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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 성령의 열매인 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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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3-09 22:33 조회5,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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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03월13일(안) 일몰 오후6시37분

제11과 성령의 열매인 의(義)

<硏究範圍> : 마 23:25~28, 롬 3:28, 8:4, 10:3, 갈 3:6, 요일 2:3~6, 5:1~3.
<核心本文> : 롬 10:3

<記憶節>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學習目標)>
I. 깨닫기 : 의(義)의 유일한 근원이신 예수님
의(義)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됨을 확인한다.
II. 느끼기 : 하나님과 화목함
자신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갈망한다.
III. 행하기 : 의(義)와 순종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한다.

<要點>
예수님 안에 있는 의(義) 외에는 그리스도인이 승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성장이 있을 것이다.

일요일(3월 7일)
<의(義)의 필요성(必要性) (마 6:33)>

◈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의(義)이다.
이제 그 의(義)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서 부패(腐敗)했던 인간을 새롭게 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 의(義)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리는 의(義)를 두 가지로 이해(理解)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義)인데,
이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으로써 우리를 덮어주시는 의(義)이며,
하늘가는 자격(資格)을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나눠주시는 의(義)인데,
이는 그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활동으로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꼴 지으시는 과정(過程)이다.
※ 우리로 하여금 구원(救援)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의(義)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뿐이며, 서로 분리(分離)할 수 없는 두 가지 의(義)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속죄(贖罪)의 희생. 그 희생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다(롬 3:24, 2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구속주(救贖主)가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대우를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은 아무 상관이 없으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은 아무 공이 없는 우리가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교리, 292)

○.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으로 의롭게 된다.(참조 롬 3:28)

○.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더 큰 죄인이 되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죄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의로써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의(義)를 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고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 <율법과 그리스도의 의(義)>
“율법은 범죄자를 용서할 힘이 없고 범죄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인다. 그분은 만일 우리가 그분을 대속자와 보증인으로 받아들이면 내가 너의 죄를 가져가서 담당할 것이요, 나는 너에게 나의 의를 입혀 주겠다고 하신다.(재림교 성경주석, 6권, 1109)

◈ “율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참 상태를 볼 수 있도록 거울과 같은 구실을 한다. (약 1:23-25).
그것을 들여다 "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품성에 비추어 자신들의 품성의 결점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율법은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롬 3:19)이므로 그분께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함을 나타낸다.”(교리, 222)

◈ “우리의 희망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충만한 믿음의 보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인간의 노력과 연합 시키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갑옷을 입고 모든 원수를 이길 수 있다.”(선지, 111)

◉ 우리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기를 기뻐하신다.

월요일(3월 8일)
<스스로 만들어낸 의(義) (롬 10:3)>

◈ “그리하여 사단은 참된 경배의 대상이 되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의와 완전 그리고 사람이 도달하여야 할 참된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의 대신에, 죄와 거짓이 많은 사람 자신의 본성을 경배의 유일한 대상으로, 판단의 유일한 척도 혹은 인격의 표준으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이다.”(쟁투, 554)

◈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예배를 도둑질하였으며, 동료 인간들에게 신앙적인 지도와 거룩한 모본을 제공하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의식 존중주의의 틀에 매여 있었다. 율법적인 신앙에 만족하였으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늘의 산 진리를 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의 신앙이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그들의 공로와는 상관이 없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와 연결시켰다.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믿음은 의식들이나 인간의 명령들로 이루어진 바리새인들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지도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구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의로우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광이 필요 없을 정도로 큰 영광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구주께서는 그들이 남용한 특권과 그들이 경시한 사업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야 했고 당신의 말씀은 확증되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에 세워져야만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수한 도시들에 전파되어야 하였으므로 유대 지도자들이 실패한 그 사업을 하도록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 (행적, 14-16)

