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성령의 열매인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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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3-11 00:25 조회6,254회 댓글0건본문
3월 20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3분)
기억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연구범위: 대하 25:2, 시 51:17, 렘 29:13, 요 7:16~17, 14:6, 17:3, 히 5:14.
안식일 오후
진리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알레쎄이아(aletheia)인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실제적 사실, 사건, 원칙과 같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과 가장, 기만이 없는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는 주관적 진리이다. 그런데 진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그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주관적인 면도 있다. 이 둘이 우리 삶에 실현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진리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진리에 의해 삶이 변화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과 3년 반 이상이나 함께 있었다. 유다는 그에게 계시된 온갖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다만 읽음으로써 알게 된 사실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지식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조심해야 한다.
핵심본문: 요 17:3
<학습 목표>
깨닫기: 진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됨을 깨닫는다.
느끼기: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행하기: 성경이 구원과 생명과 소망의 안내자임을 삶을 통해 보여준다.
< 교과 개요 >
I. 깨닫기: 예수께서 진리를 정의하심
A. 성경은 계시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이성에 의해 추리될 수도 없지만 또한 이성과 상치되지도 않는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B. 영적인 진리는 예수께서 규명하신다. 그 이상의 권위는 없다.
1. 이성만으로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2. 우리는 왜 예수님에 의해 규명된 진리를 믿는가?
3. 예수께서 길과 생명과 진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가?
II. 느끼기: 자유와 진리
A. 진리는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가져다주시는가?
B. 예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III. 행하기: 진리를 우리의 안내자로 삼음
A.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는 데는 면밀한 생각과 노력을 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1. 성경은 어떻게 매일의 삶의 지침이 되는가?
2. 진리는 소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점: 예수께서 규명하신 대로 성경은 계시된 진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순복함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인생의 안내자이다.
일요일(3월 14일) "내가 … 진리요"(요 14:6)
1. 요한복음 14:6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의 말로 간단히 설명해 보십시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답: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객관적인 진리의 실체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개인적으로 교통하여야 할 진리의 주체이시다.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오늘날 세상에 만연해 있는 주장 즉 진리는 단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일 뿐이라는 상대주의적 주장에 대하여 강력한 도전을 던진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사람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식의 모호함이 전혀 없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객관적 진리의 실체를 확립하셨다. 그분은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선언하셨다. 성경에서 상대주의의 주장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반박하는 구절은 없다.
이제 진리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진리는 한 분 곧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진리가 단지 사실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2. 위의 설명은 요한복음 17:3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답: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진리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개념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조차도 그분과 무관하게 살지는 않는다. 빌라도도 예수님과 관련이 있었으며, 대제사장 가야바도 그러하였다. 심지어 마귀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그분을 증오하는 관계이다. 복음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그분께 헌신하라는 부르심이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마침내는 자신의 생애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헌신의 관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는 구주의 말씀을 열심히 붙잡았으며 그의 마음은 참으로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는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727)
<부가설명>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론 빌라도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벌써 진리가 예수님 자신이라고 대답해놓으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지식이 아닌 인격체라고 가르치신 것과 같다. 예수님이 진리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진리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도 진리가 누구냐고 물어야 옳다. 진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만나면 자유를 얻는다. 그 자유란 곧 영생하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는 자유가 없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게 때문이다.(히2:15) 그러므로 진리를 알면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죽지 않는 생명, 곧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 오면 영생을 얻는 것이다. 죽음을 이긴 자유를 누린다. 진리가 생명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실체이시며,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맺게 되고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월요일(3월 15일) 성령과 진리(요 16:13)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다음에 나오는 심오한 통찰을 보라.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다면 말씀의 전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마음에 감화할 때에만 양심은 일깨워지고 생애는 변화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명령과 약속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로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심령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671~672)
1. 위의 글에서 엘렌 화잇은 성령의 사역의 어떤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답: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을 통해 심령이 일깨워지고 생애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감화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에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책망들은 세상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현실에 있어서도 어려운 사실들이다.
한편 성령의 사역은 단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들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한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참조 시 51:17)
성령의 감화력과 인간의 저항력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조절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항거하는 인간의 저항력보다 더 큰 힘으로는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면과 충고를 듣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 행동은 자기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하면 영광의 그릇이 되지는 못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59)
<부가설명>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만나게 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성령은 세상에서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고 예수를 나타내신다. 그분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요16:13-15) 그러므로 성령의 감화 없이는 올바르게 성경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했는데, 지식적으로도 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올바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의 감화 없이 지식적으로 올바르게 깨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올바르게 깨달을 때 성령께서는 그 깨달을 진리를 따라 올바른 인격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진정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면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며 그분 안에서 깨달을 진리의 말씀으로 진리의 인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진리의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신다.
