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자존감(Self-esteem)(질문과 대답, 부가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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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2-18 14:13 조회8,448회 댓글2건본문
2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2분
기억절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연구 범위: 시 100:3, 행 17:24~28, 롬 12:3, 마 22:39, 삼하 9장, 눅 15장, 엡4:23~32.
낮은 자존감은 신종 전염병과 같다. 이 문제 때문에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남용, 우울증, 식사장애 등의 문제로 인하여 상담실이나 목회자 사무실을 찾는 발길이 잦다.
일반적으로 낮은 자존감이 병적으로 취급된 적은 없지만, 거의 예외 없이 관계의 손상과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을 겪는 주된 원인은 대중매체일 것이다. 대중매체에서는 연예인들이 실제보다 과대포장 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들 앞에 진열된 우상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초라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은 자존감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전통적인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사람이 자신의 기질과 성격을 자신의 관찰 내지 다른 사람의 관점에 기초하여 해석한 평가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더하고 있다. 인간의 기원과(창 1:26~27),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랑이다(요 3:16). 이런 요소가 더해지면, 자존감에 관하여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된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설명한다.
➋느끼기 :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➌행하기 : 우리 존재에 대한 이상적 평가와 그리스도 몸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중요성에 도달한다.
결론 그리스도인들의 자아존중감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으며 주의 몸의 중요한 지체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요일 2월 20일
기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질문 1. 창 1:26~27, 시 8:5, 100:3, 행 17:24~28을 읽어 보십시오.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과 이 성경절들이 말하고 있는 사실은 얼마나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두 가지의 견해는 우리 자신의 자존감에 각각 어떤 영향을 줄까요?
[창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시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행17:24~28]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답: 세상은 사람들이 미생물에서 고등동물로 그리고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사람을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한다.(시49:20) 그러나 위의 말씀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천사보다(하나님)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자존감으로 말한다면 세상은 사람을 동물로 여기고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긴다. 어디에 자존감이 높겠는가?
오늘날에는 인간의 기원을 원숭이로 보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게는 어떤 초월적인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인류에게 “그분의 형상”이 주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여러 죄악의 세대를 걸치면서 그 형상은 상당 부분 훼손되고 실종되었지만, 여전히 각 사람에게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 예수께 굴복하는 자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부분은 회복될 수 있다.
<부가설명> 여러분이 현실적으로 왕의 자녀라면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는가. 자기의 신분이 고귀한 것을 알고 있을 때 자존감이 넘치게 된다. 자존감은 자기의 정체성과 신분의 어떠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형성된 새로운 인종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이다.(엡4:23) 이 사실이 참으로 인식되고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이다. 이만하면 자존감을 가질만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봉사할 수 있다. 가슴 가득한 만족감과 감사와 풍성함으로 봉사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존기귀한 존재들이다. 성경은 우리를 존귀에 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멸망하는 짐승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봉사를 함으로 충만한 자존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교훈: 인간의 기원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월요일 2월 21일
자기 인식
질문 1. 마 22:39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아상에 대하여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답: 자아를 존중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자아가 중요하다면 동시에 이웃도 중요하다는 사실도 가르친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이웃도 그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합당한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참고 성경구절들이다.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말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한다(롬 2:1, 눅 6:41~42 참고). 왜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른다. 자아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이나 외모, 품성과 능력을 평가할 때, 엄청난 과실을 범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을 매우 사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위 말씀의 초점은 아니다.
질문 2.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에 비추어볼 때, 롬 12:3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답: 하나님께서는 각 신자에게 맡긴 분량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건강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그릇의 크기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고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조화롭게 협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는 위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낮은 자존감과 자만 사이에는 건전한 중간 지대가 있다. 바울은 교만을 경고하고 있지만, 동시에 롬 12:4~8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든 신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각자의 은사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그것을 활용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스스로 알 수 없다. 사람은 모두 타인에 의하여 자기가 정의된다. 첫째는 부모이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자기가 자기인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을 알 때에만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부모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다. 현재의 사람들은 부모를 잃어버리고 고아가 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자기를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다. 태초에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존귀한 피조물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면 자존감을 고취시킬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식구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까지 모두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으로 충만하다.
