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과-성실성-온전함과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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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쉬운성경 작성일10-05-30 14:14 조회3,82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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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10년 제2기 10과 교과 연구>
성실성: 온전함과 거룩함 (Integrity: Wholeness and Holiness)
■ 교과의 개요 ■■■■■■■
이번 주 교과는 성실함 혹은 고결함 (integrity)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어여쁜 신부로 삼아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남편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성실함과 고결함]을 기쁨으로 온전하게 드릴 수 있는 당당한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그 유혹들을 물리치는 대신에 그것들과 적당히 타협을 해 버리지는 않는지요? 교과책 142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런 슬픈 사연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혹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어떻게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성실함 혹은 고결함]을 온전하고도 거룩하게 지키고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것입니다.
■ 교과의 흐름 ■■■■■■■
1.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유혹들.
▪ 광야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수많은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다 (일: 광야의 예수님).
▪ 오늘날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문제가 되는 여러 형태의 성적 유혹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수: 성적 성실성).
▪ 자칫 영적 간음에 빠져들게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하나님의 신부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화: 영적인 생활의 성실성)
2. 타협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 이 유혹들은 너무도 은밀하여 이것들에 대한 자각과 경계가 없으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혹은 뻔히 알면서도 영적 간음에 빠져들게 되고 만다 (수: 성적 성실성).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혹들과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월: 성실성을 유지하기).
▪ 그리고 우리는 타협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만 한다 (목: 믿음대로 행하기).
3. 고결함을 지켜내는 비결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광야의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이성과 의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 광야의 예수님).
▪ 우리가 그분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결하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흠많은 우리를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받아주신다 (목: 믿음대로 행하기)
■ 교과의 해설 ■■■■■■■
1.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유혹들 (Good reasons to do bad things).
(1) 광야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수많은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유혹들이 너무나도 교묘하여 우리가 자칫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다는 것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유혹과 타협을 해도 될 만한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 (good reasons to do bad things)를 제시하는 것이다.
(2) 그러면, 사탄이 광야에서 어떻게 예수님께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유혹을 하였는지를 보자.
: 먼저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해 드린다. 세상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고귀한 사명도 인정]해 드린다. 그러면서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당당하게 증명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해 드리는 듯한 선심을 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다 쉽게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신사적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3) 이 방법을 사탄은 오늘 하나님의 신부인 우리에게도 사용할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들 중의 좋은 예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있다.
: 오늘은 안식일.... 제사장(목사님)은 지금 서둘러 교회에 가는 중이다. 특별히 오늘은 그동안 모든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성경공부를 해오던 구도자들이 침례를 받는 안식일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성만찬예식도 있는 아주 뜻깊은 안식일이다. 빨리 교회에 가서 침례식이며 성만찬예식이
차질없이 준비되고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담임목사로서 성도들을 기쁨으로 환영도 해야 한다.
그러니, 강도 당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하는 수 없이 뒤따라 오는 장로님께 부탁을 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마침 서기관(장로님)은 오늘 침례받을 침례받을 분들께 선물로 드리려고 어제 금요일
오후에 주문한 꽃다발을 꽃집에 들러 찾아가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 강도 당한 사람을
돌보느라 혹시라도 제시간에 꽃다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면 안식일학교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니, 부득이하게 뒤따라 오는 청년회장에게 강도 당한 사람을 부탁해
보기로 한다.
(4)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탄이 남은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은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죄 (혹은 그리스도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하고 태만하는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sins of omission”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위의 목사님과 장로님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어지간해서는 “악한 일을 하는 죄” 따위에는 잘 빠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를 “sins of commission”이라고 한다).
(5)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이러한 교묘한 유혹를 미리 아시고 마 25장에서 간곡하게 경고하신다. 마 25장의 마지막 심판에 나오는 양과 염소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염소로 분류된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일을 하는 죄 (sins of commission)”는 단 하나도 범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리스도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죄 (sins of omission)”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이첨럼, 우리가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지 않는다면,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들을 앞세워 접근하는 사탄의 이러한 유혹에 우리는 예외없이 넘어가게 될 것이다.
