과 멸망의 무서운 것을 보여 준다면 세상에서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마치 깊은 바다 밑에 큰 바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깊은 바다 밑에 큰 바위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 밑에 바위가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늘나라와 멸망을 보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곧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의심하고 믿지 않아서 안 되는 것이지, 믿어서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안보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시며 우주 만물을 주관 하시고 계십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고 믿으십시오.
신앙은 도마처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백부장처럼 말씀만 하여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 예수께서 인내심을 가지고 자상하게 자신의 상처를 도마에게 보여주고 나서,
도마는 나의 주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였다. (요한복음 20장28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장29절)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증거를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지, 우리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 때문에 성경을 통하여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십자가(十字架)의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신 후 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그분이 살아나셨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도 내가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말씀을 직접 하셨지만, 제자들마저도 그를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부활이 실제 임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복음전파의 명령을 말씀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엇을 듣고 그냥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에 거짓과 속임수로 된 것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주신말씀을 믿고 굳게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 <의심을 능가하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 못 하실 리가 없는 것이요, 지극히 선하심으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런즉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그를 의지하기를 의심하지 말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의 확실한 허락을 믿으라.”(정로의 계단, 96)
◉ 진정한 믿음은 보이는 증거가 없을지라도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이미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요일(4월21일)
<육체(肉體)의 연습(練習)이 주는 유익(有益): Part 1>
▣ 한 번의 비상(飛翔)을 위한 천(1,000)번의 점프
피겨스테이팅 선수 24명의 훈련과정을 관찰한 연구결과의 차이점은
일류 선수들은 연습시간 68%를 고난도 점프를 훈련하고,
이류선수들은 연습시간은 48%를 점프에 투자하며, 일류선수보다 더 많이 휴식을 한다.
김연아의 재능을 하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연아가 연습하는 과정을 딱 사흘만 지켜보라고~
김연아의 유일한 결점은 지나치게 연습을 하는 "완벽주의자라는 점"이라고 코치브라이언 오서는 말한다.
김연아는 하나의 점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최소 3000번의 엉덩방아를 찧는다고 한다.
▣ 인체의 모든 기능은 사용(활용)하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진리를 절감하는 때는,
이미 절박한 고생을 당하는 단계에서이다.
어린 아이들은 잠시도 그냥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웬만한 상처나 부상(負傷)은 빨리 치유가 된다.
그러나 나이가 많을수록 상처(傷處)나 질병의 회복이 늦어진다. 그이유가 무엇일까?
인체의 모든 세포가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강해지기 때문이다.
침구술(鍼灸術)에서 뜸(구(灸)요법이 있다.
이는 인체내의 적혈구와 백혈구들의 일종의 민방공(防空) 훈련이다.
혈관 속의 적혈구와 백혈구들이 몸에 갑작스런 뜨거움이 느끼면 순식간에 그곳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그 부위가 빨갛게 되는 것이 즉 적혈구들의 집합 상태인 것이다.
이를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이 침구술(鍼灸術)의 요법(療法)인 것이다.
시술(施術)할 때는 고통이 따르지만 반면에 질병의 치유가 된다.
마찬 가지로 인생의 고난은 일종의 훈련인 것이다.
특히 군대(軍隊)에서의 값비싼 중장비(重裝備)를 다루는 사람들의 훈련은 아주 혹독하게 이루어진다.
즉 수백억 원의 값비싼 비행기나 탱크 등등.
조종하는 조종사가 적당한 훈련을 받고 하늘과 지상에서 운행한다면,
수많은 잦은 안전사고와 수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직임에 있는 자들은 그 만큼 혹독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맹훈련이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신앙에서도 여실히 증명이 된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의 경험이나, 요셉의 경우도, 욥의 경우도,
아브라함의 이삭의 사건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도 바울과 회심이후의 베드로나 요한의 경우 등도
여실히 입증이 된다.
온전한 신앙에서의 훈련과 경험이 혹독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상(報償)을 결코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점을 성경에서 여실히 보증하고 있음에 감사드립시다.
