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 성령의 열매인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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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3-15 22:06 조회6,15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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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03월20일(안) (일몰: 오후 6시 43분)
제12과 성령의 열매인 진리(眞理)
<硏究範圍> : 대하 25:2, 시 51:17, 렘 29:13, 요 7:16~17, 14:6, 17:3, 히 5:14. <核心本文> : 요 17:3
<記憶節> :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 <진리(眞理)의 공부를 하기 전에 한마디!>
세상이 너무 어둡다.
참과 거짓, 옳고 그름, 희고 검은 것을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진리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증거(證據)하시는 일로 생명까지 버리셨다.
어느 분이 말씀하기를 종교가 타락하고, 타락한 종교와 위정자가 손을 잡으면 그 결과는 말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이제 더욱 실감이 나는 때이다.
지금 세상이 너무 어두우니 자식이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승과 제자간(弟子間)에 구분이 없고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지 못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모호하고, 진리와 오류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6만개 정도의 교회가 있는데 신학교는 242개교나 된다. (1996년12월 현재)
그중 태반이 교회와 기도원에 점포를 차리듯 벌려놓고 하나같이 총회신학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
이런 학교들 중에는 매 월요일 두, 세 시간 야간에 공부하고 6개월이면 목사안수를 주는 초특급 목사제도가 태반이며, 그 수도 상당히 많아 일 년에 거의 만 명이나 배출된다고 한다.
그런 목사들이 교회를 개척할 경우 성공률은 1%도 되지 않고, 혹시 정식 신학대학의 과정을 밟은 목사로 큰 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밟고 개척 현장으로 뛰어든 목사들의 개척 성공률이 10% 정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사를 배출하는 점포 신학교들의 학교 연혁은 저마다 모두 평양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70년, 80년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죄악이 죄악을 낳는 다고, 목사를 배출하는 신학의 학장이라면 그래도 박사학위쯤은 있어야 한다며 외국의 복덕방 같은 곳에서 만들어서 파는 장난감 박사학위를 2백만 원, 3백만 원, 5백만 원이나 주고 사다가진짜 박사학위 소유자로 행세하는 모습이다.
비공식 조사에 의하면, 가짜 박사학위 소유자중 90%가 개신교 목사들이요, 10%가 비기독교인데 그들은 현재 교수직에 있거나 상당한 위치에 있는 인사들이란다.
그 90%의 가짜 박사학위는 천주교회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는 단 하나도 없을뿐더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분위기는 박사학위를 내세우는 것조차 스스로 부끄럽게 느끼는 정도이다.
엉터리 목사에 가짜박사목사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인 20-30명 모이는 교회 10개만 되면 교단을 꾸며 독립을 하기 때문에 현재 장로교단만도 130개 교단이 넘는다고 하니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여운사 발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13-14p>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이 세상에서 목소리가 크다고 진리이겠는가?
이 처럼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많은 개신교회의 목사님들의 양심을 생각해볼 때 많은 이단이나 왜곡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물질이 부요하고 많다고 진리이겠는가?
교회 건물이 크고 교인수가 많다고 진리교회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진짜는 진리가 되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성경 그자체가 시금석이다. 성경에 없는 말로 성도들을 현혹하거나 성경 말고 엉뚱한 교리나 서적으로 성경말씀을 왜곡하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진리(眞理)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른길 진리를 찾아 바로 믿는 특권을 누립시다.
<學習目標>
I. 깨닫기 : <예수께서 진리를 정의하심>
진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됨을 깨닫는다.
II. 느끼기 : <자유와 진리>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III. 행하기 : <진리를 우리의 안내자로 삼음>
성경이 구원과 생명과 소망의 안내자임을 삶을 통해 보여준다.
<要點>
예수께서 규명하신 대로 성경은 계시된 진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순복함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인생의 안내자이다.
▣ 진리(眞理)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알레쎄이아(aletheia)인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실제적 사실, 사건, 원칙과 같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과 가장, 기만이 없는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는 주관적 진리이다.
그런데 진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그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주관적인 면도 있다.
이 둘이 우리 삶에 실현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진리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진리에 의해 삶이 변화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과 3년 반 이상이나 함께 있었다.
유다는 그에게 계시된 온갖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다만 읽음으로써 알게 된 사실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지식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조심해야 한다. <교과 162p>
일요일(3월 14일)
<"내가 … 진리(眞理)요"(요 14:6)>
◈ <내가 곧 길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引導)하는 분인 동시에 통로(通路)이시다. (요 10:9)
구원(救援)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 (행 4:12).
또한 그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시다. (요 8:32)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로마서 6:4)을 풍성히 주시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요 10:10; 시 36:9).
◈ <진리(眞理)에 대하여>
( 진리(眞理)의 낱말 뜻 )
1. 히브리어 = 에마트 - 안정성, 확실함, 진리, 진실, 확립, 참되다.
2. 헬라어 = 알레데이아 - 진리, 참되다, 참되게, 진실성
알레듀오 - 진실 되다, 진리를 말하다.
◈ 진리(眞理)에 대한 성구(聖句)
1. 무엇이 진리인가(진리의 정의(定義)
(시 119:142) - 주의 법이 진리이다. (시 119:151) - 주의 계명이 진리이다.
(요 1:14) - 예수님께서 진리가 되신다. (요 14:17) - 성령의 진리
(요 14:16) - 보혜사 진리 (갈 2:5) - 복음이 진리
(딤전 3:15) - 교회가 진리
2. 성도(聖徒)가 진리에 거(居)하려면(방법)
(잠 14:22) - 선을 경영함으로 (전 12:10) - 진리를 구하여야 함
(요 18:37) - 진리 안에 거하므로 (고전 13:6) - 사랑하는 자
(엡 4:24) - 새 사람을 입어야 (딤후 2:25) -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요일 1:8) - 죄를 인식함으로 (엡 6:14) - 띠를 띨 것
(딤후 2:15) - 선하게 분별할 것 (요일 2:4) - 계명을 지켜야 함
3. 진리(眞理)대로 생애한 자의 결과
(잠 12:17) - 의(義)를 나타내는 생활을 함 (요 3:21) - 빛 가운데 있게 됨
(고후 11:10-11) - 길을 막을 자가 없음 (딤전 4:3) - 식물의 제재가 없음
(딤후 2:25-26) - 진리의 종이 됨 (딛 1:1) - 진리의 지식을 가짐
(벧전 1:22) - 영혼이 깨끗하게 됨 (요일 3:19) - 주 앞에 견고케 됨
○ 과학을 초월하는 진리
파스칼은 위대한 수학자 과학자 철학가였다. 그는 16세 때 투영기하학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청년 때에는 계산기, 수압기 등을 발명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차원 너머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1654년 11월 23일 밤 성경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깨닫고 진리를 탐구, 저 유명한 [팡세]를 썼다. 이날 그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과학의 하나님이 아니다]
○ 불변(不變)의 진리
이태리의 천문학자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선포함으로 인해 17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교회는 그를 이단자를 탄핵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가 가르치는 특권을 빼앗긴 후에 그의 주장을 철회했다고 하지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대주교 쾨니히 추기경은 지금이라도 갈릴레오에게 내려졌던 정죄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 와서야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에게 내려진 정죄를 철회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을 따라 흘러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듯 진리는 공감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 그것이 진리임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흐르지 못하게 막으려 했으나 20세기의 강을 흐르고 있다.
