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과 두 언약(질문, 대답, 부가설명)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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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11-25 06:59 조회8,200회 댓글3건본문
12월 3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연구 범위: 갈 4:21~31, 창 1:28, 2:2~3, 3:15, 15:1~6, 출 6:2~8, 19:3~6.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시내산의 율법이 복음과 일관성이 없다고 본다. 그들은 시내산 언약이 율법의 순종에 기초한 구원을 추구했던 세대(dispensation)를 대표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새 언약 즉 은혜의 언약으로 안내하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두 언약에 대한 그들의 이해이다. 즉 율법에 기초한 옛 언약이 있고 은혜에 기초한 새 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견해는 옳지 않다. 구원은 율법의 순종으로 주어진 적이 없다. 처음부터 성서적 유대교는 언제나 은혜의 종교였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맞서야 했던 율법주의는 일종의 왜곡이지 절대 기독교나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두 언약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그것들은 인간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두 개의 다른 방법을 대표하며, 그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언약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순종에 의지하려는 자들을 상징한다. 반면 새 언약은 아벨과 같이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의 경험을 상징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갈의 아들과 사라의 아들 그리고 그들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한다.
➋ 느끼기 :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신뢰와 사랑의 태도를 기른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한다.
A.
❷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마자 세운 언약은 어떤 언약이었습니까?
※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구원한 것을 말씀하셨다.
❸ 하나님께서 제물 사이를 지나셨던 아브라함과의 언약 의식에게 그대는 무엇을 느끼십니까?
※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언약을 친히 이루시겠다는 것을 증거하셨고 그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쪼갬을 당하시겠다는 것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본다.
❹ 그대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생의 사랑이다. 그 사랑과 희생이 너무 커서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B.
❷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언약의 내용을 같은 것이지만, 인간의 반응이 다른 것이다. 새 언약은 언약하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성취하실 것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옛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행위로 이루려는 반응이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태도를 긍휼이 여기시고 인간이 담당할 몫을 할당하셨다. 그것이 성소봉사 제도로 제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❸ 하갈이 시내산으로 비유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갈을 통하여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전적으로 믿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도와서 그 약속을 이루려고 한 행위가 하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❹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경험을 들어 이야기해 보십시오.
※ 이것은 각 사람이 서로 말해볼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끌기 때문에 노력이 아니라 성질로 그렇게 된다. 소는 풀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소니까 풀을 먹는 것이다. 어미 소가 새끼소에게 풀을 먹어야 한다고 교육시킨 것이 아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그와 같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결론: 아브라함이나 하갈이나 시내산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실현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노력은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비극을 불러옵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비극이 아닌 복을 가져옵니다.
첫째 날(일) 11월 27일 언약의 기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 4:21).
1. 범죄 이전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최초의 언약의 기초는 무엇이었는가?(창 1:28, 2:2~3, 15~17)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2:2,3,15~17]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답: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복을 선포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부가설명> 창세기 1:28에 있는 하나님의 복을 주신 선포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면 창조된 당시의 사람의 상태로는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거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선포하신대로 되도록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포된 복을 거절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순종, 불순종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지극히 율법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순종 불순종보다는 수용과 거절이 더욱 성경적인 상태인 것 같이 느껴진다. 물론 순종을 조건으로 복을 선포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수용과 거절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언약은 언제나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 편에서는 일방적으로 주시는 언약을 감사함으로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절하는 것을 불순종이라 표현하고 수용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기초는 수용과 거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조는 결국 자의는 아니라도 거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방적인 언약은 사람이 거절함으로 깨어진 것이다.
교훈: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와 맺은 언약은 구세주가 오심을 약속하는 은혜의 언약이었다.
둘째 날(월) 11월 28일 아브라함 언약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질문1: 하나님은 아브람과 어떤 언약을 맺으셨는가?(창 12:1~5) 아브람은 그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창12: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답: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줄 것이라고 하였으며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즉시 떠났다.
질문2: 약속의 자녀를 기다린 지 십 년이 지난 뒤에 아브람은 약속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드렸는가?(창 15:1~6)
[창15:1~6]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답: 자기에게 씨를 주시지 않았으니 다메섹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부가설명> 아브람은 자기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때 하나님은 그냥 네 몸에서 날 자라고만 하셨기 때문에 아브람 자기 몸에서 날 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반드시 사라에게서 나야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주모가 그의 몸종을 첩으로 들여 자기 아들로 삼은 풍속이 있었으니까 사라의 요청은 사회 풍속 상으로 당연하였고 첩을 통하여서라도 아브람의 씨가 태어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이 일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으려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자기가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친히 주도하셨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표상적 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취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교훈: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셨다.