◈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상징적인 예배의 깊은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독선적인 그들은 모든 제사 제도와 의식들이 지적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롬 10:3) 자족할 수 있는 형식주의를 세웠다.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가 부족한 그들은 종교적 예식과 의식들을 엄격히 준수함으로 그 부족을 메꾸고자 노력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의식들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고안한 수없이 가혹한 요구로 하나님의 명령을 방해하였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더욱더 엄격하게 이 형식들을 준수하였다. 이 모든 하찮고 번거로운 부당한 요구들을 가지고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기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십계명 가운데 나타난 의의 대원칙들과 상징적 예배에 예표된 영광스러운 진리들은 인간의 유전과 법규 아래 덮이고 묻혀 버렸다.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갈망하고,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명한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자 한 사람들은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족적으로 메시야의 강림을 갈망하는 반면에 마음과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매우 멀리 떠났으므로 그들은 약속된 구주의 품성이나 사명에 대하여 참된 개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죄악으로부터의 구원과 성화의 영광과 평화를 바라는 대신에 저희 마음은 그들의 민족적 원수들로부터의 구원과 세속적 권력의 회복에 집착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복자로 오셔서 모든 멍에를 꺾으시고 이스라엘을 높여 만국을 다스리게 하실 메시야를 고대하였다. 이리하여 사단은 구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를 거절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의 마음의 교만과 그분의 품성과 사명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그들로 하여금 그분에게서 메시야의 증거를 올바로 고찰하지 못하게 막았다.”(선지, 708-710)

○. 로마서 10:3 에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힘써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은 인간의 의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 “율법이 거룩한 것은 분명하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를 지키는 것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로마서 10장 3절)함으로써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매일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보훈, 54-55)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노력은 철두철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요 부정한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의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지 그들 자신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진리에서 시선을 놓치는 순간 교만과 함께 내면의 부패가 수반되는 자기 의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적인 경건의 행위에 치중한 나머지 진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可憎)한 것>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그리스도의 책망은 처음 사랑을 잃은 신자들에게도 적용될 수가 있다. 냉랭하고 율법적인 신앙은 결코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롭다는 정신으로 금식하고 기도드릴 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098)

◉ 우리의 의(義)는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의(義)를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참된 의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지(依支)해야 한다.

화요일(3월 9일)
<그리스도, 우리의 의(義) (롬 5:17)>

◈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욱 많은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숨은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탐구하라. 그리고 원수를 실망시키라. 시련의 시기가 우리에게 임박하였는데 이는 죄를 사유하시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심으로 셋째 천사의 큰 외침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온 땅을 영광으로 환하게 할 천사의 빛의 시작이다. 경고의 기별을 받은 모든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며 표상으로 나타내고 상징으로 나타냈으며 선지자들의 계시 가운데 표현되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들과 사람들의 아들들을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 가운데 밝히신 그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이다. 성경의 말씀은 주님에 대하여 증거한 것임을 알고 연구하라.
만약 그대들이 환란의 때를 견디기 원한다면 그대들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회개한 죄인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주님의 의의 선물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리뷰 앤 헤럴드, 1892년 11월 22일).

◈ <그리스도의 의(義)를 자기의 것으로 함>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화목뿐만 아니라 회복의 계획이 마련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넓은 웅덩이가 갈바리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메워지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하고 완전한 속전이 지불되었으며 그 공로로 말미암아 죄인이 용서함을 받게 되고 율법의 공의가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을 믿는 모든 자들은 나아가 저희 죄의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받으실 수 있고 또한 나는 주님을 요구할 수 있으며 나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시켜야 할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시고 담보물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으면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이 범한 거룩하고 공의로운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일지라도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것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주장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성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고 죄인을 위하여 대속(代贖)하시므로 써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순수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죄인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자가 되게 한다. 그 까닭은 인간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며 신성과 인성이 그의 안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자는 온전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순종함이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자신의 모든 수고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셔야만 한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만을 가지고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안에 기뻐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갖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능력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은 가인의 제물로 상징되었다. 그리스도가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기심으로 부패하여진 것과 죄 뿐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것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천국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에 그 영혼은 향상하게 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우리들은 힘에서 힘을 얻게 되며 승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굳게 붙잡게 하며 구속의 경륜에서 큰 위로와 만족을 찾아낼 것이다. (1890년 7월 1일, 리뷰 앤 헤럴드).” (가려뽑은 기별 1권, 362-364)

