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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하나님의 거룩함(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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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2-01-30 13:54 조회5,925회 댓글1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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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하나님의 거룩함


기억절: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99:9)

첫째 날(일) “기록되었으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다면 그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품성을 기초로 말씀하셨으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품성 안에서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성대로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우리의 품성대로 읽거나 기록된 글자로만 보고 해석하게 된다면 전혀 다른 말씀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경에 기록된 글자로만 본 사람들(서기관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등)이 구약성경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구약성경에 입각하여 맞서고 있는 장면은 글과 글을 말씀하신 분과의 연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라고 말씀하셔서 글자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성경 글자에는 충실하게 믿고 살지만 그 글을 말씀하신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생명 속에 있다고 할 수 없음도 생각하게 합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하고 있던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율법사는 성경말씀 그대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야기 한 율법사의 대답이 기록된 대로는 맞다고 말씀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고 말씀하심으로 그 율법사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살고 있지만 아직 생명의 연결 속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을 율법 속에서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생명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이 생명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으로서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할 뿐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내가 다 지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율법을 통해 만날 때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형성되며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성령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게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생각할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장 39-40절의 말씀을 글자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하나님께서)저희 눈(이스라엘 사람들)을 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이스라엘 사람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하나님)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글로서 이해하려고 하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12:41)

주의 영광이란 주의 품성입니다.(출33:18-19)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품성을 보게 되니(사6장) 주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눈을 감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을 거절한 사건들조차도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을 거절하게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하게 했다라고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므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품성에 입각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일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눈을 감고 마음을 닫아버려서 예수님을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은 마13:14-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품성의 입장에서, 마태복음은 사실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할까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으면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이 하나님의 품성대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되면 두 가지 기록 모두 맞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은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의 품성대로 기록한 것이고, 마태복음을 사실적인 기록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의 무수히 등장합니다.

사울의 자살과 하나님께서 죽이심 중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요?

대상 10:4 “자기 병기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병기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

반면에 대상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같은 장에서 전혀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읽으면 어떤 기록이 맞는 걸까요?

사울이 자살한 것이 맞는 것인가요?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이 맞는 것인가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읽으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품성대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둘 다 맞게 됩니다.

사울이 자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이 자살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울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품성은 사울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기록하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울을 창조하셨고 사울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다운 모습입니다.

심지어 성경의 기록은 사단이 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그런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삼하24장은 주체가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24:1)

같은 사건을 대상에서는 사단이 한 것으로, 삼하에서는 여호와께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어떤 기록을 믿어야 할까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분명히 둘 중 하나의 기록은 잘 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의 기록이 반대의 입장이라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요?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험 속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존재는 사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한일이 사실이고 우리의 품성으로는 그것으로만 기록해야만 되지만 하나님의 품성에서는 사단이 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하십니다.

그 이유는 루스벨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 사단이 한 일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패턴은 애굽의 바로에게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출애굽을 위해 보내시면서도 모세의 요구에 응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데에 결정적인 일을 해야 할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게 하여 보내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출7:2-4)

글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글은 하나님의 품성대로의 기록이지 사실대로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품성대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서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게 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도 글을 믿지 말고 그 말을 하신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출7:3-4의 글이 사실일 수 없는 이유는 만약 출7:3-4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품성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낸다고 하시고, 한편으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못 보내게 하신다면 믿기 어려운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것은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에 비추어 봐도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무엇일까요?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해 하여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해서 사실의 기록이 있습니다.
출8:32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임에도 하나님은 바로가 스스로 완강케 한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완강케 하여 거절하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지시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글로 보면 이해가 안가지만 하나님의 품성으로 보면 그곳에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주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루스벨이 사단이 되는 하늘에서의 상황도 같은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12:7-9의 내용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지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그이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전쟁이란 표현도 그렇고 싸운다는 표현과 쫓아내신다는 표현 모두 하나님답지 않은 표현처럼 보여 집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 전쟁이나 싸움이 될 수 있을까요?

피조물의 생명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가 자신의 생명의 근원과 전쟁하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가장 적합한 표현이 있다면 논쟁일 것입니다.

각 시대의 대 쟁투의 표현도 각 시대의 대 논쟁이 적합한 것 같습니다.

