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미혹하는 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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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금하 작성일11-08-20 06:33 조회5,311회 댓글2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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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9, “미혹하는 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와 예배
연구 범위:사 1:11~15, 6:1~8, 사 44장, 58:1~10, 렘 7:1~10, 미 6:1~8.
기억절 :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사 44:7).
[키워드] 스펄전 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개울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연극 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교하였다
"형식주의가 명목상의 교회들을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공언하며 하늘 구름을 타고 속히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교회증언4권401.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면서 지식이나 경건에 아무런 진보를 보이지 않는 자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단순히 주를 따르기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는 아니다. 주중에 어떻게 살든, 안식일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과연 재림신앙이 그런 것인가? 그 정도로 만족해도 되는가?
오늘날 우리는 헛된 의식적 예배 행위에만 집착하고 숙달되어 있지는 않을까?
수천년 전 팔레스틴 필드를 누비며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애쎴던 선지자들의 외침이 들린다.
8월21일(일) 천천의 숫양=미6:6
(문1) 미가 선지자가 고발한 그 당시의 널리 성행했던 죄악의 실상은 무엇인가?
1) 종교적 부패(우상 숭배, 자녀를 제물로 바침, 돈벌이로 전락한 방백 제사장 선지자직)
2) 사회적 부패(강자가 약자를 억압, 착취, 학대함)
3) 도덕적 부패(특권층의 방탕과 탐욕, 뇌물, 강포)
<해설>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이나 이사야보다 조금 늦게 활동하였다(BC758~698). 미가와 이사야의 기별은 공통점이 많으나 미가는 주로 유다와 이스라엘에 한정되었던 반면, 이사야는 주변 국가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그 때 당시의 광범위하게 퍼진 죄악의 보편성을 보여 준다.
미가는 수도 예수살렘 귀족 출신 이사야와 달리 '가드모레셋'이라는 시골의 서민적 환경 속에서 자라나 격심한 빈부 차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부조리와 부정부패상을 직접 목격하고 실감한 선지자이다.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을 넘나들며 종교적,사회적, 도덕적 죄악상을 신랄하게 폭로했으며, 불의하고 범죄한 나라와 개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억압과 불공정한 재판으로 신음하는 민중의 대변자였으며, 히스기야 왕에게 종교개혁을 단행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특히 이 당시는 과거 유다에 존재했던 어떤 배도보다도 더 쇼킹적인 상황들이 전개 되었다. 지금까지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해오던 사람들이 시류에 편승, 이교 예배로 전환하여 배도의 길에 들어섰고, 방백들의 직무유기,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적인 회유 책동, 제사장들은 삯꾼으로 변질되었다.
특권층들은 탐욕과 방탕을 위해 서민들의을 볼모로 전답이나 심지어 자녀들까지 저당 잡아 착취를 일삼았으며, 거룩한 성전에까지 우상을 세워지고, 산당 제사가 일상화되고, 자녀까지 제물로 불사르는 이교 예배가 횡횡하였다. 배도한 지도자들은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 형식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예배를 인정하신다고 오판하였다.
(문2) 배도에 빠진 이스라엘은 성전에 제사하러 나갈 때 어떤 외적인 것에 치중하였는가?
<해설>율법대로'1년된 송아지'도 모자라서 때로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바쳐야 예배를 받으시고 용서를 베풀어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가, 만족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구별한 장자까지 제물로 바쳤다. 이는 예배의 진의를 왜곡하고 이교 제사처럼 제물로 신의 진노를 달래려고 오해하였다.
(문3) 회심을 통한 경건의 회복 없이 드리는 형식적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것을 원하노라"(호6:6)
<프리즘>=가납되는 참된 예배 2원칙=
첫째=이교의 희생 제도는 하나님께 전혀 가납될 수 없다. 어떤 아버지도 속죄 제물로 자녀를 드려서는 안 될 것이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께서만 세상의 죄악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는 이것이다 곧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 7)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이 권고는 여호와의 종들에 의하여, 형식주의의 습관에 빠지고 은혜 베풀기를 잊어버릴 위험에 빠진 자들에게 반복되었다.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의 기간 동안 한 율법사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40)." -선지자와 왕327-
[묵상]""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말은 위대한 진리의 근원되시는 분께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시금석(試金石)이다"원고, 117, 1903.