교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어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화요일(3월 16일) “전심으로”(렘 29:13)
“전심으로”라는 말은 우리 입술의 말과 행동이 ‘진실로’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하다’(sincere)라는 말은 라틴어의 시네(sine, ~없다는 뜻임)와 세라(cera, 밀랍을 뜻함)가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 정직하지 못한 조각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난 흠집과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몰래 밀랍을 발랐는데,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함이란 인위적이지 않고 참되고 진솔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1. 역대하 25:2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어떤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까?
대하25:2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답: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온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의 샬렘(shalem)인데, 여기서 샬롬(shalom)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샬렘은 기본적으로 ‘충만한’, ‘완벽한’, ‘평화로운’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한 왕이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못된 동기로 바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가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이고, 우리 자신을 항상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맨 먼저 구한 것이 “정성된 마음”(a perfect heart; 대상 29:19)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 참되고 바른 것에 마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나뉜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그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충성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샬렘(shalem,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자아를 온전히 버리는 것이 열쇠이다. 그것은 물론 쉽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제 살펴본 대로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음
“주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와 은총의 표현으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그분께 버림을 당할 것이다. 진리를 양보하므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노력할 때 그들은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교회증언, 9권, 230)
<부가설명>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구하고 그 뜻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교과에 말한 대로 전심이라는 것은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사람의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마6:22), 성하다는 말이 “하플루스”인데 “하나”라는 뜻의 말이다. 두 눈을 가졌지만 그 초점을 하나라야 성한 눈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마6:25절 이하) 이것은 “메림나오”이다. 이 말은 “메리조”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분열된 것을 뜻한다. 염려하는 것은 분열된 마음의 상태이다. 눈이 두 초점이 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모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올곧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리킨다.
수요일(3월 17일)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책망하신 말씀(참조, 마 23:27)을 살펴보았다. ‘위선자’란 헬라어로 후포크리테스(hupokrites)인데, ‘연극배우’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의 내면의 감정과 은밀한 죄도 분별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너희는 겉으로 하는 행동과 속마음이 서로 다르구나. 겉과 속이 일치하게 행동할 수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또한 말씀하시기를,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라고 하셨다. 그분이 의미하신 바는 아주 분명하다.
1. 디모데전서 4:2과 디도서 1:15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양심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접촉점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릇된 행동을 하면 우리 내면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답: 화인 맞은 양심과 더러운 양심은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서 마침내는 객관적 지식은 가졌으나 실제로 진리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메마른 상태에 이르고 만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계속해서 악에 머물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행하면 우리의 양심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우리가 가진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기에 넉넉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가엾게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 풍성한 객관적 지식을 가진 채로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진리만으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진리야말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인 것이다.
2. 요한복음 7:16~17과 히브리서 5:14은 성령의 열매인 진리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떻게 도와 줍니까?
요7: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답: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고 참과 거짓을 식별하게 해 준다.
표준에 맞추어진 양심
“인간의 양심은 변한다. 어떤 양심들은 ‘약하’고, 다른 양심들은 ‘더럽’고 ‘악하’며 ‘화인(火印) 맞’았다(고전 8:7, 12, 딛 1:15, 히 10:22, 딤전 4:2). 시계처럼, 그것들이 아무리 잘 작동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확한 표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양심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 즉 그분의 율법에 맞추어져 있는 양심만이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329)
<부가설명>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불에 타게 된다. 불에 탄 부위에는 감각이 없다. 화인 맞은 양심이란 감각이 없는 양심을 뜻한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그 일에 대하여 마침내 감각이 없어진다. 양심이 더러워졌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하는 일이 잘못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앙생활도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지 않고 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양심이 예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과민하여 죄 아닌 것을 죄로 여기고 괴로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른 길을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을 구하고 성경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연구하여 오직 진리 안에서 생활이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양심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교훈: 우리의 은밀한 속마음까지 읽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야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어야겠다.
목요일(3월 18일) 진리 가운데 행함(요이 1: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1. 위의 두 구절은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까?
답: 진리를 따라 행치 아니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하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요한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 혹은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문(儀文)에 따라 십계명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진리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의해 드러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날카롭고 까다로우며 용서할 줄 모르고 복수심에 불타며 증오심이 가득하고 냉정하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자신의 향상을 위해 그들을 짓밟는다면, 아무리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아무리 신실하게 건강 기별을 따르고 아무리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바른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때가 많다.
