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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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1-01-14 13:58 조회8,769회 댓글2건본문
1월 22일 안식일 일몰: 오후5시 44분
기억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연구 범위: 삼상 25장, 엡 4:1~3, 벧전 3 : 9 ~ 1 2 , 눅 17:3~4 , 23:3 4 , 약5:16.
<교과를 공부할 때마다 꼭 염두에 둬야할 사실>
이번 기 교과에서 우리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것을 주님의 통치에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에 관한 성서적인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성경 인물들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번 기 교과의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정서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낙담에 빠지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주의 사랑의 빛을 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반사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공중전도집회를 열 때, 예비 집회 성격으로 스트레스 관리 세미나를 인도하는 강사가 있었다. 그는 설문지를 만들어 청중들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 것 4, 5개를 기록하게 했다. 전도회 봉사자들은 건강, 재정, 직업, 관계 등 일반적인 영역들로 답을 분류하였다. 그런데 한 봉사자가 보니, 집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강사는 이미 가장 큰 원인에 대하여 강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를 어떻게 알고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다. 강사의 말에 따르면 결과는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의 주범은 바로 ‘나쁜 관계’였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 주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성경의 교훈을 배우려고 한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관계의 기초를 설명한다.
➋느끼기 : 가정,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연합을 강화시키는 태도를 소중히 여긴다.
➌행하기 : 우리의 삶 속에 긍정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고 증진시키는데 필요한 원칙들을 실천한다.
결론 우리가 서로에게 축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를 용서할 것이며, 서로 배려하고 격려하면서 항상 서로를 세워 주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일요일 1월 16일
모든 겸손과 온유
질문 1. 엡 4:1~3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왜 연합이나 좋은 관계와 연결시킬까요? 이런 태도가 대인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그대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엡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답: 겸손과 온유와 인내는 상대방을 높여주는 일에 가장 적합한 성질들이다. 사람은 자기를 인정해줄 때 유쾌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를 낮추면 역효과가 난다. 사람은 정당하게 자기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에게 역겹게 여겨진다면 역효과를 낼 것이다.
질문 2. 삼상 25장을 읽어 보십시오. 긴장이 팽팽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했던 아비가일과 다윗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삼상25:18~35]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19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20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으로 좇아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 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 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답: 이 두 사람의 대화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다. 다윗의 아비가일을 칭찬하기에 앞서 아비가일에게 이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므로 인간적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기 않도록 마음을 일깨웠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구하고 성령의 주장으로 이렇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태도이다.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성공적인 사회적 교류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삼상 25장). 결과는 자신을 상대에게 어떻게 나타내고 있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진다.
다윗의 태도를 보라. 비록 그에게 군사들이 있었지만, 그는 전갈을 보내어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나발과 그의 가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고, 자신을 “네아들 다윗”이라고 소개하였다(8절).
아비가일은 넉넉하게 선물을 준비하였고, 다윗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그에게 절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불렀고, 다윗을 “내 주”라고 일컬었다. 그녀를 통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쓸데없는 유혈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그녀의 선한 판단력을 칭찬하였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아비가일은 효과적인 중재를 통하여 무죄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한편 나발은 다윗이 굳이 보복하지 않았을지라도 공포에 휩싸여 죽었다.
<부가설명> 온유는 예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고, 겸손은 예수님을 높이고 그 말씀의 역사를 따라 생활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온유와 겸손은 없다. 인간의 온유한 모양과 겸손한 태도의 밑바닥에는 자기를 유익하게 하려는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자아가 깔려 있다. 그러므로 온유와 겸손을 인간의 교양이나 수양(修養)이나 도덕적 태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대처를 보고 아비가일에게 칭찬을 하기 전에 그녀를 그렇게 이끄신 하나님께 찬양하였다. 이것이 바로 온유와 겸손의 자세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말씀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 안에서 인간관계가 바르게 될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그렇게 할 때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115:1)
교훈: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태도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월요일 1월 17일
선으로 악을 갚음
질문 1. 벧전 3:8~12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런 원칙들을 그대에 삶에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벧전3:8~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답: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나타낼 생활 방식에 대한 권고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들을 온전히 주장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정서가 세상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성령이 주장할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눈에는 눈으로” 접근방식을 다른 뺨도 돌려 대는 접근 방식으로 발전시키셨다(마 5:38~39).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선으로 갚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찾아보기 드물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말이다(마 11:29).
