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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과 바룩: 세상이 무너질 때 유산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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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0-12-17 11:26 조회9,456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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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안식일) 일몰:오후 5시 19분

기억절: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사 53:1~5, 렘 7:1~11, 28, 45, 마 6:25~34.

바룩은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때가 다해가고 있었다. 고대 근동지역을 이백 년 이상 지배했던 앗수르는 내전으로 말미암아 봉신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내분되었다. 바벨론은 새로운 막강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고, 그 틈에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야는 영토를 확장하고 참 하나님에 대한 국가적 헌신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급변하는 기원 전 7세기 말의 정세 속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남은 때는 그리 길지 않았다. 요시야 왕은 애굽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9). 그의 아들들의 입지는 아버지 때만 못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바벨론을 배신했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결국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바룩은 그와 같이 급격한 변화와 상실의 시대를 살았다. 그의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룩은 어떤 왕이나 전쟁도 파괴할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배경인물로 선정된 바룩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렘 5:4~5
| 학습 목표 |
⊙ 깨닫기 : 예레미야와 바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유다 지도자들에게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 살펴본다.
⊙ 느끼기 : 예레미야를 보조하면서 그가 가졌을 기대감과 실망감을 헤아린다.
⊙ 행하기 : 무엇을 하든 자신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옳은 편에 서는 고통
A. 예레미야는 고달픈 일생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던 땅, 애굽까지 납치되어 갔고, 거기에서 생을 마감했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당한 박해를 어떻게 함께 했는가?

02. 느끼기: 대수롭지 않은 일
A. 환난을 당할 때마다 그의 감정은 어땠을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큰 보상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B.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어떤 영광도 얻지 못했다. 그럴지라도 그는 신실하게 하나님의 기별을 전했다. 하나냐처럼 백성들에게 인기있는 말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03. 행하기: 하나님의 관점
A.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것이 우리 자신의 행위나 말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 어떤 관점이 필요한가?
B. 우리 자신을 위해 큰 보상을 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 점: 예레미야의 서기로서 바룩은 예레미야의 기별들을 기록하고 대중에게 읽어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하나님의 종의 고난에 동참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일요일 12월 19일 바룩의 세계

바룩이 살던 세계는 유다를 지배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정황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정치적으로 유다는 바벨론의 굴레 아래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강한 민족주의 정서가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바벨론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척하는 계급에게 경제적 여건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고대 유대 사회의 기초를 형성했던 종교 조직이 있었다.

1. 렘 7:1~11을 읽으십시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에 백성들이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 문제들은 오늘날 어떤 문제에 해당합니까? 특히 4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백성들은 어떤 권면을 듣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렘7:1~1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답: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영적 심각성을 외면한 채, 거룩한 성전을 통해 구원을 보장받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였다.

바룩의 이름은 “복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그의 삶은 이름과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직업은 서기관이었는데, 이는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는 서기관 가문 출신으로 보이며,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바룩이 어떻게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룩이 예레미야에게로 이끌린 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충실한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설교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상은 온전히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다. 예레미야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이상을 통하여 예레미야는 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사회 구조의 결함에 대해 독특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이 그들의 행위를 돌이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지 경고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사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룩으로 하여금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문제를 직시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범한 자들을 벌하실 것에 대하여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증거를 주셨다. 그분께서 무한히 자비하시므로 죄인에게 심판을 집행하지 않으신다고 스스로 안심하는 자들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한다.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 것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모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각 시대의 대쟁투, 539)

<부가설명> 성전 자체는 구원의 능력이 아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봉사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 봉사가 가르쳐주는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강조하면서 전에서 봉사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전혀 구원받은 사람답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전을 도덕을 굴혈로 만드는 삶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건물 성전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 성전이 문제인 것이다. 건물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도 그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정결한 성전이 되어 있지 않으면 건물 성전에 드나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바룩 시대에 유대 형편이 바로 그랬다. 지금 우리들의 처지는 어떤지 정직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훈: 하나님은 시대적 사명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를 찾고 계신다.

월요일 12월 20일 예레미야의 서기관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통해 성경의 기록 과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렘 36:4에서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백성들에게 보낼 기별을 받아 적게 한다. 바룩은 그것을 그대로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에 옮겨 적었다. 이것은 영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우선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신체를 지배해서 그의 손이 기별을 받아쓰도록 하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상과 기별을 주신다. 그런 다음 보통 다른 선지자 같으면 기별을 문서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 직접 기별을 적지 않고 바룩에게 불러주어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바룩은 그 기별을 대중에게 알렸다. 예레미야는 왕궁의 눈 밖에 나 있었고, 성전에 출입할 수 없도록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성일이면 바룩이 성전에서 예언적 기별을 백성들에게 읽어주었다. 바룩은 그것이 자신이나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별임을 주장하였다.