공언하는 바대로 실행함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믿는다 할지라도, 믿음을 통해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3:24;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언할지라도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마 22:11~12)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생활이다. 이론도 있지만, 이론만 아는 것은 학문을 하는 것일는지는 몰라도 신앙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생활인 이유는 그것은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활하게 되어 있다. 이 생활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탁월해도 생명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함께 부활한 사람들은 새 생명으로 행한다고 분명히 말한다.(롬6:4) 그러므로 생활이 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야고보는 그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믿음으로 삶이 이어지는지 자주 점검해야 할 것이다.
교훈: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에서 교리와 신학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넘어 진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금요일(3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일한 시간의 분량이 아니라 그 일에 자원해서 바친 우리의 마음과 충실함이다. 모든 봉사에는 완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아무리 작은 의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잊고 성심 성의껏 행할 때에는 이기심으로 오염된 가장 큰일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이 된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고 있으며, 우리의 일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취한 일의 분량보다도 우리가 일하는 동안 가졌던 사랑과 성실성을 더욱 귀히 보신다.”(실물교훈, 402)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큰 보상을 받는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생애함으로써 품성이 형성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랑스러움이 영혼에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속성들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반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하는 남녀들의 얼굴은 하늘의 화평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늘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영혼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예를 가지게 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업을 행하도록 위탁을 받는다.”(재림신도의 가정, 5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상대적인 진리도 있을 수 있을까요? 혹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진리가 비진리로 바뀔 수 있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상대적인 진리는 상황윤리이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생명 질서이다. 생명은 예나 지금이다 동일한 것이다. 진리가 생명의 질서라면 변할 수 없다.
2. 진리가 머리로 깨닫는 지식 그 이상이라면 왜 말씀 연구에 시간을 바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성경 연구를 통해 진리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진리는 생명 질서인데, 성경이 그것의 바른 질서를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생명 질서를 뒤엉기게 하여 사망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생명은 성경의 질서를 따르는 생태를 나타낸다.
3. 죄로 인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까요?
*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감동을 간구하는 일이 가장 좋은 도움이 될 것이며, 할 수 있으면 믿음으로 하는 사랑의 봉사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를 믿는 믿음은 생활원리요,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정말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리라.
기억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연구범위: 대하 25:2, 시 51:17, 렘 29:13, 요 7:16~17, 14:6, 17:3, 히 5:14.
안식일 오후
진리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알레쎄이아(aletheia)인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실제적 사실, 사건, 원칙과 같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과 가장, 기만이 없는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는 주관적 진리이다. 그런데 진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그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주관적인 면도 있다. 이 둘이 우리 삶에 실현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진리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진리에 의해 삶이 변화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과 3년 반 이상이나 함께 있었다. 유다는 그에게 계시된 온갖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다만 읽음으로써 알게 된 사실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지식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조심해야 한다.
핵심본문: 요 17:3
<학습 목표>
깨닫기: 진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됨을 깨닫는다.
느끼기: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행하기: 성경이 구원과 생명과 소망의 안내자임을 삶을 통해 보여준다.
< 교과 개요 >
I. 깨닫기: 예수께서 진리를 정의하심
A. 성경은 계시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이성에 의해 추리될 수도 없지만 또한 이성과 상치되지도 않는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B. 영적인 진리는 예수께서 규명하신다. 그 이상의 권위는 없다.
1. 이성만으로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2. 우리는 왜 예수님에 의해 규명된 진리를 믿는가?
3. 예수께서 길과 생명과 진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가?
II. 느끼기: 자유와 진리
A. 진리는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가져다주시는가?
B. 예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III. 행하기: 진리를 우리의 안내자로 삼음
A.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는 데는 면밀한 생각과 노력을 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1. 성경은 어떻게 매일의 삶의 지침이 되는가?
2. 진리는 소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점: 예수께서 규명하신 대로 성경은 계시된 진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순복함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인생의 안내자이다.
일요일(3월 14일) "내가 … 진리요"(요 14:6)
1. 요한복음 14:6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의 말로 간단히 설명해 보십시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답: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은 객관적인 진리의 실체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개인적으로 교통하여야 할 진리의 주체이시다.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오늘날 세상에 만연해 있는 주장 즉 진리는 단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일 뿐이라는 상대주의적 주장에 대하여 강력한 도전을 던진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사람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식의 모호함이 전혀 없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객관적 진리의 실체를 확립하셨다. 그분은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선언하셨다. 성경에서 상대주의의 주장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반박하는 구절은 없다.