루스벨과 하나님 사이의 논쟁입니다.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루스벨의 의문에 대해서 대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루스벨의 논리에 많은 천사들이 동조하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품성과 존재를 부정하며 떠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사망을 가져옴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의 잘 못되었음을 설명하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루스벨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아니하였고, 하늘의 존재들도 더 이상 자신의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 더 이상 하늘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함으로 하나님 보좌를 떠나게 됩니다.

사단의 행위를 하나님은 사단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으로 기록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이라면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서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 속에 사단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계12장에는 하나님의 품성의 기록도 있지만 사실적인 기록도 남기셔서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셨습니다.

계12:12에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라고 기록하여서 하나님이 쫓아내셔서 나간 것이 아니라 마귀가 스스로 하늘을 떠나 내려갔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유 6절에도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이라고 기록하여서 하나님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스스로 자기 처소를 떠났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어서 쫓아내셨다는 오해를 바로 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기록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지 않고 사실대로의 기록이 남겨져서 오해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품성대로만 기록되고 사실의 내용을 담지 않아서 오해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라의 반역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죽였다는 기록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갈라서 죽였다는 기록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면 하나님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위의 다른 내용들처럼 하나님의 품성적 기록과 사실적 기록이 함께 있으면 혼란이 없겠지만 한편의 기록만 있을 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뿐이므로 이런 문제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기초로 곰곰히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고라처럼 하나님을 반역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님의 품성다운 행동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그 선택의 힘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마음껏 사용한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남용하면 그 악한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오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택에 대해서 그에게 벌을 주시면 그건 모순 입니다.

자유의지의 남용대로 되지만 그것 때문에 벌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자유의지가 남용될 소지가 있지만 혹 남용된다 할지라도 그 남용의 결과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께서 대신 책임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선택 때문에 벌을 주시거나 죽이시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인 죽음을 그 사람을 대신하여 창조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대속하시는 사랑을 볼 때에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셔서 생명 속에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라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기록이 되어있어서 하나님이 죽이셨다고 믿으면 글만 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기록이 따로 남겨져 있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고라를 죽이셨다는 기록이 있어도 글로서만 받아들이면 여러 가지 성경 자체의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굳이 죽이실 필요가 없는 이유는 사람은 스스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림교회가 성경의 진리 중 하나인 영혼멸절을 지지하는 이유는 사람은 스스로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므로,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면 그 존재 자체가 창조 전의 상태로 돌아감으로 영혼이 안 죽고 벌 받는다는 영혼불멸설과 영원 지옥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가 자신의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인데 굳이 하나님께서 죽이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죽은 사람이라면 굳이 벌을 주실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미워하심도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요일1:5 , 9절)

다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반역한 선택을 한 고라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셔서 그를 구원하고 싶으시지만 고라가 끝끝내 자신의 선택을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고라가 바뀌지 않을 것을 아시고 확신하실 때 눈물을 머금고 그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때에 고라가 그의 선택대로 죽은 것입니다.

사울이 한 행위도, 사단이 한 행위도, 바로가 한 행위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품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사람의 잘 못에 대해 사람의 품성으로는 잘 못한 사람이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께서 달리신 일이 사랑이며 동시에 공의입니다.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박금하장로님의 교과해설 중 인용)

사람의 상대적 개념의 사랑 속에서는 잘 못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공의이지만 절대적 개념의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나 심판을 행할 때에도 하나님의 품성에 따라 행하심으로 사람의 잘 못에 대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시대의 소망, 762쪽)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하나님은 죄인에게 더 큰 은혜를 쏟으시지만 끝끝내 그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고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확률이 완전히 사라질 때,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그의 선택을 인정하게 되고 그 인정하심의 때를 심판이라고 하며 사람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대로 창조전의 무로 돌아가는 심판이 집행되게 됩니다.

무로 돌아가 버린 선택을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크지만 “자기 유익을 구치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전13:5)시는 품성대로 모든 것을 참으시면서 모든 것을 견디시면서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가슴에는 불이 일어납니다.(호11:8)

하나님의 품성을 통해 기록한 성경이므로 글이 아닌,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통해 성경을 보게 될 때 예수님께로 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5:40)

둘째 날(월) 구별함

거룩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개념은 구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창조에 속한 모든 것과 구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다른 창조물들과 구별됩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반면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의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품성에 있어서 다른 창조물들과 구별됩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사랑과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인 반면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인 반면 사람들의 품성으로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못 한 사람이 거기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품성인 반면(눅15장의 맏아들의 생각, 28-30절) 하나님의 품성은 하나님께서 대신 대속하시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롬5:20)


셋째 날(화)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함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초래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사람들의 어둠을 사루어 버릴 듯한 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둠이 빛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요1:5)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자신의 무가치함과 더불어 더 많이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사망 속에 있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절대적 사랑의 은혜를 붙잡게 됩니다.