2. 타협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1) 사탄의 유혹 중에서 “악한 일을 하는 죄 (sins of commission)”로의 유혹은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죄 (sins of omission)”와는 달리 아주 노골적이다. 그래서 이러한 유혹들은 우리가 특별한 경계를 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데, 교과책에서는 인테넷이나 텔레비전 등에 범람하는 성적 외설물과 성적 유혹, 아이들이 부모를 속이는 것, 시험때 컨닝하는 것, 세금을 탈루하는 것 등등을 이러한 예로 들고 있다.
(2)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이 사탄의 유혹과 책략임을 알고 있다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유혹에 대한 우리의 자각과 경계가 우리의 안전을 결코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고 그래서 알면서도 “악한 일을 하는 죄 (sins of commission)”를 짓는 것이다.
(3) 이러한 불행의 시작은 “타협”에 있다. 교과책 142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혹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4) 사탄이 우리를 노골적인 유혹해 오면, 우리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된다. 유혹 앞에서 그렇게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부로서 우리의 고결함과 성실함을 온전하게 지키기로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로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5) 사탄의 유혹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화잇선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금요일 소지, 교육 57).
: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 (교육, 57)
위에서 ‘매매되지 않는 사람’이란 추호라도 사탄의 유혹과 타협하거나 거래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죄’를 단호하게 ‘죄’라고 부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교육 57에서 언급되는 죄가 ‘[나]와 [다른 사람]의 죄’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내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그 죄는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닌 바로 '나의 죄'이다. 내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그 죄는 바로 '내 안의 죄'요 '나만 아는 나의 죄'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또한 ‘선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들을 단호하게 ‘죄’라고 부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우리의 남편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부로서의 고결함을 굳게 지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3. 고결함을 지켜내는 비결
(1) 그러나, 그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광야의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만 한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얼음같이 냉철한 '이성'과 강철같은 '의지력'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우리 자신 (자아, 의지, 이성, 자신의 계획)을 믿는 것을 완전하게 포기하고 전적으로 그분만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결하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흠많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하셔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받아주신다 (롬 12:1-2). 그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도 주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롬 4:18-5:1).
[롬 4:18-5:1]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자신의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여러 번 언급한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를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러한 인간적인 "선한 계획"의 상징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즉,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계획을 추인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소망하였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도 한결같이 ‘아니다! (No!)’라고 대답을 하셨던 것이다 (창 15:4, 17:19). 그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 아브라함이 비로소 하나님으로 더불어 참으로 화평을 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고 하나님께 굴복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따른 이후에 일어나게 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는 장면은 창 17장에 나온다.
[창 17:23-26, 쉬운성경]
23.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비롯해 자기 집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또 돈을 주고 산 종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그 날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24.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의 나이는 "아흔아홉 살"이었으며,
25.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은 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26.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같은 날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75세의 아브라함 그리고 86세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겨 주신다 (창 15:6). 그러나, 이때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아직은 어느 정도 혈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신의 “선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아직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느끼지 못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선한 의도'로써 자신이 생각하기에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선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의 약속을 추호라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자기 나름의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99세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온 몸으로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게 된 99세의 아브라함은 이제 말 그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선한 계획'을 고수해야 할지를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게 된다.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한다는 고백의 표시로 [자신의 선한 계획]의 상징이었던 ‘이스마엘’의 포피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미련없이 잘라버린 것이다 (창 17:23-2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마엘과 자신에게 할례를 베풂으로써 아브라함은 드디어 자신과 자신의 선한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 난 이후에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진 것이다. 이 완전한 굴복 이후에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참으로" 화평을 누리’(롬 5:1)게 되는 것이다.
4.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당신의 어여쁜 신부요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남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남편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성실함과 고결함]을 기쁨으로 온전하게 드릴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따라서, 광야의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의뢰해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신부로서 우리의 고결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주께서 곧 오십니다!!!