○ 신앙(信仰)의 진리(眞理)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은 일 년 내내 세계의 피서객들이 모여서 해수욕을 하는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그런데 하와이 해변가에서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하면서 수영을 즐기다 보면 모래밭에 귀중품들을 떨어뜨려 잃어버리곤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난 다음에 금속 탐지기를 가지고 그 모래사장 위를 왔다 갔다 하면 그 속에 감춰졌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발견되고 롤렉스시계가 발견이 됩니다. 그건 찾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주인이 없습니다. 신앙도 보화와 같이 찾는 자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도 구하는 자만 얻지 우연히 잠을 자다 보니까 찾아지거나 솟아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구하고 찾을 때 발견됩니다.
○ 이행부족
몇 년 전에 나는 연극배우 친구를 가진 어느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배우는 연극이 상연될 때마다 많은 관객을 끌었으며 목사님은 대조적으로 교회에서 몇 사람 되지 않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배우인 그의 친구에게 "자네는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지만 내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네. 그 이유가 뭘까? 자네 말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내 말은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일 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배우 친구는 "나는 꾸며낸 이야기를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네는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다네. " 하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태도나 방식을 통하여 또는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행부족으로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로 알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 진리는 하나
인도에서 힌두교 학자로 유명했던 어느 대학교수가 미국에 초빙되어 와서 신앙 간증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교수는 젊었을 때에는 힌두교에 매력을 느끼고 깊이 파고들었으나 날이 갈수록 힌두교에 대해 공허감을 느끼고 뚜렷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자매로부터 예수님을 소개 받았으나 여전히 갈등을 겪다가 어느 날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루는 뉴델리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까지 모두 4사람이 제각기 종교가 다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우리들은 종교가 제각기 다르지만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지요. 도달하는 길이 조금씩 다르지만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오. 결국 우리는 한 배에 타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동의를 구하듯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었습니다.
이때 가만히 앉아있던 그 교수가 버럭 고함을 쳤습니다. "아니오, 당신들은 같은 배를 탔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나는 다른 배를 탔소!" 진리는 거짓에 대해서 관용할 수 없습니다.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인도 교수의 말처럼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 진리를 간구(懇求)하는 삶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순례의 길을 걸어온 한 젊은이가 수도자(修道者)를 만났습니다.
젊은이는 수도자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도자는 젊은이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에서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도자는 계속 이 젊은이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젊은이가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수도자는 그를 끌어내놓고 물었습니다."물속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숨 쉬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진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갈급하게 노력해 보았는가?
진리는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자만이 얻게 되는 것이라네."
○ 진리(眞理)와 수난(受難)
번연의 천로역정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기독도와 같이 천성을 향해가던 '신실'이란 이가 헛된 전람회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은 헛된 사치물 즉 집,땅,직업,장소,영광,관직,소유권,나라,왕국,정욕의 대상들, 쾌락의 대상들, 기생, 창녀, 주인, 종, 생명, 피, 은금, 진주와 보석들을 파는 곳이었다. 어떤 사람이 기독도와 신실을 향해 "너희는 무엇을 사겠는가?"고 물었다. 그때에 이들은 엄숙히 대답하기를 "우리는 진리를 사렵니다."라고 했다. 그 전람회의 상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잡아서 때리고 가두었다. 신실은 핍박으로 인해 마침내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이것은 진리를 쫓다가 수난당하는 성도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 하나님을 아는 방법
설익고 건방진 공대 4학년생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아는가?" 했더니 조금은 안다고 했다. "10%를 아는가?" 했더니 100만분지 1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99%속에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존재하는지 않는지 그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 모른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전 공간(空間)과 시간(時間), 그리고 모든 존재를 다 뒤져볼 수 없다. 하나님을 철학(哲學)속에서, 비교(比較)종교 속에서, 역사(歷史) 속에서, 이성(理性)과 양심(良心) 속에서, 실험관(實驗管) 속에서, 자연(自然) 속에서 찾아봐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하나님을 안다.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내게 오신 분이다. 그 밖에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 “성경의 모든 교리는 인류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그분이 모든 교리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밝혀지지 않고 그분이 증거되지 않는 교리는 하나의 생명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교리, 5)
◈ “인류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의 인물이 있습니다. 진리의 성육신이신 주님은 무한하시다는 것을 깨닫기에, 우리는 아직도 발견해야만 할 진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교리, 6)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요 17:3) 진리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 <“진리(眞理)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는 구주의 말씀을 열심히 붙잡았으며 그의 마음은 참으로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는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727)
◉ 예수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실체이시며,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맺게 되고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월요일(3월 15일)
<성령과 진리(眞理) (요 16:13)>
▣ <성령 하나님>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창조”, “성육신”,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활동하셨다.
그분은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능력을 충만케 하셨다. 그분은 인간을 이끄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도록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되신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부여하시며, 교회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시고, 성경과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창 1:1-2; 눅 1:35, 4:18; 행 10:38; 벧후 1:21; 고후 3:18; 엡 4:11-12; 행 1:8; 요 14:16-18, 26; 15:26-27, 16:7-13) <기본교리 2007년8월10일판 85-86p >
▣ <성령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져오신다.>
그리스도는 성령을“진리의 성령” (요 14:17, 15:26, 16:13)이라고 칭하셨다.
