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과 긍정: 행복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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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6-04 22:44 조회5,43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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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1 과 긍정: 행복과 치유
6월 12일
일몰:오후 7시 54분
도입)
진정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두 가지 삶의 특징이 있다. 첫째, 그 삶 가운데 기쁨과 평강이 넘친다.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라고 기도한다. 바울은 오늘 말씀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기쁨이다. 나의 죄가 사해지고,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그러한 기쁨과 평강이다. 바울은 기도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만 우리가 소망을 소유할 수 있다.
기억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1~23).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왕상 19:2~18, 시 27편, 42편, 눅 8:14, 10:38~42, 롬 8:35~39, 고후 12:9~10, 살전 5:16~17.
|중심사상| 긍정과 희망은 우리의 건강에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친다.
감옥에 있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벨벳 하늘을 수놓고 있는 빛 난 별들을 바라본다.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볼 때, 그의 마음은 긍정과 희망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는 감옥 밖에는 좋은 것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감옥을 두르고 있는 진흙바닥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그에게 용기를 줄 만한 것 이 전혀 없다. 그의 관점이 그를 점점 더 비관적으로 만들어 간다.
성경은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언어로 삶의 실제 문제들을 그리고 있다. 신실한 주의 제자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행인 것은 성경 은 격려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긍정과 희망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희망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낙천주의는 감정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면역력을 증진시키고, 건강 전반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외부 환경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취급하는 우리의 마음가 짐을 바꿀 수는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이러한 원칙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왜 그토록 희망적인 백성이 되어야 하는지 공부할 것이다.
일요일
6월 6일
우울증과 절망감
도입)
인생을 살다보면 원하던 일들이 잘 풀리고 오랜 노력 끝에 계획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 삶이 충만하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는 실패와 좌절, 상실의 아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소중한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경험들도 겪게 된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나면 불행감이 밀려오고 자신의 인생 전체가 암울하게 느껴지며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 열등감, 슬픔, 일상생활에서 전혀 즐거움을 못 느끼며 일시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되며 심하면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생에서 고통스런 시련을 겪을 때 흔히 찾아오는 것이 우울증이며 ‘마음의 감기’라고 할 만큼 매우 흔한 정신장애중 하나이다. 우울증은 정상반응이 아니라 치료하지 않으면 몇 달, 몇 년이라도 지속되고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우며 자존심의 심각한 손상, 자기비난, 죄책감을 동반한다. 우울증과 달리 우울한 기분이란 이러한 인생의 고통스런 좌절, 이혼과 같은 상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기분이 저하되지만 우울한 감정의 정도가 가볍고 지속시간이 짧으며 개인의 기능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또한 기분 전환을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정상수준으로 좋아지게 된다는 점에서 우울증과 다르다.
우울증은 오늘날 흔한 질환이다. 우울증에 동반되는 슬픈 감정 때문에 이전에는 즐거웠던 일들도 기쁨을 주지 못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피로와 절망감, 무기력함을 경험한다. 수면 장애뿐 아니라 소화 장애, 두통, 요통 등 다양한 증세를 보인다.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자살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울증은 모든 연령 그룹에 해당되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24세 미만의 연령이 이 질병에 취약하다.
우울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망, 질병, 실직, 실연 등과 같은 유쾌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우울증이다. 이런 증세는 누구에게나 한두 번 올 수 있다. 둘째는 중추신경계의 화학적 부조화로 인한 우울증이다. 이는 대부분 유전적 인 질환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해하며 용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 다음 성경 본문은 우울증을 앓았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 구이며, 그들의 증세는 무엇이었습니까?
시 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왕상 19:2~1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약의 위인들도 절망의 그림자에 덮여 우울증을 경험하였다. 다윗은 밤낮으로 울었다. 엘리야는 죽고 싶었으나, 스스로 자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죽여주시기를 구했다(왕상 19:4).
하나님은 변함없는 은혜로써 다윗과 엘리야를 너그럽게 대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희망 속에 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시 42:11). 그 결과 그는 찬양으로 가득한 생애를 살게 되었다. 고요하고 세밀한 음성으로 하나님 은 엘리야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힘을 얻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셨 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일어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취할 제자 엘리사를 부르기 위해 나아갔으며, 그를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교훈: 성경의 위인들도 우울증에 걸렸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에서 힘을 얻었다.