[적용] 당신도 이스라엘의 전철을 밝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 교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입니까? 왜 나는 무엇 때문에 경건의 모양(외형, 형식)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화) "본인이 약 20여년 전에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서 아내와 함께 학원을 운영하던 적이있다.
그곳에서 서울 쪽으로 오다보면 광덕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 산 밑에서 장애인들 20여명과 함께 생활하시는 장로교 목사님을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면서 목사님의 입양아 여자 아이를 우리 학원에서무료로 가르쳐 준 일이 있었다. 하루는 그 목사님이 서재를 가르키며 이 세상에 단 한권 밖에 없는 책이 있다고 자랑하길래, 도데체 어떤 책인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겨 검정 피지로 된 그럴싸한 두툼한 책을 꺼내 열어 보았다가 급실망하였다. 이유는 그 책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 책이었기 때문이다. 겉만 책 처럼 생겼을 뿐이었다. 속은 기분이지만 그 목사님의 유머 감각과 장난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나, 한 가지 얻은 교훈은 우리의 신앙과 예배가 빗나가게 되면 그와 같이 겉(형식)만 뻔지름한 속빈 강정 같은 위선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언급된 임낙경 목사님은 8월 16일(화) KBS 8:30 아침 생방송에 출현 하신 분이시다)
[요점] 우리가 하나님이 명령과 요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과, 자아 부정을 요구하는 선한 사업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참된 예배요 성령으로 거듭난 진정한 경건이다.
8월22일(월) 이사야를 부르심=사6:8
(문1) 이사야가 경고와 책망의 기별을 전하도록 콜링을 받았을 때, 책임을 회피하려한 이유는?
"그는 자신에게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가 위하여 일하려는 백성들의 완고함과 불신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과업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절망 중에 그의 사업을 포기하고 유다로 하여금 여전히 우상숭배를 계속하도록 버려 둘 것인가? 니느웨의 신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지배하게 할 것인가? 이사야가 성전 주랑(柱廊) 아래 서 있을 때에 이와 같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속에 몰려오고 있었다"-선지자와 왕307.
(문2) 망서리고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어떤 환상을 보여 주셨는가? 이유는?
<해설>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 보좌에 좌정하시고 스랍들이 주위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는 이사야에게 흑암의 권세가 승리할 것처럼 보이는 답답한 현실에서 눈을 떠서 최상권을 가지시고 세계를 다스리시며,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과 용기와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유사한 환상은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고 사명감이 흔들릴 때 자주 나타났는데, 모세(출24:10) 미가야(왕상22:19) 아모스(암9:1) 다니엘(단7:9) 에스겔(1:1: 10:1~5) 요한(계4:1~6) 등이다.
<프리즘> =이사야가 받은 성공의 보증 수표=
"한 스랍이 고통 중에 있는 그를 구원하고 그로 그의 큰 사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제단에서 취한 타오르는 숯불을 그의 입술에 대며 말하기를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말하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였으며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7, 8)라고 응답하였다"-동308.
[묵상] 제단에서 꺼낸 숯은 더러움을 제거하고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상징하였다. 이것은 또한 품성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꺼낸 불을 우리의 입술에 갖다대는 것이다.-SDABC 7권126.
[적용] 당신에게 지금 주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신다. 어떻게 하겠는가?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물에 깊은 경험을 가지며 열심과 정열이 넘치는 일꾼들의 군대이다. 성화되고 자아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필요된다. 곧 시련과 책임을 피하지 않을 사람, 용감하고 진실된 사람,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으로 자리 잡은 사람, 그들의 입술에 거룩한 숯불이 닿아서 “말씀을 전파할” 사람이다. 이런 교역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이 쇠약해지고 치명적인 오류들이 치명적인 독약처럼 대부분의 인류의 도덕을 타락시키고 희망을 시들게 한다. -AA 507.
