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질문, 대답, 설명) 0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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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2-27 10:10 조회229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
(3월 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1분)
연구 범위: 골로새서 2장; 히브리서 7:11; 이사야 61:3; 고린도전서 3:6; 신명기 31:24–26; 로마서 2:28, 29; 로마서 7:7
기억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왜 안식일을 지키는지 묻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이번 주 기억절조차 안식일을 반대하는 ‘증거’로 사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구절은 넷째 계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 내 일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오류를 바로 잡고자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오류들이었는가?
먼저, 거짓 가르침은 “철학,” “사람의 전통,” “세상의 초등학문,”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닌 것으로 묘사된다(골 2:8).
또한 할례와 유대 절기 준수(골 2:11, 16), 유대 정결 의식과 음식 관련 규정(골 2:16, 21)도 포함되었고, 천사 숭배나 교제, 천사 숭배를 모방하려는 시도(골 2:18)도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거짓 가르침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근거했으며 아마도 금욕적 관습들도 포함했을 것이다(골 2:22, 23).
이 거짓 교사들은 분명히 신앙적이었고 진실했지만, 복음을 잘못 이해했다. 이번 주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번 주 기억절이 왜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믿음이 성경적 기초 위에 세워질 때 교회를 흔드는 오류로부터 믿음을 지킬 수 있다.
느끼기: 하나님의 요구가 아닌 사람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행하기: 예수를 구주로 받아 십자가의 의를 믿고 말씀을 따름으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다.
TMI 위로
2. 바울이 교회의 제도를 말하며 질서에 신중을 기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고전 11:) *답: 교회가 무질서해지면 진리를 바르게 배우고 깨닫는데 방해가 된다.
3.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내리라는 바울의 권면은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골 2:7)
*답: 예수님 정신으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4.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우리 죄, 십계명을 못 박은 것입니까?(골 2:14)
*답: 빚문서를 못 박아 없앤 것이다. 의례규례를 온전히 성취한 것이다.
5. 바울이 얽매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것 중에 안식일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입니까?(골 2:16)
*답: 일곱 절기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다.
6. 바울이 구약 의식법을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단호하게 정의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골 2:20)
*답: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것을 가르쳐주는 기능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결론: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은 신앙적이었고 진실했지만, 복음을 잘못 이해했다. 믿음이 성경적 기초 위에 세워질 때 거짓 교사의 오류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삶을 정립하여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려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가 아닌 사람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믿음을 향상시키기보다 부담이 되었다. 바울은 할례를 포함한 의식법 등을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골로새에 강요했던 예수의 사역을 가리키는 의식법과 절기의 폐지에 대한 것이며 십계명과 안식일은 없어질 그림자가 아니다.
3월 1일(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욥은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욥 28:12)지 물었다. 바울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골 2:3, 고전 1:30 참조)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답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며, 삶의 목적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충만한 확신”도(골 2:2, 흠정역) 그 안에 있다. 그분을 통해 구원의 전체 계획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되었다.
골로새서 2:1-7을 읽어보라.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은 무엇인가?
[골2:1~7]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답: 골로새와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리를 분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게 하려는 것이다.
“위안을 받고”에 사용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신(paraklēthōsin)'은 '격려받았다’ 또는 ‘힘을 얻었다'를 의미한다(골 2:2). 바울의 소망은 골로새 신자들이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게 돕는 것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연합”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 개의 동사에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 이는 서신이 의도한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한 것”(골 2:5)을 칭찬했다.
“질서”로 번역된 헬라어 탁시스(taxis)는 신약성경에서 아론의 제사장 직분(눅 1:8, 히 7:11)과 멜기세덱의 직분(히 5:6, 10; 히 6:20; 히 7:11, 17)에 사용되었으나, 바울은 이를 교회 내 질서(고전 14:40)에 적용하며 이 구절에서도 그렇게 사용한다.
때때로 교회 질서와 조직을 신학적 의미 없는 단순한 교회 제도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바울은 예배에서 적절한 예절을 규정하고(고전 11 참조), 장로와 집사를 어떻게 선출하는지 명시함으로써(딤전 3, 딛 1) 교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성경의 가르침이 보존되고 전파된다.
