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05 하나님의 거룩함(질문, 대답, 부가설명)0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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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2-01-27 13:26 조회9,185회 댓글1건본문
2월 4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58분
기억절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연구 범위: 마 11:10, 막 1:2, 창 2:3, 욥 42:5~6, 눅 5:1~11, 눅 4:31~36, 사 6:1~3, 계 4:8~9.
성경 기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기정사실이며 기하학에서 공리(증명 없이 전제되어 있는 명제)와 같은 것이다.
대신 성경 66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원하는 그분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설명하고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성경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 가운데 거룩함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하나님은 진실로 사랑이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강권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용서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바탕에는 그분의 거룩함이 있다.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자기 계시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주제는 성경에 걸쳐 두루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은 그분의 거룩함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이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학습 목표
. 깨닫기 :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마귀, 타락한 인류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의 반응을 비교한 다.
. 느끼기 :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의 본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깊이를 식별한다.
. 행하기 :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발 앞에서 날마다 경배한다.
A.
. 하나님을 만난 성경의 인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 모세는 금식하고 그 앞에 있었다. 이사야와 다니엘은 감히 얼굴을 들고 대면하지 못하고 자기의 허물 많은 모습으로 심히 두려워 엎드렸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떠나기를 구하였다. 그의 죄된 모습이 너무 크게 들어났기 때문이다. 요한도 죽은 것 같이 되었다.
.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할까요?
※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달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면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할까요?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확신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B.
. 거룩함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더 낫게 구별된 상태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은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며 구속받은 자라는 관계가 기본이다. 우리는 결코 그분과 같을 수가 없다.
. 안식일, 성소, 성육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까?
※ 안식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확인시키고 성소는 구주와 구원받은 사람의 관계를 가르쳐주며 예수님의 성육신은 이런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우리는 거룩함을 교회 생활이나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 우리의 거룩함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세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참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존재들을 살리기 위하여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보좌 앞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일지라도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 인하여 끝없이 경이로워합니다. 따라서 타락한 우리는 당연히 그분의 거룩함을 인정하고 정결케 하는 그분의 보혈과 의를 구해야 합니다.
첫째날(일) 1월 29일
“기록되었으되”
질문1.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주 반복했던 구절은 무엇인가?(렘 7:1~3)
[렘7:1~3]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답: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임하니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다.
질문2. 아래의 성경들을 살펴보라.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 성경절들에 따르면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마 4:4, 11:10, 막 1:2, 7:6, 요 12:14~15, 행 13:33, 벧전 1:16, 고전 5:7.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막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막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요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행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벧전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답: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대부분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설명한다. 신약 기자들은 구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라본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창조하기 전에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그분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후에 비로소 그분은 상대할 수 있는 피조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나 창조주께 선수(先手)가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창조하는 것이 창조주의 먼저 하신 일인 것처럼 피조물에게 접근하여 친교하는 것도 창조주께서 먼저 하셔야 가능하다. 비록 죄가 없는 세계에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범죄한 후에도 변함없이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부부를 먼저 찾아오셨고, 구원의 약속도 먼저 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계시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고 먼저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이고, 그렇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은 그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하였다. 감사한일이다.
교훈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신구약을 읽어야 한다.
둘째날(월) 1월 30일
구별함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 개역).
질문1. 성경에 거룩함의 개념을 처음으로 언급한 곳은 어디인가?(창 2:3) 성경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첫째 사물이 시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가?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답: 첫 번 언급한 곳이 바로 창2:3이다. 시간은 사람의 생활 자료로 주셨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시간을 생활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룩하게 하신 것은 그 시간을 통하여 거룩하신분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질문2. 다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출 15:11, 삼상 2:2, 시 86:8~10, 99:1~3, 사 40:25.