◈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다는 것은 의롭다 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것이 곧 바울이 열렬히 주장하는바 의롭다 하심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0-25, 31)고 말하였다.”(가려뽑은기별 1권, 397)

◈ “신자가 복음의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에 할 일은 그의 품성에 덕을 더하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지식은 모든 참교육과 모든 참 봉사의 기초이다. 이것이 유혹에 대한 유일의 참 방벽이며 이것만이 사람의 품성을 하나님과 같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신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의를 얻고자 성실하게 소망하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남겨 두 시는 좋은 선물은 없다.”(사도행적, 530)

◈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당신의 율법에 완전히 일치되기를 요구하신다. 이 율법은 거룩하라, 더욱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의 메아리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을 갈망하라. 그대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 가득 채우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는 사업은 평화요 그 결과는 영원한 안정과 확신이다. ”(사도행적, 566)

◈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救世主)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로 여기시게 된다.”(가려뽑은 기별 1권, 155)

◈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의(義)는 모든 당신의 사업과 모든 당신의 율법을 특징지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과 같이 당신의 백성들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생애 가운데 밝히 나타나야만 합니다. 공중 앞에서나 개인적으로 하신 주님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또는 주님의 모든 말과 태도에 있어서 실제적인 경건이 나타났으며 이 경건은 주님의 제자들의 생애 가운데도 나타나 보여야 합니다.”(가려뽑은 기별 1권, 198)

◈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한 죄 없으심에 관하여 의혹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지적인 신앙이어야 하며 대속 제물이신 주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과 전적인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룩한 능력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게 하셨으며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셨다. 이러한 이유에서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여기신바 될 수 있다.”(가려뽑은 기별 1권, 256)

◈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영혼들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선하신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벌을 가하심으로 당신의 율법을 보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義)였다. 오직 이 방법만이 율법을 보존할 수 있으며 거룩하고 공의롭고 선한 율법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가려뽑은기별 1권, 301)

○.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를 받아 사망에 이르렀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

○.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예수님의 의의 선물을 받게 된다.

◉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義)>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로마의 회중에게 증거하였을 때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는 선물로 우리들에게 전가(轉嫁)시켜 주셨다는 사상은 실로 보배로운 생각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0)

◉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 의(義)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것을 믿음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수요일(3월 10일)
<의(義)와 순종(順從)(요일 2:29)>

◈ <하늘 본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들을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구속주가 되셨다.
그는 아담의 수치스러운 타락을 속량(贖良)하셨고,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던 이 지구를 하늘 본토와 연결시키셨다. (성경의 메아리 1894. 8. 6).”(화잇주석, 창 3:15)

◈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그분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救援)의 근원이 되시"(히 5:8, 9, 2:10, 18)었다. 그분은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으나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교리, 48)

◈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무죄한 생애를 사셔야만 했다. 둘째 아담으로서 그분은,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거나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신화를 추방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첫째 아담이 타락한 곳에서 둘째 아담은 죄와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시고 우리의 구주(救主)요 우리의 완전한 모본(模本)이 되셨다. 그분의 능력 안에서 그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요 16:33).”(교리, 52)

◈ <신자(信者)들을 위한 그분의 사명.>
“성령에 관한 성경절 중 대다수가 그분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분의 성화케 하는 감화력이 순종으로 이끈다. (벧전 1:2). 그러나 그 누구도 특정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아니하고는 그분께서 내재하시는 체험을 계속적으로 가질 수 없다. 베드로는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말했다. (행 5:32).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을 거스리고, 슬프게 하고, 소멸시키는 것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행 7:51; 엡 4:30; 살전 5:19).”(교리, 64)

