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사랑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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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금하 작성일12-06-01 23:04 조회4,765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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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사랑의 반응
MT: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문)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그분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청년법관처럼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반문하면서 혹,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둘째 돌비에 기록된 여러 계명들을 말씀하신 다음에
이것들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계명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이다.
그분께서 죽으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사랑처럼,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인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는가?“-교증6,479
우리가 영혼의 가치를 절반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의 영원한 생명의 가치도,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일요일> 사랑의 동기 (요일4;19)
[옵션]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 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토의1) 진정한 제자도의 정신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요일4:18~19)
답: 하나님과 동포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행동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밑에 사도행적 334p의 말씀을 잘 음미하여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명상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해안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랑을 말하려고 노력하나 표현할 말이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의 그분의 생애와 우리를 위한 그분의 희생과 우리의 대언자로서 하늘에서 하시는 그분의 사업과 그분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거처를 생각할 때 다만 오,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여! 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4:10, 3:1). 참된 모든 제자에게서 이 사랑은 거룩한 불처럼 마음의 제단에서 불타오른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것은 이 세상이었다. 당신의 자녀들이 결백한 생애를 통하여 이 사랑을 반사해야 할 곳도 역시 이 세상이다. 이와 같이 하여 죄인들은 십자가로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AA,334
토의2) 오직 사랑만이 제자도 실천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1)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시는 것은 우리가 한 일의 양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그 일을 한 정신입니다. (2)사랑이 없으면 선교하는 일은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위대한 결과보다도 일한 동기를 중요시하시며 성취한 위대한 업적보다 선과 충성심을 더 중히 여기신다”-2T, 510
요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심연에 잠겨 순교의 정신으로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힘에 매수되면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월요일> 죄책감으로 하지 않음 (롬3:19)
토의1) 선교가 의무나 강요, 죄책감에서 비롯되면 어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까요?
답: (1)무거운 짐으로 여김 (2)형식적으로 전도하게 됨 (3)기쁨을 느끼지 못함 (4)일회성으로 그침 (5)불평과 불만이 일어남 (6)기회들을 일부러 회피하게 됨 (7)보상 심리로 전도함 (8)유아기적 신앙에 머무름 (9)사단에게 이용당하고 패배함. (10)품성 변화에 실패함.
“억지로 굴종하는 것은 마음과 품성의 진정한 계발을 방해할 것이요 사람으로 한갖 자동 제어기계가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니다“-정계,43
토의2) 바울은 선교사들에게 어떤 신학적 이해를 가지라고 호소합니까?(롬3:19~24; 8:1~2)
답: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께 나아간 뒤에 죄가 씻겨지고 예수의 의가 덧입혀지면 죄책감은 더 이상 우리의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고 죄 없는 완전한 상태로 예수 안에 섰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느끼는 것만큼 행동의 동기를 그처럼 깊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경험한 만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증거 하려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므로 사랑 안에는 두려움(죄책감)이 없어지고 온전한 사랑은 죄책감을 쫓아내며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DA,22
요점) 죄책감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책감을 벗었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은혜를 전하러 나아가야 됩니다.
<화요일> 섬김의 동기 (요15:13)
[옵션]어느 한 젊은 수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테레사 수녀에게 "저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수녀는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버려진 남자를 치료해줬던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자에게 사랑을 베푼 감격을 그 수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렇소 사랑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아프리카의 성자인 알버트 슈바이처에게 한 부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학자이며 의사입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오지에서 생명을 바쳐 일을 하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지그시 눈을 감은채 부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저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재주가 없답니다, 사랑을 아무리 열심히 설명하여도 그것뿐입니다, 나는 사랑을 베풀면서 건강과 행복을 선물로 받았어요". 사랑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한순간 사람을 감동시키지만 여운이 짧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랑은 오랫동안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토의1) 예수님은 어떤 실례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큰 사랑을 설명하셨습니까? (요15:13)
답: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살신성인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속적인 그리스도의 무아적인 영원한 사랑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죄인을 영원한 멸망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살신성인들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희생과 사랑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죄인을 전도하여 구주께로 이끄는 일은 더 큰 사랑입니다(고전13:3 참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사람은 행동의 동기를 주께 대한 충심 어린 사랑에서 끌어오고 그 사랑의 뿌리에서 그 형제에 대한 무아의 관심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요점)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싶어 할 정도로 그분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수요일> 율법주의 함정 (갈2:16)
토의1) 마20:1~16은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 입니다. 포도 밭 주인이 한 데나리온 품삯을 약속하고 장터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들 중 시차(9시, 12시, 3시)를 두고 각각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저녁에 똑같이 품값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고생한 자들이 주인의 불공평한 처사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약속을 어긴 사실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권리행사는 주인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요?