부가적용)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울증의 증상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욥이나 모세와 요나와 베드로,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전체가 우울증을 겪기도 하였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민족의 절망이나 우울한 현상을 애가(비탄, 통곡)라는 책 전체에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대결하여 승리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살인자이며 우상숭배자인 이세벨왕후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광야로 도망을 가, 거기에서 극단적인 절망감이나 자기 낙담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며(자살충동)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천사에 의해 그 상태를 치료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예들은 성경이 사람들이 사는 인생의 현실이 수많은 슬픔의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우울증이라는 임상적인 용어는 다루지 않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런 증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69편과 88편, 그리고 102편은 시인이 겪는 우울증적인 현상을 절망의 노래로 언급하며, 그런 좌절 속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 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편43편에서 다윗은 삶의 우울과 기쁨 등 양쪽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영혼아 왜 너는 의기소침하여 있으며, 내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가? 그리고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에게 너의 희망을 두어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에게 꼭 필요한 희망과는 대비되는 인생의 절망적인 현실성을 알려준다. 믿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생의 우울한 현실들을 돌파하는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기쁨을 신앙 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월요일
6월 7일
이생의 염려
도입)
염려는 런던의 짙은 안개와 비슷하다. 런던의 안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짙은 안개가 없었다면 범인을 눈앞에서 놓쳤다는 유명한 셜록홈즈의 소설도 쓰여 지지 않았을 것이다. 런던에 사는 사람들은 ‘완두콩 스프처럼 짙은’라는 말을 사용하며, “당신의 손을 내 얼굴 앞에 내밀어도 보이지가 않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안개는 꽤 밀도가 높은 물질처럼 보이지만 과학자들은 두께가 400피트(120m)정도 되고 한 도시의 일곱 구획을 전부 감싸는 안개라 할지라도 실제 물의 양으로 따지면 한 컵도 안된다고 한다. 그 물이 아주 조그만 수천만 개의 물방울들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전체 도시를 정체시킬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염려와 비슷하다. 우리의 마음이 수천만 개의 두려움의 물방울로 분산되면 하나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안개에 쌓여 있게 되면 막판까지 가서야 주님을 찾게 된다. 그리고 안개는 오직 주님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염려가 우리는 도와준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며 게다가 그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염려를 한다고 해서 나쁜 일이 미연에 방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염려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염려는 우리의 생각에 파고들어와 기쁨을 독으로 물들인다.
긍정과 희망은 종종 바쁜 일정 가운데 파묻혀 버린다. 비록 선하고 필요한 일일지 라도 우리가 사물과 일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분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성장에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1. 다음의 본문들을 읽으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예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미 6: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8:1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0:38~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2:16~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의미의 추구가 아닌가?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아니면 비유 속의 농부처럼 농사에는 성공했지만, 최후의 심판 때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게 될 것인가? (눅 21:34)
마르다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처럼 그녀도 주님을 위한 일 때문에 바빴다. 하지만 그 일을 맡기신 생명의 주님과 관계를 맺는 일은 소홀히 여겼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마리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음을 주지시키셨다.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 성공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함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씨앗과 같다.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이생의 걱정으로 짓눌린다. 가정의 필요를 공급하랴, 자녀들 교육시키랴, 생계를 유지하랴 세상은 온통 근심거리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면 삶의 모든 부분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고뇌와 압박의 시기에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관점으로 삶을 누리게 된다.
교훈: 걱정과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살기보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긍정적으로 사는 편이 낫다.
부가적용)
요즈음 세상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을 보면, 모두가 긍정에 관한 것들이다. “긍정의 힘”이라든지, “씨크릿”이란 책은 모두 긍정적인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물론 매사에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긍정적인 사람보다는 부정적인 사람이 더 많아 문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인기의 원인은 긍정이 육신적인 성공을 가져오게 되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집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일부 성공한 사람들만 가지고 있던 비밀(secret)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긍정의 목표가 단순히 부자가 되거나 육신의 안목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우리는 믿음과의 경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긍정의 목표를 가난한 자가 되거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라도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면 이 책들은 아마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긍정이란 말은 부정이라는 말과 큰 차이가 나는 말이 아니다. 어차피 두 단어다 확정적인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긍정적인 반응은 “이거 먹으면 정말 죽을지 몰라!” 이고 부정적인 반응은 “어쩌면 안 죽을지도 몰라!”이다. 이 두 말에 무슨 차이가 있나? 둘 다 확신과 확정은 없다. 긍정적인 사람이든지 부정적인 사람이든지 그들의 선택은 현재로서 확실하지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긍정과 부정은 큰 차이가 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먹으면 죽는다”라고 반응한 것이다. 아쉽게도 아담과 하와는 믿음의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고 긍정내지는 부정의 반응을 보인자들이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죽게 된 결과는 똑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긍정의 힘(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믿음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믿음은 “그럴 것 같애!”라는 말이 없다. “좋은게 좋은 거지!” 식의 어설픈 신앙생활을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언약의 확증이기 때문에 분명하다. 죽으면 죽은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단순히 긍정적인 사람들로 보아서는 안된다. 저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니 가서 취하라!” 이것이 믿는 자의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도전해봐!” 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화요일
6월 8일
항상 기뻐하라
도입)
행복은 기쁨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신앙의 모습과 표시는 기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모습이 참된 경건의 모습이다. 기쁨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며 얼굴이다. 본문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기뻐한다. 이처럼 명백히 기뻐할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항상’이다. 항상이란 ‘상황에 관계없이’라는 의미이다. 어떻게 인간이 ‘항상’ 상황에 관계없이 기뻐할 수 있을까? 박해와 비난이 우리의 영혼에 슬픔을 일으킨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심령으로 기뻐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러므로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시련이 보다 무거울 지라도 유익을 발견해야 한다. 바울은 확실히 이러한 기법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당하는 고생이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값어치가 없다.“(롬 8:18) 이것은 영원한 영광 뿐 아니라 현세에도 영광이 있다. 베드로가 영광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사람들 위에 임한다는 바를 지적한 바와 같이(벧전 4:14) 보다 나은 유익은 이러한 유한한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내시는 사랑, 기쁨, 평화와 그 밖의 열매들을 통하여 우리 삶에 엄청난 것들을 성취하기 원하신다. 그것은 영원까지 지속될 엄청난 상급을 가질 수 있는 성취를 통해서다.