<“눈에는 눈”이라는 방법을 동형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뜻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그런 해를 입히면 자기도 같은 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해를 입히지 않고 살라는 권면을 강조한 표현인 것이다. 자기 눈을 상하지 않으려면 남의 눈을 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원리와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을 강하게 함으로 강한 인상을 준 것일 뿐이지 원리는 동일한 황금율이 아니겠는가.>
질문 2.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의 집요한 공격에 대하여 다윗은 어떻게 갚아 주었습니까? 삼상 24:4~6. 이는 다윗의 품성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와 우리가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다윗과 같은 정신을 어떻게 우리의 경험 속에 적용해야만 합니까?
[삼상24:4~6]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답: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찾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도 그를 하나님이 취급하도록 맡겼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타인의 생명을 취할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을 다윗은 깨닫고 있었다.
다윗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때 가능하다.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오직 선으로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롬12:21) 다윗은 바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갔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으로 이해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도덕적 덕성으로 도덕적 악덕을 이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바른 이해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야고보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무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이익을 남기려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악이라고 하였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야고보가 여기 한 말을 세상적 사고방식, 도덕적 시각으로 보면 악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아닌 것은 다 악이다. 선으로서 악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서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이며, 그 빛이 어둠을 이기는 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인들은 보복보다는 선으로 악을 갚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화요일 1월 18일
용서
질문 1. 엡 4:32을 읽어 보십시오. 그대는 이런 성서적 진리를 삶 속에 얼마나 잘 적용했습니까? 그대는 누구를 용서해야 합니까?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답: 마음을 주님께 드리면서 이런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날마다 구하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주시기를 기도한다. 용서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를 확인하는 척도이다. 용서하지 않는 정신은 마귀의 정신이다.
겉으로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실제인간관계는 심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며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이게 현실이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용서의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몇 십 년 동안 심리학자들과 상담학자들은 종교와 신앙을 죄책감과 두려움의 잠재적 원인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이 가지고 있는 예방 효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기도, 묵상 노트, 기억절 암송, 용서 약정서와 같은 치유책이 여러 가지 정서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용서는,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나님께서 변화시킨 마음에만 일어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손꼽힌다(겔 36:26).
질문 2. 마 5:23~25, 눅 17:3~4, 23:34을 읽어 보십시오. 용서에 대하여 이 말씀들이 주고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5:23~2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눅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답: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롬12:18) 그리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때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께서 짊어지셨던 고난과 치욕의 수준에 이르러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왕이요 창조자께서 합당치 않은 대우를 받으시고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토록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의 용서를 구하실 정도로 인간들을 돌보셨다.
<부가설명> 용서는 하나님의 기본적 성질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겠는가? 회개와 용서는 같은 사실의 다른 측면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회개보다 먼저 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회개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로 온 인류를 용서하신 사실을 선포하셨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정신을 가진 사람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기 전에 이미 용서하는 사람이다. 이런 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궤계에 빠진 사람이다.(고후2:10,11)
교과의 저자가 말하는 방법은 심리학적 사고방식이 근저가 되어 있지 않는지 의심스럽다. 성경의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받고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단 성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런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용서하려는 노력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세상의 도덕적 덕성으로도 수양과 도야로도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는 용서가 보기에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근본은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의 성질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그리스도인은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이 좋아야 하고 좋을 수밖에 없다.