넷째 날(수) 나를 떠나소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때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절망은 동시에 희망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는 그 절망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기에 사람의 절망을 해결하기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다섯째 날(목) 마귀가 말할 때

마귀가 예수님을 볼 때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자신의 어둠을 살라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마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은 잘 못에 대해서 벌을 주시고 죽이시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보았을 때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이사야의 죗됨 어두움이 빛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이사야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은 부정한 사람에 대해서 벌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에 있던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6-7)고 하셨습니다.

단은 번제단으로 해석할 수 있고 핀 숯은 번제단 위에 올려진 나무와 어린 양의 희생의 결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부정하고 죄 속에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사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이사야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는 분임을 이사야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내 선택대로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신 지셔서 대신 돌아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핀 숯을 입게 닿게 한 스랍의 말은 “이 일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의 상태입니다.(마25:24-26)

죄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유6, 벧후2:4, 창3:4-5)

몸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제물을 풍성하게 바쳐도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고 죄입니다.(사1:11-13)

이제야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된 이사야는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잘 못된 신앙 속에 행위적이고 율법의 조문대로의 열심을 내는 백성들을 위해 누가 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하나님의 질문에, 같은 문제로 고통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품성을 통해 생명이 연결된 자신의 경험을 볼 때에 자신이 가야될 것 같은 확신 속에 자신이 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기 위해 이사야를 보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품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여 이사야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함으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만약 이사야가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이해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저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고 마음을 둔하게 하여 구원 못 받게 하신다고 하십니까? 어떤게 사실입니까? 제가 가서 그들을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못 얻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요? 어떤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질문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의 말씀임을 깨닫고 위의 질문을 하지 않고 어느 때까지 그들이 기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질문합니다.(사6:11)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귀와 눈을 닫게 하여 못 믿게 하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강퍅하여져서 마음과 귀와 눈을 닫고 믿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말씀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12:39-40절에서 인용되었고 이사야가 이렇게 기록한 이유도 하나님의 품성을 알았으므로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실 분이라는 확신 속에 기록되었음을 41절에서 남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창조주로서 책임지시는 사랑의 품성을 볼 때에 그 거룩함에 모든 존재들은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람의 잘 못에 대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에 두려우리 만큼 놀라운 그 사랑에 감격하고 무릎 꿇게 됩니다.

댓글목록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작성일

교회일로 인해 교과해설이 늦어졌습니다.
이번 교과해설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자세히 생각하시면서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정규님의 댓글

이정규 작성일

교과해설이 안 올라와서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품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셨네요.
목사님 덕에 이 일주일이 행복하게 지낼것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요.
건강하세요.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이정규님..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셨다고 하니 더욱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원진덕님의 댓글

원진덕 작성일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하는 치료는 그 물을 닦는 것이고 뉴스타트는 그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이라죠
원인을 찾는 것이 근본이라는.....
하나님 품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서 제 인생에 중심을 찾게된 것 같아서 행복하답니다.
앞으로도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이 될 수있도록 좋은 말씀으로 이끌어주세요^^*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원진덕님..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함께 하여서 넘 좋습니다.
눈이 많이 오네요.
건강하시고 안전운행하시길..

말씀연구님의 댓글

말씀연구 작성일

먼저 이번 교과에 올리신 2-3가지 정도를 빼고
모든 부분들에 있어서 공감합니다!

그래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 대한
저의 견해를 올렸습니다!!

보시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단의 한 죄된 행위를 하나님이 한 것처럼 표현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책임지시는 사랑이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사단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인류가 져야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대신 책임지신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능동적인 사랑의 언어인 주권적 표현으로
하셨다 이런 부분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단의 한 일까지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한다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책임지시는 언어는 우리의 죄를 실제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한 행위를 하나님이 한 것처럼 표현한다면
사단의 죄는 어떻게 책임지시는 겁니까?

십자가에서도 사단의 죄에 대해 돌아가신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사단의 한 행위를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표현해도 문제가 없겠지만 십자가가 인류의 죄에 대해
책임지시는 것이지 사단과 그의 타락한 천사의 죄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생각됩니다!!