1. 살전 5:16~17을 읽으십시오. 두 명령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30년 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내용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던 적이 있었다. 동기는 참 좋았다. 그러나 그런 글 때문에 어떤 이들은 죄책감에 시달 려야 했다. 왜냐하면 사망, 손실, 재난, 장애, 분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시련의 시기에 기쁨과 행복감을 잃기에 자칫 주님께 신실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이기 때 문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항상 즐거워하지 않는다. 아마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다(마 26:38, 요 11:35). 하지만 그분이 신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욥도 여호와께 신실했지만, 언제나 기뻐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 려 그는 비참하고 가련한 환자였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비극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쁨과 긍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들이 우리를 그토록 크게 낙망케 했던 걱정과 근심을 얼마나 잠재울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과 그것들이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그분이 주시는 약속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2. 아래의 약속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희망과 긍정의 정신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롬 8:3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롬 8:35~3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21: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훈: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은 현실에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소망에 있다.
부가적용)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충분한 이유가 있다. 불교와 도교와 스토아 철학에는 고상하고 훌륭한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거기에는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빌4:4).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는 것이 당위적인 의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 중에도 위로를 받으며 고난 한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 자신보다 훨씬 큰 영적 실재,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항상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다(살전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살전5:1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핍박인가, 굶주림인가, 헐벗음인가, 위협인가, 또는 칼인가?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 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는다. 나는 확신한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8:35-39).
수요일
6월 9일
웃음과 치료
도입)
오랜 가뭄으로 시들어가던 초목이 소나기를 맞고 나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이 웃음은 영과 육을 살리는 힘이 있다. 1.2분 동안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 2시간 반 동안 달리기를 하는 운동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웃음으로 우리몸 안에 있는 신경의 반 이상이 움직이게 되므로 웃음은 운동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피터버거는 유머에는 “초월효과”라는 것이 있어서 유머를 말하거나 듣는 순간에 즉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는 용기와 기쁨과 일체감 등이 생겨나면서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게 된다. 웃음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며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리더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웃는 사람 옆에 있으면 바이러스가 전염된 것처럼 웃게 된다. 유머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을 주목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리더자가 된다.
1. 고후 12:9~10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원리를 우리 생활에 특별히 고난의 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질병의 해부학(Anotomy of An Illness)의 저자 노먼 커즌즈(Norman Cousins) 는 30년간 미국의 유명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1964년 병으로 쓰러지면서 그는 일과 건강을 잃고 큰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사지와 손가락, 심지어 턱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는 병상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종기 덩어리들이 생겼다. 의사는 아스피린, 코데인 등 모든 종류의 진통제와 진정제, 수면제를 처방했다. 그의 몸은 병보다 약물 반응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다. 노먼에게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질병의 완치율이 오백 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약과 부작용에 진절머리가 나자 그는 ‘몰래카메라’라는 재미있는 TV 쇼를 보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익살스런 장면을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웃자 생각 외의 변화가 느껴졌다. 많이 웃으니까 기분이 훨씬 좋았다. 때로는 그가 박장대소하는 것을 보려고 간호사들이 우스운 이야기를 읽어 주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건강은 점점 호전되어 갔다. 오래지 않아 그의 종기들이 수축되기 시작했고, 그는 마침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테니스와 골프를 치고, 말을 타고,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웃음이 우리의 모든 건강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밝은 마 음가짐이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교훈: 웃음으로 생기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부정적인 육체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준다.
부가적용)
최근 미국에선 많이 웃는 사람들에게 심장병 발병이 적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우리 몸에는 내장을 지배하는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 등 두 가지 자율신경이 있다. 놀람, 불안, 초조, 짜증 등은 교감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심장을 상하게 한다. 반면 웃음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며 몸 상태를 편안하게 해 준다. 이것이 심장병이 적게 생기는 이유이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 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도 예방해 준다. 웃음은 병균을 막는 항체인 "인터페론 감마"의 분비를 증가시켜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주며 세포 조직의 증식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사람이 웃을 때 통증을 진정시키는 "엔도르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18년간 웃음의 의학적 효과를 연구해 온 미국의 리버트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에게서 피를 뽑아 분석해 보면 암을 일으키는 종양세포를 공격하는 "킬러 세포"가 많이 생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웃음이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과 성인병을 예방해 준다는 것이다.