그분의 기능은 “네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요 14:26)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요 16:130은 것이다. 그분의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요 15:26). 그리스도는 말씀 하셨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 16:13-14).
▣ <성령은 개성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노력하시고 (창 6:3), 가르치시고 (눅 12:12), 죄를 책망하시고 (요 16:8), 교회일 을 지시하시고 (행 13:2), 도우시며 중보하시고 (롬 826), 영감을 주시고 (벧후 1:21), 성화 시킨다 (벧전 1:2).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영향력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행해질 수 없다. 오직 한 인격체만이 이것들을 할 수 있다.
<기본교리2007년8월10일판 85-86p >
▣ <성령은 그리스도를 임재(臨在)케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관한 기별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도 가져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돕는 자, 요 14:16-17)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인성으로 제약을 받으신 인간 예수님은 편재하실 수 없으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떠나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나 게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 14:16-17)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표자이시지만 인간의 개성을 갖지 않으신 분이며, 그러기에 독립적인 분이시다.
<기본교리 2007년8월10일판 92p >
◈ 성령께서는 세상을 향해서는 책망의 사역을 수행 하신다. 9요 16:8-11)
하지만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는 인도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이사야 30:21)
◉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다면 말씀의 전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마음에 감화할 때에만 양심은 일깨워지고 생애는 변화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명령과 약속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로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심령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671~672)
◈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크신 지혜를 가지고 깊은 주의와 친절한 태도로 하셨다. 그는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써 하셨다.”(정로의 계단, 12)
◈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무수한 형태의 모든 기만은 사단의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라도 올바른 진리의 노선에서 떠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사단의 권세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계 14:5 참조).” (선지자와 왕, 252)
◈ “화평(和平)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 일치한다. (사 55:13, 35:1).”(소망, 302)
◈ “진리는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으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다.”(행적, 11)
◈ “마음으로 믿고 생애로 실증된 현대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 되게 하고, 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준다.”(1증언, 327)
◈ “진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감으로 주신 것이며 보호를 받고 있다.
진리는 생명을 유지할 것이며 때때로 무색하게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 끝끝내 성공할 것이다.”(2기별, 108)
◈ “육적(肉的)인 마음이 미워하는 것은 성령과 진리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구원(救援) 뿐이다.” (초기, 273)
◉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을 통해 심령이 일깨워지고 생애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감화하신다.
◉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에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證據)하시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책망들은 세상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현실에 있어서도 어려운 사실들이다.
한편 성령의 사역은 단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들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한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참조 시 51:17)
◉ <성령의 감화력(感化力)과 인간의 저항력(抵抗力)>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조절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항거하는 인간의 저항력보다 더 큰 힘으로는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면과 충고를 듣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 행동은 자기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하면 영광의 그릇이 되지는 못한다.”(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59)
◉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어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화요일(3월 16일)
<“전심(全心)으로”(렘 29:13)>
◈ <너희가 전심으로> 이 놀라운 약속(約束)은 신명기 4:29절의 반향(反響)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진실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본교 성경주석(한) 7권630p>
▶ <마음을 다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求)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 4:29)
사람의 동기는 순수하고 영적(靈的)이어야 한다. (신 6:5; 10:12; 11:13; 30:2, 6, 10) <본교 성경주석(한) 2권5518p>
▶ <너는 마음을 다하고>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존재 자체와 마음, 애정, 능력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한다. (살전 5:23).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동기, 애정, 감정, 욕구, 의지 등을 일컫는 용어이다.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며 생각과 감정의 중심이다. 9축 31:6; 36:2; 대하 9:23; 전 2:23).
“성품”(soul)으로 번역된 단어는 근본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을 불어넣는 원리를 나타내지만, 신체적 욕구와 갈망까지도 포함한다. (참조 민 21:5). 잠언 23:2과 전도서 6:7에서는 이 단어를 “탐식”으로 번역하였다.
“힘‘으로 번역된 단어는 ”증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파생 되었다. 그 명사형은 ”풍부“를 뜻하며, 사람이 이생에서 축적한 것 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 2권526-527>
▶ 역대하 25장에 나오는 “아마샤”는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왕하 14:3) 요아스(대하 24:2)와 아마샤에 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적어도 두 왕 모두 그들의 전체 치세(治世) 중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둘 다 현저한 약점을 드러냈으며 저희 단점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아마샤가 산당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참조, 왕하 14:4)
▣ 예레미아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고 있는 중이며 따라서 회개(悔改)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의 무관심내지는 무지(無知)를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다. 죄는 즉시 회개하지 않고 놓아두게 되면 우리의 영적(靈的)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도(聖徒)는 늘 기도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는 진실 되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겸손함(롬 8:26)과 아울러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려는(히 12:4) 결단성이 전제 되어야 한다.
◉ “전심으로”라는 말은 우리 입술의 말과 행동이 ‘진실로’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하다’(sincere)라는 말은 라틴어의 시네(sine, ~없다는 뜻임).와 세라(cera, 밀랍을 뜻함)가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 정직하지 못한 조각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난 흠집과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몰래 밀랍을 발랐는데,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함이란 인위적이지 않고 참되고 진솔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 역대하 25:2를 이 구절은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 ‘온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의 샬렘(shalem)인데, 여기서 샬롬(shalom)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샬렘은 기본적으로 ‘충만한’, ‘완벽한’, ‘평화로운’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한 왕이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못된 동기로 바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가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이고, 우리 자신을 항상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맨 먼저 구한 것이 “정성된 마음”(a perfect heart; 대상 29:19)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 참되고 바른 것에 마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나뉜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그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충성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샬렘(shalem,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자아를 온전히 버리는 것이 열쇠이다. 그것은 물론 쉽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제 살펴본 대로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교과 168p>
◉ <전심으로 주님을 찾음>
“주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와 은총의 표현으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그분께 버림을 당할 것이다. 진리를 양보하므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노력할 때 그들은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교회증언, 9권, 230)
◉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올곧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리킨다.
수요일(3월 17일)
<화인 맞은 양심(良心) (딤전 4:2)>
▣ <자기 양심이>
문자적(文字的)으로 “그들 자신의 양심이”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속임수들은 동시에 기만자(欺瞞者)들로 하여금 진리에 무감각(無感覺)하게 만든다.