<기도>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아무게야... 네가 나를 진정 사랑하느냐? 네 양을 치라!"
[요점] 하나님의 성소에서 발현하는 영광을 목격한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과 무능함과 불신의 죄에 대하여 고백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령의 숯불로 정결함을 받고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을 체험하자 즉각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8월23일(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사1:11
(문1) 하나님은 신앙적 스펙(Spec,이력,공력)보다 무엇에 영적 가치를 부여 하시는가?
<해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사 1:11).
1>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것을 원하노라"(호6:6).2>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전5:1).3>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자신을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4> 세상에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아니하노라 하신뜻이 무엇인지 너희는 배우라"(마9:13).5> 의와 공평, 공의로 인자와 겸손을 추구하는 것이다(잠21;3.)6>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몸과같이 사랑하는것이 전제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프리즘>"율법주의적인 종교는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는 종교이므로 사람을 결코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금식이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예배를 위한 엄숙한 집회, 종교적 의식의 반복, 외형적인 겸손, 남의 이목을 끄는 희생 제사 등은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을 의롭고 하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기만이다"
-시대의 소망 p.280 -
<예화> "위선은 영적 화장이다.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인데, 화장을 한 이유는 자신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자신의 얽은 얼굴의 마마 자국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다고 한다. 서커스단의 단원들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자신을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이든지, 자신의 결점을 감추려는 것이든지, 상대방에게 웃음을 주려고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함이든지 화장을 하는 경우는 다 다르겠지만, 그 이유는 결국 ‘상대방을 속이기 위함’ 인 것이다. 화장을 진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면목은 점점 더 감추어질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장한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맨 얼굴을 대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국 남을 속이기 위해서 하는 화장이지만 결국은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 화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은 영적 화장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포장하는 행위가 위선이다. 꾸며진 모습이 아닌, 하나님을 속이기 위한 그런 모습이 아닌, 자신의 참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심이고 참된 예배이다. 유다 백성들은 죄는 감추고 겉으로만 하나님께 수많은 제물로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삶에서 율법의 정신이 실천되지 않을 때, 의식과 형식에 더 집착하게 된다.하나님은 그런 종교적 가면에 염증과 신물이 나셨던 것이다. 위선과 형식적인 예배는 차라리 공공연한 배도보다 더 하나님께 불쾌히 여기심을 받는다."
[묵상]"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참 종교는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데 있음을 보이셨다"- 시대의 소망497.
[적용] 당신은 강도 만난 자의 비유(눅10장)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요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예배와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받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나누며 사는 것이다. 순수한 참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서 발견된다, 의의 부재(不在)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킨다.
8월24일(수) 다 허망하도다=사44:9
(예화)"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 로렌스 반 데 포스트(Laurens van der Post)가 남긴 “허무의 짐”이라는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 골몰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우리는 죽는다. 그리고 우리를 아는 사람들도 다 죽는다. 그러면머지않아 우리는 영원히 잊혀지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하는 수많은 일들이 실제 아무 의미도, 어떤 중요성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문1) 이사야는 허망한 것을 숭배하는 유다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던지는가?
<해설>비록 이사야가 기록한 말씀이 당시의 사회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원칙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한 분이시다. 이사야는 자신의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며 “허망”한 것을 숭배하는 자들을 조소한다.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보이는가? 그러나 지금 내 영혼의 깊은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마지막 때에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는 “허망”한 것에 힘과 시간과 생명을 마친다면 우리도 비슷한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확증하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후 13:5). 만약 우리가 바르게 예배하고 있다면 안식일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줄 것이다. 예배는 삶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핵심적이며 무엇이 일시적이고 무엇이 “허망”한지 되새기는 시간이다.