골로새 교인들은 바울의 동역자들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받은 결과 믿음의 “굳건”함을 가지게 되었다. 이 믿음이 흔들릴 수 없는 이유는 견고한 성경적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 기초 위에 굳게 선다면 거짓 교사들이 퍼뜨리는 오류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훈> 바울은 질서를 유지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신중했다. 믿음이 성경적 기초 위에 세워질 때 거짓 교사의 오류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수 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와 거질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택하신 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느면 미혹할 것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후 경고의 말씀처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했다고 하셨다(마24:24,25). 이 말씀은 말세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셨는데, 이미 바울 당시 사도요한 당시 이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혔다. 요한은 그의 편지서에서 예수께서 피와 물이 있는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단정했다. 바울도 골로새서에서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식자(識者)들 사이에 파고 든 거짓 철학이었다. 그래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말씀에 굳게 서라고 당부한 것이다. 지금은 더욱 그렇게 해야 할 때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 진리를 성경대로 해석하기보다는 학문적 합리성을 앞세워 해석하고 철학적 사고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이 재림교회 안에도 엄연히 있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고전4:6). 예수님의 경고와 합해서 우리는 정말 조심하고 오직 기록되 말씀으로만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을 가진 것이라고 성경이 보증했다.
3월 2일(월)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내리고 자라남
골로새서의 주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6)는, 그리스도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명확한 좌우명이다. 우리는 가르침의 체계가 아닌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한다(엡 2:20).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죽음, 곧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계신 말씀(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성경)과 분리될 수 없다.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실제로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결정과 행동을 그분의 말씀과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내어드린다는 뜻이다.
골로새서 2: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비유하는 익숙한 성경 은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삶을 정립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는 방법이다.
다음 구절은 식물의 은유를 어떻게 믿는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주는가?(사 61:3, 마 3:10, 눅 8:11-15, 고전 3:6 참조)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8:11~15]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답: 사람이 나무를 심고 가꾸고 기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처럼 진리에 굳게 서도록 지키시고 가꾸시고 자라도록 돌보시는 것으로 설명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를 분명히 설명한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심으신”(사 61:3) 나무로 남아 그분과 그분의 교훈을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해서 완전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모조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인간의 철학과 전통을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사로잡”힌다(골 2: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지만, 다시 속박의 멍에를 메고 노예가 될 수도 있다(갈 5:1; 행 15:10 참조).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불행히도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고, 성경의 권위보다 인간의 권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갈 1:6-9 참조). 이는 초기 교회가 경험한 위험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교훈>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삶을 정립할 때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는 방법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진정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고 비유했다. 요한복음 15장은 예수께서 친히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은 그 농부라고 하시며 우리는 그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는 것은 예수님께 찰떡처럼 붙어 있는 것을 비유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전적으로 주장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다(계19:13, 요1:1, 요일1:1).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기록된 말씀이 전적으로 나의 사상과 생활방식이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성도가 거듭나는 것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벧전1:23).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은 당연히 말씀의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주장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경험의 성도이다.
3월 3일(화) 십자가에 못 박으심
골로새서 2:11-15을 읽어보라. 바울이 여기서 어떤 문제들로 씨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골2:11~15]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답: 할례와 율법주의 자들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이 본문들, 그중에서도 골로새서 2:14이 율법과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논거로 오용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보아왔는가?
이 구절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두 가지 주요 해석을 제안했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기록한 “증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걸었던 팻말(마 27:37; 요 19:19, 20)처럼 “우리를 대적하”여 제기된 죄목들이다. 혹은 둘째, 모세가 기록한 의식법(신 31:24-26 참조)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넓은 맥락에서 살펴볼 때, 이 구절은 분명히 의식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또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골 2:11), 곧 “마음”의 할례(롬 2:28, 29; 신 30:16 참조)를 언급하는데, 이는 의식법의 가장 중요한 규례 중 하나였던 육신의 할례와 분명히 대조된다(레 12:3; 출 12:48 참조).
바울은 이러한 내적 변화를 “육의 몸을 벗는 것”과 물속에 잠기는 침례와 연결한다. 이 침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골 2:11, 12).
이러한 회심의 경험은 마치 죄 가운데 “죽었”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골 2:13)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 것과 같다.
“의문”(골 2:14)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세상(눅 2:1, 행 17:7)이든 교회의 것(행 16:4)이든 법적 규정을 가리킨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단 두 번 등장하는 데, 다른 한 곳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분리 장벽을 형성했던 의식법을 가리킨다(엡 2:14, 15).