성실성: 온전함과 거룩함 (Integrity: Wholeness and Holiness)
■ 교과의 개요 ■■■■■■■
이번 주 교과는 성실함 혹은 고결함 (integrity)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어여쁜 신부로 삼아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남편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성실함과 고결함]을 기쁨으로 온전하게 드릴 수 있는 당당한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그 유혹들을 물리치는 대신에 그것들과 적당히 타협을 해 버리지는 않는지요? 교과책 142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런 슬픈 사연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혹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어떻게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성실함 혹은 고결함]을 온전하고도 거룩하게 지키고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것입니다.
■ 교과의 흐름 ■■■■■■■
1.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유혹들.
▪ 광야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수많은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다 (일: 광야의 예수님).
▪ 오늘날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문제가 되는 여러 형태의 성적 유혹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수: 성적 성실성).
▪ 자칫 영적 간음에 빠져들게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하나님의 신부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화: 영적인 생활의 성실성)
2. 타협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 이 유혹들은 너무도 은밀하여 이것들에 대한 자각과 경계가 없으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혹은 뻔히 알면서도 영적 간음에 빠져들게 되고 만다 (수: 성적 성실성).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혹들과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월: 성실성을 유지하기).
▪ 그리고 우리는 타협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만 한다 (목: 믿음대로 행하기).
3. 고결함을 지켜내는 비결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광야의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이성과 의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 광야의 예수님).
▪ 우리가 그분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결하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흠많은 우리를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받아주신다 (목: 믿음대로 행하기)
■ 교과의 해설 ■■■■■■■
1.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유혹들 (Good reasons to do bad things).
(1) 광야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수많은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유혹들이 너무나도 교묘하여 우리가 자칫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다는 것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유혹과 타협을 해도 될 만한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 (good reasons to do bad things)를 제시하는 것이다.
(2) 그러면, 사탄이 광야에서 어떻게 예수님께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유혹을 하였는지를 보자.
: 먼저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해 드린다. 세상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고귀한 사명도 인정]해 드린다. 그러면서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당당하게 증명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해 드리는 듯한 선심을 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구원이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다 쉽게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신사적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3) 이 방법을 사탄은 오늘 하나님의 신부인 우리에게도 사용할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들 중의 좋은 예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있다.
: 오늘은 안식일.... 제사장(목사님)은 지금 서둘러 교회에 가는 중이다. 특별히 오늘은 그동안 모든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성경공부를 해오던 구도자들이 침례를 받는 안식일일 뿐만 아니라
더불어 성만찬예식도 있는 아주 뜻깊은 안식일이다. 빨리 교회에 가서 침례식이며 성만찬예식이
차질없이 준비되고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담임목사로서 성도들을 기쁨으로 환영도 해야 한다.
그러니, 강도 당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하는 수 없이 뒤따라 오는 장로님께 부탁을 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마침 서기관(장로님)은 오늘 침례받을 침례받을 분들께 선물로 드리려고 어제 금요일
오후에 주문한 꽃다발을 꽃집에 들러 찾아가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 강도 당한 사람을
돌보느라 혹시라도 제시간에 꽃다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면 안식일학교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니, 부득이하게 뒤따라 오는 청년회장에게 강도 당한 사람을 부탁해
보기로 한다.
(4)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탄이 남은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은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죄 (혹은 그리스도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하고 태만하는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sins of omission”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위의 목사님과 장로님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어지간해서는 “악한 일을 하는 죄” 따위에는 잘 빠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를 “sins of commission”이라고 한다).
(5)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이러한 교묘한 유혹를 미리 아시고 마 25장에서 간곡하게 경고하신다. 마 25장의 마지막 심판에 나오는 양과 염소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염소로 분류된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일을 하는 죄 (sins of commission)”는 단 하나도 범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리스도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죄 (sins of omission)”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이첨럼, 우리가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지 않는다면,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들을 앞세워 접근하는 사탄의 이러한 유혹에 우리는 예외없이 넘어가게 될 것이다.
