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선교를 거절하는 변명들(질문, 대답, 설명) 1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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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10-27 21:08 조회4,282회 댓글0건본문
제5과 선교를 거절하는 변명들
(11월 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31분)
연구 범위: 욘 1:~4:, 나 1:1, 왕하 17:5, 6, 시 24:1, 약 1:27, 사 6:1~8
기억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선교사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순종한 것은 아니다. 요나가 그 예이다(요나 1~4장 읽기).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외치도록 하셨다. 오늘날 이라크에 위치한 니느웨는 예루살렘에서 900Km나 떨어진 도보로 한 달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요나는 가기를 거부한 것만 아니라 심지어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욥바에 도착한 요나는 현재 스페인 남부로 추정되는 다시스로 가는 배편을 마련했다. 장장 3,200Km의 뱃길은 날씨에 따라 최소 한 달은 걸렸을 것이다. 앗수르 왕에게 맞서고 싶지 않았던 요나는 니느웨에 도착하는 데 걸렸을 한 달을 반대로 도망치는 데 사용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는 왜 그랬을까?
니느웨 사람들은 악독하고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했던 사악한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가서 그 큰 악에 대해 외치도록 하셨다(욘 1:2). 이 장의 표현은 창세기 18:20, 21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관해 사용하신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아브라함과 사뭇 달랐다.
사명을 피하기 위해 변명을 만들어 내는 요나의 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선교를 거절하는 변명들을 극복하고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느끼기: 선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을 느낀다.
행하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구원과 희망의 소식을 세계에 전한다.
TMI 위로
2. 요나가 사명을 피한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나 3:1~4)
*답: 두려움. 대상의 거대함.
3. 우리가 요나처럼 선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욘 2:9)
*답: 선교를 자기가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4.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지만 요나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욘 3:4)
*답: 니느웨에 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이 필요했다.
5. 요나의 세계관은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습니까?(욘 4:8~11)
*답: 악한 자는 망해야 한다는 세계관이었다.
6. 니느웨의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란다고 말씀하십니까?(욘 4:11)
*답: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신다.
결론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피하여 다시스로 갔다. 그에게는 두려움, 편견, 오해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비 가운데 그를 다시 니느웨로 보내시고 놀랍게 일하셨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내가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날의 니느웨에 사는 도시와 세계의 수많은 사람에게 빛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10월 29일(일) 사명을 피하는 변명: 두려움
나훔 3:1~4, 열왕기하 17:5, 6, 19:32~37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니느웨,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이 관계는 요나가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가기로 한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가?
[나3:1~4]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왕하17:5,6]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왕하19:32~3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답: 앗수르외 그 수도인 니느웨는 너무 사나운 곳이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장본인이고 요나 시대도 그 나라를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나는 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극구 기피하였다.
요나는 아마도 두려움 때문에 니느웨로 가기를 꺼렸을 것이다. 니느웨는 앗수르 왕국의 수도였고 앗수르는 무서운 적이었다.
"분열된 이스라엘의 시대에 고대 세계의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는 앗수르 왕국의 수도 니느웨였다 … 세속적으로 번영하던 시대에 니느웨는 범죄와 악행의 중심지였다. 영감의 기록은 니느웨를 “피 성이여 …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나 3:1)다고 그 특징을 묘사하였다. 선지자 나훔은 표상적인 말로 니느웨 사람을 잔인하고 굶주린 사자로 비유하였다. 나훔은 묻기를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나 3:19)고 기록했다"(선지자와 왕, 265).
규모만으로도 니느웨는 엄청났다. 역사가들은 산헤립이 연면적 503m x 242m 규모에 적어도 80개 이상의 방이 들어있는 남서쪽 궁전을 짓는 등 도시를 크게 확장했다고 말한다.
또 65Km 떨어진 곳에서 도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8개의 운하를 건설했다. 이런 기반 시설만 보아도 니느웨는 주변을 압도하는 도시였다.