셋째 날(화) 11월 29일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갈 4:23).
질문1: 바울은 하갈의 사건을 왜 그토록 부정적으로 평가하는가?(갈 4:21~31, 창 16장) 구약의 기사를 이용하여 그가 드러내려고 했던 구원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갈4:21~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창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이었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답: 하갈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려고 한 사실의 표상이다.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하여 구원과 의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이루신다는 것을 드러내려하였다.
질문2: 이스마엘의 출생과 대조하여 이삭의 출생을 둘러싼 상황을 보라(창 17:15~19, 18:10~13, 히 11:11~12). 이런 상황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왜 그같이 큰 믿음을 요구하였는가?
[창17:15~1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18:10~13]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히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답: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 늙어서 생산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고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믿음이 요구되었다.
<부가설명> 하갈과 사라 사이에서 아브라함이 나타낸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행위로 이루려는 것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극명하게 대조하는 모습이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사로 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면 누구나 후사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우리도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설명하고 신학이나 경험으로 설명하고 도덕과 행위로 설명하면 이와 같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아직까지도 방해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처럼 인간이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와 구원에 참여하려는 태도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교훈: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의 결과였다.
넷째 날(수) 11월 30일 하갈과 시내산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갈 4:24).
질문1: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종류의 언약을 수립하기 원하셨는가?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어떤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가?(출 6:2~8, 19:3~6, 신 32:10~12)
[출6:2~8]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출19:3~6]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신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답: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맡기는 태도를 취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아브람에게 언약할 때 그것을 하나님이 하실 일로 믿었으며 그랬을 때 그것을 의로 여겼었다.
2. 만약 시내산 언약 관계와 아브라함 언약이 유사하다면, 바울은 왜 하갈의 부정적 경험과 시내산의 경험을 동일시하였는가?(출 19:7~25, 히 8:6~7)
[출19:7~25]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언약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산 사면을 구별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명하셨다.
[히8:6,7]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답: 바울은 시내산 언약에 사람들이 그것을 수행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한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행위로 이루려고 대답을 했다. 그것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의 태도와 같다. 그러나 창15장의 언약에서 아브라함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냥 믿었다.
<부가설명> 시내산 언약은 내용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 동일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더하였는데,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출19:5)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마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건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일이다. 그 사실을 제시하신 것은 지금 하시는 말씀도 그렇게 해 주시도록 요청하도록 유도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흠이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무흠하였더면”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흠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행위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교훈: 하갈이 시내산 경험과 동일시되었던 이유는 두 경우 모두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잘못된 노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목) 12월 1일 오늘날의 이스마엘과 이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질문: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에 직면해야 하는가?(갈 4:28~31, 창 21:8~21)
[갈4:28~31]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창21:8~21]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답: 핍박에 직면한다.
<부가설명>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진리의 백성을 핍박하는 일에 대한 말씀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인 안에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거스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 5장에서 밝힌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받은 육체의 생명의 소욕이고 하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의 소욕이다. 그래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권고하였다. 또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고 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일을 이루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바울은 이것을 다시 설명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리고 말한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3:5)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으로 이루신다고 약속하였다. 믿는다는 말인 피스튜오는 맡긴다는 뜻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것처럼, 이스라엘 자기들이 하겠다고 대답한 것처럼,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해야 한다고 작심한다. 그리고 또 실망한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교훈: 행위와 육체에 의지하는 신자는 이스마엘의 후손이고,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신자는 이삭의 후손이다.
예비일(금) 12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63~373 “율법과 언약.”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 광야로 인도하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들에게 순종을 조건으로 큰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율법을 주셨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깨어 버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의 신앙은 “옛 언약” 유형입니까? 아니면 “새 언약” 유형입니까?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것은 각 사람이 생각하도 대답해보자. 서론부의 B 4번을 참고하라.
➋ 그대는 무엇을 하겠다 또는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약속하였습니까? 그대가 하나님께 했던 약속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이것도 스스로 대답해보자.