[출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삼상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시86:8~10]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10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9:1~3]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사40:25]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답: 하나님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더구나 죄인 된 인간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두려운 분이시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근본이 존재성이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여호와라 이름하신 분 외의 모든 것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있도록 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존재에 차이가 있다. 모든 있는 것들은 그 있게 된 사실에서 창조주를 의지하고 있다. 창조주를 의지하지 않고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이 사실이 거룩함의 기본 요소이다. 게다가 이 세상의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주신 그 처음 생명, 영원한 생명을 다 잃었다. 이제는 영원한 사망, 곧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만 남았는데, 창조주께서 구주가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분은 구주시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존재를 그분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처럼 이제 구원도 전적으로 창조주께 의지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은 생명과 존재와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거룩하신 이유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루시퍼의 사상이다.
교훈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특별하게 구별되고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따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날(화) 1월 31일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함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질문1.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위의 성경절은 사탄에 의해 비인도적인 고난을 견딘 후에 나온 욥의 부르짖음이다. 이런 반응은 인간의 죄성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욥의 반응 속에서 복음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는가?
답: 욥은 도덕적 관계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한 후에 욥은 존재와 생명의 관계로 하나님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 인식의 그릇됨을 진정으로 회개하였다. 욥의 반응은 창조주와 올바를 관계를 회복할 때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내용이다.
질문2. 하늘의 은총을 받은 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을 때 다니엘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대는 왜 그가 그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하는가?(단 10:5~8)
[단10:5~8]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답: 다니엘은 아직도 육체의 생명으로 생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을 때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부가설명> 욥이다 다니엘이나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을 때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의 상태가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으로부터 받은 사망의 씨로 태어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상태로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이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기를 감추시고 대면하신다. 욥이나 다니엘이 그런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들을 견딜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교훈
이 땅에서 가장 신실하고 경건한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더러움을 숨기지 못하였다.
넷째날(수) 2월 1일
나를 떠나소서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질문1. 신약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는가? 눅 5:1~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신약과 구약 사이에 일관성이 있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눅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답: 베드로의 태도는 신성을 깨달은 사람이 그 신성 앞에 나타내는 당연한 모습니다. 이런 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하다.
<부가설명>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한 새벽을 맞았다. 그때 예수께서 바닷가에 오시고 베드로의 배에 올라앉아서 일찍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에게 강론하셨다. 그동안 베드로는 그물을 씻었다. 아마도 그물 씻기를 마쳤을 무렵 예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 것 같다. 베드로에게 갈릴리 바다는 손바닥 보듯 하는 일터이다. 그런데 목수인 예수가 어부인 베드로에게 그물질 하는 것을 가르치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가당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래도 했고 결과는 너무 엄청났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자기의 죄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있어야 할 것이다.
교훈
베드로도 예수님의 거룩함을 목격한 후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떠나 주시도록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날(목) 2월 2일
마귀가 말할 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눅 4:31~36을 읽어 보라. 누가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대하여 증언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되는가?
질문1. 눅 4:31~36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관하여 어떤 증언이 있었는가? 그 증언을 누가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되는가?
[눅4:31~36]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답: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알았다.
질문2. 요한이 보좌 주위에 있는 하늘의 존재들로부터 들은 말은 무엇인가?(계 4:8)
[계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답: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찬송 소리를 들었다.
<부가설명> 스스로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토록 찬양받으시는데 그 가사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것은 온 우주에 모든 존재들과 여호와 하나님은 구별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렇게 찬양하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찬양이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동거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동일한 원리이다.
교훈
하늘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부르는 찬양의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이며, 심지어 마귀조차 그분의 거룩함을 부인할 수 없다.
여섯째날(금) 2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께서 성전의 밀집한 군중 앞에 서셨을 때, “소란이 그쳤다. 거래하고 흥정하던 소리가 멈추었다. 침묵은 고통스러우리만큼 지루하였다. 경외감이 회중을 압도했다. 마치 그들의 행한 일에 답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송사를 당하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를 쳐다본 그들은 인성의 두루마기를 통하여 신성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하늘의 주재되시는 분께서 마지막 날의 재판장처럼 서계셨다. …예수께서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시면서 구내 입구에 모아 둔 노끈으로 된 채찍을 드시고 장사하는 무리에게 성전 구내에서 떠나가라고 명하셨다. 예수께서는 전에 결코 나타내시지 않으셨던 열정과 준열하심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다. …예수께서는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가지시고 그들을 때리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손에 들린 간단한 채찍은 마치 화염검과 같이 무서워 보였다.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 투기(投機)하는 제사장들 그리고 중간 상인들과 가축을 파는 자들이 양과 소를 몰고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받은 정죄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달아났다”(시대의 소망, 15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런 차이점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속주요 우리는 피조물이며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영원토록 없앨 수 없다. 오직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거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 일을 위하여 예수께서 구주가 되셨다.