교훈: 용서는 정신건강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관계를 치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수요일 1월 19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
질문 1. 서로 죄를 고백하라는 야고보의 권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약 5:16. 그대는 이 말씀의 가르침을 현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답: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는 막힌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이 막혀 있으면 기도가 올바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도 기도가 막히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다.(벧전3:7) 성도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상태에 있으라는 것은 마음이 열린 상태로 성도의 교제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런 상태로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성도는 이 기도의 권고를 따라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한다.
이웃에게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다. 죄의 고백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이 있으며, 용납과 용서를 희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은 또한 위대한 치유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서로 죄를 고백하면 상호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신뢰하고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연대감을 고취시키고, 지속적이고 참된 우정을 배양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친한 친구에게 범죄 사실을 고백하면 내 마음은 편하게 되지만, 그 친구에게는 큰 짐이 될 수 있다. 또 그 친구가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위험이 있으며, 비밀을 알게 된 사람 모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과를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것만이 완전한 용서와 비밀을 보장받는 길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사람들이 우리를 도울 수도 있지만, 확실한 도움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짐을 가져가시고, 대신 우리에게 진정한 안도감을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부가설명> 사람 사이에서 죄를 서로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는 일은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속건제의 방법은 죄를 고백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거나, 성물에 손해를 끼쳤거나,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레6장 7장 참고) 그런데 손해를 끼쳤을 때 그 가치의 2/5를 더하여 갚고 하나님께 속건제사도 드려야 한다. 손해를 끼친 것을 갚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 왜 하나님께 또 속건제를 드려야하는가?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에 서로 용서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할 도리는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3,4) 사람은 죄 지은 이야기를 들으면 약점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성경의 권고를 잘 깨닫고 시편의 기록을 따라 성령의 지혜로 가장 복되게 되어야 할 것이다.
목요일 1월 20일
서로 세우라
질문 1. 아래의 말씀을 읽고 그대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은 그대 자신뿐 아니라 남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엡 4:29, 살전 5:11, 롬 14:19.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살전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롬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답: 언어생활이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한다. 은혜와 덕을 끼치는 말을 사용하자. 덕을 세우도록 권고하고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서로 만나고 마주대할 때 서로가 평안한 관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아에 대한 건전한 감정은 험담과 비방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은 구원의 은혜를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시 17:8, 벧전2:9).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다른 이를 세우고 서로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일할 수 있다. 격려와 인정,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 겸손, 즐거운 태도는 개인적 문제가 있는 자들을 돕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9). 그리고 야고보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의의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약 3:1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어떤 그리스도인 농부가 계곡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계단식 농경지에서 벼를 재배하고 있었다. 하루는 썰물이 시작되더니, 바다가 훨씬 뒤로 후퇴해서 바닥이 훤히 드러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곧 바닷물이 강하게 밀려오면 계곡의 모든 것이 떠내려 갈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계곡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떠올랐다. 그래서 자신의 논에 불을 질렀다. 계곡에서 일하던 친구는 연기를 보고 불을 끄기 위해 즉시 산으로 뛰어왔고, 덕분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서로 도우려는 정신이 목숨을 구했다.
<부가설명> 서로 세우는 일은 이기심에 찌든 사람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지라도 도덕적 수양과 도야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굳이 도덕적인 수양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며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의 성질이 그런 성질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보여주신 삶이 바로 그것을 증거한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문제로 서로 다툴 때 예수께서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섬기는 것은 상대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사랑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다. 사랑도 대상이 없으면 나타날 수 없는 성질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수고가 있다. 사랑으로 하는 수고는 일상의 수고와 다르다. 수고 자체가 달기 때문이다. 야곱이 라헬을 연애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 같이 지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섬김에는 수고가 있지만 그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서로 세운다는 말일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으로서 서로 세우는 것이 당연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교훈: 서로를 위하고 세우는 마음이야말로 서로를 구원하는 지름길이다.
