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영으로 살아감(교과 한장으로 토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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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병주 작성일11-12-12 14:32 조회4,052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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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서론
►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안에는 두 가지 본성, 즉 육체적 본성(소욕)과 의(영)의 본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두 본성의 치열한 싸움에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지 않을 사람은 없다.
►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영으로 살아가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하늘에 가기까지 십자가 아래 나아가서 우리의 죗된 본성의 결과들로 인하여 많이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패배는 원수의 몫이며 승리는 그리스도인이 얻어야 할 전과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패배자가 될 필요가 없다. 성령이 우리를 돕고 계시기 때문이다.
► 승리와 패배의 핵심 키는 우리의 의지이다. 육체의 욕심은 반드시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의지는 매일 매순간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그분께 굴복시켜야 한다. 이것이 승리의 유일한 비결이다. 육체의 본성이 일어 날 때, 이전의 익숙한 습관이 거칠게 몰아 칠 때 성령을 부르라. 그분은 죄외 싸우기 위하여 그분께 호소하는 당신의 백성을 절대 외면치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평소의 연습과 같다. 매일 우리가 누구에게 굴복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 할 것이다. 결국은 두 본성 가운데 하나는 아사(餓死)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을 맞거나 화인을(성령이 떠남) 맞는 최종적인 결과이다.
(일) 성령을 따라 걸음
► 신앙은 행함이요, 예수믿음은 예수 따름을 의미한다. 머리에만 신앙은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고 가슴의 신앙은 발로 내려가서 행해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그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가서 느껴지는 신앙을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가슴으로 느낀 신앙이 우리의 손과 발로 행해져야 한다. 이것이 헬레니즘 신앙관과 히브리즘 신앙의 차이이다. 히브리즘 신앙은 믿으라와 행하라는 같은 의미이다.
► 사람의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율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 성령의 길과 율법의 길은 동일하다. 율법주의는 영의 일보다는 육신의 일과 가깝다. 이것은 결국 자기중심적 신앙이며 자기 의를 향한 자기사랑이다.
(월) 그리스도인의 갈등
► 화잇 여사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곳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마음은 의지가 활동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누가 점령할 것인가 하는 것이 승패를 결정한다. 원수 마귀는 육신의 본성을 이용하여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고 성령께서는 그 육신의 욕심을 그분의 인도아래 있는 의지의 지배하에 두게 함으로 승리자가 되게 하신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한, 그리고 재림 때 우리가 홀연히 변화되기까지는 육신의 본성이 우리 안에 공존 하는 것이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요, 굴복의 문제이다. 매일 매순간 우리는 누구에게 굴복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릴 때에 누런 종이 아래 동전을 놓고 연필로 문질러서 동전의 문양을 베끼던<프로타쥬 기법 이라고 함> 일이 생각난다. 연필이 지나 갈 때마다 아래 동전의 문양이 조금씩 나타나듯 하나하나의 결정이 우리의 품성을 꼴 짓고 결국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우리의 자아를 성령의 지도아래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 육체의 일
►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그대로 방치하면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로 기울어져서 끊임없이 자기 파멸의 길을 걷고자 요구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나열한 육체의 일들은 죗된 본성이 요구하는 일들이다.
► 육체의 일은 결국 자기파멸, 관계파괴, 생명파괴의 길이다. 그 뿌리는 이기심이며 이기심은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이 사랑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다.(갈 5:24 참조) 더 이상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
(수) 성령의 열매
► 육체의 일의 결과물은 사망이며(약 1:15) 성령의 열매들은 생명적인 것이다. 열매가 중요한 것은 그 열매가 나무의 정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마 7:18, 바른)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그래서 주님은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 바울이 언급한 아홉가지 열매들은 사랑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목) 승리의 길
► “무엇으로 심던지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항구적 진리이다. 매일의 선택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영을 따라 살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영생을 거둘 것이며 육신을 따라 살고 육체의 씨앗을 심는다면 사망을 거둘 것이다. 따라서 승리의 길은 성령을 구하고 그 뜻을 선택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매일의 선택에 달렸다. “ 자아를 부인할 때마다 자아를 부인하는 일이 쉬워진다. 승리를 얻을 때마다 새로운 승리를 얻을 길을 준비한다. 유혹을 대항할 때마다, 자아를 버릴 때마다, 죄를 이길 때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청년, 96)
결론
육체는 흔히 “자기”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된다. 예수는 그분 자신을 버려서 인류를 구하셨고 승리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사는 길만이 승리의 비결이다.
토의 사항
▪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매우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들이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3가지만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 (개인생각)
►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안에는 두 가지 본성, 즉 육체적 본성(소욕)과 의(영)의 본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두 본성의 치열한 싸움에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지 않을 사람은 없다.
