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두 언약(교과 한장으로 토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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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병주 작성일11-11-30 00:37 조회4,139회 댓글2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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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서론
► 성경이야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 여자의 이야기는 창3장에서 시작하여 성경 전반에 그 맥이 흐른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태도에 따라 두 여자의 이야기로 발전한다. 한 여자는 믿음을 따라간 여자이며 한 여자는 인간의 행위를 따라 간 여자이다. 믿음을 따라간 여자는 사라와 에스더, 룻과 나아가서 마리야등 절대적 불가능에서 오직 믿음으로 삶의 반전을 가져온 여인들이 이야기이다. 다른 여인은 하갈과 같은 여인이며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다.
► 이 두 연인이 상징하는 두 언약은 아벨과 가인에게서부터 존재했고 역사 속에서 늘 상존해 오던 신앙의 다른 방식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인간의 행위를 위지하여 의로워 지려고 하는 율법주의를 하갈을 통하여 낳은 이스마엘, 즉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종으로 살다가 유업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 그 아들에 비유해서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이 아들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다. NIV 성경은 이것은 “보통의” 혹은“일반적인 방법”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이것인 인간에 세계에서는 보통의 방법이고 자연스럽다. 보다 본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어렵고 인내가 필요하다.
(일) 언약의 기초
► 흔히 국가대 국가, 개인대 개인의 언약은 상대주의적인 의미가 짙다. 그러나 범죄 후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사실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이다. 까닭인 즉은 인간의 측면에서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이 계약이지 이것은 하나님 측에서 전적으로 베푸는 은혜 언약이었다. 범죄 이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범죄 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는”(마 19:26절) 은혜의 언약을 제정하신 것이다.
► 하나님이 원래 인간에게 에덴에서 주신 아담과의 언약은 그분의 사랑에 기초한 은혜의 언약이었다. 그것은 메시야 언약이며 그것은 인간 측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방적인 계약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의를 성취하려고 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위에 세워지는 구조물과 같다. 그것은 인간이 갚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월) 아브라함의 언약
► 언약의 내용은 “복과 상급”이었다. 그 복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실 “큰 민족” “하늘의 별 같은” 그분의 백성들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여럿이 아닌 한 사람“예수”를 통하여 이루어 질 약속 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날에 구속의 경륜과 회복될 에덴을 보았다. 그 언약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그분의 “때 볼 것을 보았다”(요 8:56참조)
► 언약의 체결은 당시에 근동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 언약의 성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나가고 그 다음 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그 언약의 진실하심을 친히 나타내셨다. 그 장면은 그때로부터 이천여년 후 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 희생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사건이 연출되었다.
(화)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 사라는 가능성이 없었지만 아직 아브라함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믿음은 가능성에 기대는 어떤 인간의 노력이 아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하여 가능성에 도전하였다. 늘 인간은 가능성에 기대는 버릇이 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안심한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를(일반적 방식)따라 사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가 아닌 약속, 하나님의 약속의 방식으로 낳은 아들만이 상속자라고 하신다. 믿음의 사람들은 가능성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다. 우리 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측면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분의 약속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
(수) 하갈과 시내산
► 그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이든, 할례 언약이든, 시내산 언약이든 그 언약들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동일한 은혜의 언약이지만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부정적인 면으로 나타난다. 사실 할례언약(창 17장)도 은혜언약이요 믿음의 언약이었다. 즉. 무할례시에 믿음을 할례로 인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유대인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제시함으로 언약을 변질시킨 것이다. 시내산 언약도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더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에서 변질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하갈의 경우에 적용한 것이다.
(목) 오늘날의 이스마엘과 이삭
► 오늘날 구원이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면 그는 이삭이며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의지하며 인간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처럼 그들의 신앙은 종의 신앙, 자유가 없고 유업도 없는 그들의 어머니는 하갈과 같은 신앙이다.
결론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한 줌의 노력도 더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의하기
▪ 당신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 왜 불신이 일어나는가?
▪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는가?