금요일 1월 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엡 4:25~32을 읽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에 밑줄을 쳐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묵상해 보라. 다음 글은 엘렌 G. 화잇이 한 복음전도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분이다.
“나는 이 기별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그대에게 전한다. 먼저 말을 온순하게 하고 행동을 고상하게 하라. 그대는 너무 엄격하여 전제적이며 말도 과격한 편이다. …과격한 말은 주님을 슬프게 하며, 분별없는 말은 해를 끼친다. 나는 그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부드럽게 하며, 그대의 언어에 깊이 주의하여 말에나 행동에 과격함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 …그대가 매일 예수님을 쳐다보고 예수님의 모본을 배우는 생애를 하면, 조화되는 건전한 품성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항상 온유한 말을 하고, 남을 비난하고 꾸짖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 크신 교사 예수님을 본받으라. 친절과 동정의 말은 양약과 같아서, 절망 가운데서 신음하는 영혼을 치유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아픔을 진정시키고 치유하는 힘을 갖게 한다. 과격한 말은 자신이나 어떤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복음교역자, 163~1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용서란 정말 어려운 일이며, 특히 우리가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대가 용서하든 말든 관심도 없으며, 심지어 조롱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만약 그대라면, 그대에게 어떤 책임이 있을까요
*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사실의 반향일 뿐이다.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용서하지 못하도록 궤계를 꾸민다. 십자가에 못 밖는 사람들의 용서를 비신 예수님,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의 용서를 구한 스데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타나는 모습이다.
➋현재 그대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과정을 밟을 수 있습니까? 그런 과정 가운데 겸손, 하나님께 대한 신뢰, 의를 행하려는 소망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각자가 자기 처지에서 생각할 문제이다.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은 겸손과 온유와 신뢰로 드러난다. 소망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정말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이룰 것이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기억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연구 범위: 삼상 25장, 엡 4:1~3, 벧전 3 : 9 ~ 1 2 , 눅 17:3~4 , 23:3 4 , 약5:16.
<교과를 공부할 때마다 꼭 염두에 둬야할 사실>
이번 기 교과에서 우리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것을 주님의 통치에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에 관한 성서적인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성경 인물들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번 기 교과의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정서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낙담에 빠지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주의 사랑의 빛을 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반사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공중전도집회를 열 때, 예비 집회 성격으로 스트레스 관리 세미나를 인도하는 강사가 있었다. 그는 설문지를 만들어 청중들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 것 4, 5개를 기록하게 했다. 전도회 봉사자들은 건강, 재정, 직업, 관계 등 일반적인 영역들로 답을 분류하였다. 그런데 한 봉사자가 보니, 집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강사는 이미 가장 큰 원인에 대하여 강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를 어떻게 알고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다. 강사의 말에 따르면 결과는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의 주범은 바로 ‘나쁜 관계’였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 주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성경의 교훈을 배우려고 한다.
※ 핵심 요지
➊깨닫기 :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관계의 기초를 설명한다.
➋느끼기 : 가정,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연합을 강화시키는 태도를 소중히 여긴다.
➌행하기 : 우리의 삶 속에 긍정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고 증진시키는데 필요한 원칙들을 실천한다.
결론 우리가 서로에게 축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를 용서할 것이며, 서로 배려하고 격려하면서 항상 서로를 세워 주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일요일 1월 16일
모든 겸손과 온유
질문 1. 엡 4:1~3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왜 연합이나 좋은 관계와 연결시킬까요? 이런 태도가 대인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그대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엡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답: 겸손과 온유와 인내는 상대방을 높여주는 일에 가장 적합한 성질들이다. 사람은 자기를 인정해줄 때 유쾌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를 낮추면 역효과가 난다. 사람은 정당하게 자기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에게 역겹게 여겨진다면 역효과를 낼 것이다.