목요일
6월 10일
즐거운 마음: 실제적인 낙천주의(잠 17:22)
도입)
웃음이 가진 미덕을 질병 치료에 접목시킨 웃음치료법이 의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다. 즐거운 마음이 건강한 몸을 만든다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명제를 넘어서서, 의학적으로 입증된 실질적인 효능들이 이 치료법에 대한 믿음을 더한다. 어린 아이들이 하루 400번 웃는데 반해, 어른이 되면 6번 정도로 웃음의 양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란 말은 그래서 생겨난 말일 게다.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적으로 7.1년을 더 오래 사는 이유도 자주 웃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웃음과 건강의 긴밀한 상관관계는 예부터 강조되어 온 덕목이다. 서양속담에 ‘웃음은 내면의 조깅이다’라는 말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어른들이 믿었던 웃음의 미덕과 그 위상은 거의 불로장생의 명약쯤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웃음은 즐거운 마음에서 비롯될 진데, 마음의 힘과 기(氣)의 흐름, 그 불가시한 세계의 초월적 힘을 동경했던 이들로선 즐거운 마음이 곧 건강한 몸을 만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웃음과 즐거운 생각은 건강에 유익하다. 웃음은 허파를 움직이게 만들고, 순환계를 자극한다. 웃음은 혈액의 산소 농도를 증가시키고, 긴장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해 장기적으로는 혈압을 적절히 낮추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웃음은 엔돌핀의 생성을 도와 신경의 안정과 통증완화에 도움이 되며, 면역세포들의 활동을 증가시킨다. 낙천적이고 즐거운 마음가짐은 우리의 삶이 그분의 통치 안에 있다는 지식을 발견 하게 될 때, 더욱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계속 웃고 계속 즐거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추구해야 한다.
1. 사 26:1~4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을 그대의 삶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 까?
우리가 굳건하게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확실한 혜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면역력 향상이 향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우리가 즐겁게 생활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심화 발전시키면 정서적, 영적 치유뿐 아니라, 육체적 치유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잠 17:22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즐거운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상한 심령은 우리 전 존재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다윗은 이런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고, 계속되는 그의 난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할을 잊지 않았다.
2. 시편 27편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어떤 희망이 제시되어 있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교훈: 하나님을 믿고 그의 통치 속에 거하는 인생은 훨씬 즐겁고 건강하다.
부가적용)
종교와 영적인 것이 건강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은 의학적인 실행 안에 역사하고 있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의 실재를 확인하고 있다. 1967년에 JAMA(The Journal of America Medical Association)에서는 “의학과 종교”라는 부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이래 정기적으로 의학 안에 있는 종교와 영적인 요소에 대한 글들을 연구한 것들을 정기적으로 출판하여 왔다. 여기서는 종교적인 믿음과 건강 사이에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많이 보고하여 오고 있다. 많은 연구들은 종교에 활동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질병을 대처하는 능력을 강화하고 회복을 증진시키고 정신적인 질병, 육체적인 질병을 예방하는데 유익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신앙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아픔을 경감하는데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살과 우울증으로부터 보호한다고 밝힌다. 그러면 신앙은 어떤 Mechanism을 통해서 이런 건강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신앙은 사회적 혹은 심리적 혹은 이 양쪽의 지지를 더해 주어서 사람들의 삶에 건강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신앙은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키는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하고 음주나 흡연과 같은 건강에 위험한 행위를 자제하게 함으로 건강을 증진시키고 있다. 건강에 좋은 개인적인 삶의 형태를 증진시킴으로 그리고 공동체 안에 융합과 사회적인 지지를 확보함으로 삶의 질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신앙의 치료효과를 설명하는 몇 가지에 불과 하다. 연구자들은 더 많은 요소들을 말하고 있다.
금요일
6월 11일
독서 과제:치료봉사, 241~259 “정신치료”
“감사와 찬양의 정신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더욱 잘 증진시켜 주는 것은 없다. 우울하고 불만스런 사상과 감정을 물리치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면, 슬퍼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아 버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탄식하고 불평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까?”(치료봉사, 251)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버지와 연합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 망이 달려 있다. 십자가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의 발아래 에서 죄인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에, 그는 충만한 기쁨 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사도행적, 209~210)
“새롭게 된 땅에서 얻을 확실한 유업을 바라보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혹독한 시 련과 고통의 때에도 즐거워하였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 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 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사도행적, 517~51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2. 잠 3:7~8을 읽으십시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의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어떻게 이번 주 교과와 어울립니까?
3. 나중에 그대의 기분이 우울해지면, 긍정적인 것에 머물도록 생각을 집중시키십시오. 하 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대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절을 읽으십시오. 노래와 기 도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대의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겁니다.