1. 예레미야 28장의 하나냐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이 기사는 사 8:20에서 제시한 원칙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까?
[렘렘28:1~17]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 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 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5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 선 제사장들의 앞과 모든 백성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할새 6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다시 옮겨 오시기를 원하노라 7 그러나 너는 이제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라 8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11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 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신다 하라 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

답: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리라”(렘 28:9).

하나님의 기별은 인기를 얻기 위하여 백성들의 견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기별이 정치적 관점에서 항상 옳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되기도 드물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별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의 해석은 모순될 수 있으나, 기별 자체는 절대 모순되지 않는다.
렘 28:7~9에서 선지자는 이미 성취된 예언의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진 성경의 통일성을 언급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원칙은 생생하게 재확인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만 주시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감정을 거슬리는 부분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근거도 주신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어느 곳보다 성경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계시하셨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
“그리스도께 나오는 방법을 이해하고자 바라는 영혼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이 강단에서 인기 있는 설교를 듣지만 그 설교를 듣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심령이 갈급하는 예수님의 평안과 안식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세상을 향해 마지막 자비의 기별을 전하는 목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피난처로 높여져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명심해야 한다.”(증언보감 1권, 524)

<부가설명> 선지자는 자기의 견해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말이 평화이거나 전쟁과 환난이거나 간에 그 기별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은 그 기별이 성경과 온전히 일치하느냐 하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옛날에도 모세 오경과 기타 선지자들의 기록으로 그 기별의 근원을 분별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레미야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영감과 계시와 환상으로 말씀을 주시던 때이기 때문에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전하면 쉽게 분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전에 선지자들의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면서 하나냐에게 말한 것이다. 결국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임을 확인되었다. 백성의 구미에 맞는 기별을 전하는 것이 인기는 얻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훈: 우리는 듣기 좋은 말씀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을 보내주신다.

화요일 12월 21일 좌절된 야망(렘 36장)

마침내 유다 백성들에게 심각한 상황이 일어날 조심이 보이고 있었다. 렘 36:9에서 백성들은 금식일로 성전에 모였다. 바룩은 다른 서기관들과의 직업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성전 입구 쪽 그마랴 창에 있는 좋은 자리를 확보하였다. 거기에서 바룩은 예레미야의 기별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읽어 나아갔다. 바룩이 기별을 다 읽자, 성전 관원들이 말씀을 따로 읽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말씀의 기원에 대하여 질문한 뒤, 그들은 두루마리를 왕에게 가져가기로 결정하였다. 잠시 동안이지만 유다에 변화에 생길 것처럼 보였다.
바룩에게 이는 희망의 순간이었다. 상황이 반전되기만 한다면 예레미야를 위한 그의 조력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개혁의 과정에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정부 내 요직을 차지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1. 왕의 반응은 바룩의 장래에, 특히 그의 경력에 어떤 의미였습니까? 렘 36장 참조.
[렘36:21~26]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 여후디가 삼 편 사 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24 왕과 그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25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하여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26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명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답: 바룩은 예레미야와 자신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 영적 개혁을 일으켜서,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오기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두루마리는 파피루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쌌다. 게다가 일일이 손으로 복사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루마리는 희귀하고 값비싼 재산이었다. 바룩의 편으로 전달된 두루마리는 여호야김을 위한 하나님의 기별이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은 두루마리를 갈기갈기 찢고 불태움으로써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했다. 두루마리가 불탐으로써 바룩이 기울였던 장시간의 노고는 수포로 돌아갔다. [교과 저자는 월요일 공부에서 양피지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파피루스라고 하였다. 두루마리(메길라)는 예레미야 시대에는 주로 파피루스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월요일 양피지는 오기(誤記)가 아닌지 모르겠다.]
왕궁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희망했던 바룩은 자신이 지금까지 “엉뚱한” 사람을 돕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궁에서 서기관으로 일하겠다는 자신의 미래도 물 건너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분노케 만들었다. 이로써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치를 대가가 얼마나 큰지 분명해졌다.
바룩은 이제 예레미야와 함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왕궁 소속 정보원들이 “망국”을 바라는 이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도시를 샅샅이 뒤졌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겁쟁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이용해 출세하려는 자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야망에 의해 이끌린 삶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일생을 최대의 유익을 산출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동료 인간들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목적들을 위하여 쓰여질 때에만 인생은 가치가 있다.”(절제생활, 137)

<부가설명> 여호야김 왕의 태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지상 통치자인 유다의 왕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대총회장이 하나님의 기별을 잘라서 불에 태우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대총회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교회의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고 해도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행여 이런 태도가 아닌가? 성경과 예언의 신의 증언을 올바르게 생활에 적용하려는 정신이 없으면 여호야김의 태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통치자의 정신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교회도 목회자의 정신에 좌우되지 않을까? 평신도 지도자나 목회자나 예레미야의 심정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우리는 신앙을 통해 지상에서 많은 복을 누리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받드는 사람은 오직 천국의 보상만을 바란다.