<프리즘>"우상 숭배자들은, 거짓 신들은 인간을 향상시키고 구원하기에 무력하다는 교훈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11)
[묵상]"현대 이스라엘은 고대의 백성들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질 위험이 더 크다. 심지어, 안식일 준수자들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에 의해서까지 많은 우상이 경배되고 있다...축복과 저주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과 분리되어 겸손하게 순종의 길을 걸을 것 같으면 축복을 받고, 그들이 고상한 하늘의 요구를 짓밟는 우상 숭배자들과 연합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반역한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가 기록되어 그 상황이 우리 앞에 하나의 경고로 주어져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만일 그들의 범죄의 본을 따르고 하나님을 떠나면 분명히 그들처럼 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교회증언1권609.
[적용]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시간과 재물, 정력과 건강을 무가치하고 허망한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 따져보라.
(예: 지나친 자녀교육투자. 레져활동, TV나 컴퓨터, 취미활동, 돈버는 일, 세계여행, 집 치장, 먹고 마시는 일 등)
[요점] 구원을 줄 수 없는 일에 우리가 힘과 시간을 바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잠시 후면 사라질 허망한 것에 시간을 빼앗길 만큼, 남은 은혜의 날과 인생의 날은 길지 않다.
8월25일(목)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렘7:4
(문1) 예레미야가 왜 예루살렘 성전을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하였는가?
<해설> 유다 백성들이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성전에서의 의식적 제사에는 열심이었다. 제사만 잘 드리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라고 생각했고 종교적 의무가 다 끝난 것으로 믿었다. 순백색 대리석으로 장엄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종교 의식의 위대함에 대한 저들의 자부심과 자랑은 미신적이었며, 저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부적처럼 여겼다. 한 술 더떠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거처인 예루살렘 성전은 결코 하나님이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더 신뢰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아무리 휘황 찬란한 황금 보석으로 꾸민 성전이라 할지라도 성전은 그 자체가 거룩하거나 영광스럽지 않다. 성전이 거룩하고 영광스러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해 계실 때이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물을 퉁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품성의 영광을 보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는 가운데 죄를 슬퍼하며, 영원한 멸망과 죄악에서 용서하여 주시고 구속하여주신 구세주께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인과 만나주시는 곳이 될 때, 그곳이 벧엘이 되는 것이다.
(예화)=어느 목사님의 똑같은 설교=
"어떤 교회에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다. 교인들은 새로 오신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실까? 하고 기대하면서 안식일을 기다렸다. 드디어 성일이 되었다. 예배가 끝난 뒤 교인들은 목사님에게 다가와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목사님, 말씀이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좋은 말씀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말씀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오늘의 설교가 좋았다고 목사님께 인사를 하였다. 그 다음 성일이 되었다. 교인들이 설교를 가만 듣다보니 지난 안식일의 설교와 똑 같은 것이었다. 교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대로 넘어갔다. 그런데 목사님이 부임하고 세 번째 안식일의 설교도 지난 주와 두 주 전의 설교와 똑 같은 것이었다. 교인들은 드디어 목사님에게 가서 항의를 하였다. "아니, 목사님, 벌써 똑 같은 설교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을 하셨다. "예, 저도 제가 세 번이나 똑 같은 설교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 제가 새로운 설교를 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제가 보았을 때 세 번씩이나 같은 설교를 하였지만 여러분들의 행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깨달아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회개를 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하는 분들이 있는데도 그렇지를 아니하고 새로운 말씀만 주시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씀은 들음으로 실행으로 옮겨서 변화되는 삶이 되어야 그 말씀의 뜻을 알게 되는데, 지금까지도 여러분들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번에도 똑 같은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묵상] 우리가 매주 안식일에 교회에 나오는 자체로만 만족하고 마음에 안위를 찾는다면, 이미 그 신앙은 골동품에 지나지 않거나 예쁘게 그려진 벽화이거나 종교적 아편에 불과한 것으로 끝난다.
[적용] 당신의 신앙생활에 맹점은 무엇인가? 고칠점은 어떤 것인지 따져 보라.
[요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0~12).
[총론] 우리가 성전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느끼게 될 때, 이사야처럼 영혼이 정결해지기를 구하게 된다. 그 후,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라는 거룩한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힘입게 될 수 있다.
연구 범위:사 1:11~15, 6:1~8, 사 44장, 58:1~10, 렘 7:1~10, 미 6:1~8.
