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질문, 대답, 부가설명)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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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12-02 09:03 조회8,287회 댓글2건본문
12월 10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연구 범위: 갈 5:1~15, 고전 6:20, 롬 8:1, 히 2:14~15, 롬 8:4, 13:8.
갈 2:4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 수호의 중요성을 간략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그토록 자주 말하고 있는 “자유”란 과연 무슨 뜻인가? 이 자유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율법은 어떤 관계인가?
바울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두 가지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첫째는 율법주의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믿음으로 얻은 구원과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사역의 속성을 잊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째 위험은 방종에 빠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자유를 남용할 경향이다. 이런 경향을 가진 자들은 자유를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긴다.
자유와 상반되는 것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종의 얽매임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를 굳건히 지키라고 호소하고 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율법주의와 방종을 피하게 되는지 토의한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맛본다.
➌ 행하기 :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섬김에 뛰어든다.
A.
❷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까?
※ 율법주의와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
❸ 율법주의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율법주의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것을 지켜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정신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율법을 구원받은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성취되게 하는 것이다.
B. ❶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자유를 누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 아마도 매우 지루할 것이다. 방해가 있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된 자유이다.
❷ 진정한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 참 자유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며, 자기를 바르게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르게 지키는 정신과 삶이지만, 방종은 자기를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치는 정신과 태도이다. 이기심의 극치이다. 그것은 죄를 생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어떤 적극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예수께서 내 안에서 그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신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유롭다.
결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자유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그럼으로써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는 율법을 성취합니다.
첫째 날(일) 12월 4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질문: 갈 1:3~4, 2:16, 3:1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에서 어떤 은유가 사용되었는가? 우리는 이 성경절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
[갈1:3,4]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답: 바울은 자유라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즉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자기 몸을 우리 죄를 위하여 드리셔서 죽으심으로 죄를 처리하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는 여러 가지 표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실 일들을 예언적으로 가르쳐주었다. 유월절 양이나 매일 드리는 제물들이나 놋 뱀을 장대에 단 것이나 성소제도나 절기들이나 모든 것이 몸인 그리스도를(골2:17) 가리킨다. 이런 것들이 다 표상이나 은유나 비유들이 된다. 바울은 성소제도도 비유라고 하였다.(히9:9) 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런 표상들 중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한 말씀을(신21:2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 받으시는 것에 적용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께서 당히시고 행하신 이런 사실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임을 정직하게 믿으면 구원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설파한 것이다. 우리는 믿는지 아니면 행하여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행위는 모두 열매들이다. 열매를 맺히려면 나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미 포도나무가 되셨으니 우리는 그 가지가 되어 단단히 나무에 붙어 있야 하고 붙어있으되 뿌리로부터 영양을 잘 공급받는 생명 있는 가지로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며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사망과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얻은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시고 산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날(월) 12월 5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질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는가?(롬 6:14, 18, 8:1, 갈 4:3, 8, 5:1, 히 2:14~15)
[롬6:14,18]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4:3,8]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히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답: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셨다.
<부가설명> 죄에 종노릇한다는 것과 사망의 종노릇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일까? 죄와 사망은 의미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닐까? 로마서 5장17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말한다. 21절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망과 죄를 동격으로 말한 것이 아닌가? 또한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셨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이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5:21) 살아남은 이들과 시대의 소망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죄를 담당하신 예수께서는 죄악의 법적 형벌을 받으셨고 사람을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살아남은 이들 224)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소망 755) 이 성경과 예언의 신의 이 말씀들은 예수라는 사람 자체가 죄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들이다. 이것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인 사람 자체가 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죄의 법적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 값을 갚으신 것이다. 참으로 얼마나 엄청난 희생인가! 창조주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대신하여 죄 자체가 되셨다는 것은 영원한 신비이다. 거저 감사함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교훈: 자유는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죄와 멸망과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셋째 날(화) 12월 6일 위험한 율법주의의 결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질문: 갈 5:2~12을 읽어 보라. 할례와 관하여 바울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갈5:2~1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답: 첫째, 할례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 전체를 지키도록 짐을 지운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셋째, 할례는 영적 성장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할례는 십자가의 공격을 제거한다.(이상 교과에 있는 해설에서 퍼 왔다. 교과에 잘 설명되어 있다.)