◈ “그대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그대의 의지를 하나님 편에 두든지 아니면 그대의 정력을 세상을 섬기는 일에 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바치는 봉사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 RH, 1910. 9. 1.”(청지기, 217-218)

◈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행동의 법칙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조용하지만 쉬지 않고 각기 지정된 일을 수행하고 있다. 대양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들판을 아름답게 옷 입히는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자서, 87)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속제물이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대속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이루어진 대속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너희가 알거니와 … 구속된 것은 …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 19). 구원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 이르게 된 것은 우리 구세주께서 무한하신 희생을 치르시고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신 때문이었다.
모든 죄에 대한 범죄 의식이 그 놀라운 무게를 가지고 세상의 구세주의 거룩하신 영혼을 압박하였다.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들이 가진 악한 생각, 악한 말, 악한 행동은 당신 자신께 징벌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대치물이 되신 까닭이다. 비록 죄의 범죄 의식이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나 주님의 심령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멍이 들게 되었으며 우리로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죄를 모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가려뽑은기별 1권, 321)

◈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이기적인 율법으로 나타낸다. 그는 우리 인간이 그 율법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는 우리 시조(始祖)의 타락과 거기에 따른 모든 재난의 책임을 조물주에게 지우고 사람들로 하나님을 죄와 고통과 사망의 창시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예수께서는 이런 기만을 폭로시키실 것이었다. 그는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어 순종의 모본을 주실 것이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그는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경험을 몸소 체험하셨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어떤 일을 겪어야 한다면 사단은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히 4:15)으셨다. 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다. 그는 자유롭게 쓰도록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능력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으로서 시험을 대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으로써 승리하셨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괴로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특성과 그의 봉사의 본질을 명백하게 드러내셨다. 그의 생애는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소망, 24)

○.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 <의(義)는 순종과 연결된 성령의 열매이다.>
어떤 사람들은 순종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니, 그분을 주님으로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 속에 내포된 의미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문제와 따로 분리된 문제인 것처럼 들리게 한다. 그것은 구원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표식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구세주(救世主)이시다. 주님께서는 한때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으며 항상 살아 계시사 우리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우리들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가려뽑은 기별 1권, 392)

○. 순종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구원 받은 자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 순종이라는 주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물론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루스 벨을 하늘에 두신 것은 그가 순종의 덕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은 그의 불순종 때문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순종한 공로로 에덴동산에 있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되었다.
“의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은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위는 믿음의 진실한 여부를 보여 준다.”(실물교훈, 312)

◉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의무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종말을 고한 것은 의를 얻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이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시키고 도덕률과 의문률을 율법 주의적으로 순종함으로 그들 스스로의 의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잘못된 율법의 남용을 끝내시고 믿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지적하셨다. 그러한 믿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며(롬 3:31 참조) 사람들로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도와준다.”(재림교 성경주석, 롬 10:4)

◉ 순종의 공로로 구원 받을 사람도 없지만, 불순종하고 구원 받을 사람도 없다.
불순종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목요일(3월 11일)
<의(義)로운 생애(生涯) (요일 5:1~3)>

○. 하나님의 계명 곧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요구하셨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단지 의무감에서 지키는 자들은 결코 순종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의 성향과 충돌되기 때문에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애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생애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순종은 마음속에 간직한 원칙이 행동으로 실행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순종은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우리의 구속주에 대한 충성이 모든 의의 진수이다. 이 충성심이 우리를 의로운 행위로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로운 행위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실물교훈, 97~98)