실제 사단의 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사랑으로 한 것처럼 표현한다면
그건 말뿐인 사랑이 아닌가요?

그래서 삼하 24장 1절에 표현이
사단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표현한 것이 아닌
다윗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지시려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구속의 경륜의 쟁점은
죄의 책임이 하나님인가? 사단인가?
하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는데....

사단의 죄의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지신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단은 자신의 행위로
하늘에 야기된 분쟁에 대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정부에 그 책임을 돌렸다.

그는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정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은 처음부터 자신이
반역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 우주는 그 기만자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쟁투 498)

그리고 대속죄일에
모든 죄의 대한 책임을
아사셀 염소 즉 사단에게 돌리는 일에 있어서
목사님의 주장처럼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사단이 한 행동을 하나님이 한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의 죄의 책임은 하나님이 아닌 사단이야!!

이렇게 하나님이 주장하는 것 역시 이상한 것 같습니다!!

대속죄일 아사셀 염소에 대한
예언의 신 해석입니다.

“사단은 죄의 창시자이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원인이 된
모든 죄의 선동자이었으므로
공의는 사단이 최종적 벌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사람의 구속과 우주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하늘 성소에서 죄를 제거하고
마지막 형벌을 받게 될 사단에게
이 모든 죄를 돌리므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모형적 봉사에 있어서도
연중 봉사는 성소의 정결과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의 머리 위에 죄를 고백함으로 끝났다.“
(부조 358)

“그리하여 그들은 유혹하여 범하게 한
모든 죄의 책임을 사단이 져야
할 것으로 선고될 것이다.“(쟁투 658)

여기까지가 저의 견해입니다.


여기에 답변 부탁드립니다!



둘째는 사단이 하늘을 스스로 나갔는가?
하나님이 추방 하신 것인가? 입니다

제가 대쟁투 총서에서 이 부분을
다루는 내용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의 흐름과 전체 문맥이
사단이 스스로 나간 것이 아닌
하나님이 추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에
에덴동산에서 스스로 나갔는지
하나님이 내어보냈는지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에덴동산에서
스스로 나갔습니까?

나가기 싫은데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말씀하셔서 나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창3:2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창3:24)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셔서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선고에
아담과 하와는 간청했습니다.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에서 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죄없고 즐거운 집에 계속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열렬히 간청하였다.“
(부조 61,62)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여기서
더 살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나가야 함을 설득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결국 이 말씀에 순종하여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쫓아 내신다” - 라는 표현이
강제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이것은 강제적 의미가 아닌
타당한 합리적 근거와 사랑의 의해 내보내시는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순종하여
나오는 것이죠!!

만약 하나님께서 여기서
나가야 되는 이유를 말씀하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에덴동산에서 나갔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합당하게
말씀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가 끝까지 나가기를 거부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래 너희가 그렇게 원하니 있으라 하셨을까요?
아니면 아담과 하와를 원래 없던 상태로
돌아가게 하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거부했다면
하나님은 일단은 그분의 능력으로
내어보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바르게 알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습니다.
구속의 계획은 성취되어야 하니깐요...

저는 사단은 스스로 나간 것이 아니라
사단은 추방 당한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야 하나님의 사랑의 설득에
순종해서 에덴동산 밖으로 나갔지만
사단은 하나님의 추방과 그 사랑의 설득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보내셔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의 이해가 애매할 수 있기 때문에
예언의 신의 대한 해석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신은
우리가 성경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길잡이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엘렌 화잇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쫓아 보내셨다고 이해했을까요?
스스로 나갔다고 이해했을까요?

각 시대 대쟁투 498-500(영문페이지)를
읽어보시면 사단이 스스로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를 하늘에 둘 수가 없어
추방을 선고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기에 대한 예언의 신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사단이
하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후에도
그를 즉시 멸망시키지 아니하셨다.“
(쟁투 498)

“하늘에서 투쟁이 끝날 때까지
그 큰 찬탈자는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동조자들과 함께
복된 하늘에서 추방당하는 선고를 받자
그 반역의 괴수는 대담하게
창조주의 율법을 멸시하는 말을 공언하였다.“
(쟁투 499)

사단은 스스로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비방하고
오해하도록 주장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그를 동조한 타락한 천사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기 즉 죄로부터 돌아오기를 간청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맞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설득시키려고 하신다“
이렇게 사랑의 강권을 하나님을 오해시키는데
활용을 합니다.