수요일 12월 22일 화로다!

예레미야 45장에서 여호와는 오직 바룩을 위한 특별 기별을 주셨다. 때가 그럴 만도 했다. 첫째, 렘 45:1에 “여호야김 사 년”이란 역사적 언급을 통해 우리는 예레미야 45장이 36장 이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는 분명 옥중에 있었을 것이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부흥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둘째, 지상의 관점에서 바룩의 미래는 가장 암담해 보였다. 렘 45:3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룩은 소위 “궂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슬픔, 우울함, 실의에 빠진 감정은 이 땅에서 자연스런 경험이다. 이런 감정을 유발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따라서 누구도 이런 감정을 죄로 여길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 그런 감정을 느끼는 못한다면 거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성경 가운데 수많은 인물들이 절망의 순간을 경험했다(왕상 19:4, 욥 6:2~3, 시 55:4 참조). 우리 스스로 그런 감정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 사 53:1~5을 읽으십시오. 어떤 분위기와 정서가 묘사되어 있습니까? 이런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사53:1~5]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답: 예수님도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 실의와 절망을 겪으셨다. 따라서 우리의 우울한 감정을 결코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단지 예수님을 통해 믿음과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정서적인 고뇌와 슬픔을 겪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타락한 인성을 가진 우리가 이생에서 겪어야 할 고통일 뿐이다. 그 고통이 우리의 잘못 때문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 악한 자가 우리의 슬픔을 이용해 주님께로부터 우리를 돌아서게 만들거나, 회의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와 치유와 밝은 미래와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더 나은 경험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로 이 땅의 속성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바라고 상상하는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겪든지 끔찍한 죄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이 영원히 사라지게 될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위대한 소망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대는 역경이나 맹렬한 반대에 의해 너무 쉽게 좌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전진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라. 예수께서는 당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대를 견디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하고 용기를 내라. 그리고 믿음과 용기와 소망을 갖고 전진하라.”(교회증언 3권, 434)

<부가설명> 이 세상에는 실망과 좌절과 고통과 환난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있을 수 있다. 사실 이 땅에 사는 인간 자체가 고통이다. 예수께서 이런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과 좌절의 상태를 아신다. 체험적으로 아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런 정서들을 다 받아들이시고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신다. 우리가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 되고 그분을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떠나서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말은 뒤집으면 예수 안에서는 아무것이라도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그분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하나님은 바룩을 그렇게 권고하셨다.

교훈: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란 전혀 슬픔이 없는 삶이라기보다는 소망을 잊지 않는 삶이다.

목요일 12월 23일 네게 무엇을 주시겠나이까?

1. 렘 45장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바룩은 어떤 인물입니까?
[렘45:1~5]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제 사 년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가로되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3 네가 일찍 말하기를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하셨고 4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답: 민족에 대한 희망도, 자신에 대한 꿈도 잃어버린 바룩에게 하나님은 개인적인 기별을 전해 주셨다. 하나님은 바룩을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이시며 바룩은 스스로 큰 일을 도모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굴복하였다.

하나님의 마음도 아팠다. 그분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심고 가꾸어왔다. 고집 세고 반항적인 자녀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처럼 여호와는 천 년 이상 자기 백성을 훈계하기도 했고 달래기도 했다. 바룩의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희미한 투영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에 항상 쉽게 공감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 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실의에 빠진 서기관을 찾아오셔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이스라엘에게 곧 임할 심판의 때에 바룩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보전해 주셨다.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5절)는 표현은 예레미야서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렘 21:9, 38:2, 39:18). 이는 전투에 패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하는 한 병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역설적이지만 구원은 “패배”로부터 비롯된다. 예수의 승리도 십자가의 수치와 패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기꺼이 투쟁을 멈추고 우리의 생명과 계획과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2. 렘 45:1~5과 마 6:25~34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까?
[마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답: 하나님은 바룩에게 큰 일을 찾지 말고, 생명을 지키는 것이 가장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다. 예수께서도 세상의 영화보다는 영생이 소중하며, 그 어떤 것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가르치셨다.