이제 진리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진리는 한 분 곧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진리가 단지 사실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2. 위의 설명은 요한복음 17:3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답: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진리이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개념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조차도 그분과 무관하게 살지는 않는다. 빌라도도 예수님과 관련이 있었으며, 대제사장 가야바도 그러하였다. 심지어 마귀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그분을 증오하는 관계이다. 복음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그분께 헌신하라는 부르심이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마침내는 자신의 생애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헌신의 관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는 구주의 말씀을 열심히 붙잡았으며 그의 마음은 참으로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는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727)
<부가설명>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론 빌라도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벌써 진리가 예수님 자신이라고 대답해놓으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지식이 아닌 인격체라고 가르치신 것과 같다. 예수님이 진리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진리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도 진리가 누구냐고 물어야 옳다. 진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만나면 자유를 얻는다. 그 자유란 곧 영생하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는 자유가 없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게 때문이다.(히2:15) 그러므로 진리를 알면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죽지 않는 생명, 곧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 오면 영생을 얻는 것이다. 죽음을 이긴 자유를 누린다. 진리가 생명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실체이시며,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맺게 되고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월요일(3월 15일) 성령과 진리(요 16:13)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다음에 나오는 심오한 통찰을 보라.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다면 말씀의 전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마음에 감화할 때에만 양심은 일깨워지고 생애는 변화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명령과 약속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로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심령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671~672)
1. 위의 글에서 엘렌 화잇은 성령의 사역의 어떤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답: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을 통해 심령이 일깨워지고 생애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감화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에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책망들은 세상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현실에 있어서도 어려운 사실들이다.
한편 성령의 사역은 단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들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한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참조 시 51:17)
성령의 감화력과 인간의 저항력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조절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항거하는 인간의 저항력보다 더 큰 힘으로는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면과 충고를 듣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 행동은 자기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하면 영광의 그릇이 되지는 못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59)
<부가설명>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만나게 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성령은 세상에서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고 예수를 나타내신다. 그분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요16:13-15) 그러므로 성령의 감화 없이는 올바르게 성경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했는데, 지식적으로도 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올바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의 감화 없이 지식적으로 올바르게 깨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올바르게 깨달을 때 성령께서는 그 깨달을 진리를 따라 올바른 인격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진정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면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며 그분 안에서 깨달을 진리의 말씀으로 진리의 인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진리의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신다.
교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어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화요일(3월 16일) “전심으로”(렘 29:13)
“전심으로”라는 말은 우리 입술의 말과 행동이 ‘진실로’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하다’(sincere)라는 말은 라틴어의 시네(sine, ~없다는 뜻임)와 세라(cera, 밀랍을 뜻함)가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 정직하지 못한 조각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난 흠집과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몰래 밀랍을 발랐는데,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함이란 인위적이지 않고 참되고 진솔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1. 역대하 25:2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어떤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까?
대하25:2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답: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온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의 샬렘(shalem)인데, 여기서 샬롬(shalom)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샬렘은 기본적으로 ‘충만한’, ‘완벽한’, ‘평화로운’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한 왕이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못된 동기로 바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가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이고, 우리 자신을 항상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맨 먼저 구한 것이 “정성된 마음”(a perfect heart; 대상 29:19)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 참되고 바른 것에 마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나뉜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그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충성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샬렘(shalem,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자아를 온전히 버리는 것이 열쇠이다. 그것은 물론 쉽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제 살펴본 대로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음
“주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와 은총의 표현으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그분께 버림을 당할 것이다. 진리를 양보하므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노력할 때 그들은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교회증언, 9권, 230)
<부가설명>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구하고 그 뜻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교과에 말한 대로 전심이라는 것은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사람의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마6:22), 성하다는 말이 “하플루스”인데 “하나”라는 뜻의 말이다. 두 눈을 가졌지만 그 초점을 하나라야 성한 눈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마6:25절 이하) 이것은 “메림나오”이다. 이 말은 “메리조”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분열된 것을 뜻한다. 염려하는 것은 분열된 마음의 상태이다. 눈이 두 초점이 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모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올곧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리킨다.
수요일(3월 17일)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책망하신 말씀(참조, 마 23:27)을 살펴보았다. ‘위선자’란 헬라어로 후포크리테스(hupokrites)인데, ‘연극배우’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의 내면의 감정과 은밀한 죄도 분별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너희는 겉으로 하는 행동과 속마음이 서로 다르구나. 겉과 속이 일치하게 행동할 수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또한 말씀하시기를,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라고 하셨다. 그분이 의미하신 바는 아주 분명하다.