4. 우울해지고, 실망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 다면 믿음과 감정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왜 그런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6월 12일
일몰:오후 7시 54분
도입)
진정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두 가지 삶의 특징이 있다. 첫째, 그 삶 가운데 기쁨과 평강이 넘친다.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라고 기도한다. 바울은 오늘 말씀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기쁨이다. 나의 죄가 사해지고,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그러한 기쁨과 평강이다. 바울은 기도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만 우리가 소망을 소유할 수 있다.
기억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1~23).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왕상 19:2~18, 시 27편, 42편, 눅 8:14, 10:38~42, 롬 8:35~39, 고후 12:9~10, 살전 5:16~17.
|중심사상| 긍정과 희망은 우리의 건강에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친다.
감옥에 있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벨벳 하늘을 수놓고 있는 빛 난 별들을 바라본다.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볼 때, 그의 마음은 긍정과 희망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는 감옥 밖에는 좋은 것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감옥을 두르고 있는 진흙바닥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그에게 용기를 줄 만한 것 이 전혀 없다. 그의 관점이 그를 점점 더 비관적으로 만들어 간다.
성경은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언어로 삶의 실제 문제들을 그리고 있다. 신실한 주의 제자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행인 것은 성경 은 격려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긍정과 희망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희망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낙천주의는 감정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면역력을 증진시키고, 건강 전반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외부 환경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취급하는 우리의 마음가 짐을 바꿀 수는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이러한 원칙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왜 그토록 희망적인 백성이 되어야 하는지 공부할 것이다.
일요일
6월 6일
우울증과 절망감
도입)
인생을 살다보면 원하던 일들이 잘 풀리고 오랜 노력 끝에 계획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 삶이 충만하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는 실패와 좌절, 상실의 아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소중한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경험들도 겪게 된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나면 불행감이 밀려오고 자신의 인생 전체가 암울하게 느껴지며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 열등감, 슬픔, 일상생활에서 전혀 즐거움을 못 느끼며 일시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되며 심하면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생에서 고통스런 시련을 겪을 때 흔히 찾아오는 것이 우울증이며 ‘마음의 감기’라고 할 만큼 매우 흔한 정신장애중 하나이다. 우울증은 정상반응이 아니라 치료하지 않으면 몇 달, 몇 년이라도 지속되고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우며 자존심의 심각한 손상, 자기비난, 죄책감을 동반한다. 우울증과 달리 우울한 기분이란 이러한 인생의 고통스런 좌절, 이혼과 같은 상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기분이 저하되지만 우울한 감정의 정도가 가볍고 지속시간이 짧으며 개인의 기능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또한 기분 전환을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정상수준으로 좋아지게 된다는 점에서 우울증과 다르다.
우울증은 오늘날 흔한 질환이다. 우울증에 동반되는 슬픈 감정 때문에 이전에는 즐거웠던 일들도 기쁨을 주지 못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피로와 절망감, 무기력함을 경험한다. 수면 장애뿐 아니라 소화 장애, 두통, 요통 등 다양한 증세를 보인다.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자살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울증은 모든 연령 그룹에 해당되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24세 미만의 연령이 이 질병에 취약하다.
우울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망, 질병, 실직, 실연 등과 같은 유쾌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우울증이다. 이런 증세는 누구에게나 한두 번 올 수 있다. 둘째는 중추신경계의 화학적 부조화로 인한 우울증이다. 이는 대부분 유전적 인 질환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해하며 용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 다음 성경 본문은 우울증을 앓았던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 구이며, 그들의 증세는 무엇이었습니까?
시 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왕상 19:2~1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약의 위인들도 절망의 그림자에 덮여 우울증을 경험하였다. 다윗은 밤낮으로 울었다. 엘리야는 죽고 싶었으나, 스스로 자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죽여주시기를 구했다(왕상 19:4).
하나님은 변함없는 은혜로써 다윗과 엘리야를 너그럽게 대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희망 속에 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시 42:11). 그 결과 그는 찬양으로 가득한 생애를 살게 되었다. 고요하고 세밀한 음성으로 하나님 은 엘리야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힘을 얻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셨 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일어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취할 제자 엘리사를 부르기 위해 나아갔으며, 그를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교훈: 성경의 위인들도 우울증에 걸렸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에서 힘을 얻었다.