교훈: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기보다 건전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화요일 2월 22일
다른 사람의 시선
질문 1. 그대가 속한 사회나 문화에서 과도하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재물과, 신분과, 개인의 능력 등이 아닐까? 개인의 능력이 올바르게 평가되어 적절하게 활용된다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질문 2. 성, 계급, 국적에 관한 편견은 사람들의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편견과 차별에 관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갈 3:28.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답: 그것들은 자존감에 영향을 준다. 사람을 위축하게도 하고 사람을 교만하게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하려는 의식이 생기고 의식이 작용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의 재능과 자질과 외모 등으로 결정된다.
우리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며, 그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삼상16:7). 그래서 자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외모를 관찰하고 나타낸 반응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종종 가치 없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9장을 보면 다윗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었던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신을 “죽은 개”라고 일컬었다. 게다가 그는 절름발이였다. 그러나 가족의 재산과 하인들을 돌려받고, 명예가 회복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분명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의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시선은 다른 사람의 자아 관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힘이 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예외 없이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외모에 대한 것도 그렇고 심성에 대한 것도 그렇다. 나는 타인에 의하여 규정되고 정의 된다.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도 자기 눈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희랍 신화의 나르시스(Narcisse)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주 미소년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미소년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물가에 세수하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그것이 타인인줄 알고 물에 비친 자기를 사랑하다가 그 소년을 잡으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거기서 돋아난 풀에 꽃이 피었는데 그것이 수선화라는 희랍 신화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신화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에 노출된 상태로 생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성도로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눈에도 하나님의 아들답게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고양되는 자존감을 인하여 감사하게 될 것이다.
교훈: 다른 사람의 시선은 우리의 자존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시선보다 하나님의 가치와 시선을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수요일 2월 23일
하나님의 시선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24).
질문 1. 눅 15장을 읽어 보십시오. 이 장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런 사실이 우리의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관하여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답: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관심을 가지고 살피시고 찾아주시며 찾도록 찾으신 후에 기뻐하시고 아들로 후대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한다.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달으면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는 대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존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능력을 발휘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없는 특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낙담하고, 중압감에 시달리며, 외롭고, 걱정이 많은 영혼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24시간 대기 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우리가 특별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시는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이다. 그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과 잘못에 상관없이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보여 준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가 우주의 창조자에게 무한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소개해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다 세시고 아신다고 했다.(욥14:16, 31:4,37) 그 말씀들이 부담이 되는가. 그만큼 우리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말씀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며 우리의 생존의 유일한 근거이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행17:28)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그 다함없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두루 보살피시며 영원을 위하여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하신다. 바로 사랑의 손길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잃어버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목요일 2월 24일
새로운 자아
질문 1. 엡 4:23~24을 읽어 보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새 사람”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엡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답: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새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다. 그런 사람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생활자체가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할 것이다.
질문 2. “새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행위들을 요약해 보십시오. 엡 4:25~32.
[엡4:25~3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지 말 것: 1. 거짓을 버릴 것. 2. 죄를 짓지 말 것, 3. 해 지도록 분을 품지 말 것, 4.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 것, 5. 도적질 말 것, 6. 더러운 말을 내지 말 것, 7. 성령 근심하게 말 것, 8. 악독, 9. 분냄, 10. 떠드는 것, 11. 훼방, 12. 악의를 버릴 것.
할 것: 1. 참된 것을 말할 것, 2. 제 손으로 일하여 구제할 것이 있게 할 것, 3. 선한 일을 할 것, 4.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할 것, 5. 선한 말로 피차 은혜를 끼칠 것, 6. 인자하게 하고, 7. 불쌍히 여기고, 용서할 것,
이런 일은 진정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일하시는 모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새 사람을 입자.
“더러운 말을 억제해야 할 의무가 모든 가정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져 있다. 어리석은 말을 함부로 하는 무리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대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좋지 않은 말은 슬쩍 흘려버리고 유익을 주는 방면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도록 해야 한다”(실물교훈, 337).
<부가설명> 내가 자주 말하는 성경 이야기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사실이다.(고전15:22) 아담의 후손들은 예외 없이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썩어질 씨로 태어난다.(벧전1:23) 그렇게 난 사람들을 육으로 난 사람이요 육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상태로는 결단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썩은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받을 수 없다.(고전15:5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나면 영에 있는 사람들이 된다. 예수께서 친히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후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다.(요3:5,6)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바로 영으로 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롬8:9) 이 사람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자아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실제적인 신분이 된다. 그러면 자존감이 얼마나 고양되겠는가. 우리는 이 사실이 실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가? 그렇다면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샘솟게 된다. 그래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데서 큰 성취감을 얻는다.