답: 보수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자들은 구원과 상급이 행위에 근거한다고 믿는, 공로의식에 사로잡힌 신자들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나 영생의 상급은 순종이나 선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은 복음 사명보다는 인간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2:16)
적용) 은혜가 감사해서 전도합니까 아니면 인정받기위해, 아니면 체면이나 의로워지기 위해 합니까? 참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이유를 다음의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영혼을 사랑해서입니다.(살전2;4)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 기껏해야 무익한 종이요,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은총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요 우리의 기쁨의 면류관이 되셔야 한다”-교증3권,526
요점) 우리의 행위와 순종이 어느 정도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복음에 대한 큰 오해이며, 증거와 전도 활동에서 배제해야 하는 생각입니다.
<목요일> 종이 될 자유 (요8:36)
[옵션]어떤 부자가 노예 시장 앞을 지나다가 한 흑인 노예가 팔려서 사랑하는 처자식과 헤어지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 그 신사가 노예 값을 후하게 지불하고 자유의 몸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더니, 너무너무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면서 자원하는 맘으로 주인의 종이 되어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노예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주인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하여 사랑으로 종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의 속박과 노예에서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여 주셨습니다. 신분이 하루아침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노예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옮겨졌습니다. “자유, 생명, 주님의 종”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얼마나 눈물겨운 은총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리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모든 존재들의 섬김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종이 되려고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므로 모든 사람의 섬김과 영예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속성에 참여하고 구속받은 영혼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그분과 나눌 자들은 그분의 무아의 봉사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DA,651
토의1) 죄의 노예와 자유의 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요8:34~36; 갈5:13~15)
답: 종(servant)은 주인의 유익을 위해 자원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며, 노예(slave)는 노예의 상태로 속박당하고 있는 사람, 자신에 대한 통제나 행동의 자유를 잃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양 극단만 존재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며,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릅니다. 구속 사업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 아래서 누구를 섬길지 선택할 자유가 주어집니다.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과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참된 주의 종은 자유를 남용하거나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구원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자유의 종이 되었지만 여전히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내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면, 예수님이 내 삶 속에 계시는 것인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사역을 보여주지만 종의 마음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한 지를 보여준다.”-릭 워렌
요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는 종의 생애, 즉 섬김의 삶을 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는 하나님과의 사랑스런 관계를 일깨우고, 다른 이들에게 대한 우리의 다정한 봉사에 반영될 때에 진정한 증거의 기초가 됩니다.
MT: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문)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그분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청년법관처럼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반문하면서 혹,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둘째 돌비에 기록된 여러 계명들을 말씀하신 다음에
이것들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계명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이다.
그분께서 죽으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사랑처럼,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인 모두는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는가?“-교증6,479
우리가 영혼의 가치를 절반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의 영원한 생명의 가치도,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일요일> 사랑의 동기 (요일4;19)
[옵션]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 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토의1) 진정한 제자도의 정신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요일4:18~19)
답: 하나님과 동포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행동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밑에 사도행적 334p의 말씀을 잘 음미하여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명상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해안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랑을 말하려고 노력하나 표현할 말이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의 그분의 생애와 우리를 위한 그분의 희생과 우리의 대언자로서 하늘에서 하시는 그분의 사업과 그분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거처를 생각할 때 다만 오,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여! 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4:10, 3:1). 참된 모든 제자에게서 이 사랑은 거룩한 불처럼 마음의 제단에서 불타오른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것은 이 세상이었다. 당신의 자녀들이 결백한 생애를 통하여 이 사랑을 반사해야 할 곳도 역시 이 세상이다. 이와 같이 하여 죄인들은 십자가로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AA,334
토의2) 오직 사랑만이 제자도 실천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1)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시는 것은 우리가 한 일의 양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그 일을 한 정신입니다. (2)사랑이 없으면 선교하는 일은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위대한 결과보다도 일한 동기를 중요시하시며 성취한 위대한 업적보다 선과 충성심을 더 중히 여기신다”-2T, 510
요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심연에 잠겨 순교의 정신으로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힘에 매수되면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월요일> 죄책감으로 하지 않음 (롬3:19)
토의1) 선교가 의무나 강요, 죄책감에서 비롯되면 어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까요?
답: (1)무거운 짐으로 여김 (2)형식적으로 전도하게 됨 (3)기쁨을 느끼지 못함 (4)일회성으로 그침 (5)불평과 불만이 일어남 (6)기회들을 일부러 회피하게 됨 (7)보상 심리로 전도함 (8)유아기적 신앙에 머무름 (9)사단에게 이용당하고 패배함. (10)품성 변화에 실패함.