➋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자기 의와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이 위험한 기만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이유를 쉽게 알아차리게 됩니까?
※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 없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창조와 구속을 지속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이 된다. 옛날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바울이 지적했다.(롬10:1~4을 보라)
❸ 올바르고, 정직하며, 순수해 보여서 그대가 ‘거룩하게’ 여기거나, 다른 사람과 꽤 ‘구별’돼 보이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 앞에 그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사람은 그대의 기분을 어떻게 만듭니까? 좋게 만듭니까? 나쁘게 만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너무 거룩해 보이면 허물 많은 자기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가까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다고 인정하시고 기꺼이 사랑으로 코이노니아의 자리에 함께 하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요약
하나님의 거룩함 대신 그분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어쩌면 훨씬 은혜로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접근법은 진리를 왜곡시킨다. 우리는 그분 앞에 두려워 떨기까지 그분의 준엄한 거룩함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와 비견되는 우리의 죄 됨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속죄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그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일몰:오후 5시 58분
기억절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연구 범위: 마 11:10, 막 1:2, 창 2:3, 욥 42:5~6, 눅 5:1~11, 눅 4:31~36, 사 6:1~3, 계 4:8~9.
성경 기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기정사실이며 기하학에서 공리(증명 없이 전제되어 있는 명제)와 같은 것이다.
대신 성경 66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원하는 그분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설명하고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성경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본질 가운데 거룩함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하나님은 진실로 사랑이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강권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용서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바탕에는 그분의 거룩함이 있다.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자기 계시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주제는 성경에 걸쳐 두루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은 그분의 거룩함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이와 같이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학습 목표
. 깨닫기 :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마귀, 타락한 인류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의 반응을 비교한 다.
. 느끼기 :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의 본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깊이를 식별한다.
. 행하기 :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발 앞에서 날마다 경배한다.
A.
. 하나님을 만난 성경의 인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 모세는 금식하고 그 앞에 있었다. 이사야와 다니엘은 감히 얼굴을 들고 대면하지 못하고 자기의 허물 많은 모습으로 심히 두려워 엎드렸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떠나기를 구하였다. 그의 죄된 모습이 너무 크게 들어났기 때문이다. 요한도 죽은 것 같이 되었다.
.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할까요?
※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달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면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할까요?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확신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B.
. 거룩함이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더 낫게 구별된 상태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은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며 구속받은 자라는 관계가 기본이다. 우리는 결코 그분과 같을 수가 없다.
. 안식일, 성소, 성육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까?
※ 안식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확인시키고 성소는 구주와 구원받은 사람의 관계를 가르쳐주며 예수님의 성육신은 이런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우리는 거룩함을 교회 생활이나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 우리의 거룩함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세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참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존재들을 살리기 위하여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보좌 앞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일지라도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 인하여 끝없이 경이로워합니다. 따라서 타락한 우리는 당연히 그분의 거룩함을 인정하고 정결케 하는 그분의 보혈과 의를 구해야 합니다.
첫째날(일) 1월 29일
“기록되었으되”
질문1.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주 반복했던 구절은 무엇인가?(렘 7:1~3)
[렘7:1~3]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답: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임하니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다.