부가적용)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울증의 증상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욥이나 모세와 요나와 베드로,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전체가 우울증을 겪기도 하였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민족의 절망이나 우울한 현상을 애가(비탄, 통곡)라는 책 전체에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대결하여 승리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살인자이며 우상숭배자인 이세벨왕후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광야로 도망을 가, 거기에서 극단적인 절망감이나 자기 낙담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며(자살충동)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천사에 의해 그 상태를 치료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예들은 성경이 사람들이 사는 인생의 현실이 수많은 슬픔의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우울증이라는 임상적인 용어는 다루지 않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런 증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69편과 88편, 그리고 102편은 시인이 겪는 우울증적인 현상을 절망의 노래로 언급하며, 그런 좌절 속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 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편43편에서 다윗은 삶의 우울과 기쁨 등 양쪽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영혼아 왜 너는 의기소침하여 있으며, 내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가? 그리고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에게 너의 희망을 두어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에게 꼭 필요한 희망과는 대비되는 인생의 절망적인 현실성을 알려준다. 믿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생의 우울한 현실들을 돌파하는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기쁨을 신앙 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월요일
6월 7일
이생의 염려
도입)
염려는 런던의 짙은 안개와 비슷하다. 런던의 안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짙은 안개가 없었다면 범인을 눈앞에서 놓쳤다는 유명한 셜록홈즈의 소설도 쓰여 지지 않았을 것이다. 런던에 사는 사람들은 ‘완두콩 스프처럼 짙은’라는 말을 사용하며, “당신의 손을 내 얼굴 앞에 내밀어도 보이지가 않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안개는 꽤 밀도가 높은 물질처럼 보이지만 과학자들은 두께가 400피트(120m)정도 되고 한 도시의 일곱 구획을 전부 감싸는 안개라 할지라도 실제 물의 양으로 따지면 한 컵도 안된다고 한다. 그 물이 아주 조그만 수천만 개의 물방울들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전체 도시를 정체시킬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염려와 비슷하다. 우리의 마음이 수천만 개의 두려움의 물방울로 분산되면 하나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안개에 쌓여 있게 되면 막판까지 가서야 주님을 찾게 된다. 그리고 안개는 오직 주님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염려가 우리는 도와준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며 게다가 그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염려를 한다고 해서 나쁜 일이 미연에 방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염려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염려는 우리의 생각에 파고들어와 기쁨을 독으로 물들인다.
긍정과 희망은 종종 바쁜 일정 가운데 파묻혀 버린다. 비록 선하고 필요한 일일지 라도 우리가 사물과 일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분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성장에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1. 다음의 본문들을 읽으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예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미 6: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8:1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0:38~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12:16~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성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의미의 추구가 아닌가?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아니면 비유 속의 농부처럼 농사에는 성공했지만, 최후의 심판 때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게 될 것인가? (눅 21:34)
마르다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처럼 그녀도 주님을 위한 일 때문에 바빴다. 하지만 그 일을 맡기신 생명의 주님과 관계를 맺는 일은 소홀히 여겼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마리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음을 주지시키셨다.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 성공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함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씨앗과 같다.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이생의 걱정으로 짓눌린다. 가정의 필요를 공급하랴, 자녀들 교육시키랴, 생계를 유지하랴 세상은 온통 근심거리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면 삶의 모든 부분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고뇌와 압박의 시기에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관점으로 삶을 누리게 된다.
교훈: 걱정과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살기보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긍정적으로 사는 편이 낫다.
부가적용)
요즈음 세상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을 보면, 모두가 긍정에 관한 것들이다. “긍정의 힘”이라든지, “씨크릿”이란 책은 모두 긍정적인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물론 매사에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긍정적인 사람보다는 부정적인 사람이 더 많아 문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인기의 원인은 긍정이 육신적인 성공을 가져오게 되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집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일부 성공한 사람들만 가지고 있던 비밀(secret)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긍정의 목표가 단순히 부자가 되거나 육신의 안목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우리는 믿음과의 경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긍정의 목표를 가난한 자가 되거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라도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면 이 책들은 아마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긍정이란 말은 부정이라는 말과 큰 차이가 나는 말이 아니다. 어차피 두 단어다 확정적인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긍정적인 반응은 “이거 먹으면 정말 죽을지 몰라!” 이고 부정적인 반응은 “어쩌면 안 죽을지도 몰라!”이다. 이 두 말에 무슨 차이가 있나? 둘 다 확신과 확정은 없다. 긍정적인 사람이든지 부정적인 사람이든지 그들의 선택은 현재로서 확실하지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긍정과 부정은 큰 차이가 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먹으면 죽는다”라고 반응한 것이다. 아쉽게도 아담과 하와는 믿음의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고 긍정내지는 부정의 반응을 보인자들이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죽게 된 결과는 똑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긍정의 힘(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믿음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믿음은 “그럴 것 같애!”라는 말이 없다. “좋은게 좋은 거지!” 식의 어설픈 신앙생활을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언약의 확증이기 때문에 분명하다. 죽으면 죽은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단순히 긍정적인 사람들로 보아서는 안된다. 저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니 가서 취하라!” 이것이 믿는 자의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도전해봐!” 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화요일
6월 8일
항상 기뻐하라
도입)
행복은 기쁨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신앙의 모습과 표시는 기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모습이 참된 경건의 모습이다. 기쁨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며 얼굴이다. 본문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기뻐한다. 이처럼 명백히 기뻐할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항상’이다. 항상이란 ‘상황에 관계없이’라는 의미이다. 어떻게 인간이 ‘항상’ 상황에 관계없이 기뻐할 수 있을까? 박해와 비난이 우리의 영혼에 슬픔을 일으킨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심령으로 기뻐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러므로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시련이 보다 무거울 지라도 유익을 발견해야 한다. 바울은 확실히 이러한 기법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당하는 고생이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값어치가 없다.“(롬 8:18) 이것은 영원한 영광 뿐 아니라 현세에도 영광이 있다. 베드로가 영광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사람들 위에 임한다는 바를 지적한 바와 같이(벧전 4:14) 보다 나은 유익은 이러한 유한한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내시는 사랑, 기쁨, 평화와 그 밖의 열매들을 통하여 우리 삶에 엄청난 것들을 성취하기 원하신다. 그것은 영원까지 지속될 엄청난 상급을 가질 수 있는 성취를 통해서다.