질문 2. 삼상 25장을 읽어 보십시오. 긴장이 팽팽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했던 아비가일과 다윗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삼상25:18~35]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19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20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으로 좇아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 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 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답: 이 두 사람의 대화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다. 다윗의 아비가일을 칭찬하기에 앞서 아비가일에게 이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므로 인간적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기 않도록 마음을 일깨웠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구하고 성령의 주장으로 이렇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태도이다.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성공적인 사회적 교류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삼상 25장). 결과는 자신을 상대에게 어떻게 나타내고 있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진다.
다윗의 태도를 보라. 비록 그에게 군사들이 있었지만, 그는 전갈을 보내어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나발과 그의 가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고, 자신을 “네아들 다윗”이라고 소개하였다(8절).
아비가일은 넉넉하게 선물을 준비하였고, 다윗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그에게 절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불렀고, 다윗을 “내 주”라고 일컬었다. 그녀를 통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쓸데없는 유혈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그녀의 선한 판단력을 칭찬하였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아비가일은 효과적인 중재를 통하여 무죄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한편 나발은 다윗이 굳이 보복하지 않았을지라도 공포에 휩싸여 죽었다.
<부가설명> 온유는 예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고, 겸손은 예수님을 높이고 그 말씀의 역사를 따라 생활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온유와 겸손은 없다. 인간의 온유한 모양과 겸손한 태도의 밑바닥에는 자기를 유익하게 하려는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자아가 깔려 있다. 그러므로 온유와 겸손을 인간의 교양이나 수양(修養)이나 도덕적 태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대처를 보고 아비가일에게 칭찬을 하기 전에 그녀를 그렇게 이끄신 하나님께 찬양하였다. 이것이 바로 온유와 겸손의 자세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말씀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 안에서 인간관계가 바르게 될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그렇게 할 때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115:1)
교훈: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태도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월요일 1월 17일
선으로 악을 갚음
질문 1. 벧전 3:8~12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런 원칙들을 그대에 삶에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벧전3:8~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답: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나타낼 생활 방식에 대한 권고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들을 온전히 주장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정서가 세상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성령이 주장할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눈에는 눈으로” 접근방식을 다른 뺨도 돌려 대는 접근 방식으로 발전시키셨다(마 5:38~39).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선으로 갚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찾아보기 드물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말이다(마 11:29).
<“눈에는 눈”이라는 방법을 동형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뜻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그런 해를 입히면 자기도 같은 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해를 입히지 않고 살라는 권면을 강조한 표현인 것이다. 자기 눈을 상하지 않으려면 남의 눈을 상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원리와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을 강하게 함으로 강한 인상을 준 것일 뿐이지 원리는 동일한 황금율이 아니겠는가.>
질문 2.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의 집요한 공격에 대하여 다윗은 어떻게 갚아 주었습니까? 삼상 24:4~6. 이는 다윗의 품성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와 우리가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다윗과 같은 정신을 어떻게 우리의 경험 속에 적용해야만 합니까?
[삼상24:4~6]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답: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찾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도 그를 하나님이 취급하도록 맡겼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타인의 생명을 취할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을 다윗은 깨닫고 있었다.
다윗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때 가능하다.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오직 선으로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롬12:21) 다윗은 바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갔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으로 이해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도덕적 덕성으로 도덕적 악덕을 이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바른 이해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야고보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무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이익을 남기려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악이라고 하였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야고보가 여기 한 말을 세상적 사고방식, 도덕적 시각으로 보면 악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아닌 것은 다 악이다. 선으로서 악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서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이며, 그 빛이 어둠을 이기는 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인들은 보복보다는 선으로 악을 갚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화요일 1월 18일
용서
질문 1. 엡 4:32을 읽어 보십시오. 그대는 이런 성서적 진리를 삶 속에 얼마나 잘 적용했습니까? 그대는 누구를 용서해야 합니까?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답: 마음을 주님께 드리면서 이런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날마다 구하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주시기를 기도한다. 용서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를 확인하는 척도이다. 용서하지 않는 정신은 마귀의 정신이다.