◉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그분의 엄청난 희생을 숙고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일으키는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전하는 데서 능력이 나온다.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가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음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데서 권능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지옥과 정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동기를 유발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와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풍성한 약속에 초점을 맞추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 <의(義)로운 생애(生涯)>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사랑의 제자는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요일 5:1)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생애와 품성이 그리스도를 닮은 이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 세상에 오셔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다. 그분은 이 때문에 힘써 일하시고 번민(煩悶)하시다가 구원(救援)하시려고 하신 자들로 인하여 심장이 터지고 마침내는 갈바리 산상에서 생명을 버리셨다. (성화, 81)

◈ <모본(模本)을 따름>
많은 사람들은 우리 구주(救主)께서 사셨던 생애를 피한다. 그분의 모본을 따르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더욱 좋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치시는 일을 끈기 있게 견디는 것은 너무도 큰 희생을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미천한 도구로서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도움에 의존하면서 모든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는 일이 쉬운 일임을 알게 될 것이며 능히 그리스도를 위한 짐을 지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담대하고 확신 있는 태도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한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가 행로에서 장애물을 만나 그것들을 성실하게 정복하고, 반대와 치욕을 당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를 얻으며, 책임을 감당하여 우리 주님께서 가지셨던 정신으로 우리들의 의무를 이행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실과 능력에 대한 실로 고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몸소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42)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명상하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할수록 우리는 더욱 예민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더욱 진지하게 우리의 능력과 구속자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마음의 성전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할 아무런 능력이 없으나 하나님을 거스려 범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용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역사하시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는 믿음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우리는 성화 될 수 있으며 이리하여 영광의 왕국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흰 옷 입은 구속받은 자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성화, 81-83)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 아버지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며 그분은 아버지로써 우리에게 충성된 봉사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하라. 인류의 선두에 서셔서, 아버지를 섬기신 그분은 우리가 어떠한 아들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본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바치셨던 그 같은 순종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요구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를 사랑으로 섬겼으며 즐거운 마음과 부담 없는 정신으로 봉사하셨다.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성취하시러 오신 사업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너무 크다고 생각지 않으셨으며, 어떠한 수고도 너무 괴롭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셨다. 그는 열두 살 때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부르심을 듣고 그 일을 맡으셨다. 그는 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순종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표준에 이르는 자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저희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각 사람에게 시금석이 된다. 주께서는 자기를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 3:17)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는 주요 목적은 사람들을 시험하셔서 그들에게 저희 품성을 계발시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그와 같이 저희가 당신의 명령을 순종하는 여부를 시험하신다.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살 수는 없으나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값없는 선물로써 우리의 심령에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두 계급의 사람들만이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에도 단지 두 계급의 사람으로 구별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들과 그 율법을 순종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충성과 불 충성을 입증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15-2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실물, 282-283)

◉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군인이 만일 그의 사령관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군인은 그의 사령관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시다.”(재림교 성경주석, 7권, 949)
◉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그분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계명에 대한 참된 존경심은 그분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 이르러 온다.

◉ “예수님은 협잡꾼이 아니며, 성경은 공교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비록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넉넉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公言)하는 것만으로 넉넉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을 알 것이요’(요일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어떠한 공언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실물교훈, 312~313)

