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죄책감(교훈과 풍부한 예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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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1-21 09:51 조회6,565회 댓글2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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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죄책감
1월 29일 안식일 일몰: 5시 52분
(도입 예화)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관용을 베풀었다. “이 경우에는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이제 그만 청각이 약해져서 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누구든지 죄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교훈)
살아가면서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 있는데 죄의식, 후회, 양심의 가책 등등이다. 이런 감정들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에게 가치 있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죄책감은 자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기준을 여겼으며 이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지침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죄책감을 해결키 위해 어떤 이들은 죄책감 자체를 부인하거나 억누름으로서 만회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법은 불행하게도 전혀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가 하면 이 감정에 완전히 항복해 버려서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기력상태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데, 이는 우리가 갖는 죄책감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우리의 잘못된, 혹은 실수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 행동을 취함으로서 변화를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생기는 감정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억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3~4)
일요일 1월 23일
수치심
도입)
해로운 수치심과 죄책감은 분명히 구분된다. 올바른 죄책감은 뭔가 잘못을 하거나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중심에서부터 드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죄책감도 나중에는 해로운 수치심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에릭슨은 많은 진보를 이룩한 제3의 심리학에서 죄책감의 학습됨과 그 자발적인 면에 대한 차이를 다루고 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죄책감은 수치심 보다 좀 더 성숙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자신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는 입장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가치관의 통합된 입장에서 나오는 경우인데 포슨과 맨슨에 따르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믿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정도이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결국 죄책감은 자신의 가치를 좋게 보고 있기에 그가 그 자신이 믿는 방향대로 나아가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수치심은 아예 자신의 가치를 좋게 여기지 않고 수치스럽게 여긴다. 행동이 아닌 존재에 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Facind Shame]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죄책감은 인류가 경험한 첫 번째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범죄한 직후, 아담과 하와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 이전에 없었던 이러한 반응은 아버지이자 친구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분을 대면하기 꺼려하는 그들의 수치심을 의미했다. 소중한 친밀감이 깨졌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과 수치심뿐 아니라 슬픔까지 느끼게 되었다.
교훈: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부가적용)
죄책감이 들었을 때 하나님을 택할 수 있다. 죄책감이 들어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연락을 단절하고 힘들어하는 더 깊은 죄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위해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그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면서 새롭게 더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죄책감이 들었을 때 방향을 틀어 하나님께로 그렇게 마음을 다시 두는 것은 사실 쉽지 않고 더 거슬러 올라 산을 오르는 듯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죄책감이 들었을 때 우울함보다 하나님께 더 깊게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고..그것이 당신에게 더 유익이 되는 길인 것을 기억하자.
월요일 1월 24일
요셉의 형제들
도입)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미국에서 어느 한인이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집에 화재가 났는데, 집안에 있던 자기 아들이 화재로 죽은 것이다.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온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다” 라고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그때에 옆에 있던 경찰이 이 어머니를 살인죄로 체포했던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아들을 죽였다고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는데, 이 사실을 알고는 한국 변호사가 가서 그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돈 버느라고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모의 죄책감이 “내가 죽었다”고 통곡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미국인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경찰은 그녀를 석방해주었다고 한다. 죄책감,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이다. 이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이 오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교훈: 과거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가지고 과거의 잘못에 몰두하기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가적용)
어떤 분이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여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몇 번이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그토록 많이 용서하라는 명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토록 반복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요한1서 5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죄를 짓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생활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회개할 때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죄를 이기게 된다.