겉으로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실제인간관계는 심각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며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이게 현실이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용서의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몇 십 년 동안 심리학자들과 상담학자들은 종교와 신앙을 죄책감과 두려움의 잠재적 원인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이 가지고 있는 예방 효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기도, 묵상 노트, 기억절 암송, 용서 약정서와 같은 치유책이 여러 가지 정서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용서는,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나님께서 변화시킨 마음에만 일어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손꼽힌다(겔 36:26).
질문 2. 마 5:23~25, 눅 17:3~4, 23:34을 읽어 보십시오. 용서에 대하여 이 말씀들이 주고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마5:23~2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눅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답: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롬12:18) 그리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때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께서 짊어지셨던 고난과 치욕의 수준에 이르러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왕이요 창조자께서 합당치 않은 대우를 받으시고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토록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의 용서를 구하실 정도로 인간들을 돌보셨다.
<부가설명> 용서는 하나님의 기본적 성질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겠는가? 회개와 용서는 같은 사실의 다른 측면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회개보다 먼저 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회개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로 온 인류를 용서하신 사실을 선포하셨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정신을 가진 사람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기 전에 이미 용서하는 사람이다. 이런 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궤계에 빠진 사람이다.(고후2:10,11)
교과의 저자가 말하는 방법은 심리학적 사고방식이 근저가 되어 있지 않는지 의심스럽다. 성경의 용서는 하나님께 용서받고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단 성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런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용서하려는 노력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세상의 도덕적 덕성으로도 수양과 도야로도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는 용서가 보기에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근본은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의 성질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그리스도인은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이 좋아야 하고 좋을 수밖에 없다.
교훈: 용서는 정신건강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관계를 치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수요일 1월 19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
질문 1. 서로 죄를 고백하라는 야고보의 권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약 5:16. 그대는 이 말씀의 가르침을 현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답: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는 막힌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이 막혀 있으면 기도가 올바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도 기도가 막히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다.(벧전3:7) 성도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상태에 있으라는 것은 마음이 열린 상태로 성도의 교제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런 상태로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성도는 이 기도의 권고를 따라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한다.
이웃에게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다. 죄의 고백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이 있으며, 용납과 용서를 희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은 또한 위대한 치유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서로 죄를 고백하면 상호 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신뢰하고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연대감을 고취시키고, 지속적이고 참된 우정을 배양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친한 친구에게 범죄 사실을 고백하면 내 마음은 편하게 되지만, 그 친구에게는 큰 짐이 될 수 있다. 또 그 친구가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위험이 있으며, 비밀을 알게 된 사람 모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과를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것만이 완전한 용서와 비밀을 보장받는 길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사람들이 우리를 도울 수도 있지만, 확실한 도움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짐을 가져가시고, 대신 우리에게 진정한 안도감을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부가설명> 사람 사이에서 죄를 서로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는 일은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속건제의 방법은 죄를 고백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거나, 성물에 손해를 끼쳤거나,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레6장 7장 참고) 그런데 손해를 끼쳤을 때 그 가치의 2/5를 더하여 갚고 하나님께 속건제사도 드려야 한다. 손해를 끼친 것을 갚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 왜 하나님께 또 속건제를 드려야하는가?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에 서로 용서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할 도리는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3,4) 사람은 죄 지은 이야기를 들으면 약점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성경의 권고를 잘 깨닫고 시편의 기록을 따라 성령의 지혜로 가장 복되게 되어야 할 것이다.