<초점(焦點)>

◈ 우리로 하여금 구원(救援)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의(義)의 근원은 예수님이시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비결은 그분에 뜻에 의(義)로 순종하는 것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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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
복음(福音)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복음에 대해서 그 정의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한 번씩 대답을 해보실래요?
아마 저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대답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 또는 좋은 소식, 예수 그리스도로 정도로만 이해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만 이해를 하고 있다면 복음에 대한 충분한 정의를 못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만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에 대해서 오해(誤解)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껏 하늘나라를 가는 방법이나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이 적혀 있는 방법론의 책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좀 더 나가면 성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자고 할 때, 또는 성경의 말씀대로 살자고 할 때 항상 빠지게 되는 오류가 자기가 목적하고자 하는 일의 수단과 방법과 증명으로서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에게 지금 필요한 말씀만 인용하고 붙들고 고집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말씀이 삶의 백과사전과 같은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말씀이 정말 빈약해져 버리고 초라해져 버렸습니다.
성경이 겨우 우리의 구원(救援)과 삶을 위한 지침서 정도 밖에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질문을 드린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만 이해를 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습니다.
때문에 정작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만 할 가장 큰 진리를 놓쳐 버렸습니다.
단순히 진리를 놓쳐버렸다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놓쳐 버림으로써 기껏 받은 구원(救援)의 은혜가 자꾸만 흔들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분이나 컨디션이나 하는 일이 좋고 괜찮으면 구원(救援)받은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떨 때는 이 세상의 삶이 너무 좋아서 하늘나라도, 구원도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救援)이 흔들립니다.
때문에 성도(聖徒)들의 흔들리는 구원에 대해서 더 큰 의심을 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대해서 영영 멀어지게 하려는 사단들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말은 구원의 확신을 준다고 하면서 아예 하늘나라백성의 삶을 내던지게 해버리려고 하는 사단의 전략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이나 복음을 모두 내 필요한 것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이해를 해버리면 결과가 그렇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겨우 구원을 제공하고 이 땅에서 잘 사는 삶의 방법을 제공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하고 싶어 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방법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다.
복음이나 성경이 모두 우리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데는 관심이 없고 구원이든지 하늘나라든지 이 땅의 복이든지 몽땅 다 우리들을 위한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때문에 항상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곁가지들만 붙잡고 있어서 결국은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 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을 붙드는 수준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그 분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서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의(義)를 통해서 하나님 그 분 자체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그 분이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서 그 어떤 믿음의 시련이나 의심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귀한 믿음을 누리는 우리 재림성도님들이기를 기대해봅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문을 활짝 여셔서 참된 믿음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義)”가 뭔가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로마서 1장16-17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그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16-17을 잘 읽어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영어로는 “righteousness" 입니다.
우리말로 해석을 하면 ”옳으심“입니다.
이 말을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복음에는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어디에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표현되고 있습니까?

바로 로마서 1장17절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삶이라는 전제가 우리들에게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믿음의 삶에는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살게 해주시는 유일한 근거요, 힘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의 여부를 떠나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열심과 최선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누려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 각오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믿음 안에서 살게 하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1장17절 중간부분부터 끝까지 나오는 이 말씀 때문입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고 붙들려고 하는 우리 편에서의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聖徒)들이 바로 이 부분에서 착각(錯覺)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준이 자기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으면 하늘나라고 믿음이 없으면 멸망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너무 주관적이고 자극적이고 감정적입니다.
믿음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 믿음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들의 신념, 의지, 각오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믿음을 붙들면 성공하고 믿음을 놓치면 실패한다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감당하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여 주시는 일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렵고 힘든 형편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자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외부적인 압박과 환경과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은 추풍낙엽(秋風落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믿음에는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바로 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려운 형편과 처지가 되어 있더라도 우리를 붙들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으신 믿음입니다. 내가 이만큼 믿는다고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힘과 능력이 바로 오늘 로마서 1장16-17의 믿음 입니다 .
바로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의(義)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도 이르게 하시고 구원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바로 이 하나님의 의(義)로 인해서 우리들의 삶은 푸른 하늘이고, 잔잔한 물가이고 쉴 만한 초장(草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을 이렇게도 표현을 했습니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차별이 없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있어서 소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시지 않습니다. 편견(偏見)과 차별(差別)과 구분 없이 그저 우리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무조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그 예수를 구세주(救世主)로 믿게 되는 믿음까지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요, 선물(膳物)이요, 은혜(恩惠)입니다.
내 쪽에서의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조건이 있기는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조건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우릴 위해서 내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6장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아는 것도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어린아이의 신앙으로만 서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우리 삶의 형편과 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 자체를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 좌절이나 절망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로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에 이르게 하고 믿음으로 구원(救援)받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이 있어야 하고 담대(膽大)해야 하고 제대로 서야만 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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