사단과 그를 동조한 타락한 천사들을 위한
은혜의 시기가 끝났을 때
하나님은 추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소멸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로 가는 것이나
아직 온 우주는 죄가 무엇인지
사단의 주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의와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사랑의 봉사만이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충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확신에 기초해야 한다.

하늘과 그 밖의 모든 다른 세계의 주민들은
아직 죄의 본질과 그 결과에 대하여
깨달을 단계가 못 되었으므로
사단을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은혜임을 깨달을 수 없었다” (쟁투 498)

그러므로 사단의 주장이 사실인지
하나님의 주장이 사실인지 깨닫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죄가 용납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추방을 했으나
멸망 시킬 수 없었습니다!

“비록 그가 하늘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라도
무한하신 지혜자는 사단을 멸하지 않으셨다.

하늘과 여러 세계의 거민들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단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단이 그의 원칙들을 더욱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부조 42,43)

하늘을 떠나기 싫어했던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하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은
우주의 행복을 위해 지금껏
투쟁했는데 그 결과가 추방이라니...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내 세우는 것입니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에덴동산을 나갔으면 문제가 없었으나
그들은 여기에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각시대 대쟁투에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투쟁이 끝날 때까지
그 큰 찬탈자는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하여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동조자들과 함께
복된 하늘에서 추방당하는 선고를 받자
그 반역의 괴수는 대담하게
창조주의 율법을 멸시하는 말을 공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천사들은 지배받을 필요가 없으며
언제나 그들을 바르게 지도해 줄
그들 각자의 의지를 따르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추방이 선고되었는데 떠난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겁니다!)

사단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반역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전가시키고
만일 그들이 견책을 받지 않았을 것 같으면
결코 반역을 일으키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과 그 무리는 불충성하는 일에 대담하고
완고해진 나머지 하나님 정부를 전복하려고
헛되이 노력하였다.

반역의 괴수와 그의 모든 동조자들은
불손하게도 그들은 압제의 세력에
죄없는 희생자들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하늘에서 내어 쫓김을 당했다.“(대쟁투 499,500)

추방 선고에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장을 더 강하게 펼쳐
하늘에 있고자 한 사단과 그의 동료들은
결국 하늘에서 내어 쫓김을 당했습니다.

서두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추방의 말씀과
이 합당한 이유를 듣고서도
에덴동산에서 나가길 거부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쩔수 없이
그분의 능력으로 내어보내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죽을 죄인이라도 자신의 죽음을
좋아하는 자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는 심판이라 할찌라도
영원한 죽음에 대한 것은
죄인의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그 죄의 결과를
거두나 죄인이 전 죽기를 소망합니다.
라고 죽는 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대로 가도록....
그 선택이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도
실상 죄인들은 이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선택의 결과를 거두는
심판 즉 무로 가게 하십니다.!!!

저는 사단이 이런 비슷한 방법으로
하늘에서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추방 명령과
그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단과 그 천사들이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쫓겨난 것이 맞다 생각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죄의 본질과
그 결과를 알지 못하는 우주 앞에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시간을 준 것입니다.
너의 주장을 펼쳐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걸려든 곳이 지구입니다.
지구는 사단의 주장을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불공평하고
순종할 수 없다는 증거로써
아담의 범죄를 지적하였다“(소망 117)

왜냐하면 아담도 무흠한 창조가운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법이며
그러므로 법은 개선되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사단이 하늘에 다시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지구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주장한
사단이 스스로 떠났다 라는 것을 증거로 삼은
성경구절들입니다.

계12:12에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유 6절에도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

이 구절들은 스스로 하늘을 떠났음을 말하는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계12장 12절 말씀의 배경은
최초 하늘의 전쟁이 아닌
십자가 이후 하늘에서 내어보냄을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1차적으로
이 구절을 가지고
최초에 있었던 하늘의 분쟁을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계시록 12장 12절 말씀을
살펴보면 사단이 스스로 내려온것처럼 기록되어 보이나
13절에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라고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2장 12절은 십자가의 승리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희생은
그동안 사단이 주장해온
‘율법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공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개선해야 된다‘는 등의
모든 주장을 깨뜨리는 구속의 현장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그는 아담의 타락을 빌미삼아
하늘에 올라가서 자신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말해왔지만
인성을 쓰시고 오신 예수님의 율법의 완전한 순종으로
그의 거짓은 무너졌기에 하나님께서 다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단과 그 타락한 천사들을 공식적으로 추방한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차지하고 싶고
하늘에 계속 있고 싶었으나 예수님을 통해
증명된 사실이 사단을 더 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서 결과적으로
원하지 않는 추방을 두 번 당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대쟁투 시초때
두 번째는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룬 후