바울이 이미 침례로 상징되는 죄 사함과 내적 변화를 언급했으므로 성경의 다른 어디서도 사용되지 않은 다른 은유로 이 주제를 다시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강조한 것과 유사한 요점, 곧 골로새의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포함한 의식법이나 그에 따르는 정결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행 10:28, 34, 35 참조)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다른 곳(롬 7:7)에서 죄를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십계명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교훈>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은 증서는 할례를 포함한 의식법이나 정결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부가설명>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 이 말씀에서 법조문으로 번역한 원문은 “케이로그라폰”이다. ‘케이르’는 ‘손’이다. 즉 ‘손으로 쓴 증서’라는 뜻이다. 요즘 몇 번역은 ‘빚 문서’ 또는 ‘재무증서’라고 번역했다. 빚을 얻고 빚을 냈는데, 언제 갚을 것이라고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써서 준 문서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율법 조문이 아니고 빚진 것을 자기 손으로 적어소 준 무서다. 이것은 사람이 죄를 짓고 기록된 죄 목록이다. 그것을 십자가로 없앤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지은 죄를 지워버리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를 이기는 능력이라고 기록한 것이다(15절). 죄가 죄라고 기록하는 것은 율법이다. 그래서 법조문이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각 사람이 다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새 생명을 얻는다. 그는 여호와의 심으신 의의 나무가 되기 때문에 죄의 열매는 맺을 수 없다. 밖에서 죄의 포자가 날아와서 의의 나무 가지에 붙어 흔들리는 것이다. 의의 나무 진액을 빨아먹는다. 속히 제거하지 않으면 그 나무는 생명의 진액을 잃고 죽게 된다. 이것이 죄와 싸우는 현상이다. 죽기까지 이런 죄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방어가 뚫여도 주님 앞에서 치료받고 또 싸워야 한다.
3월 4일(수) 그림자인가 실체인가?
골로새서 2:16-19을 읽어보라. 바울은 여기서 어떤 유대교 배경의 기독교 관습을 다루고 있는가?
[골2:16~19]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답: 바울은 유대교의 의식적 절기와 절기의 날과 먹고 머시는 것들에 관하여 말한다. 이것들은 다 장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속죄와 그 사업의 그림자들이라고 말한다.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바울의 서신 자체가 이방인이 대다수였을 이 교회에(골 2:13) 분열을 일으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대인 신자들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따를 필요가 없는 것들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2:16이 기독교로 개종한 일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켜지고 있던 여러 유대교 관습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골로새서 2:18이 말하는 요소들도 같은 맥락에 부합한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겸손을 가장하는 것을 비판하셨다(마 6:1, 5, 7, 16). 쿰란 사본을 통해 우리는 어떤 유대인들의 예배 개념에서 천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권면하는 문제들은 다른 곳에서 겪었던 문제들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골로새서 2:16은 너무나 빈번하게 오해받기 때문에, 이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다음 사항들을 주목하라.
바울이 “그러므로”를 사용한 것은 그가 이미 말했던 내용에서 결론을 도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전에 문자적인 할례의 필요성을 배제한 것은 내면의 마음의 변화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골 2:11-15).
“먹고 마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가져온 음식과 음료 헌물을 가리킨다.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골 2:16)은 호세아 2:11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세아는 예식 안식일을 포함하여(레 23:11, 24, 32 참조) 동일한 순서의 절기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핵심은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다(골 2:17, 새번역)라고 말한 바울 자신의 해석에 있다. 이 절기들은 희생 제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고전 5:7, 고전 15:23 참조). 그와 대조적으로 제칠일 안식일은 죄가 있기 전, 성소의 의식적인 제사가 채택되기 오래 전인 에덴에서 이미 제정되었기에 이것은 십자가 이후에 없어질 그림자가 아니다.
<교훈> 바울이 다루는 문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골로새 교회에 강요했던 예수의 사역을 가리키는 절기의 폐지에 대한 것이며 안식일은 없어질 그림자가 아니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7절기가 있다. 절기에 따라서 먹고 마시고 씻고 등등 여러 가지 의례(儀禮)가 있다. 신약에서 이것을 의문(儀文)이라고 했고 우리는 의문의 율법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예식을 진행하는 것과 어떻게 진행해야 되는 지를 조목조목 기록한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이후와 레위기 민수기 등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할례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의례규례를 따라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다. 이런 의례규례는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실 구속사업을 조목조목 상징해서 보여준다. 예수께서 오셔서 이것들을 다 이루셨다. 그래서 십자가로 폐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이 행하신 구속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의례규례로 정해 놓은 조문들의 지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이미 이런 것은 다 행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다 폐했다고 하면 예수믿는 사람들은 식생활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먹고 마시는 것은 의례규례에 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는 더 분명히 기록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 확실히 알고 속지 말고 속이지도 말아야 한다.