“억지로 굴종하는 것은 마음과 품성의 진정한 계발을 방해할 것이요 사람으로 한갖 자동 제어기계가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니다“-정계,43
토의2) 바울은 선교사들에게 어떤 신학적 이해를 가지라고 호소합니까?(롬3:19~24; 8:1~2)
답: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께 나아간 뒤에 죄가 씻겨지고 예수의 의가 덧입혀지면 죄책감은 더 이상 우리의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고 죄 없는 완전한 상태로 예수 안에 섰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느끼는 것만큼 행동의 동기를 그처럼 깊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경험한 만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증거 하려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므로 사랑 안에는 두려움(죄책감)이 없어지고 온전한 사랑은 죄책감을 쫓아내며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DA,22
요점) 죄책감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책감을 벗었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은혜를 전하러 나아가야 됩니다.
<화요일> 섬김의 동기 (요15:13)
[옵션]어느 한 젊은 수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테레사 수녀에게 "저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수녀는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버려진 남자를 치료해줬던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자에게 사랑을 베푼 감격을 그 수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렇소 사랑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아프리카의 성자인 알버트 슈바이처에게 한 부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학자이며 의사입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오지에서 생명을 바쳐 일을 하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지그시 눈을 감은채 부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저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재주가 없답니다, 사랑을 아무리 열심히 설명하여도 그것뿐입니다, 나는 사랑을 베풀면서 건강과 행복을 선물로 받았어요". 사랑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한순간 사람을 감동시키지만 여운이 짧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랑은 오랫동안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토의1) 예수님은 어떤 실례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큰 사랑을 설명하셨습니까? (요15:13)
답: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살신성인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속적인 그리스도의 무아적인 영원한 사랑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죄인을 영원한 멸망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살신성인들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희생과 사랑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죄인을 전도하여 구주께로 이끄는 일은 더 큰 사랑입니다(고전13:3 참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사람은 행동의 동기를 주께 대한 충심 어린 사랑에서 끌어오고 그 사랑의 뿌리에서 그 형제에 대한 무아의 관심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요점)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싶어 할 정도로 그분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수요일> 율법주의 함정 (갈2:16)
토의1) 마20:1~16은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 입니다. 포도 밭 주인이 한 데나리온 품삯을 약속하고 장터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들 중 시차(9시, 12시, 3시)를 두고 각각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저녁에 똑같이 품값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고생한 자들이 주인의 불공평한 처사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약속을 어긴 사실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권리행사는 주인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요?
답: 보수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자들은 구원과 상급이 행위에 근거한다고 믿는, 공로의식에 사로잡힌 신자들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나 영생의 상급은 순종이나 선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은 복음 사명보다는 인간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2:16)
적용) 은혜가 감사해서 전도합니까 아니면 인정받기위해, 아니면 체면이나 의로워지기 위해 합니까? 참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이유를 다음의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영혼을 사랑해서입니다.(살전2;4)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 기껏해야 무익한 종이요,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은총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요 우리의 기쁨의 면류관이 되셔야 한다”-교증3권,526
요점) 우리의 행위와 순종이 어느 정도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복음에 대한 큰 오해이며, 증거와 전도 활동에서 배제해야 하는 생각입니다.
<목요일> 종이 될 자유 (요8:36)
[옵션]어떤 부자가 노예 시장 앞을 지나다가 한 흑인 노예가 팔려서 사랑하는 처자식과 헤어지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 그 신사가 노예 값을 후하게 지불하고 자유의 몸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더니, 너무너무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면서 자원하는 맘으로 주인의 종이 되어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노예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주인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하여 사랑으로 종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의 속박과 노예에서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여 주셨습니다. 신분이 하루아침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노예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옮겨졌습니다. “자유, 생명, 주님의 종”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얼마나 눈물겨운 은총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리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모든 존재들의 섬김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종이 되려고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므로 모든 사람의 섬김과 영예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속성에 참여하고 구속받은 영혼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그분과 나눌 자들은 그분의 무아의 봉사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DA,651
토의1) 죄의 노예와 자유의 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요8:34~36; 갈5:13~15)
답: 종(servant)은 주인의 유익을 위해 자원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며, 노예(slave)는 노예의 상태로 속박당하고 있는 사람, 자신에 대한 통제나 행동의 자유를 잃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양 극단만 존재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며,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릅니다. 구속 사업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 아래서 누구를 섬길지 선택할 자유가 주어집니다.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과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참된 주의 종은 자유를 남용하거나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구원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자유의 종이 되었지만 여전히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내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면, 예수님이 내 삶 속에 계시는 것인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사역을 보여주지만 종의 마음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한 지를 보여준다.”-릭 워렌
요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구원하는 종의 생애, 즉 섬김의 삶을 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는 하나님과의 사랑스런 관계를 일깨우고, 다른 이들에게 대한 우리의 다정한 봉사에 반영될 때에 진정한 증거의 기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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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교사를 위한 교과 교수법 가이드】
※교과 토의 주제를 중심으로 해답을 찾아가도록 적절한 질문을 하십시오.
※전체 내용(산)을 등산하면서 교과가 의도하는 핵심(나무)을 탐험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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