화요일 1월 25일
진액이 빠짐
도입)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난, 재채기, 사랑 등이다. 가난의 영역은 참으로 넓어서 화려한 옷 한두 벌로 쉽게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터져 나오는 기침이나 재채기도 감추기가 어렵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면 아무리 그것을 감추려 해도 환한 얼굴로 다 드러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창밖이나 허공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 사람은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자루 속의 송곳은 감출 수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고 보면 감출 수 없는 것 중의 한 가지가 ‘자루 속의 송곳’인 셈이다. 송곳은 끝이 뾰족한 도구로, 종이나 나무에 작은 구멍을 뎬
1월 29일 안식일 일몰: 5시 52분
(도입 예화)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관용을 베풀었다. “이 경우에는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이제 그만 청각이 약해져서 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누구든지 죄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교훈)
살아가면서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 있는데 죄의식, 후회, 양심의 가책 등등이다. 이런 감정들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에게 가치 있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죄책감은 자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기준을 여겼으며 이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지침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죄책감을 해결키 위해 어떤 이들은 죄책감 자체를 부인하거나 억누름으로서 만회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법은 불행하게도 전혀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가 하면 이 감정에 완전히 항복해 버려서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기력상태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데, 이는 우리가 갖는 죄책감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우리의 잘못된, 혹은 실수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 행동을 취함으로서 변화를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생기는 감정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억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3~4)
일요일 1월 23일
수치심
도입)
해로운 수치심과 죄책감은 분명히 구분된다. 올바른 죄책감은 뭔가 잘못을 하거나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중심에서부터 드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죄책감도 나중에는 해로운 수치심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에릭슨은 많은 진보를 이룩한 제3의 심리학에서 죄책감의 학습됨과 그 자발적인 면에 대한 차이를 다루고 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죄책감은 수치심 보다 좀 더 성숙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죄책감은 자신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는 입장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가치관의 통합된 입장에서 나오는 경우인데 포슨과 맨슨에 따르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믿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정도이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결국 죄책감은 자신의 가치를 좋게 보고 있기에 그가 그 자신이 믿는 방향대로 나아가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수치심은 아예 자신의 가치를 좋게 여기지 않고 수치스럽게 여긴다. 행동이 아닌 존재에 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Facind Shame]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죄책감은 인류가 경험한 첫 번째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범죄한 직후, 아담과 하와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다. 이전에 없었던 이러한 반응은 아버지이자 친구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분을 대면하기 꺼려하는 그들의 수치심을 의미했다. 소중한 친밀감이 깨졌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과 수치심뿐 아니라 슬픔까지 느끼게 되었다.
교훈: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부가적용)
죄책감이 들었을 때 하나님을 택할 수 있다. 죄책감이 들어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연락을 단절하고 힘들어하는 더 깊은 죄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위해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그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면서 새롭게 더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죄책감이 들었을 때 방향을 틀어 하나님께로 그렇게 마음을 다시 두는 것은 사실 쉽지 않고 더 거슬러 올라 산을 오르는 듯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죄책감이 들었을 때 우울함보다 하나님께 더 깊게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도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고..그것이 당신에게 더 유익이 되는 길인 것을 기억하자.
월요일 1월 24일
요셉의 형제들
도입)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미국에서 어느 한인이 살인죄로 기소가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집에 화재가 났는데, 집안에 있던 자기 아들이 화재로 죽은 것이다.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온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다” 라고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그때에 옆에 있던 경찰이 이 어머니를 살인죄로 체포했던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아들을 죽였다고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는데, 이 사실을 알고는 한국 변호사가 가서 그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돈 버느라고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모의 죄책감이 “내가 죽었다”고 통곡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미국인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경찰은 그녀를 석방해주었다고 한다. 죄책감,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이다. 이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이 오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교훈: 과거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가지고 과거의 잘못에 몰두하기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가적용)
어떤 분이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여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몇 번이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그토록 많이 용서하라는 명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토록 반복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요한1서 5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죄를 짓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생활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회개할 때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죄를 이기게 된다.
화요일 1월 25일
진액이 빠짐
도입)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난, 재채기, 사랑 등이다. 가난의 영역은 참으로 넓어서 화려한 옷 한두 벌로 쉽게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터져 나오는 기침이나 재채기도 감추기가 어렵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면 아무리 그것을 감추려 해도 환한 얼굴로 다 드러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창밖이나 허공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 사람은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자루 속의 송곳은 감출 수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고 보면 감출 수 없는 것 중의 한 가지가 ‘자루 속의 송곳’인 셈이다. 송곳은 끝이 뾰족한 도구로, 종이나 나무에 작은 구멍을 뎬
댓글목록
문성철님의 댓글
문성철 작성일감사합니다. 목요일 저녁에 올려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정인혜님의 댓글
정인혜 작성일
주님처럼 비유통해 어리석은 백성들의 이해를 도우시는것같아
감사히 잘읽고 있습니다
훨씬 재미 있게 느껴져 전 처럼 성경절 찾아 적다 보면 좋고 나에게 유익인줄 알면서도
지루하고 싫증이나 하루이틀분만 하고 덮어버렸는데
이번기 공부는 나를 더 살필수있는 깊이있게 나를 돌아보게 하는것같아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