<부가설명>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고집한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면 그것은 구약에 제시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기로 서약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상하는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가 속죄받기 위하여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다면 십자가의 속죄를 부인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을 전한 유대인 신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도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하여 완전해지고 거룩하여지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은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완전하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이 거룩함과 완전함을 더럽히지 않고 잘 유지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투쟁이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인의 이런 상태를 더럽히고 훼손하기 위하여 공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이것을 잘 막아야 한다. 그 방패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교훈: 할례를 받기로 결정한 자들은 위험한 영적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넷째 날(수) 12월 7일 방종이 아닌 자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질문: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남용하는 길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는가?(갈 5:13)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답: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고하였다.
<부가설명> 자유라는 말은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절대적인 자유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도 없고 영원한 세상에서도 없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0~22) 죄에게 종 되었을 때 의에 대하여 자유했다는 말은 의의 종이 되면 죄에 대하여 자유하다는 말도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는 영생의 생명을 얻은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지 않는다.(히2:15) 영생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는 사망의 종으로 일생에 매여 있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매인 자들이다. 그 생명이 나타내는 대로 생활하게 된다. 그 생명이 나타나는 생활이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삶이 나나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종노릇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생명의 성질이 그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가 소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유스러운 것과 같은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게 된 자유는 절대 방종이 아니라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섬김을 위한 것이다.
다섯째 날(목) 12월 8일 온 율법을 이룸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질문1: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갈 5:3)를 부정적으로 해석한 부분과 “온 율법(을) 이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롬 10:5, 갈 3:10, 12, 5:3을 롬 8:4, 13:8, 갈 5:14과 비교해 보라.)
[롬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갈3:10,12]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답: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르려는 정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에는 율법이 생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긍정적으로 말한다.
질문2: 바울은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는가?(레 19:18, 막 12:31, 33, 마 19:19, 롬 13:9, 약 2:8)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막12:31,33]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롬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답: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에서 온전한 의미를 찾았다.
<부가설명> 우리는 사랑은 윤리적 행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은 윤리적인 행위 이상의 것이며 그 이전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는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새 계명이 아니다. 새 계명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거듭 확인하셨다. 요13:34,35에서 말씀하시고 다시 요15:12에서 확인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의 사도 요한이 잘 설명해 주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그런 사랑이다.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다. 윤리적 행위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다. 이런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요한이 또 설명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이런 사랑은 사람이 윤리와 도덕의식을 가지고 행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했을 때 그 생명이 나타내는 성질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을 소유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윤리와 도덕적 의무와 책임으로 이런 사랑을 행하려면 얼만 힘들겠는가. 우리는 이런 온전한 사랑을 올바른 이해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거듭나서 예수께서 부활로 증거하신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이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열망으로 온 율법을 이루는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교훈: 성경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얻으려는 노력은 반대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찬성한다.
예비일(금) 12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순수한 믿음은 항상 사랑으로 역사한다. 그대가 갈바리를 쳐다볼 때 그것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그대를 달래거나 마음을 가라앉혀서 잠자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예수의 믿음 즉 역겨운 이기심으로부터 그대의 영혼이 순결해지도록 행동하는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여야 하고, 조심스럽게 선을 지속해야 한다. 참된 증인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고 하신다. 우리의 부지런한 활동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믿음이 우리의 활동을 고무시킨다는 말 역시 사실이다(원고 16, 1890)”(화잇 주석, 갈 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단순히 십계명을 지키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자신의 대답으로부터 율법의 성취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 단순히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이 명했기 때문에 행하는 의무에 실행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의 생리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➋ 사람들이 죄의 방종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남용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덫에 빠지게 됩니까?(요일 3:8 참고)
※ 이런 정신은 예수 생명이 나타내는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며 믿는다고 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행하려는 것일 뿐이다. 생명은 그 생명이 나타내는 생리가 있다. 자유를 남용하는 것은 생명의 성질을 거스르는 것이다. 남용하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참 의미를 체험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마귀의 덫에 걸린 사람이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약: 자유는 복음을 정의하기 위해 바울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 말 속에는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할 삶의 방식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통해 율법주의나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섬기지 않고 생명을 바쳐 이웃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연구 범위: 갈 5:1~15, 고전 6:20, 롬 8:1, 히 2:14~15, 롬 8:4, 13:8.