▣ <화인(火印) 맞아서>
곧 “쇠도장으로 낙인(烙印) 찍혀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 뜨거운 쇠로 사람의 살을 지지면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듯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해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무감각해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양심에 어떤 감화도 주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마침내 자기 영혼에 하는 모든 호소를 무시하게 된 유다의 행로를 참조하라. (참조 눅 22:3; 요 6:70; 13:27). 다른 이들은 이것을 인(印)이 그 자국을 남기듯이 “귀신의 가르침” (딤전 4:1)과 위선적(僞善的)인 “거짓말” (딤전 4:2)이 사단의 인(印)으로서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든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흔적“(갈 6:17)을 지닌 것처럼, 기만자(欺瞞者)들도 그것에 해당되는, 사단에 대한 충성의 표식들을 지니게 될 것이다. <본교 성경주석(한) 13권342p>
◈ <화인(火印) 맞은 양심(良心)> (딤전 4:2절)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 맞아서 외식(外飾)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火印)은 헬라어"카우테리아조"라는 단어(單語)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그 어원(語源)을 찾아 올라가보면 뜨거운 열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의 언어로 나옵니다. 뜨거운 쇠로 사람을 지지는 무서운 고문들이 자행했던 일들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지져진 곳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듯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여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무감각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양심에 어떤 감화도 주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마침내 자신의 영혼에 호소하시는 음성을 무시해버린 유다의 모습을 통하여 화인(火印)맞은 양심의 위태로움을 보여주고 있네요. 다른 이들은 이것을 인이 그 자국을 남기듯이 귀신의 가르침과 위선적인 거짓말이 사단의 인으로서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든다고 여기고 있음을 바울은 말을 하고 있는 성경 절입니다. 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기만자(欺瞞者)들도 그것에 해당하는 사단에 대한 충성의 표적들을 지니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린 다 연약하기에 실수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가 있는지 아님 일어설 수가 없는 이미 마음이 화인(火印)맞아 무디어져서 무엇이 죄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말씀에 마음을 온전히 열어 주의 빛이 나의 심령을 깨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되시길 바랍니다.
◉ <표준에 맞추어진 양심>
“인간의 양심은 변한다. 어떤 양심들은 ‘약하’고, 다른 양심들은 ‘더럽’고 ‘악(惡)하’며 ‘화인(火印) 맞’았다(고전 8:7, 12, 딛 1:15, 히 10:22, 딤전 4:2). 시계처럼, 그것들이 아무리 잘 작동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확한 표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양심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 즉 그분의 율법에 맞추어져 있는 양심만이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기본교리, 2007년, 329) (교리, 222)
▣ “죄책감에 대한 해독제(解毒劑)는 용서로서(마 6:12), 그 결과로 청결한 양심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용서를 회개(悔改)하는 죄인에게 허락하기를 갈망하신다. 죄짐을 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를 향해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스럽게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교리, 90)
◉ 우리의 은밀(隱密)한 속마음까지 읽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야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어야겠다.
목요일(3월 18일)
<진리(眞理) 가운데 행함.(요이 1:4)>
▣ <진리 가운데 행함>이란
한결 같이 진리의 통제 아래 살며, 영원한 본향을 향한 발걸음의 일부로서 이 땅에서의 모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함을 가리킨다. <본교 성경주석(한) 14권377p>
▣ <진리가운데에서 행함의 삶이란 >
자신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 받은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불의를 제거 하고자 하는 데에 철두철미하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죄인 자신도 죄를 버림으로서 하나님과 협력 해야만 한다. 영적 계획에 따른 다면, 정결케 하는 일은 완성될 것이다.
옛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다시 생애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기도(祈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롬 6:11-13; 고전 9:27).
의지(意志)에 뒤 따르는 행동은 단호하지만, 의지는 그리스도가 그것을 정결케 하고 강하게 하기가지는 연약하고 흔들린다. 기만적인 마음은 종종 그 옛길에 대한 감추인 열망을 가지며 계속적인 방종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들을 획책한다. 이러한 위험을 부단히 자각(自覺)하고 목적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이 죄 없음에는 필수적인데(정로의 계단. 52p). 이는 사람이 생애의 모든 죄 된 욕망과 경향을 근절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하늘이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일 3:6-10; 유다서 1장24절 참조) <본교 성경주석(한) 14권300p>
◉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요한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 혹은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문(儀文)에 따라 십계명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진리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의해 드러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날카롭고 까다로우며 용서할 줄 모르고 복수심에 불타며 증오심이 가득하고 냉정하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자신의 향상을 위해 그들을 짓밟는다면, 아무리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아무리 신실하게 건강 기별을 따르고 아무리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바른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때가 많다. <교과 172p>
◉ <공언하는 바대로 실행함>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믿는다 할지라도, 믿음을 통해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 책에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3:24;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언할지라도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재림교 성경주석, 마 22:11~12)
◉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에서 교리와 신학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넘어 진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일한 시간의 분량이 아니라 그 일에 자원해서 바친 우리의 마음과 충실함이다. 모든 봉사에는 완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아무리 작은 의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잊고 성심 성의껏 행할 때에는 이기심으로 오염된 가장 큰일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이 된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고 있으며, 우리의 일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취한 일의 분량보다도 우리가 일하는 동안 가졌던 사랑과 성실성을 더욱 귀히 보신다.”(실물교훈, 402)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큰 보상을 받는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생애 함으로써 품성이 형성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랑스러움이 영혼에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속성들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반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하는 남녀들의 얼굴은 하늘의 화평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늘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영혼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예를 가지게 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업을 행하도록 위탁을 받는다.”(재림신도의 가정, 535)
◈ “참된 성화는 사랑의 원칙을 실천함으로 이룩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의 생애에는 실제적 경건이 나타날 것이다. 품성은 순결하고, 향상되고, 고상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순결한 교리가 의의 행위와 섞이고 하늘의 규례가 거룩한 행실과 혼합될 것이다.”(행적, 559)
<초점(焦點)>
진리(眞理)란 참을 말하는 것이다. 참이란 근본(根本)을 말하는 것인데 그 근본이 진리이다. 진리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분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참이 아닐 때에는 우주 자체가 존속할 수가 없다. 우주와 천체가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는다면 그 운행에 있어서 얼마나큰 차질이 오겠는가. 존속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며 그 진리 되시는 창조주에게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제12과 성령의 열매인 진리(眞理)
<硏究範圍> : 대하 25:2, 시 51:17, 렘 29:13, 요 7:16~17, 14:6, 17:3, 히 5:14. <核心本文> : 요 17:3
<記憶節> :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 <진리(眞理)의 공부를 하기 전에 한마디!>
세상이 너무 어둡다.