게다가 앗수르는 무자비했다. 산헤립은 바벨론 정복에 대한 기록에서 남녀노소 주민의 시체로 거리를 가득 채웠다고 자랑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부조 조각에는 병사들이 희생자를 찔러 죽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앗수르인들은 그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적을 향해 꺼림 없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분명히 요나는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 사이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우리는 종종 요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곤 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이 아닌 두려움에 사로잡혀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훈>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은 큰 이유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앗수르는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때로는 두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부가설명> 심리학자들은 두려움은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가지게 되는 기본 정서 중 하나라고 한다. 기본 정서는 기쁨, 슬픔, 두려움이라고 한다. 슬픔과 두려움은 죄의 속성이다. 죄가 없었으면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두려움의 근본은 사망이다. 사망이나 아픔이 없다면 왜 두려워하겠는가? 사실 전도는 사망과 두려움이 없는 생명을 얻으라고 외치는 것인데, 전도자도 그 몸은 죄와 사망의 몸이므로(롬6:6, 7:24) 사망의 세상에서 사망의 세력의 조롱과 위협이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요나는 앗수르의 악랄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지경에 발을 딛는 것도 두려웠을 것이다. 우리도 전도지를 선택할 때 깡패 지역을 선호하지 않는다. 또 고집이 세고 듣기를 원하지 않으며 위협적 언사를 쓰는 사람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요나가 도망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능력으로 붙드려서 그의 전도는 성공적이었다. 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받은 은사를 따라 충성해야 하는데 모든 은사는 협력하여 복은 전파로 집약되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10월 30일(월) 사명을 피하는 변명: 잘못된 견해
폭풍이 닥쳤을 때 요나는 자신을 탓했다(욘 1:1~12).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당시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 내지 '신들'에 대한 세계관과 이해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다양한 신들이 각각의 땅을 주관한다고 믿었지만, 바다는 혼란스러운 악마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선원들의 세계관에서 바다의 신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요나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당시의 관습적인 신앙에 영향을 받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나 2:1~3, 7~10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요나가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욘2:1~3, 7~10]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답: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을 고백한 것을 봐서 알 수 있다.
요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을 벗어나 이방 문화권 지대를 여행하고 있었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여호와께서 주권자이심을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배웠다. 바람과 파도는 하나님의 것이요, 물고기들도 그러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요나는 땅과 바다의 주권자에게로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구원받았다.
우리도 하나님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 개인의 구원을 바라신 나머지 우리가 주변의 악한 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약 1:27)하도록 하라는 가르침도 어떻게 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희망을 전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이해해야 한다.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오해는 성공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양 여기는 것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선교를 하면서 자신이 '구원자'처럼 일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요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킨 놀라운 역사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간증을 드리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 수 있으시다. 우리가 진리의 씨앗을 심을 수 있지만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역할을 하나님의 역할과 혼동하고는, 그것을 핑계로 복음을 증거 하는 일로부터 도망친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지만 니느웨를 돌이킨 것은 요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다.
<교훈> 선교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하는 것은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협력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은 영혼 구원에 아무런 작용도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은 여호와의 창조라고 하셨다(사45: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흙 한줌을 갖다 놓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영혼 구원을 위하여 늦은 비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기대한다. 사실은 늦은 비 성령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이른 비 역사와 늦은 비 역사이다. 요엘에 예언된 늦은 비 역사는 하나님의 교회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만민에게 임하신다(욜2:28).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신다(행2:17), 그리고 또 하나님의 남 종과 여 종에게 부어주신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심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섬기며 구주 예수님으로 믿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전도할 때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견해로 우리는 낙담할 때가 많다. 감히 내가 그 영혼을 구원했다고 착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흙 한줌을 창조주 앞에 데려다 놓을 뿐이다.
10월 31일(화) 사명을 피하는 변명: 불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경험한 일(욘 2: 참조)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극적으로 보여주었고, 요나의 기도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의 기별을 놓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고 순종하여 니느웨로 돌아갔을지라도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태도가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요나 3장을 읽어 보라. 요나가 전한 내용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이 구절에는 증거하는 것에 대한 어떤 교훈이 담겨 있는가?