기억절 :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사 44:7).
[키워드] 스펄전 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개울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연극 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교하였다
"형식주의가 명목상의 교회들을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공언하며 하늘 구름을 타고 속히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교회증언4권401.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면서 지식이나 경건에 아무런 진보를 보이지 않는 자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단순히 주를 따르기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는 아니다. 주중에 어떻게 살든, 안식일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과연 재림신앙이 그런 것인가? 그 정도로 만족해도 되는가?
오늘날 우리는 헛된 의식적 예배 행위에만 집착하고 숙달되어 있지는 않을까?
수천년 전 팔레스틴 필드를 누비며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애쎴던 선지자들의 외침이 들린다.
8월21일(일) 천천의 숫양=미6:6
(문1) 미가 선지자가 고발한 그 당시의 널리 성행했던 죄악의 실상은 무엇인가?
1) 종교적 부패(우상 숭배, 자녀를 제물로 바침, 돈벌이로 전락한 방백 제사장 선지자직)
2) 사회적 부패(강자가 약자를 억압, 착취, 학대함)
3) 도덕적 부패(특권층의 방탕과 탐욕, 뇌물, 강포)
<해설>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이나 이사야보다 조금 늦게 활동하였다(BC758~698). 미가와 이사야의 기별은 공통점이 많으나 미가는 주로 유다와 이스라엘에 한정되었던 반면, 이사야는 주변 국가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그 때 당시의 광범위하게 퍼진 죄악의 보편성을 보여 준다.
미가는 수도 예수살렘 귀족 출신 이사야와 달리 '가드모레셋'이라는 시골의 서민적 환경 속에서 자라나 격심한 빈부 차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부조리와 부정부패상을 직접 목격하고 실감한 선지자이다.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을 넘나들며 종교적,사회적, 도덕적 죄악상을 신랄하게 폭로했으며, 불의하고 범죄한 나라와 개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억압과 불공정한 재판으로 신음하는 민중의 대변자였으며, 히스기야 왕에게 종교개혁을 단행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특히 이 당시는 과거 유다에 존재했던 어떤 배도보다도 더 쇼킹적인 상황들이 전개 되었다. 지금까지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해오던 사람들이 시류에 편승, 이교 예배로 전환하여 배도의 길에 들어섰고, 방백들의 직무유기,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적인 회유 책동, 제사장들은 삯꾼으로 변질되었다.
특권층들은 탐욕과 방탕을 위해 서민들의을 볼모로 전답이나 심지어 자녀들까지 저당 잡아 착취를 일삼았으며, 거룩한 성전에까지 우상을 세워지고, 산당 제사가 일상화되고, 자녀까지 제물로 불사르는 이교 예배가 횡횡하였다. 배도한 지도자들은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 형식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예배를 인정하신다고 오판하였다.
(문2) 배도에 빠진 이스라엘은 성전에 제사하러 나갈 때 어떤 외적인 것에 치중하였는가?
<해설>율법대로'1년된 송아지'도 모자라서 때로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바쳐야 예배를 받으시고 용서를 베풀어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가, 만족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구별한 장자까지 제물로 바쳤다. 이는 예배의 진의를 왜곡하고 이교 제사처럼 제물로 신의 진노를 달래려고 오해하였다.
(문3) 회심을 통한 경건의 회복 없이 드리는 형식적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것을 원하노라"(호6:6)
<프리즘>=가납되는 참된 예배 2원칙=
첫째=이교의 희생 제도는 하나님께 전혀 가납될 수 없다. 어떤 아버지도 속죄 제물로 자녀를 드려서는 안 될 것이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께서만 세상의 죄악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는 이것이다 곧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 7)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이 권고는 여호와의 종들에 의하여, 형식주의의 습관에 빠지고 은혜 베풀기를 잊어버릴 위험에 빠진 자들에게 반복되었다.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의 기간 동안 한 율법사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40)." -선지자와 왕327-
[묵상]""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말은 위대한 진리의 근원되시는 분께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시금석(試金石)이다"원고, 117, 1903.