렘 45장에서 하나님은 바룩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상기시키셨다. 예수님도 지상의 소유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셨다(마 6장). 재난의 때에 중요한 것은 큰일을 하는 것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의 밝은 미래는 놓쳤지만, 역설적으로 그와의 인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꿈꿔왔던 것보다 훨씬 위대한 유산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난 13주 동안 구약의 배경 인물을 연구하면서 살폈던 것이 바로 이 유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인물들은 대부분은 자기 시대의 주역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성경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남겨 주었다.

우리의 종착점
“사람들은 지상의 인간들이 수여하는 명예의 표에 불과한 면류관 즉 잠시 후면 사라질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자아 부정과 훈련에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주의 끝에 불멸과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될 달음박질에 참가하여야 한다. 그렇다. 달음박질이 끝날 때에, 우리에게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증언보감 1권, 185)

<부가설명> 바룩은 세상의 명예는 얻지 못했다. 유다 나라는 곧 망하였다. 이 모습은 이 세상의 종말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올바른지를 가르쳐주는 예표이다. 바룩의 뜻은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것 중에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관점에는 전혀 축복받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뜻대로 그는 생명을 얻었다.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큰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확실히 있어야 할 것이다.

교훈: 세상을 다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영생을 얻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금요일 12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 바룩에게 주니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렘 36:28, 32)다.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선지자의 입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호야김이 여호와의 종의 감화를 막는 데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 더욱더 하나님의 요구를 밝힐 기회를 주었다.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투옥했던 정신 곧 견책에 반대하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되풀이해서 주어지는 경고를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그들의 허영심을 칭찬하고 그들의 행동을 너그럽게 보는 거짓 교사들에게 듣기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은 환난 날에 안전한 피난처를 얻지 못하고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종들은 비난과 무시와 허위 진술을 통하여 그들에게 이르러 온 시련과 고통에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직면하여야 한다. 그들은 항상 옛 선지자들과 인류의 구주와 그의 사도들이 말씀을 인하여 학대와 핍박을 참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사업을 계속 충실히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선지자와 왕, 43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대는 영감이 주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사역은 이런 중요한 주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 영감은 하나님이 부르신 선지자에게 주신다. 선지자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서기관에게 필기하도록 구전할 수 있다. 모든 선지자가 자기가 받은 계시와 영감의 말씀을 직접 기록한 것은 아니다. 선지자나 사도가 직접 기록하지 않았다고 영감이 감소되거나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화잇의 경우도 동일하다.

2.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함으로 개인적 야망이 좌절되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 침례요한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마 모세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히11:24) 모든 순교자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3. 주님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각자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섬긴 대가로 돌려받은 것이 가치 없는 것이었는지 물어보십시오.
* 서로 이야기 해보세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은 영원을 얻는 것이니, 가장 좋은 얻는 것입니다.

4. 잘못된 행동 때문에 견책을 받을 때 그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대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겠습니까? 아니면 유다의 왕처럼 견책의 말씀을 불에 던지고 여호와의 사자를 감옥에 가두겠습니까? 그대의 반응에 따르면 그대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까?
* 각자가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5. 우리의 고난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증거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극심한 고통이 따를 때에도 믿음을 굳게 붙잡을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을 올바르게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에 익숙한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댓글목록

안식일학교님의 댓글

안식일학교 작성일

목사님 덕분에 정말 든든했습니다.
내년에도 전세계에 있는 한국 재림성도들에게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성근님의 댓글

김성근 작성일

목사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설명으로 교과공부를 잘 할수 있어서 매일매일의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언제나 성도들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자세한 설명으로 은해받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주안에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시고 항상 주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아울러서 새해에도 좋은 설명으로 많은 은혜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일님의 댓글

박정일 작성일

김명호 목사님 한 해 동안 안교교과 부가설명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 해에도 강건하시고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천안에서 박정일드림.

노준아빠님의 댓글

노준아빠 작성일

한해동안 감사 했습니다 내년에도 부탁드려도 되죠~
김목사님 화이링~~^^

김문영님의 댓글

김문영 작성일

목사님 지난 일년동안 대단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새해에도 더 영감넘치고 유익한 교과지도 기대하겠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최대진님의 댓글

최대진 작성일

정말 감사 합니다.
특히 부가 설명으로 어두운 밤의 등불처럼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해에도 목사님 지도 받기를 간구드립니다.
다니엘처럼 목사님께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명모님의 댓글

성명모 작성일

슬며시 들어와서 열심히읽고 많은 도움받은 한해 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목사님
신묘년 새해 하나님의 축복 더 풍성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임광석님의 댓글

임광석 작성일

한해동안 목사님의 교과해설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리고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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