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과 십자가를 자랑함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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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1-12-23 11:57 조회4,95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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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과 십자가를 자랑함
기억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한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첫째 날(일) 바울의 손으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편지를 보내는데 대서자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대서자를 이용하여도 편지의 끝에는 바울이 직접 간단한 인사말로 서신을 마무리 하곤 합니다.(고전 16:21)
바울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마지막은 자신의 글로 손수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 속에 자신이 큰 글씨로 서신을 기록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큰 글씨로 썼다는 의미는 오늘날 강조를 위해 사용하는 밑줄이나 다른 글씨체로 쓰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요점을 강조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일부의 어리석은 율법주의에 대한 교정을 위해 다시한번 강조함으로 호소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날(월) 육체를 자랑함
갈라디아의 일부 신자들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예루살렘의 신자들에게 인정으로 받음으로서 핍박을 면하고자하는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됨을 기본으로 하는데 생명 없는 사람과의 관계가 엮여지면 신앙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의 일부 신자들의 율법주의적인 행위가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생명 없는 것이기에 단호하고 강조하여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으며 끝마무리까지도 다시한번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여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초기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의 선택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지라 이것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6-20)
셋째 날(화) 십자가를 자랑함
당시의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는 경멸과 저주의 이미지였습니다.
실제로 흉악한 죄수가 사형시키는 도구가 십자가였고 돌을 침으로 사형시켰던 유대인들에게도 십자가는 하나님에게도 저주받은 사람을 사형시키는 도구였습니다.(갈3:13)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아담의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당해야 할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아담을 대신하고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창조주로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피조된 존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께서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피조된 존재에게 묻지 아니하시고(요12:47)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 입니다.
하나님다운 모습입니다.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품성을 보게 될 때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에게 끌려지게 되고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에 즐겨 무릎을 꿇게 됩니다.(요12:32; 빌2:5-11)
십자가에 보여 진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된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혐오와 경멸의 상징인 십자가가 오히려 자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넷째 날(수) 새 창조
새 창조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의 선택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아담과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고전15:22)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죽게 되었으므로 다시 살리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선택을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부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창조주)께서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인간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가 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가 창조주시요, 책임지시는 사랑의 품성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확신하게 되어 그 사랑에 끌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선택하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 속에 있었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같은 새 창조 입니다.
다섯째 날(목) 맺음말
바울은 자신이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가 생명을 위한 규례로 규정하였고 십자가에 보여 진 하나님의 사랑에 본 사람으로서의 감사로 인한 종 됨에 대한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 하나님께로 이끌리게 되고 즐겨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고자 선택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의 영광을 진토 가운데 버려두게 하고 우리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품성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 정확히 보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루고 싶으신 하나님의 사업입니다.(요6:28-29)
기억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한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첫째 날(일) 바울의 손으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편지를 보내는데 대서자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대서자를 이용하여도 편지의 끝에는 바울이 직접 간단한 인사말로 서신을 마무리 하곤 합니다.(고전 16:21)
바울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마지막은 자신의 글로 손수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 속에 자신이 큰 글씨로 서신을 기록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큰 글씨로 썼다는 의미는 오늘날 강조를 위해 사용하는 밑줄이나 다른 글씨체로 쓰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요점을 강조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일부의 어리석은 율법주의에 대한 교정을 위해 다시한번 강조함으로 호소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날(월) 육체를 자랑함
갈라디아의 일부 신자들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예루살렘의 신자들에게 인정으로 받음으로서 핍박을 면하고자하는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됨을 기본으로 하는데 생명 없는 사람과의 관계가 엮여지면 신앙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의 일부 신자들의 율법주의적인 행위가 사람과의 관계를 위한 생명 없는 것이기에 단호하고 강조하여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으며 끝마무리까지도 다시한번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여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초기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의 선택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지라 이것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6-20)
셋째 날(화) 십자가를 자랑함
당시의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는 경멸과 저주의 이미지였습니다.
실제로 흉악한 죄수가 사형시키는 도구가 십자가였고 돌을 침으로 사형시켰던 유대인들에게도 십자가는 하나님에게도 저주받은 사람을 사형시키는 도구였습니다.(갈3:13)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아담의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당해야 할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아담을 대신하고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창조주로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피조된 존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께서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피조된 존재에게 묻지 아니하시고(요12:47)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 입니다.
하나님다운 모습입니다.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품성을 보게 될 때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에게 끌려지게 되고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에 즐겨 무릎을 꿇게 됩니다.(요12:32; 빌2:5-11)
십자가에 보여 진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된 바울은 당시 사람들의 혐오와 경멸의 상징인 십자가가 오히려 자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넷째 날(수) 새 창조
새 창조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의 선택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아담과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고전15:22)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죽게 되었으므로 다시 살리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선택을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부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창조주)께서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인간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가 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가 창조주시요, 책임지시는 사랑의 품성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확신하게 되어 그 사랑에 끌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선택하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 속에 있었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같은 새 창조 입니다.
다섯째 날(목) 맺음말
바울은 자신이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가 생명을 위한 규례로 규정하였고 십자가에 보여 진 하나님의 사랑에 본 사람으로서의 감사로 인한 종 됨에 대한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 하나님께로 이끌리게 되고 즐겨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고자 선택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의 영광을 진토 가운데 버려두게 하고 우리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품성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 정확히 보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루고 싶으신 하나님의 사업입니다.(요6: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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