►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영으로 살아가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하늘에 가기까지 십자가 아래 나아가서 우리의 죗된 본성의 결과들로 인하여 많이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패배는 원수의 몫이며 승리는 그리스도인이 얻어야 할 전과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패배자가 될 필요가 없다. 성령이 우리를 돕고 계시기 때문이다.
► 승리와 패배의 핵심 키는 우리의 의지이다. 육체의 욕심은 반드시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의지는 매일 매순간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그분께 굴복시켜야 한다. 이것이 승리의 유일한 비결이다. 육체의 본성이 일어 날 때, 이전의 익숙한 습관이 거칠게 몰아 칠 때 성령을 부르라. 그분은 죄외 싸우기 위하여 그분께 호소하는 당신의 백성을 절대 외면치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평소의 연습과 같다. 매일 우리가 누구에게 굴복하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 할 것이다. 결국은 두 본성 가운데 하나는 아사(餓死)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을 맞거나 화인을(성령이 떠남) 맞는 최종적인 결과이다.
(일) 성령을 따라 걸음
► 신앙은 행함이요, 예수믿음은 예수 따름을 의미한다. 머리에만 신앙은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고 가슴의 신앙은 발로 내려가서 행해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그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가서 느껴지는 신앙을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가슴으로 느낀 신앙이 우리의 손과 발로 행해져야 한다. 이것이 헬레니즘 신앙관과 히브리즘 신앙의 차이이다. 히브리즘 신앙은 믿으라와 행하라는 같은 의미이다.
► 사람의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율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 성령의 길과 율법의 길은 동일하다. 율법주의는 영의 일보다는 육신의 일과 가깝다. 이것은 결국 자기중심적 신앙이며 자기 의를 향한 자기사랑이다.
(월) 그리스도인의 갈등
► 화잇 여사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곳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마음은 의지가 활동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누가 점령할 것인가 하는 것이 승패를 결정한다. 원수 마귀는 육신의 본성을 이용하여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고 성령께서는 그 육신의 욕심을 그분의 인도아래 있는 의지의 지배하에 두게 함으로 승리자가 되게 하신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한, 그리고 재림 때 우리가 홀연히 변화되기까지는 육신의 본성이 우리 안에 공존 하는 것이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요, 굴복의 문제이다. 매일 매순간 우리는 누구에게 굴복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릴 때에 누런 종이 아래 동전을 놓고 연필로 문질러서 동전의 문양을 베끼던<프로타쥬 기법 이라고 함> 일이 생각난다. 연필이 지나 갈 때마다 아래 동전의 문양이 조금씩 나타나듯 하나하나의 결정이 우리의 품성을 꼴 짓고 결국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우리의 자아를 성령의 지도아래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 육체의 일
►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그대로 방치하면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로 기울어져서 끊임없이 자기 파멸의 길을 걷고자 요구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나열한 육체의 일들은 죗된 본성이 요구하는 일들이다.
► 육체의 일은 결국 자기파멸, 관계파괴, 생명파괴의 길이다. 그 뿌리는 이기심이며 이기심은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이 사랑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다.(갈 5:24 참조) 더 이상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
(수) 성령의 열매
► 육체의 일의 결과물은 사망이며(약 1:15) 성령의 열매들은 생명적인 것이다. 열매가 중요한 것은 그 열매가 나무의 정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마 7:18, 바른)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그래서 주님은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 바울이 언급한 아홉가지 열매들은 사랑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목) 승리의 길
► “무엇으로 심던지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항구적 진리이다. 매일의 선택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영을 따라 살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영생을 거둘 것이며 육신을 따라 살고 육체의 씨앗을 심는다면 사망을 거둘 것이다. 따라서 승리의 길은 성령을 구하고 그 뜻을 선택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매일의 선택에 달렸다. “ 자아를 부인할 때마다 자아를 부인하는 일이 쉬워진다. 승리를 얻을 때마다 새로운 승리를 얻을 길을 준비한다. 유혹을 대항할 때마다, 자아를 버릴 때마다, 죄를 이길 때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청년, 96)
결론
육체는 흔히 “자기”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된다. 예수는 그분 자신을 버려서 인류를 구하셨고 승리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사는 길만이 승리의 비결이다.
토의 사항
▪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매우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들이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3가지만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 (개인생각)
댓글목록
별빛태자님의 댓글
별빛태자 작성일
오늘도 주신 은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주님앞에 항복합니다.
항복한 맘에 가득한 은혜가 넘쳐납니다..주님안에 행복합니다.
형님이 섬기는 하나님이 내 앞에도 계십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