▣ 운동선수가 경기(競起)에서 승리를 기대하려면 욕구(慾求)와 욕망(慾望)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몸이 마음의 명령에 즉시 반응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하며, 흔히 인류에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천성적인 나태함과 일하기 싫어하는 경향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는 술이나 자극적이고 호화로운 생활이나 방종(放縱)같이 자극과 흥분을 일으켜 결국 쇠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삼가야만 한다. 그는 명백히 해로운 것 뿐 아니라 그 자체로는 해롭지 않은 것에서도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는 엄격히 절제하는 가운데 먹고 마시며, 몸을 연약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저히 거부해야만 한다. 영생의 상을 굳게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은 여러 면에서 헬라 경기대회 참가자가 따랐던 것과 유사한 과정을 따라야만 한다. 단기간 지속될 지상에서의 영광을 위해 겨루는 선수들처럼,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자격을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용기와 믿음, 인내와 자아부정과 근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 경주에서는 훈련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기자는 누구나 모두 상을 받을 수 있다. 영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膳物)이기는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구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부여된다. <본교성경주서(한)12권 241p>
◉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몸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과학자들은 운동이 우리의 몸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1마일을 4분 안에 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적당한 운동을 통해서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매우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몸과 분리된 불멸의 혼이 존재한다는 그리스 사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 육체는 악하다는 이교의 사상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느끼는 것은 정신과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두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어떤 면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양심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 남녀들은 자제(自制)의 의무와 순결의 필요와 각종 타락한 식욕과 더러운 습관에서의 해방에 대하여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치료봉사, 130)
◉ 운동하는 사람들은 운동이 얼마나 유익한지 증명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엄청난 운동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 <하나님과 협력하라>
“영혼이 거하는 육신은 하나님께 속한다. 모든 근육과 살은 주의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등한함이나 남용으로 단 하나의 기관이라도 약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사 육체적·영적 모든 능력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꼴 지우실 수 있는 성전을 만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몸을 최상의 건강 상태로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협력하여야 한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69)
◈ “너희도 얻도록 달음질하라
쟁취해야 할 귀중한 승리가 있다. 식욕과 모든 세속적인 정욕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자는 쇠하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과 진주 문이 있으며 보석으로 된 기초 위에 세워진 도성에 있는 복된 가정을 하사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을 받기 위하여 힘쓸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자. ST, 1887. 9. 1.”(절제, 150)
◉ 우리의 몸은 정신과 영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최선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운동으로 몸을 관리해야 한다.
목요일(4월22일)
<육체(肉體)의 연습(練習)이 주는 유익(有益): Part 2>
▣ 헬라 경기대회의 승리자가 받은 상(賞)과,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사람이 일시적인 성공을 위해 얼마나 애쓰며, 동료 인간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기 위해 몸의 불편함이나 고통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이 곧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위해서도 기꺼이 이렇게 한다면, 신자는 영원히 썩지 않을 영생의 면류관을 위해 얼마나 더 열심히, 더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다 말인가.
세상에 죄가 들어 왔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과 관념은 왜곡됐고, 그로 인해 사단은 사람들이 모든 건강 법칙을 범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일하고 여가를 즐기고, 생각 하는 습관을 통해 육체의 퇴보를 재촉하는 방식으로 살라간다.<건강에 관한 권면 18-19p>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런 일들에서 개혁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건강보존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엄격한 자제를 실행하는데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요구하신다. 사람은 건강한 삶을 사는 문제에서 마음대로 스스로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를 사셨기에 그에게는 몸과 마음을 가능한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건강 법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구주를 향한 사랑에 좌우되는 그리스도인은 욕구와 열정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정신적, 육체적, 영적 생애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면을 모든 면에서 받아들일 것이다. 육체의 욕구는 그보다 고결한 정신력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데, 이 정신력은 바로 성령의 지도아래 있는 것이다. <교회증언 Ⅱ권380-381p)
▣ 알코올과 담배는 사단이 사람을 현옥시켜 사용하게 만든 독소이기에, 영(靈)과 육(肉) 모두에게 연약성을 증가 시키며 기꺼이 모든 일에 절제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상급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건강에 관한 권면 125p>
▣ 권투 선수가 상대 없이 연습을 한다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또는 상대 선수가 그의 주먹을 피함으로 그가 허공에다 힘을 허비하게 만들어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상대를 봐주거나 상대가 자기 주먹을 피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혼자서 싸움을 연습하며 허송세월을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히는데, 이는 그의 상대가 항상 눈앞에 있으며 단호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먹마다 목표물에 확실하게 겨누어 명중시키기 위해 모든 뜻과 원기를 모아서 주먹을 날린다.그는 육체의 후패한 욕구들을 제어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전존재를 하나님에게 복종시켜야 했다.