요약: 하갈, 이스마엘, 시내산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는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는 어리석음을 예증한다. 이런 자기 의의 방법을 옛 언약이라고 부른다. 새 언약은 영원한 은혜의 언약으로써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마자 수립되었고, 아브라함을 통해 갱신되었으며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연구 범위: 갈 4:21~31, 창 1:28, 2:2~3, 3:15, 15:1~6, 출 6:2~8, 19:3~6.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시내산의 율법이 복음과 일관성이 없다고 본다. 그들은 시내산 언약이 율법의 순종에 기초한 구원을 추구했던 세대(dispensation)를 대표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새 언약 즉 은혜의 언약으로 안내하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두 언약에 대한 그들의 이해이다. 즉 율법에 기초한 옛 언약이 있고 은혜에 기초한 새 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견해는 옳지 않다. 구원은 율법의 순종으로 주어진 적이 없다. 처음부터 성서적 유대교는 언제나 은혜의 종교였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맞서야 했던 율법주의는 일종의 왜곡이지 절대 기독교나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두 언약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그것들은 인간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두 개의 다른 방법을 대표하며, 그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언약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순종에 의지하려는 자들을 상징한다. 반면 새 언약은 아벨과 같이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의 경험을 상징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갈의 아들과 사라의 아들 그리고 그들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한다.
➋ 느끼기 :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신뢰와 사랑의 태도를 기른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한다.
A.
❷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마자 세운 언약은 어떤 언약이었습니까?
※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구원한 것을 말씀하셨다.
❸ 하나님께서 제물 사이를 지나셨던 아브라함과의 언약 의식에게 그대는 무엇을 느끼십니까?
※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언약을 친히 이루시겠다는 것을 증거하셨고 그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쪼갬을 당하시겠다는 것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본다.
❹ 그대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생의 사랑이다. 그 사랑과 희생이 너무 커서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B.
❷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언약의 내용을 같은 것이지만, 인간의 반응이 다른 것이다. 새 언약은 언약하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성취하실 것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옛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행위로 이루려는 반응이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태도를 긍휼이 여기시고 인간이 담당할 몫을 할당하셨다. 그것이 성소봉사 제도로 제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❸ 하갈이 시내산으로 비유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갈을 통하여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전적으로 믿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도와서 그 약속을 이루려고 한 행위가 하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❹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경험을 들어 이야기해 보십시오.
※ 이것은 각 사람이 서로 말해볼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끌기 때문에 노력이 아니라 성질로 그렇게 된다. 소는 풀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소니까 풀을 먹는 것이다. 어미 소가 새끼소에게 풀을 먹어야 한다고 교육시킨 것이 아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그와 같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결론: 아브라함이나 하갈이나 시내산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실현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노력은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비극을 불러옵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비극이 아닌 복을 가져옵니다.
첫째 날(일) 11월 27일 언약의 기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 4:21).
1. 범죄 이전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최초의 언약의 기초는 무엇이었는가?(창 1:28, 2:2~3, 15~17)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2:2,3,15~17]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답: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복을 선포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부가설명> 창세기 1:28에 있는 하나님의 복을 주신 선포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면 창조된 당시의 사람의 상태로는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거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선포하신대로 되도록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포된 복을 거절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순종, 불순종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지극히 율법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순종 불순종보다는 수용과 거절이 더욱 성경적인 상태인 것 같이 느껴진다. 물론 순종을 조건으로 복을 선포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수용과 거절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언약은 언제나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 편에서는 일방적으로 주시는 언약을 감사함으로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절하는 것을 불순종이라 표현하고 수용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기초는 수용과 거절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조는 결국 자의는 아니라도 거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방적인 언약은 사람이 거절함으로 깨어진 것이다.
교훈: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와 맺은 언약은 구세주가 오심을 약속하는 은혜의 언약이었다.
둘째 날(월) 11월 28일 아브라함 언약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질문1: 하나님은 아브람과 어떤 언약을 맺으셨는가?(창 12:1~5) 아브람은 그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창12: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답: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줄 것이라고 하였으며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즉시 떠났다.
질문2: 약속의 자녀를 기다린 지 십 년이 지난 뒤에 아브람은 약속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드렸는가?(창 15:1~6)
[창15:1~6]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답: 자기에게 씨를 주시지 않았으니 다메섹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부가설명> 아브람은 자기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때 하나님은 그냥 네 몸에서 날 자라고만 하셨기 때문에 아브람 자기 몸에서 날 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반드시 사라에게서 나야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주모가 그의 몸종을 첩으로 들여 자기 아들로 삼은 풍속이 있었으니까 사라의 요청은 사회 풍속 상으로 당연하였고 첩을 통하여서라도 아브람의 씨가 태어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이 일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으려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자기가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친히 주도하셨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표상적 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취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교훈: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셨다.
셋째 날(화) 11월 29일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갈 4:23).