목요일 1월 20일
서로 세우라
질문 1. 아래의 말씀을 읽고 그대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은 그대 자신뿐 아니라 남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엡 4:29, 살전 5:11, 롬 14:19.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살전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롬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답: 언어생활이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한다. 은혜와 덕을 끼치는 말을 사용하자. 덕을 세우도록 권고하고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서로 만나고 마주대할 때 서로가 평안한 관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아에 대한 건전한 감정은 험담과 비방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은 구원의 은혜를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시 17:8, 벧전2:9).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다른 이를 세우고 서로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일할 수 있다. 격려와 인정,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 겸손, 즐거운 태도는 개인적 문제가 있는 자들을 돕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9). 그리고 야고보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의의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약 3:1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어떤 그리스도인 농부가 계곡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계단식 농경지에서 벼를 재배하고 있었다. 하루는 썰물이 시작되더니, 바다가 훨씬 뒤로 후퇴해서 바닥이 훤히 드러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곧 바닷물이 강하게 밀려오면 계곡의 모든 것이 떠내려 갈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계곡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떠올랐다. 그래서 자신의 논에 불을 질렀다. 계곡에서 일하던 친구는 연기를 보고 불을 끄기 위해 즉시 산으로 뛰어왔고, 덕분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서로 도우려는 정신이 목숨을 구했다.
<부가설명> 서로 세우는 일은 이기심에 찌든 사람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지라도 도덕적 수양과 도야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굳이 도덕적인 수양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며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의 성질이 그런 성질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보여주신 삶이 바로 그것을 증거한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문제로 서로 다툴 때 예수께서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섬기는 것은 상대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사랑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다. 사랑도 대상이 없으면 나타날 수 없는 성질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수고가 있다. 사랑으로 하는 수고는 일상의 수고와 다르다. 수고 자체가 달기 때문이다. 야곱이 라헬을 연애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 같이 지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섬김에는 수고가 있지만 그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서로 세운다는 말일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으로서 서로 세우는 것이 당연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교훈: 서로를 위하고 세우는 마음이야말로 서로를 구원하는 지름길이다.
금요일 1월 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엡 4:25~32을 읽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에 밑줄을 쳐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묵상해 보라. 다음 글은 엘렌 G. 화잇이 한 복음전도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분이다.
“나는 이 기별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그대에게 전한다. 먼저 말을 온순하게 하고 행동을 고상하게 하라. 그대는 너무 엄격하여 전제적이며 말도 과격한 편이다. …과격한 말은 주님을 슬프게 하며, 분별없는 말은 해를 끼친다. 나는 그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부드럽게 하며, 그대의 언어에 깊이 주의하여 말에나 행동에 과격함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 …그대가 매일 예수님을 쳐다보고 예수님의 모본을 배우는 생애를 하면, 조화되는 건전한 품성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항상 온유한 말을 하고, 남을 비난하고 꾸짖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 크신 교사 예수님을 본받으라. 친절과 동정의 말은 양약과 같아서, 절망 가운데서 신음하는 영혼을 치유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아픔을 진정시키고 치유하는 힘을 갖게 한다. 과격한 말은 자신이나 어떤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복음교역자, 163~1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용서란 정말 어려운 일이며, 특히 우리가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대가 용서하든 말든 관심도 없으며, 심지어 조롱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만약 그대라면, 그대에게 어떤 책임이 있을까요
*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사실의 반향일 뿐이다.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용서하지 못하도록 궤계를 꾸민다. 십자가에 못 밖는 사람들의 용서를 비신 예수님,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의 용서를 구한 스데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타나는 모습이다.
➋현재 그대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대는 어떤 과정을 밟을 수 있습니까? 그런 과정 가운데 겸손, 하나님께 대한 신뢰, 의를 행하려는 소망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각자가 자기 처지에서 생각할 문제이다.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은 겸손과 온유와 신뢰로 드러난다. 소망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정말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이룰 것이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댓글목록
하늘가기님의 댓글
하늘가기 작성일
목사님
주시는 은혜로운 글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새로은 각오와 깨달음으로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루시님의 댓글
도루시 작성일
항상 목사님의 말씀을 보면서 고쳐야 될것이 많음을 깨달아 갑니다.
맘 같이 잘 되진 않지만 기도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해 고쳐나가려 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그러나 날 사랑하는 주님의 있기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