[욘3:1~10]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답: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다. 증거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요나의 개인적인 감정이 어떠했든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니느웨 사람들은 마음을 돌이켜 회개했다. 하기 싫었던 일을 하기까지 요나는 많은 일을 겪어야 했지만,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교는 설령 머뭇거렸을지라도 결국 자원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의 가치관은 잃어버린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순위보다 결코 앞설 수 없다. 요나처럼 우리도 때로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편견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선교를 수행하는 데는 시간과 정서적인 힘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에 투자하고 진정으로 그들을 돌보는 것은 부담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삶과 문제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이 시대에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돌보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돈에 대한 생각과 사용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을 돌보는 데 드는 비용, 책자나 전도 자료 구입, 선교 사역에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지출하는 서비스나 편의 시설 비용 등 선교와 관련된 일에는 지출이 따른다. 어떤 형태로든지 선교 사역에는 헌신이 필요하다.
좋은 소식은 요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강력하게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요나는 하늘의 기쁨과 축복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라도 죄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망이 주장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것은 불편한 상태다. 그냥 사는 것도 불편한데 불편하게 하는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은 더 불편하게 하는 사명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명을 받은 은사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생리는 생활을 위하여 몸이 나타내는 생명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 먹는 것, 숨 쉬는 것, 걷는 것, 자는 것, 등등은 다 생리작용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전도하신 후에 제자들에 먹을 것을 사와서 잡수시라고 할 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따고 하셨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전도한 사실을 가리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추수하는 이야기를 하셨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기도하는 시간에 시장하여 먹고자 할 때 하늘에 보자기를 내려보이시면서 잡아먹으라고 하셨다. 이런 표상과 말씀들은 전도가 식생활처럼 그리스도인 생활의 생리작용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불편해도, 두려워도 생명이 나타내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전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의 생리작용이기 때문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우선순위 앞에 자신의 것을 먼저 내려놓는 것이고,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재정, 시간, 마음 등의 헌신이 필요하다. 생활할 때 재정과 시간과 활동이 필요한 것과 같다.
11월 1일(수) 사명을 피하는 변명: 불편한 대면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한편에서 보면 요나의 기도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요나 4장을 읽어 보라. 요나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욘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답: 요나의 문제는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에게는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이 약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낸 그 사람들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의 종말에 대한 기별이 실패로 드러나서 자신이 체면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요나는 니느웨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되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고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의 세계관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고 요나는 자신의 세계가 그렇게 뒤집히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
요나서에서의 하나님과 요나의 두 번째 대면이 이루어진다. 설교나 말씀이 아닌 체험을 통해서다. 세계관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롭거나 다른 것을 들었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세계관은 종종 삶의 경험을 통해 또 그것이 해석되거나 이해되는 방식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경험은 요나가 자신의 세계관이 왜곡되어 있음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크게 자라게 하셔서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요나가 쉴 수 있을 만한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 요나는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식물에 대해 감사했다. 그는 이 기적을 공로 없는 자에게 주신 과분한 기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선행에 따른 적절하고 당연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박넝쿨이 죽자 요나는 몹시 화를 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혼미해져 자살 충동까지 느낄만큼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 후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씀해 주셨고, 요나는 니느웨의 수천, 수만 명의 남녀노소, 동물들보다 식물 한 그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았다.
<교훈> 하나님은 요나를 사랑하시기에 그의 고치기 어려운 문제도 경험을 통해서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기를 원하신다.
<부가설명> 니느웨는 요나의 기별에 회개로 반응했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보는 것을 알고 있다. 히틀러 등 정치가들의 만행이 얼마나 많은가? 느부갓네살 같은 사람은 여러 차례 경고로 마침내 회개했으나 악한 자에게 속한(요일3:12) 사람들은 끝내 돌아서지 않는다. 전도가 어려운 것은 전도 대상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전도를 받지 않도록 하는 강한 세력이 돕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자인 루시퍼 사탄의 힘이다. 창조주는 루시퍼와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루시퍼에게 허락된 시간이 있기 때문에 힘을 그를 꺾지 않으신다. 구원의 기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결정권을 주셔서 루시퍼의 감화를 이기도록 권고하신다. 그러나 가인처럼 악한 자에게 속하여 전도하는 동생을 죽일 수도 있다(요일3:12). 요나는 이런 사람들이 망하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도 때때로 예수님 속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세상이 속히 망했으면 좋겠다는 심리 작용일 수 있다. 요나 심리이다. 필자도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것이다. 성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은사대로 수행하면 결과는 하나님께서 거두실 것이다. 요나가 회개하고 굴복했는지 여부는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 마음을 달아보라는 기별이라고 생각한다.