[적용] 당신도 이스라엘의 전철을 밝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 교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입니까? 왜 나는 무엇 때문에 경건의 모양(외형, 형식)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화) "본인이 약 20여년 전에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서 아내와 함께 학원을 운영하던 적이있다.
그곳에서 서울 쪽으로 오다보면 광덕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 산 밑에서 장애인들 20여명과 함께 생활하시는 장로교 목사님을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면서 목사님의 입양아 여자 아이를 우리 학원에서무료로 가르쳐 준 일이 있었다. 하루는 그 목사님이 서재를 가르키며 이 세상에 단 한권 밖에 없는 책이 있다고 자랑하길래, 도데체 어떤 책인지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겨 검정 피지로 된 그럴싸한 두툼한 책을 꺼내 열어 보았다가 급실망하였다. 이유는 그 책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 책이었기 때문이다. 겉만 책 처럼 생겼을 뿐이었다. 속은 기분이지만 그 목사님의 유머 감각과 장난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나, 한 가지 얻은 교훈은 우리의 신앙과 예배가 빗나가게 되면 그와 같이 겉(형식)만 뻔지름한 속빈 강정 같은 위선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언급된 임낙경 목사님은 8월 16일(화) KBS 8:30 아침 생방송에 출현 하신 분이시다)
[요점] 우리가 하나님이 명령과 요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과, 자아 부정을 요구하는 선한 사업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참된 예배요 성령으로 거듭난 진정한 경건이다.
8월22일(월) 이사야를 부르심=사6:8
(문1) 이사야가 경고와 책망의 기별을 전하도록 콜링을 받았을 때, 책임을 회피하려한 이유는?
"그는 자신에게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가 위하여 일하려는 백성들의 완고함과 불신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과업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절망 중에 그의 사업을 포기하고 유다로 하여금 여전히 우상숭배를 계속하도록 버려 둘 것인가? 니느웨의 신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지배하게 할 것인가? 이사야가 성전 주랑(柱廊) 아래 서 있을 때에 이와 같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속에 몰려오고 있었다"-선지자와 왕307.
(문2) 망서리고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어떤 환상을 보여 주셨는가? 이유는?
<해설>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 보좌에 좌정하시고 스랍들이 주위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는 이사야에게 흑암의 권세가 승리할 것처럼 보이는 답답한 현실에서 눈을 떠서 최상권을 가지시고 세계를 다스리시며,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과 용기와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유사한 환상은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고 사명감이 흔들릴 때 자주 나타났는데, 모세(출24:10) 미가야(왕상22:19) 아모스(암9:1) 다니엘(단7:9) 에스겔(1:1: 10:1~5) 요한(계4:1~6) 등이다.
<프리즘> =이사야가 받은 성공의 보증 수표=
"한 스랍이 고통 중에 있는 그를 구원하고 그로 그의 큰 사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제단에서 취한 타오르는 숯불을 그의 입술에 대며 말하기를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말하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였으며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7, 8)라고 응답하였다"-동308.
[묵상] 제단에서 꺼낸 숯은 더러움을 제거하고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상징하였다. 이것은 또한 품성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꺼낸 불을 우리의 입술에 갖다대는 것이다.-SDABC 7권126.
[적용] 당신에게 지금 주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신다. 어떻게 하겠는가?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물에 깊은 경험을 가지며 열심과 정열이 넘치는 일꾼들의 군대이다. 성화되고 자아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필요된다. 곧 시련과 책임을 피하지 않을 사람, 용감하고 진실된 사람,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으로 자리 잡은 사람, 그들의 입술에 거룩한 숯불이 닿아서 “말씀을 전파할” 사람이다. 이런 교역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이 쇠약해지고 치명적인 오류들이 치명적인 독약처럼 대부분의 인류의 도덕을 타락시키고 희망을 시들게 한다. -AA 507.
<기도>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아무게야... 네가 나를 진정 사랑하느냐? 네 양을 치라!"