십자가 사건이후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죄에 대한 심판 즉 영원한 사망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심판에 대한 사단의 마음은
받아드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받아드렸다면
분노하고 내려가지 않았겠죠!!

결국 이 분노를 사단은
얼마 남지 않는 시간동안
성도를 핍박하고 죄인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힘을 쏟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깨어진 것에 대한 분노와
더 이상 하늘의 보좌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
하나님의 대한 분노....
이 분노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쏟아 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해서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예언의 신을 통해 본 내용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복잡한 질문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말씀 연구님..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생각할만한 내용들인 것 같습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보고 답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며칠전의 사고로 인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생각이 잘 정리가 안되네요.
긴 글 감사합니다.

말씀연구님의 댓글

말씀연구 댓글의 댓글 작성일

목사님 어떤 사고인지 알지못하나
속히 회복되길 기도하겠습니다.
강건하십시오!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안녕하세요?
답글이 늦어졌네요.

사단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인데 사단을 위한 십자가는 지실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단만은 빼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모순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이란 대상도, 형편도 상관없이 사랑한다는 것 아닐까요?
다만 사단과 그의 추종하는 악한 천사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갈 것이 예지적 측면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똑같은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목사님 이번에는 많이 늦으셨네요,
그렇지만 매우 상세한 설명으로 여느 때보다 도움이 많이 됩니다.

위의 글들을 보니 마음이 참 답답하시겠네요^^
힘내시고 게속하여 좋은해설 부탁드립니다.
화이팅!!!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야겠지요..
눈오는 날입니다.
안전운전하세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박용범 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례하지만 질문 2가지만 드리겠습니다.

1,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리엘과 이방 족속과의 수많은 전쟁이 나옵니다.
이방 족속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로 인해 엄청난 살육의 심판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직접 어린아이나 짐승까지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진멸시키도록 명령하십니다.

목사님이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품성에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자대로 읽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그런 명령은 누가 시킨 것이며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타살 당한 것인지요.

또,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과 노아 홍수의 심판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초자연적인 신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인지요.

2, 죄의 존재나 천사들이나 인간들의 범죄와 타락에 있어서 조물주께 어떤 일말의 책임이 있는지요.
하나님이 죄의 출현에 대하여 책임지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요.

죄인을 멸망에서 구속해 주신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지시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는 모순이 옵니다. 아가페 사랑도 아니고요.

그렀습니까?
책임이란 말과 사랑이란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박목사님의 말씀은 주로 이*구 박사의 성경 강의와 논리가 비슷합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은 분들은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재림교회 정통 가르침하곤 다른 면이 있습니다.

여러 교인들을 위하여 꼭 답변 부탁합니다.

"성경에 무엇보다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온 것에 대하여 전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대쟁투492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댓글의 댓글 작성일

박금하 장로님..답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례하지만 질문 드리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례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주신 질문 잘 생각해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며칠전의 사고로 인해서 가슴이 진정이 잘 안되서요, 글이 잘 들어오지가 않네요.
생각을 정리해서 제가 알고 있는 한도내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눈이 많이 오네요.
안전운전 하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사고 때 부상이 심하신거 아닙니까?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시는게 좋을듯합니다.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런 정도의 사고면 부상이 심할 것입니다.
빨리 입원하셔서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치료를 받으시길 부탁합니다.

오늘 아침 묵상 중에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의문이랄 수는 없는 의문이면서도
늘 마음 속에 걸려있는 그런 의문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장면들입니다.
또 자기가 베푼 이적을 알리지 못하게 하는 장면들도 있구요,
뭐 특별히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의문이었어요.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라고 해석해봤지만 그게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피조물이므로 생각에 한계가 있지요, 누구나
그래서 언제든지 예수님을 붙잡고 논쟁하려 들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면 그들은 기어이 그것을 문제 삼으려했고
늘 예수님에게 논쟁하려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피하신것 아닐까요?
그 논쟁이 결코 그들에게 도움이 안될 때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너무도 안타까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늘 한결 같았을 것 같습니다.
안타까움의 기도!
오늘 아침에 깨달은 예수님의 그 마음에 저를 비추어 보았습니다.