참과 거짓, 옳고 그름, 희고 검은 것을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진리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증거(證據)하시는 일로 생명까지 버리셨다.
어느 분이 말씀하기를 종교가 타락하고, 타락한 종교와 위정자가 손을 잡으면 그 결과는 말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이제 더욱 실감이 나는 때이다.
지금 세상이 너무 어두우니 자식이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승과 제자간(弟子間)에 구분이 없고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지 못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모호하고, 진리와 오류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6만개 정도의 교회가 있는데 신학교는 242개교나 된다. (1996년12월 현재)
그중 태반이 교회와 기도원에 점포를 차리듯 벌려놓고 하나같이 총회신학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
이런 학교들 중에는 매 월요일 두, 세 시간 야간에 공부하고 6개월이면 목사안수를 주는 초특급 목사제도가 태반이며, 그 수도 상당히 많아 일 년에 거의 만 명이나 배출된다고 한다.
그런 목사들이 교회를 개척할 경우 성공률은 1%도 되지 않고, 혹시 정식 신학대학의 과정을 밟은 목사로 큰 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밟고 개척 현장으로 뛰어든 목사들의 개척 성공률이 10% 정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사를 배출하는 점포 신학교들의 학교 연혁은 저마다 모두 평양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70년, 80년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죄악이 죄악을 낳는 다고, 목사를 배출하는 신학의 학장이라면 그래도 박사학위쯤은 있어야 한다며 외국의 복덕방 같은 곳에서 만들어서 파는 장난감 박사학위를 2백만 원, 3백만 원, 5백만 원이나 주고 사다가진짜 박사학위 소유자로 행세하는 모습이다.
비공식 조사에 의하면, 가짜 박사학위 소유자중 90%가 개신교 목사들이요, 10%가 비기독교인데 그들은 현재 교수직에 있거나 상당한 위치에 있는 인사들이란다.
그 90%의 가짜 박사학위는 천주교회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는 단 하나도 없을뿐더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분위기는 박사학위를 내세우는 것조차 스스로 부끄럽게 느끼는 정도이다.
엉터리 목사에 가짜박사목사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교인 20-30명 모이는 교회 10개만 되면 교단을 꾸며 독립을 하기 때문에 현재 장로교단만도 130개 교단이 넘는다고 하니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여운사 발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13-14p>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이 세상에서 목소리가 크다고 진리이겠는가?
이 처럼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많은 개신교회의 목사님들의 양심을 생각해볼 때 많은 이단이나 왜곡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물질이 부요하고 많다고 진리이겠는가?
교회 건물이 크고 교인수가 많다고 진리교회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진짜는 진리가 되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성경 그자체가 시금석이다. 성경에 없는 말로 성도들을 현혹하거나 성경 말고 엉뚱한 교리나 서적으로 성경말씀을 왜곡하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진리(眞理)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른길 진리를 찾아 바로 믿는 특권을 누립시다.
<學習目標>
I. 깨닫기 : <예수께서 진리를 정의하심>
진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됨을 깨닫는다.
II. 느끼기 : <자유와 진리>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III. 행하기 : <진리를 우리의 안내자로 삼음>
성경이 구원과 생명과 소망의 안내자임을 삶을 통해 보여준다.
<要點>
예수께서 규명하신 대로 성경은 계시된 진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순복함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인생의 안내자이다.
▣ 진리(眞理)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알레쎄이아(aletheia)인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실제적 사실, 사건, 원칙과 같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과 가장, 기만이 없는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는 주관적 진리이다.
그런데 진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그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주관적인 면도 있다.
이 둘이 우리 삶에 실현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진리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진리에 의해 삶이 변화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과 3년 반 이상이나 함께 있었다.
유다는 그에게 계시된 온갖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다만 읽음으로써 알게 된 사실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지식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조심해야 한다. <교과 162p>
일요일(3월 14일)
<"내가 … 진리(眞理)요"(요 14:6)>
◈ <내가 곧 길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引導)하는 분인 동시에 통로(通路)이시다. (요 10:9)
구원(救援)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 (행 4:12).
또한 그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시다. (요 8:32)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로마서 6:4)을 풍성히 주시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요 10:10; 시 36:9).
◈ <진리(眞理)에 대하여>
( 진리(眞理)의 낱말 뜻 )
1. 히브리어 = 에마트 - 안정성, 확실함, 진리, 진실, 확립, 참되다.
2. 헬라어 = 알레데이아 - 진리, 참되다, 참되게, 진실성
알레듀오 - 진실 되다, 진리를 말하다.
◈ 진리(眞理)에 대한 성구(聖句)
1. 무엇이 진리인가(진리의 정의(定義)
(시 119:142) - 주의 법이 진리이다. (시 119:151) - 주의 계명이 진리이다.
(요 1:14) - 예수님께서 진리가 되신다. (요 14:17) - 성령의 진리
(요 14:16) - 보혜사 진리 (갈 2:5) - 복음이 진리
(딤전 3:15) - 교회가 진리
2. 성도(聖徒)가 진리에 거(居)하려면(방법)
(잠 14:22) - 선을 경영함으로 (전 12:10) - 진리를 구하여야 함
(요 18:37) - 진리 안에 거하므로 (고전 13:6) - 사랑하는 자
(엡 4:24) - 새 사람을 입어야 (딤후 2:25) -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요일 1:8) - 죄를 인식함으로 (엡 6:14) - 띠를 띨 것
(딤후 2:15) - 선하게 분별할 것 (요일 2:4) - 계명을 지켜야 함
3. 진리(眞理)대로 생애한 자의 결과
(잠 12:17) - 의(義)를 나타내는 생활을 함 (요 3:21) - 빛 가운데 있게 됨
(고후 11:10-11) - 길을 막을 자가 없음 (딤전 4:3) - 식물의 제재가 없음
(딤후 2:25-26) - 진리의 종이 됨 (딛 1:1) - 진리의 지식을 가짐
(벧전 1:22) - 영혼이 깨끗하게 됨 (요일 3:19) - 주 앞에 견고케 됨
○ 과학을 초월하는 진리
파스칼은 위대한 수학자 과학자 철학가였다. 그는 16세 때 투영기하학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청년 때에는 계산기, 수압기 등을 발명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차원 너머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1654년 11월 23일 밤 성경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깨닫고 진리를 탐구, 저 유명한 [팡세]를 썼다. 이날 그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과학의 하나님이 아니다]
○ 불변(不變)의 진리
이태리의 천문학자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선포함으로 인해 17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교회는 그를 이단자를 탄핵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가 가르치는 특권을 빼앗긴 후에 그의 주장을 철회했다고 하지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대주교 쾨니히 추기경은 지금이라도 갈릴레오에게 내려졌던 정죄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 와서야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에게 내려진 정죄를 철회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을 따라 흘러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듯 진리는 공감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 그것이 진리임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흐르지 못하게 막으려 했으나 20세기의 강을 흐르고 있다.