▪ 당신의 신앙에는 자유가 있는가? 참 기쁨이 있는가?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 성경이야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 여자의 이야기는 창3장에서 시작하여 성경 전반에 그 맥이 흐른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태도에 따라 두 여자의 이야기로 발전한다. 한 여자는 믿음을 따라간 여자이며 한 여자는 인간의 행위를 따라 간 여자이다. 믿음을 따라간 여자는 사라와 에스더, 룻과 나아가서 마리야등 절대적 불가능에서 오직 믿음으로 삶의 반전을 가져온 여인들이 이야기이다. 다른 여인은 하갈과 같은 여인이며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다.
► 이 두 연인이 상징하는 두 언약은 아벨과 가인에게서부터 존재했고 역사 속에서 늘 상존해 오던 신앙의 다른 방식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인간의 행위를 위지하여 의로워 지려고 하는 율법주의를 하갈을 통하여 낳은 이스마엘, 즉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종으로 살다가 유업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 그 아들에 비유해서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이 아들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다. NIV 성경은 이것은 “보통의” 혹은“일반적인 방법”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이것인 인간에 세계에서는 보통의 방법이고 자연스럽다. 보다 본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어렵고 인내가 필요하다.
(일) 언약의 기초
► 흔히 국가대 국가, 개인대 개인의 언약은 상대주의적인 의미가 짙다. 그러나 범죄 후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사실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이다. 까닭인 즉은 인간의 측면에서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이 계약이지 이것은 하나님 측에서 전적으로 베푸는 은혜 언약이었다. 범죄 이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범죄 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는”(마 19:26절) 은혜의 언약을 제정하신 것이다.
► 하나님이 원래 인간에게 에덴에서 주신 아담과의 언약은 그분의 사랑에 기초한 은혜의 언약이었다. 그것은 메시야 언약이며 그것은 인간 측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방적인 계약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의를 성취하려고 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위에 세워지는 구조물과 같다. 그것은 인간이 갚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월) 아브라함의 언약
► 언약의 내용은 “복과 상급”이었다. 그 복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실 “큰 민족” “하늘의 별 같은” 그분의 백성들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여럿이 아닌 한 사람“예수”를 통하여 이루어 질 약속 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날에 구속의 경륜과 회복될 에덴을 보았다. 그 언약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그분의 “때 볼 것을 보았다”(요 8:56참조)
► 언약의 체결은 당시에 근동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 언약의 성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나가고 그 다음 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그 언약의 진실하심을 친히 나타내셨다. 그 장면은 그때로부터 이천여년 후 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 희생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사건이 연출되었다.
(화)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 사라는 가능성이 없었지만 아직 아브라함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믿음은 가능성에 기대는 어떤 인간의 노력이 아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하여 가능성에 도전하였다. 늘 인간은 가능성에 기대는 버릇이 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안심한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를(일반적 방식)따라 사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가 아닌 약속, 하나님의 약속의 방식으로 낳은 아들만이 상속자라고 하신다. 믿음의 사람들은 가능성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다. 우리 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측면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분의 약속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
(수) 하갈과 시내산
► 그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이든, 할례 언약이든, 시내산 언약이든 그 언약들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동일한 은혜의 언약이지만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부정적인 면으로 나타난다. 사실 할례언약(창 17장)도 은혜언약이요 믿음의 언약이었다. 즉. 무할례시에 믿음을 할례로 인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유대인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제시함으로 언약을 변질시킨 것이다. 시내산 언약도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더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에서 변질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하갈의 경우에 적용한 것이다.
(목) 오늘날의 이스마엘과 이삭
► 오늘날 구원이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면 그는 이삭이며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의지하며 인간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처럼 그들의 신앙은 종의 신앙, 자유가 없고 유업도 없는 그들의 어머니는 하갈과 같은 신앙이다.
결론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한 줌의 노력도 더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의하기
▪ 당신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 왜 불신이 일어나는가?
▪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는가?
▪ 당신의 신앙에는 자유가 있는가? 참 기쁨이 있는가?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댓글목록
금강님의 댓글
금강 작성일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쁨으로
받아 드리는 날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이병주님의 댓글
이병주 작성일행복한 저녁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