금요일 2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돌보신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산 자들은 어떻게 돌보시겠는가?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귀하다. 그의 나라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단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예수께서는 갈보리의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엘렌 G. 화잇 언급, 더 리뷰 앤드 헤럴드, 1892. 5. 3.).
“우리는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께 구하는 일을 게을리함으로 여러 풍족한 복을 잃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우리의 잘못을 밝혀 주도록 그분께 구하면, 그분은 그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우리 자아에 대한 참모습을 보여 주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보았다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잊지 말도록 하자. 흠이 많은 우리 품성의 상태를 철저하게 살피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된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자”(엘렌 G. 화잇 언급, 더 레이크 유니온 헤럴드, 1909. 11. 3.).
위의 두 인용문은 열등감과 자만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우리에게 추가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의 내용을 기초로 롬 12:2~3을 읽어보라. 균형 잡힌 자아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롬12: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자기의 그릇의 크기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릇의 크기대로 우리를 가장 합당하게 대하신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화요일 교과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한 사람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건강한 자존감을 갖도록 돕고자 할지라도, 그들에게 해가 되는 길로 그들의 자아를 키우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과정에서 그들을 해하는 길로 빠지지 않도록 올바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므비보셋은 사울 왕조의 사람이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그 전 왕조의 자손들은 죄인이 된다. 므비보셋의 처지가 바로 그랬다. 그는 숨어서 살았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을 기억하고 그를 찾아서 왕조 중에 하나처럼 대접했다. 그러므로 그는 불구였지만 자기의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고 아마도 자기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하였다. 다윗이 자기를 접대하는 그 일로 우쭐대지 않았다. 그는 전 왕조의 자손이라는 멍에를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삼하19:28) 과거의 자아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아를 우쭐대지 않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큰 감사로 겸손하게 봉사하며 살아가도록 스스로 자기를 설득할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이렇게 주장하신다. 므비보셋이 바로 그런 모습을 나타내었다.
기억절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연구 범위: 시 100:3, 행 17:24~28, 롬 12:3, 마 22:39, 삼하 9장, 눅 15장, 엡4:23~32.
낮은 자존감은 신종 전염병과 같다. 이 문제 때문에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남용, 우울증, 식사장애 등의 문제로 인하여 상담실이나 목회자 사무실을 찾는 발길이 잦다.
일반적으로 낮은 자존감이 병적으로 취급된 적은 없지만, 거의 예외 없이 관계의 손상과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을 겪는 주된 원인은 대중매체일 것이다. 대중매체에서는 연예인들이 실제보다 과대포장 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들 앞에 진열된 우상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초라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은 자존감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전통적인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사람이 자신의 기질과 성격을 자신의 관찰 내지 다른 사람의 관점에 기초하여 해석한 평가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더하고 있다. 인간의 기원과(창 1:26~27),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랑이다(요 3:16). 이런 요소가 더해지면, 자존감에 관하여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된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설명한다.
➋느끼기 :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➌행하기 : 우리 존재에 대한 이상적 평가와 그리스도 몸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중요성에 도달한다.
결론 그리스도인들의 자아존중감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으며 주의 몸의 중요한 지체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요일 2월 20일
기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질문 1. 창 1:26~27, 시 8:5, 100:3, 행 17:24~28을 읽어 보십시오.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과 이 성경절들이 말하고 있는 사실은 얼마나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두 가지의 견해는 우리 자신의 자존감에 각각 어떤 영향을 줄까요?
[창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시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행17:24~28]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답: 세상은 사람들이 미생물에서 고등동물로 그리고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사람을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한다.(시49:20) 그러나 위의 말씀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천사보다(하나님)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자존감으로 말한다면 세상은 사람을 동물로 여기고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긴다. 어디에 자존감이 높겠는가?
오늘날에는 인간의 기원을 원숭이로 보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게는 어떤 초월적인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인류에게 “그분의 형상”이 주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여러 죄악의 세대를 걸치면서 그 형상은 상당 부분 훼손되고 실종되었지만, 여전히 각 사람에게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 예수께 굴복하는 자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부분은 회복될 수 있다.