갈 2:4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 수호의 중요성을 간략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그토록 자주 말하고 있는 “자유”란 과연 무슨 뜻인가? 이 자유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율법은 어떤 관계인가?
바울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두 가지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첫째는 율법주의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믿음으로 얻은 구원과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사역의 속성을 잊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노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째 위험은 방종에 빠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자유를 남용할 경향이다. 이런 경향을 가진 자들은 자유를 율법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긴다.
자유와 상반되는 것은 율법주의와 방종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종의 얽매임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를 굳건히 지키라고 호소하고 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율법주의와 방종을 피하게 되는지 토의한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맛본다.
➌ 행하기 :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섬김에 뛰어든다.
A.
❷ 예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까?
※ 율법주의와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
❸ 율법주의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율법주의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것을 지켜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정신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율법을 구원받은 기쁨이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성취되게 하는 것이다.
B. ❶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자유를 누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 아마도 매우 지루할 것이다. 방해가 있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된 자유이다.
❷ 진정한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 참 자유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며, 자기를 바르게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르게 지키는 정신과 삶이지만, 방종은 자기를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치는 정신과 태도이다. 이기심의 극치이다. 그것은 죄를 생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어떤 적극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예수께서 내 안에서 그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신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유롭다.
결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자유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그럼으로써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는 율법을 성취합니다.
첫째 날(일) 12월 4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질문: 갈 1:3~4, 2:16, 3:1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에서 어떤 은유가 사용되었는가? 우리는 이 성경절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
[갈1:3,4]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답: 바울은 자유라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즉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자기 몸을 우리 죄를 위하여 드리셔서 죽으심으로 죄를 처리하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는 여러 가지 표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실 일들을 예언적으로 가르쳐주었다. 유월절 양이나 매일 드리는 제물들이나 놋 뱀을 장대에 단 것이나 성소제도나 절기들이나 모든 것이 몸인 그리스도를(골2:17) 가리킨다. 이런 것들이 다 표상이나 은유나 비유들이 된다. 바울은 성소제도도 비유라고 하였다.(히9:9) 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런 표상들 중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한 말씀을(신21:2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 받으시는 것에 적용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께서 당히시고 행하신 이런 사실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임을 정직하게 믿으면 구원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설파한 것이다. 우리는 믿는지 아니면 행하여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행위는 모두 열매들이다. 열매를 맺히려면 나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미 포도나무가 되셨으니 우리는 그 가지가 되어 단단히 나무에 붙어 있야 하고 붙어있으되 뿌리로부터 영양을 잘 공급받는 생명 있는 가지로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며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사망과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얻은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시고 산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날(월) 12월 5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질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는가?(롬 6:14, 18, 8:1, 갈 4:3, 8, 5:1, 히 2:14~15)
[롬6:14,18]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4:3,8]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히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답: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셨다.
<부가설명> 죄에 종노릇한다는 것과 사망의 종노릇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일까? 죄와 사망은 의미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닐까? 로마서 5장17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말한다. 21절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망과 죄를 동격으로 말한 것이 아닌가? 또한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셨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이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5:21) 살아남은 이들과 시대의 소망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죄를 담당하신 예수께서는 죄악의 법적 형벌을 받으셨고 사람을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살아남은 이들 224)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소망 755) 이 성경과 예언의 신의 이 말씀들은 예수라는 사람 자체가 죄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들이다. 이것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인 사람 자체가 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죄의 법적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 값을 갚으신 것이다. 참으로 얼마나 엄청난 희생인가! 창조주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대신하여 죄 자체가 되셨다는 것은 영원한 신비이다. 거저 감사함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교훈: 자유는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죄와 멸망과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셋째 날(화) 12월 6일 위험한 율법주의의 결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질문: 갈 5:2~12을 읽어 보라. 할례와 관하여 바울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갈5:2~1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답: 첫째, 할례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 전체를 지키도록 짐을 지운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셋째, 할례는 영적 성장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할례는 십자가의 공격을 제거한다.(이상 교과에 있는 해설에서 퍼 왔다. 교과에 잘 설명되어 있다.)