3월 5일(목) 사람의 계명
골로새서 2:20-23을 읽어보라. 이 장에서 논의된 다른 사항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책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골2:20~2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답: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당연한 책망이다. 유대인이 주장하는 율법을 따르려는 것은 없어질 것을 귀하게 여기는 속임수에 들어가는 것임을 지적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도록 권고한다.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유대교 의식을 지키려고 하는 문제에 대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규정한다(골 2:8, 20; 갈 4:3, 9 참조). 다시 말해, 지상 성전과 같은 것들은 땅에 속한 것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우리가 의식법에 얽메일 필요가 없는 것은 이것들이 단지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현실을 예표했던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규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분명하지만, 그 기능을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손이 성전 휘장을 찢는 사건(마 27:51; 단 9:27 참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규례는 십자가에서 폐지되었기에,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에 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규례를 따르는 것은 사라져 버릴 이 세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새 세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옛것을 단순히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벧후 3:13)본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규례 위에 인간적인 요구사항을 추가했다는 사실(막 7:1-13 참조)을 제외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약의 의식들을 계속 지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요구사항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그저 인간이 부여한 의무일 뿐이었다. 실제로 이 규례는 믿음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모든 행위를 하는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게 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잘못된 일인데, 그뿐 아니라 교묘하게 마치 이것이 구원을 위한 어떤 공로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기 쉬웠다. 우리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 내내 성경학자들은 종교적 주장을 만들려는 유혹에 굴복해 왔으며, 신자들에게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가로채 왔다. 바울과 다른 성경 기자들이 가르친 것처럼 그리스도만이 성경의 진리가 솟아나는 샘이시다.
<교훈> 예수께서 성취한 구약의 의식은 더 이상 하나님의 요구가 아닌 인간이 부여한 의무일 뿐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믿음을 향상시키기보다 믿음에 부담이 되었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속죄에 관한 의례규례를 따라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의례규례를 다 이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루어야 할 구원사업의 내용을 미리 보여 주면서 메시아가 오시기 전까지 그분이 와서 이렇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의례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 오실 메시아와 그가 와서 그 일을 이루심으로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그 모든 의례규례를 성취하셨으므로 그것을 지키는 것은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래서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된다. 진리를 배반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배반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이것을 강하게 지적하며 책망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랬다. 우리도 주의하고 바르게 진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3월 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사도 시대에 유전과 철학으로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오늘날도 의의 원수는 고등 비평, 진화론, 강신술, 접신술, 범신론 등의 그럴듯한 주장으로 영혼을 금지된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기름 없는 등과 같은 것은 그들이 오해와 혼란을 일으키는 사변적 믿음의 경로로 저희 마음을 돌린 까닭이다. 분석, 추측, 재구성하는 고등 비평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제어하고 향상시키고 감명시키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빼앗고 있다. 강신술에 의하여 군중들은 욕망이 최고의 법이며 방종은 자유요, 인간은 자기 자신만 책임지면 괜찮다고 믿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바울이 골로새 신도들에게 경고한 ‘공교한 말’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는 강신설의 성경 해석을 만나게 될 것이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도의 음성은 성경의 영원한 진리를 분명히 확언하는 말로 인정되어야 한다. 눈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며, 밝혀 주신 길로 꾸준히 전진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관념들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명상과 묵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것이다”(사도행적, 474).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분이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골 2:9, 10) 요한복음 1:1, 히브리서 1:3, 베드로전서 3:22도 참조하라.
*답: 예수님이 창조주요, 통치자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씀이다.
2. 골로새서 2:14-16이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번 주 교과에서 다룬 것 외에, 우리가 더 이상 네 번째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데에 이 구절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어떤 문제점이 있겠는가?
*답: 이것은 그림자 의례규례에 관한 것이지 언약의 규레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의례규례가 아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다(신4:13 참고).
3. 당신은 의식법들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것들을 지키는 데서 영적인 또는 신학적 축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답: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4. 위 인용문에서 엘렌 화잇은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여겨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든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으로부터 부지런히 자신을 지켜야 하는가? 심지어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부분들까지도 말이다.
*답: 기록된 말씀과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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