▣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욕구와 욕망들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은 알면서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사우는 시늉은 하지만 실상 자기의 주먹으로 자신의 일부분이 강타되기를 바라지 않는데, 이는 주먹이 명중함으로 초래될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 된 본성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손상시키지 못하고, 인정에 호소하는 육체를 무시하기에는 의지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바울은 이와 다르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 된 육체 곧 육체의 본성을 향해 결코 인정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미워하여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기에, 모든 연민이나 동정 같은 생각과 느낌을 다 버리고 모든 힘과 기술과 뜻을 다해 주먹을 겨냥한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바울이 영지주의자 처럼 육체자체를 본질상 치유 불가능한 악으로 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육체를 제어 하고자 노력 했을 뿐 파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고대(古代)의 권투경기(혹은 헬라인의 주먹 싸움)의 이 비유(比喩)는
바울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만 하는 쟁투(爭鬪)가 얼마나 격렬한가를 생생히 예증(例證)하기위해 사용했다. 당시 권투 선수가 꼈던 권투 장갑은 오늘날의 장갑과 달랐는데 그것은 주로 쇠가죽 띠로 만들어 졌으며 때로는 놋쇠 조각들이 달려있어 그 파괴력이 강화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9장27절)의 “쳐”라는 말은 헬라어 “휘포피아조”(hupὀpiazὀ)는 참 그리스도인이 죄 된 본성을 얼마나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뤄야할지 생생하게 묘사해주는 단어이다. 이 단어에는 사람의 악한 성향 속에 있는 모든 후패한 열정을 극복하기위한 엄격한 훈련과 자기 부정이 시사돼있다.
◉ 바울은 악한 성향과 후패한 정욕과 성벽을 모두 완전히 극복하려는 확고부동한 목적을 드러낸다. 그는 어중간한 방책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현세의 본성이 어떤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끝장을 봐야만 하는 싸움이라는 점과, 신령한 열망과 양립하지 못하는 악이 사라져야만 함을 알았다.
이것은 하늘 시만으로 승인 받을 자격을 갖추고자 소망하는 모든 사람이 배워야만 하는 교훈이다. 본성의 욕망과 열망에서 나온 자극과 갈망은 소멸 시켜야만 한다. <정로의 계단 43-44, 60> <본교성경주서(한)12권 241-243p>
◉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 것처럼 육체도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운동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현재의 건강상태가 규칙적인 운동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이미 존재하는 건강상의 문제나 장애가 있다면, 의사로부터 적당한 강도의 운동을 처방받는 것이 현명하다.
어떤 운동을 하든지 3가지 점을 명심하라: 빈도, 강도, 시간
1) 빈도 : 현재 건강이 최상의 상태라면 일주일에 여섯 번 운동하기를 권한다.
2) 강도 : 운동의 강도는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꾸준한 성격이라면 운동의 강도가 점점 세질 것이다.
심장박동수를 높이고 땀을 흘리는 운동이 좋다.
그러나 스스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3) 시간 : 하루에 약 45~90분 정도 운동하는 것이 좋다.
일주일에 6일 동안 매일 적어도 30분 운동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
시간을 나눠서 운동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침, 점심, 저녁 10분씩 운동할 수도 있다.
그대에게 맞게 프로그램을 조정해야 한다. 걷기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형태의 운동이다.
◊ <움직여야 산다.>
“목사, 교사, 학생, 그 밖의 정신노동자들은 육체적 운동으로 제거되지 않는 심한 정신적 부담으로 초래된 질병 때문에 때때로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많은 활동적인 생애이다. 적당한 운동과 함께 병행되는 엄격한 절제의 습관은 정신적, 육체적 활력을 확보해 주고, 모든 정신노동자들에게 인내력을 줄 것이다.”(치료봉사, 238)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 특별한 명예로 생각되었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주에 임한 사람들은 모든 것에 절제함으로 그들의 근육과 뇌와 모든 지체가 경주에 최적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모든 것에 절제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원하던 몸의 탄력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절제하면 더 성공적으로 잘 뛸 수 있으며, 면류관을 받을 것이 더 확실해질 것이었다.”(교회증언 2권, 357)
◉ 운동은 현재의 건강상태에 따라 조절해야 하며, 규칙적인 운동은 지능을 높이고,
여러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다.
“은혜 중에 자라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사업을 사욕이 없이 행하는 것이니 곧 우리의 재능이 미치는 대로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복되게 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 힘이라는 것은 활동함으로 생기는 것이니 활동이야말로 생명의 필수 조건이다. 은혜로써 주는 복을 받음으로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일하지 아니하고 먹고 살려는 자와 같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에 있어서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언제나 퇴화와 쇠퇴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의 수족을 쓰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오래지 아니하여 그 수족을 쓸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쓰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가졌던 능력까지 잃어버릴 것이다.”(정로의 계단, 80~81)
▣ <초점(焦點)>
영성과 육체는 단련함으로 인하여 건강해진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도 건강도 온전히 유지하는 비결은 단련을 통하여 이르러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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