<부가설명> 여러분이 현실적으로 왕의 자녀라면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는가. 자기의 신분이 고귀한 것을 알고 있을 때 자존감이 넘치게 된다. 자존감은 자기의 정체성과 신분의 어떠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형성된 새로운 인종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이다.(엡4:23) 이 사실이 참으로 인식되고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이다. 이만하면 자존감을 가질만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봉사할 수 있다. 가슴 가득한 만족감과 감사와 풍성함으로 봉사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존기귀한 존재들이다. 성경은 우리를 존귀에 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멸망하는 짐승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봉사를 함으로 충만한 자존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교훈: 인간의 기원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월요일 2월 21일
자기 인식
질문 1. 마 22:39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아상에 대하여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답: 자아를 존중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자아가 중요하다면 동시에 이웃도 중요하다는 사실도 가르친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이웃도 그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고 합당한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참고 성경구절들이다.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말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한다(롬 2:1, 눅 6:41~42 참고). 왜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른다. 자아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이나 외모, 품성과 능력을 평가할 때, 엄청난 과실을 범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을 매우 사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이 위 말씀의 초점은 아니다.
질문 2.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에 비추어볼 때, 롬 12:3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답: 하나님께서는 각 신자에게 맡긴 분량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건강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그릇의 크기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고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조화롭게 협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는 위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낮은 자존감과 자만 사이에는 건전한 중간 지대가 있다. 바울은 교만을 경고하고 있지만, 동시에 롬 12:4~8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든 신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각자의 은사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그것을 활용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스스로 알 수 없다. 사람은 모두 타인에 의하여 자기가 정의된다. 첫째는 부모이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자기가 자기인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을 알 때에만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부모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다. 현재의 사람들은 부모를 잃어버리고 고아가 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자기를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다. 태초에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존귀한 피조물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면 자존감을 고취시킬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식구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까지 모두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으로 충만하다.
교훈: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기보다 건전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화요일 2월 22일
다른 사람의 시선
질문 1. 그대가 속한 사회나 문화에서 과도하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재물과, 신분과, 개인의 능력 등이 아닐까? 개인의 능력이 올바르게 평가되어 적절하게 활용된다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질문 2. 성, 계급, 국적에 관한 편견은 사람들의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편견과 차별에 관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갈 3:28.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답: 그것들은 자존감에 영향을 준다. 사람을 위축하게도 하고 사람을 교만하게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하려는 의식이 생기고 의식이 작용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의 재능과 자질과 외모 등으로 결정된다.
우리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며, 그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삼상16:7). 그래서 자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외모를 관찰하고 나타낸 반응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종종 가치 없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9장을 보면 다윗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었던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신을 “죽은 개”라고 일컬었다. 게다가 그는 절름발이였다. 그러나 가족의 재산과 하인들을 돌려받고, 명예가 회복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분명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의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시선은 다른 사람의 자아 관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힘이 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예외 없이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외모에 대한 것도 그렇고 심성에 대한 것도 그렇다. 나는 타인에 의하여 규정되고 정의 된다.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도 자기 눈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희랍 신화의 나르시스(Narcisse)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주 미소년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미소년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물가에 세수하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그것이 타인인줄 알고 물에 비친 자기를 사랑하다가 그 소년을 잡으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거기서 돋아난 풀에 꽃이 피었는데 그것이 수선화라는 희랍 신화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신화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에 노출된 상태로 생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성도로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눈에도 하나님의 아들답게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고양되는 자존감을 인하여 감사하게 될 것이다.
교훈: 다른 사람의 시선은 우리의 자존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시선보다 하나님의 가치와 시선을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수요일 2월 23일
하나님의 시선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24).
질문 1. 눅 15장을 읽어 보십시오. 이 장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런 사실이 우리의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관하여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답: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관심을 가지고 살피시고 찾아주시며 찾도록 찾으신 후에 기뻐하시고 아들로 후대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한다.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달으면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는 대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존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능력을 발휘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없는 특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낙담하고, 중압감에 시달리며, 외롭고, 걱정이 많은 영혼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24시간 대기 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우리가 특별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시는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이다. 그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과 잘못에 상관없이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보여 준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가 우주의 창조자에게 무한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소개해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다 세시고 아신다고 했다.(욥14:16, 31:4,37) 그 말씀들이 부담이 되는가. 그만큼 우리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말씀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며 우리의 생존의 유일한 근거이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행17:28)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그것이 가장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그 다함없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두루 보살피시며 영원을 위하여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하신다. 바로 사랑의 손길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잃어버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목요일 2월 24일
새로운 자아
질문 1. 엡 4:23~24을 읽어 보십시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새 사람”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엡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답: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새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다. 그런 사람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생활자체가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할 것이다.