○ 신앙(信仰)의 진리(眞理)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은 일 년 내내 세계의 피서객들이 모여서 해수욕을 하는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그런데 하와이 해변가에서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하면서 수영을 즐기다 보면 모래밭에 귀중품들을 떨어뜨려 잃어버리곤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난 다음에 금속 탐지기를 가지고 그 모래사장 위를 왔다 갔다 하면 그 속에 감춰졌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발견되고 롤렉스시계가 발견이 됩니다. 그건 찾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주인이 없습니다. 신앙도 보화와 같이 찾는 자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도 구하는 자만 얻지 우연히 잠을 자다 보니까 찾아지거나 솟아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구하고 찾을 때 발견됩니다.
○ 이행부족
몇 년 전에 나는 연극배우 친구를 가진 어느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배우는 연극이 상연될 때마다 많은 관객을 끌었으며 목사님은 대조적으로 교회에서 몇 사람 되지 않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배우인 그의 친구에게 "자네는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지만 내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네. 그 이유가 뭘까? 자네 말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내 말은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일 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배우 친구는 "나는 꾸며낸 이야기를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네는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다네. " 하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태도나 방식을 통하여 또는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행부족으로 진리를 꾸며낸 이야기로 알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 진리는 하나
인도에서 힌두교 학자로 유명했던 어느 대학교수가 미국에 초빙되어 와서 신앙 간증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교수는 젊었을 때에는 힌두교에 매력을 느끼고 깊이 파고들었으나 날이 갈수록 힌두교에 대해 공허감을 느끼고 뚜렷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자매로부터 예수님을 소개 받았으나 여전히 갈등을 겪다가 어느 날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루는 뉴델리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까지 모두 4사람이 제각기 종교가 다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우리들은 종교가 제각기 다르지만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지요. 도달하는 길이 조금씩 다르지만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오. 결국 우리는 한 배에 타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동의를 구하듯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었습니다.
이때 가만히 앉아있던 그 교수가 버럭 고함을 쳤습니다. "아니오, 당신들은 같은 배를 탔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나는 다른 배를 탔소!" 진리는 거짓에 대해서 관용할 수 없습니다.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인도 교수의 말처럼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 진리를 간구(懇求)하는 삶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순례의 길을 걸어온 한 젊은이가 수도자(修道者)를 만났습니다.
젊은이는 수도자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도자는 젊은이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에서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도자는 계속 이 젊은이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젊은이가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수도자는 그를 끌어내놓고 물었습니다."물속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숨 쉬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진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갈급하게 노력해 보았는가?
진리는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자만이 얻게 되는 것이라네."
○ 진리(眞理)와 수난(受難)
번연의 천로역정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기독도와 같이 천성을 향해가던 '신실'이란 이가 헛된 전람회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은 헛된 사치물 즉 집,땅,직업,장소,영광,관직,소유권,나라,왕국,정욕의 대상들, 쾌락의 대상들, 기생, 창녀, 주인, 종, 생명, 피, 은금, 진주와 보석들을 파는 곳이었다. 어떤 사람이 기독도와 신실을 향해 "너희는 무엇을 사겠는가?"고 물었다. 그때에 이들은 엄숙히 대답하기를 "우리는 진리를 사렵니다."라고 했다. 그 전람회의 상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잡아서 때리고 가두었다. 신실은 핍박으로 인해 마침내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이것은 진리를 쫓다가 수난당하는 성도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 하나님을 아는 방법
설익고 건방진 공대 4학년생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아는가?" 했더니 조금은 안다고 했다. "10%를 아는가?" 했더니 100만분지 1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99%속에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존재하는지 않는지 그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 모른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전 공간(空間)과 시간(時間), 그리고 모든 존재를 다 뒤져볼 수 없다. 하나님을 철학(哲學)속에서, 비교(比較)종교 속에서, 역사(歷史) 속에서, 이성(理性)과 양심(良心) 속에서, 실험관(實驗管) 속에서, 자연(自然) 속에서 찾아봐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하나님을 안다.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내게 오신 분이다. 그 밖에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 “성경의 모든 교리는 인류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그분이 모든 교리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밝혀지지 않고 그분이 증거되지 않는 교리는 하나의 생명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교리, 5)
◈ “인류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의 인물이 있습니다. 진리의 성육신이신 주님은 무한하시다는 것을 깨닫기에, 우리는 아직도 발견해야만 할 진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교리, 6)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요 17:3) 진리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 <“진리(眞理)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는 구주의 말씀을 열심히 붙잡았으며 그의 마음은 참으로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는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727)
◉ 예수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실체이시며,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맺게 되고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월요일(3월 15일)
<성령과 진리(眞理) (요 16:13)>
▣ <성령 하나님>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창조”, “성육신”,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활동하셨다.
그분은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능력을 충만케 하셨다. 그분은 인간을 이끄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도록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되신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부여하시며, 교회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시고, 성경과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창 1:1-2; 눅 1:35, 4:18; 행 10:38; 벧후 1:21; 고후 3:18; 엡 4:11-12; 행 1:8; 요 14:16-18, 26; 15:26-27, 16:7-13) <기본교리 2007년8월10일판 85-86p >
▣ <성령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져오신다.>
그리스도는 성령을“진리의 성령” (요 14:17, 15:26, 16:13)이라고 칭하셨다.