1. 살전 5:16~17을 읽으십시오. 두 명령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30년 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내용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던 적이 있었다. 동기는 참 좋았다. 그러나 그런 글 때문에 어떤 이들은 죄책감에 시달 려야 했다. 왜냐하면 사망, 손실, 재난, 장애, 분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시련의 시기에 기쁨과 행복감을 잃기에 자칫 주님께 신실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이기 때 문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항상 즐거워하지 않는다. 아마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다(마 26:38, 요 11:35). 하지만 그분이 신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욥도 여호와께 신실했지만, 언제나 기뻐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 려 그는 비참하고 가련한 환자였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비극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쁨과 긍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들이 우리를 그토록 크게 낙망케 했던 걱정과 근심을 얼마나 잠재울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과 그것들이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그분이 주시는 약속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2. 아래의 약속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희망과 긍정의 정신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롬 8:3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롬 8:35~3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일 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21: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훈: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은 현실에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소망에 있다.
부가적용)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충분한 이유가 있다. 불교와 도교와 스토아 철학에는 고상하고 훌륭한 가르침이 많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거기에는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빌4:4).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는 것이 당위적인 의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 중에도 위로를 받으며 고난 한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 자신보다 훨씬 큰 영적 실재,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항상 기억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다(살전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살전5:1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핍박인가, 굶주림인가, 헐벗음인가, 위협인가, 또는 칼인가?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 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는다. 나는 확신한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8:35-39).
수요일
6월 9일
웃음과 치료
도입)
오랜 가뭄으로 시들어가던 초목이 소나기를 맞고 나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이 웃음은 영과 육을 살리는 힘이 있다. 1.2분 동안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 2시간 반 동안 달리기를 하는 운동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웃음으로 우리몸 안에 있는 신경의 반 이상이 움직이게 되므로 웃음은 운동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피터버거는 유머에는 “초월효과”라는 것이 있어서 유머를 말하거나 듣는 순간에 즉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는 용기와 기쁨과 일체감 등이 생겨나면서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게 된다. 웃음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며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리더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웃는 사람 옆에 있으면 바이러스가 전염된 것처럼 웃게 된다. 유머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을 주목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리더자가 된다.
1. 고후 12:9~10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원리를 우리 생활에 특별히 고난의 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질병의 해부학(Anotomy of An Illness)의 저자 노먼 커즌즈(Norman Cousins) 는 30년간 미국의 유명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1964년 병으로 쓰러지면서 그는 일과 건강을 잃고 큰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사지와 손가락, 심지어 턱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는 병상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종기 덩어리들이 생겼다. 의사는 아스피린, 코데인 등 모든 종류의 진통제와 진정제, 수면제를 처방했다. 그의 몸은 병보다 약물 반응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다. 노먼에게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질병의 완치율이 오백 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약과 부작용에 진절머리가 나자 그는 ‘몰래카메라’라는 재미있는 TV 쇼를 보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익살스런 장면을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웃자 생각 외의 변화가 느껴졌다. 많이 웃으니까 기분이 훨씬 좋았다. 때로는 그가 박장대소하는 것을 보려고 간호사들이 우스운 이야기를 읽어 주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건강은 점점 호전되어 갔다. 오래지 않아 그의 종기들이 수축되기 시작했고, 그는 마침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테니스와 골프를 치고, 말을 타고,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웃음이 우리의 모든 건강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밝은 마 음가짐이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교훈: 웃음으로 생기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부정적인 육체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준다.
부가적용)
최근 미국에선 많이 웃는 사람들에게 심장병 발병이 적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우리 몸에는 내장을 지배하는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 등 두 가지 자율신경이 있다. 놀람, 불안, 초조, 짜증 등은 교감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심장을 상하게 한다. 반면 웃음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며 몸 상태를 편안하게 해 준다. 이것이 심장병이 적게 생기는 이유이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 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도 예방해 준다. 웃음은 병균을 막는 항체인 "인터페론 감마"의 분비를 증가시켜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주며 세포 조직의 증식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사람이 웃을 때 통증을 진정시키는 "엔도르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18년간 웃음의 의학적 효과를 연구해 온 미국의 리버트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에게서 피를 뽑아 분석해 보면 암을 일으키는 종양세포를 공격하는 "킬러 세포"가 많이 생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웃음이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과 성인병을 예방해 준다는 것이다.