질문2. 아래의 성경들을 살펴보라.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 성경절들에 따르면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마 4:4, 11:10, 막 1:2, 7:6, 요 12:14~15, 행 13:33, 벧전 1:16, 고전 5:7.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막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막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요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행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벧전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답: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대부분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설명한다. 신약 기자들은 구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라본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창조하기 전에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그분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후에 비로소 그분은 상대할 수 있는 피조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나 창조주께 선수(先手)가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창조하는 것이 창조주의 먼저 하신 일인 것처럼 피조물에게 접근하여 친교하는 것도 창조주께서 먼저 하셔야 가능하다. 비록 죄가 없는 세계에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범죄한 후에도 변함없이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부부를 먼저 찾아오셨고, 구원의 약속도 먼저 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계시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고 먼저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이고, 그렇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은 그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하였다. 감사한일이다.
교훈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신구약을 읽어야 한다.
둘째날(월) 1월 30일
구별함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 개역).
질문1. 성경에 거룩함의 개념을 처음으로 언급한 곳은 어디인가?(창 2:3) 성경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첫째 사물이 시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가?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답: 첫 번 언급한 곳이 바로 창2:3이다. 시간은 사람의 생활 자료로 주셨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시간을 생활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룩하게 하신 것은 그 시간을 통하여 거룩하신분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질문2. 다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출 15:11, 삼상 2:2, 시 86:8~10, 99:1~3, 사 40:25.
[출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삼상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시86:8~10]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10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9:1~3]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사40:25]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답: 하나님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더구나 죄인 된 인간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두려운 분이시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근본이 존재성이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여호와라 이름하신 분 외의 모든 것들은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있도록 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존재에 차이가 있다. 모든 있는 것들은 그 있게 된 사실에서 창조주를 의지하고 있다. 창조주를 의지하지 않고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이 사실이 거룩함의 기본 요소이다. 게다가 이 세상의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주신 그 처음 생명, 영원한 생명을 다 잃었다. 이제는 영원한 사망, 곧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만 남았는데, 창조주께서 구주가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분은 구주시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존재를 그분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처럼 이제 구원도 전적으로 창조주께 의지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은 생명과 존재와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거룩하신 이유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루시퍼의 사상이다.
교훈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특별하게 구별되고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따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날(화) 1월 31일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함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질문1.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위의 성경절은 사탄에 의해 비인도적인 고난을 견딘 후에 나온 욥의 부르짖음이다. 이런 반응은 인간의 죄성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욥의 반응 속에서 복음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는가?
답: 욥은 도덕적 관계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한 후에 욥은 존재와 생명의 관계로 하나님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 인식의 그릇됨을 진정으로 회개하였다. 욥의 반응은 창조주와 올바를 관계를 회복할 때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내용이다.
질문2. 하늘의 은총을 받은 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을 때 다니엘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대는 왜 그가 그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하는가?(단 10:5~8)
[단10:5~8]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답: 다니엘은 아직도 육체의 생명으로 생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을 때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부가설명> 욥이다 다니엘이나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을 때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의 상태가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으로부터 받은 사망의 씨로 태어난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상태로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이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기를 감추시고 대면하신다. 욥이나 다니엘이 그런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들을 견딜 수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교훈
이 땅에서 가장 신실하고 경건한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더러움을 숨기지 못하였다.
넷째날(수) 2월 1일
나를 떠나소서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질문1. 신약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는가? 눅 5:1~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신약과 구약 사이에 일관성이 있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눅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답: 베드로의 태도는 신성을 깨달은 사람이 그 신성 앞에 나타내는 당연한 모습니다. 이런 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하다.
<부가설명>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피곤한 새벽을 맞았다. 그때 예수께서 바닷가에 오시고 베드로의 배에 올라앉아서 일찍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에게 강론하셨다. 그동안 베드로는 그물을 씻었다. 아마도 그물 씻기를 마쳤을 무렵 예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 것 같다. 베드로에게 갈릴리 바다는 손바닥 보듯 하는 일터이다. 그런데 목수인 예수가 어부인 베드로에게 그물질 하는 것을 가르치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가당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래도 했고 결과는 너무 엄청났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자기의 죄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있어야 할 것이다.
교훈
베드로도 예수님의 거룩함을 목격한 후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떠나 주시도록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날(목) 2월 2일
마귀가 말할 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눅 4:31~36을 읽어 보라. 누가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대하여 증언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되는가?