그분의 기능은 “네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요 14:26)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요 16:130은 것이다. 그분의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요 15:26). 그리스도는 말씀 하셨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 16:13-14).
▣ <성령은 개성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노력하시고 (창 6:3), 가르치시고 (눅 12:12), 죄를 책망하시고 (요 16:8), 교회일 을 지시하시고 (행 13:2), 도우시며 중보하시고 (롬 826), 영감을 주시고 (벧후 1:21), 성화 시킨다 (벧전 1:2).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영향력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행해질 수 없다. 오직 한 인격체만이 이것들을 할 수 있다.
<기본교리2007년8월10일판 85-86p >
▣ <성령은 그리스도를 임재(臨在)케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관한 기별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도 가져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돕는 자, 요 14:16-17)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인성으로 제약을 받으신 인간 예수님은 편재하실 수 없으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떠나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나 게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 14:16-17)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표자이시지만 인간의 개성을 갖지 않으신 분이며, 그러기에 독립적인 분이시다.
<기본교리 2007년8월10일판 92p >
◈ 성령께서는 세상을 향해서는 책망의 사역을 수행 하신다. 9요 16:8-11)
하지만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는 인도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이사야 30:21)
◉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다면 말씀의 전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마음에 감화할 때에만 양심은 일깨워지고 생애는 변화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명령과 약속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로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심령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671~672)
◈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크신 지혜를 가지고 깊은 주의와 친절한 태도로 하셨다. 그는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써 하셨다.”(정로의 계단, 12)
◈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무수한 형태의 모든 기만은 사단의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라도 올바른 진리의 노선에서 떠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사단의 권세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계 14:5 참조).” (선지자와 왕, 252)
◈ “화평(和平)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 일치한다. (사 55:13, 35:1).”(소망, 302)
◈ “진리는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으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다.”(행적, 11)
◈ “마음으로 믿고 생애로 실증된 현대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 되게 하고, 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준다.”(1증언, 327)
◈ “진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감으로 주신 것이며 보호를 받고 있다.
진리는 생명을 유지할 것이며 때때로 무색하게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 끝끝내 성공할 것이다.”(2기별, 108)
◈ “육적(肉的)인 마음이 미워하는 것은 성령과 진리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구원(救援) 뿐이다.” (초기, 273)
◉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을 통해 심령이 일깨워지고 생애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감화하신다.
◉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에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證據)하시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책망들은 세상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현실에 있어서도 어려운 사실들이다.
한편 성령의 사역은 단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들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한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참조 시 51:17)
◉ <성령의 감화력(感化力)과 인간의 저항력(抵抗力)>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조절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항거하는 인간의 저항력보다 더 큰 힘으로는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면과 충고를 듣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 행동은 자기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하면 영광의 그릇이 되지는 못한다.”(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59)
◉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어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화요일(3월 16일)
<“전심(全心)으로”(렘 29:13)>
◈ <너희가 전심으로> 이 놀라운 약속(約束)은 신명기 4:29절의 반향(反響)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진실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본교 성경주석(한) 7권630p>
▶ <마음을 다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求)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 4:29)
사람의 동기는 순수하고 영적(靈的)이어야 한다. (신 6:5; 10:12; 11:13; 30:2, 6, 10) <본교 성경주석(한) 2권5518p>
▶ <너는 마음을 다하고>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존재 자체와 마음, 애정, 능력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한다. (살전 5:23).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동기, 애정, 감정, 욕구, 의지 등을 일컫는 용어이다.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며 생각과 감정의 중심이다. 9축 31:6; 36:2; 대하 9:23; 전 2:23).
“성품”(soul)으로 번역된 단어는 근본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을 불어넣는 원리를 나타내지만, 신체적 욕구와 갈망까지도 포함한다. (참조 민 21:5). 잠언 23:2과 전도서 6:7에서는 이 단어를 “탐식”으로 번역하였다.
“힘‘으로 번역된 단어는 ”증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파생 되었다. 그 명사형은 ”풍부“를 뜻하며, 사람이 이생에서 축적한 것 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 2권526-527>
▶ 역대하 25장에 나오는 “아마샤”는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왕하 14:3) 요아스(대하 24:2)와 아마샤에 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적어도 두 왕 모두 그들의 전체 치세(治世) 중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둘 다 현저한 약점을 드러냈으며 저희 단점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아마샤가 산당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참조, 왕하 14:4)
▣ 예레미아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고 있는 중이며 따라서 회개(悔改)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의 무관심내지는 무지(無知)를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다. 죄는 즉시 회개하지 않고 놓아두게 되면 우리의 영적(靈的)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도(聖徒)는 늘 기도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는 진실 되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겸손함(롬 8:26)과 아울러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려는(히 12:4) 결단성이 전제 되어야 한다.
◉ “전심으로”라는 말은 우리 입술의 말과 행동이 ‘진실로’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하다’(sincere)라는 말은 라틴어의 시네(sine, ~없다는 뜻임).와 세라(cera, 밀랍을 뜻함)가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 정직하지 못한 조각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난 흠집과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몰래 밀랍을 발랐는데,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함이란 인위적이지 않고 참되고 진솔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 역대하 25:2를 이 구절은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 ‘온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의 샬렘(shalem)인데, 여기서 샬롬(shalom)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샬렘은 기본적으로 ‘충만한’, ‘완벽한’, ‘평화로운’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한 왕이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못된 동기로 바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가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이고, 우리 자신을 항상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맨 먼저 구한 것이 “정성된 마음”(a perfect heart; 대상 29:19)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 참되고 바른 것에 마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나뉜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그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충성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샬렘(shalem,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자아를 온전히 버리는 것이 열쇠이다. 그것은 물론 쉽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제 살펴본 대로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교과 168p>
◉ <전심으로 주님을 찾음>
“주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와 은총의 표현으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그분께 버림을 당할 것이다. 진리를 양보하므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노력할 때 그들은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교회증언, 9권, 230)
◉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올곧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리킨다.
수요일(3월 17일)
<화인 맞은 양심(良心) (딤전 4:2)>
▣ <자기 양심이>
문자적(文字的)으로 “그들 자신의 양심이”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속임수들은 동시에 기만자(欺瞞者)들로 하여금 진리에 무감각(無感覺)하게 만든다.
▣ <화인(火印) 맞아서>
곧 “쇠도장으로 낙인(烙印) 찍혀서.”