[요점] 하나님의 성소에서 발현하는 영광을 목격한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과 무능함과 불신의 죄에 대하여 고백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령의 숯불로 정결함을 받고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을 체험하자 즉각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8월23일(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사1:11
(문1) 하나님은 신앙적 스펙(Spec,이력,공력)보다 무엇에 영적 가치를 부여 하시는가?
<해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사 1:11).
1>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것을 원하노라"(호6:6).2>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전5:1).3>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자신을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4> 세상에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아니하노라 하신뜻이 무엇인지 너희는 배우라"(마9:13).5> 의와 공평, 공의로 인자와 겸손을 추구하는 것이다(잠21;3.)6>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몸과같이 사랑하는것이 전제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프리즘>"율법주의적인 종교는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는 종교이므로 사람을 결코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금식이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예배를 위한 엄숙한 집회, 종교적 의식의 반복, 외형적인 겸손, 남의 이목을 끄는 희생 제사 등은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을 의롭고 하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기만이다"
-시대의 소망 p.280 -
<예화> "위선은 영적 화장이다.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인데, 화장을 한 이유는 자신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자신의 얽은 얼굴의 마마 자국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다고 한다. 서커스단의 단원들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자신을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이든지, 자신의 결점을 감추려는 것이든지, 상대방에게 웃음을 주려고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함이든지 화장을 하는 경우는 다 다르겠지만, 그 이유는 결국 ‘상대방을 속이기 위함’ 인 것이다. 화장을 진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면목은 점점 더 감추어질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장한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맨 얼굴을 대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국 남을 속이기 위해서 하는 화장이지만 결국은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 화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은 영적 화장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포장하는 행위가 위선이다. 꾸며진 모습이 아닌, 하나님을 속이기 위한 그런 모습이 아닌, 자신의 참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심이고 참된 예배이다. 유다 백성들은 죄는 감추고 겉으로만 하나님께 수많은 제물로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삶에서 율법의 정신이 실천되지 않을 때, 의식과 형식에 더 집착하게 된다.하나님은 그런 종교적 가면에 염증과 신물이 나셨던 것이다. 위선과 형식적인 예배는 차라리 공공연한 배도보다 더 하나님께 불쾌히 여기심을 받는다."
[묵상]"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참 종교는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데 있음을 보이셨다"- 시대의 소망497.
[적용] 당신은 강도 만난 자의 비유(눅10장)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요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예배와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받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나누며 사는 것이다. 순수한 참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서 발견된다, 의의 부재(不在)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킨다.
8월24일(수) 다 허망하도다=사44:9
(예화)"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 로렌스 반 데 포스트(Laurens van der Post)가 남긴 “허무의 짐”이라는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 골몰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우리는 죽는다. 그리고 우리를 아는 사람들도 다 죽는다. 그러면머지않아 우리는 영원히 잊혀지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하는 수많은 일들이 실제 아무 의미도, 어떤 중요성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문1) 이사야는 허망한 것을 숭배하는 유다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던지는가?
<해설>비록 이사야가 기록한 말씀이 당시의 사회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원칙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한 분이시다. 이사야는 자신의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며 “허망”한 것을 숭배하는 자들을 조소한다.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보이는가? 그러나 지금 내 영혼의 깊은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마지막 때에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는 “허망”한 것에 힘과 시간과 생명을 마친다면 우리도 비슷한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확증하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후 13:5). 만약 우리가 바르게 예배하고 있다면 안식일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줄 것이다. 예배는 삶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핵심적이며 무엇이 일시적이고 무엇이 “허망”한지 되새기는 시간이다.
<프리즘>"우상 숭배자들은, 거짓 신들은 인간을 향상시키고 구원하기에 무력하다는 교훈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11)
[묵상]"현대 이스라엘은 고대의 백성들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질 위험이 더 크다. 심지어, 안식일 준수자들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에 의해서까지 많은 우상이 경배되고 있다...축복과 저주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과 분리되어 겸손하게 순종의 길을 걸을 것 같으면 축복을 받고, 그들이 고상한 하늘의 요구를 짓밟는 우상 숭배자들과 연합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반역한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가 기록되어 그 상황이 우리 앞에 하나의 경고로 주어져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만일 그들의 범죄의 본을 따르고 하나님을 떠나면 분명히 그들처럼 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교회증언1권609.