1. 디모데전서 4:2과 디도서 1:15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양심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접촉점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릇된 행동을 하면 우리 내면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답: 화인 맞은 양심과 더러운 양심은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서 마침내는 객관적 지식은 가졌으나 실제로 진리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메마른 상태에 이르고 만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계속해서 악에 머물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행하면 우리의 양심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우리가 가진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기에 넉넉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가엾게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 풍성한 객관적 지식을 가진 채로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진리만으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진리야말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인 것이다.
2. 요한복음 7:16~17과 히브리서 5:14은 성령의 열매인 진리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떻게 도와 줍니까?
요7: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답: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고 참과 거짓을 식별하게 해 준다.
표준에 맞추어진 양심
“인간의 양심은 변한다. 어떤 양심들은 ‘약하’고, 다른 양심들은 ‘더럽’고 ‘악하’며 ‘화인(火印) 맞’았다(고전 8:7, 12, 딛 1:15, 히 10:22, 딤전 4:2). 시계처럼, 그것들이 아무리 잘 작동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확한 표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양심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 즉 그분의 율법에 맞추어져 있는 양심만이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329)
<부가설명>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불에 타게 된다. 불에 탄 부위에는 감각이 없다. 화인 맞은 양심이란 감각이 없는 양심을 뜻한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그 일에 대하여 마침내 감각이 없어진다. 양심이 더러워졌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하는 일이 잘못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앙생활도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지 않고 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양심이 예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과민하여 죄 아닌 것을 죄로 여기고 괴로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른 길을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을 구하고 성경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연구하여 오직 진리 안에서 생활이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양심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교훈: 우리의 은밀한 속마음까지 읽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야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어야겠다.
목요일(3월 18일) 진리 가운데 행함(요이 1: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1. 위의 두 구절은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까?
답: 진리를 따라 행치 아니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하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요한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 혹은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문(儀文)에 따라 십계명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진리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의해 드러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날카롭고 까다로우며 용서할 줄 모르고 복수심에 불타며 증오심이 가득하고 냉정하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자신의 향상을 위해 그들을 짓밟는다면, 아무리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아무리 신실하게 건강 기별을 따르고 아무리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바른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때가 많다.
공언하는 바대로 실행함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믿는다 할지라도, 믿음을 통해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3:24;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언할지라도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마 22:11~12)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생활이다. 이론도 있지만, 이론만 아는 것은 학문을 하는 것일는지는 몰라도 신앙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생활인 이유는 그것은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활하게 되어 있다. 이 생활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탁월해도 생명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함께 부활한 사람들은 새 생명으로 행한다고 분명히 말한다.(롬6:4) 그러므로 생활이 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야고보는 그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믿음으로 삶이 이어지는지 자주 점검해야 할 것이다.
교훈: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에서 교리와 신학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넘어 진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금요일(3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일한 시간의 분량이 아니라 그 일에 자원해서 바친 우리의 마음과 충실함이다. 모든 봉사에는 완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아무리 작은 의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잊고 성심 성의껏 행할 때에는 이기심으로 오염된 가장 큰일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이 된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고 있으며, 우리의 일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취한 일의 분량보다도 우리가 일하는 동안 가졌던 사랑과 성실성을 더욱 귀히 보신다.”(실물교훈, 402)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큰 보상을 받는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생애함으로써 품성이 형성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랑스러움이 영혼에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속성들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반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하는 남녀들의 얼굴은 하늘의 화평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늘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영혼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예를 가지게 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업을 행하도록 위탁을 받는다.”(재림신도의 가정, 5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상대적인 진리도 있을 수 있을까요? 혹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진리가 비진리로 바뀔 수 있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상대적인 진리는 상황윤리이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생명 질서이다. 생명은 예나 지금이다 동일한 것이다. 진리가 생명의 질서라면 변할 수 없다.
2. 진리가 머리로 깨닫는 지식 그 이상이라면 왜 말씀 연구에 시간을 바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성경 연구를 통해 진리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진리는 생명 질서인데, 성경이 그것의 바른 질서를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생명 질서를 뒤엉기게 하여 사망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생명은 성경의 질서를 따르는 생태를 나타낸다.
3. 죄로 인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까요?
*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감동을 간구하는 일이 가장 좋은 도움이 될 것이며, 할 수 있으면 믿음으로 하는 사랑의 봉사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를 믿는 믿음은 생활원리요,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정말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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