어떤 이들은 이것이, 뜨거운 쇠로 사람의 살을 지지면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듯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해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무감각해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양심에 어떤 감화도 주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마침내 자기 영혼에 하는 모든 호소를 무시하게 된 유다의 행로를 참조하라. (참조 눅 22:3; 요 6:70; 13:27). 다른 이들은 이것을 인(印)이 그 자국을 남기듯이 “귀신의 가르침” (딤전 4:1)과 위선적(僞善的)인 “거짓말” (딤전 4:2)이 사단의 인(印)으로서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든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흔적“(갈 6:17)을 지닌 것처럼, 기만자(欺瞞者)들도 그것에 해당되는, 사단에 대한 충성의 표식들을 지니게 될 것이다. <본교 성경주석(한) 13권342p>
◈ <화인(火印) 맞은 양심(良心)> (딤전 4:2절)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 맞아서 외식(外飾)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火印)은 헬라어"카우테리아조"라는 단어(單語)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그 어원(語源)을 찾아 올라가보면 뜨거운 열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의 언어로 나옵니다. 뜨거운 쇠로 사람을 지지는 무서운 고문들이 자행했던 일들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지져진 곳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듯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여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무감각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양심에 어떤 감화도 주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마침내 자신의 영혼에 호소하시는 음성을 무시해버린 유다의 모습을 통하여 화인(火印)맞은 양심의 위태로움을 보여주고 있네요. 다른 이들은 이것을 인이 그 자국을 남기듯이 귀신의 가르침과 위선적인 거짓말이 사단의 인으로서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든다고 여기고 있음을 바울은 말을 하고 있는 성경 절입니다. 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기만자(欺瞞者)들도 그것에 해당하는 사단에 대한 충성의 표적들을 지니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린 다 연약하기에 실수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가 있는지 아님 일어설 수가 없는 이미 마음이 화인(火印)맞아 무디어져서 무엇이 죄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말씀에 마음을 온전히 열어 주의 빛이 나의 심령을 깨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되시길 바랍니다.
◉ <표준에 맞추어진 양심>
“인간의 양심은 변한다. 어떤 양심들은 ‘약하’고, 다른 양심들은 ‘더럽’고 ‘악(惡)하’며 ‘화인(火印) 맞’았다(고전 8:7, 12, 딛 1:15, 히 10:22, 딤전 4:2). 시계처럼, 그것들이 아무리 잘 작동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확한 표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양심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 즉 그분의 율법에 맞추어져 있는 양심만이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기본교리, 2007년, 329) (교리, 222)
▣ “죄책감에 대한 해독제(解毒劑)는 용서로서(마 6:12), 그 결과로 청결한 양심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용서를 회개(悔改)하는 죄인에게 허락하기를 갈망하신다. 죄짐을 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를 향해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스럽게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교리, 90)
◉ 우리의 은밀(隱密)한 속마음까지 읽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야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어야겠다.
목요일(3월 18일)
<진리(眞理) 가운데 행함.(요이 1:4)>
▣ <진리 가운데 행함>이란
한결 같이 진리의 통제 아래 살며, 영원한 본향을 향한 발걸음의 일부로서 이 땅에서의 모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함을 가리킨다. <본교 성경주석(한) 14권377p>
▣ <진리가운데에서 행함의 삶이란 >
자신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 받은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불의를 제거 하고자 하는 데에 철두철미하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죄인 자신도 죄를 버림으로서 하나님과 협력 해야만 한다. 영적 계획에 따른 다면, 정결케 하는 일은 완성될 것이다.
옛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다시 생애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기도(祈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롬 6:11-13; 고전 9:27).
의지(意志)에 뒤 따르는 행동은 단호하지만, 의지는 그리스도가 그것을 정결케 하고 강하게 하기가지는 연약하고 흔들린다. 기만적인 마음은 종종 그 옛길에 대한 감추인 열망을 가지며 계속적인 방종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들을 획책한다. 이러한 위험을 부단히 자각(自覺)하고 목적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이 죄 없음에는 필수적인데(정로의 계단. 52p). 이는 사람이 생애의 모든 죄 된 욕망과 경향을 근절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하늘이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일 3:6-10; 유다서 1장24절 참조) <본교 성경주석(한) 14권300p>
◉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요한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 혹은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문(儀文)에 따라 십계명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진리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의해 드러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날카롭고 까다로우며 용서할 줄 모르고 복수심에 불타며 증오심이 가득하고 냉정하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자신의 향상을 위해 그들을 짓밟는다면, 아무리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아무리 신실하게 건강 기별을 따르고 아무리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바른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때가 많다. <교과 172p>
◉ <공언하는 바대로 실행함>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믿는다 할지라도, 믿음을 통해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 책에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3:24;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언할지라도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재림교 성경주석, 마 22:11~12)
◉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에서 교리와 신학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넘어 진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일한 시간의 분량이 아니라 그 일에 자원해서 바친 우리의 마음과 충실함이다. 모든 봉사에는 완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아무리 작은 의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잊고 성심 성의껏 행할 때에는 이기심으로 오염된 가장 큰일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이 된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고 있으며, 우리의 일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취한 일의 분량보다도 우리가 일하는 동안 가졌던 사랑과 성실성을 더욱 귀히 보신다.”(실물교훈, 402)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큰 보상을 받는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생애 함으로써 품성이 형성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랑스러움이 영혼에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속성들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반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하는 남녀들의 얼굴은 하늘의 화평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늘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영혼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예를 가지게 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업을 행하도록 위탁을 받는다.”(재림신도의 가정, 535)
◈ “참된 성화는 사랑의 원칙을 실천함으로 이룩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의 생애에는 실제적 경건이 나타날 것이다. 품성은 순결하고, 향상되고, 고상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순결한 교리가 의의 행위와 섞이고 하늘의 규례가 거룩한 행실과 혼합될 것이다.”(행적, 559)
<초점(焦點)>
진리(眞理)란 참을 말하는 것이다. 참이란 근본(根本)을 말하는 것인데 그 근본이 진리이다. 진리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분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참이 아닐 때에는 우주 자체가 존속할 수가 없다. 우주와 천체가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는다면 그 운행에 있어서 얼마나큰 차질이 오겠는가. 존속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며 그 진리 되시는 창조주에게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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