[적용]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시간과 재물, 정력과 건강을 무가치하고 허망한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 따져보라.
(예: 지나친 자녀교육투자. 레져활동, TV나 컴퓨터, 취미활동, 돈버는 일, 세계여행, 집 치장, 먹고 마시는 일 등)
[요점] 구원을 줄 수 없는 일에 우리가 힘과 시간을 바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잠시 후면 사라질 허망한 것에 시간을 빼앗길 만큼, 남은 은혜의 날과 인생의 날은 길지 않다.
8월25일(목)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렘7:4
(문1) 예레미야가 왜 예루살렘 성전을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하였는가?
<해설> 유다 백성들이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성전에서의 의식적 제사에는 열심이었다. 제사만 잘 드리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라고 생각했고 종교적 의무가 다 끝난 것으로 믿었다. 순백색 대리석으로 장엄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종교 의식의 위대함에 대한 저들의 자부심과 자랑은 미신적이었며, 저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부적처럼 여겼다. 한 술 더떠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거처인 예루살렘 성전은 결코 하나님이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더 신뢰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아무리 휘황 찬란한 황금 보석으로 꾸민 성전이라 할지라도 성전은 그 자체가 거룩하거나 영광스럽지 않다. 성전이 거룩하고 영광스러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해 계실 때이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물을 퉁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품성의 영광을 보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는 가운데 죄를 슬퍼하며, 영원한 멸망과 죄악에서 용서하여 주시고 구속하여주신 구세주께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인과 만나주시는 곳이 될 때, 그곳이 벧엘이 되는 것이다.
(예화)=어느 목사님의 똑같은 설교=
"어떤 교회에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하셨다. 교인들은 새로 오신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실까? 하고 기대하면서 안식일을 기다렸다. 드디어 성일이 되었다. 예배가 끝난 뒤 교인들은 목사님에게 다가와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목사님, 말씀이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좋은 말씀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말씀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오늘의 설교가 좋았다고 목사님께 인사를 하였다. 그 다음 성일이 되었다. 교인들이 설교를 가만 듣다보니 지난 안식일의 설교와 똑 같은 것이었다. 교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대로 넘어갔다. 그런데 목사님이 부임하고 세 번째 안식일의 설교도 지난 주와 두 주 전의 설교와 똑 같은 것이었다. 교인들은 드디어 목사님에게 가서 항의를 하였다. "아니, 목사님, 벌써 똑 같은 설교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을 하셨다. "예, 저도 제가 세 번이나 똑 같은 설교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 제가 새로운 설교를 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제가 보았을 때 세 번씩이나 같은 설교를 하였지만 여러분들의 행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깨달아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회개를 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하는 분들이 있는데도 그렇지를 아니하고 새로운 말씀만 주시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씀은 들음으로 실행으로 옮겨서 변화되는 삶이 되어야 그 말씀의 뜻을 알게 되는데, 지금까지도 여러분들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번에도 똑 같은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묵상] 우리가 매주 안식일에 교회에 나오는 자체로만 만족하고 마음에 안위를 찾는다면, 이미 그 신앙은 골동품에 지나지 않거나 예쁘게 그려진 벽화이거나 종교적 아편에 불과한 것으로 끝난다.
[적용] 당신의 신앙생활에 맹점은 무엇인가? 고칠점은 어떤 것인지 따져 보라.
[요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0~12).
[총론] 우리가 성전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느끼게 될 때, 이사야처럼 영혼이 정결해지기를 구하게 된다. 그 후,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라는 거룩한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힘입게 될 수 있다.
댓글목록
아름다운향기님의 댓글
아름다운향기 작성일
일찍올려주시느라 고생많으시네요.덕분에 열공입니다.
주님축복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다니엘님의 댓글
다니엘 작성일
적절한 예언의 신과 예화와 설명, 베리 굿입니다.
잘 참고하였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