질문 2. “새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행위들을 요약해 보십시오. 엡 4:25~32.
[엡4:25~32]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지 말 것: 1. 거짓을 버릴 것. 2. 죄를 짓지 말 것, 3. 해 지도록 분을 품지 말 것, 4.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 것, 5. 도적질 말 것, 6. 더러운 말을 내지 말 것, 7. 성령 근심하게 말 것, 8. 악독, 9. 분냄, 10. 떠드는 것, 11. 훼방, 12. 악의를 버릴 것.
할 것: 1. 참된 것을 말할 것, 2. 제 손으로 일하여 구제할 것이 있게 할 것, 3. 선한 일을 할 것, 4.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할 것, 5. 선한 말로 피차 은혜를 끼칠 것, 6. 인자하게 하고, 7. 불쌍히 여기고, 용서할 것,
이런 일은 진정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일하시는 모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새 사람을 입자.
“더러운 말을 억제해야 할 의무가 모든 가정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져 있다. 어리석은 말을 함부로 하는 무리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대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좋지 않은 말은 슬쩍 흘려버리고 유익을 주는 방면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도록 해야 한다”(실물교훈, 337).
<부가설명> 내가 자주 말하는 성경 이야기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사실이다.(고전15:22) 아담의 후손들은 예외 없이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썩어질 씨로 태어난다.(벧전1:23) 그렇게 난 사람들을 육으로 난 사람이요 육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상태로는 결단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썩은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받을 수 없다.(고전15:5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나면 영에 있는 사람들이 된다. 예수께서 친히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후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다.(요3:5,6)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바로 영으로 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롬8:9) 이 사람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자아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실제적인 신분이 된다. 그러면 자존감이 얼마나 고양되겠는가. 우리는 이 사실이 실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가? 그렇다면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샘솟게 된다. 그래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데서 큰 성취감을 얻는다.
금요일 2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돌보신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산 자들은 어떻게 돌보시겠는가?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귀하다. 그의 나라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단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예수께서는 갈보리의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엘렌 G. 화잇 언급, 더 리뷰 앤드 헤럴드, 1892. 5. 3.).
“우리는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께 구하는 일을 게을리함으로 여러 풍족한 복을 잃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우리의 잘못을 밝혀 주도록 그분께 구하면, 그분은 그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우리 자아에 대한 참모습을 보여 주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보았다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잊지 말도록 하자. 흠이 많은 우리 품성의 상태를 철저하게 살피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된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자”(엘렌 G. 화잇 언급, 더 레이크 유니온 헤럴드, 1909. 11. 3.).
위의 두 인용문은 열등감과 자만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우리에게 추가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의 내용을 기초로 롬 12:2~3을 읽어보라. 균형 잡힌 자아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롬12: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자기의 그릇의 크기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릇의 크기대로 우리를 가장 합당하게 대하신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화요일 교과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한 사람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건강한 자존감을 갖도록 돕고자 할지라도, 그들에게 해가 되는 길로 그들의 자아를 키우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과정에서 그들을 해하는 길로 빠지지 않도록 올바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므비보셋은 사울 왕조의 사람이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그 전 왕조의 자손들은 죄인이 된다. 므비보셋의 처지가 바로 그랬다. 그는 숨어서 살았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을 기억하고 그를 찾아서 왕조 중에 하나처럼 대접했다. 그러므로 그는 불구였지만 자기의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고 아마도 자기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하였다. 다윗이 자기를 접대하는 그 일로 우쭐대지 않았다. 그는 전 왕조의 자손이라는 멍에를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삼하19:28) 과거의 자아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아를 우쭐대지 않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큰 감사로 겸손하게 봉사하며 살아가도록 스스로 자기를 설득할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이렇게 주장하신다. 므비보셋이 바로 그런 모습을 나타내었다.
댓글목록
sunny님의 댓글
sunny 작성일감사합니다. 깊이 있게 설명해 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
감사합니다.
원래 답글을 잘 쓰지 않는데, 요즘 저의 집 사람이 몸져 누워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줄어들어서 답글을 더욱 쓰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답글을 달아 대답하는 것이 예의라고 우리 아이들이 나무라는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sunny님의 글에 답을 답니다. 깊이 있게 보셨으니 감사합니다. 항상 주 안에서 말씀에 풍성하시고 복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