질문1. 눅 4:31~36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관하여 어떤 증언이 있었는가? 그 증언을 누가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되는가?
[눅4:31~36]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답: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알았다.
질문2. 요한이 보좌 주위에 있는 하늘의 존재들로부터 들은 말은 무엇인가?(계 4:8)
[계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답: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찬송 소리를 들었다.
<부가설명> 스스로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토록 찬양받으시는데 그 가사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것은 온 우주에 모든 존재들과 여호와 하나님은 구별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렇게 찬양하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찬양이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동거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동일한 원리이다.
교훈
하늘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부르는 찬양의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이며, 심지어 마귀조차 그분의 거룩함을 부인할 수 없다.
여섯째날(금) 2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께서 성전의 밀집한 군중 앞에 서셨을 때, “소란이 그쳤다. 거래하고 흥정하던 소리가 멈추었다. 침묵은 고통스러우리만큼 지루하였다. 경외감이 회중을 압도했다. 마치 그들의 행한 일에 답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송사를 당하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를 쳐다본 그들은 인성의 두루마기를 통하여 신성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하늘의 주재되시는 분께서 마지막 날의 재판장처럼 서계셨다. …예수께서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시면서 구내 입구에 모아 둔 노끈으로 된 채찍을 드시고 장사하는 무리에게 성전 구내에서 떠나가라고 명하셨다. 예수께서는 전에 결코 나타내시지 않으셨던 열정과 준열하심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다. …예수께서는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가지시고 그들을 때리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손에 들린 간단한 채찍은 마치 화염검과 같이 무서워 보였다.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 투기(投機)하는 제사장들 그리고 중간 상인들과 가축을 파는 자들이 양과 소를 몰고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받은 정죄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달아났다”(시대의 소망, 15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런 차이점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속주요 우리는 피조물이며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영원토록 없앨 수 없다. 오직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거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 일을 위하여 예수께서 구주가 되셨다.
➋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자기 의와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이 위험한 기만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이유를 쉽게 알아차리게 됩니까?
※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 없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창조와 구속을 지속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이 된다. 옛날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바울이 지적했다.(롬10:1~4을 보라)
❸ 올바르고, 정직하며, 순수해 보여서 그대가 ‘거룩하게’ 여기거나, 다른 사람과 꽤 ‘구별’돼 보이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 앞에 그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사람은 그대의 기분을 어떻게 만듭니까? 좋게 만듭니까? 나쁘게 만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너무 거룩해 보이면 허물 많은 자기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가까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다고 인정하시고 기꺼이 사랑으로 코이노니아의 자리에 함께 하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요약
하나님의 거룩함 대신 그분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어쩌면 훨씬 은혜로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접근법은 진리를 왜곡시킨다. 우리는 그분 앞에 두려워 떨기까지 그분의 준엄한 거룩함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와 비견되는 우리의 죄 됨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속죄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그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댓글목록
최 방원님의 댓글
최 방원 작성일
주님 안에서 편안하심을 기도합니다.
항상 귀감이 드는 부설에 말씀을 주시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둘째날 (화요일) 을 공부하면서 항상 느끼였던 문제점을 말씀드립니다.(구별된 안식일)
하나님의 근본존재라 헀으며 하나님의 건룩함 속에는 시간(안시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안식일 대예배(설교예배)는 중요하지 않는지요?
교회요람 129페지에 '안식일 설교예배는 모든 교회 집회 중에 가장 중요하다.
130페지에는 " 개회 행사가 어떤 경우이든 간에 예배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요
구 되 는 시간을 소모하지 말아야한다"(151 주해)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거룩한 이시간이 되게 축복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서 순서지에 광고를 다시광고하며 교회행사 및 행정(교적정리, 중요한 안건 )을 그시간에 하는일과 침례신문과 침례식을 그시간에 행하여야 하는지요? 예배시전이나 후에 하면 안되는지요?
이런 문제로 많은 갈등과 의구심이 참으로 많습니다.
꼭! 좋은 조언에 말씀을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