2. 타협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1) 사탄의 유혹 중에서 “악한 일을 하는 죄 (sins of commission)”로의 유혹은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죄 (sins of omission)”와는 달리 아주 노골적이다. 그래서 이러한 유혹들은 우리가 특별한 경계를 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데, 교과책에서는 인테넷이나 텔레비전 등에 범람하는 성적 외설물과 성적 유혹, 아이들이 부모를 속이는 것, 시험때 컨닝하는 것, 세금을 탈루하는 것 등등을 이러한 예로 들고 있다.
(2)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이 사탄의 유혹과 책략임을 알고 있다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유혹에 대한 우리의 자각과 경계가 우리의 안전을 결코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고 그래서 알면서도 “악한 일을 하는 죄 (sins of commission)”를 짓는 것이다.
(3) 이러한 불행의 시작은 “타협”에 있다. 교과책 142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혹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4) 사탄이 우리를 노골적인 유혹해 오면, 우리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된다. 유혹 앞에서 그렇게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부로서 우리의 고결함과 성실함을 온전하게 지키기로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로 굳게 결심해야만 한다.
(5) 사탄의 유혹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화잇선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금요일 소지, 교육 57).
: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 (교육, 57)
위에서 ‘매매되지 않는 사람’이란 추호라도 사탄의 유혹과 타협하거나 거래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죄’를 단호하게 ‘죄’라고 부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교육 57에서 언급되는 죄가 ‘[나]와 [다른 사람]의 죄’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내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그 죄는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닌 바로 '나의 죄'이다. 내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그 죄는 바로 '내 안의 죄'요 '나만 아는 나의 죄'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또한 ‘선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들을 단호하게 ‘죄’라고 부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우리의 남편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부로서의 고결함을 굳게 지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3. 고결함을 지켜내는 비결
(1) 그러나, 그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광야의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만 한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얼음같이 냉철한 '이성'과 강철같은 '의지력'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우리 자신 (자아, 의지, 이성, 자신의 계획)을 믿는 것을 완전하게 포기하고 전적으로 그분만을 의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결하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흠많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하셔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받아주신다 (롬 12:1-2). 그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도 주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롬 4:18-5:1).
[롬 4:18-5:1]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자신의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여러 번 언급한 “아주 타당하고도 선한 이유”를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러한 인간적인 "선한 계획"의 상징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즉,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계획을 추인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소망하였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도 한결같이 ‘아니다! (No!)’라고 대답을 하셨던 것이다 (창 15:4, 17:19). 그러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 아브라함이 비로소 하나님으로 더불어 참으로 화평을 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고 하나님께 굴복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따른 이후에 일어나게 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는 장면은 창 17장에 나온다.
[창 17:23-26, 쉬운성경]
23.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비롯해 자기 집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또 돈을 주고 산 종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그 날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24.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의 나이는 "아흔아홉 살"이었으며,
25.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은 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26.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같은 날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75세의 아브라함 그리고 86세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겨 주신다 (창 15:6). 그러나, 이때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아직은 어느 정도 혈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신의 “선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아직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느끼지 못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선한 의도'로써 자신이 생각하기에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선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의 약속을 추호라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자기 나름의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99세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온 몸으로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게 된 99세의 아브라함은 이제 말 그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선한 계획'을 고수해야 할지를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하게 된다. [자신의 선한 계획]을 완전하게 포기한다는 고백의 표시로 [자신의 선한 계획]의 상징이었던 ‘이스마엘’의 포피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미련없이 잘라버린 것이다 (창 17:23-2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마엘과 자신에게 할례를 베풂으로써 아브라함은 드디어 자신과 자신의 선한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 난 이후에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진 것이다. 이 완전한 굴복 이후에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참으로" 화평을 누리’(롬 5:1)게 되는 것이다.
4.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당신의 어여쁜 신부요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남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남편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성실함과 고결함]을 기쁨으로 온전하게 드릴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따라서, 광야의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의뢰해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신부로서 우리의 고결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주께서 곧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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