질문1: 바울은 하갈의 사건을 왜 그토록 부정적으로 평가하는가?(갈 4:21~31, 창 16장) 구약의 기사를 이용하여 그가 드러내려고 했던 구원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갈4:21~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창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이었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답: 하갈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려고 한 사실의 표상이다.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하여 구원과 의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이루신다는 것을 드러내려하였다.
질문2: 이스마엘의 출생과 대조하여 이삭의 출생을 둘러싼 상황을 보라(창 17:15~19, 18:10~13, 히 11:11~12). 이런 상황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왜 그같이 큰 믿음을 요구하였는가?
[창17:15~1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18:10~13]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히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답: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 늙어서 생산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고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믿음이 요구되었다.
<부가설명> 하갈과 사라 사이에서 아브라함이 나타낸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행위로 이루려는 것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극명하게 대조하는 모습이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사로 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면 누구나 후사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우리도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설명하고 신학이나 경험으로 설명하고 도덕과 행위로 설명하면 이와 같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아직까지도 방해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처럼 인간이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와 구원에 참여하려는 태도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행하시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교훈: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의 결과였다.
넷째 날(수) 11월 30일 하갈과 시내산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갈 4:24).
질문1: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종류의 언약을 수립하기 원하셨는가?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어떤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가?(출 6:2~8, 19:3~6, 신 32:10~12)
[출6:2~8]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출19:3~6]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신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답: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맡기는 태도를 취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아브람에게 언약할 때 그것을 하나님이 하실 일로 믿었으며 그랬을 때 그것을 의로 여겼었다.
2. 만약 시내산 언약 관계와 아브라함 언약이 유사하다면, 바울은 왜 하갈의 부정적 경험과 시내산의 경험을 동일시하였는가?(출 19:7~25, 히 8:6~7)
[출19:7~25]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언약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산 사면을 구별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명하셨다.
[히8:6,7]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답: 바울은 시내산 언약에 사람들이 그것을 수행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한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행위로 이루려고 대답을 했다. 그것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의 태도와 같다. 그러나 창15장의 언약에서 아브라함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냥 믿었다.
<부가설명> 시내산 언약은 내용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 동일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더하였는데,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출19:5)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마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건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일이다. 그 사실을 제시하신 것은 지금 하시는 말씀도 그렇게 해 주시도록 요청하도록 유도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흠이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무흠하였더면”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흠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행위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교훈: 하갈이 시내산 경험과 동일시되었던 이유는 두 경우 모두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잘못된 노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목) 12월 1일 오늘날의 이스마엘과 이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질문: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에 직면해야 하는가?(갈 4:28~31, 창 21:8~21)
[갈4:28~31]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창21:8~21]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답: 핍박에 직면한다.
<부가설명>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진리의 백성을 핍박하는 일에 대한 말씀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인 안에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거스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 5장에서 밝힌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받은 육체의 생명의 소욕이고 하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의 소욕이다. 그래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권고하였다. 또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고 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일을 이루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바울은 이것을 다시 설명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리고 말한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3:5)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으로 이루신다고 약속하였다. 믿는다는 말인 피스튜오는 맡긴다는 뜻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것처럼, 이스라엘 자기들이 하겠다고 대답한 것처럼,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해야 한다고 작심한다. 그리고 또 실망한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교훈: 행위와 육체에 의지하는 신자는 이스마엘의 후손이고,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신자는 이삭의 후손이다.
예비일(금) 12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63~373 “율법과 언약.”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 광야로 인도하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들에게 순종을 조건으로 큰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율법을 주셨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깨어 버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의 신앙은 “옛 언약” 유형입니까? 아니면 “새 언약” 유형입니까?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것은 각 사람이 생각하도 대답해보자. 서론부의 B 4번을 참고하라.
➋ 그대는 무엇을 하겠다 또는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약속하였습니까? 그대가 하나님께 했던 약속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이것도 스스로 대답해보자.
요약: 하갈, 이스마엘, 시내산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는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는 어리석음을 예증한다. 이런 자기 의의 방법을 옛 언약이라고 부른다. 새 언약은 영원한 은혜의 언약으로써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마자 수립되었고, 아브라함을 통해 갱신되었으며 예수님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댓글목록
조홍숙님의 댓글
조홍숙 작성일자세한 설명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유비님의 댓글
유비 작성일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다시한번 주님께 나를 맡겨드립니다
Kaley님의 댓글
Kaley 작성일Times are cahningg for the better if I can get this 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