11월 2일(목)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요나의 이야기는 놀라움 그 이상이다. 요나의 빈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마음을 움직여 죄를 깨닫고 변화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역할은 다만 그분의 통로가 되는 것일 뿐임을 엄중히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당신의 지시에 기꺼이 순종할 겸손한 기별자이다.
이사야 6:1~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표현된 중심 사상은 무엇인가?
[사6:1~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답: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전할 사람을 부르시며, 부르심에 자원하여 응답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것이다.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나님은 기꺼이 자원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건 순종하고 따르기로 선택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요나의 이야기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날 빌딩이 나무와 꽃을 대신하고 끊임없는 소음으로 인해 조용히 그의 음성을 듣기 어려운 도시에 거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욘 4:11)들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삶의 분주함과 추악함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그분의 희망의 소식을 기꺼이 전할 기별자를 필요로 하신다.
이사야는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사 6:8, 새번역)라는 음성을 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겠는가?
<교훈> 하나님은 요나의 빈약한 증거를 통해서도 니느웨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도시들과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부가설명> 성경에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명(召命)이라고 한다. 소명을 받은 사람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사명(使命)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소명하셨다. 그리거 3년 반동안 교육과 훈련을 하셨고 마침내 그들에게 사명을 이행하도록 보내셨다. 그것이 선교다. 그리스도인은 다 소명에 응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 사명을 받았다. 그것이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는 직접 나가서 전하는 것도 있고 그들을 재정으로 돕고 기도로 돕는 것도 포함된다. 현장 선교사와 후원 선교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 선교사이다.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날 우리가 하늘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가 누구에게 전해들었는지 알고 반가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은 다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본인도 예수님을 믿고 생활한 것이 전적으로 성령님 역사라는 것도 깨닫고 감사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11월 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엘렌 화잇은 주변 사람들에게 증거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어조로 말한다. "변명한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지 않으며, 이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을 소홀히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회피하는 불충실한 종으로 하늘책에 기록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한다면 그 사역자는 과연 사람들에게 힘과 복이 되기 위해 봉사하셨던 주님의 모본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소홀히 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양떼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을 배우기 위해 그들의 형제들과 교통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덕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사업의 짐을 함께 지지 않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리뷰 앤 헤럴드, 1892, 8, 30).
이 말씀은 주께서 선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강조하는 강력한 경고이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나에게 위탁된 책임은 무거운 것이었으나 그에게 가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붙드시고 그에게 성공을 허락하실 수 있으셨다. 만일 선지자가 의심치 않고 순종하였더라면 많은 쓰라린 경험을 겪지 않고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요나가 절망에 빠진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연속적인 시련과 기이한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 자신의 구원하시는 무한하신 능력에 대하여 선지자의 확신을 소생시키실 것이었다"(선지자와 왕, 266).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선교에 참여하지 않을 여러 가지 변명을 찾기 쉬울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부르심은 요나를 부르셨던 것만큼이나 매우 분명하다. 이 부름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토의를 위한 질문
1. 선교에 동참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핑계를 대고 싶은 유혹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대의 니느웨는 무엇인가?
*답: 각각 대답해보자.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의 부족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내성적인 성격일 수도 있고, 다양한 니느웨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찾아보자.
2. 진리가 주어진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각해 보라. 이렇게 아름다운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또 자기의 신앙을 증거할 확실한 대답이 준비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3. 어떻게 하면 예수를 증거하는 사명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할 수 있겠는가?
*답: 기도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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