참으로 속절 없는 죄인인 제가 보였습니다.
어찌 그리 그 당시 에수님에게 따지던 그들의 품성이 제 모습인지요.
잘난체하고 싶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저와 다른 의견을 들으면 그것을 판단하고 제 의견으로 바꾸려고 하는
그런 제 모습이 보엿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참 힘들게 했구나 라는 생각에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전에 제자신 스스로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요즈음 제가 말씀을 들음으로 조금 알게 되었다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 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에 대해
뭔가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던것 같습니다.

지식이 생기면서 교만이 싹트는 모습인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남들이 이견을 내놓을 때 반론하기 이전에
묵묵히 들어주시는 모습을 볼 때에 참 답답한분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서야 알것 같군요.
말씀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도 제게 많은것을 깨닫게 하시는 군요.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지만
급한 성격에....^^
지금 이생각, 이느낌이 지워지기전에 글올려 봅니다.
빨리 회복되셔서 좋은 말씀 해 주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저번에 제게 해주셨던 말씀이 이제서야 마음속에서 크게 울립니다.
'집사님 어떤 논쟁이든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것 같네요'
네 절대로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용범님의 댓글

박용범 작성일

장로님..
오랫만입니다.
답글이 너무 늦어졌네요..
여러가지 이유로 늦어졌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두가지 주셨는데요, 장로님의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제가 위에 쓴 글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백성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감게 하여 믿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울의 자살과 하나님께서 죽이셨다는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장로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또한 사단이 한일과 하나님께서 하신일이 둘다 성경에 기록되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13장입니다.
사랑과 하나님을 바꾸어 읽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으므로 서로 바꾸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동일하신 분이시고 동일하신 품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8-39, 43-44)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에 다르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힌트가 마19:8에서 보여집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결혼한 부부가 언제나 행복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지만 서로간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겪을때 혹시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오히려
이혼하며 사는 것 같이 살면서 괴로움만 당하는 한 편을 위해서 하나님의 본래 생각은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지만 사람의 완악함을 인하여 모세를 통해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할 수 있다는 말씀을 남용한다면 본래 하나님께서 가지신 하나님의 생각을 저버리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도지만 사람들의 완악함을 인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된 본성의 공의에 맞추어 하나님의 생각은 상대방이 한개의 이를 뺐어도 용서하고 참으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상대방이 가만히 있는 내 이를 한개 뺐다면 상대방의 두개 내지 세개를 빼어야 공의롭고 공정하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정 빼고 싶다면 너가 당한 것처럼 단 한개만 빼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절대적이란 상대방에 따라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랑을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은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과 더 멀어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랑을
주셔야만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사랑과 같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욱 넘치게 부어주신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책임과 사랑이 별개가 아닙니다.
책임감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책임이 있는 사랑입니다.

이박사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이박사님의 말씀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건 장로님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 판단을 객관적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판단하시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누구도 판단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님의 강의가 삼육대학원에서 계절학기로 이번에 개설된다고 들었습니다.
장로님도 한번 참석하셔서 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생각하시는 재림교회의 정통 가르침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화잇의 글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사단은 그가 하늘에서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마치 가혹하고 포악한 분으로 여기게 하여 사람들을 범죄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의 반역에 휘말려 들어가서 범죄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부당한 속박이 인류를 타락케 하였다고 주장하였다."(쟁투, 500)
"대 쟁투가 시자가되었을때부터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고 그분의 율법에 대하여 반역을
선동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이일은 성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기만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반역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36)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멸망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겔33:11) 성령께서는 은혜의 시기가 마칠 때까지 사람들에게 생명의 선물을 받으라고 탄원하신다. 성령의 이러한 탄원을 거절한 자들만이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우주의 파멸을 일으키는 화근이 되므로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지 않은 자들은 결국 그 죄가 멸절될 때에 함께 멸망하게될 것이다."(실물, 123)

장로님과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논쟁은 자신의 논리만을 더 확고히 하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이 생각하시는 것만 제안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서로 좋은 대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행복한 하루가 되시고 기쁨 충만한 삶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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