목요일
6월 10일
즐거운 마음: 실제적인 낙천주의(잠 17:22)
도입)
웃음이 가진 미덕을 질병 치료에 접목시킨 웃음치료법이 의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다. 즐거운 마음이 건강한 몸을 만든다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명제를 넘어서서, 의학적으로 입증된 실질적인 효능들이 이 치료법에 대한 믿음을 더한다. 어린 아이들이 하루 400번 웃는데 반해, 어른이 되면 6번 정도로 웃음의 양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란 말은 그래서 생겨난 말일 게다.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적으로 7.1년을 더 오래 사는 이유도 자주 웃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웃음과 건강의 긴밀한 상관관계는 예부터 강조되어 온 덕목이다. 서양속담에 ‘웃음은 내면의 조깅이다’라는 말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어른들이 믿었던 웃음의 미덕과 그 위상은 거의 불로장생의 명약쯤으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웃음은 즐거운 마음에서 비롯될 진데, 마음의 힘과 기(氣)의 흐름, 그 불가시한 세계의 초월적 힘을 동경했던 이들로선 즐거운 마음이 곧 건강한 몸을 만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웃음과 즐거운 생각은 건강에 유익하다. 웃음은 허파를 움직이게 만들고, 순환계를 자극한다. 웃음은 혈액의 산소 농도를 증가시키고, 긴장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해 장기적으로는 혈압을 적절히 낮추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웃음은 엔돌핀의 생성을 도와 신경의 안정과 통증완화에 도움이 되며, 면역세포들의 활동을 증가시킨다. 낙천적이고 즐거운 마음가짐은 우리의 삶이 그분의 통치 안에 있다는 지식을 발견 하게 될 때, 더욱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계속 웃고 계속 즐거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추구해야 한다.
1. 사 26:1~4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을 그대의 삶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 까?
우리가 굳건하게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확실한 혜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면역력 향상이 향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우리가 즐겁게 생활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심화 발전시키면 정서적, 영적 치유뿐 아니라, 육체적 치유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잠 17:22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즐거운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상한 심령은 우리 전 존재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다윗은 이런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고, 계속되는 그의 난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할을 잊지 않았다.
2. 시편 27편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어떤 희망이 제시되어 있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교훈: 하나님을 믿고 그의 통치 속에 거하는 인생은 훨씬 즐겁고 건강하다.
부가적용)
종교와 영적인 것이 건강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은 의학적인 실행 안에 역사하고 있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의 실재를 확인하고 있다. 1967년에 JAMA(The Journal of America Medical Association)에서는 “의학과 종교”라는 부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이래 정기적으로 의학 안에 있는 종교와 영적인 요소에 대한 글들을 연구한 것들을 정기적으로 출판하여 왔다. 여기서는 종교적인 믿음과 건강 사이에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많이 보고하여 오고 있다. 많은 연구들은 종교에 활동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질병을 대처하는 능력을 강화하고 회복을 증진시키고 정신적인 질병, 육체적인 질병을 예방하는데 유익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신앙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아픔을 경감하는데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살과 우울증으로부터 보호한다고 밝힌다. 그러면 신앙은 어떤 Mechanism을 통해서 이런 건강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신앙은 사회적 혹은 심리적 혹은 이 양쪽의 지지를 더해 주어서 사람들의 삶에 건강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신앙은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키는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하고 음주나 흡연과 같은 건강에 위험한 행위를 자제하게 함으로 건강을 증진시키고 있다. 건강에 좋은 개인적인 삶의 형태를 증진시킴으로 그리고 공동체 안에 융합과 사회적인 지지를 확보함으로 삶의 질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신앙의 치료효과를 설명하는 몇 가지에 불과 하다. 연구자들은 더 많은 요소들을 말하고 있다.
금요일
6월 11일
독서 과제:치료봉사, 241~259 “정신치료”
“감사와 찬양의 정신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더욱 잘 증진시켜 주는 것은 없다. 우울하고 불만스런 사상과 감정을 물리치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면, 슬퍼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아 버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탄식하고 불평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까?”(치료봉사, 251)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버지와 연합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 망이 달려 있다. 십자가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의 발아래 에서 죄인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에, 그는 충만한 기쁨 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사도행적, 209~210)
“새롭게 된 땅에서 얻을 확실한 유업을 바라보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혹독한 시 련과 고통의 때에도 즐거워하였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 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 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사도행적, 517~51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2. 잠 3:7~8을 읽으십시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의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어떻게 이번 주 교과와 어울립니까?
3. 나중에 그대의 기분이 우울해지면, 긍정적인 것에 머물도록 생각을 집중시키십시오. 하 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대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절을 읽으십시오. 노래와 기 도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대의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겁니다.
4. 우울해지고, 실망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 다면 믿음과 감정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왜 그런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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