<부가설명>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고집한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면 그것은 구약에 제시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기로 서약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상하는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가 속죄받기 위하여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다면 십자가의 속죄를 부인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을 전한 유대인 신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도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하여 완전해지고 거룩하여지려고 한다면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은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완전하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이 거룩함과 완전함을 더럽히지 않고 잘 유지해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투쟁이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인의 이런 상태를 더럽히고 훼손하기 위하여 공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이것을 잘 막아야 한다. 그 방패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교훈: 할례를 받기로 결정한 자들은 위험한 영적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넷째 날(수) 12월 7일 방종이 아닌 자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질문: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남용하는 길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는가?(갈 5:13)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답: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고하였다.
<부가설명> 자유라는 말은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절대적인 자유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도 없고 영원한 세상에서도 없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0~22) 죄에게 종 되었을 때 의에 대하여 자유했다는 말은 의의 종이 되면 죄에 대하여 자유하다는 말도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는 영생의 생명을 얻은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지 않는다.(히2:15) 영생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는 사망의 종으로 일생에 매여 있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매인 자들이다. 그 생명이 나타내는 대로 생활하게 된다. 그 생명이 나타나는 생활이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삶이 나나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종노릇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생명의 성질이 그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가 소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유스러운 것과 같은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게 된 자유는 절대 방종이 아니라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섬김을 위한 것이다.
다섯째 날(목) 12월 8일 온 율법을 이룸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질문1: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갈 5:3)를 부정적으로 해석한 부분과 “온 율법(을) 이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롬 10:5, 갈 3:10, 12, 5:3을 롬 8:4, 13:8, 갈 5:14과 비교해 보라.)
[롬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갈3:10,12]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답: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에 이르려는 정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에는 율법이 생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긍정적으로 말한다.
질문2: 바울은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는가?(레 19:18, 막 12:31, 33, 마 19:19, 롬 13:9, 약 2:8)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막12:31,33]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롬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답: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에서 온전한 의미를 찾았다.
<부가설명> 우리는 사랑은 윤리적 행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은 윤리적인 행위 이상의 것이며 그 이전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는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새 계명이 아니다. 새 계명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거듭 확인하셨다. 요13:34,35에서 말씀하시고 다시 요15:12에서 확인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의 사도 요한이 잘 설명해 주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그런 사랑이다.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다. 윤리적 행위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다. 이런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요한이 또 설명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이런 사랑은 사람이 윤리와 도덕의식을 가지고 행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했을 때 그 생명이 나타내는 성질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을 소유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윤리와 도덕적 의무와 책임으로 이런 사랑을 행하려면 얼만 힘들겠는가. 우리는 이런 온전한 사랑을 올바른 이해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거듭나서 예수께서 부활로 증거하신 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이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열망으로 온 율법을 이루는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교훈: 성경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얻으려는 노력은 반대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찬성한다.
예비일(금) 12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순수한 믿음은 항상 사랑으로 역사한다. 그대가 갈바리를 쳐다볼 때 그것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그대를 달래거나 마음을 가라앉혀서 잠자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예수의 믿음 즉 역겨운 이기심으로부터 그대의 영혼이 순결해지도록 행동하는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여야 하고, 조심스럽게 선을 지속해야 한다. 참된 증인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고 하신다. 우리의 부지런한 활동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믿음이 우리의 활동을 고무시킨다는 말 역시 사실이다(원고 16, 1890)”(화잇 주석, 갈 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단순히 십계명을 지키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자신의 대답으로부터 율법의 성취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까?
※ 단순히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이 명했기 때문에 행하는 의무에 실행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의 생리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➋ 사람들이 죄의 방종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남용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덫에 빠지게 됩니까?(요일 3:8 참고)
※ 이런 정신은 예수 생명이 나타내는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며 믿는다고 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행하려는 것일 뿐이다. 생명은 그 생명이 나타내는 생리가 있다. 자유를 남용하는 것은 생명의 성질을 거스르는 것이다. 남용하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참 의미를 체험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마귀의 덫에 걸린 사람이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약: 자유는 복음을 정의하기 위해 바울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 말 속에는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할 삶의 방식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통해 율법주의나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섬기지 않고 생명을 바쳐 이웃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댓글목록
조혜은님의 댓글
조혜은 작성일깊이 있게 성경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름다운향기님의 댓글
아름다운향기 작성일
좋은 양식 맛있게먹고 남아 많이 나누어 주었읍니다 .
늘 건강하시고 좋으신 친구 주님과 행복한 동행 하세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